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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른사람 외에는 무조건 지각. - 부른게 우선
명단에 없는 사람 - 이것도 불렀을때 추가하고, 없으면 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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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끝나고 3대 챙길 것. 출석부 / USB 1/ USB 2/ 리모콘
지난시간 간다라- 양식진전. 현재 불상에서 보이는 모든 특징이 갖추어지는 것이 3세기 중반이다.
<<마투라-굽타 9월 26일.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1년 9월 26일 월요일 오전 9:08
불상의 최초는 서기 1세기. 불타 출현 후 600년 후에 나타남. 불상출현을 막는 전통이 있어왔다.
헬레니즘 이후 상호표현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해불가로 불상 출현.
이념적으로는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불상이 탄생.
이념이 뿌리라면 미술은 꽃이다. 대승이라는 새로운 이념이 출현했으므로 그것에 뿌리해서 불상이 출현.
간다라는 북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불상의 발전을 절정에 이르게 한 쿠샨왕국 - 페샤와르.
그래서 이런 일들이 인더스강 중.상류 지역에서 힌두쿠시산맥을 바로 넘어 일어난 일.
실제로 불타의 출현은 갠지스강 중하류. 주 활동지역도 그지역 마가다 왕국.
그래서 인간 석가모니부처님은 네팔에서 났다고 하지만 실제 불교를 일으킨 곳은 그 지역.
퍼지는 건 아쇼카왕때임. BC226년 즉위. 서기전3세기에 활동.
석가모니의 생존 시기는 BC623년. BC554년 사망. 서력 기원 전후로. 불상(헬레니즘)
양식파탄이 일어나는 시기가 불상 일어난지 3세기만에 . 쿠샨제국의 멸망도 그쯤. 250년이면 노쇠하여 해체될 기운이 나타난다. 그 와중에 제국이 해체의 길로 나아간다.
조선도 멸망시 직접적 동인은 일제라지만, 노쇠하여 쇠망할 기운이 있었다. 500년.
임진란때는 새 기운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망하지 않은 것.
쿠샨제국 역시 건국후 250년정도니.BC57카니슈카가 왕국세움.
파르티아 사포르1세의 침입을 막다가 제국 멸망.
이미 망하게 된 상태에서 쳐들어오니 해체된 것. -> 힌두쿠시 산맥 너머는 다 잃고, 갠지스강 유역의 중북인도는 쿠샨제국에게 식민통치 당하고 있던 그지역은 독립을 되찾게 됨.
그럴때 쿠샨제국이 중북인도지역을 완전점령은 카니슈카 2세 AD128등극 23년 통치. 152년까지가 최전성기.
이시대의 미술 - 계주가 살아있고 끈만 남아있을 때 (신비화가 진행되나가는 그런 시기)
이때 중북인도가 완전 쿠샨제국 영토로 편입이 된 그 시대이다.
그런데 중북인도 지역에서 가장 서북쪽이 (갠지스 서쪽 지류 상류근처) 마투라 라는 지역이 있다.
간다라 마투라는 쌍벽을 이루는 지역. 마투라 지역에서 간다라 불상과는 조형적 연계성 없이 독자적으로 불상을 출현시킨다. 그런데 간다라는 그리스적 조형의식에서 사실적 표현으로, 의습에 약간의 과장은 있으나 육신은 전체적으로 사실적 표현, 그리스 신상조각과 일맥상통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아쇼카왕 석주를 보면 페르시아 기법이라지만 인도적 과장된 느낌이 많았던 것 알 수 있다.
순 인도적조형기반에서 불상을 탄생시킨 게 마투라. 이때문에 간다라 불상 최초 출현 후 인도 영향을 끼쳐서 마투라 불상을 일으켰다 서구 학자들이 주장하는데, 그들의 미술사 연구는 인도 지배가 명분 있다는 얘길 하려고 그리스문화로 개화하기 시작했다는 주장 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거의 같은 시기에 마투라에서도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제3자인 우리 입장에서는, 어떤 것이 더 먼저라기 보다는 대승사상이라는 공통 이념을 기반으로 두 지역에서 같이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선후관계를 꼭 정하자면 쿠샨제국의 중심인 서북인도가 그 제국의 주도이념으로 일어난 것이니 거기에서 일어났다고 볼 수도 있다. 상업세력을 이끄는 이념으로 출현한 불교는 상업지역으로 강하게 침투했을 것이다.
서북인도로 가는 교통의 요지인 마투라는, 서쪽 캄베이만, 남쪽으로는 중인도로 가니까, 서인도양과 중인도를 이어주는 곳이니 상업세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일찍부터. 그래서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전에 대중부(상좌부가 전통 고수) 불교가, 결국 세력해서 대승불교로 성장하였다. 개혁성향이 강한 종파가 거기로 갔다. 부가 축적되어,
미술이란 건전한 뿌리와 부의 축적이 찬란한 꽃이 되는 것. 마투라에서도 재빨리 대승 이념을 받아들여 불상을 만들었다는 게 최완수 선생님 설.
일본에서느 ㄴ소승불교이념을 바탕으로 불상을 출현시켰다고 주장한다.
조형기반이 전혀 다르고, 범본을 전혀 달리 택하고 있다. 쿠샨제국에서는 황제 모습이 그대로 불타가 되었지만, 여기서는 소년상(성인식을 갓 치른)이 불타의 범본이 되었다. 마투라 뿐 아니라 중인도 전체가 그러한데, 그러한 습속을 평생 가지고 살다 돌아갔다. 성인식 대체로 머리로 치룬다. 중국문화권에서는 상투/비녀 꽃는다. 인도에서는 케샨타 (주변머리를 밀어버리고 정수리 머리칼만으로 상투를 튼다. 열대지역이라 덥지 않게 트느라고 위에 고정한다. 케샨타. 성인식을 막 치뤘을 때는 세캰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성인식을 치루고 난 모습으로 불상을 출현시켰다. 언제 치뤄지냐면, 계급에 따라 다른데, 브라만은 16세, 크샤트리아 22 바이샤 24세, 수드라는 치루지 않는다. 석가모니는 계급은 크샤트리아이지만 브라만처럼 16살에 한 것으로 해두었다. 돌아갈때까지 16세 동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고 믿는다.
전통적으로 상소불노(언제나 젊고 늙지 않는다.) 부처님의 신체에 대한 관념이 그렇다.
16세 동자 - 영양상태가 좋으니 빨리 자란다. 이미 다 자란거. 육신은 다 자랐는데 자리가 잘 안잡힌 것. 다 동그란 얼굴. 그래서 동그란 얼굴이어야 한다. 그래서 32상중 부처님은 만월면이라고 한다. 거기서 시작. 32상 80종호의 항목중에 4 8 상호 많다는 뜻인데, 인도 문화권에서는 8진법이라 32상. 장아함경에서는 열거하기로 28가지밖에 못 만들었다.
나중에 32상을 다 채우는데, 불상양식이 진행해나가는 모양을 보고 넣었다. 수족 막만상 (물갈퀴) - 조각이 떨어지지 않게 붙여 만든 걸 보고 그런요소까지 집어넣는다. 그래서 만들어놓고 나서 만월면도 추가한듯. 베다시대부터 미남얼굴이니까 있어왔는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커보인다든지 길어보인다든지 할 수 있는데, 인도문화는 열대문화이므로 과장표현하게 되어 지체가 실제 이상으로 길다. 이목구비도 얼굴눈코입 열대지역 특성대로 아주 관능적일만큼 과장되어 있다. 귓불도 길게 늘어져있고. 그러면서, 여기서 의복이 문제가 된다.
의복 - 뜨거운 열대 지역 위도 25도, 간다라는 35도. 10도 차이가 난다. 그러니까 엄청 덥다. 더워서 옷을 다 입고 다닐 수가 없다. 보통사람은 밑만 가리고 다니고, 체면있는 사람은 그위에 치마같은거 입고 입어야 할 때는 둘둘 말아 지고 다니다 집어야 할 때 최대한으로 입는 것이 편단우견이다. 장방포를 (직사각형의 포)
한쪽어깨를 (드러낼 단) 대중앞에서 경전을 설할때에야 편단우견 옷을 입는 것이다(원래 벗고 있다가). 체면차릴때는 안입었던 것을 입고 하는 것이다.
초기에는 설법하지 않는 모습을 표현했기에 짊어지고 있다. 가사와 같은 모양 장방포.
의복을 갖춘것에서는.
지역도 간다라는 모직, 상당히 두껍게 융기되어서 표현. 마투라는 더우니까 얇은 천을 입는다. 신분이 높을수록 훤히 비치는 (투박의(비춰보이고 얇은)) 옷을 입는다. 신체가 다 보이게 된 옷을 입힌다. 그런 옷을입으니까 뭉치는 왼쪽 어깨만 옷주름이 있고, 나머지 부분은 그냥 신체 윤곽이 그대로 노출. 그래서 앉아있을 때에는 문제가 없는데 서있을 때에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가운데로 보이지만 않게 몰아서 표현한다. 치마처럼.
열대문화는 그래서 관능성이 강하다. 이렇게 간다라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불상을 출현시키고 있다.
게다가, 마투라 지역은 역사인물로서 실제로 방문을 했던 지역이다. 그래서 600년이 지나도 그분의 모습에 대한 전통이나 표현할 수 없는 전통도 강하다. 그를 표현을 하면서도 불상이라고 못하고 보살상이라고 프라티나 보디사트바라고 적아놓았다. 반응을 봐서 프라티마(상)이라고 적다가, 한 50년 지나다 괜찮아지니깐 불상이라고 적는다. 이래서, 부처님의 고향이기 때문에 이러한 단계를 밟아서 정착한다. 없는 서북인도는 그냥 표현이 되지만 여긴 단계가 필요했다.
간다라에서는 함흑색의 편암으로. 간다라 근처엔 편암 산지를 아직 발견 못한다. 마투라 근처에선 시크리라는 곳에서 사암이 생산된다. 사암은 상당히 부드러워서 조각하기 적합하다. 아쇼카왕때는 백색사암으로 기념주를 만들었는데, 쿠샨제국의 마투라 불상은 시크리의 적색 사암으로 만들었다. 분홍빛이 강할 정도의. 황색 반점이 드문드문 섞여있는.
불상을 만드는 데에 아주 적합했다.
그래서 마투라에서는 간다라처럼 50년 단위로 양식변천이 된다. 여기서도 머리변화가 두드러진다. 소라껍질모양으로. 한 50년 지나고선 머리칼이 돌아올라가는 사실성이 사라지고, 수평선으로 층된 모양이 된다. 그것을 모방모방하다보니 그것이 상투인지도 잊게 된다. 그다음 한50년에는 그것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수평선조차 사라져서 2세기 전반 3세기에는 머리칼이 다 없어지고 뿔하나 솟은것처럼 된다. 이때 간다라에서는 마투라의 편단우견이 받아들여진다.
마투라에서는 간다라의 통견양식을 받아들인다. 통견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 멕시코 판초옷처럼 받아들여서, 오른쪽 어깨를 감싼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냥 씌워놓기만 했다. 간다라에선 의복을 걸치기 위해 손을 올리는데, 그것을 둘러넘어간게 아니라 목만 씌워놓은 형태로 3세기 전반의 마투라가 된다. 이후엔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자연스러운 통견 표현이 잘 안되어서, 양쪽 주름이 연결이 서로 안되는 식으로 한 반세기. 이후 부처님 머리엔 머리칼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불경에 있으니까, 나중에는 세로가로무늬로 돗자리 문양을 그린다. 근데 그건 아니거든. 그러니까 혼란을 겪고 나서 3세기 중반에는 나발형태 간다라의 나발형태를 받아들여 시작하게 된다. 나발과 돗자리무늬가 같이 나타나는 시기가 있다. 자이나교 상도 그러한 진행과정을 거친다.
키다라 굽타. 4세기-5세기에세속화 6세기되면 완전히 타락.
3세기 후반엔 쿠샨제국의 축소로, 키다라 쿠샨이 남고, 소왕국. 200여년 지속. 그때는 쿠샨제국에서 누리던 간다라양식이 일변하여, 재질이 편암이 아니라 소조상으로 나온다. 이때 논소불교(논장들이 나오면서)
논소불교 - 경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성인. - 기본골격
논은 경에 철학적 논리성을 부여하는 것. 종교가 철학의 늪에 빠지면 소멸하게 되어있다. 경전해석에 천착하게 되면 그렇다 천착하는 사람은 학승들이다. 종교와 철학은 다른 것인데..
100론 12지론 대론이니.. 이걸 종파불교로 중국에서 나오게 하는 요인이 된다.
논장이 이때 많이 만들어지는데, 논장을 만들면 논에 대한 재주석서가 필요한 것이므로 그게 소.
논소 - 경률론 3장 세가지. 여기에 소. 소에 소가 또 붙어 8만4천경..
논소불교가 주를 이루기에, 논소불교를 이끄는 사람은 가장 존경받는 학승이다.
간다라는 황제불상인데 이시대의 불상은 학승들이 범본이다. 아주 이지적인 모습으로 최초에 나온다. 이것도 한세기가 지나면 세속화가 시작된다. 노쇠할때는 장식적이고 화장도 하고 변한다.
그런때에 바미얀대불이 그사이에 만들어진다. 4-6세기에.
마투라쪽에서는 마투라양식의 변화과정을 거치면서 통견과 나발을 받아들여, 그것이 막 만들어지기 시작할때 쿠샨제국이 해체. 마투라 입장에서는 쿠샨의 인도령을 통치하는 수도였다. 인도에선 본래 인도의 강국인 마가다를 중심으로 대제국을 다시 일으키게 된다. 슈리굽타가 서기275년에 굽타왕국을 건설. 200-250년 다시 이끈다. 왕국건설 후 100년 지나 SWMA이 되면 문화절정기. 남인도를 빼놓고는 거의 인도대륙을 통일한다.
찬드라 - 다리/ 굽타 - 지킬 호. 영원한 이름이다.
문화황금기. 굽타제국에서는 쿠샨제국 멸망할정도로 실크로드의 기능이 쇠퇴한다. 바닷길이 열리고 마호메트가 나오면서. 길이 막히니까 쿠샨이 망한다. 인도내에서도 상업세력이 쇠퇴한다. 불교의 쇠퇴도 상업세력의 쇠퇴가 원인. 전통적 베다 브라만 이념을 바탕으로 해서 다른 모든 이념을 흡수해서 새로운 농업세력을 ㄱ이끄는 힘인 힌두교를 출현시켜 중농정책을 표방하게 된다. 드디어 인도 본연의 모습이 되었다. 힌두이즘은 인도의 범신적, 포용적. 불교와 자이나교를 박해하지 않는다. 불상들 역시 계속 발전한다. 극에 이르른다. 통견에 대한 이해도 완전히 끝내고, 통견불상에서 의복재료는 전통적인 얇은 마투라 의복이고, 거기에 무늬가 있으면서 몸윤곽이 다 비쳐보이게. 또한 아주 건장한 20대 중반의 청년상으로 얼굴표정을 진행. 그래서 간다라에선 소년상으로 가는데, 마투라는 미청년상으로 만든다. 결과적으로는 그리스신상과 거의 같은 연령대로 만들어놓는다. 인류가 만든 신상조각으로는 가장 신비로운 조각이다. 마투라 불상.
뒤에는 광배 초화문. 4세기 후반경까지는 대체로 이걸 유지 발전하다가 5세기전반까지도 . 5세기 중반서부터는 키다라 쿠샨이 흔들린다. 키다라가 존재하는 한은 힌두쿠시 산맥너머의 침입을 키다라가 막아줬는데, 마투라에서는 마음놓고 발전을 계속했던 것인데 5세기 중반에 백흉노가 쳐들어와 멸망. 마투라는 국제적 상업도시에서 갑자기 전쟁의 전진기지로 변한다. 그래서 상업활동 못한다. 모두 하류로 피난해서 사르나트라는 곳 - 초전법륜 했던 그곳으로 이주한다. 사르나트가 마투라 공방 출신자의 피난지가 되엇다. 여기 오니, 기술을 가지고 왔다 해도, 현지에서 오래 살다 보면 현지 미술에 적응할 수박에 없다 .이 현지미술은 힌두교 예술. 힌두교의 성교장면 등 나신상. 이걸 받아들여서 옷주름을 없애고, 끝자락만 주름이 있고 나머지는 거의 나신상. 색정적 관능적. 불교가 금욕을 내세우는 종교인데 색정적이라 하면 이미 망할 때가 되엇다. 난해해져서(종교가 망하는 2가지 원인 돈 탐하면 썩고, 어려워지면 접근불가능으로 지지기반을 상실) 불교가 나중에 이슬람이 침입하면서8세기말 - 나란타사라는 1만명의 학승이 있던 절이 이슬람이 점심시간에 쳐들어와 다 죽여버린다.
그때 이슬람교도들이 죽인 것은 불교만이 아니다. 힌두교도도 죽였다. 지금은 힌두교는 더 발전했는데, 왜 불교는 없어졌을까? 상업세력이 없어졌으므로. 불교도 변화하려고 노력했을테지만. 원래 종교의 원초적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 밀교이다. 주술적 힘에 의지해서(원초적 종교의 모습) 불교교세를 유지하려. 그런데 이게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서 보다 탈철학적이지만, 미신적 요소가 강화될 수밖에. 관능적인 쪽으로 흐른다. 불상이 6세기를 넘으면서부터는 관능성을 보이고, (힌두교신상영향으로) S자로 몸을 꼰 보살, 불상은 나신처럼 표현, 보관여래 등.. 이래서 끝이 난 것이다. 인도대륙에서는 불교가 불상양식이 파탄되면서 소멸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적어도 9세기 이후에는 불상을 거의 발견할 수 없다. 그때 우리는 8세기경 불교미술을 완전히 종결시킨 석굴암이 나온다.
여기까지 인도를 다 했다. 키다라 불상은 머리만 남고 몸통은 허술하게 만들었기에, 남은건 해체되어 거의 안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