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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노영(金魯永) 영조 5, 정조 12.

1. 영조 1144638(을유) 1번째기사 / 김노영의 선공감의 가감역으로, 박상덕을 좌천하여 충청 수사로 삼다

2. 영조 12350821(임인) 1번째기사 / 입시한 과차에 김노영 등을 뽑다

3. 영조 12350821(임인) 2번째기사 / 이재간·조영진·조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4. 영조 12350828(기유) 1번째기사 /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을 소견하다

5. 영조 12350829(경술) 1번째기사 / 조정·심발·윤양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6. 정조 11524(정미) 3번째기사 / 경루를 잘못 전한 것을 살펴 계책하지 못한 병조 참지 김노영을 파직하다

7. 정조 1251215(계미) 1번째기사 / 상참과 차대를 겸행하다

8. 정조 26121016(갑진) 1번째기사 / 김재찬을 대사헌, 김노영 대신 정존중을 대사간으로 삼다

9. 정조 2713711(을미) 1번째기사 / 금성위 박명원의 상소로 인하여 영우원을 천장하기로 결정하다

10. 정조 2914220(신미) 4번째기사 / 황인점·김노영·서영보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11. 정조 3014613(임술) 3번째기사 / 김노영에게 사헌부 대사헌을 제수하다

12. 정조 31141210(병진) 2번째기사 / 봉산 사람 곽시복의 처 허씨가 징을 치고 억울한 일을 호소하다

13. 정조 321533(정축) 1번째기사 / 김노영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윤확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다

14. 정조 331592(갑술) 4번째기사 / 이민보를 파주 목사로, 김노영을 수안 군수로 특별히 보임하다

15. 정조 371729(임신) 3번째기사 / 김로영을 개성부 유수로 삼다

16. 정조 38171125(갑인) 1번째기사 / 개성부 유수 김노영, 경력 최경악과 풍덕 부사 임성운을 파직하다

17. 정조 391819(정유) 1번째기사 / 명정전에 나아가 조참례를 행하고, 전 개성 유수 이시수의 탐오를 문죄하다

   

조선왕조실록 총 17

   

   

   

   

영조 114, 46(1770 경인 / 청 건륭(乾隆) 35) 38(을유) 1번째기사

임금이 육상궁에 있었다. 김노영(金魯永)을 선공감(繕工監)의 가감역(假監役)으로 삼고, 이조 판서 박상덕(朴相德)을 좌천(左遷)시켜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삼았다. 이때 임금이 김노영에게 관직을 제수하려고 해조(該曹)에 명하여 해당한 자리에 의망(擬望)해 들이도록 하였으나, 갑작스런 일이므로 미처 거행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심하게 화를 내어 임금의 명령을 조종한다고 여겨 박상덕은 좌천시키고, 김노영에게 들어와 숙배 사은(肅拜謝恩)하라고 독촉하였다. 대체로 감역(監役)의 제수에는 연한(年限)이 있고, 사은하는 일이 없었으니, 그 제수와 사은은 모두 고례(古例)가 아니다. 얼마 안되어 박상덕을 내직(內職)에 의망하라 명하고, 김노영은 계방(桂坊)으로 옮겨 제수하였는데, 김노영은 곧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의 손자로서 나이 겨우 약관(弱冠)이었다.

乙酉/上在毓祥宮, 以金魯永爲繕工假監役, 貶吏曹判書朴相德爲忠淸水使時上欲除魯永職, 命該曹擬入當窠, 倉卒未及擧行上怒甚, 以爲操縱君命, 遂貶相德, 促令魯永入肅蓋監役之除, 有年限, 而無謝恩, 其除與謝, 皆非古例也未幾命相德內擬, 移除魯永桂坊, 魯永乃月城尉金漢藎孫, 年才弱冠矣

   

영조 123, 50(1774 갑오 / 청 건륭(乾隆) 39) 821(임인) 1번째기사

입시(入侍)한 과차(科次)18987) 에 김노영(金魯永) 20명을 뽑았다.

壬寅/入侍科次, 取金魯永等二十人

   

영조 123, 50(1774 갑오 / 청 건륭(乾隆) 39) 821(임인) 2번째기사

이재간(李在簡)을 이조 참의로, 조영진(趙英鎭)을 대사간으로, 조엄(趙曮)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김노영은 문과 장원을 하였는데, 등과하기 전에 자궁(資窮)18988) 이었으므로 가자(加資)하였다.

以李在簡爲吏曹參議, 趙英鎭爲大司諫, 趙曮爲藝文提學, 金魯永以文科第上下一人上下, 登科前資窮, 加資

   

영조 123, 50(1774 갑오 / 청 건륭(乾隆) 39) 828(기유) 1번째기사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김노영(金魯永)에게 이르기를,

"너는 부모가 다 살아 있는데도 풍악을 베풀지 않았다고 하니, 이는 네 아비의 뜻인 것 같다. 네가 사는 동네가 바로 나의 옛집과 같은 동네이다. 용호영(龍虎營)의 삼현(三絃)18991) 을 특별히 내려 줄 터이니, 너는 오늘 유가(遊街)하라."

하였다. 이어 해조(該曹)에 명하여 곡식과 피륙을 제급(題給)하게 하니, 김노영은 곧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의 손자였다.

己酉/上御德游堂, 召見新恩, 上謂金魯永曰: "汝以具慶, 不爲張樂云, 似是汝父之意也汝之所居洞, 卽予舊邸龍虎營三絃特給, 汝今日遊焉" 仍命該曹, 米綿題給, 魯永卽月城尉金漢藎之孫也

   

영조 123, 50(1774 갑오 / 청 건륭(乾隆) 39) 829(경술) 1번째기사

조정(趙晸)을 이조 참의로, 심발(沈墢)을 대사헌으로, 윤양후(尹養厚)를 부제학으로, 황경원(黃景源)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고, 김노영(金魯永)을 승지로 특별히 임명하였다.

庚戌/以趙晸爲吏曺參議, 沈墢爲大司憲, 尹養厚爲副提學, 黃景源爲弘文提學, 金魯永特除承旨

   

정조 11, 5(1781 신축 / 청 건륭(乾隆) 46) 24(정미) 3번째기사

병조 참지 김노영(金魯永)을 파직하였는데, 경루(更漏)를 잘못 전한 것을 살펴 계칙하지 못했기 대문이었다.

罷兵曹參知金魯永職以更漏誤傳, 不能察飭也

   

정조 12, 5(1781 신축 / 청 건륭(乾隆) 46) 1215(계미) 1번째기사

상참(常參)하였는데, 차대(次對)도 겸하여 행하였다.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이 아뢰기를,

"경기 관찰사 이형규(李亨逵)가 상소하여 교동(喬桐)에 다시 수곤(水閫)을 설치한 것과 장단(長湍)에 다시 방영(防營)을 설치한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전도되게 소각(銷刻)한다는 혐의가 있고 또 하나는 상당히 백성들을 동요시키는 일이 있게 되니, 아울러 우선 버려 두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대사헌 이갑(李)이 아뢰기를,

"전 참봉 송헌규(宋獻圭)는 곧 송덕상(宋德相)의 종손(從孫)인데, 송덕상의 위세를 팔아서 마음대로 방자한 짓을 하면서 송덕상을 도왔고 역모에도 참섭(參涉)하였습니다. 송덕상의 죄악이 환히 드러난 뒤에 이르러서는 당여(黨與)의 주참(誅斬)이 마땅히 먼저 그에게 내려졌어야 하는데, 멋대로 마음으로 끊었다는 말을 하면서 요행히 주참을 면할 계교를 세우려 했으니, 그 정상이 이미 그지없이 간교하고 악랄합니다. 그러나 대론(臺論)이 준열하게 발론되어 끝내 면할 수 없게 되자 또 불령(不逞)한 무리들과 교결하여 감히 영호(營護)할 마음을 내어 암암리에 사람을 배포하여 인심을 광혹(誑惑)시켰습니다. 저 기호(畿湖)에서 일어난 변괴도 이들이 주장(譸張)3038) 한 것에 연유된 것이 아니라고 기필할 수 없으니, 전 참봉 송헌규는 우선 절도(絶島)에 정배(定配)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전 지평 강문환(姜文煥)은 송덕상과 구생(舅甥)의 친척이 되는데, 송덕상에 의해 보호 양육되었고 송덕상의 조아(爪牙)3039) 가 되어 음흉한 계모(計謀)를 참섭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세상에서 곁눈질하며 비웃고 손가락질해 온 지 오랬습니다. 송덕상의 죄악이 환히 드러난 뒤에도 뻔뻔스레 도성(都城) 안에 거처하고 있으면서 전혀 돌아보고 꺼리는 기색이 없는 채, 조론(朝論)을 정탐해서 은밀히 흉적(凶賊)에게 알렸다는 전설(傳說)이 낭자하여 듣기에도 놀랍고 두렵습니다. 전 지평 강문환에게 속히 변방으로 귀양보내는 형전(刑典)을 시행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편배(編配)는 번거롭기만 할 뿐이니, 먼저 삭판(削版)시키는 형전부터 시행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규위(李奎緯)가 마땅히 갚아야 할 민채(民債)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미 다 받은 뒤에 처분(處分)하라는 하교에서 특별히 보방(保放)하게 한 내용이 있었던 것은 실로 관대하게 하는 덕의(德意)에서 나온 것이니, 그의 도리에 있어서는 진실로 서둘러 준비하여 갚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1년이 지나도록 전혀 아무런 동정(動靜)이 없으니, 조정의 명을 어긴 것이 진실로 이미 놀랍습니다. 거기다가 그는 의막(依幕)을 집으로 삼고 태연히 스스로 거처하고 있어, 조가(朝家)에서의 감죄(勘罪)가 또한 이를 연유하여 지체되고 있으며 따라서 일이 끝날 기약이 없으니, 어찌 이런 사체가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더구나 그의 아우 이규경(李奎景)의 일이 발생한 뒤에는 더욱 한결같이 그대로 있게 해서는 안됩니다. 청컨대 전후 금오(金吾)의 당상들을 아울러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해부(該府)로 하여금 기일을 지켜 독봉(督棒)하게 한 다음 이어 해당되는 율(律)을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 조상진(趙尙鎭)이 아뢰기를,

"전 장령 박종언(朴宗彦)은 부민(富民)을 추착(推捉)3040) 하여 대각(臺閣)에 수모를 끼쳤으므로, 그 뒤 대각에 들어오는 사람은 박종언을 경계로 삼아서 풍문(風聞)의 고사(故事)를 일절 폐각(廢却)하고 있습니다. 박종언에 의해 풍문은 간개(刊改)되었지만 구규(舊規)를 폐기해서는 안되며, 부례(府隷)들이 농간을 부리는 것도 또한 징즙(懲戢)시켜야 하니, 이런 내용으로 신칙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부교리 윤확(尹㬦), 부수찬 이경일(李敬一)이 아뢰기를,

"방축 죄인(放逐罪人) 김상복(金相福)은 정처(鄭妻)·김귀주(金龜柱)·송형중(宋瑩中) 3(三凶)의 예(例)에 의거 우선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키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먹은 마음이 흉특(凶慝)하고 세운 계모가 위포(危怖)스러운 것은 역적 홍인한(洪麟漢)·송형중과 털끝만큼도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이 한 짓을 본보기로 삼아 따르면서 그들의 전모(前茅)가 되어 상청(上聽)을 현혹시켜 은밀히 저궁(儲宮)을 해쳤고 심지어는 심상운(沈翔雲)의 급서(急書)를 환출(幻出)시켰으며, 윤양후(尹養厚)의 흉언에 메아리처럼 응하였으니, 삼척(三尺)의 법전이 있다면 어떻게 저자에서 죽이는 율(律)을 면할 수 있겠는가? 특별히 대관(大官)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갑자기 대벽(大辟)에 두려 하지 않는 것뿐이다. 이는 주토(誅討)에 소홀히 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일전의 동가(動駕)할 때 부사직 김노영(金魯永)이 평상복에 모구(毛具)3041) 차림으로 반행(班行) 앞을 지나갔으니, 그 거조가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속히 삭직(削職)시키는 형전을 시행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문(拿問)하여 조처하게 하라. 양사(兩司)에서 연(輦) 앞에서 도가(導駕)하면서 이런 일을 목격하고도 아직껏 한마디도 하지 않음으로써 옥당(玉堂)으로 하여금 언관(言官)의 일을 대신 행하게 하였으니, 대각(臺閣)에 수모를 끼치게 한것이 무엇이 이보다 더 크겠는가? 그날의 시신(侍臣)·양사(兩司)는 아울러 파직시키라."

하였다. 우승지 이재학(李在學)이 아뢰기를,

"헌서(憲書)의 재자관(齎咨官)이 돌아올 때에 본도(本道)의 도사(都事)가 수험(搜驗)하는 책임을 관장하고 있는데도, 근래에는 도사들을 택차(擇差)하지 않기 때문에 수모를 끼치게 하는 일이 없지 않습니다. 청컨대 이제부터는 도사를 보내지 말고 도내(道內)의 수령(守令)을 택차하여 차원(差員)으로 정하여 보내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癸未/常參兼行次對領議政徐命善啓言: "京畿觀察使李享逵, 疏請喬桐復置水閫長湍更設防營, 而一則有顚倒銷刻之嫌, 一則有多少擾民之事, 竝姑置之" 從之大司憲李啓言: "前參奉宋獻圭, 卽德相之從孫也藉賣德相, 恣行胸臆, 左右德相, 參涉逆謀及其德相罪惡彰著之後, 黨與之誅, 當先於渠, 則肆發心絶之言, 欲爲倖逭之計者, 情狀已極巧惡臺言峻發, 終始不免, 則又結不逞之徒, 敢生營護之意, 暗地排布, 誑惑人心惟彼畿湖之變怪, 未必不由於此輩之譸張也, 請前參奉宋獻圭, 爲先絶島定配" 從之又啓言: "前持平姜文煥, 與德相爲舅甥之親, 而(卯)育於德相, 爪牙於德相, 陰謀凶計, 無不參涉, 爲世側目, 嗤點久矣德相罪惡彰露之後, 偃處城闉, 略無顧忌, 偵探朝論, 密報凶賊, 傳說狼藉, 聽聞駭懼請前持平姜文煥, 亟施屛裔之典" 敎曰: "徒煩編配, 先施削版之典" 又啓言: "李奎緯之當報民債者, 未知其幾何, 而業有畢捧後處分之敎, 特爲保放, 實出於寬大之德意則在渠道理, 固當汲汲備償, 而已過周年, 了無動靜, 其違拒朝令, 固已駭痛, 而渠則乃以依幕爲家, 晏然自居, 朝家勘罪, 亦由此而稽滯, 究竟無期, 寧有如許事體? 況其弟奎景事出後, 尤不可一任其自在請前後金吾諸堂, 竝從重推考, 令該府, 刻期督捧, 仍施當律焉" 從之大司諫趙尙鎭啓言: "前掌令朴宗彦, 推捉富民, 貽羞臺閣, 其後入臺者, 以宗彦爲戒, 風聞故事, 一切廢却朴宗彦則刊改風聞, 舊規可以不廢, 府隷作奸, 亦爲懲戢請以此申飭" 從之副校理尹嚄副修撰李敬一啓言: "放逐罪人相楅, 依鄭妻龜柱瑩中三凶例, 姑先絶島安置" 敎曰: "設心之憯慝, 造謀之危怖, 與逆麟賊瑩, 毫無加損若乃看作軌牽, 爲渠前茅, 眩惑上聽, 陰害儲宮, 甚至幻出翔雲之急書, 響應養厚之凶言, 倘有三尺之典, 豈逭肆市之律? 特因已經大官, 不欲遽置大辟此非忽於誅討而然也" 又啓言: "日前動駕時, 副司直金魯永, 以便褻毛具, 掠過班行, 擧措駭然亟施削職之典" 敎曰: "令該府拿問處之兩司輦前導駕, 而目擊此事, 迄無一言, 致使玉堂, 替行言官之事其貽羞臺閣, 孰大於是? 伊日侍臣兩司, 竝罷職" 右承旨李在學啓言: "憲書賫咨官回還時, 本道都事, 掌其搜驗, 而近來都事, 多不擇差, 不無貽羞請自今勿送都事, 擇差道內守令, 定送差員" 從之

   

정조 26, 12(1788 무신 / 청 건륭(乾隆) 53) 1016(갑진) 1번째기사

김재찬(金載瓚)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노영(金魯永)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노영이 수원 부사에 잉임(仍任)되었기 때문에 정존중(鄭存中)을 대신 제수하였다.

甲辰/以金載瓚爲司憲府大司憲, 金魯永爲司諫院大司諫魯永, 以水原府使仍任, 以鄭存中代之

   

정조 27, 13(1789 기유 / 청 건륭(乾隆) 54) 711(을미) 1번째기사

영우원(永祐園)을 천장(遷葬)할 것을 결정하였다. 상이 원침(園寢)의 형국이 옅고 좁다고 여겨 즉위 초부터 이장할 뜻을 가졌으나, 너무 신중한 나머지 세월만 끌어온 지가 여러 해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상소하기를,

"원소(園所)는 그 사체가 어떠하며 관계 또한 어떠합니까. 오늘의 신하된 자로서 만세의 대계를 생각할 때 마음을 끝까지 쓰지 않을 수 없고 의리로 보아 감히 스스로 숨길 수 없기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신은 본래 감여(堪輿)4959) 에 어두워 귀머거리나 소경과 일반이므로 다만 사람마다 쉽게 알고 쉽게 볼 수 있는 것만을 가지고 논하겠습니다.

첫째는 띠가 말라죽는 것이고, 둘째는 청룡(靑龍)이 뚫린 것이고, 셋째는 뒤를 받치고 있는 곳에 물결이 심하게 부딪치는 것이고, 넷째는 뒤쪽 낭떠러지의 석축(石築)이 천작(天作)이 아닌 것입니다. 이로써 볼 때 풍기(風氣)가 순하지 못하고 토성(土性)이 온전하지 못하고 지세가 좋지 않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하나만 있어도 신민(臣民)들의 지극한 애통스러움이 되는데, 더구나 뱀 등속이 국내(局內) 가까운 곳에 또아리를 틀고 무리를 이루고 있으며 심지어 정자각(丁字閣) 기와에까지 그 틈새마다 서려 있는데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비록 옛 장릉(長陵)에 혈도(穴道)까지 침범했던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으나, 국내에 이미 많이 있고 보면 지극히 존엄한 곳까지 침범하지 않았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성상께서 갑오년에 원(園)을 처음으로 참배하신 때로부터 병신년에 즉위하신 뒤에 이르기까지 걱정하신 일념이 오직 원소의 안부에 계시어, 새벽에 종소리를 듣고 밤에 촛불을 대하실 때 깊은 궁중에서 눈물을 뿌리신 것이 얼마인지 모르며, 봄비가 오고 가을 서리가 내릴 때이면 조회에 임해서도 자주 탄식하셨다는 것을 신이 여러번 들었습니다. 병신년 초에 천장해 모실 것을 연석(筵席)에서 처음으로 발언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데 성상께서도 아마 기억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 병오년 5월과 9월의 변고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성상께서 외로이 홀로 위에 계시며 해는 점점 서산으로 기울어가는데 아직까지 뒤를 이을 자손이 더디어지고 있습니다. 옛날 영종 대왕 7년 신해년에 장릉(長陵)을 천장할 때, 대신과 여러 재신(宰臣)들이 무신년 이후로 중외(中外)에 공경하고 삼가야 한다는 마음이 있다 하여 주문공(朱文公)의 혈식 구원(血食久遠)이란 말을 이끌어 어전으로 가서 다시 길지(吉地)를 골라 천장해서 국운을 장구하게 하기를 건의하였는데, 실로 지금까지 그 덕을 힘입고 있습니다. 이미 선왕조의 고사(故事)가 있고 보면 더욱 오늘날에 천장할 수 있는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바라건대 조정에 있는 신하들에게 널리 물으시고 지사(地師)들을 널리 불러 모아 길흉을 물으시어 신도(神道)를 편안하게 하시고 성상의 효성을 펴시어 천추 만대의 원대한 계책이 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리석게도 지금까지 밤낮으로 가슴속에 담아 두고 답답해 하기만 하였는데 경의 요청이 이런 때에 이르렀으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 결정하겠다."

하고, 이어 대신·각신(閣臣)·예조 당상과 종친부·의빈부·삼사의 2품 이상을 희정당으로 불러 접견하고서 승지에게 명하여 박명원의 소를 읽게 하였다. 대신과 예조 당상들이 한 목소리로 빨리 성명(成命)을 받들기를 청하니, 상이 눈물을 삼키며 목메인 소리로 이르기를,

"나는 본래 가슴이 막히는 증세가 있는데 지금 도위(都尉)의 소를 보고 또 본원(本園)에 대해 언급하는 경들의 아룀을 들으니 가슴이 막히고 숨이 가빠지는 것을 스스로 금할 수 없다. 갑자기 말을 하기가 어려우니 계속 진달하지 말고 나의 기운이 조금 내리기를 기다리라."

하였다. 조금 뒤에 상이 이르기를,

"만약 화복(禍福)의 설에 현혹되어 갑자기 오래된 묘를 옮기는 것이라면 비록 여항(閭巷)의 서인의 집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불가하다고 할 수 있는데 하물며 국가의 막중하고 막대한 일이겠는가. 지금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이 어찌 한 도위(都尉)의 소로 인해서 그러는 것이겠는가. 나의 심정이 정상인으로 자처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경들도 아는 바일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지극한 슬픔이 가슴속에 맺혀 있는데, 만약 흙이 시신에 가까이 닿아 있다[土親膚]고 말한다면 나의 망극한 마음이 다시 어떠하겠는가. 지하의 체백(體魄)이 편안하지 못하다는 것은 오렴(五廉)4960) 운운하는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판단할 수 있다.

대체로 광중(壙中)의 흙은 기운이 없는 죽은 흙이니 지극히 말하기 곤란한 염려가 충분히 있다. 그리고 감여가(堪輿家)들이 항용하는 말로 말하더라도, 패철(佩鐵)의 내반(內盤)으로는 갑좌(甲坐)가 되고 외반(外盤)으로는 묘좌(卯坐)가 되며 신술방(辛戌方) 득수(得水)4961) 이고 해방(亥方) 득파(得破)4962) 이니, ··해가 모두 목(木)이다. 신술방의 물은 바로 이른바 황천 득수(黃泉得水)4963) 로서 내명당(內明堂)4964) 에 물이 없다. 그러나 한쪽에 있는 물만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 더구나 을입수(乙入首)4965) 로서 용세(龍勢)가 더욱 논할 만한 것이 없는데이겠는가. 갑오년에 성묘(省墓)하고 나서부터 옮겨 모셔야겠다고 계획하였으나 새로 정하는 자리가 지금의 자리보다 천만 배 나은 뒤에야 거의 여한이 없을 수 있을 것인데, 오늘날 행용(行用)하는 지사(地師)로서 누가 땅속의 일을 분명히 알 수 있겠는가.

도위도 병신년에 옮겨 모시자는 의논이 있었다고 하였거니와, 대체로 즉위한 처음부터 간절한 나의 일념이 오직 이 일에 있었다. 그 때에 과연 상하가 말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고, 기유년이란 세 글자를 이미 그 때의 연교(筵敎)에서 언급했었다. 내가 즉위한 이후로 14년 동안에 오직 금년만이 연운(年運)·산운(山運)·원소(園所) 본인의 명운(命運)이 상길(上吉)함이 되기 때문에 나의 마음이 더욱더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도위의 소를 보고 여러 경들의 말을 듣건대 숙원(宿願)을 이룰 수 있겠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전에 봉표(封標)해 두었던 곳으로 문의(文義) 양성산(兩星山) 해좌(亥坐)의 언덕은 예전부터 좋다고 운운하는 자리이지만 조산(祖山)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것이 흠이어서 답답하게 막힌 기색을 면하지 못하였고 지질과 물이며 용세(龍勢)도 결코 언급할 만한 것이 없다. 장단(長湍) 백학산(白鶴山) 아래의 세 곳은 국세(局勢)가 혹은 협소하기도 하고 혹은 힘이 없고 느슨하기도 하다. 광릉(光陵) 좌우 산등성이 중의 한 곳은 바로 달마동(達摩洞)으로서 문의의 자리와 함께 찬양되는 곳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가운데 한 곳은 바로 절터이니, 신당(神堂)의 앞이나 불사(佛寺)의 뒤나 폐가(廢家) 또는 고묘(古廟)에 묘를 쓰는 것은 옛사람들이 꺼린 바이다. 용인(龍仁)의 좋다고 운운하는 곳도 역시 그러하다. 이밖에 헌릉(獻陵) 국내의 이수동(梨樹洞)과 후릉(厚陵) 국내의 두 곳, 강릉(康陵) 백호(白虎) , 가평(加平)의 여러 곳들도 마음에 드는 곳이 한 곳도 없다.

그러나 오직 수원(水原) 읍내에 봉표해 둔 세 곳 중에서 관가(官家) 뒤에 있는 한 곳만이 전인(前人)들의 명확하고 적실한 증언이 많았을 뿐더러 옥룡자(玉龍子)가 이른바 반룡 농주(盤龍弄珠)의 형국이다. 그리고 연운·산운·본인의 명운이 꼭 들어맞지 않음이 없으니, 내가 하늘의 뜻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를 이름이다. 나라 안에 능이나 원(園)으로 쓰기 위해 봉표해 둔 것 중에서 세 곳이 가장 길지(吉地)라는 설이 예로부터 있어 왔는데, 한 곳은 홍제동(弘濟洞)으로 바로 지금의 영릉(寧陵)이 그것이고, 한 곳은 건원릉(健元陵) 오른쪽 등성이로 바로 지금의 원릉(元陵)이 그것이고, 한 곳은 수원읍(水原邑)에 있는 것이 그것이다.

수원의 묏자리에 대한 논의는 기해년 《영릉의궤(寧陵儀軌)》에 실려 있는 윤강(尹絳)·유계(兪棨)·윤선도(尹善道) 등 여러 사람과 홍여박(洪汝博)·반호의(潘好義) 등 술사(術士)들의 말에서 보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시말로 말하면 윤강의 장계(狀啓)와 윤선도의 문집 중에 실려 있는 산릉의(山陵議) 및 여총호사서(與摠護使書)보다 자세한 것이 없다. 내가 수원에 뜻을 둔 것이 이미 오래여서 널리 상고하고 자세히 살핀 것이 몇 년인지 모른다. 옥룡자의 평(評)이 그 속에 실려 있는데, 그의 말에 '반룡 농주의 형국이다. 참으로 복룡 대지(福龍大地)로서 용(龍)이나 혈(穴)이나 지질이나 물이 더없이 좋고 아름다우니 참으로 천 리에 다시 없는 자리이고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자리이다.' 하였으니, 이곳이야말로 주자(朱子)가 이른바 종묘 혈식 구원(宗廟血食久遠)의 계책이란 것이다.

대체로 그 형국으로 말하면 비록 범인의 안목으로도 판단할 수 있다. 유두(乳頭) 아래 평탄한 곳에 재혈(裁穴)하고 작은 언덕을 안대(案對)해서 좌향(坐向)을 놓으면 바로 이른바 구슬을 안대한다는 것이다. 구슬을 안대하려면 두 봉우리 사이 빈 곳으로 안(案)이 가는데, 이것이 또 이른바 구슬을 안대하면 빈 곳으로 향(向)이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금(分金)4966) 도 이렇게 재혈하고 이렇게 좌향을 놓고 이렇게 안대할 것으로 결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나의 뜻은 이미 수원으로 결정하였다. 지금 경 등을 대하여 속에 쌓아 두었던 말을 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하늘의 뜻이 음으로 돕고 신명(神明)이 묵묵히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판중추부사 김익(金熤)이 아뢰기를,

"지금 성상의 분부를 들으니 신도 어슴푸레하게나마 알겠습니다. 옥룡자는 바로 도선(道詵)의 호인데 그의 논평이 이와 같다면 이곳을 버리고 어디에서 구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수원산론(水原山論)을 읽게 하니, 연신(筵臣) 모두가 아뢰기를,

"옛사람의 논한 바가 이미 이와 같은데 지금에 와서 어찌 다른 말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해년에 봉표해 둔 곳이 바로 이른바 유두(乳頭)로서, 아래쪽의 낮은 곳에 비하면 너무 올라오고 드러나는 혐의가 없지 않으니, 오직 달무리처럼 둥그렇게 평탄한 곳이 바로 진정한 복룡 길지(福龍吉地)이다. 길일(吉日)이 머지않았으니 오늘날의 급선무로는 그 고장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다음으로 고을을 옮길 계획을 의논하는 것이 가장 마땅하다. 나는 인정이 편안한 뒤에야 지리(地理)도 길해진다고 생각한다. 백성을 옮기는 일에 관해서는 내가 이미 여러모로 계획을 세워 각각 살 곳을 정해 안주하게 하였거니와, 왕명을 선포하고 백성들을 무마하는 책임을 맡은 나의 신하는 감사와 지방관이 바로 그들이다."

하고, 이어 경기 관찰사 조정진(趙鼎鎭)과 수원 부사 김노영(金魯永)을 내직(內職)으로 옮기고, 서유방(徐有防)을 경기 관찰사로, 조심태(趙心泰)를 수원 부사로 삼았다. 그리고 상이 이르기를,

"천장해 모시는 일은 사체가 막중하므로, 본원(本園)의 제사 의식도 태묘(太廟)에 버금가는 것으로 대부(大夫)의 예를 사용해서 제사할 것이니 총호사(摠護使)를 차출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때에는 삼공(三公)을 의당 갖추어야 할 것이다. 총호사의 임무는 으레 영의정이 관장하는 것이니, 좌상과 우상은 복상(卜相)한 뒤에 가서 봉심(奉審)하라."

乙未/定永祐園遷奉之禮上以園寢形局淺挾, 自御極初, 有移奉之意, 而鄭重荏苒, 且有年至是錦城尉朴明源上疏曰:

園所事體, 顧何如也, 關係亦何如也? 爲今日之臣子, 思萬世之大計, 心無所不用其極, 義有所不敢自隱, 玆敢冒死仰陳崇聽臣素昧堪輿, 便同聾瞽, 只以人人易知易見者論之, 莎草枯損也, 靑龍穿鑿也, 後托水勢之衝激也, 後節築石之非天作也以此觀之, 則風氣之不順, 土性之不全, 地勢之汚下, 推可知也有一於此, 尙爲臣民之至慟, 而況蛇虺之屬, 局內近處, 蟠結成群, 至於丁字閣瓦子, 張張罅欹雖與舊長陵穴道侵犯, 差有間焉, 局內旣多有之, 則安知其不犯於至敬至重之地乎? 我聖上自甲午拜園之初, 至丙申御極之後, 憧憧聖念, 惟在園所安否晨鍾夜燭, 幾灑深宮之淚, 春雨秋霜, 頻發中朝之歎, 臣之承聆屢矣丙申初, 有以遷奉發端於前席者, 伏想聖聰, 亦或記有矣嗚呼! 丙午五九月之變, 尙何言哉? 我聖躬惸惸獨立於上, 海籌漸向晼晩, 瓜瓞尙遲綿蔓昔在英宗大王七年辛亥, 長陵遷奉時, 大臣諸宰, 以戊申以後, 中外顒若之情, 引朱文血食久遠之語, 前席建議, 改卜吉地, 國祚靈長, 寔至今賴焉旣有先朝之故事, 則尤爲今日之明證矣伏願博詢在廷, 廣招地師, 諮諏休咎, 以安神道, 以伸聖孝, 俾爲千萬代遠猷

批曰: "冥頑至今, 夙宵結轖于中卿請際至, 當問于大臣諸臣決之"乃召見大臣閣臣禮堂宗親儀賓三司二品以上于熙政堂, 命承旨, 讀明源疏大臣禮堂一辭請亟奉成命上飮泣哽咽曰: "予素有膈氣, 今見都尉疏, 又聞卿等之奏語到本園, 自不禁臆塞氣短猝難發言, 姑勿繼陳, 以待予氣小降" 移時, 上曰: "若惑信禍福之說, 遽移久遠之塋域, 則雖閭巷匹庶之家, 尙云不可, 況國家莫重莫大之擧乎? 今予此言, 豈因一都尉之疏而發哉? 予之情事, 不欲以常人自處者, 卿等之所知數十年至慟, 結轖胸中, 若言土親膚三字, 則予懷罔極, 當復如何? 地中之不安, 不待五廉云云, 可以決之大抵穴星卽無氣死土, 有十分至難言之慮且以堪輿家恒用說話言之, 內作甲坐, 外作卯坐, 辛戌得水亥破, 甲卯亥俱木也辛戌水, 卽所謂黃泉得水, 內堂無水, 不可但以偏水言又況乙入首, 而龍勢尤無可論自甲午展省, 經營移奉, 而新卜之地, 千勝萬勝於今日以前, 然後庶可無憾以行用地師, 孰能明見地中之事乎? 都尉亦云, 丙申有遷奉之議, 蓋自御極之初, 予之洞屬一念, 惟在此事伊時果有上下酬酢, 而己酉年三字, 已發於伊時筵敎十四年之間, 惟今年運山運園所, 本命運爲上吉, 予心益復憧憧今見都尉疏, 聞諸卿言, 宿志可遂, 豈非天意耶? 自來封標之處, 文義兩星山亥坐之原, 則自古云云, 而離祖終欠太近, 不免有菀弗之氣, 砂水龍勢, 決難議到長湍白鶴山下三處, 則局勢或狹小, 或微緩, 光陵左右岡中一處卽達摩洞, 與文義齊稱之地, 而俱未合意其中一處卽寺基, 神前佛後, 廢屋古廟, 古人之所忌, 龍仁云云處亦然外此獻陵局內梨樹洞, 厚陵局內二處, 康陵白虎邊, 加平諸處, 無一合意處唯水原邑內封標三處, 官家後一處, 多前人明的之證, 況玉龍子所謂盤龍弄珠之形局且年運山運本命運, 無不沕合, 予所謂天意者此也國中陵園封標中, 三處最吉之說, 自古有之, 一則弘濟洞, 卽今寧陵是也, 一則健元陵右岡, 卽今元陵是也, 一則水原邑也水原山地之論, 觀於己亥寧陵儀軌, 如尹絳兪棨尹善道諸人及洪汝博潘好義等術士之言, 可以知之其始末則莫詳於尹絳狀啓尹善道文集中, 山陵議與摠護使書, 而予於水原留意已久, 博考而詳察, 不知爲幾年玉龍子所評, 詳載其中, 其言以爲: '盤龍弄珠之形, 眞是福龍大地, 而龍穴砂水, 盡善盡美, 誠千里所無, 千載一遇之地' 此正朱子所謂: '宗廟血食久遠之計也' 槪其形局, 雖凡眼可辨, 穴星則乳頭下坦處, 而坐向則案對小阜, 是謂對珠, 而欲對珠, 則兩峰間空處, 此又所謂對珠, 則向空者也且分金則以此穴以此坐以此案亦當決之, 予意已定水原今對卿等, 喩以蘊中之說, 此非天意之所陰騭, 神明之所默佑乎?" 判中樞府事金熤曰: "今承聖敎, 臣亦怳然玉龍子卽道詵之號, 所論如此, 捨此何求乎?" 上命承旨, 讀水原山論》。 筵臣僉曰: "古人所論旣如此, 到今豈有他說乎?" 上曰: "己亥封標處, 卽所謂乳頭也比諸稍低處, 則不無登露之嫌, 惟坦處圓暈處, 是眞正福龍吉地也吉日不遠, 目下急先務, 最宜安接本土之民, 次議移邑之計予則曰: '人情安然後, 地理亦吉民人遷徙, 則予已有多般經紀, 俾各奠安, 而任予宣布撫摩之責者, 道伯及地方官是也" 仍命京畿觀察使趙鼎鎭水原府使金魯永內移, 以徐有防爲京畿觀察使, 趙心泰爲水原府使上曰: "遷奉之擧, 事體莫重本園祭儀, 皆以亞於太廟, 祭以大夫之禮用之, 摠護使當差出此時三公宜備, 而摠護之任, 自是領相例管, 左右相卜相後, 進去奉審"

   

정조 29, 14(1790 경술 / 청 건륭(乾隆) 55) 220(신미) 4번째기사

황인점(黃仁點)을 성절 겸 사은 정사(聖節兼謝恩正使), 김노영(金魯永)을 부사(副使), 서영보(徐榮輔)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고, 구상(具庠)을 이조 참판으로, 홍병찬(洪秉纘)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창한(李昌漢)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병찬과 창한은 얼마 안 가 체차되고, 이성규(李聖圭)를 대사헌으로, 박천행(朴天行)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以黃仁點爲聖節兼謝恩正使, 金魯永爲副使, 徐榮輔爲書狀官, 具庠爲吏曹參判, 洪秉纉爲司憲府大司憲, 李昌漢爲司諫院大司諫昌漢尋遞, 以李聖圭爲大司憲, 朴天行爲大司諫

   

정조 30, 14(1790 경술 / 청 건륭(乾隆) 55) 613(임술) 3번째기사

김노영(金魯永)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以金魯永爲司憲府大司憲

   

정조 31, 14(1790 경술 / 청 건륭(乾隆) 55) 1210(병진) 2번째기사

봉산(鳳山) 사람 곽시복(郭始復)의 처 허씨(許氏)가 징을 치고 호소하였는데, 그 내용에 의하면, 그의 남편 곽시복이 서울에 사는 차이원(車履遠)과 형조(刑曹)에서 송사를 하게 되어 관청에서 시복을 잡아가니 허씨의 시어미가 허씨의 남편을 붙들고 놓지 않자, 형조의 하인이 허씨 남편의 의관을 찢고 허씨 시어미를 구타하여 방금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 사건은 홍수영(洪守榮)과 관련된 것으로서 당상관은 홍최영(洪最榮)의 처남이고 당하관 역시 홍수영과 절친한 사이이므로 허씨를 말려서 호소하지 못하게 하였다. 형조에서 아뢰기를,

"차이원과 곽시복이 토지 값을 가지고 송사하게 된 것은 이달 11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곽시복이 도로 물리겠다는 뜻으로 공술하고는 기한이 지나도록 이행하지 않으므로 참의 강이정(姜彛正)이 붙잡아갔는데, 그때에 보기에는 갓은 비록 찢어졌으나 몸에 상처난 곳은 없었습니다. 지금 이 공술을 보면 그 남편이 구타를 당하였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형조의 하인이 조용히 압송하지 못하여 갓이 부서진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본조의 하인은 신의 조에서 엄격히 다스리겠습니다만, 본 송사는 호소가 허용된 네 가지 일[四件事]5065) 에 들지 않았으니 내버려두기 바랍니다. 허씨 여인은 신의 조에서 법률에 의하여 엄히 다스리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어버이를 위하여 호소하는 것도 또한 호소가 허용된 네 가지 일 이외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송사는 이렇거나 저렇거나 우선 그만두고라도 본 사건은 외척집안의 토지이고 당상관은 외척 관리의 처남이었다. 더구나 하인을 지방에 풀어놓아 이처럼 제멋대로 행패를 부리게 내버려두었지 않은가. 동료 당상관을 두둔하는 경의 마음으로도 오히려 사실을 완전히 숨기지 못하여 쓰고 있던 갓이 부서졌다고 하였으니, 그들이 행패를 부렸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노파가 그 아들을 위해 붙잡고 말리는 통에 상처를 입게 된 것도 사세로 보아 그럴 법하다.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대개 근래에 다른 외척 집안이건 이 외척 집안이건 막론하고 지나치게 으시대며 기세를 부리는 꼴을 항상 남몰래 걱정해왔는데, 이때 마침 이 사실을 듣게 되었다. 홍최영같이 무식하고 패려한 자에 대해서는 마음 속으로 늘 민망히 여기던 자로서 반드시 청탁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알겠지만, 그의 형으로 말하면 지방에 있었을 뿐 아니라 자못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최영이야 어떻게 자기의 죄를 모면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횡포를 부리는 버릇은 발각되는 즉시 징계하여야만 허물을 고치지 못하고 있는 옛날 외척과 그것을 본뜨고 있는 새 외척들이 또한 경계할 줄을 알게 될 것이다. 대사령이 방금 지났으니 십분 참작하여 홍최영은 그 직명을 삭탈하여 문안드리는 반열에서 빼어버리라. 자궁(慈宮)의 겸손한 덕망으로 얼마나 거듭 훈계하였겠는가마는 그의 성명이 사소한 일로 이와 같은 문서에 오르내리니 이 어찌 통분한 일이 아니겠는가.

참판을 자주 사송(詞訟) 관리로 제수하는 것은 처음 제수하였을 때의 명성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뒤에 제수되었을 때가 처음 제수되었을 때만 못하고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소문으로 변하여 결국 이처럼 일을 그르치게 되었다. 그 집 어른이 너무도 어질고 유순하여 능히 그 자제들을 단속하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다. 본조의 참판 김노영(金魯永)에 대해서는 해부로 하여금 부탁을 받고 송사를 처리하며 하인을 놓아 백성을 괴롭힌 율문을 적용하게 하라. 비록 경으로 말하더라도 참으로 이른바 초록은 동색이다. 애매한 혐의를 받는 것은 생각지 않고 드러나게 감싸주려는 기색만 있다. 더없이 엄격한 것이 송사인데 이처럼 편을 들고 있으니, 너무도 해괴한 일이다. 경은 파직시키겠다. 본 송사는 황해 감사로 하여금 엄히 조사하여 장계로 보고하게 할 것이며, 그 하인도 황해 감사를 시켜 고문하여 엄히 가두어놓고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

하였다. 이때에 와서 시수가 사실을 조사하여 보고하였으나 상의 마음에 들지 않아 그 계본을 되돌려주게 하고 회유하기를,

"경이 재상의 지위에 이르고 감사의 부절을 안게까지 된 것은, 대개 병신년 봄 이전에는 경의 이름이 요망한 환관 무리의 입에 거론되지 않았고 을미년 겨울 이전에는 경의 나가는 방향이 외척 집안을 가까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대대로 지키는 가문의 명성을 조금도 떨어뜨리지 않았다고 보아 수년 동안 의금부 관리로 있는 처지에서 발탁하여 언책(言責)과 논사(論思)의 직책을 거쳐 승지에까지 순차를 따라 등용하였던 것인데, 이 조사 보고를 보면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경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잘못 알았다. 진작 경이 마음을 쓰는 것이 사(私)에 있고 공(公)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면 잘못 알았다는 후회가 어찌 오늘에 나왔겠는가. 비단 홍최영 형제의 나쁜 소식이 될 뿐 아니라 또한 어찌 경의 집에 있어서도 좋은 계기가 되겠는가. 처음 조사하라고 명한 것은 그 토지가 정말 최영의 집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었는데, 경은 차가(車哥)의 부탁에 귀를 기울여 긴요치 않은 일에 간섭하였으니, 평소에 경계한 본의와는 크게 어긋난다.

그리고 곽시복도 비록 시골에 사는 한미한 사람이긴 하지만 듣건대 홍의 장군(紅衣將軍)의 후예라고 하며 또 이른바 이춘로(李春老)도 금년에 '충장(忠壯)'이란 시호를 내린 집안 사람이라고 하니, 명색이 그래도 사족(士族)이다. 그런데 관청에서 보낸 사람이 곽시복의 어미를 향해 돌입하여 뿌리치고 밀었으니, 이것이 기세를 부린 처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일개 차이원의 송사의 승부가 그렇게도 갈등을 일으키니 이 또한 어찌 까닭이 없이 그렇겠는가. 그때 참판은 설령 알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지난달 초부터 20일경까지 곽시복의 어미가 징을 치고 호소하겠다는 등의 말로 위협하였는데 최영이 어찌 듣지 못하였을 리가 있겠는가. 듣고서 응당 그 처남에게 말을 전달하였을 것이다. 참판이 된 자로서는 그 즉시 송사를 가라앉혔어야 하는데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으니, 그 패려하고 추악한 습성은 손발같이 다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다. 이뿐이 아니다. 금호문(金虎門) 밖 부인의 교자를 사람을 보내 위협하며 끌어내는 것도 부족하여 그의 외로운 아들을 차디찬 옥중에 가두었다. 날씨가 추움으로 인하여 특별히 석방을 명한 후에도 완전히 놓아주지 않았다. 이것은 조정에 임금이 있는 이상 권력이 있는 자도 감히 하지 못하는 일로서 위로는 호소하려는 길을 막고 아래로는 외로운 사람을 박해하였다.

이런 일이 한 가지만 있어도 중벌을 면하기 어려운 것인데 더구나 최영의 처지로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비록 최영이 일일이 지시하여 그렇게 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알면서도 그대로 묵인하였으니 최영의 마음 속에는 '(㥘)'이란 한 글자는 전연 없다. 그처럼 어리석은 부류가 이와 같이 겁이 없으니, 이것이 곧 내가 차이원이 최영의 집에 끈덕지게 붙어 최영의 집에 청탁한 사실의 전말을 알고자 하여 경에게 넘겨 조사 보고하게 한 이유이다. 그런데 경은 허다한 사관(査官) 중에서도 기어코 필요한 증인이라는 왕한정(王漢禎)을 보내왔으니, 차이원이 비록 토설하고 싶은들 사관이 재갈을 물려놓은 격이라 차이원이 입을 다물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 다물어지고 말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엄한 처분을 내릴 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조사하기 시작한 일이라 경의 손으로 결정지으려 하였기 때문에 아직까지 우선 참작하여 다시 조사한 보고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겠다.

곽시복에 대해서는 별로 물어볼 것도 없으니 즉시 놓아보내고, 이른바 차이원은 이번의 공초 외에도 그의 지친이 병신년에 묘자리를 볼 때부터 한번 호되게 다스리려고 하던 자였다. 그러한 자로서 그러한 죄를 저질렀으니 참으로 이른바 용서하기 어렵다. 각별히 엄하게 고문하라. 그가 토지값을 가지고 무엇 때문에 최영 형제에게 청탁하였으며 징을 치고 호소하겠다는 말이 나온 후에도 오히려 형조의 관리에게 뇌물을 바치는 등 갖가지 죄상이 여지없이 탄로되었다. 이 여러 가지 사건이 어느것이나 모두 분명히 캐물어야 할 일인데 경은 일체 은폐하고 이미 환하게 알고 있는 토지의 주객만을 가지고 하나하나 따져 물어서 보고서를 만들었으니, 경의 의사를 알 만하다. 더구나 해당 당상관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또 본 송사의 곡직은 유사에게 넘기라고 하교한 이상 이를 조사하여 보고하는 것은 해당 조의 회답 공문을 쓰면 되는 것인데, 어찌 감히 이처럼 모르는 척하면서 능청맞게 엉뚱한 대답을 하는가. 경은 기질적인 병통을 끝내 각성하고 고치지 않아 구태의연한 전일 그대로의 경이다. 경이야 애석할 것이 없고 애석한 것은 대신이며 경의 집안이다.

이 보고서를 도로 내려보내니 다시 시급히 수정하여 보고하라. 또 혹시라도 저항하거든 차이원을 즉시 진영으로 넘겨 남의 재물을 훔친 것으로 간주하여 먼저 강도의 율문으로 다스리고, 다음은 외척의 세력을 빙자하여 국법을 무시하며 저항한 것을 다스려야 한다. 전교에 의하여 엄히 신문한 결과의 죄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경이 비록 다시 차이원의 낯을 보아주고자 한들 그리할 수 있겠는가. 이 점을 일체 알고 있으라."

하니, 시수가 다시 조사하여 차이원이 뇌물질한 절차를 가지고 치계하였다. 이에 회유하기를,

"자주 조사를 하게 하였으나 본 사건의 곡절을 모르는 것은 아니고 본 송사의 대략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토지는 홍최영의 토지가 아니고 판결도 김노영이 판결할 일이 아니라는 것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사건은 유사가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맡길 것이지, 조정에서 무엇 때문에 수다스럽게 윤음을 내리겠는가. 그러나 한 번 조사하고 두 번 조사하고 계속 밝히기에까지 이른 이유의 하나는 홍최영이 혹시 차이원을 위하여 김노영에게 간접적으로 청탁할 수 있기 때문이고, 또 혹시 기만하고 엄폐하기에 급급하여 곽시복을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조사 보고를 보면 홍최영과 김노영은 이렇다할 범죄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사전에 조심할 줄을 몰랐으니 홍최영도 전연 죄가 없다고 이를 수는 없고 애매한 혐의를 받게 된 것도 전연 소홀히 하였으니, 김노영도 혼매한 죄를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이미 애당초 생각했던 것과 다른 점이 있는 이상 그대로 중벌을 적용할 수 없다. 전 참판 김노영은 파직시키는 것으로 다시 전지를 받을 것이며, 전 판관 홍최영은 도태시키는 것으로 다시 전지를 받으라. 이른바 차이원에 대해서는 이미 엄한 형벌을 내렸으나 섣달 그믐날도 며칠 남지 않았으니 즉시 결단을 내려야겠는데, 속였는가 속이지 않았는가는 막론하고 하찮은 그로 인하여 여러 차례 번거롭게 지시를 내린 것만해도 용서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형조에 뇌물을 바쳤다는 것을 그가 이미 자복하였으니 이와 같은 간사한 소인배는 형장을 쳐 귀양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대사령이 금방 지나갔으니 귀양보내는 대신 속전을 받고 다시 엄한 형장을 가한 후 해조에 압송하여 처결하게 하라.

경은 첫번째 조사 보고할 때 왕한정(王漢禎)을 조사관으로 차임하여 사실을 추적하려고 하였는데 겉으로 보기에도 과연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앞서 내린 유지(有旨)에서 빠짐없이 타이르고 책망하였는데, 그중에는 경으로서 감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도 있었을 것이다. 이미 본심이 참으로 잘못된 것이 아닌줄 알면서 그대로 억압을 가한다는 것은 자못 사실을 밝히는 본의가 아니며 또한 신하를 예로 부리는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앞서 내린 유지 중 한 구절은 다 지워버리게 하였다. 이것은 대신이 안심하고 감영에 있게 하기 위해서다. 경은 이 구절을 지워버렸다 하여 죄를 면하였다고는 생각지 말라. 이후부터는 조정의 명령이 내릴 때면 매사에 성의를 다할 것이며 혹시라도 종전처럼 하여 스스로 죄과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鳳山人郭始復妻許氏, 擊錚原情以爲, 其夫始復與京居車履遠訟於刑曹, 自官推捉, 其媤母挽執其夫曹隷裂破其夫衣冠, 敺其媤母, 方在死境, 而本事干涉於洪守榮, 堂上則洪最榮妻娚, 郞廳又是切親之間, 故禁渠不得呼籲刑曹啓言: "車履遠郭始復田價相訟, 始於今月十一日始復以還退之意納供, 過限不成參議姜彛正推捉, 而伊時所見, 笠雖破而身無傷處今觀此供, 其夫被打, 旣不顯著, 曹隷不能從容押來, 笠子破碎, 事極驚駭曹隷則自臣曹嚴懲, 本訟則係是四件之外, 請置之, 許女, 則自臣曹照法嚴勘" 敎曰: "爲親上言, 亦可謂之四件外事乎? 訟理之如此如彼, 姑舍是, 本事則戚里家田土也, 堂上則戚臣之妻娚也況縱隷於外邑, 任其行惡乃爾? 以卿曹右袒僚堂之心, 猶不敢全諱事實, 曰以所着之笠毁損, 則其所作挐, 足爲明證老婆之爲其子挽救之際, 致傷, 勢所使然, 不致命, 幸耳大抵近來, 無論他戚家此戚家, 騰揚太過, 肆氣之漸, 每切隱憂, 際此聞此以洪最榮之無識麄悖, 心常悶然者, 決知有干囑至於乃兄, 不但在外任, 頗似畏愼最榮焉逭其罪乎? 此等豪橫之習, 須從露處卽嚴懲, 舊戚里之不悛者新戚里之學習者, 亦庶知戒赦令才過, 十分參酌, 洪最榮削其職名, 拔之起居之列以慈宮謙德, 敎戒何等申複, 而渠之姓名, 以屑越之事, 上下於似此文書, 尤豈不痛憤乎? 至於亞堂之頻除詞訟, 以其初除時, 不無名稱故也後叨不及初叨, 治聲變爲疪政, 果然有此僨誤惜其家老純善太柔, 不能束子弟本曹參判金魯永, 令該府, 施以受托聽訟縱隷虐民之律雖以卿言之, 眞所謂草綠一色, 而莫念瓜田之嫌, 顯有掩覆之跡莫嚴者議讞, 而阿好如許, 極爲駭然卿則罷職本訟, 令海伯嚴査狀啓該隷, 亦令海伯刑推嚴囚, 以待處分" 至是, 時秀査實以啓, 未稱旨, 命給其啓本, 回諭曰: "卿之致位卿月, 至擁藩節, 蓋於丙申春以前, 卿之姓名, 不聞於妖宦輩, 乙未冬以前, 卿之趨向, 不近於戚里家, 意謂世守之家聲, 或有一分不墜落, 拔之於數年烏帶之餘, 言責論思, 以至喉舌, 節次推擢矣觀此査啓, 一言以蔽之曰, 予於卿錯料誤知早覺卿宅心用意, 在私不在公, 則錯誤之悔, 豈發於今日乎? 不但爲洪最榮兄弟惡消息, 亦豈卿家好關捩乎? 當初行査之命, 非不知本土地之果非最榮家物也傾聽車漢之囑, 干涉不緊之事, 大非平日戒飭之本意且其郭童, 雖曰鄕曲冷跡, 聞是紅衣將軍之後裔, 所謂李春老, 又爲今年賜謚忠壯家人, 則名是士族也官差之向郭母突入揮斥, 此非肆氣之端乎? 一車哥之訟理立落, 如彼其葛藤, 亦豈無所一以而然? 其時亞堂藉令不知, 自去月初至念間, 郭母以上言擊錚等說威脅, 則最榮寧有不聞之理? 聞當送言於渠之妻娚爲亞堂者, 期於卽地息訟, 而任其所爲, 其愚悖麄惡之習, 可謂手脚之己綻不惟是也, 金虎門外婦人轎, 發差驅曳之不足, 囚其孤兒於冷獄因日寒, 特敎放釋之後, 又不永放者, 此朝廷當陽, 有權力者所不敢爲上而阻遏籲徹之路, 下而虐害窮獨之人, 有一於此, 難逭重法況最榮地處乎? 雖非最榮之一一指囑使爲者, 知而唯唯, 最榮胸中, 都沒一怯字如渠癡騃之類, 無怯若此, 此所以欲知車哥緊於最榮家囑於最榮家之顚末淺深, 付卿査啓, 則許多査官, 必以切證之王漢禎差來, 車哥雖欲吐舌, 査官爲含枚, 車哥口吻, 不期鎖而自噤非不知嚴賜處分, 而旣始之査事, 欲自卿手決折之, 故今姑參酌, 以待更査啓本之入徹郭哥別無更問之端, 卽爲放送所謂車履遠, 本招之外, 渠之至親, 自丙申相地時, 一欲痛治者也以渠有渠罪, 直所謂難貰, 各別嚴刑以渠土價, 緣何請囑於最榮兄弟, 而上言擊錚之說旣出之後, 猶復納賄曹吏, 種種情狀, 綻露無餘以此諸件, 無非當覈當問之事, 一切掩諱, 以已洞知之田土主客, 斷斷發問, 以此修啓者, 卿之意思, 不難知也況於該堂疏批, 又以本訟曲直, 付之攸司爲敎, 則此査啓, 用於該曹回移則可也, 焉敢爲此佯若不諦悉, 無難問東答西乎? 卿於氣質之病, 終不能刻意矯革, 依舊是前日之卿非所惜於卿, 所惜者, 大臣也, 卿家也此啓本還下送, 更卽星火修啓又或抵賴, 車哥直付鎭營, 以盜竊人財貨, 先治强盜之律, 次當繩以憑藉戚畹之勢, 侮蔑國法, 抵賴因傳敎嚴問之罪到此卿雖欲更顧車哥之面, 得乎? 一體知悉" 時秀更査, 以車履遠行賂節次馳啓, 回諭曰: "屢令行査, 本事委折, 非不知也, 原訟槪略, 非不悉也土非洪最榮之土, 決非金魯永之決, 亦非不洞燭也似此事件, 皆屬有司, 聽理之如何, 朝家豈煩絲綸乎? 一査再査, 至於屢覈者, 一則洪最榮或有爲車哥轉囑於金魯永也, 又或急於欺蔽, 使郭童罹困苦也觀此査啓, 最榮魯永, 似無緊切所犯然不念先事之懼, 最榮不可謂全然無罪; 專忽納履之嫌, 魯永焉逭昏昧之罪乎? 旣與當初所料有異, 則不可仍施重典前參判金魯永, 以罷職, 更捧傳旨; 前判官洪最榮, 以汰去更捧傳旨所謂車履遠, 旣施嚴刑矣, 歲除隔日, 宜卽決折, 而毋論見欺與否, 因渠蟣蝨, 屢煩辭敎, 卽此可謂罔赦況納賂於曹吏, 渠旣自服, 如許奸細之類, 刑配當然, 而赦令纔過, 定配收贖更加嚴刑後, 押付該曹, 使之決處卿於初次査啓, 以王漢禎差査官執跡, 驟觀果涉如何? 前下有旨, 誨責備至, 間有卿不敢承聞之句語矣旣知本情之眞箇無妄, 則仍以勒加, 殊非覈實之意, 亦違禮使之道前下有旨中一句, 竝許抹去此蓋爲大臣便意在營, 卿勿以句語抹改, 謂以免罪, 此後朝令之下, 隨事盡心, 無或如前自抵罪過"

   

정조 32, 15(1791 신해 / 청 건륭(乾隆) 56) 33(정축) 1번째기사

김노영(金魯永)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윤확(尹㬦)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丁丑/以金魯永爲司憲府大司憲, 尹㬦爲司諫院大司諫

   

정조 33, 15(1791 신해 / 청 건륭(乾隆) 56) 92(갑술) 4번째기사

이민보(李敏輔)를 파주 목사로, 김노영(金魯永)을 수안 군수(遂安郡守)로 특별히 보임하였다. 상이 민보 등이 금부 당상으로서 영희의 공술을 받을 때 조종하였다 하여, 이런 명령이 있었다.

特補李敏輔爲坡州牧使, 金魯永爲遂安郡守上以敏輔等以禁堂, 扶抑於永僖之捧供, 有是命

   

정조 37, 17(1793 계축 / 청 건륭(乾隆) 58) 29(임신) 3번째기사

김로영(金魯永)을 개성부 유수로 삼았다.

以金魯永爲開城府留守

   

정조 38, 17(1793 계축 / 청 건륭(乾隆) 58) 1125(갑인) 1번째기사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김노영(金魯永), 경력(經歷) 최경악(崔景岳)과 풍덕 부사(豊德府使) 임성운(林性運)을 파직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개성 유수 김노영이 장계 올리기를 '사람을 살해한 죄인 음세형(陰世亨)의 공초에 의하면, 첩 유순랑(劉順娘)과 동거하는데 장사를 나갔다가 돌아온 날에 본디 친하게 지내던 주지현(朱之賢)이 순랑의 집에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분한 마음이 울컥 일어나 처음엔 때려주려 하였으나 지현이 상당한 완력이 있기 때문에 몸을 빼 피하여 달아났습니다. 세 차례나 그렇게 하다가 지난 6월에 길에서 문태혁(文太爀)을 만났는데 태혁이 말하기를, 순랑이 지금 주지현과 함께 임 조이(林召史)의 집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곧장 뒤를 밟아 가보니 과연 순랑과 지현이 함께 임 조이의 집에 있기에 불같은 분노가 치밀어 따져볼 겨를도 없이 먼저 오른손으로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지현의 왼쪽 다리를 찌르고 다음에 왼손으로 지현의 상투를 잡고서 머리로 지현의 이마와 가슴팍을 들이받았으며 또 발길로 등줄기와 옆구리 등을 찼는데 그 다음날 지현이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법에 따라 심리하여 처단하게 하고, 그 나머지 관련된 유순랑 등은 그대로 수감하고 결말이 나기를 기다려 신의 영문에서 중한 쪽으로 처리할까 합니다.' 하였습니다. 이 옥사는 사형에 해당되는 옥사이니 의정부에 통보하여 상세한 심리를 가하여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판부하기를,

"일에는 원리 원칙과 임시 변통이라는 것이 있고, 법도 사건에 따라 오르내림이 있기는 한 것이지만 대체로 임시 변통은 아랫사람이 제멋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나아가서 원칙적인 불변의 법률에 대해서 법을 맡은 사람은 더더욱 판례가 그렇다는 것만 알고 있어야지 설령 그 정상이 매우 동정이 가더라도 섣불리 자기가 융통성을 보이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그와는 반대다. 음세형은 남편이고 순랑은 첩인데, 순랑이 간부인 주지현과 저지른 음행에 대해서는 남들이 다 알 만큼 소문이 파다하였다. 세형은 우매하고 용렬하기 짝이 없어서 여러 차례 간음하는 장소에 갔으면서도 도리어 뒤집어 쓸까봐 두려워하다가 다행히도 그날은 음부와 간부가 함께 한방에 앉아있는 것을 분명히 잡고서 곧장 앞으로 내달아 날쌔게 간부를 찔렀으니 이는 법조문에 이른바 간통의 현장에서 잡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세형을 엄하게 신문하여 진술을 받고 옥안을 작성하면서 논리라고는 한 마디도 없으니 이것이 법을 어긴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첫 번째로 불가한 것이다. 이름이 설사 화초첩이라고 하더라도 음분이 난 여자와는 전혀 달라 장가든 근거가 있고 평소 동거도 하였으며 그 여자도 남자마다 모두 남편으로 삼는 계집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음부가 간통한 죄를 그 여자에게 시행하지 않고 어디다가 할 것인가. 그런데 간부를 죽였다 하여 도리어 본 남편을 죽인다면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러한 인륜 강상이 어디 있겠는가. 두 번째로 불가한 일이다. 그리고 삼가 선왕에서 받은 전교를 상고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치마를 잡아당기거나 마주앉아 밥먹는 것을 그 남편이 보고는 분기를 내거나 혹 분한 김에 실수로 죽였을 경우에는 모두 가벼운 쪽으로 법을 적용하도록 서울과 지방의 법관들에게 반포했었다. 그런데 그 계집과 그 놈은 그 현장에서 잡혔으니 그것이 어디 치마를 잡아당기거나 마주앉아 밥먹는 것에 비할 일인가. 그렇게 막중한 수교 내용을 애당초 장계에 한 마디 거론조차 않고 곧바로 옥안을 작성하여 문서로 보고한 것은 구구절절 소홀히 한 것으로 그것이 세 번째 불가한 일이다.

유수의 직임이 비록 임금의 교화를 펴는 직임은 아니지만 역시 한 고을의 풍속 교화를 맡고 있는 사람인데 그가 처리한 일이 그처럼 상식에 반한 일을 하였으니 개성 유수 김노영을 파직시키는 법으로 처리하여 법률을 중히 하고 풍속과 교화를 부지하며 수교가 존중되도록 하라. 그리고 세형은 신임 유수로 하여금 관아의 뜰에 불러다가 타일러서 놓아보내도록 하고, 순랑도 신임 유수로 하여금 법조문을 상고하여 처리하게 하라. 그리고 경들은 법을 다루는 위치에 있으면서 의견을 내어 논리를 전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스스로 법을 위반하는 죄과를 범했으니 모두 중한 쪽으로 추고하고, 초검관(初檢官)도 옥을 꾸밀 일이 아닌 사건으로 옥사를 꾸몄으니 그 죄가 똑같으며, 복검관(覆檢官) 역시 그러하다. 경력 최경악과 풍덕 부사 임성운도 모두 파직시키라."

하였다.

甲寅/罷開城府留守金魯永經歷崔景岳豐德府使林性運職刑曹啓言: "開城留守金魯永狀啓以爲: '殺獄罪人陰世亨供, 與妾劉順娘同居矣出商還鄕之日, 目見素親人朱之賢在於順娘之家, 憤心陡起, 初欲敺之, 而之賢頗有膂力, 故脫身走避如是者三, 而去六月, 路逢文太爀, 則太爀云: 順娘方與朱之賢, 同在林召史家, 故卽往追踵, 則順娘之賢, 果同在林家憤火弸撑, 不暇計量, 先以右手拔所佩刀, 刺之賢左胯, 次以左手執之賢頭髻, 以頭觸之賢之額上及胸膛, 又以足踢其脊背脅肋等處其翌日之賢致死云令該曹照法勘斷, 其餘干連人劉順娘等, 仍囚待決末, 自臣營從重勘處' 云矣係是一罪, 請報議政府, 詳覆施行" 判曰: "事有經權, 法有低昻, 大抵權宜, 非自下之擅便也至於金石之法律, 爲有司者, 尤當但知斷例而已設有其情之絶可矜, 豈或輕生闊狹之見, 而此事則反於是陰世亨, 夫也; 順娘, 妾也順娘與奸夫朱之賢, 狼藉行淫, 人人皆知爲世亨者, 昏劣莫甚, 屢往奸淫之所, 恐被反荷之杖幸於伊日, 的執淫婦奸夫之同坐一室, 直前快刺奸夫者, 此乃律文所謂奸所被捉也今乃嚴訊世亨, 直招結案, 無一言論理者, 此非違法而何? 此一不可也名雖謂之花妻, 判異於行露之鶉奔其娶也有據, 其居也有素, 厥女又似非人盡夫之蹤跡, 則淫婦作奸之律, 不施於厥女而何哉? 然則以殺奸夫, 反殺本夫, 往古來今, 豈有如許倫常? 此二不可也敬考先朝受敎, 與他人挽裳對飯, 而其夫見而出忿, 或有忿頭枉殺, 幷許從輕之律, 頒示京外法官厥女之與厥漢, 被捉於厥處, 又豈比於挽裳而已對飯而已, 則莫重受敎, 初不槪論於狀辭, 直以結案文書登聞者, 節節踈忽此三不可也居留雖非旬宣之任, 亦掌一府之風化, 則其所處決, 若是反常開城留守金魯永, 施以罷職之典, 以重法律, 以扶風敎, 以尊受敎世亨令新留守招致官庭, 曉諭放送; 順娘亦令新留守, 考律處置卿等在按法之地, 不惟不能出意見敷陳, 乃反自歸於違法之科, 幷從重推考初檢官之不當成獄而成獄, 其罪均矣, 覆檢亦然經歷崔景岳豐德府使林性運, 幷罷職"

   

정조 39, 18(1794 갑인 / 청 건륭(乾隆) 59) 19(정유) 1번째기사

명정전에 나아가 조참례를 행하였다. 좌의정 김이소가 아뢰기를,

"하늘에 천명(天命)이 영원하기를 구하는 근본은 참으로 백성들을 화합하게 하는 데에 있고 백성들을 잘 보호하는 방법은 탐오한 풍습을 징계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각도에 특별히 신칙하여 자세히 탐문해서 보고하게 하여 무거운 법으로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참으로 좋다. 일전에 개성 유수의 말을 듣고 미처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살펴 묻지 못하고 단지 착복한 재물을 받아내게만 하였었다. 어제야 비로소 자세히 들어보니 재상의 반열에 있는 사람도 이런 무엄한 버릇이 있었다. 그러니 어찌 대단히 한심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전교하기를,

"대신이 탐오를 징계한다[懲貪]는 두 글자로 백성들을 화합하게 하는 급선무로 삼았으니 그의 말이 매우 옳다. 모름지기 대신이라도 법망(法網)에서 빠져나가는 일이 없어야 법을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대신에 대해서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경재의 반열에 있고 유수의 직임에 있는 사람이 새로 반포한 사목(事目)을 무시하고서 꾸어쓰고 횡령하여 국가의 재물에 손을 댄단 말인가. 규정을 정한 지 얼마 안 되어 이렇게 허물어뜨렸으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제 들으니 전 유수 김노영(金魯永)이 가장 그렇다고 한다. 이러한 위치에 있으면서 그러한 불법을 범하였으니 단지 보잘것없는 사람이 무엄한 짓을 한 것 정도로만 말할 수 없다. 명목은 꾸어썼다고 하지만 어찌 관리를 맡은 자가 직접 도적질한 법조문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 사이에는 비록 사우(祠宇)를 모시고 받드는 데에 쓴 것도 있고 노인을 위한 수연(壽宴)을 많이 열어주는 데에 쓴 것도 있기는 하지만, 사사로운 것을 가지고 어떻게 공적인 규정을 덮어 가릴 수 있겠는가. 불법을 저지른 것은 매한가지이다. 이러한 사람에게 곱절 더 무거운 법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개성 유수 김노영을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라."

하니, 이소가 아뢰기를,

"전 유수 김노영이 이미 먼 지방으로 귀양가는 처벌을 받았으니, 그 이외의 국가 재물을 불법으로 사용한 모든 사람들도 사용한 수량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구별을 두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 가운데 임기 전에 앞질러 교체되고 사용한 수량도 적은 자의 경우는 물론 용서할 수도 있겠지만, 몇백 섬이나 되는 수량을 떼어먹은 자에 대해서는 다같이 죄를 따져서 처벌하는 것이 징계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신은 전 유수 이시수(李時秀)와 이가환(李家煥)에게도 모두 귀양보내는 벌을 시행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자, 전교하기를,

"수량이 가장 많은 데다가 그 지위가 어떠한가. 이것이 김노영에 대하여 특별한 처분을 하게 된 까닭이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경이 아뢴 말도 옳다. 대체로 죄가 발각되기 전에 제 스스로 속죄한 자는 자수한 경우와 다름이 없으므로 따지지 않는 것이지만 사면령이 이제 막 지났으니 의당 참작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전 개성 유수 이시수는 관직을 삭탈하여 내쫓는 벌을 시행하고, 이가환은 백수(百數)의 분량을 횡령한 명목이 있으므로 의당 차등을 두어야 하니 관직을 삭탈하라."

丁酉/御明政門, 朝參左議政金履素曰: "祈天永命之本, 亶在於諴小民, 懷保小民之道, 亦莫先於懲貪風另飭諸道, 詳探啓聞, 繩以重律" 上曰: "卿言儘好日前聞松留言, 未及査問其誰某, 而第使徵捧矣, 昨始詳聞位居宰列者, 亦有此等無嚴之習, 豈不大可寒心乎?" 敎曰: "大臣以懲貪二字, 爲諴小民之先務, 其言甚是須使大吏, 莫或漏網, 法可施矣大吏猶然, 況身忝卿宰之列, 職在居留之地者, 不有新頒之事目, 借貸攛挪, 容手於公貨? 定式未久, 毁畫若此, 豈不駭然? 今聞前留守金魯永爲最云以若地處, 有若干犯, 不可但以無狀無嚴言名雖貸用, 焉逭自盜之律? 間雖有陪奉祠宇, 過行壽宴之擧, 私豈可揜公? 其爲不法一也此等之人, 若不施加倍之律, 其可曰國有法乎? 開城留守金魯永, 遠地定配" 履素曰: "前留守金魯永, 旣被遠配之典, 則其外犯用諸人, 恐不當以數爻多少有所區別其中徑遞而數少者, 雖或可恕, 至於累百之見逋者, 一體論勘, 似爲懲戢之道臣謂前留守李時秀李家煥, 竝施竄配之典, 宜矣" 敎曰: "最多之外, 地處何如? 此所以別有處分於金魯永者也不然, 不必區別卿之所奏亦然大凡未現發前, 私自贖罪者, 無異於自首者, 勿問赦令纔過, 合有商量前開城留守李時秀, 施以削黜之典; 李家煥有百數之名, 宜有差等, 削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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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전기)조선시대 전기 분원과 도자의 제작양상에 관해 논술하시오.

전기의 시기: 1468년(분원설치)/1592(임진왜란 발발)

분원설치: 건국이후 왕실에 필요한 자기양증가

<경국대전>에 명시된 바와 같이 사옹원은 법적,제도적으로 보장된 가운데 왕실자기를 전

문적으로 제작하는 관요인 분원을 설치/이유: 조선 왕실이 국내외로 사용할 최고급 백자 대량

필요. 세종연간 조선백자는 명조공용, 명 사신 접대용으로 그 수요가 늠. 금은기 부족했던 태종

-세종 연간에는 자기가 금은기 대용품으로 사용. 세조 연간에도 왕실에서 청화 백자를 본격적

으로 쓰기 시작. 태종~세조 조에 걸쳐 왕실용 일상기, 의기 대명, 조공용 기명등에 사용될

백자 수요 크게 증가

분원 설치이후 변한점: 왕실에 상납하는 자기의 성격변화(공납자기->진상자기=상품백자)

분청사기 쇠퇴: 지방 여러가마에서 분원 관요 진상백자 모방하려함

인화분청, 귀얄분청->일정기간제작. 철회분청->번성기 이미 쇠퇴기에 접어든

태토와 유약이 매우 조잡. 전기 2기가 시작되는 16세기 중엽부터 분청사기와

상감백자 등은 사라지고 순 백자와 청화백자가 주류.

분원자기의 유출과 사기장인의 도망: 연산군대 부터 관장이 크게 부족, 왕실 자기제작 곤란.

연산군(1494~1505)&중종(1506~1544)연간 관영수공업체제 흔들림->분원자기 외부유출 사용한 사

례 기록에 등장. 유출 사건에 사옹원 운영에 간여했던 종친들 연루

10년에 한번씩 가마이전: 연료문제 이러한 상황은 숙종 연간까지도 지속/분원 가마에서 도자기를 구울

때 사용하는 연료는 시장으로 지정된 광주 6개면과 양근 1개면에서 조달. 가마는 바로 이 떌감처

안에 위치. 이후 숙종 이후 분원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분원을 고정시키고 떌감을 외부에서

사오는 방식으로 바뀜

가마의 이원화: 중, 하품vs상품백자 청화백자와 같은 고급자기와 왕실 전용백자는 품질 유지를 위해 갑발

등에 넣어 정성을 다해 번조.

대표적 가마터: 경기도 광주 번천리, 도수리, 우산리, 무갑리

성종연간: 분원자기생산 안정화.사치풍조. 중국에서부터 들여오는 청화백자 수요 증가. 분원 청화백자

생산도 증가. 분원에서의 청화백자 생산도 초기에 비해 늘어났으며 수요층도 확대. ==>왕실이나

서울의 사대부가뿐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분원 백자를 향유하고자 하는 사람이 확산됨 반증

   

도자의 양식: 조선 전기는 상감백자와 순백자, 음 양각백자. 청화백자가 유행하던 시기 분원가마터를 조

사해보면 백자 중에는 상감백자가 가장먼저 유행 이후 순백자, 철화백자, 청화백자가 그 뒤를

이은 것으로 보인다.

백자: 고려에서 제작되던 연질백자는 15세기까지만 생산되었으며 이후 원, 명 초기의 영향을 받은 경질 백자가 주.조선 전기 백자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기형으로는 대접, 병, 항아리, 묘지석 등이 있다. 대접이나 완은 고려 청자와 달리 구연부가 밖으로 벌어진 것이 대부분이며, 굽은 높고 밖으로 벌어지거나 낮고 수직으로 뻗은 두 종류로 구분된다. 접시는 구연부가 밖으로 벌어진것이 대부분인데 청화 백자 보상당초문 접시가 대표적인 예이다. 잔의 경우 특이하게 양옆에 귀가 붙은 형태가 있는데 1466년 (세조12)진양군영인정씨묘지석과 동반출토된 태일전(太一殿)명 상감백자 잔탁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고족배와 합, 각배 등이 있다.

상감백자: 15세기말~16세기초 점차 소멸. 고려 청자, 분청사기 사용된 상감기법에 연원

청화백자: 초기의 청화백자 문양장식은 한국식과 중국식으로 구분되어 중국 자기는 송죽매가 병렬되거나 혼재되어 중경에 배치된데 비해, 조선 청화백자는 한두 소재를 부각시켜 근경에 배치하고 표현이 절제 되고 회화적이다. 청료가 귀했던 시기인 만큼 이 시기의 청화백자 수요층에 대한 제재는 엄격해서 <경국대전>형전 금제조에 세조 13년(1467)"청화백자 사용 금지법" 제정=======>(변화)

전기 성종조에 중국에서 청료 개발 그 영향으로 청화백자와 청료가 사무역, 밀무역 등의 비공식적 교류를 통해 다량 수입, 다양한 계층에서 널리 사용. 국내 제작 기술 역시 우수했지만 국내에서 청료가 생산되지 않아 여전히 청화백자는 귀하였다. 이에 청화 백자 무역 금지와 사용금지령이 공표되기도. 초기에 중국 도자기를 모방했던 조선 자기의 문양은 전기에 이르러 한국적인 정서가 깃든 격조 있는 회화풍으로 바뀌었다. 당초문이 빈틈없이 꽉 들어차던 기면은 매화가지 위에 앉아있는 새, 나무 아래 들국화 등 한국적인 화조화로 장식되었다. (홍치2년명청화백호, 백자청화매조문호)또한 보조문양 없이 매화절지의 주 문양만을 충분한 여백을 두고 표현 한 점도 전기의 특징. 16세기 전반 중종대에는 회회청을 들여오지 못하여 청화백자 제작이 어렵게 되었다.

홍치이년명 백자청화송죽문호(1489)

백자청화매조문호,15세기,국보170호

철화백자: 순백자와 청화백자에 비해 소량으로 생산. 초기에는 보조제를 제대로 정제하지 않아서인지 안료가 휘발하여 색상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으며, 색상에 대한 선호도가 청화에 비해 낮았기 때문.

15세기 제작 분원자기굽-內用, 見樣./, , , 글자를 한글자씩 음각한것 발견. 궁중에서 사용한다는 뜻인 "내용"과 왕실 공예품의 견본이라는 "견양"은 각각 대전에서 사용하던 것임을 의미, . . , 은 경복궁 내 창고를 지칭

좀 더 늦은시기-, , 명도 발견: 은 별번 즉 원래 진상할 기명 이외 왕실의 행사있을 떄 별도로 제작하는 그릇에 표기/좌, 우명은 좌우로 나누어 분원을 관리했다는 <용재총화>의 기록으로 보아 분원 가마를 좌우 두 부류로 나눈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

------------------------------------------------------------------------------------------------------------------2001후기)조선시대 후기 도자사의 제 양상에 관해 논술하시오.

후기의 시기:1752년(영조28)~1884(고종21)현재의 분원리로 이전하여 고정된 1752년부터 민영화되는 고종 20년까지 약 130년간의 기간

전대의 도자관련 여러 조항들:

분원고정론의 논의: 숙종23년(1779)에 대두. 분원을 원료의 운송이나 제작에 편리한 강변으로 옮겨 고정시키자는것.

남종면 분원리에 영구 정착 1752년 가마를 옮기는 비용 절감. 강을 이용하여 도자의 재료가 되는 백토와 떌감, 그리고 완성된 자기를 운반하기에 유리한 상황이 갖추어져 1884년 가마 운영이 민영화될 떄까지 안정적인 요업체계를 유지 더욱 다양한 도자를 제작할 수 있는 변화의 시대를 열게됨. 그러나 여러가지 대내외적 민영화의 길을 걷게됨

   

도자의 양식:

후기 전반부- 대개 금사리 계통의 것과 유사하나 후반부의 제품은 보다 대중화되어 가며 또한 순백자보다는 청화백자가 양적으로 많아지고 무늬도 민화풍으로 서민화되어 가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구하기 어려웠던 고가의 청화안료의 구득이 상당히 용이해지고 있는데 아마도 국내에서 많이 생산되었든가 아니면 서양으로부터 저렴한 청화안료의 수입이 비교적 자유로왔던 것이 아닌가 생각

18세기후기(중기의 전반부): 18세기 후기에는 중기의 여운이 많이 남아 있는 유색은 영청을 띠며 푸른 기가 도는 것이 특징. 무늬는 간결한 국란, 문자, 칠보, 산수, 초화등의 무늬가 그려지며 필치는 크고 굵어지는 경향을 보이면서 민화풍의 분위기가 나타나고, 떄로는 청화, 진사, 철화 등을 섞어 다채로운 무늬를 나타낸 예도 있다. 항아리 동부 중심에는 난 계통의 초화무늬와 여기에 매조, 화분과 파초무늬가 조합되어 복잡한 새로운 무늬로 등장한다. 또는 넓어진 능화형 안에 초화무늬, 산수인물무늬 등의 무늬가 그려지기도 한다. 이밖에 어깨에 시문된 보조무늬인 여의두 무늬가 커지고 병이나 항아리 하부에는 연판무늬가 시문되며 때로는 항아리의 아래에서부터 3분의 2되는 곳에 여의두 무늬가 한줄 돌려져 문양포치에 어색함이 나타난다. 진사백자등장-> 그릇 표현 전체를 진사로 무늬를 나타낸 몇몇의 예외는 있으나 진사는 예부터 필요한 부분에만 조금 쓰이던 안료이다. 진사자기가 대량으로 제작되지는 않았지만 18세기에 들어와 진사백자의 제작이 늘어나고 있는점 주목. 무늬는 연화무늬, 포도무늬, 대나무무늬, 호랑이무늬, 송학무늬등 이것은 당시 특수한 시대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후기 후반부인 19세기-청화백자 무늬는 전성기를 맞지만 격조가 떨어지고 구성의 묘가 없이 복잡한 무늬가 그려지는 그릇들이 많아진다. 때로는 무늬가 단순화되어 자유분방한 새로운 무늬로 변하고 있다. 단순생략 과정에서는 기하무늬가 나타나기도 하며 무늬의 소재로는 초화, 십장생, 문자, 봉황, 학, 남중문인화풍의 산수, 신선, 포도, 파초, 연어 등 매우 다양한 내용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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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후기)한국의 청자 발생 및 편년 문제를 서술하시오., 쟁점과 이설이 있으면 그 점도 구체적으로 언급하시오.

고려청자의 발생 문제는 일제강점기의 학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논쟁거리로서 대체적인 발생배경으로는 통일신라 경질토기에 나타나는 회유기술등의 내적인 기술 수준 상승, 나말여초 장보고로 대표되는 중국과의 활발한 해상교역과 그에 따른 중국 도자기 기술의 전래, 당시 중국 월주 청자의 영향, 선종 승려들과 지배층의 차문화 수요에 따른 도자 수요 증가 등이 거론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 방향은 가장 오래된 절대편년자료인 <순화4년>명 항아리를 청자의 초보적 단계로 보는 실증적 연구방법과 해무리굽 양식을 포함하는 초기 청자의 제반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한국보다 먼저 청자를 완성한 중국 기술이 언제 전해졌는가 하는 전파와 수용의 관점에서 본 양식 비교를 통한 연구 방법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먼저 실증적 연구 방법에 대해 살펴보면<순화4년> 명항아리라는 절대편년자료를 바탕으로 10세기 후반 발생설을 주장한다. 유약과 태토가 조잡하기 때문에 이것을 발생기 수준을 나타내는 초보적 청자로 본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태조묘당의 제기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청자라는 신소재가 충분한 숙련기간을 거쳐, 당시의 안목을 기준으로 우수한 재질이라 판단되는 수준에 이르렀을 떄 비로소 채택되었을 것이라는 상식적인 문제가 고려되지 않은 문제점이 있다. 또한 최근에 발견된 새로운 자료의 등장과 함께 설득력을 잃고 있다.

이러한 한계점 때문에 중국과의 비교 연구에 초점을 맞추는 양식사적 방법론에 관심이 기울어지고 있다. 초기 연구는 주로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월주요와 강진 청자요지군의 출토품이 유사하다는 점을 토대로 10세기 후반설, 장보고가 활동하던 당시의 중국, 한국, 일본의 관계 속에서 해무리굽 청자 발생이 일본보다 늦게 나타날 수 없다고 보아 9세기 전반설 등이 제기되었다.

보다 최근의 견해들을 정리해 보면 9세기 전반설, 9세기 후반설, 10세기 후반설 등이 제기되고있다.

9세기전반설:

-김재열: 김재열은 용인 서리 출토 유물을 토대로 해무리굽 형식보다 앞서는 선해무리굽의 형태의 청자가 존재한다고봄. 해무리굽보다 이른 시기의 청자와 백자는 굽의 접지면이 좁고 내저원각이 없으며 포개어 군 예가 많다는 등의 특징을 언급. 그렇다면 용인 서리 최하층위의 도편 성격은 내저원각이 없고 접지면이 좁은 청자로서 이들을 우리나라 최초의 자기로 봄. 이러한 종류의 가마는 시흥방산동, 봉천 원산리 또한 해무리굽 양식은 당대 자기 특징의 하나이고 8~9세기로 비정, 일본에서도 9세기 후반에 시유토기에 해무리굽완의 영향이 반영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한국에서 백자 해무리굽 발생시기는 늦어도 9세기 말이여야 하며 최하층의 고식청자(혹은 선해무리굽완류)는 1m이상 퇴적되어 있어 제작시기가 길었을 것으로 보고 선해무리굽완의 고식청자는 9세기 전반 장보고의 해상활동과 통일신라 후기 선종의 유입과 함께 음다풍습의 유행등을 배경으로 청자 발생 9세기 전반 주장

-최건: 해무리굽 완이 성행하는

 

   

   

   

   

   

   

   

   

   

2002전기*후기

2010년 5월 1일 토요일

오후 3:38

1.청화백자의 시원과 전개양상에 대해 논술하시오.

백자.-순백색 바탕흙 위에 투명한 유약을 씌워서 번조한 자기를 말함 동양에서 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575년경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顯) 북제(北齊)시대 (武平6년: 575년) 비교적 깨긋한 백자편 출토. 범수묘의 발견으로 6세기 후반경 이미 만들어 지기 시작함이 확인

당대는 백자의 발달기로서 하북성(河北省) 형요(邢窯)가 북방 백자 생산 가마중 대표생산지로 부각. 당나라 시기에는 백자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 정선된 바탕흙이 아닌 기면에는 화장토를 입히고 소성하는 풍조도 생김.

수, 당시대에는 하남성 공현(鞏縣)지방에서 정선된 순백자가 최초로 생산되었다.

정요백자의 출현과 발달-10c후반경 정요백자가 북망에서 만들어 짐(977년 화북 중국 정지사 탑기 밑부분에서 양질의 백자가 출토) 이후 12세기 후반 크림색의 질좋은 백자를 생산. 13~14세기에는 청백자가 출현하였다.

청백자:(13~14세기 출현)

   

   

   

   

   

   

   

   

   

   

   

   

   

   

원대(1271~1368)-1320년경 경질백자 탄생. 이러한 백자를 토대로 1351년경 청화백자를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 요주요, 여요, 남송 관요 등으로 대표되는 송 대의 청자 문화권에서 원대는 백자를 선호 이는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여 사치를 금하고 절약, 소비를 줄였던 풍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색도 무색에 가까운 백색을 숭상한것. 그러나 14세기 전반 양질의 백자생산을 토대로 한 1351년의 청화백자의 대량 생산은 초반기의 이념과 대치되는 것으로 이는 무역품으로 팔아먹기 위한 것이었다.

1323년경 신안앞바다-그 제작시대가 지대통보(至大通寶) 전( )에 의한 1310년의 상한과 지치(至治)3년명목간(木簡)에 의한 1323년의 하한년도가 밝혀짐. 그런데 여기에서 중국 청화백자가 한 점도 없다는 점을 들 수 있고 그로 인해 청화백자의 본격적인 제작 시기는 14세기 중기 이후라고 보게 된것

영파에서 출발하여 일본으로 가는 도중 난파. 중국도자기(약 60%가 용천요청자/대부분 경덕진요계의 백자 30%/나머지 건요, 길주요),한국도자기(고려청자 7점).일본도자기 4점.

1351년 1929년 영국 David중국 예술 기금회소장 지정(至正11년-1351년)의 연호가 적힌 "청화 용문 상이병" 현 대영박물관 소장 약 60cm의 대형자기, 청화백자의 가장 연대가 내려가는 예

지정형: 페르시아 수입청화안료사용. 망간소량, 철분 =>청화발색이 농염 처액이 진한부분은 흑색의 반점/중국산 청색안료:망간 성분 , 철분 =>청화 발색이 회색및이 나며 흑색의 반점이 없다. 이렇듯 청화의 사용으로 회화적 문양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감상용 도자기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명대: 명 초기 정치 불안정으로 전반적인 도자 생산 상황이 좇지 않음. 1425년 명사 윤봉이 우리나라에 백자요구(15세기 전반 조선 백자의 수준을 반영하는 동시에 명의 상황 반증)

선덕시대 다시 청화백자 경덕진서 부흥: 영락시대부터 청화백자의 장식이 산뜻하고 간략화 되면서 서서히 중국인의 전통적인 심성과 부합되면서 중국자기의 주류가 되었다. 자기의 기벽은 얇고 유색이 부드러우며 문양장식은 화조와 과실 위주이고 그림은 산뜻하고 자연스럽고 명쾌하다. 이 때부터 관요에서 생산된 자기는 황제의 연호를 써넣기 시작했으며 전서로 "永樂年製"로 썼으나 극히 적은 수에 불과하다. 선덕 시기의 청화백자는 비교적 무게가 있어 보이며 기벽이 두껍다. 유색은 청색을 띠며, 그림은 세련되고 힘이 있고 호방하다. 용맹하고 신성해 보이는 다섯 발가락을 가진 용문양이 많이 보이며, 화훼, 봉황, 사자, 해수, 인물, 원앙문 등이 보인다. 본격적으로 그릇의 밑바닥에 해서(楷書)로 황제 연호를 "大明宣德年製" 로 썼다.

   

우리나라로의 전래: 청화백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으나 고려말기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말기록 <효종실록>에 의하면 태종이 왕세자로 국자박사로 있을 떄 성균관에서 중국 청화백자잔으로 술을 마심(1380년대)/그 후의 청화자기 유입기록은 세종조에 집중

세종즉위년(1418)유구에서(당시유구는 명에 예속/세종5년(1423)일본에서 중국 청화백자와 청자를 조공품으로 받친기록.그외에도 명에서 선덕제가 즉위하여 명 황실로부터 세련된 청화백자가 전래된것으로 보임. 상당수의 중국그릇이 수입, 전래, 진상, 하사 등의 방법으로 국내에 유입되어 청화백자 생산에 자극을 주었다.그리하여 1463년 이후 세조는 국내산 회청의 개발을 서둘렀고 또 광주 관요를 중심으로 백자와 청화백자의 본격적 제작되었을것.

   

청화백자는 청화의 안료를 중국으로부터 고가로 수입하여 사용하였으므로 국가의 재정이 곤란하여 수입이 어려울때는 그 제작의 양도 격감하고 있다. 특히 임진란과 호란 전후기에 이러한 현상이 뚜렷하다. 또한 그 무늬는 조선시대 회화의 변천에 따라 시대적인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특징은 화원이 그림을 담당했기 때문이며, 조선후기로 내려올수록 그릇과 무늬는 대중화되어 가는 경향이 짙어 특히 무늬에서는 전문화가의 필치가 사라지고 대개가 서민화 혹은 민화화하고 있어 청화백자 사용층이 보다 대중화되어 확대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원대도자의 특징: 기형이 대체적으로 크고 풍만하며

큰쟁반, 큰대접, 편항아리(이슬람 문화의 영향)

큰항아리, 매병, 호로병, 고족배, 잔탁

기면에 층을 나누고 전체를 장식하는 것 문양 장식이 간단한 송대와 당대 자기형태와 많이 달라진점임

인물고사, 동물문, 물고기, 곤충과 당초문 등의 식물문이 꽃잎이 둥글고 대칭을 이루며 도식화되어 있다.

용문양이 본격적으로 제작되었고 왕과 관련된 상층민용으로 제작.

   

   

2004전기*후기

2010년 5월 1일 토요일

오후 4:38

   

   

2005전기*후기

2010년 5월 1일 토요일

오후 4:41

1.분청사기의 기원과 특징 및 변천

<분청사기의 기원>

분장회청사기의 준말. 퇴락해 가던 14세기 상감청자의 뒤를 이어 발생 15세기 초 조선왕조의 기반이 튼튼히 닦여진 시기와 떄를 같이하여 퇴락해 가던 상감청자가 일변하여 새롭게 서서히 탈바꿈한것. 세종대에 기법이 다양하여 그 발전기 15세기 후반 이후 경기도 광주 일대에 백자 생산의 관요가 국가에 의해 운영됨으로써 분청사기는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생산이 거의 끝난다. 그러므로 14세기 중엽 발생으로부터 16세기 중엽경까지 약 200여 년간 생산. 우리나라 도자기 중 가장 순박하고 민예적인 성격. 양식상 12세기 중엽 발생한 고려상감청자에 그 연원을 두고 있으며 13세기 후반 이후, 원 나라와는 일가관계에 놓여 밀접한 유대가 이루어지므로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 일어난다. 상감 기법은 조잡, 해이해지고 능화형 안에 무늬가 그려지며 대접 안바닥에는 간지가 새겨진다. 그뿐아니라 화금 청자와 같은 소수 수요층을 위한 화금 기법등도 고안 사용되었다. 이러한 여러가지 요소들이 분청사기 발생에 영향을 주었다.

조선왕조는 14세기 중엽 이후 새로이 등장한 지방 향리와 평민 층으로부터 성장한 신진사대부가 주축이 되어 조선왕조가 성립 . 훈민정음창제, 천문관측기의 발명등 맥성을 위한 "민본"을 전제로 한 독창적인 민족문화의 계발과 창달. <농사직설>과 <향약집성방>등의 편찬. 우리에게 맞는 농사법을 찾고자 함과 우리의 산천에 나는 약초등을 조사하여 우리나라 사람의 질병은 우리나라의 약으로써 고치고자함. 민족적인 자각과 기층문화를 포용하고자하는 성격이 15세기 문화의 특색.

분청사기는 토산공물로서 중앙에 상납되었기 때문에 특히 관사명이 들어 있는 것이 많고 특히 관사명이 새겨 있는 그릇은 왕실 및 관아에서 주로 사용. 또한 전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생산지. 고려말 조선 초에 걸쳐 정치의 불안, 관기의 문란, 신분층의 와해, 새로운 지배세력의 성장, 왜적의 침입 등으로 관요의 기능이 마비되었고 이들 기술자들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퇴락한 상감청자를 제작하기에 이르른것.

   

<초기,발생기 약1360년~1420년경)

초기제1기: 태동기 상감청자 쇠퇴기, 분청사기 태동기, 고려의 쇠운과 함께 고려청자는 퇴락일로. 태토가 조잡해지고 기벽이 두껍고 투박하며 암록색을 띤다. 운학무늬 의 경우 구름무늬가 빗방울무늬로 변형되어 고려 상감청자의 전통을 유지. 대접의 경우 포류수금무늬, 연당초무늬 같은 무늬가 생략되고 몇 줄의 선만 돌려 민무늬의 경향을 보이기도 . 매병에 있어서는 굴곡이 심한 기형의 변화와 더불어 어깨에 간략한 자무늬, 연판무늬 등이 상감될 뿐이다. 고려말기의 기형, 무늬 등이 정형을 잃었지만 그대로 분청사기로 연결된다. 전남 강진군 대구면 미산과 당전 부락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14세기 말 청자가마터가 이 시기에 속한다.

   

   

초기제 2기: 초기 후반 약 30년간 조선왕조의 기반이 다져지는 시기이므로 분청사기에서도 새로운 방향이 모색. 퇴화된 상감청자의 무늬가 그대로 이어지는 한편 기형, 무늬 , 유태가 재정비되어 조선적인 무늬 형태로 변모하기 시작. 또한 고려 상감기법에서 간혹 채택되던 인화기법이 대접의 중심무늬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인화기법의 발생기.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분청상감공안명연당초무늬대접과 분청인화공안부명국화무늬대접이다. 전자는 청자상감정릉명 연당초무늬대접에 근원을 둔 연당초무늬의 변형도니 상황이고, 후자는 성긴 국화무늬의 발생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1420년은 공안부가 폐지되는 해일 뿐 아니라 대접무늬에서도 뚜렷이 한 획을 그을 수 있기 때문에 초기와 중기를 여기서 구분. 그러므로 이 시기에 속하는 그릇의 무늬는 퇴화된 연당초무늬, 풀무늬, 중권무늬, 빗방울무늬, 성긴 인화무늬가 많다. 부수적인 무늬로는 여의두 무늬, 연판무늬, 자무늬, 방사성파상무늬 등이 사용된다. 기형은 대접의 경우 안으로 휜 투박한 모양이 주종을 이루며 대마디 굽의 특징을 보인다. 제작 방법은 태토 빚음 받침에 포개어 제작했으며 유약은 청자유 계통의 투명유이지만 태토가 짙은 회흑색을 띠고 있어 유조는 여전히 암록색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편년자료로 최운해 무덤출토 분청상감파도무늬완(1404년), 등이 있음.

   

   

   

<중기, 발전기 약 1420년경~약 1480년경>

분청사기 발전기 1480년 전후가 되면 상감 기법은 자취를 감추고 인화 기법도 쇠미해지는 반면 귀얄 기법이 크게 유행한다.

중기 제 1기: 세종 치세년간에 해당 조선 전기 문화의 융성시기. 도자공예에서도 기법상의 다양한 발전을 보여 상감, 인화, 박지 음각 등에서 참신하게 변모한 양상. 혹은 새로운 기법이 고안되기도. 태토는 정선되어 밝아지며 유약은 잡물이 없이 투명해져 분청사기의 특징이 유감없이 발휘되며 또한 조선백자의 생산이 뚜렷해짐. 이와 같이 중기 제1기는 무늬와 기법이 다양하게 발전 세련되며 고려적인 전통에서 조선적인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 기법은 상감과 인화기법이 많으며, 인화 기법은 대접의 경우 내측면에 듬성듬성한 시문에서부터 점차 발전하여 기면 전체를 가득히 채워 무늬구도가 세련된다. 인화 기법에 사용되는 단독무늬 도장에는 국화무늬, 톱니바퀴형 원무늬, 육각판무늬 등이 있으며 또한 집단연권무늬가 그릇 전체에 압인되어 민화무늬의 새로운 특징이 정착되는 시기이다. 상감 기법의 연당초무늬는 변형하여 활달한 새로운 무늬로 변모한다. 한편으로 대접 외면에는 청자상감정릉명연당초무늬에 연원을 둔 당초무늬와 이중원권내 국화무늬를 네 곳에 배치하는 무늬의 구도는 퇴화되지만 다시금 고려상감청자의 무늬가 소생하기도 한다. 이밖에도 변형된 운학무늬가 상감되어 고려청자의 새로운 환원기를 맞이한 듯하며 이떄의 유조는 고려청자와 구별할 수 없다. 충남 공주군 의당면 가산리와 중흥리가마터로부터 물고기 무늬가 상감 혹은 인화기법으로 시문되며 또한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가마터로부터는 면상감의 모란무늬, 모란당초무늬의 편병과 큰항아리가 출토되어 분청사기의 새로운 면을 보인다.

편년자료로는 정소공주무덤출토 분청상감초화무늬네귀항아리와 분청인화집단연권무늬네항아리(1424), 분청박지연어무늬고봉화상뼈항아리(1430)등

   

   

   

   

청자상감정릉명 연당초무늬대접(왼편)

청자상감덕천명연버들무늬병

분청상감의성고명병등

청자상감정릉명 연당초무늬 대접의 내면무늬인 연당초무늬는 초기 분청사기 대접의 변천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며 청자상감덕천명연버들무늬병과 분청상감의성고명병은 기형, 거친 태토, 간략한 자 무늬와 연판무늬, 황색을 띤 회청의 유약 등의 특징들은 청자상감의 쇠퇴와 분청사기 발생의 과도기적 양상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2006전기*후기

2010년 5월 1일 토요일

오후 5:25

1)이제까지 발굴된 한국의 도자 가마터를 요점적으로 정리 서술하되 도자사의 추이와 연결하여 설명하시오.,

1.전남 영암구림리, 전북 보령진죽리-청자 발생 문제와 연결되는 8~9세기 통일신라시대 가마터

2,청자 가마터 강진 사당리 가마터에 대한 조사와 발굴 일제 시대 잘못된 인식에서 출발 . 청자에 대한 관심을 1910년대부터 일본인들의 골동취미에 의해 개성의 왕릉 도굴을 비롯 강진일대 지표조사가 실시되면서 고조 그 결과 왕릉은 물론이요 가마터 역시 훼손이 심하여 강진뿐만 아니라 부안 유천리 일대가 도굴되어 파편산일 다행히 유천리 도편의 일부는 그후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이들이 정리되어 1983년에 특별전이 개최되기도.

3.녹청자 관련<인청경서동가마터, 해남진산리 가마터>

인천경서동 가마의 경우 1965년~66년 국박과 인천시립박물관이 함께 발굴함으로써 알려진 조질의 녹청자가마터이다. 발굴 당시에는 토기제작에서 청자로 넘어오는 과도기의 가마터로 보았으나 82년~84년 대규모 녹청자 가마터들이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에서 지표조사되었고 또 진산리 제품을 실은 배를 완도 어두리 앞바다에서 인양발굴함으로써 녹청자에 대한 생각이새로이 정리 인천 경서동이나 해남 진산리 녹청자들은 11세기경의 생산품이라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이 결과, 우리나라 청자의 생산은 강진을 중심으로 한 양질의 청자와 해남 진산리나 인천 경서동을 중심으로 한 조질녹청자의 두 종류의 생산품이 공존했음을 파악. 진산리 제 17호로 명명된 녹청자가마터 91년도 발굴 보고서에 의거 10세기말~11세기 전반이라는 연대 추정

4.초기청자관련<용인서리고려백자가마터, 고창용계리 청자가마터,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가마터, 봉천원산리가마터, 강진 대구면 용운리 가마터> 이들 가마터의 공통된 특징은 무수한 원통 M자형 갑발로 거대한 퇴적층이 이루어져 있고 도편의 대부분 민무늬 이며 해무리굽 양식의 완, 얇은 내화토 받침이 특징. 유색은 암록색, 황갈색, 녹갈색 등을 띠며 유빙렬이 없다. 밖으로 벌어진 대접, 접시 완, 항아리등 생활용기의 기종이 다양하게 보임.

-용인서리 고려백자가마터: 1084~88년까지 3차에 걸쳐발굴. 모두 3차의 가마가 축조 최초의 가마는 벽돌가마요, 최후의 가마는 진흙가마로 그 길이가 약 84m에 달함. 4개층위를 확인한 6m의 자연퇴적층의 존재는 청자의 시원문제로부터 백자의 자체변화의 모습까지 알려줌. 즉 선해무리굽->해무리굽->퇴화해무리굽->윤형굽으로의 굽형태의 변화과정을 밝혀주었다.

   

   

   

-고창용계리가마터: 1983년 영광 원자력 발전소의 상수원 취수댐걸설을 위해 원광대학교 박물관 발굴. 발굴당시 가마와 관계있는 건물터 주변에서 태평임술(太平壬戌二年)명(1022)평와편의 발견으로 대체로 1022년전후 활동했으리라는 정보. 접시, 꽃모양접시, 대접, 큰사발, 병항아리, 주전자, 등잔 등다양한 기종

출토. 해무리굽의 완굽이 특징. 뚜껑있는완, 편병, 유병등은 안압지 풀토의 토기 기형가 비슷하며 잔받침, 주전자, 향로등은 11세기 후반~12세기 기형의 선구적인 것으로 주목 민무늬의 무늬 , 음각과 양각기법이 모두 있으며 음각기법으로는 구름무늬, 연판무늬,앵무무늬, 초화무늬 수목무늬등이 양각기법으로는 연판무늬가 있다. 아직 비색청자의 유조가 아닌 회청색, 녹청색, 녹갈색등의 유조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 가마터: 벽돌가마터 진흙가마로 진행하지 않고 벽돌가마에서 자기제작 중단. 또한 청자 퇴적층이 간층없이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토기현들의 퇴적위에 존재했다는 점 확인 용인서리의 최초 가마가 벽돌가마였으므로 최초의 서리가마는 방산동 가마와 거의 같은 시기일 것이며 오히려 방산동 가마가 조금 앞설 것이라는 점.

   

   

-봉천원산리 가마터

   

   

2007전기*후기

2010년 5월 1일 토요일

오후 6:08

1)분청사기의 종류와 지역적 특성에 대해 서술하시오.

< 분청사기의 지역별 특색-경기도, 충청도(제1군)/전라남,북도(제2군)/경상남,북도(제3군)>

(경기도, 충청도)-1군

15세기 전반 연당초무늬의 상감기법과 육각판무늬, 국화무늬 같은 인화기법이 중심이다. 15세기 후반 경기도 광주 같은 지방은 관요가 성립됨에 따라 분청사기의 제조는 끝이 나고 백자 생산의 중심이 되므로 귀얄과 담금분장과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있다.

충남 공주군 반표면 학봉리에서는 청화백자의 영향에서인지 철화기법의 분청사기라는 독특한 지방양식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16세기가 되면 회백자에 백토분을 입힌 도편이 남양주군 별내면 청학리와 과천군 문원리 등지에서 채집되고 있어 지방에서의 백자이행 양상의 한 단면을 알 수 있다. 서울의 우이동과 도봉동에는 14세기말~15세기, 이를테면 전기 제2기에 속하는 가마터가 존재하는데 이들은 분청사기의 특질을 갖추기 이전의 가마터이다. 이와 같은 성격의 가마터는 전국에서 발견되며 이는 고려 말기 청자 가마터가 전국으로 확산된 현상과 상통한다. 충청도 공주와 연기 지방의 중기 제1기에 속하는 분청사기 가마터 근방에는 대단위 백자 가마터가 좀처럼 발견되지 않아 이러한 현상은 15세기 전반에 이 지방에서는 아직 백자의 생산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말한다. 대체로 15세기 후반~16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 학봉리 철화분청 가마터에서는 백자 도편이 많이 수집되므로 15세기 후반 광주 관요의 백자 생산의 영향이 서서히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사기막리의 분청사기의 성격도 인화분청에서 바로 백자화해 간 15세기 후반의 가마터가 있다. 이와 같이 경기도와 충청도의 분청사기의 성격은 전라도 지방에서 크게 유행한 귀얄이나 담금분장의 성행 없이 대체로 15세기 후반 이후 백자로 이행해 간다.

(전라남, 북도)-2군

다른 어느 지역에서보다 가장 뛰어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15세기에는 박지 기법과 음각기법에서 특이한 발전을 하며 15세기 후반~16세기에는 귀얄 기법과 백토가 두껍게 입혀진 담금분장 기법에서 아름다운 묘미를 살리고 있다. 15세기 전반에서 후반을 걸쳐서 활동한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가마터는 양이나 내용에 있어서 학봉리 가마터와 쌍벽을 이루는 개성있는 지역 특색을 보이는 가마터이다. 편병, 큰항아리와 같은 기형이라든지, 물고기, 모란, 모란당초, 연화 등과 같은 무늬, 그리고 면상감, 인화, 박지, 음각, 귀얄 기법 등은 제 2군을 대표하며 면상감 기법에서 특히 특징이 두드러진다. 전남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의 분청사기 가마터는 15세기 후반~16세기 전반에 활동한 가마터로서 담금분장기법에서 개성있는 지역적 특색을 보인다. 전북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와 부안면 수동리 가마터에서는<내섬(內贍)>명 도편이 수집되며<내섬>명 그릇은 전라도 지방에서만 제작되고 있어 제 2군의 특징으로 꼽힌다. 광주 충효동 분청사기 가마터는 특히 각종의 명문이 수십종 발굴된 바 있어 제 2군의 지방적 특색을 또한 보인다.

(경상남, 북도)-3군

인화기법을 새로운 경지로 발전시킨다. 특히 집단연권무늬의 그릇은 동일 무늬의 반복으로 인해 현대 추상미술을 연상시키는 것이 있다. 인화 기법의 그릇은 당시 상품 그릇으로 주로 중앙관아에 상납했고 따라서 <인수부><장흥고>의 관청 이름뿐만 아니라 생산지 이름도 같이 새겨 상납하고 있다. 상납 그릇의 생산지 이름이 경상도 지방이 많다는 점이 제 3군의 제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양질의 태토가 경상도 지방에서 많이 산출되는 데도 기인한다.

   

<분청사기의 종류-상감, 인화, 박지, 음각, 철화, 귀얄, 담금기법>

(상감기법)

고려상감기법의 연속 무늬의 음각선에 백토나 자토를 넣어 유약을 씌워 번조하는것. 분청상감기법에는 선상감과 면상감이 있는데 특히 면상감에서 특징을 보인다. 면상감은 박지 기법으로 이행된다. 선상감은 처음에는 고려 상감무늬를 답습하다가 1420년대 이후에는 조선적인 무늬로 신선하게 변한다. 분청상감 기법은 조선백자에 영향을 주어 상감백자가 약간 제작되나 15세기 후반 이후로는 상감 기법은 도자 무늬로서 크게 이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자기에 적용된 상감 기법은 12세기 중엽에 발생하여 15세기 중엽경까지 애용되었던 한국 독자적인 도자 무늬 기법으로 발전되었음은 이미 언급한 바이다. 무늬로는 연당초무늬, 연꽃무늬, 버드나무무늬, 모란당초무늬, 모란무늬, 초화무늬, 갈대무늬, 물고기무늬, 어룡무늬, 파도무늬, 돌림무늬 등이 있으며 때로는 이들이 도식화되거나 변형되어 새로운 무늬의 경지를 나타낸다. 분청상감 기법의 그릇에는 유색과 태토가 고려청자상감 그릇과 구별하기에 매우 모호한 것이 많다.

(인화무늬_

인화 기법은 원하는 무늬를 새긴 도장을 가지고 그릇 표면에 질서 정연히 찍은 후 백토를 넣어 무늬를 나타낸 기법으로 넓은 의미로는 상감기법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도장을 찍는 기법은 통일신라시대 뼈항아리에 많이 사용되었고 고려상감청자에도 일부 사용되나 표면 장식무늬로서 특색을 십분 발휘한 것은 단연 분청사기에서이다. 모든 종류의 기형에 응용되며 처음에는 대접의 내면에 국화무늬, 육각판무늬, 삼원무늬와 같은 도장이 한 줄 또는 두 줄 정도로 단독으로 듬성듬성 압인되다가 차츰 전체를 메워 나가며 한편으로는 집단화된 국화무늬, 연권무늬, 빗방울 무늬 등이 그릇 전체를 뺵뺵히 찍혀 그릇은 전체가 하얗게 백토분장되어 인화 기법은 절정에 이른다. 그릇 아가리나 굽 주위에 부수적으로 시문되는 종속무늬로는 풀잎무늬 당초무늬, 여의두무늬, 연판무늬, 자무늬, 빗방울무늬, 잎무늬 등이 있다. 가마터를 조사하면 듬성듬성 인화된 초기 인화분청 파편이 청자상감의 여운이 짙은 파편과 함꼐 출토되는 것이 보통이다. 대체로 분청인화 기법은 15세기 초에 발생하여 1420년경에는 무늬 구도가 안정되고 15세기 중엽경에는 세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화 기법은 모든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발견된다.

특히 인화분청 그릇 중에는 관사 일므, 생산지 이름, 도공 이름을 압인 혹은 상감 기법으로 새긴 것이 있어 제작 시기, 생산지간의 특색 비교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예컨대 공안부, 경승부, 인녕부, 인수부, 덕녕부, 내섬시, 내자시, 예빈시, 장흥고 등의 관사일므,고령, 합천, 경주, 언양, 안동, 상주, 군위, 성주, 금산, 경산, 밀양, 창원 울산, 양산, 진주, 진해, 김해, 의흥, 예안, 삼척, 해주, 무안 등의 지방 이름이 있는데 경상도 지방이름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특색이다.

이밖에 , , , . 와 같은 과낫이름의 약자. , , , ,, 의 지명의 약자. 李金, , , 良金, 와 같은 도공이름. 기타 公衙,(공아), (공), 光上(광상), 光公(광공) 과 같은 관아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명문이 있다.

(박지기법)

박지 기법은 상감과 인화 기법과는 달리, 먼저 그릇 전체 혹은 일부에 백토로 분장한 후 시문하고자 하는 무늬를 음각으로 그리고 백토가 남아 있는 무늬 이외의 배경을 긁어내어 무늬의 백색과 회색의 바탕이 대조되게 하는 기법을 말한다. 백색과 바탕색과의 대비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긁어낸 바탕에 철채를 가하여 흑갈색을 띠게 한 기법도 있다. 박지 기법은 세종떄에 이미 세련되며 모란무늬, 모란당초무늬, 연꽃무늬, 연화당초무늬, 잎무늬, 물고기무늬 등에서 생동감이 넘치는 활달한 무늬를 나타내는 분청사기의 정수를 보여 준다. 박지 기법의 도편이 발견되는 가마터로는 전남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광주 직할시 충효동,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운대리 등이다.

(음각기법)

음각 기법은 박지 기법과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많으며 무늬가 간소화될 때 주로 많이 사용된다. 이 기법은 기면을 백토분장한 후 원하는 무늬를 선조하면 회색의 바탕색이 무늬선으로 나타나며 고려자기의 음각 기법과 같다. 회화적인 사실 표현에서부터 추상화된 무늬에 이르기까지 능숙한 필치를 보이며 모란무늬, 모란당초무늬 연꽃무늬, 연당초무늬, 물고기무늬, 잎무늬, 버드나무무늬, 인물무늬, 가옥무늬 등 다양한 무늬소재를 보인다. 꽃무늬가 많기 때문에 일명 조화무늬 혹은 조화 기법이라고도 한다.

(철화기법)

철화 기법은 백토분장한 후에 철분이 많이 포함된 안료로 그림을 그리면 흑갈색 혹은 흑색으로 나타난다. 이 기법은 긁어내거나 선조하는 것이 아니고 붓으로 무늬를 그리기 때문에 회화성이 높다. 무늬는 도식적인 것, 추상적인 것, 희화적인 익살스러운 것 등 서민들의 익살과 해학적인 분위기가 나타나 현대인의 감각과도 잘 영합된다. 대개 15세기 후반~16세기 전반에 걸쳐서 충남 곶우군 반포면 학봉리 일대에서 제작된 독특한 기법 중의 하나이다. 당시 관요인 경기도 광주에서는 중앙의 화원이 파견되어 청화백자가 활발히 제작되고 있었기 때문에 상호 영향관계가 주목된다.

(귀얄 기법)

귀얄이라는 도구를 써서 백토를 바르는 것으로 귀얄 자국이 운동감 있게 남아 있어 또다른 효과를 보인다. 대체로 포개어 구워 대량 생산한 막사기에 많이 있다. 박지, 음각, 철화 기법에는 기본적으로 귀얄을 사용하여 백토를 분장하며 귀얄 자국만 남는 순수한 귀얄 기법은 대개 분청사기의 쇠퇴 과정에서 많이 사용하였고 표면이 백자화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담금분장기법)

백토 물에 그릇을 덤벙 담가 백토 분장하는 법이다. 귀얄과 같은 자국이 없으므로 표면이 차분하다. 백토가 두껍게 씌워지면 표면이 완전히 백자화하여 역시 분청사기 말기에 많이 보인다. 대접 경우에는 굽다리를 잡고 거꾸로 담그기 때문에 굽 언저리에 백토가 묻지 않고 흘러내린 자국만이 있어 백토분장의 또다른 추상성을 보인다.

   

   

2008전기*후기

2010년 5월 1일 토요일

오후 9:34

1.고려청자와 중국도자기의 관련성을 서술하시오.

월주요청자의 영향으로 청자 발생 이후 북송대 여요, 요주요, 남송관요, 경덕진요 등의 새로운 조형기법이 이때 영향

1.초기(908~1095)-월주요청자:청자의 발생은 절강성에 위치했던 오월국과의 교섭을 주시

월주요는 춘추시대 의 영역인 절강성을 중심으로 동한시대부터 청자를 구웠던 요군을 말한다. 850년경 만들어져 무역도자로써 수출이 되었으며 이러한 월주요무역자기는 안압지, 황룡사, 미륵사, 부소산성, 완도 등에서서도 출토되고 있다. 고려청자의 발생에 있어서 월주요 청자의 유입으로 이루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현재 그 시기는 9세기 말~10세기전반으로 논의되고 있다. 월주요 청자의 영향은 먼저

1)가마구조-벽돌가마:서남부지방의 전축요 계열 가마들 시흥방산동 가마, 봉천원산리가마, 용인서리, 등의 가마들 원통형 m자형 갑발을 사용하며 대부분 민무늬이며, 해무리굽 양식 완, 내화토 받침이 특징, 유색은 암록색, 황갈색, 녹갈색을 띤다.

2)해무리굽완-중국에서는

3)기형-화형완,발 ,주자,잔탁--> 당말 오대의 기형들 한국 초기청자가마터에서 비슷한 양상으로 출토

4)문양-

고려의 초기 청자는 소문청자였다. 이것은 중국 월주요 당말-오대의 청자에서도 보이는 특징으로 청자 발달 초기에는 거의 문양이 없는 素文시대였다. 중국에서는 10세기후반 오대말-북송초 월주청자에서 가는 음각기법으로 새긴 연판문과 당초문 형식의 식물문과 파도어문, 용문, 쌍나비문,쌍앵무문등이 등장한다.

5)요도구-갑발, 갑발받침,도침

   

요주요청자: 요주요는 섬서성 동천시 황보진에 위치하며 당대부터 원말 명초를 거쳐 요업을 계속하였던 중국 고대의 저명한 요자아운대 하나이다. 당대에서 오대에 해당하는 기간은 월주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송대 이후로는 특징적인 압출양각 기법등을 통하여 하나의 계를 이룰만큼 세력 확장. 올리브 그린색을 띄는 청자가 특징적으로 도범의 사용으로 대량생산에 까지 이어졌다. 고려청자의 경우 북방청자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졌으며 문양에 있어서도 선조 음각 등에서 요주요 청자같은 장식적 문양이 12세기경 출현 또한 강진용운리, 붕나 유천리, 대전 구완동 등지의 가마터에서 압출양각청자출토. 거란의 침입 후 공식적으로 단절되었던 고려와 송은 11세기 후반에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양국의 공식관계가 활성화되는 1071~1126년 사이에 고려는 송을 중화로 인식하면서 그 분화를 받아들였고, 예종과 인종의 "화풍" 에 대한 흠모는 고려로 하여금 송의 선진문물 수용과 유교 이념에 입각한 체제 정비를 본격화하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11세기 말 중국 내에서 가장 광범하게 확산되고 있었던 요주요계 압출양각 기법의 급속한 국내 전래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임.

1)원상감기법

2)양인각기법과문양-고려 중기 청자에 보이는 압출양각기법

3)청자화판형접시

4)청자화형완

5)청자향로

6)과형병

그러나 요주요 가마구조는 석탄을 땔감으로 사용하는 만두요 구조이다. 따라서 요주요로부터 축요법은 영향 받은 바 없고 제자기법만 일부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여요: 11세기 말부터 12세기 북송과의 교섭으로 이루어졌다.

1)고려도경의기록-12세기초 북송 여요를 모방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2)사각받침=>인종장릉출토 사각받침(사당리출토).

3)화형잔

그러나 여요청자의 경우 우리나라에 수출된 예가 발견되지 않으므로 考古圖,宣和博古圖등을 모방한게 아닌가 생각된다.

   

   

   

2009전기*후기

2010년 5월 1일 토요일

오후 9:34

1)17세기 조선시대 백자의 특징과 성격에 대하여 서술하시오.

조선은 임진왜란(1592)으로 전 국토가 황폐해지고 국력이 소진된 상태에서 재건을 위해 노력하던 중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등으로 다시 혼란에 빠졌다. 병자호란 직후에는 인조15년(1637)분원에서 자기 번조가 일시 중단되어 왕실도자기도 부족한 실정이었다. 또한 효종, 현종시기에는 전에 없는 가뭄과 흉년, 전염병 등으로 국가는 안팎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전쟁외에도 분원에서 자기 번조가 어려웠던 또 다른 이유는 장인들이 작업장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분원 설치 당시 <經國大典> 工典에 사기장이 1,140명인데 인조 3년(1625)에는 821명만 남은 사실만으로도 그 심각성이 드러난다. 이렇듯 전쟁과 재해로 인한 어려움 그리고 분원경영의 내부적인 병폐로 인해 도자제작에도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이에 대한 분원의 새로운 변화와 정비를 위한 노력이 시도된다. 그 변화의 시도로서 숙종 23년1697년 분원의 경공장에 대해 사기장이 번갈아 입역하는 分三番立役制에서 通三燔立役制인 비계약직 임금노동자로 변화한 것인데, 다시말해 공인들에 대해 이전의 부역제에서 임금을주는 고용제로 변화한 것이다. (분삼번입역제는 장인을 셋으로 나누어 교대로 입역하던 것이고, 통삼번입역제는 일시적인 기거를 위해 분원에 머문 것이 아니라 분원 주위에 마을을 형성하여 기거하는 전속 장인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관요는 수준높은 전속장인을 거느리고 고급의 원료를 사용하여 우수한 백자를 생산하게 되는 등 기술제작과 양식에 있어 큰 변화의 계기가 된다.) 그럼에도 분원에서의 도자유출과 사번이 빈번하여 영조는 고급 자기인 갑기가 왕실 이외의 수요처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고 분원장인의 생활보장을 위해 화전세를 거두었다. (1727)

도자 양식적 측면에서도 임진왜란 이후 도자양식의 번반적인 변화는 불가피하였다. 백자는 그릇의 형태와 유약, 장식 등에서 이전과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 청화안료를 구하기 어려워 이를 대신한 철화백자가 주로 제작되었으며 색도 회백색을 보이는 백자가 주류를 이룬다. 대접과 접시 등 일상생활용 그릇이 주로 제작되었으며, 그릇의 종류도 이전만큼 다양하지 못하다. 이러한 상황은 17세기 후반까지도 여전히 지속되었으며, 전국각지에서는 대부분 질이 다소 좋지 못한 순백자와 철화백자가 제작되었다.

광주시 탄벌동(1606~1612), 도척면 상림리(163`~1640), 초월면 선동리(1640~1649), 광주시 송정동(1649~1659), 실촌면 유사리(1661~1664), 실촌면 신대리(1665~1677), 초월면 지월리(1677~1680년대), 도척면 궁평리(1680~1717년이전), 퇴촌면 관음리(1680~1717년 이전), 실촌면 오향리(1717~1720년 이전), 남종면 금사리(1721~1751)로 이동하면서 운영되었다.

임란직후 질적 쇠퇴와 사옹원 분원의 제작을 정비하고자 한 노력으로 역삼각형굽 그릇의 밑면에 음각으로 "*+干支"의 간지가 등장 1604~1630년까지로 조질백자의 경우 오목굽에 모래빚음눈이 사라지게 된다. 양질, 조질 모두 회백색 유조에 태토에 잡물이 많은 현상이 두드러 지며 전체적으로 질이 떨어진 모습이다.

1631~1680년경은 "* +干支+숫자" 로 명문의 내용이 바뀌고 조질백자의 경우 오목굽에 굵은 모래받침을 사용한다. 철화의 사용이 빈번해지고 소량의 청화를 사용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선동리, 송정동 등지에서는 다양한 굽이 등장하면서 질을 향상시키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 선동리 요지(1640~1649)""자가 청료로 쓰여진 청화백자편이 출토된바 17세기 전반기말부터 청화백자 소량이나마 번조된것. 또한 선동리 가마터의 수집된 자료에 따르면 접시의 굽은 4종류로 v자형의 높은굽과 낮은곱, u자형의 넓은 굽, 안으로 파진 오목굽 등이 있다. )

1680년경부터 1751년까지로 명문의 내용이 "*+기타"로 바뀌며, 백자의 질이 전반적으로 향상된다. 양질백자의 경우 흙모래받침을 사용한 순백색의 백자가 늘어나고, 조질백자의 오목굽에 굵은 모래받침은 그 제작량이 감소하게 된다. 이렇게 질의 향상과 함꼐 청화백자의 제작이 늘어나고 명문은 점차 사라지게 되는것.

17세기 후반에는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백자청화난초문각병에서 보듯 간결하게 그려진 난초와 대나무 문양은 청화 안료를 소량 사용한 듯 옅은 청색을 띤다. 치밀한 백토에 엷은 청색을 머금은 투명한 백자유 문양으로 보면 한쪽에는 각진 면에 걸쳐 대나무가 사선으로 쭉 뻗어 올라간 대담한 구도가 두드러지며, 반대쪽에는 난초 잎과 꽃이 거의 좌우대칭으로 표현된 문양이 안정적이다. 이렇게 한쪽엔 힘차게 뻗은 동적인 대나무를, 반대쪽에는 차분하고 정적인 난초를 대조적으로 배치한 발상이 독특하다. 대나무, 난초와 같은 문양장식은 중기 백자에 애용 경기도 광주 송정리 요지(1649~1659)에서도 대나무, 난초등의 초화문이 그려진 청화백자편들이 수습되었다.

17세기는 철화백자의 전성기답게 철화문양이 다채롭게 시문 그중 대표적으로 시문된 것은, 종속문으로 주로 쓰인 당초문을 비롯해서 운룡문, 각종 꽃과 호랑이와 사슴 등 동물을 그린 화훼* 영모문, 매죽문과 같은 사군자류의 문양이다. 운룡문이 시문된 대표적인 자기로는 17세기 초기 작품인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철화백자 운룡문항아리를 들 수 있다. 이 항아리에는 종속문으로 위쪽에 당초와 연판문을, 아래쪽에 삼각문과 당초문을 시문하였다. 용은 약간 굴곡진 목 부분과 직선에 가까운 몸통을 지니고 있으며 발톱은 세 개이다. 조선 전기에는 촘촘하던 비늘이 넓은 부채꼴 형태로 성글게 시문되었고, 입이 짧고 머리가 우스꽝스러운 모양이다. 용은 전체적으로 신비함과 위엄이 느껴지기보다는 약간 어설픈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철화로 바뀐 시문 상황에 익숙지 않은 탓인지 선이 중간중간 끊어지거나 채색이 고르지 못하다.

   

   

2)고려시대 백자에 대하여 서술하시오.

중국에서는

백자.-순백색 바탕흙 위에 투명한 유약을 씌워서 번조한 자기를 말함 동양에서 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575년경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顯) 북제(北齊)시대 (武平6년: 575년) 비교적 깨긋한 백자편 출토. 범수묘의 발견으로 6세기 후반경 이미 만들어 지기 시작함이 확인

당대는 백자의 발달기로서 하북성(河北省) 형요(邢窯)가 북방 백자 생산 가마중 대표생산지로 부각. 당나라 시기에는 백자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 정선된 바탕흙이 아닌 기면에는 화장토를 입히고 소성하는 풍조도 생김.

수, 당시대에는 하남성 공현(鞏縣)지방에서 정선된 순백자가 최초로 생산되었다.

정요백자의 출현과 발달-10c후반경 정요백자가 북망에서 만들어 짐(977년 화북 중국 정지사 탑기 밑부분에서 양질의 백자가 출토) 이후 12세기 후반 크림색의 질좋은 백자를 생산. 13~14세기에는 청백자가 출현하였다.

6세기 중엽 이후 우리나라는 중국으로부터 전래품 혹은 무역품의 성격으로 이미 중국 백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도 사용하고 있었다. 그 예로는 백제 무녕왕릉 출토의 완, 경북 의성 출토의 당 형주요 백자병, 안압지 출토의 형주요 백자완과 정요대접, 황룡사지 목탑지 심초석 밑에서 출토된 백자 작은항아리,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대중12년명(858)토기편과 동일층으로부터 나온 중국자기 등이 있다.

고려시대 백자는 대체적으로 청자의 발생과 거의 동시대로서 대체로 10세기 전반경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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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e Rodin

   

로댕 조각의 전통성과 현대성을 구체적인 작품을 예로 들어 논하시오. <2005 후기>

19세기 조각사에서 가장 빛나는 작가는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이었다. 로댕은 전통을 종합하면서 혁신을 이룬 조각가로 20세기 현대조각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 하였다.당시 회화는 아카데믹한 회화의 급진적 변화와 전개가 이루어졌지만, 조각에 있어서는 매체자체의 제한이 크기 때문에 회화의 진전에 비해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것에서 급격한 변화를 이끌어낸 사람이 로댕이다.

로댕은 문학적 상징적 주제를 사실주의적인 인체의 표정과 동작을 통한 극적이고 감정에 충만한 인물로 표현하였고, 궁극적으로는 19세기의 사조인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상징주의, 그리고 표현주의의 영역을 두루 거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광선에 녹아드는 듯한 표면효과와 음영의 대비는 인상주의자들의 관심과도 일치한다. 인상주의의 회화가 일으킨 변혁을 잘 알고 있었고 순간적 변화와 움직임, 빛과 색채변화의 포착을 조각으로 실현하는 것에 큰 역할을 하였다.

로댕의 전통성과 현대성을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청동시대>는 로뎅의 이름을 알린 작품이다. 콘트라포스토의 자세나 인체의 비례는 그가 이탈리아에서 보았던 미켈란젤로의 <다윗>이나 <죽어가는 노예>의 영향으로 고전조각에서 유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창과 같은 소도구도 갖고 있지도 않고, 이상화되지도 않은 채 피부의 생생한 촉감이나 얼굴에서 생명력 넘치는 평범한 인간을 느낄 수 있으며, 모델링을 통한 명암효과를 최대한으로 살려 인상주의 화가들과 동질성을 보여주는 점 등은 전통성에서 탈피한 화가의 현대성이라 할 수 있다.

원래 파리장식미술학교의 정문으로 주문받은 <지옥의 문>은 단테 「신곡」의 지옥편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원래는 우주는 구획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중세의 개념을 반영하여 문을 네모 형태의 패널의 연속으로 만들 예정이었다. 이는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의 전통을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구획이 없어진 문은 파도가 치는 듯 유동적 표현과 인물의 dynamic한 표현과 인물이 바닥에서 돌출된 정도는 거의 환조에 가까워 전형적 부조의 개념에서 벗어났다. 지옥의 문에서 파생된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 사색하는 사람의 근육은 에너지와 율동감이 과장되어 매우 표현적이다. 또한 <키스>는 인간의 세속적 애욕이 주재이다. 의도적으로 거친 대리석을 미완성으로 남겨 둔 것은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작품으로부터 받은 영향이지만 한편으로는 각 부분이 완성되지 않아도 오히려 그것이 표현적 요소로서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는 시사는 곧 현대조각의 새로운 한 면을 열어주게 되었다.

공공조각의 대표적인 작품인 <칼레의 시민>은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 시 영국이 칼레시를 포위한 것에 대해 용감한 6명의 시민의 영웅적 행위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격렬한 비난을 샀고 결국 거절당하게 되었다. 기존 공공조각의 기념비적이고 용감한 영웅상은 유대감이 없고 포기, 좌절, 공포, 불안 등의 굉장히 인간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인물들로 표현되었으며, 기존의 공공조각이 높은 단에 위치하는 것에 반해 ground level로 조각되어 전통적인 영웅상과 반대되었다.

이러한 그의 조각의 원천은 르네상스, 고딕, 바로크의 전통에서부터 시작되었으나, 조각의 표면은 그자체로서 중요한 표현적 요소가 되었으며, 신체의 일부분만으로 충분한 완성작품이 될 수 있다든지, 미완성 형태의 작품 요소로서의 가능성 발전, 나아가 조각이 사회적 기능을 갖기 이전에 작가의 개인적 표현매체라는 그의 미학은 현대조각의 새로운 개념이 되었다. 감정적인 그의 조각은 정신적으로는 고딕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2

   

Hellenism 미술

<2008 전기 簡>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인 기원전 4세기 말에 이르면 그리스 문화는 지중해 전역으로 스며들고 문화의 선도지인 아테네와는 멀리 떨어진 각 지역에 문화 중심지가 성장하고 있었다. 이때에 북쪽에서는 마케도니아라는 강력한 세력이 새로이 등장하였으며, 알렉산더에 이르러 페르시아제국 전체를 정복하고, 다뉴브강에서 나일강까지, 지중해에서 인도 너머에까지 그리스의 세력권을 확장시켰다.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제국의 건설은 그리스 미술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리스 미술은 이 제국이 건설됨에 따라 몇 개의 작은 도시 국가를 벗어나 세계의 절반에 해당되는 지역의 조형 언어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이 후기 시대의 미술은 그리스 미술이라고 부르지 않고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이 동방의 나라에 건설한 제국의 이름을 따서 헬레니즘 미술이라고 부른다.

이 제국의 수도들이었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티오크,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등은 그리스 본토에서 미술가들에게 요구했던 것과는 상이한 요구를 하였다. 그들은 기원전 4세기의 자연주의에 대한 매혹을 고전기 조각의 이상화된 영웅상과는 동떨어진 주제로까지 확장하여 술 취한 사티로스, 노파, 어부 등 시대를 초월하여 다양한 분위기를 갖는 인물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헬레니즘 양식은 유연하고 생동감이 있으며 불규칙적이고 때로는 비대칭적이다. 이들 조각들은 움직임의 표현에서나 자세, 몸짓, 얼굴 표정을 통해 생생한 감정을 보여주기 위해, 기술적인 극치를 최대한으로 보여주고 있다. 건축에서는 이전 도리아 양식이나 이오니아 양식의 평이함과 우아함에서 벗어나 기원전 3세기 초에 고안된 코린트양식이 유행하였으며, 일반적으로 건물 전체에 더 많은 화려한 장식물을 입혔다.

헬레니즘 양식의 대표적인 예는 기원전 160년경에 새워진 페르가몬의 거대한 제우스 신전이다. 이 제단의 프리즈에 표현된 <신들과 거인들의 전투>에서는 초기 그리스 조각의 조화미와 세련미를 찾아볼 수 없으며, 대신 강력하고 드라마틱한 효과를 느낄 수 있다. 모든 형상마다 격렬한 몸짓과 나부끼는 옷주름이 충만하며, 거의 환조의 형태로 되어 제단의 계단으로 흘러넘치기도 한다. 또한 1506년에 발견된 <라오콘, 기원전 175-150년경>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드》에 나오는 라오콘이 포세이돈이 보낸 바닷뱀들에게 공격당하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뒤틀리고 변형된 인물들의 역동적인 자태나 라오콘의 몸에서 보여 지는 과장된 근육표현, 파토스가 승화되는 얼굴표정 등은 긴장이 극대화된 표현으로써 가장 절정의 극적인 모습을 형상화 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의 미술은 미술이 오래전부터 유지해왔던 주술적 종교적 연관성을 거의 상실하였다. 모뉴멘털한 조각은 더 이상 엄격한 종교의식을 위해 헌납되지 않았고, 귀족이나 왕조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점차 궁정을 장식하는 데 이용되었다. 미술가들은 기술 자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모든 움직임, 표정, 긴장 등을 담고 있는 극적인 상태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표현해내느냐 하는 문제는 한 all술가의 솜씨를 시험하는 가장 적합한 과제가 되었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2

   

Minimalism

미니멀리즘 <2005 후기 2007 전기 2008 전기 簡>

   

몇몇 사람들에게 무의미한 속박처럼 보이는 전통으로부터 예술을 해방시키기 위한 시도로서 미술가들은 예술의 군더더기를 벗겨내 그 본질만을 남겼다. 미니멀리즘은 조각부분에 특히 두드러지며, 구성주의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에 그 기원을 둔다. 미니멀리즘은 60년대 후반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하드-에지 미니멀 아트 화가의 원형이었는데 추상표현주의의 에너지가 충만한 행위적 미술을 은근히 비판하였다. 그의 같은 중심을 지나는 기하학적인 도형과 가는 선으로 패턴화 된, 일군의 엄격하고 금욕적인 흑색 회화를 통해 추상주의에 있어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개성주의는 완전히 제거되었다.

이처럼 추상표현주의의 과도한 표현과 팝 아트의 대중성에 반발하여 작가의 의지와 창조성을 배제시키고, 전통회화의 illusion과 narrative를 없애, 작품자체의 물질성만을 중요시 여겼다. 이는 스텔라가 말한 "What you see is what you see."라는 것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회화가 가진 모든 요소가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최소화 된 것을 말한다. 따라서 미니멀리즘은 매우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를 띠고, 단일한 색을 가지며, 기계적 방식으로 제작된 특징을 보인다.

또한 기존의 전통적인 작품들(모나리자)은 작품의 의미가 그 안에 내제되어 스스로 완결된 존재로써 그것이 어디에 있건 그것의 의미는 변하지 않았지만, 미니멀리즘 미술은 시공간에 구애를 받으며, 작품의 의미는 외부에 존재하는 특징을 지닌다. Tony Smith<Die, 1962>라는 작품에서 (일루전과 서사적 요소 배제) 전통적인 기단을 무시하고 바닥에 놓음으로써 실제공간과 유리된 초월적 공간이 아닌 우리들과 같은 공간을 점유하는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Robert Morris는 3개의 똑같은 L형의 빔을 서로 다르게 배치한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관람자는 그것이 똑같은 형태임을 알지만, 그것이 놓은 곳에서 그것들을 우리가 지각할 때의 느낌은 너무도 다르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이는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현상학적인 지각'이라 부른 것으로 작품의 의미는 맥락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이는 Donald Judd<무제, 1967>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러한 작품들은 점점 대형화되어 상상할 수 없는 스케일로 변화하여 공공미술에 많이 이용되었다.

미니멀리즘은 미국에서는 추상미술의 뒤를 잇는 것이 되었지만 한편으로 유럽에서는 미니멀리즘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성향, 산업주의적 영향을 거대한 스케일로 장악하고 있다고 하는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3

   

Conceptual Art

   

1960년대 말아서 70년대 초의 미술계는 "회화는 죽었다."라는 구호로 가득했다. 개념미술가라고 자칭하는 그룹의 작가들에게 있어 회화뿐 아니라 조각도 이미 한물 간 유산에 불과했다. 조셉 코주스 (Joseph Kosuth)는 "진짜 미술품이란 역사적인 호기심거리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 개념미술은 미술작품의 물질화에 대한 의문이며, '미술의 비물질화'를 표방하는 사조의 일부분이다. 간단히 말해 창의적인 아이디어야말로 미술의 기본을 이루는 요소로서 이 아이디어에 고무 받아 실제의 미술작품을 만드는 작업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개념미술은 마르셀 뒤샹이 미술에 있어 중요한 것은 미술품 그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아이디어라고 본 점, 그림을 만드는 것은 관람객이라고 하면서 관람객의 참여를 기대한 것에 의해 이미 예견되었다.

미술은 독창적 개념에 있는 것이지 실제의 작품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미니멀리스트들이 그들의 작품 속에서 이미지, 개성, 감정, 메시지, 수공예적 성격을 제거해버렸다면, 개념미술가들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미술작품 형식을 추방해버렸던 것이다. 개념미술은 예술가의 사상을 강조하는 사조는 어떤 것이든 속하는데, 따라서 언어가 재료가 될 수 있고, 몸을 재료로도 쓸 수 있다. 조셉 코주스는 <의자 Ⅰ과 Ⅲ, 1965>에서 의자가 존재하는 방식을 의자, 의자의 사진, 의자의 사전적 정의로 표현하여 언어가 미술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한스 하케(Hans Haacke)는 <응축입방체, 1963-65>에서 작품이 주변의 자연적 물리적 환경변화에 따라 변하여, 작품의 의미는 외부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Metro Mobilitan>에서는 메트로폴리탄과 모빌사의 전시후원의 가려진 진실을 폭로하며, 미술작품의 의미는 정치와 권력이 만들어 주는 것이라 주장한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3

   

Pop art

*Pop art <2003 후기 簡> *팝아트의 주요화가와 그 특징을 설명하시오. <2001 전기>

*1910년대 입체주의 미술가들과 60년대 팝아트 미술가들이 어떻게 생활 속에서 발견되는 재료들을 미술에 도입하여 사용했는지 그 차이 및 공통점에 대해서 논술하시오. <1999>

1960년대 초기에 미국에서 발달하여 미국 화단을 지배했던 구상 회화의 한 경향이다. 팝 pop이라는 명칭은 '대중적', popular에서 유래하였으며 일상생활에 범람하는 기성 이미지인 대중적 이미지에서 제재를 취했던 미술의 경향을 일컫는다. 팝 아트가 급속히 일반화된 것은 1962년 뉴욕의 시드니 제니스 화랑에서 열렸던 뉴리얼리스트전 이후의 일이나 영국에서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그 전조가 된 미술가들의 활동이 있었다. 1950년대 초부터 해밀턴, 파올로치 등의 젊은 작가들이 모여서 대중 사회의 문화, 예술, 매스 미디어와 같은 문제들을 토론하고 전시회를 개최함으로써 팝아트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영국의 팝아트는 초기부터 사회 비판으로서 사회와 예술을 접목시키고자 했던 젊은 예술가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팝 아트는 1950년대 초기의 미국화단을 휩쓸었던 추상표현주의의 애매하고 환원적인 형태와 주관적인 미학에 대한 반동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6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사회는 대량생산과 매스미디어의 발전에 의한 소비문화와 대중문화의 시대가 도래 하였다. 상품은 광고를 통해 비쳐지는 이미지가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미술이 유일한 이미지이자 작품이었지만, 이제는 이러한 이미지와 상품의 홍수 속에서 미술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팝아트는 이러한 현대의 테크놀로지 문명에 대한 낙관주의를 기조로 하고 있다. 미국 팝 아트의 가장 직접적인 선조는 라우센버그와 제스퍼 존스를 들 수 있다. 그들은 회화의 마지막 종착지 같던 추상표현주의를 넘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다시 재현으로 되돌아갔다. 라우센버그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발견되는 물체, 이를테면 콜라병, 자동차 타이어, 침대 등을 이용하여 컴바인 페인팅을 창안함으로써 팝 아트의 기틀을 마련했다. 제스퍼 존스는 라우센버그의 정열적이고 혼란스러운 제작법과 반대되는 차갑게 계산된 그림을 그렸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지만 눈여겨보지 않는 것들을 대상으로 삼아 표현함으로써 이미지와 실재사이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현대적이고 평범하며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이미지를 사용하는 특징은 팝아트에 영향을 주었다.

<모노그램, 1955-59>/ <성조기, 1598>

미국의 팝 아트는 흔히 발견되는 일상의 이미지나 물체를 미술 작품으로 전환시켰는데 이 점은 다다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다다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팝 아트가 세련된 고도의 기술에 의해 '일상'을 미술의 영역으로 또는 사회의 체계 속으로 끌어들였으며 풍자적이거나 무정부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또 화면에 나타난 이미지는 구상적이지만 회화 체계 자체는 추상성이 높다. 팝 아트는 추상표현주의에 반발하는 반대운동이긴 하지만 추상표현주의로부터 무한히 확장된 의미를 지닌 미술의 가능성과 '전면 회화'인 거대한 크기의 작품이 자아내는 효과의 의미를 물려받았다.

앤디 워홀(Andy Warhol)은 팝아트를 대표하는 작가일 뿐 아니라 대중매체가 만들어낸 60년대 당시 미국사회의 슈퍼스타(Celebrity)였다. 그는 미술의 전통적인 가치, 독창성에 대한 개념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따라서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아이콘(코카콜라 등의 상품, 마릴린 먼로 등의 유명인), 비극적인 사건 등을 소재로 삼아 작업방식도 그의 팩토리에서 실크스크린과 같은 대량생산 방식으로 제작하였다. 이는 자본주의 세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소비중심주의, 물질중심주의를 비난하기 보다는 동조하고 찬양하였다. <100개의 캠벨 수프 깡통, 1962>, <골드 마릴린 먼로, 1962>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은 당시 대중문화를 반영하는 통속적 만화(특히 로맨스/ 전쟁)만화에서 발취한 것들을 거대하게 확대시킨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디테일을 삭제하여 원작을 단순하고 크게 그렸으며, 면은 색이 분할되어 점으로 찍은 인쇄기법인 ben day-dot을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Whaam!, 1963>

제임스 로젠퀴스트(James Rosenquist)는 거대한 팝 그림들 속에 비개성적이고 일반화된 광고판 제작 기법을 사용하여 이미지를 분해하고 분해된 이러한 파편들을 무질서하게 늘어놓았다. 전쟁과 핵폭탄, 대량살상, 헤어드라이기, 파스타 등의 무과난 이미지들이 섞여있는데 이는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운 일들이 이미지화 되어 계속적으로 노출되어 무감각해지는 내성화를 드러내고 있다. <대통령 선거, 1960>, <F-111, 1965>

클레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는 우리에게 친숙한 사물들을 삼차원적이고 거대하게 확대시키고 재질도 변형시킨 작품을 만들었다. 따라서 그는 관객들의 무감한 상태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사물의 힘을 되돌려 준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공공조각도 많이 제작하였다. <부드러운 변기, 1966>, <표범의자, 1963>

미국의 팝아트는 뉴욕뿐만 아니라 서부에서도 독자적인 전개를 보여, 뉴욕 팝과 함께 켈리포니아 팝이 2대 조류를 이룬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3

   

Surrealism

초현실주의 미술운동<2005 전기 2006 전기 簡 >

다다와 초현실주의 미술운동을 간략히 설명하면서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설명하시오. <2002 전기>

초현실주의는 다다의 직접적인 계승자이다. 1차 대전 이후 합리성과 이성에 대한 반발과 저항이 일어났고 초현실주의는 합리성에 반하는 비합리성과 의식에 반하는 무의식적 세계를 체계적으로 탐구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듬해인 1919년부터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까지 약 20년 동안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과 미국에서 널리 유행한 초현실주의는 원래 문학에서 출발한 예술사조로서 그 대부는 시인 앙드레 브루통이었다. 초현실주의는 미술, 문학 운동을 넘어선 삶의 방식이자 철학적 견해의 표현이었다.

1924년 브루통이 '제 1차 초현실주의 선언'을 함으로써 공식적인 시작을 알리게 된다. 그는 다다의 허무적이고 파괴적인 특질을 개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다의 여러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비교적 조리 있는 철학을 지닌 운동을 창조하였다. 그는 현실의 상위(sur)에 존재하는 현실이 또 하나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초현실주의는 현실의 위에 있는 초월적인 현실이 있다는 믿음에 기반 한다."고 하며, 초현실도 엄연한 현실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하는 것에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적 사고가 결합되었다. 초현실주의는 프로이트의 자유연상법과 꿈의 분석에 기저를 두었기 때문에 시인과 화가들은 무의식의 이미지를 자극하기 위해 자동기술법(Automatism: 의식적인 통제를 거치지 않은 창조행위)을 사용하였다.

이탈리아 화가인 키리코(Chirico)는 공식적으로 초현실주의 작가는 아니지만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의 역할을 하였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그의 작품들에서 거의 단정적인 꿈의 이미지에 대한 언어를 발견하였는데 몇몇 미술가에게는 이것은 거의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초기부터 이 운동에는 다다에 속한 예술가들인 막스 에른스트(Marc Ernst)와 아르프가 속해 있었다. 이들은 미로, 달리, 마그리트와 같은 자체 내의 중요한 예술가들을 길러냈다. 그러나 다른 주요 예술가들도 공식적으로는 이 운동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초현실주의적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이미지들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초현실주의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유럽에서 가장 두드러진 아방가르드 예술이었다.

일반적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은 오토마티즘 원리를 중요시하였으나 단일한 양식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크게 나누어 보면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첫째는 구상을 기반으로 하여, 일반적으로 현실의 상황에서 멀리 벗어나 병치, 전환, 치환 또는 변화를 시킨 자연형태의 정확한 형태에 의존한 사실주의 양식이 있다.(달리, 마그리트) 둘째는, 추상을 기반으로, 자연에서 발견되는 형태들을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는 이미지와 무의식 내에서 탄생된 형태들을 지향하는 우연, 즉흥적 화법의 양식이 있다.(미로, 에른스트)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는 정확하고 단조로운 산문적 묘사를 하는 아카데믹하고 자연주의적이며 재현적인 기법에서는 완벽하였다. 그는 크기에 대한 모순을 놀랍게 이용하고, 중력의 법칙을 부정하며, 잘라서 이젤에다가 옮겨 놓을 수 있는 물질들로 하늘을 채우는 등, 불합리한 것들을 조합해서 충격과 불안을 일으켜 전통적인 기대감을 가장 능숙하게 실망시킨 화가였다. 그의 낯설음은 일상생활의 대상들을 사용함으로써 더욱 고조된다.

<이미지의 배반, 1928-29>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도 마그리트와 마찬가지로 비현실적 주제들이 마치 실제인 듯이 보이는 19세기 아카데미의 자연주의 기법을 적용시키는 것이었다. <기억의 영속, 1931>

호안 미로(Joan Miro)의 전매특허인 환상적인 형태들은 항상 실제 대상을 의미한다. 그는 해, 달, 동물 같은 자연의 사물들을 특유의 생물과 같은 형태의 기호로 표현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형태들은 점차적으로 사실과 환상이 결합된 아메바 같은 둥글고 작은 덩어리와 '생물형태적(Biomorph)'인 형태로 단순화 되었다. <달을 향해 짓는 개, 1926>

주로 독학을 했던 이브 탕기(Yves Tanguy)는 부르통의 소개로 초현실주의에 동참하였다. 그는 자신만의 생동감 있고 독창적인 이미지를 발견하고 발전시켜서, 정신의 환각적 상태를 실현시켰다. 탕기의 이미지는 종종 바다 속의 풍경처럼 그때까지의 과학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았던 아메바 같은 생물체를 닮은 듯한 것들이 깔려 있는 영원한 해저를 암시한다.

초현실주의는 파리에서 탄생하였고 제 2차 세계 대전 때까지 파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나 빠르게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어 갔다. 1938년 파리 전시회에는 14개국이 참가하였다. 초현실주의는 문학과 시각 예술 양쪽에서 중요한 운동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조직된 운동이 해체되고, 그 추진력이 고갈되었다 할지라도, 초현실주의의 정신과 방법들은 계속 발전하여 많은 나라들의 개개 미술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3

   

Venetian school

베니스 화파의 특징<2001 전기>

   

베네치아 화파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르네상스 시대에 활약한 화가들 및 그들의 미술을 말한다. 유럽의 동쪽 항구로 동방무역의 중심지였던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지적이고 엄격한 이상을 강조하던 피렌체나 로마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베네치아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은 빛에 의한 '색채'이다. 엄격하고 완벽한 소묘를 추구한 중부 이탈리아 화풍과는 베네치아에서는 색채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곳은 무역으로 돈을 번 부유한 후원자들이 많아서 지성미 보다는 화려함을 강조하는 그림이 곽광을 받았다. 또한 많은 이국적인 물품들이 수입되던 이곳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술 마시고 노래하며 인생을 즐기는 감각적인 쾌락의 도시였다. 따라서 베네치아 화풍에서는 도색적이며 세속적인 주제를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초기 르네상스 시대, 즉 15세기의 베네치아 화단은 벨리니 가문이 주도하였다. 자코포 벨리니(Jacopo Bellini)는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제자로, 그의 양식은 국제 고딕양식의 다소 뻣뻣하지만 화려한 양식을 보여주었다. 그의 영향은 젠틸레 벨리니, 지오반니 벨리니에게로 이어지게 된다. 젠틸레 벨리니(Gentile Bellini, 1431-1516)는 한때,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의 술탄 메흐멧 2세의 궁정에서 궁정화가로 일했으며, 형식적이고 정적인 그림을 그렸다. 지오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는 오랜 생애동안 지속적인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창의력이 풍부하고 당대의 변화하는 풍조를 민감하게 수용하였다. 그의 화풍은 논리적인 공간과 비례를 추구하는 피렌체의 양식과 플랑드르의 세밀한 화풍을 이어받았다. 그의 작품<성모와 성인들, 1505>에서는 정교하게 구현된 원근법과 부드럽고 다채로운 색채들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벨리니의 후기 걸작들을 가능케 해준 것은 유화기법의 유연성과 광택이었다. 예를 들어 <성 프란체스코의 법열, 1470-80>은 풍요로운 색채와 초자연적인 광선의 효과를 보여준다. 또한 이전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풍경과 인물의 결합은 이후 지오르지오네와 티치아노가 이루게 될 융합을 예견하고 있다. 그는 대단히 바쁜 공방의 우두머리였는데, 그의 공방에서는 친퀘첸토의 유명한 베네치아 거장인 지오르지오네와 티치아노를 배출했다.

지오르지오네(Giorgione, 1478?-1510)는 벨리니가 하지 못했던 일, 즉 풍경과 인물을 하나의 신비로운 전체로 통합시켰으며 인간과 자연사이에 새로운 조화를 성취하였다. 그는 진작으로 여겨지는 작품도 겨우 다섯 점 밖에 되지 않으며, 이들 그림들은 수수께끼와 같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의 확실한 진작인 <폭풍우, 1506>는 화면 전체에 스며있는 빛과 공기에 의해서 풍경과 인물이 하나의 전체로 융합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전과 달리 풍경은 그림의 진정한 주제가 되고 있다.

친퀘첸토의 베네치아는 호사스러움이 극에 달했지만 한편으론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미술은 여전히 활기를 띠어 16세기 중엽에 이르러는 회화의 주도권이 피렌체와 로마를 거쳐 베네치아로 넘겨졌고, 당시 베네치아 회화의 독보적 존재는 티치아노(Titian/Tiziano, 1485?-1576)였다. 그는 색채에 의해 입체감을 표현하는 베네치아 미술의 특징과 함께 바로크로 계승되는 역동성을 함께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 <페사로 마돈나, 1519-26>에서는 혁신적인 구도로 성모를 비대칭적으로 배치하였지만, 색채를 이용해 통일성을 회복하였다. <성모의 승천, 1516-18>에서는 다채로운 인물들의 역동적인 동세를 통한 극적인 율동감, 빛나는 색채 등이 나타나 바로크 미술을 예견하고 있다. 그는 또한 초상화로 가장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의 초상화는 후기로 갈수록 보다 대담하고 자유로운 양식으로 발전했다. <젊은 영국인, 1540년경>에서 보다시피 세밀한 입체감의 묘사는 눈에 띠지 않으나 엄숙하고 존엄한 모습을 한 초상화 그렸다.

cf)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년경> 관능적이고 세속적인 베니스 특유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며 촉각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유로파의 강탈, 1562> 스페인 펠리페 2세를 위해 제작한 7점의 신화화 중 하나로 직각 삼각형의 구도를 지니고 있으며 특히 공간과 대기에 대한 환성적인 묘사와 찬란한 색채감을 보여준다.

   

16세기 후반 베네치아 화파의 대가는 틴토레토(Tintoretto, 1518-94)였다. 그는 티치아노의 형태와 색채에 있어서의 단순한 아름다움을 거부했다. 그는 사람들이 극적인 긴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사물을 새로운 관점에서보고자 했으며, 과거의 전설과 신화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탐구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표현의 격렬함과 자유로움, '미완성인 채로 두는' 처리법이 특징이다. <성 마르코의 유해 발견, 1562년경>에서는 성 마르코의 유해를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로 옮겨왔던 이야기 중의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빛과 어둠, 원경과 근경, 조화가 결여된 몸짓은 극적인 긴장감을 유발한다.

틴토레토의 경쟁자였던 사람은 파올로 베로네제(Paolo Veronese, 1528~88)였다. 그는 틴토레토와 달리 티치아노의 초기 작품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베로네제는 감각의 기쁨과 베네치아 문화생활의 고상함을 찬양하는 풍요한 축제그림(pageant painting)들로 유명하다. 그는 위대한 초상화가이기도 했으며 마음이나 정신의 활동보다는 오히려 모델들의 풍만한 육체와 모피, 실크 등으로 감싸여 있는 귀족 신분의 물질적 화려함을 전달하였다. 그의 작품<레비가의 향연, 1573>에는 편안하고 충분히 알기 쉬운 장관 속에 풍부한 세부들을 조직해 낸 점이 그의 작품의 특징이자 업적이다.

   

베네치아 화파가 부각되었던 마지막 시기는 18세기였다. 지오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 1696~1770), 프란체스코 구아르디(Francesco Guardi, 1712-93)

국제적 명성을 지닌 뛰어난 화가들이 이 시기에 여러 명 배출되었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4

   

대지미술 Earth work <2009 후기 簡>

   

대지미술은 기하학적이고 구조적인 관심과는 대조를 이루지만 전통적인 방법과 형식을 거부하고자 하는 점에서는 개념미술, 미니멀과 공통된다. 대지미술은 풍경, 대지, 지구 그 자체를 강조하는 경향이다. 이들은 종종 미술관이나 화랑에서 전시할 수 없는 종류의 작품을 제작했는데,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미술 오브제나 작품을 만들지 않고 바위, 토지, 잔디, 눈과 같은 물질로 작업한다. 그들의 작품은 근본적으로 익명적이고 비영구적이다.

대지미술에서 가장 유명하고 두드러진 미술가인 크리스토(Christo)는 기념비적인 공공건물인 베른 미술관을 마치 거대한 소포처럼 플라스틱 막으로 포장한 포장 설치작업으로 국제적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는 북부 캘리포니아의 두 지방을 가로지르는 40킬로미터의 나일론 울타리<길게 뻗은 울타리, 1972-76>을 세웠고, 마천루를 포장하는가 하면, 오스트레일리아 해안의 100만 평방피트를 포장하였다. 그에게 있어 이러한 작품들의 포장을 세우는 기술, 주변 풍경과 주변사람들에게 끼친 충경, 환경적 사회적 영향과 같은 것들은 전체의 개념에서 중요한 요소들이다.

또한 전형적 지구미술가인 로버트 스미손(Robert Smithson)은 부패, 화석화에 반대되는 지칠 줄 모르는 자연의 무한한 풍요로움을 주제로 담을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하여, 자연 풍경을 원재료로 삼았다. <나선형의 둑, 1970>에서 불도저를 동원해 수십 톤의 흙을 옮겨놓는 거대한 작업을 지휘했다. 단순한 형태와 분명한 상징은 방대한 규모로 실현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같게 되었지만 스미손은 특히 변화라는 주제(이 방파제는 즉시 부식되기 시작했다)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4

   

라파엘 전파

Pre-Raphaelites <2001 후기 簡>

   

1848년경, 가브리엘 로제티를 필두로 젊은 아티스트들이 모여서 만든 화파이다. 그들은 르네상스의 라파엘의 회화적 혁신 이후, 아카데미 미술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타락했다고 보고, 라파엘이 만들어 놓은 세련되게 다듬어놓은 형식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동경한다는 의미로 라파엘 전파라고 이름 하였다. 라파엘은 1520년에 죽었기 때문에 1500년 이전의 초기 르네상스, 중세를 도덕적인 미술로 생각하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영국의 미술을 개혁하고자 했던 모임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 종교적인 동경, 현재에 대한 혐오는 낭만만주의적 성격을 띤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물질에 사람들이 집착하고 물질화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대의 사회를 혐오하였고, 당시 아카데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값싼 부르주아들의 취향이며, 이러한 것들은 너무 관습적이고 정형화되어 더 이상 아무 자극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물질 사회에서 도피하여 과거의 영광스러운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들의 작품은 센티멘털하고 도덕성을 중시하며, 상징적인 그들의 화풍은 확실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것이 또한 특징이다. 그들의 작품에는 모든 디테일에 상징이 들어나 굉장히 상징적이며, 그들은 세부를 성실히 묘사하는 것이 화가가 가질 수 있는 도적적인 자세라고 생각하여 모든 부분을 아주 세밀하고 정확하게 그린 것이 특징이다. 그들은 사실주의자들의 장르화도 그리지만 주로 추구했던 주제는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 영국 극작가들의 소설과 같은 전통적인 주제를 따르고 있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는 종교적 감성에서 시작하여 점점 개인적 상징, 탐미주의로 나가갔고 이 때문에 라파엘 전파와 갈라서게 되었다. 그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수태고지, 150>가 있다. 존 밀레는 그의 대표적 작품인 <요셉의 집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1850>에서 세부를 정확히 그리는 중세적 특징과 일상모습과 그 세부에 모든 종교적 상징을 부여하였다.

브라운은 공식적으로 라파엘 전파에 합류했던 사람은 아니나 주요멤버들이 그를 스승으로 여겼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영국이여 안녕, 1855>, <노동, 1855>이 있다.

헌트는 일관적으로 종교와 관련한 주제를 그렸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깨어나는 양심, 1852-54>, <고용된 양치기, 1852>가 있다.

사실상 이들은 당시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었고, 그렇게까지 성공한 운동을 하지는 못했다. 감상적이고 센티멘털한 느낌이 강하여 당대 사회와 많이 유리된 느낌이 있었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4

   

미술과 공예운동

미술과 공예운동의 성립배경과 주요 특징.<2002 전기 簡>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에 의한 변화와 근대화라는 것은 19세기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영국은 1851년 최초로 '만국박람회'를 개최했다. 만국박람회는 산업혁명에 의한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새로운 산업제품을 전시할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자국의 대외적 과시, 각국의 정치, 외교, 문화를 대변하는 장이 되었다. 당시 영국은 자신들이 자랑하던 섬유제품을 전시하여, 과시를 하려고 했었는데, 실제로 박람회에 출품한 섬유제품들은 디자인이 서툴렀다. 이는 기계에 의해 모든 것이 표준화되어 빠른 시간 내에 효과적으로 대량생산하는 방식으로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따라서 박람회가 끝난 다음에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점을 약점으로 생각하였다. 이를 주도했던 사람은 앨버트 공으로, 그는 미술과 문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디자인이야말로 경제를 살린다고 보았다.

이러한 배경으로 디자인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때에 나왔던 움직임의 하나가 미술과 공예운동이었다. 중심인물은 철학자이자 평론가였던 존 러스킨, 윌리엄 모리스였다. 이들은 도시가 엔진소리와 공장으로 가득 차있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였고, 산업제품을 굉장히 혐오하였다. 인간을 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다시 중세로 돌아가는 것이고, 수공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산업화에 대한 과격한 비판을 하게 된다.

모리스는 산업화에 밀려서 장인적인 솜씨와 수공이 파괴되고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수공, 중세의 장인체제를 통경하였다. 미술이란 것이 그 동안 대중과 멀어져서 그들과 유리된 존재였다고 생각하고, 예술가의 역할은 사람의 사회적, 문화적 환경을 바꾸어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건축, 실내장식, 벽지, 가구, 카펫, 책의 삽화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을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존 러스킨은 기본적으로 도덕주의자였는데 미술작품은 도덕적인 의지의 결과여야 하는데, 기계로 만든 산업제품은 도덕과 양심이 없기 때문에 혐오하였다. 그는 기계와 당대의 제도자체가 인간의 삶을 점점 더 추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였다.

1. 디자인이라는 것은 실용적이고, 사람들이 금방 사용할 수 있고, 그래서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수공예야 말로 대체무기라고 생각했다.

2. 건축가, 디자이너, 화가, 조각가가 평등한 관계를 위해 협동하는 Total design개념을 내세웠다.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토털 디자인으로 형태는 단순하고 견고한 형태, 재료도 굉장히 기본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자연에 영감을 받은 디자인을 많이 했다. 윌리엄 모리스의 디자인은 꽃과 새 등 자연에서 모티프를 따서 정교하고 풍요로운 디자인을 많이 하였다. 이렇듯 미술과 공예운동은 디자인사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내세웠던 수공 디자인 제품들은 너무 비싸서 일반대중들은 도무지 사고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아르누보 운동에서는 기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운동은 이후 아르누보 운동을 비롯하여 회화 뿐 아니라 건축, 가구 등 이른바 토탈 디자인에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5

   

바우하우스

바우하우스는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에 의해서 1919년에 바이마르에 설립되었다. 1919년 창립 선언문의 서두에서는 "시각미술이라는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작품행위의 최종목적은 완전한 건축이다. 미술은 결코 전문 직업이 아니다. 미술가와 장인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고 주장하였다. 그들에게 영감을 준 것은 반 데 벨데의 예술에 있어서의 종합화와 순수한 형식의 주장,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과 공예운동의 이론이었다. 또한 중세 시대의 길드제도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바우하우스에 영향을 준 선각자들과는 달리 바우하우스는 기계문명 시대의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열렬히 환영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구조적으로, 이론적으로, 미학적으로 충분히 이용하였다.

바우하우스는 6개월 기초과정부터 시작하며, 각 과정은 기본이론을 가르치는 담임과 근대적 의미의 장인의 지도하에 이루어졌다. 학생들은 중세 시대의 도제와 거의 다름없었고, 이론과 실습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었다. 바우하우스에서 가르쳤던 칸딘스키의 『점, 선, 면』등과 같던 교재는 전 세계 미술 교재의 고전이 되었다. 교육과정은 계속해서 바뀌고 보강되어졌다. 시행착오가 거듭되던 초기에는 이론 쪽으로는 형식론, 재료학, 과학 및 수공예적이고 기숙적인 숙련에 치중되었다. 그러나 1923년부터 모든 예술적인 원리들을 하나로 통일시켜주는 분야로서의 건축적인 측면이 두드러지게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바우하우스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분야는 가구, 도자기, 직물 등의 건축과 공업 및 실내디자인 분야였다. 단순하고 기능적인 디자인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이 수립됨과 아울려, 새로운 기술과 재료를 이용하기 시작하였으며 플라스틱과 같은 대량 생산방식도 이용하였다.

그로피우스의 천재성 가운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각국에서 뛰어난 교수진을 불러 모아 강단에 서게 한 점이었다. 잇텐, 파이닝거, 칸딘스키, 파울 클레 등의 뛰어난 교수진에도 불구하고, 바우하우스는 학생 중에서 이렇다 할 화가나 조각가를 배출하지 못했고, 자유롭게 회화나 조각을 제작할 기회마저 줄어들어갔다. 그로피우스와 모흘리-나기는 1928년에 바우하우스를 떠난 후 새로운 책임자의 지도아래 보다 기능주의적인 성격으로 변모하였다. 바우하우스는 나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1933년 강제 폐쇄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가 이루어낸 디자인론, 미술과 산업 사이의 관계, 형식론 및 교수 방법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바우하우스에 몸 담았던 일원들이 나치의 압제를 피해 외국으로 뿔뿔이 흩어짐에 따라 서방세계, 특히 미국에 널리 전파되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5

   

베르니니: 성 테레사의 무아지경

17세기 이탈리아 조각가 베르니니의 <성 테레사의 무아지경>에 나타나는 바로크 양식의 특성에 대해 논하시오.<2000>

   

<성 테레사의 法悅>은 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의 코르나로 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해 베르니니가 만든 제단이다. 이 예배당은 베네치아 출신의 교황 코르나로의 주문에 의해 1645년부터 1652년 까지 7년간의 노력 끝에 완성되었다. <성 테레사의 法悅>은 베르니니가 직접 제작한 것으로 비범한 재능을 지닌 그의 다양한 능력이 완벽하게 구현되었다. 이 제단은 스페인의 성 테레사에게 봉헌된 것이다.

성 테레사는 16세기의 수녀로 그녀가 본 신비스러운 환영을 글로 쓴 유명한 책을 남겼다. 그 책에서 그녀는 천상의 환희를 느낀 순간을 이야기하면서 주님의 한 천사가 황금으로 된 뜨거운 화살로 자기 심장을 꿰뚫자 아픔과 함께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로 충만됨을 느꼈다고 한다. 베르니니가 표현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순간의 광경이다. 성녀는 구름을 타고 황금빛 햇살의 형태로 위로부터 쏟아지는 빛줄기를 향해서 하늘로 올라간다. 천사는 공손하게 그녀에게 다가서고 있으며 성녀는 기절한 채 황홀감 속에 빠져 있다. 배치된 방법이 교묘해서 이들은 제단이 제공하는 틀 속에 아무런 받침도 없이 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위쪽의 보이지 않는 창으로부터 광선을 받고 있는 듯이 보인다.

바로크 양식의 최고의 걸작으로 인정받는 이 작품은 어떤 작품보다도 바로크 양식의 특성을 잘 대변하고 있다. 바로크 미술은 고대 미술의 권위를 인정하지만, 보다 많은 다양성과 인상적인 효과를 살리기 위해 보다 극적인 효과를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의 모든 요소들은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외적인 수단을 통해 神性을 드러내려는 베르니니 예술의 경향이자 바로크 양식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반쯤 감긴 눈꺼풀 밑에 초점을 잃은 채 머리는 뒤로 젖혀지고 입은 반쯤 열린 황홀경에 빠진 인물의 표현은 그녀의 고통스런 환희의 강렬함을 똑같이 경험하는 옷주름의 찬란한 파동에 의해 강조되고 있다. 특히, 베르니니의 옷주름의 처리 방법은 아주 새로운 것이다. 즉, 고전적인 방식인 품위 있는 옷주름으로 흘러내리게 하지 않고 흥분과 움직임의 효과를 보다 강조하기 위해서 옷자락이 몸부림을 치듯 펄펄 날리게 표현했다.

또한, 조각과 회화가 서로 공존의 상태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조각과 회화사이의 선명한 구별을 하지 못하는 점 또한 바로크 미술의 특징이다. 조각과 회화는 건축과 결합해서 무대와 같은 복합적인 환각을 형성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그것이 놓여진 장소까지 포함해서 고려해야만 올바른 감상을 할 수 있다.

<성 테레사의 법열>을 포함한 코르나로 예배당의 다양한 요소들은 훌륭한 조화를 이루며 결합되어 조각가로서의 베르니니의 생애에 최상의 종합체가 되었으며 한 세기 반 동안 세계적인 경탄을 자아냈다. 그 후로 엄격한 신고전주의의 교리 때문에 이 작품은 바로크적인 과장된 표현의 가장 터무니없는 예로서 악명 높고 의심스런 작품이 되었다가 20세기 인들의 안목에 맞추어 재평가되고 당당하게 복권되었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5

   

샤르트르 성당의 고딕적 특징 <2009년 후기 簡>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9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는 샤르트르 대성당은 11294년에 있었던 화재 이후 새로 재건축되었다. 이 성당은 노트르담 성당의 5랑식-이중복도구조를 그대로 이어받아 전체규모를 조금 더 확대시킨 모습을 하고 있다. 샤르트르 성당은 무엇보다 전성기 고딕건축의 문을 연 건축물로써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뒤를 이어 13세기에 등장한 고딕양식은 세계 건축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높이 솟구친 내부를 가진 혁신적인 구조물을 만들어 내였다. 이러한 건축물을 건설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늑골궁륭(Libbed-vault)'과 '공중부벽(Flying-buttress)', 그리고 '첨두아치(Pointed-arch)'의 발명 덕분이었다. 이 덕분에 건축가들은 작은 창문이 달린 육중한 벽을 가진 로마네스크의 '전투적 교회'와는 달리, 커다란 스테인드 글라스를 설치한 창을 통해 밝은 빛이 들어오게 해 내부를 환하게 밝힐 수 있었고, 신랑의 높이를 더욱 높여 위로 상승하려는 수직성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전성기 고딕의 문을 연 건축물로써 샤르트르가 갖는 중요한 의미는 천장이 직사각형 4분 볼트로 처리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초기와 전성기 고딕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기존 정사각형 6분 볼트보다 직사각형 4분 볼트는 기둥간 거리를 넓힐 수 있는 성질을 지녔다. 이는 창문을 설치할 수 있는 면이 더욱 확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빛이 더욱 많이 들어와 실내를 더욱 넓어 보이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장미창문이 기존 신랑의 정면의 중앙 뿐 아니라 신랑의 측면에도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샤르트르 성당은 고딕양식의 건축 중에 스테인드 글라스를 가장 많이 사용하였고, 스테인드 글라스의 설치로 화려함과 아름다움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천상의 예루살렘의 광경이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고딕양식은 건축물의 구조 뿐 아니라 성당 외부 벽에 있는 조각들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샤르트르 성당의 대표적인 고딕 조각상은 서쪽현관과 북쪽현관에 있다. 서쪽 현관의 문설주에 부착된 조상들은 좁은 기둥의 몸체에 맞추기 위해 길게 늘어나 있으며 옷의 선도 몸체와 마찬가지로 가늘고 직선적이어서 사실적인 흔적은 거의 없다. 이에 반해 북쪽 현관에 있는 성상들은 하나하나 살아있는 듯이 묘사되어 있다. 왼쪽부터 멜기세덱, 아브라함, 이삭, 모세 등을 묘사하고 있는데, 조각상들은 성인들의 개별적인 특징을 분명하게 표시하고 있으며, 원주로부터 강하게 돌출되어 있고, 신체의 구조가 옷주름의 아래로 보이는 사실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결국 이 두 고딕조각의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고딕양식이 하나의 형상을 더욱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점진적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형상을 실감나게 묘사하기 위해 오래도록 잊혀져왔던 고전예술의 전통을 따르게 된 것이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5

   

서양 외광풍경화의 전통: 인상주의까지의 전개과정

서양 풍경화의 변천과 전개 과정을 서술하시오.< 2006 후기>

외광파(plein air painting) <2005 전기 簡>

   

서양의 풍경화는 근본적으로 관념적인 자연의 모습이며 실제의 경관을 그린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1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보기 어려웠으며, 대부분의 풍경화는 스튜디오에서 창작되었다. 이 전통은 19세기 후반에 인상주의가 대두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자연에서의 실경을 담은 외광풍경화는 인상주의에서 절정을 이루고 이후 자연의 외적인 형상에 만족하지 않고 내적인 면을 파고들어 추상화 되었다.

풍경을 그린 그림은 고대 이집트나 미노스의 벽화에서부터 그리스의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시대에 그려지지만 단순히 인물의 배경으로, 도식적인 모습을 띤다. 기독교사상이 유럽사회를 지배한 중시에는 정신세계가 중요시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자연이란 미지의 세계이고 두려운 대상이었고, 따라서 회화에서 풍경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고딕 후기에 들어서면 자연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하여 풍경화는 주제 자체가 풍경을 요구하는 작품에서 장식적이고 도식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며, 꽃이나 나무들이 종교적인 상징성을 갖는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중세 후기의 랭부르 형제의 <베리 공의 호화로운 기도서, 1409-15>는 중세의 상징성에서 탈피해 계절에 따라 변화는 경치를 사실적으로 관찰하고 그렸다. 채색필사본에 부분적으로 그려진 풍경화인 얀 반 아이크의<예수의 세례, 15초>는 플랑드르 특유의 사실적 풍경화를 시도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면 과학이 발달로 자연에 대한 호기심이 유발되어 자연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옮기려 하였다. 고전주의 전통이 강했던 피렌체의 회화는 이상화된 상상의 풍경을 추구하였으며, 이와는 달리 베네치아에서는 벨리니, 지오르지오네, 티치아노를 중심으로 목가적이며 시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편안하고 무르익은 풍경화가 발달한다. 북유럽의 르네상스회화는 극히 세부적 묘사에 치중하는 사실주의 경향을 보여 왔으며, 자연과 좀 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특징을 보였다. 콘라드 비츠의 <기적적인 물고기의 낚음, 1444>은 지형적인 사실성을 보여주는 최초의 풍경화 이다. 15세기 말 알브레히트 뒤러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여행한 기억을 수채화로 생생히 묘사하였다. <숲속의 연못> 16세기 말에는 가톨릭 세력의 감소로 종교화가 줄어들고 회화의 주제가 세속화 되었다. 브뤼겔은 계절에 따른 인간의 활동을 다루어 자연에 좀더 밀착되는 자연관은 엿보게 한다. <숲속의 사냥꾼, 1565>

17세기에 풍경화는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하게 된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는 고전주의가 정착되고 상상적이며 이상화된 풍경화가 계승되면서 특색 있는 화풍이 형성되었다. 고전적 풍경화의 전형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이탈리아의 안니발레 카라치의 고전성과 베네치아 화파의 시적인 분위기를 살리면서 새로운 풍경화의 방향을 제시한 회가는 니콜라 푸생이었다. 그의 풍경화는 엄격하고 정확하여 이전의 전통보다 더 고전적 풍경화를 창조했다. <포키온의 매장, 1648> 푸생과 같은 시기 로마에 거주하던 또 한명의 프랑스 화가 클로드 로랭은 푸생과 달리 야외에서 자연의 여러 변화를 관찰해 그려, 신선한 광선으로 공간을 깊숙하고 부드럽게 감싸면서 북유럽의 사실주의와 조화되고 있다. 그의 풍경은 17세기 네널란드에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림과 같은(picturesque)'이란 단어로 수식되는 풍경화의 대명사가 되어, 18-19세기 영국 풍경화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실비아의 사슴을 죽이는 아스카니우스, 1682> 프랑스에서는 루벤스가 과장되고 외향적인 전형적 바로크 양식을 보여주는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실경을 바탕으로 풍경화를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당시의 두터운 중산계층은 미술품 구입에 열성적이었고, 그들은 고전적 그림보다 자신의 실내에 걸어놓고 즐길 수 있는 조그마한 정물화, 초상화, 풍경화를 선호하였다. 따라서 야콥 반 로이스탈, 얀 반 호이엔 등과 같은 많은 풍경화가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시각적인 관찰 및 경험을 기초로 사실에 충실하고 미화하지 않은 풍경화를 그렸으며, 화면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는 하늘을 강조하고 시점을 낮게 잡아 지평선을 강조하였다. 그들에게 풍경화는 실제 풍경에 근접한 평범한 모습이라는 사고에서 이들은 로랭과는 달랐다. 야콥 반 로이스달<오버빈의 모래언덕에서 본 하를렘의 정경, 1670?>

18세기 이탈리아에는 유럽 각국에서 그랜드 투어 붐이 일어나면서 '베두테(vedute)'라는 유명 도시 및 유적을 사실 그대로 세밀하게 그린 풍경화가 탄생하였고, 폼베이와 헤라클레니움의 발굴은 고전주의를 부활시켰다. 로마에는 프랑스 아카데미 분원이 설치되었고 로마를 무대로 하여 화가들 사이에 외광스케치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자연에 관심을 보이는 낭만주의가 회화에도 파급되어, 18세기 중반부터 풍경화 붐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수채화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거듭해 19세기 중반에는 전성기를 맞게 된다. 그랜드 투어의 붐으로 여행에 관심이 국내여행의 붐을 일으켰고, 가보지 못한 지방의 경치를 그림으로 감상하는 '그림여행(voyage pittoresque)'종류의 책과 풍경화가 팔리게 되고 수채화가 생생한 하나의 작품으로 제작되었다. 리처드 윌슨은 로랭의 영향으로 광선이 스며드는 전원풍의 그림을 그렸고, 토마스 게인즈버러도 초기에는 네덜란드의 사실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풍경을 그렸으나, 후기에는 상상적이고 낭만적인 풍경으로 전환하게 된다.

19세기 초반에 영국의 풍경화는 이들에 의해 확고한 전통을 수립하게 되면서 자연서 느끼는 비장감, 숭고미 등을 보여주는 종류와, 그림과도 같은 아름답고 감상적인 종류의 두가지 새로운 미학을 형성하게 된다. 수채화가 일반에까지 인기를 끌게 되고 회화의 한 분류로 인정되면서 존 컨스터블, 윌리엄 터너와 같이 우수한, 풍경만을 전문으로 그리는 화가를 배출하게 되었다. 이들은 프랑스 화가들과 자주 교류했고, 자연과의 좀더 긴밀하고 직접적인 접촉을 권장하면서 네덜란드의 사실적인 풍경화 지식 및 수채화 기법을 가르쳐 주게 된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교량 역할을 한 화가는 보닝턴이었는데, 자연의 변화하는 순간적인 인상을 수채화로 화면에 빨리 기록하는 방법을 소개해 주었다. 또한 존 컨스터블은 아카데믹 교육을 받은 젊은 프랑스 화가들에게 붓질의 자유스러움과 표면의 생동감이, 안정감 있는 회화 구성 체계와 동시에 복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해주었고, 자연에 나가 직접 유화로 스케치하는 방법도 흥미를 끌었다.

프랑스에서 외광풍경화의 전통은 1830년대 바르비종화파에 의해 정착되었다. 여기서 그림을 그리던 화가는 카미유 코로, 테오도르 루소, 장-프랑수아 밀레, 도비니 등이 있었다. 이들은 아직까지도 스튜디오에 돌아와서 작품을 완성하는 태도에서는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들 작품에서부터 이전과 같은 '완성된 작품'과 '스케치와의 경계선이 모호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바르비종파의 도비니는 자연주의와 인상주의를 연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스케치뿐 아니라 하나의 작품과정 전체를 야외에서 완성하였을 뿐 아니라, 수면에서 교차하는 빛을 잡기 위해 강에 띄운 배 위에서 제작하기도 하였는데, 후기의 테크닉과 정신은 초기 인상주의자들과 상당히 가까웠다.

거칠고 깎아지른 절벽과 훌륭한 구름의 형태, 바다를 찾아 노르망디 해안 일대에 몰려든 생-시메옹 화파가 있다. 이는 위에, 이자베이, 용킨드, 외젠 부뎅으로 이들은 인상주의의 선구자들로 불리운다. 용킨트는 같은 장소에서 순간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분위기 들을 포착하여 인상파들처럼 생생하게 광선과 대기의 순간적인 효과를 화면에 기록하고 있다. 외광풍경화의 전통이 완전하게 자리 잡은 것은 부댕에 의해서이다. 그의 가벼운 소품들, 특히 그의 해변가 그림들은 바르비종의 화풍을 따른 것이었는데 거기에 색채의 생동감이 더해져 인상주의적 효과를 낳고 있다. 용킨트, 부댕, 코로, 루소 등이 닦아 놓은 외광풍경화의 실습은 곧이어 모네, 르느와르, 피사로 등 인상파 화가들에 의해 절정에 이른다. 이들은 처음으로 야외에 이젤을 놓고 그 자리에서 완성하였다. 그러나 인상주의가 끝나감과 동시에 이후의 화가들은 자연에 대해 느끼는 주관적인 감정표현에 주력하게 되며, 이것은 19세기 말 이후 미술의 주관화추상화 그리고 표현주의적인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게 하는 주원인이 된다. 따라서 외광풍경화는 하나의 미술전통속에 자리를 잡게 되며 그 위에 뻗어간 20세기 새로운 미술은 내면풍경화로서 또 다른 전개를 하게 되는 것이다. 부댕,<트루빌의 비치, 1868>

   

외광파

외광파(plein air painting) <2005 전기 簡>

외광파는 특정한 유파를 가리키는 경우엔 인상주의가 이에 해당되나, 보다 폭넓은 개념으로서, 인상파의 수법에 의하지 않더라도 실외의 공기와 자연 광선에 의한 회화적 효과를 표현하기 위하여 야외에서 그리는 화가들을 가리킨다. 이 운동이 일어난 것은 19세기 후반으로 그때까지 유럽의 화가들은 대부분 광선이 적은 아틀리에에서 그렸고, 야외에서 모티브를 취재하더라도 아틀리에에서 마지막으로 손질을 가해 완성하는 것이 통례였다. 색채는 다갈색의 나뭇가지, 녹색의 나뭇잎 등 이렇게 고정된 색채개념에 지배되어 어두운 화면을 지니며, 야외광선에 비친 변화하는 색채의 아름다움을 포착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한 대상의 고유색을 신봉하는 고정관념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는데 19세기 사질주의 사조가 일어나면서 자연관찰이 정밀하고도 객관적이 된 결과 야외의 밝은 빛의 효과를 의식하게 되니 이것을 실제로 나타내기 위해서 직접 야외에서 제작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19세기의 영국 화가 컨스터블과 터너는 아틀리에에서 야외로 나와 자연광선에 의한 풍경의 변화하는 양태를 밝은 색을 써서 직접 그리기 시작하여 외광파의 선구자가 되었고, 이는 아직까지 역사화와 같은 관학적인 그림이 발달했던 프랑스의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9세기 중기 마키아이오리파의 화가들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인상주의 화가들에 선행하여 바르비종파의 화가들과 노르망디 해안에 모인 생-시메옹 화파들이 있었고, 이들은 모두 인상주의의 선구자로서 이후 인상주의의 태동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특히 바르비종파의 도비니는 자연주의와 인상주의를 연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후기의 테크닉과 정신은 초기 인상주의자들과 상당히 가까웠다. 그는 스케치뿐 아니라 하나의 작품과정 전체를 야외에서 완성하였을 뿐 아니라, 수면에서 교차하는 빛을 잡기 위해 강에 띄운 배 위에서 제작했는데, 이러한 제작 태도가 후에 마네, 피사로, 시슬리, 모네 등 인상주의의 화가들에 의해 채용되었다. 또한 생-시메옹 화파 중의 외젠 부댕과 용킨드는 인상주의의 주도적인 선구자가 되었는데, 이들의 가벼운 소품들 특히 해변 가 그림들은 바르비종 화풍을 따랐으나, 거기에 색채의 생동감이 더해져 인상주의적 효과를 낳고 있다. 그리고 색채분해와 여러 가지 색채의 병치(竝置)에 의해 태양빛에 비친 색채현상을 묘사하려고 한 마네, 훗날 그의 영향을 받고 이 파 특유의 화법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 모네, 피사로, 시슬레 등이 있으며 그들에 의해 정점에 달하였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5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운동 <1999 전기 2006전기 簡>

서양미술사에서 '아방가르드'미술 운동을 하나 예로 들어 설명하고 '아방가르드'의 개념을 정의할 것.<2005 전기>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 사회는 봉건 제국에서 '민중을 위한 공화국'이 되었다. 그 이전의 러시아는 수세기 동안 문화적 영감을 유럽에서 받아왔다. 러시아 미술에 남긴 가장 큰 업적은 (비잔틴 전통에 뿌리를 둔) 성상화(Icon)였다. 하지만 19세기에는 주로 사실주의, 상징주의, 아르누보같은 서구의 양식을 기초로 하면서도 러시아의 특성을 살린 다양한 작품으이 문화적 중심지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혁명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결성된 '예술세계'라는 그룹은 농민들의 토속미술 전통에 아주 가까운 경향을 띠고 있었다. 점차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의 실험적 작품들이 모스크바로 들어왔고, 1908년 전시회에는 후기인상주의 뿐만 아니라 나비파와 야수파까지 포함되었다.

혁명적인 러시아 추상 운동을 이끌었던 두 선구자는 생생하고 강렬한 선과 과감하고 표현적인 평면적 패턴들을 사용했던 나비파와 야수파의 기법에 흥미를 가지고, 러시아 민속미술의 기법과 작품세계에 이를 접합시켰단 바로 미카일 라리오노프(Mikhail Larionov)와 그의 파트너 나탈리아 곤차로바(Natalia Goncharova)였다. 이들이 루브키(lubki: 대중적 목판화)와 그라피티에서 영감을 받아 이룩한 직접적이고 거친 표현은 독일 표현주의 운동조차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들은 1911년에서 17년 사이에 러시아에서 급속히 진행됐던 구상에서 비구상으로의 발전 중 한 단계를 말하는 것으로 모스크바를 유럽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지로 부상시켜 주었다.

이후 모스크바의 추상운동은 말레비치와 타틀린에 의해 계속되었다. 레닌은 아방가르드적인 예술사조에 관대했다. 그는 아방가르드 미술을 통해 새로운 시각적 매체를 개발함으로써 거의가 문맹인 대중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전파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스탈린이 이러한 예술을 금지시키기 전까지, 이 모험심 넘치는 화가들은 미술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혁명을 이끄는 아방가르드 세력이었다. 카시미르 말레비치(Kasimir Malevich)는 그의 작품에서 시간이 갈수록 기하학적 경향이 매우 급속히 증가되어 1915년에는 최초로 기하학적 요소들로만 구성된 절대주의 작품을 전시하였다. 그의 기하학적 형태들은 복합했는데 그 이후 복잡성으로부터 극단적인 단순성과 순수함으로 나아가, 1917년에서 18년 사이에는 순수한 본질만 남는 상태까지 진전시킨 <흰색 위의 흰색, 1918>역작을 제작하였다. 그가 이룬 비대상으로의 발전은 몬드리안과는 달리 실제 자연의 형태로부터 추상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관념적인 기초로부터 추출된 것이었다. 이는 전통적인 회화에서 보이는 회화와 무관한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회화를 최소화 시켜 회화의 가장 궁극적인 본질로 나아간 것이다.

블라디미르 타틀린(Vladimir Tatlin)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에 제일 먼저 동참했으나 절대주의를 버리고 보다 엄격한 구성주의적 개념을 추구하게 되었다. 구성주의는 종합적 입체주의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는 파리로 가서 피카소의 3차원적 구조에 적용된 콜라주 기법의 실험을 보게 된다. 실생활에 사용되는 매체로 그 특성에 잘 맞는 형태를 만들어서 공간속에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조각이었다. 그는 러시아로 돌아와서 전통적 조각의 틀이나 대좌의 개념을 내던진 부조 구성물을 만들게 되는데, 매체자체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제작과정이 쉽게 유추 가능한 그의 작품은 러시아 구성주의를 잘 나타내준다. 그의 작품인 <제3 인터네셔널 기념물>은 모스크바에 한가운데 세워질 예정이었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유리와 철골로 된 이 개방된 구조물은 인류 사회가 점진적으로 상승하면서 진보하고 있음을 연속적인 나선형을 통해 상징화하고 있다. 1920년 이후 그의 구성주의가 실생활을 위한 사회주의적 디자인을 하는 생산주의와 합쳐지게 되자, 미술은 유물론적으고 기능적인 목적을 위하여 생활에 적용되었고,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과학기술의 진보에 의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의 꿈은 깨지고 말았다.

   

아방가르드

   

아방가르드는 전위, 선두, 선구 등의 뜻으로 프랑스의 군사 용어인 전위(부대의 전초로서 선발된 소수 정예부대)에서 나온 말이다. 정치적 의미로 오늘날에는 좌익과 같은 말로 특히 예술상으로는 인습적인 권위와 전통에 대한 반항, 혁명적인 예술 정신의 기치를 내걸고 행동하는 예술 운동을 말한다. 문화적인 혁신자들의 어떤 신조를 나타내기 위한 특정의 주의나 형식을 가리키는 용어라기보다는 신시대의 급진적인 예술 정신 전반에 걸쳐서 사용되는 말이지만 특히 제 1차 세계대전, 후의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를 중심으로 한 조형 활동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이들 활동의 배후에는 기계 문명의 발달과 무의식 세계의 규명, 원시 예술의 발굴, 사회의식의 확대 등 신시대적인 여러 가지 요인이 내포되어 있다. 또한 이 말은 반자연주의라는 점에서 동시대의 문학, 연극, 영화 등의 분야에 있어서도 그 실험적, 혁명적인 행위에 대해서 쓰여 진다.

칸딘스키는 그의 저서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에서 미술가들은 좀 더 위대한 정신성을 향해 인류를 고양시키는 삼각형의 최고 정점에 있다고 하였고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아방가르드 미술을 대중문화와는 거리가 먼 필연적으로 엘리트주의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몇몇 저술가들은 단지 미술의 전통적인 형식뿐만 아니라 미술이 존재하는 제도적 상황에도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현대 미술에만 이 용어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5

   

아카데미의 성립과 발전

19세기 프랑스 미술의 아카데미즘 또는 아카데미즘의 역사적 기원과 성격에 대해서 논하시오.<1999>

고대 아테네 플라톤의 Academia에서부터 시작된 이 의미는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신플라톤주의가 유행하면서 철학이나 문학 모임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미술을 인문학의 영역으로 정당화시키려는 알베르티나 레오나르도의 미술이론은 16세기 후반기에 본격적인 미술 아카데미의 시작을 알렸고, 이는 지오르지오 바자리(Giorgio Vasari, 1511-74)와 토스카나의 대공 코지모 데 메디치(Cosimo de'Medici)가 이미 존재하던 콩파니아 디 루카(Compania di Luca)를 개혁해 설립한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Academia del Disegno)라고 할 수 있다. Disegno 라는 용어는 그대로 번역하면 디자인(design)이지만 여기서는 회화, 조각, 건축을 이루는 구상, 드로잉, 창조력 등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단어로 이해해야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철저한 이론 교육에 중점을 두었던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의 교육과정은 국가적인 후원을 업고 미술가들이 장인의 위치에서 벗어나 전문인으로서 자신들의 분야를 관장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즉, 아카데미아 회원이라는 것은 미술가들에게 사회적 신분상승을 의미하는 것으로 더 이상 주문을 받아 작업을 하는 장인이 아니라 지적인 진실을 추구하는 자유인으로서의 입지를 확인시켜주는 하나의 증거였다.

이후 로마, 파리, 런던 등지에도 미술 아카데미가 설립되는데 특히 프랑스에서는 1648년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Acade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가 설립됨으로써 최고의 권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는 왕실의 직속기관이었으며 원장은 왕에게 복속되어 있었다. 그림의 주문과 전시는 아카데미가 관정하였고 당시 가장 강력한 주문자였던 왕과 귀족의 주문을 받기 위해선 화가로서 아카데미의 멤버가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해졌다. 당시 가장 중요한 미술전시회는 salon展으로 2년에 한번 루브르에서 열렸다. 당시 상류층 지식인들은 살롱전의 작품에 대해 비평문을 쓰고 팜플렛으로 발간하여 여론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살롱의 영향력은 상상이상으로 강력하였다.

이 아카데미에서는 르네상스시기부터 이어져 온 전통인 기하학과 비례에 의한 명확한 공간을 강조하였고 미술의 장르들을 위계질서로 나누어 도덕적인 교훈을 줄 수 있는 역사화를 가장 고상한 주제로 여기는 교육을 지속해 나아갔다. 그러나 길드의 규제로부터 미술가들을 자유롭게 하려는 이탈리아의 아카데미와는 달리 프랑스의 아카데미는 루이 14세와 재상 콜베르의 주도 下에 절대국가의 중앙중심주의와 연결되어 문화를 통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프랑스 아카데미의 이상적인 양식은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를 기본으로 하였다. Nicolas Poussin의 양식은 로얄 아카데미의 모본으로 여겨졌고 후에 Ingres를 아카데미양식의 정점으로 보아, 학생들은 모두 이 양식으로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 점차 아카데미는 획일화된 예술, 공식화된 미술이라고 인식되었고 아카데미 미술가들은 사회적 지위와 부를 얻은 대신 독립성과 창의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프랑스의 아카데미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로 바뀌었고 아카데미의 아성은 흔들리게 되었다. 회화, 조각, 건축과 같은 순수미술 중심의 아카데미는 그 후 수공예, 응용미술이 다시 미술의 중심으로 들어오면서 과거와 같은 교육을 지속시킬 수 있는 의미를 잃어버렸다. 19세기 중반 이후 미술후원자들이 국가, 교회 중심에서 개인이나 화랑 등으로 바뀌면서 미술작품의 유통은 자유경제체제로 바뀌었다. 이제 화가들은 아카데믹한 교육에 반발하면서 다른 화가들과 구별되는 독창적인 양식을 추구하게 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아카데미, 아카데미시즘은 고루하거나 보수적 양식의 부정적인 의미로 인식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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