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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른사람 외에는 무조건 지각. - 부른게 우선

명단에 없는 사람 - 이것도 불렀을때 추가하고, 없으면 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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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끝나고 3대 챙길 것. 출석부 / USB 1/ USB 2/ 리모콘

   

   

지난시간 간다라- 양식진전. 현재 불상에서 보이는 모든 특징이 갖추어지는 것이 3세기 중반이다.

   

<<마투라-굽타 9월 26일.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1년 9월 26일 월요일 오전 9:08

   

불상의 최초는 서기 1세기. 불타 출현 후 600년 후에 나타남. 불상출현을 막는 전통이 있어왔다.

헬레니즘 이후 상호표현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해불가로 불상 출현.

이념적으로는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불상이 탄생.

이념이 뿌리라면 미술은 꽃이다. 대승이라는 새로운 이념이 출현했으므로 그것에 뿌리해서 불상이 출현.

간다라는 북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불상의 발전을 절정에 이르게 한 쿠샨왕국 - 페샤와르.

그래서 이런 일들이 인더스강 중.상류 지역에서 힌두쿠시산맥을 바로 넘어 일어난 일.

실제로 불타의 출현은 갠지스강 중하류. 주 활동지역도 그지역 마가다 왕국.

그래서 인간 석가모니부처님은 네팔에서 났다고 하지만 실제 불교를 일으킨 곳은 그 지역.

퍼지는 건 아쇼카왕때임. BC226년 즉위. 서기전3세기에 활동.

석가모니의 생존 시기는 BC623년. BC554년 사망. 서력 기원 전후로. 불상(헬레니즘)

   

양식파탄이 일어나는 시기가 불상 일어난지 3세기만에 . 쿠샨제국의 멸망도 그쯤. 250년이면 노쇠하여 해체될 기운이 나타난다. 그 와중에 제국이 해체의 길로 나아간다.

조선도 멸망시 직접적 동인은 일제라지만, 노쇠하여 쇠망할 기운이 있었다. 500년.

임진란때는 새 기운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망하지 않은 것.

쿠샨제국 역시 건국후 250년정도니.BC57카니슈카가 왕국세움.

파르티아 사포르1세의 침입을 막다가 제국 멸망.

이미 망하게 된 상태에서 쳐들어오니 해체된 것. -> 힌두쿠시 산맥 너머는 다 잃고, 갠지스강 유역의 중북인도는 쿠샨제국에게 식민통치 당하고 있던 그지역은 독립을 되찾게 됨.

그럴때 쿠샨제국이 중북인도지역을 완전점령은 카니슈카 2세 AD128등극 23년 통치. 152년까지가 최전성기.

이시대의 미술 - 계주가 살아있고 끈만 남아있을 때 (신비화가 진행되나가는 그런 시기)

이때 중북인도가 완전 쿠샨제국 영토로 편입이 된 그 시대이다.

그런데 중북인도 지역에서 가장 서북쪽이 (갠지스 서쪽 지류 상류근처) 마투라 라는 지역이 있다.

간다라 마투라는 쌍벽을 이루는 지역. 마투라 지역에서 간다라 불상과는 조형적 연계성 없이 독자적으로 불상을 출현시킨다. 그런데 간다라는 그리스적 조형의식에서 사실적 표현으로, 의습에 약간의 과장은 있으나 육신은 전체적으로 사실적 표현, 그리스 신상조각과 일맥상통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아쇼카왕 석주를 보면 페르시아 기법이라지만 인도적 과장된 느낌이 많았던 것 알 수 있다.

순 인도적조형기반에서 불상을 탄생시킨 게 마투라. 이때문에 간다라 불상 최초 출현 후 인도 영향을 끼쳐서 마투라 불상을 일으켰다 서구 학자들이 주장하는데, 그들의 미술사 연구는 인도 지배가 명분 있다는 얘길 하려고 그리스문화로 개화하기 시작했다는 주장 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거의 같은 시기에 마투라에서도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제3자인 우리 입장에서는, 어떤 것이 더 먼저라기 보다는 대승사상이라는 공통 이념을 기반으로 두 지역에서 같이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선후관계를 꼭 정하자면 쿠샨제국의 중심인 서북인도가 그 제국의 주도이념으로 일어난 것이니 거기에서 일어났다고 볼 수도 있다. 상업세력을 이끄는 이념으로 출현한 불교는 상업지역으로 강하게 침투했을 것이다.

서북인도로 가는 교통의 요지인 마투라는, 서쪽 캄베이만, 남쪽으로는 중인도로 가니까, 서인도양과 중인도를 이어주는 곳이니 상업세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일찍부터. 그래서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전에 대중부(상좌부가 전통 고수) 불교가, 결국 세력해서 대승불교로 성장하였다. 개혁성향이 강한 종파가 거기로 갔다. 부가 축적되어,

미술이란 건전한 뿌리와 부의 축적이 찬란한 꽃이 되는 것. 마투라에서도 재빨리 대승 이념을 받아들여 불상을 만들었다는 게 최완수 선생님 설.

일본에서느 ㄴ소승불교이념을 바탕으로 불상을 출현시켰다고 주장한다.

   

조형기반이 전혀 다르고, 범본을 전혀 달리 택하고 있다. 쿠샨제국에서는 황제 모습이 그대로 불타가 되었지만, 여기서는 소년상(성인식을 갓 치른)이 불타의 범본이 되었다. 마투라 뿐 아니라 중인도 전체가 그러한데, 그러한 습속을 평생 가지고 살다 돌아갔다. 성인식 대체로 머리로 치룬다. 중국문화권에서는 상투/비녀 꽃는다. 인도에서는 케샨타 (주변머리를 밀어버리고 정수리 머리칼만으로 상투를 튼다. 열대지역이라 덥지 않게 트느라고 위에 고정한다. 케샨타. 성인식을 막 치뤘을 때는 세캰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성인식을 치루고 난 모습으로 불상을 출현시켰다. 언제 치뤄지냐면, 계급에 따라 다른데, 브라만은 16세, 크샤트리아 22 바이샤 24세, 수드라는 치루지 않는다. 석가모니는 계급은 크샤트리아이지만 브라만처럼 16살에 한 것으로 해두었다. 돌아갈때까지 16세 동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고 믿는다.

전통적으로 상소불노(언제나 젊고 늙지 않는다.) 부처님의 신체에 대한 관념이 그렇다.

16세 동자 - 영양상태가 좋으니 빨리 자란다. 이미 다 자란거. 육신은 다 자랐는데 자리가 잘 안잡힌 것. 다 동그란 얼굴. 그래서 동그란 얼굴이어야 한다. 그래서 32상중 부처님은 만월면이라고 한다. 거기서 시작. 32상 80종호의 항목중에 4 8 상호 많다는 뜻인데, 인도 문화권에서는 8진법이라 32상. 장아함경에서는 열거하기로 28가지밖에 못 만들었다.

나중에 32상을 다 채우는데, 불상양식이 진행해나가는 모양을 보고 넣었다. 수족 막만상 (물갈퀴) - 조각이 떨어지지 않게 붙여 만든 걸 보고 그런요소까지 집어넣는다. 그래서 만들어놓고 나서 만월면도 추가한듯. 베다시대부터 미남얼굴이니까 있어왔는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커보인다든지 길어보인다든지 할 수 있는데, 인도문화는 열대문화이므로 과장표현하게 되어 지체가 실제 이상으로 길다. 이목구비도 얼굴눈코입 열대지역 특성대로 아주 관능적일만큼 과장되어 있다. 귓불도 길게 늘어져있고. 그러면서, 여기서 의복이 문제가 된다.

의복 - 뜨거운 열대 지역 위도 25도, 간다라는 35도. 10도 차이가 난다. 그러니까 엄청 덥다. 더워서 옷을 다 입고 다닐 수가 없다. 보통사람은 밑만 가리고 다니고, 체면있는 사람은 그위에 치마같은거 입고 입어야 할 때는 둘둘 말아 지고 다니다 집어야 할 때 최대한으로 입는 것이 편단우견이다. 장방포를 (직사각형의 포)

한쪽어깨를 (드러낼 단) 대중앞에서 경전을 설할때에야 편단우견 옷을 입는 것이다(원래 벗고 있다가). 체면차릴때는 안입었던 것을 입고 하는 것이다.

초기에는 설법하지 않는 모습을 표현했기에 짊어지고 있다. 가사와 같은 모양 장방포.

의복을 갖춘것에서는.

지역도 간다라는 모직, 상당히 두껍게 융기되어서 표현. 마투라는 더우니까 얇은 천을 입는다. 신분이 높을수록 훤히 비치는 (투박의(비춰보이고 얇은)) 옷을 입는다. 신체가 다 보이게 된 옷을 입힌다. 그런 옷을입으니까 뭉치는 왼쪽 어깨만 옷주름이 있고, 나머지 부분은 그냥 신체 윤곽이 그대로 노출. 그래서 앉아있을 때에는 문제가 없는데 서있을 때에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가운데로 보이지만 않게 몰아서 표현한다. 치마처럼.

열대문화는 그래서 관능성이 강하다. 이렇게 간다라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불상을 출현시키고 있다.

게다가, 마투라 지역은 역사인물로서 실제로 방문을 했던 지역이다. 그래서 600년이 지나도 그분의 모습에 대한 전통이나 표현할 수 없는 전통도 강하다. 그를 표현을 하면서도 불상이라고 못하고 보살상이라고 프라티나 보디사트바라고 적아놓았다. 반응을 봐서 프라티마(상)이라고 적다가, 한 50년 지나다 괜찮아지니깐 불상이라고 적는다. 이래서, 부처님의 고향이기 때문에 이러한 단계를 밟아서 정착한다. 없는 서북인도는 그냥 표현이 되지만 여긴 단계가 필요했다.

   

간다라에서는 함흑색의 편암으로. 간다라 근처엔 편암 산지를 아직 발견 못한다. 마투라 근처에선 시크리라는 곳에서 사암이 생산된다. 사암은 상당히 부드러워서 조각하기 적합하다. 아쇼카왕때는 백색사암으로 기념주를 만들었는데, 쿠샨제국의 마투라 불상은 시크리의 적색 사암으로 만들었다. 분홍빛이 강할 정도의. 황색 반점이 드문드문 섞여있는.

불상을 만드는 데에 아주 적합했다.

그래서 마투라에서는 간다라처럼 50년 단위로 양식변천이 된다. 여기서도 머리변화가 두드러진다. 소라껍질모양으로. 한 50년 지나고선 머리칼이 돌아올라가는 사실성이 사라지고, 수평선으로 층된 모양이 된다. 그것을 모방모방하다보니 그것이 상투인지도 잊게 된다. 그다음 한50년에는 그것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수평선조차 사라져서 2세기 전반 3세기에는 머리칼이 다 없어지고 뿔하나 솟은것처럼 된다. 이때 간다라에서는 마투라의 편단우견이 받아들여진다.

마투라에서는 간다라의 통견양식을 받아들인다. 통견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 멕시코 판초옷처럼 받아들여서, 오른쪽 어깨를 감싼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냥 씌워놓기만 했다. 간다라에선 의복을 걸치기 위해 손을 올리는데, 그것을 둘러넘어간게 아니라 목만 씌워놓은 형태로 3세기 전반의 마투라가 된다. 이후엔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자연스러운 통견 표현이 잘 안되어서, 양쪽 주름이 연결이 서로 안되는 식으로 한 반세기. 이후 부처님 머리엔 머리칼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불경에 있으니까, 나중에는 세로가로무늬로 돗자리 문양을 그린다. 근데 그건 아니거든. 그러니까 혼란을 겪고 나서 3세기 중반에는 나발형태 간다라의 나발형태를 받아들여 시작하게 된다. 나발과 돗자리무늬가 같이 나타나는 시기가 있다. 자이나교 상도 그러한 진행과정을 거친다.

   

   

키다라 굽타. 4세기-5세기에세속화 6세기되면 완전히 타락.

3세기 후반엔 쿠샨제국의 축소로, 키다라 쿠샨이 남고, 소왕국. 200여년 지속. 그때는 쿠샨제국에서 누리던 간다라양식이 일변하여, 재질이 편암이 아니라 소조상으로 나온다. 이때 논소불교(논장들이 나오면서)

논소불교 - 경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성인. - 기본골격

논은 경에 철학적 논리성을 부여하는 것. 종교가 철학의 늪에 빠지면 소멸하게 되어있다. 경전해석에 천착하게 되면 그렇다 천착하는 사람은 학승들이다. 종교와 철학은 다른 것인데..

100론 12지론 대론이니.. 이걸 종파불교로 중국에서 나오게 하는 요인이 된다.

논장이 이때 많이 만들어지는데, 논장을 만들면 논에 대한 재주석서가 필요한 것이므로 그게 소.

논소 - 경률론 3장 세가지. 여기에 소. 소에 소가 또 붙어 8만4천경..

논소불교가 주를 이루기에, 논소불교를 이끄는 사람은 가장 존경받는 학승이다.

간다라는 황제불상인데 이시대의 불상은 학승들이 범본이다. 아주 이지적인 모습으로 최초에 나온다. 이것도 한세기가 지나면 세속화가 시작된다. 노쇠할때는 장식적이고 화장도 하고 변한다.

그런때에 바미얀대불이 그사이에 만들어진다. 4-6세기에.

   

마투라쪽에서는 마투라양식의 변화과정을 거치면서 통견과 나발을 받아들여, 그것이 막 만들어지기 시작할때 쿠샨제국이 해체. 마투라 입장에서는 쿠샨의 인도령을 통치하는 수도였다. 인도에선 본래 인도의 강국인 마가다를 중심으로 대제국을 다시 일으키게 된다. 슈리굽타가 서기275년에 굽타왕국을 건설. 200-250년 다시 이끈다. 왕국건설 후 100년 지나 SWMA이 되면 문화절정기. 남인도를 빼놓고는 거의 인도대륙을 통일한다.

찬드라 - 다리/ 굽타 - 지킬 호. 영원한 이름이다.

문화황금기. 굽타제국에서는 쿠샨제국 멸망할정도로 실크로드의 기능이 쇠퇴한다. 바닷길이 열리고 마호메트가 나오면서. 길이 막히니까 쿠샨이 망한다. 인도내에서도 상업세력이 쇠퇴한다. 불교의 쇠퇴도 상업세력의 쇠퇴가 원인. 전통적 베다 브라만 이념을 바탕으로 해서 다른 모든 이념을 흡수해서 새로운 농업세력을 ㄱ이끄는 힘인 힌두교를 출현시켜 중농정책을 표방하게 된다. 드디어 인도 본연의 모습이 되었다. 힌두이즘은 인도의 범신적, 포용적. 불교와 자이나교를 박해하지 않는다. 불상들 역시 계속 발전한다. 극에 이르른다. 통견에 대한 이해도 완전히 끝내고, 통견불상에서 의복재료는 전통적인 얇은 마투라 의복이고, 거기에 무늬가 있으면서 몸윤곽이 다 비쳐보이게. 또한 아주 건장한 20대 중반의 청년상으로 얼굴표정을 진행. 그래서 간다라에선 소년상으로 가는데, 마투라는 미청년상으로 만든다. 결과적으로는 그리스신상과 거의 같은 연령대로 만들어놓는다. 인류가 만든 신상조각으로는 가장 신비로운 조각이다. 마투라 불상.

뒤에는 광배 초화문. 4세기 후반경까지는 대체로 이걸 유지 발전하다가 5세기전반까지도 . 5세기 중반서부터는 키다라 쿠샨이 흔들린다. 키다라가 존재하는 한은 힌두쿠시 산맥너머의 침입을 키다라가 막아줬는데, 마투라에서는 마음놓고 발전을 계속했던 것인데 5세기 중반에 백흉노가 쳐들어와 멸망. 마투라는 국제적 상업도시에서 갑자기 전쟁의 전진기지로 변한다. 그래서 상업활동 못한다. 모두 하류로 피난해서 사르나트라는 곳 - 초전법륜 했던 그곳으로 이주한다. 사르나트가 마투라 공방 출신자의 피난지가 되엇다. 여기 오니, 기술을 가지고 왔다 해도, 현지에서 오래 살다 보면 현지 미술에 적응할 수박에 없다 .이 현지미술은 힌두교 예술. 힌두교의 성교장면 등 나신상. 이걸 받아들여서 옷주름을 없애고, 끝자락만 주름이 있고 나머지는 거의 나신상. 색정적 관능적. 불교가 금욕을 내세우는 종교인데 색정적이라 하면 이미 망할 때가 되엇다. 난해해져서(종교가 망하는 2가지 원인 돈 탐하면 썩고, 어려워지면 접근불가능으로 지지기반을 상실) 불교가 나중에 이슬람이 침입하면서8세기말 - 나란타사라는 1만명의 학승이 있던 절이 이슬람이 점심시간에 쳐들어와 다 죽여버린다.

그때 이슬람교도들이 죽인 것은 불교만이 아니다. 힌두교도도 죽였다. 지금은 힌두교는 더 발전했는데, 왜 불교는 없어졌을까? 상업세력이 없어졌으므로. 불교도 변화하려고 노력했을테지만. 원래 종교의 원초적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 밀교이다. 주술적 힘에 의지해서(원초적 종교의 모습) 불교교세를 유지하려. 그런데 이게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서 보다 탈철학적이지만, 미신적 요소가 강화될 수밖에. 관능적인 쪽으로 흐른다. 불상이 6세기를 넘으면서부터는 관능성을 보이고, (힌두교신상영향으로) S자로 몸을 꼰 보살, 불상은 나신처럼 표현, 보관여래 등.. 이래서 끝이 난 것이다. 인도대륙에서는 불교가 불상양식이 파탄되면서 소멸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적어도 9세기 이후에는 불상을 거의 발견할 수 없다. 그때 우리는 8세기경 불교미술을 완전히 종결시킨 석굴암이 나온다.

   

여기까지 인도를 다 했다. 키다라 불상은 머리만 남고 몸통은 허술하게 만들었기에, 남은건 해체되어 거의 안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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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는 기록으로 / 고고학적 발견으로 확인할 수 있다.

    기원전 3000년경 농업생산이 늘어나, 농업사회 발생. 세계 각처에서 다소 공통적으로 발생,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문명.

    앞으로 더 확인될지는 모르지만, 여러 여건상 여기 제외하고는 확인하기가 어려울듯.

    이 농업문명을 고대문명이다. 1900년대 전후하여 고고학적 발굴로 확인할 수 있었다.

  • 문화의 정의.
    • 문화란 별것이 아니다. 쾌적하고 안락한 환경을 지속시키려는 의지이다.
    • 경험의 축적은 전해져서 가능하다. 인간도 한 세대만 살면 축적된 지혜가 없다. 문화가 없는 것을 야만족이라 한다.
    • 인간은 언어와 문자기록을 통해서 문화를 전한다. 축적.
    • 그래서 가장 좋은 문자기록을 가진 중국이 문화를 많이 발전시킬 수 있었다.
      • 상형문자 - 말그대로 표현할 수 있고, 변화가 없는 문자.

        인도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는 어떤 민족이 문화를 일으켰는지조차 알 수 없다.

        유일하게 문화를 일으킨 민족이 현재까지 제 땅을 지키는 건 중국뿐.

  • 쾌적, 안락한 환경을 지속시키는데에 어려움이 다소 있는 곳에서 문명이 발생한다.
    • 날씨가 덥고 먹잇감이 풍부한 곳에서는 쾌적한 환경을 바꿀 필요가 없으니 고대문명이 일어나지 않는다.
    • 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 인도문화는 1925년 이후 모헨조다로와 하라파에서 발굴로 확인.
    • 인도를 식민통치하기 위해서 그 나라의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하기 때문에 연구했다. 일본도 경성제대를 세워 과거의 문화강국이었던 조선사 연구를 철저히 알려 한 것이고, 그것으로 태어난 것이 식민사관이다. 문화적으로 승복시킬 수 있는 방법은 식민사관을 통한 세뇌, 자조적 자기비하. 사학자들이 식민사관을 심었던 선생들의 제자이므로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미술사가 필요하다.
      • 기록으로는 좋았던 시대일수록 이러면 안된다는 말을 많이 하게 되는데,
      • 미술사 - 조선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던 시대 - 모든걸 긍정적인 사고로 살았으나, 정치적으로는 당쟁이 치열했다. 당쟁하다 망한 나라? 상대당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는데 부패할 수가 없다. 일당독재해서 망할 때가 더 무섭다. 일본은 기록으로 들이대서 사관을 내보임.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미술사이다.
    • 유물들을 보면, 나중에 불교미술이 태어났을때의 초창기가 다 나온다. 인더스 문명 출토 인장에서부터 사면신의 모습에서부터 불교미술에서 보는 특징이 잘 드러남.
      • 열대미술은 관능적, 지체를 과장되게 표현. 장대하거나 이목구비를 기괴하게 하거나. 사자 소 따위를 신으로 숭배 - 이것도 불교. 이런것들은 음양과 관계가 있다. 물소는 뿔이 반달, 태음, 사자는 태양.

      인도 대륙의 문화가 어떻게 생성되고 소멸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하지만, 인도대륙은 독립된 대륙이었다고 한다. 지각변동으로 유라시아 대륙에 부딛쳐서 히말라야 산맥이 만들어졌다. 히말라야와 파미르 고원으로 인도 중국 중앙아시아로 나누어놓았다. 서쪽으로는 히말라야 카라코룸 힌두쿠시 산맥 일반적으로 넘기에는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으로 그리고 인더스강으로. 인더스강은 힌두쿠시산맥에서 발원.

      갠지스강 상류는 히말라야.

      인더스문명이 일으킨 족속은 중앙아시아에서 온 족속이라 생각되고 있다.

      서기전 2000년경 아리안족이 남하하면서 밀려나거나 흡수되었거나 소멸했다. 이들도 유목민족이었겠지만 인도대륙에서는 풍토가 적당하니 농업으로 바꾼 것으로 생각됨.

    • 문화가 이루어지려면 공통된 이념으로 이끌어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브라마니즘 브라만교.
      • 브라마니즘의 특징은 강력한 계급제도. 이럴수밖에 없는 것이, 농업사회에는 계급이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유는, 농토는 한번 확보하면 대물림을 통해 쓰여지고, 농토를 사는 것도 파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한번 차지한 계급이 그곳에 계속 주도권을 유지하려고 한다. 철저한 계급사회는 모든 농업문명권의 특징. 이런 계급제도로 2000년 가까이 산다는 것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 브라만이 최상층, 정치하는 크샤트리아, 농민 대부분은 바이샤, 천민은 수드라.
  • 무슨 까닭인지 상업문명이 갑자기 도처에서 bc700-800년전쯤 발생.
    • 상업세력을 위한 혁신이념이 또 태어난다. 상업하기 알맞은 요건에서 문명이 꽃핀다. 그것이 그리스문명. 상업하기에 적당한 점은 에게해를 끼고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가 바로 연결. 중계무역지로는 최적의 지역이다. 그래서 그리스에서 순수한 상업문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 상업이란 계급제도가 상존할 수 없다. 오늘 거지였다가 내일 부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상업세력이 계급타파를 주장한다. 혁신이념으로 사상논쟁이 각처에서 치열하게 일어난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의 이념논쟁을 거친 결과 농업세력의 이념인 유가가 우위를 점했다.
    • 인도에선 상업세력을 위한 이념이 자이나교, 불교가 있었다. 세계사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 인물들이 대체로 이 시기에 거의 동시에 출현한다. 부처 654bc - 533 - 80세, 공자는 증손자뻘. 거의 동시에 출현한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 불교가 내세우는 교리의 특성은 평등. 혁신중 혁신이다. 그래서 석가모니가 천민중에서 십대제자에 속하는 사람을 뽑아낼 정도. 상업세력을 이끌려면 금욕을 가르쳐야 한다. 평등과 금욕을 내세운 것이 불교이다. 인도에서 윤회사상을 전통적으로 브라만교에서 수용하고, (인과응보와 윤회- 브라마니즘과 힌두교 모두 공통적으로 가지는 특징)종교는 역사의 산물. 절대적으로 신봉하게 하려면 신비주의가 있어야 한다. 환경에 따라 가르치는 덕목은 다 똑같다. 요즘은 살기가 좋아서 광신도가 없다. 광신도 - 자기가 믿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 불교의 출현
    • 똑같은 이념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자이나교- 금욕과 평등. 자이나는 보편성을 뛰어넘어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 부귀의 표상으로 꾸미고 신분을 과시하는 것이 머리이다. 그러므로 삭발을 하고. 그런데 자이나교는 의복과 체모를 모두 안입고 깎는다. 그래서 더운나라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 불교는 25조가사 9조가사 등 주운 옷을 잘라 서로 나누어 가진 후 모아 입는다.
    • 출가수행 장면에서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상인들이 도와준다.
      • 소승경전, 대승경전의 차이 - 소승경전 - 원시경전. 석가모니가 직접 설했을 가능성이 큰 경전.
      • 종교경전중 가장 방대한 규모를 가진 것이 불교이다. 기독교는 신 구약 2개밖에, 코란 - 몇 개 안되고, 유가는 7서,
      • 열대지방에서는 말이 많다. 그래서 한이야기 또하고 또하는데. 직접설했다고 부르는 경전이 소승경전, 원시경전. 이 경전이란 것은, 석가모니가 부처가 되는 방법을 그대로 가르쳐주는, 자기 혼자 깨달아가는 길을 가는, 소승 - 자가용처럼 작은.(소승이란 말을 대승불교에서 깎아내린 말). 인도만 있는 줄 알았을 때 불교가 존재. 교역로가 열리니까 세계가 인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이 바뀔 수 있었다. 지구밖에 무수한 우주가 존재한다는, 우주관이 바뀌면서 자연스레 나 아닌 다른 사람 - 그래서 보살이라는 존재. 성불할 능력을 충분히 가진 존재가 그럴 능력을 가진 이들을 데리고 같이 가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유보하고 있는 것. 큰 배나 큰 수레에 주변사람들을 태워서 성불하는 길을 가려고 하는 것이 대승. 1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아프간 파키스탄, 월지족(감숙성 지역에서 한무제에 밀려남)이 넘어오면서 이 이념을 받아들임. 이런 이념의 변화가 불상 출현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 초기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던 시기 약 5세기동안.
          • 이시기에는 불상이 없었다.
        • 부처님 당시에 불상이 만들어졌었다는 소승경전의 이야기 - 정일아함경에선 - 후에 추가된 내용으로 보인다. 불교가 존재했던 모든 진리가 불교에 배치되지 않으면 전부 불경에 포함되었다. 그때문에 고도의 철학체계를 갖춘 경전으로 출현한다.
        • 화엄 법화 금강경등은 고도의 철학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가지려면 상당한 발전 뒤에야 가능. 이런 것은 역사의 산물이다. 그러한 대승경전은 쿠샨제국에서 대체로 만들어졌을 것으로.(세계로 불교가 전파되는 시기에)
    • 문화의 이념이 뿌리라면, 예술은 꽃이다. 이념은 보이지 않지만, 안 보이는 이념을 보려면 조형예술품을 보아야 한다. 뿌리가 바뀌어야 예술이 바뀐다. 불상을 표현하지 않는 형식에서, 그 시대의 총체적인 역량의 표출로 불상으로 표현했다면, 그것을 표현할 뿌리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대승불교의 출현이다.
      • 대승불교는 ad1세기 중반쯤. 이시기에 월지족이 흉노에게 밀려서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옴. 실크로드 - 동서무역이 늘어나니까 중개무역으로 절정에 이른다. 카니슈카 2세 -불교사에서는 최초의 불교외호한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왕. 아쇼카왕은 bc3세기전반에 활동했던 사람.
      • 알렉산더 bc324년에 출발해서 10년간 페르시아 쫓아 힌두쿠시산맥을 넘는다. 갠지스강 상류 파라바왕국을 격퇴하고 넘는다. 부하들은 회군하기 원했다. 그때 인도에선 초유의 침공을 받아 연합군을 형성했다. 마가다왕국을 중심으로 근 100만이 모인다. 마가다왕국의 찬드라굽타가 총사령관.자기나라 왕을 쳐서 마우리아왕조를 열었다.
      • 그 손자가 아쇼카왕이다. 아쇼카왕은 추남이었는데, 인도에서는 미남이어야 왕의 자격이 있다. 32상 80종호를 갖춘 사람이면 재가하면 전륜성왕, 출가하면 불타가 된다고 한다. 베다시대부터 전통이다. 아쇼카왕은 99왕자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고 하는데, 할존자란 비구가
      • 점령은 쉽게 했겠지만 통치는 힘들다. 불교를 통해. 세계관이 변한 상황에서 농업문명으로는 힘들다. 상업세력의 이념으로 통일제국을 이끌어가기 위해 불교를 전인도에 전파, 외교사절단을 통해서 주변국에도 보낸다. 불교경전에서 특히 대승경전에서는 불타재세시에, 불타를 낳다가 돌아간 마야부인이 도리천에 상생해있는데, 우전왕이라는 어린 임금이 부처님을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아서 불타의 모습을 만든 것이 불상의 최초라곤 하지만, 근거가 없다.
      • 이시대의 불교미술로는 아쇼카 왕의 석주 (ashokan pillar). 중요한 곳에 거대한 석주를 세우고, 법칙령을 지어 새겼다. 사자 숫소 등을 새긴 기법은 페르시아적인, 사실성이 강한 조형기법으로 제작했다. 상당히 사실적. 인도는 과장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이 전통. 페르시아가 도망오면서 이러한 미술도 들어왔다.
      • 상업은 개방적일 수밖에 없다. 불교문화란 전인도적으로 확산되는 순간부터 구체성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불상의 흔적은 하지만 전혀 없다. 여러 유적지의 기념주에서 미술이 쇠퇴하고, 스투파stupa - 유골무덤 사암으로 - 탑파신앙 탑은 본래 무덤이다.
      • 대승경전에서는 사리가 8섬도 더 나왔다고 말했다. 8만4천 - 인도가 당시 8진법이라 그렇다.
      • 8왕들이 탑을 세우려고 서로 싸우다가(사리를 놓고) 8탑을 세웠던 것을 다 건져내어 8만4천탑을 세웠다고 한다. 소형 탑이 있던 곳을 확장했을 가능성이 있는 곳도 있고..
      • 서기전 1세기경 bc2-300년 이때가 탑파.
        • 거기에 불전도를 그리고, 본생담(jataka)을 소재로 한 본생도를 그렸다.
        • 본생도는 부처님이 표현이 되어있지 않다. 상징으로 대체.
          • 탄생은 -나무아래, 보리수나무 아래 대각을 이루고, 암나수 아래서 설법, -나무 아래서 열반.
          • 서양인들이 처음에 발견해놓고 의아해함. 그래서 불상불표현의 시대.
        • 불상불표현 시대에는 3-600년동안 그랬다. 뒤에 연구하면서 왜 이랬을까 - 동양적인 사고방식. 계급 사회에서는 성인이라 부르는 인물을 일반대중과 함께 표현하지 않았다.
          • 왕실 진찬 연회도 에서도 왕의 모습을 표현하지 않는다.
        • 1세기경 간다라 불상이 출현. 불전도 중 빈자리에 불상을 나타나게 한다. 1세기 말엽.
      • 간다라 양식
        • 그래서 카니슈카 대왕의 증조부때 대승불교 불상이 탄생. 같은 시기에 마투라에서도 불상이 순인도적 조형으로 발생. 무슨 근거로 만들어내나? 베다시대 경전에 32상 80종호를 가진 이는 출가하면 부처가 된다, 재가하면 전륜성왕 - 대체로 가장 아름다움을 갖춘 사람의 얼굴.
          • 1세기 후반의 불상은 왕의 모습이면서 일체의 장신구를 알상투 빼고는 다 안함.
          • 우슈니샤 - Ushunisa 계주, 계뉴가 분명한 사실적인 표현
        • 그리스적 조각기법, 사실적인 상호로 표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코밑수염)
        • 2세기에 들어 단독 예배상으로 출현.
          • 양식화 - 상투끈이 떨어져나가고, 높고 큰 상투라는 의미에서 살상투, 육계로
        • 3세기 전반쯤 - 상투 윗부분부터 나발이 형성. 모든 터럭은 오른쪽으로 돈다는 이야기. 가지런하게 도
        • 3세기 중반 - 전면이 가지런하게 된다. 현재 볼 수 있는 육계와 나발이 이 시기에 완성
        • 3세기 후반 - 쿠샨제국이 근250년 수명 다함. 사산조 페르시아 침입 받아 멸망. 기존에 있던 모든 양식이 뒤죽박죽해지는데 망하게 생긴것으로 보면 안다.

             

             

             

             

  • 인더스 - 다비다면신 여기서부터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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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aluing Minimalism: Patronage, Aura, and Place

Anna C. Chave

   

현대미술에서 후원연구가 드문 데에는 이유가 하나 있다. 후원자들이 미술의 과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적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미니멀리즘 운동 쥐세페 판자(Giuseppe Panza), 디아 파운데이션(Dia Foundation)의 설립자인 하이너 프리드리히(Heiner Friedrich), 필리파 펠리치(Philippa Pellizzi)에 의해 주도된 미니멀리즘의 정신적 관점은 미니멀리즘 영역의 특정 작가들을 부각시켰는데, 이 점은 특히 어마어마한 규모로 제작된 장소 특정적 미술(Site-specific art)에서 그러하다. 이들 후원자들의 후원으로 말미암아 월터 드 마리아의 1977년 작"Lightening Field"같은 작품이나 디아 비콘 뮤지엄(Dia Beacon Museum)과 같은 곳이 생겨났는데, 언론들은 그곳을 순례지, 혹은 성전으로 묘사했으며, 따라서 그 시작부터 미니멀리즘의 제도적 구분과 모순되는 상황에 대해 세속화, 물질주의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판자는 1967년 댄 플래빈(Dan Flavin)과 로버트 모리스의(Robert Morris)의 작품을 시작으로, 도널드 저드(Donald Judd), 칼 안드레(Carl Andre),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 로버트 어윈(Robert Irwin) 등의 작품들을 초기에 사들여 시장을 독점하였다. 미니멀리즘 초기에 판자의 미니멀리즘을 보는 시각은 "단순한 형태를 통한 진리의 탐구", 본래의 작품에 무언가 "본질적인" 아우라와 같은 것이 부여되는 작업이었다. 디아 파운데이션의 작가후원으로 만들어지는 대형 미니멀리즘 작품에 대해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텅 빈" 작품에 무언가 "본질적인 것"을 덧씌우는 것이라 비판하였다.

   

1975년 설립된 디아 파운데이션의 목적은 "비용과 크기상 개인이 만들거나, 후원하거나, 소장하기 힘든 작품을 기획하고 만들어내며 유지하는 것"이었다. 프리드리히는 재단의 목적이 "통로"(그리스어로 "–를 통해서")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이름을 디아라고 골랐다. 디아는 또한 "신과 같은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디아에 의해 천재들이 만들어낸 신의 선물들로 윤색된, 이 작가들의 작품들은 종종 언론에 의해서 "디아 화" 되었다. 예술가와 후원자들은 서로를 초인적인 천재성을 지닌 자들로 인가한 것이다.

   

언론은 종종 로스코 채플(Rothko Chapel)을 제작하게 한 드 메닐(de Menil)가를 메디치가에 비유하였고, 프리드리히는 디아의 설립을 문화적인 르네상스와 같은 것이라 말했다. 하이너 프리드리히와 필리파 펠리치는 플래빈, 저드, 터렐, 드 마리아(Walter de Maria), 마리안 제질라(Marian Zazzila)부자, 그리고 행위예술가 로버트 휘트만(Robert Whitmann)의 작품을 후원, 소장했다. 이들 후원자들은 그들이 아우라가 느껴진다고 생각되는 작품들을 찾았고, 그들은 캘리포니아 미니멀리스트 중 몇명을 뉴욕 미니멀리스트와 동등하게 포함시켰다. 하지만 미니멀리즘 담론이 진화하면서, 수많은 비평가와 미술사가들이 "빛과 공간"의 작가인 어윈, 터렐 등을(모두 서부 출신인) 완전한 미니멀리스트가 아니라, 전혀 동떨어진, 정신화(idealized)된 작가들 혹은 "캘리포니아 숭고"의 예로 분류한다. 1991년 크라우스가 프랭크 스텔라와 애드 라인하르트를 떼어내듯 모이스와 플래빈의 그룹과 어윈과 터렐 등의 서부 그룹을 떼어낸 것이 대표적인데, 그는 20세기 초에 태어난 바넷 뉴먼과 마크 로스코, 토니 스미스, 론 블레든, 아그네스 마틴, 앤 트루잇과 같은 화가들이 그들의 유대인-크리스천 혹은 동양철학의 배경에서 정신적인 접근을 하는 예가 이미 오래전에 존재했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위와 같은 작가들은 미니멀리즘의 단순성에 영향을 준 이들로 저드와 같은 세대들에게 존경받고 있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미니멀리즘의 기하학적 단순성이 산업적인 물질주의에 기반한 세속적인 미술이라고 생각한다. 미니멀리즘이 하나의 운동으로 뚜렷히 모여진 시기, 1960년대 중반에는, 많은 사람들이, 리차드 쉬프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즉각적인 물리적 팩트를 넘어선 상상을 하게 하는 요소가 없는" 오브제를 보여주려 한다고 생각했다.

   

미니멀리즘 작가들의 초기 중요한 전시에는(예를 들어 66년 뉴욕 Jewish MuseumPrimary Structures 전시) 동부와 서부의 작가들 모두가 참여했다. 하지만 그레고리 뱃콕의 1968년 작품집 Minimalism의 에세이들은 갑자기 몇 명의 캘리포니아 출신 작가들만 다루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편견은 더욱 굳어졌다.

   

동부와 서부의 미니멀리즘을 합치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있다면 두 그룹은 어떻게 교차했으며, 어떻게 비교하는 것이 유용한지는 중요한 질문이다.

사실, 미니멀리스트로 분류된 작가들 중 뉴욕 태생은 플래빈 하나였다. 저드와 모리스는 미주리, 또한 모리스는 뉴욕에 오기 전 캘리포니아에서 성장기를 지냈다. 저드는 뉴욕을 떠난 뒤 상당기간 텍사스에서 지냈다고 하였고, 솔 르윗과 안드레는 본래 뉴잉글랜드 출신이며, 안드레는 그러한 자신의 정체성을 종종 말하곤 했다. 퍼포먼스와 음악에서 미니멀리즘 작가들은 비록 대부분 뉴욕으로 이주해서 살았다. 무용에서 사이먼 포트(Simone Fort)와 이본 레이너(Yvonne Rainer)가 있다. 음악가 존 케이지는 선조부터 뉴욕에 살았으며, 라 몬트 영과 테리 라일리도 뉴욕 사람이다. 캘리포니아 출신인 드 마리아도 뉴욕에 정착했다. 반면 어윈, 터렐, , 맥크래큰(McCracken),등은 그들이 태어난 서부에 계속 남았고, 그들 전부가 서부해안 가까이 살지는 않았다.

   

   

최근의 미니멀리즘 전시들은(LA현대미술관, 뉴욕의 구겐하임미술관(미니멀리즘을 역사로 돌아보는 최초의 전시) 판자가 얼마나 미니멀리즘을 자기 방식대로 지원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일는지 모른다. 현대미술시장에서 판자의 처음 행동은 남들처럼 작품을 계속 구입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공공미술을 성당의 지위에 올려놓고자 했던 이상주의적 야심을 키웠다. 이것은 디아의 설립자들과도 강하게 공유되었으며, 마침내 드 마리아의 <Broken Kilometer>와 같이 성소와 같이 영원할듯한 작품들을 만들게 되었다. 디아만큼의 재력이 없었던 판자는 장소특정적 미술과 환경미술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나름의 방식대로 주문, 전시, 홍보를 하여 주도적 인물이 되었다. 그는 터렐과 플래빈에게 자신의 바레세(Varese)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 터렐의 1975년 작품 <Skyspace I>, 플래빈의 1977년 작<Varese Corridor>를 주문하는 한편, 여러 나라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의 주거도 마련했다.

   

판자의 장소특정적 미술에 대한 관심 프리드리히에 의한 것으로, 그는 독일과 뉴욕에 최첨단 상업갤러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미술가를 "사회의 최고봉"으로, 미술을 "새로운 세계를 세우는 시스템"으로 생각하던 프리드리히는 1963년 뮌헨에 첫 갤러리를 열었다. 그는 1938년 독일에서 태어나, 전쟁 기간동안 부자가 된 사업가의 아들이었다. 따라서 그는 요셉 보이스처럼 미술이 전쟁의 참상을 치유할 무언가 심오한 치료제이며, 전쟁의 파괴로도 무서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그는 드 마리아, 저드, 플래빈, 터렐, 그리고 영과 재질라가 합작한 소리와 빛의 설치미술 작품 등을 전시했다.

   

1977년에 드 마리아는 그의 대량의 흙을 21인치로 깔아 만든 첫 번째 <New York Earth Room>는 프리드리히가 연 뉴욕의 갤러리에서 전시되었다. 제작, 전시 비용들은 필리파 펠리치로부터 조달되었다. 펠리치는 대부호인 슐름베르거(Schlumberger)집안 출신인 드 메닐(de Menil) 부부의 막내로, 1964년 휴스턴의 사막 한가운데에 로스코 채플을 주문했던 집안이었다.

   

에큐메니컬 교회인 로스코 채플에는 다양한 종교의 순례자들이 찾아왔는데, 이후 그녀는 프리드리히와 1979년에 수피즘식 결혼식을 갖고, 파리하(Fariha)라는 이름을 받았다. 수피즘은 신비롭고 명상적인 이슬람 종파로서, 예술과 철학 방면에 대해 깊이 탐구한다. 1981년 지은 부부의 모스크에는 그들의 주거공간과 공연장 등 성과 속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여기에는 플래빈이 제작한 여러개의 빛 설치작품 또한 있었다.또한 음악, 언어, 신학, 역사등의 연구 모임을 하거나, 종교가들을 초빙하고, 무슬림 신앙과 철학을 담은 사진, 영화, TV 프로그램을 공급하여 을 지원했다.

   

플라빈은 1979년에 이 건물의 조명을 의뢰았는데, 프리드리히는 1957년 지오토의 프레스코를 보게 된 파두아의 아레나 채플을 본 경험과 아레나 채플의 경험은 동일하다고 후에 생각했다. 1960-70년대의 현대미술의 아방가르드는 정교한 기술이나 재료, 천재와 같은 관념을 포기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는데도, 프리드리히는 로스코 채플을 통해 로스코가 천재임을 알아챘으며, 그 작품은 그 대담함과 크기, 비중에서 걸작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그러한 작가들에게 비용을 아끼지 않고 후원했다.

   

이러한 예가 있기 전의 아방가르드 미술에서는 1960년대 후반의 대지미술, 그리고 최근 미니멀리즘에서 리차드 세라와 같은 경향 이전에는 거대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므로 디아가 소장한 거대 작품들의 무언가 산업적인 공간들은 분명 미니멀리즘 미학과 후원자 간에 조정을 거친 것들이다. 산업재료 역시 가난한 미술가 생활의 산물이었다.

   

초기 미니멀리즘 조각을 예로 들어보자면, 드 마리아의 1961년 무제 박스는, 합판 상자로, 일일이 광을 낸 동판 500개를 늘어놓은 1979년 작 "Broken Kilometer"에 비하면 값싸고 쉬운 작업이었다. 이러한 예들은 미니멀리즘의 역사에 있어 막대한 후원을 받는 시기의 변화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작품의 규모와 이런 것을 주문한 이유, 작품에 사인은 있는지, 작가에게 돈을 너무 퍼주는 것은 아닌지, 매우 전체주의적이라는 평 등, 주로 비용과 작가의 노동(Authorship)에 대한 질문을 했으며, 일부는 비난하고 일부는 열광하였다. 전문가들 중 에이프릴 킹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치 방탄유리 너머의 금괴들을 바라보듯, 매우 흥분되지만 절대 가질 수 없는 금으로 된 집같다." 반면 브라이언 월리스는 로스코 채플과 이 작품에서 "기계와 정신간의 팽팽한 긴장감"을 느꼈다고 적고 있다.

   

디아가 추구했던 거대 프로젝트들의 엄숙함과 고요, 그리고 적극적인 재단의 배려는 작가들이 어떤 질문이나 비판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작가들을 사회와 유리시킨다고 하였다고 하며 "컬렉터는 작품을 구입하는 것이지, 작품으로 성전을 만들지는 않는다."고 평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반응들이 미국인의 자유시장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자나 디아의 후원방식은 요즘의 자유시장과 배치되는 것이다. 2001년에 비평가 데이브 히키는 저드와 플래빈을 비교하며 그들이"18세기 신고전주의 대가 팔라디오와 같으며, 유럽 귀족 취향일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붙들려 있다"고 말했다. 작가들은 이후 독점적인 후원방식에 대해 불평하었지만, 그런 불평은 오일쇼크와 같은 경제난 당시에는 없었다.

   

프리드리히와 부인은 수피즘 신자이지만, 작가들에게 신앙을 강요하진 않았다. 그의 작가들 중 신앙이 있는 사람은 영과 재질라였다. 이 둘이 1981-1985년에 제작한 Dream House"전자음악이 24시간 흘러나오고, 6층짜리 작품이 보랏빛으로 수놓아져"있었는데, 재단은 수피즘의 음악론을 따르는 인도가수를 초청하여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디아의 첫 대지미술 후원은 드 마리아의 <Lightning Field>(1977)였다. 텍사스 마파(Marfa)에는 1979년에 개관한 치나티 파운데이션(Chinati Foundation)이 있다. 저드는 디아가 매입한 군수 폐기물로 작업하였고. 제임스 터렐은 1975년부터 아리조나 주의 로든 크레이터에 하늘을 볼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중이다. 세계의 미술품이 대개 도시에 집중되어있는 것에 비교할 때 이것은 매우 두드러지는 것으로, 벤야민이 정의한 미술품 특유의 특성인데, 언론에서는 위와 같은 장소를 다녀온 경험을 순례처럼, 작품을 아우라를 가진 것으로 묘사했다.

   

1960년대는 선불교와 아방가르드가 만나 이루어진 정신적인 운동의 시기였다. 칼 안드레의 벽돌과 플래빈의 형광등 작업에서 관람자는, 무언가 해탈(transfiguration)의 순간을 경험한다고도 평하며, 마치 선불교와 선험철학 등에서 나올 법한 여러 가지 반응들을 보인다.

반면 물건을 보는 사람들은 물건만을 보는 것을 고집한다. 이렇기에 미니멀리즘의 아우라를 경험하려면 모종의 입도 과정이 필요하다. 모리스는 미니멀리즘의 오브제는 "축성"을 한 후에야 감상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디아 파운데이션은 아예 허스든강 화파의 지역에 대성당 격인 디아 비콘을 지었고, 언론에서는 이것을 실제 역사와 달리 미니멀리즘의 바티칸인 듯 묘사한다.

   

미니멀리즘의 제도적 역사를 통틀어 후원자들은 무엇보다 정신적이며, 규모면에서 엄청난 작품들을 끝까지 후원했고, 판자와 프리드리히는 비평가들의 편견에 맞서 캘리포니아 미니멀리스트들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우리가 미니멀리즘의 역사에서 이런 후원자들이 없다고 가정해도, 물질주의적인 미술의 움직임은 있었을 것이다. 미니멀리즘 작가들은 동부이든 서부이든 낭만성 추구라는 1960년대의 특징을 띤다고들 말한다. 이들은 모두 미술을 보는 경험을 혁신하고 대지를 이상화한다. 안드레아 지텔(Andrea Zittel)은 미술에 있어 미니멀리즘적 혁신의 요인이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주관성의 반발뿐만이 아니라, 공간에서의 환영, 환각 문화, 격렬한 시민운동, 인간을 대자연의 일부로 보는 동양종교의 자아관 등이 함께 작용했다고 말한다. 그의 이러한 통찰은 동부와 서부지역 모두의 작가들에게 왜 판자와 같은 콜렉터들이 개인적 감명을 느끼고 이들의 작품들을 독점하려 했는지를 이해하는데에 도움을 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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