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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자의 초상을 비롯해..

영나쌤이 문제를 내던 시대의 내용들이다.

혹시 기출소스를 가지러 내 블로그에 오셨다면 영나샘것은 잊으시라..

-16C~ 17C:강력한 국가들이 등장 <스페인과 프랑스> 왕의 초상화들이 많이 나타난다.

   

16세기 베네치아

티치아노-1548 율버그의 찰스 5세

당시 최고의 색채화가 티치아노

베니스는 무역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안료를 수입하는 중계도시여서 값싸게 안료 구할수 있었음.

다른 나라의 르네상스보다 향락적 분위기

이 그림에서는 찰스 5세가 몸이 매우 약한 사람이었지만 기마상을 그림으로써 용맹성을 돋보이게함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포즈)

   

유화 15c부터 발견 예전의 조그만 그림은 템페라화임 유화의 등장 이후 나무나 천 위에 그림그리기 시작 새로운 색을 만들 수 있고 광택이 나며 텍스쳐의 표현이 자유로워지고 견고해짐

   

얼굴보다 색채와 아름다운 풍경에 더 신경쓴 분위기

17세기 스페인

디에고벨라스케스-1650 인노켄티우스10세

통치자 앞에서 그리는 초상화는 미화되어 있기 마련인데 벨라스케스는 자신의 느낌대로 그림 이는 어느정도 사실과 해석이 공존함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얼굴(악몽의 대상)

   

이 당시 교황은 굉장히 의심이 많은 강력한 힘의 소유자. 번쩍거리는 빨간색과 하얀옷의 조화

   

약간 움직이는 듯한 손

17세기 영국

안토니 반다이크

-1635 찰스 1세의 초상

영국 귀족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린 안토니 반다이크 뛰어난 초상화가라 불리는 이유는 왕을 돋보이게 하는 방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1.모자로 가린얼굴-> 얼굴이 눈에 제일뜀

2.말과하인의 등장->높은지체 상징

3말도 경배하듯 숙이고 있음

4.나무도 왕을 호위하는 느낌

5.하인들 2명을 겹쳐서 그린다.

17세기~18세기프랑스

루이 14세의 초상

-1701 리그

백합 모티브는 루이 14세 왕가의 문양

왕의 권위 상징문장이 다 나옴

   

   

   

1800년대 프랑스: 혁명의 이미지

나폴레옹의 집권

1800년대스페인의 엉망진창인 정국

자크루이 다비드: 알프스를 넘어가는나폴레옹 (1800)

나폴레옹은 대중앞에서 자기 이미지를 만들기 좋아했던 인물. 정복자이면서 통치자의 가장 적합한 기마상의 motive 실제로는 당나귀를 타고 넘지만 큰 말을 타고 넘는 모습으로 그림 뒤에 군인은 쪼그맣게 그리고자기만 크게 그림 알프스 위이자 미래를 약속하는 이미지.

한니발: 알프스 보나파르트 샬르마뉴 칼대제의 이름을 동시에 왼쪽편돌에새김으로써 동일시

고야 : 카를로스 4세의 가족초상화(1800년대)

뒤에 화가의 모습과 화폭이 있다.고야는 당시 궁정화가 얼굴의 모양을 자세히 보면 볼수록 교만해 보이고 겸손해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면모는 반짝거리는 옷등으로 무마 고야가 그들을 조롱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게 이상함

고야 자신은 이들과 다르다는뉘앙스 (화가의 자율성-근대에 가까움)

-20c 에 들어 개인숭배가 줄어 들면서 초상화가 줄었다.

ehrler 총통 1939 건축도구를 히틀러 옆에 그림으로써 히틀러가 일종의 새로운 제국의 건축가로써 그려지다.

   

-Lenin, Moscow

사회주의 국가 소련 중국에서는 통치자의 두상이 많이 새워진다. 엄청나게 많은 레닌의 동상은 많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레닌 자신은 이런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로버트 라슈엔버그 1960

대통령 꼴라쥬

자기와 특별히 의미 있지 않은 잡동사니를 붙임

단지 하나의 이미지중의 하나로 케네디가 들어간다.

통치자 우상시 하는 이미지는 아니다.

   

   

00파일 이탈리아 르네상스(피렌체)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10

   

00.이태리 불란서의 신의 이미지.HWP 

그치만 앞에 아마르나 양식이나 뭐 헬레니즘 이런거나 아니면 아무튼 비잔틴이런건 따루 정리를 하셔야 되요

<이태리 불란서의 신의 이미지>

   

<전기르네상스>

①마사치오

-brancacci chapel 마사치오 성전세 1425~ 28

brancacci의 개인용 채플임 그린 목적은 세금좀

더 잘내라는 메시지

선원근법과 풍경의 색과 앞의 전경색차이로

나타나는 대기원근법을 다 적용함 그러나

아직도 중세적 요소-> 한 장면에 여러 가지

이야기

   

-에덴에서의 추방: 사람크기의 적나라한 누드표현

르네상스를 뜻함

   

  

②도나텔로

-성조지 1415~ 17

당당하고 이상적 아름다움을 지녔다. 그러나

그저 이상화 되지 만은 않은 상황을 파악하려는 인물이라는것

얼굴은 젊고 이성적으로 다시 그리스 로마 청년상으로 변하였으며

기사로서 방패를 들고 있고 밑부분의 부조는

대기 원근법과 선원근법이 들어가 있다.

-다윗

중세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고대 이후 첫 번째 등신대

누드 조각상 그러나 얼굴은 그리스 조각보다 사실적임

그리스의 콘프라 포스토 자세를 하고 있음

비례는 아름다운 신체 비례

완전히 성숙되어 보이지 않는다.(12~13살: 도나텔로 양성애자?

다윗이 처음 자신의 신체 능력을 깨달은 장면

르네상스인들이 자신의 신체능력을 깨달은 장면?)

흐르는 듯한 윤기의 청동질감을 갖고 있음

승리한 뒤의 다윗으로서 도나텔로가 투스카니 지방의 한

목동을 모델로함

   

   

③브루넬레스키

-산로렌조 교회:

높이가 낮아지고 수평으로 잘린 천장. 기둥등도 심플해졌다.

코린트식주구. 정확한 수학적인 비례와 기둥과 기둥의 사이

를 1로 보았을 때 기둥서 코린트 양식도 1 (정사각형)

그 위에 반원의 형태 굉장히 수학적 비례 파르테논 신전

등에 보이는 비례가 나타난다.

고대로마 연구를 통하여 교회에 적용했다.

   

why 수학: 이 당시 수학은 명확한 진리를 나타낸다고

생각하였다.

-파찌 채플: 메디치 가문과 경쟁하던 가문 정면 파사드

형태가 개선문 같다. 역시 1대1의 비례가 되풀이됨

   

④종교화의 인간화

1. fra fillip lippo 배경이 일반 가정집과 같으며

마리아에게 후광이 없다.

그이전보다 더욱 인간적인 마돈나의 형태로서

모든 것이 더욱 인간화됨

사실적이지만 부드러운

   

2.마사치오

후광이 있으며 물리적 육중함과 집중된 힘을 읽을 수 있다.

명암의 대조가 너무 세다.

   

   

3. Fra Angelico 수태고지 1440~45

매우 수학적인 건축이다. 일직선상에 원근법을 적용

원근법 : 원근법은 기본적으로 휴머니즘이 기본바탕

내가 본 장면 시야에서 건축과 인물을

조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piero della francesca 부활 1463

: 이사람은 은빛이 비치는 듯한 그림을 그리는게 특징이었다.원래는 예수의 오른쪽이 예수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에게서 보는 오른쪽이 예수 이후의 세계 암시 (르네상스 시대의 휴머니즘) = 왼쪽은 황폐한 숲 오른쪽은 울창한 숲

밑의 4명의 인물 측면/정면/3/4면/뒷면

뒤로 젖힌 얼굴의 사람은 원근법에 대한 도전

삼각형구도: 정적이며 안정감을 주는 느낌이다. 예수의 얼굴이 거의 정면 부동적 영원한 조각적

중량감과 조각적인 느낌은 프렌체의 특징이다.

     

   

⑤1400~1500 초기 르네상스 => 콰트로첸토 후기에 보티첼리가 나옴

1. Botticelli 비너스의 탄생 1482

조각적이지 않은 누드 (why? 명암 의 대조가 엄청 강하지 않기 때문)

원근법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당시 피렌체는 원근법이 붐이었음

어떻게 보면 유니크한 화가이다. 지

적이면서 수줍은 비너스는

(why? neo 플라톤학파의 영향 )

네오 플라톤 학파란: 정말 플라톤을 잘 이해했다기 보다는 플라톤과 + 기독교의 결합으로 미(美) 를 통하여 기독교 하나님의 세계가 합치 될 수 있다. 기독교적인 비너스 왼쪽은 제피로스라는 북풍의 신

사실적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선 자체의 흐름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섬세하지만 약하지 않고 생동감있는 그림

Primarena봄 1478

왼쪽에서 시작해서 지그재그 하는 구성

강한 명암의 대조가 아니지만 구불구불한 선과 옷의 아름다운 흐름이 느껴진다. (특히 삼미신)

===> 중요한건 보티첼리의 이러한 원근법이 느껴지지 않는 그림은 당시 피렌체 스타일이 아니었다는거

   

<전성기 르네상스>

①레오나르도 다빈치

1.암굴속의 마돈나 1485

   

화가라기 보다는 과학자의 면모가 있는 "르네상스 인간" 이사람의 note (수기원고) 원래 왼손잡이였기 때문에 왼손을 씀 거울에 놓고 봐야 한다.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보통 사람같은 마돈나(후광이없다.)

그러나 범인과는 다른 매우 성숙해 보이는 이상적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암벽의 모습이 과학적으로 묘사되어있으며 암굴에 자라는

식물들만 나오는 것을 볼수 있다. (경험론자)

   

삼각형 구성, 얼굴만 보면 원형의 느낌이다

심리적 신체적으로 하나의 그룹인 느낌이며 오른쪽의 천사가 우리쪽을 보고 있음으로 해서 관객역시도 연결되는 효과

왼쪽애기는 요한으로서 축복을 받아들이는 동작을 하고 있고 오른쪽 애기는 축복을 내리는 동작을 하고 있다(축복의 동작---> 예수나 하나님만 가능함)

정확한 선이 아닌 스푸마토-> 경계선이 부드럽다.

레오나르도의 얼굴은 신비롭게 느껴진다.

   

=======> 그러나 첫 번째 그림이 퇴짜 받음 런던버전은 그 이후에 "후광" 을 포함하여 그

린 것으로 오리지널이 아닌거다.

2. 최후의 만찬 1499

밀라노 수도원의 식당그림이다.

예수님 홀로 있다-> 앞으로 홀로 받을수난암시

이전의 최후의 만찬에서는 유다가 따로 떨어져 나가 있었으나

성경을 토대로 이들 제자의 성격을 하나하나 연구하여

성미가 급한 성 토마스 맨 먼저 손가락 치켜들고 예수께 묻는다.

제일 어린 애제자 요한

모든 선이 예수의 머리에서 만나고 뒤의 3개의 창문은 하늘을 등지고 있어 성3위일체를 뜻한다.

   

예수는 반듯한 삼각형이고 예수의 얼굴을 중심으로 완벽한 원이 이루어진다.

마치 실제 인간사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을때의 반응은? 이런 느낌

   

②라파엘

1.1505 마돈나의 초원 (메이비 이거?)

2. 1505 그랑두카의 마돈나 ============> 르네상스 최성기와 일치하다.

그는 종합의 귀재 이제껏 발견을 종합함(르네상스의

특징을 잘 나타냄)

   

아기가 진짜 애기 같다.

   

보다 인간적 자애로움 모성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하였다.

    

3.1510~1511 아테네 학당

   

고대 그리스 아테네 문명을 찬양하는 일종의 상상화이다. 깊은 공간을 내다 보는 듯한 원근법의 자유로운 사용이느껴짐 . 같은 건물 내에 천지 창조 천장화를 그리고 있었다.

라파엘의 아테네 학당의 자세 등은 당대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았다.

   

   

=> 사족을달기(2004년도 전기) 흔히 라파엘을 르네상스 미술정신을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한 화가라고 한다. 이 말의 의미를 그의 작품을 예를 들어 설명하시오

제 생각에는 라파엘은 그의 선배 거장인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업적을 반씩 섞은 사람입니다. 다빈치의 그림은 미켈란젤로의 그림보다 좀더 회화적이고 안정적인 느낌을 주지요. 그것은 선을 스푸마토 기법을 이용하여 뿌옇게 처리해주고, 르네상스의 창안이 삼각형 구도를 적극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건 위의 그림에서 확인하실 수 있을거에요

   

근데 미켈란젤로는 그렇지 않다는 거죠 굉장히 조각적입니다. 그는 회화보다 조각을 더 좋아했는데 조각이 더 신에 가까운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조각을 "대리석 안에 갇혀있는 인물을 해방시키는 것" 이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의 그림은 이런 그의 생각이 반영된 탓인지 마치 조각을 그린 듯한 효과를 내고 있지요.

   

결론은 라파엘은 그란두카의 마돈나같은 그림은 레오나드도 다빈치 식으로 아테네 학당은 미켈란젤로식으로 그린것.

   

   

③미켈란젤로

  

  

1.미켈란젤로 다윗 1501~4

머리가좀 큰이유는 밑에서부터 보도록 고안되어있는상이기때문

그림, 건축, 조각을 다했지만 그는 자신이 조각가라는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도나텔로의 다윗과의 차이는 가장 신체적 절정기의 다윗이라는 점이다. 또한 돌을 갖고는 있는데 던질까 말까하는 갈등을 그리고 있다.

굉장히 큰 거상으로 4m? 가량 원래 야외에 놓여지게 되어있던

것이지만 오리지널은 미술관에 있고 광장에 있는 것은 카피이다. 커다란 대리석이 필요했기 때문에 조각가로서는 대리석 확보가 중요했을 것이다. 이 사람은 남이 하다만 조각을 이용하였으며 때문에 다윗의 옆은 상당히 얇다. (덩어리 부족)

기본적으로 관람위치는 르네상스에서는 앞에서만 본다(정적인조각) 그러나 바로크에 이르러서는 관람자의 위치는 사방팔방

   

콘트라 포스토의 자세는 그리스 조각의 영향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리스 조각과의 차이는 몸 전체가 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는 편안한 반면 얼굴 표정도 개성

적 양식이기 때문.

미켈란 젤로는 불필요하리만큼 신체를 불편하게 보이도록

그림을 그리거나 만드는 경향이 있다. (성격탓인듯)

   

  2.미켈란 젤로 시스티나채플

   

이런류의 대형그림은 후원자가 있는 상황에서만 나올수 있는것

1508~1512(천정화를 그림)-두개 사이에서 양식의 차이가 나타남-1535~1541(벽화그림)

-천정화(1508~1512)

   

   

  

  

   

   

부분샷:

르네상스란: 옛날 그리스 로마의 재생의미. 그러나 아직까지도 종교적 사회이다. 중세 시절 의 종교적 영향+인간을 아름답게 생각한다. 르네상스는 중세의 부정은아님/

다시 그리스의 누드 (이상적 인간형이 나타나면서)

신도 아름다운 사람같이 만들어 버림. 이 장면은 아담을 떠나보내는 장면이다.

아담의 몸은 육중함에도 불구하고 얼굴에는 힘이 없는 반면 백발노인인 하나님

의 얼굴은 역동적기운.

프레스코화로써 천정에 그려있다.

-1535~1534 시스티나 성당 최후의 심판

본인은 조각가라고 생각하던 미켈란젤로이지만 율리우스 2세 때문에 천장화를 그리고 그후 벽화를 그렸다. 이 그림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중앙의 인물로서 자비로운 예수그리스도가 아닌 결의에 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교황권이 흔들리던 당시 상황과 연관이 있다.

(루터) 매우 어지러운 시기로써 르네상스의 원근법이 사라지고 전반적으로 중세적 느낌이 다시 나타난다.

예수 조금 아래쪽에 바톨로메오(껍데기가 벗겨져 순교한 인물)는 항상 자신의 껍질을 들고 다니는데 이 껍질에 미켈란젤로는 그의 자화상을 그려넣음. 이것은 신체보다 다시 정신것만 추구하는 중세적 분위기를 암시함

전반적으로 인물들이 몸이 커지고 허리가 비대해진다. 이는 미켈란젤로의 후기양식이다.

   

밑에는 지옥도임 공포에 찬 영혼들과 배타고 오는 악마 등 실질적으로 사람이 처음 이그림을 접했을때 보는 장면은 예수의 그림이 아닌 지옥도 부분 . 재미있는 점은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 가장 잘 보이는 부분은 뱀이 뚤뚤 말고 있는 사람인데 이 사람의 얼굴에 추기경의 얼굴을 그려넣었다. (맨날 잔소리하던 인물)

  -----> 지금까지는 피렌체의 르네상스임

   

   

베니스 르네상스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16

   

베니스의 르네상스

<베니스의 르네상스: 베네치아 는 당시 무역의 중심지/ 중계무역의 도시

때문에 베니스의 물감은 비싼 물감이 조금 쌌음 그런탓인지

베네치아의 르네상스는 보다 향락적이며 색채가 화려하다.

물질적인 분위기가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베니스에서는 이상하게 풍경화가 발전하였다.

1.티치아노, 페자로 가족과 마돈나(1526)

   

마돈나와 아기예수

천국의 수문장 베드로(열쇠)

성프란체스코

페자로 가족들(맨오른쪽 밑에-> 1526년 쯤 되면 옛날에는 종교화에 사람이 들어가지 않았으나 이때는 완전히 세속화되어서 사람이 막 들어간다.)

   

대각선 구도의 강조: 역동적 느낌

아기천사가 날아다니고, 파란하늘, 햇살이 따뜻함

   

기존의 마돈나 그림은 마돈나가 중앙에 있고 양옆에 성인이 있거나 이런식 으로 비례가 맞게 했지만 티치아노의 경우 색으로 비례를 맞춘걸 알 수 있다.

전반적으로 구도가 오른편으로 쏠림에도 불구하고

왼쪽 오렌지색 깃발이 비례도 맞고 화면에

신선함도 줌

그는 레오나르도의 "소묘실력" 만큼 "물감" 을 잘 다루었다.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여성의 피부 vs 시트

붉은 천 vs 흰천

두꺼운 우단 커튼

   

==> 감각적인 그림

   

비너스가 빤히본다. 실제 세계의 한여인같은 느낌 그냥 여자 그려놓고 제목만 붙인게 아닐까?

와상-> 드러누워 있는상

   

페미니즘미술사적 견지에서 여성의 드러누운 상은 일종의 핀업걸?

가장 많이 서양 미술사에서 그려진 것으로써 invite 의 의미

남성을 위해 그린 남성의 그림

--> 여자는 드로잉 연습도 할 수 없었다. (왜? 누드화로 연구하니가)

주로 르네상스 시기 여성 화가들은 아빠가 화가이거나 한 경우

거의 99%가 가 19세기 까지 남성화가 여성화가들은 온리 정물화와 초상화

   

   

플랑드르와 독일의 르네상스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18

   

<플랑드르(네덜란드 , 벨기에)의 르네상스>

Master of Aemalle 또는 Robert Campin, Merode

제단화 1425~ 28

실제 얼굴에 가까운 얼굴들이 나타난다.

오른쪽의 요셉은 쥐 덮을 만든다. (악마들을 잡아들일 그리스도 의미)

왼쪽의 주문자는 문 밖에 있다.

가운데 방에 초에 촛불은 꺼졌고 백합이 있다.

사람들의 주름이 매우 독특-> 실제감 이 x

======> 원근법 적용이 안되 있다. 시선이 매우 부자연스럽다.

방이 교회 사원이 아니고 중산층의 집 가구등 물건이 잔뜩

정물이 훨씬많다.

세속화로의 종교화가 여기서도 그려지고 있다.

중요 point: 플랑드르의 원근법은 아직 발달하지 않았다.

또한 정물을 통하여 함축된 의미를 전달한다.

사실주의 화법 (얼굴만 봐도 훨씬 실제 얼굴에 가까운 얼굴들 등장)

세밀한 표현 (옷, 주름 장황)

공간과 인체의 상관 관계가 매우 어색하다.

   

   

①얀 반 에이크, Jan van Eyck, Arnolfini의 결혼 1434

유화의 사용, 깊이감 있고 보석 같은

사실주의의 대가인 반 아이크는 네덜란드에 온 이탈리아 상인 아르놀피니와 그 신부의 결혼식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뒤의 벽에 걸린 거울에는 서약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화가인 판 아이크 자신의 모습도 반영

거울 위에 " 얀 판 아이크가 여기 있다. 1434년"이라고 쓰여져 있는데. 이는 화가가 이 결혼식을 증명하는 입회인임을 나타낸다. 그림 속에 그려진 모든 사물들은 이 그림의 주제인 결혼의 신성함을 상징하고 있다.

-삽살개: 충성

-대낮인데도 오직 하나 켜있는 촛불: 그리스도를 상징

-두 사람이 신발을 벗은 이유는: 성소이기 때문

-거울옆의 묵주: 순결

   

   

==========>도상학 Icon=이미지 graphy=reading

Ex) 비둘기 (옛날) 평화 (NOW) : 당시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

②유고 반 데르 관, 포티나리 제단화 1476

Hugo van der Goes, Portinari Altarpiece 

   

   

<독일>

알브레히트 뒤러 (제 생각에 뒤러 부분은 더 첨가를 하셔야 할듯)

   

1500 자화상

DURER

그당시 자화상은 많이 그려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실물을 정밀하게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해석한 자화상

독일의 레오나르도로서

인문주의자, 이론적, 이태리 여행후

르네상스 미술을 잘알 고 그림

마치 그리스도 같은 자화상

   

   

뒤러: 4 성인

1526

요한, 바울, 마가, 누가

4 신약의 성인들

마틴루터 신교화 되기 시작한 독일

당시 종교 변화와 맞물려 해석

   

   

바로크와로코코 - 로마와 네덜란드, 스페인과 프랑스 바로크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18

   

<바로크 미술>

바로크: 괴이하다는 뜻 "불규칙한 진주" 라는 의미 (좋은의미가 아니다.)

당시에는 르네상스를 잘 이어간다는 생각이었겠지만 그러나 19c 에는 그렇게

보지않았기에 이런 이름이 붙여짐

17c 변화->1. 교황 권력 < 왕의 권력

2. 스페인이 강대국으로 부상(콜롬버스) 아직 독일 등은 발달하지않음

3. 루이 14세의 프랑스

4.네덜란드의 독립(무역의 중심지)

====>바로크는 국가별로 특색있게 진행된다. 르네상스 처럼 통일 양식이 아닌 국가 중심

정확히 말하려면 17세기 라고 보는 것이 좋다.

①건축

교회의 위기-> 마틴루터이 신교의 위협에 따라 카톨릭 자체의 부흥운동이 일어남 로마를

신앙의 중심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베드로 대 성당 중심(바티칸)

   

이 건물은 사람들을 끌어안는 제스쳐를 취 하는듯한 디자인이다. 이 성 베드로 대사원의 콜로네이드는

베르니니가 (1656~57) 지음

공간속을 침투하는 이러한 구조는 바로크의 특징이다.

바로크의 특징: 적극적, 운동감, 드라마틱, 조화보다는 효과

르네상스: 정적, 균형

   

(내부)

베르니니 성 베드로의 옥좌

1952~ 66

여태껏 단순 명확했던 르네상스와 달리 명확하지 않는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함 이것이 바로 바로크 적이다.

왼쪽은 카톨릭 오른쪽은 그리스 정교 상징

구름과 아기천사들이 위에서부터 팍 퍼져서 나오는 듯 하다.

회화, 건축, 조각이 합치되는 극적 idtlr

   

   

당시에는 르네상스 양식을 최고로 여겼기에 못마땅했지만 19세기 말부터는 다 이해~

   

   

   

②카라바지오: 카라바지오는 바로크의 선구자적 인물로 이 사람이 창안한 암흑양식(il tenebrose )를 창시한 인물 이거 굉장히 바로크적인 양식으로 앞으로 나올 바로크의 거장들 렘브란트나 벨라스케스도 이러한 것에서 영향을 받은것을 보여서 굉장히 중요한 화가입니다.

   

-1600년 에마우스의 저녁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비교해 봤을 때 매우 대조 )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후 처음 나타난 순간으로서 "내가 예수다" 라고 하는 장면이다. 이전의 성인들은 성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반하여 여기의 사람들은 세속적이고 여태껏 등장하지 않았던 서민의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들은 종교적 성인들이 갖추어야 할 것을 갖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연극적이고 과장된 몸짓 양 옆의 사람들의 팔은 화면 밖으로 경계선을 밀고 침입하고 있으며 식탁 위에 가자미가 있는 그릇을 보면 식탁에서 나올 것 같은 것을 알 수 있으실 것임. 이것은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불안 한 마음을 주고 또한 그림에 참가 시키는 요소이다. 전반적으로 이들은 주름살 가득한 모습과 헤진 옷을 입고 있고 여기서 묘사는 매우 사실적인데 이것을 "자연주의" "사실주의" 라고한다.

굉장히 극적인 명암을 사용하였다. 그림속의 사람과 그림보는 사람의 경계가 굉장히 가깝다. 마치 번개가 앞에서 친 듯한 닭다리 빵등을 정밀묘사했다.

-1599~1602년 성 마태의 소명

예수님이 성 마태에게 나타나셔서 이리로 와서 나를 따르라 하는 장면으로써 맨 오른편에 팔을 쳐들고 있는 인물이 예수입니다. 여기서 손을 쭉 뻗고 있는 인물이 예수님인데 이것은 시스티나채플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에서 하나님의 손동작으로써 카라바지오는 자신이 그림에 대하여 안다는 것을 이런식으로 표현했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지식을 자랑? 하는 것이 당시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이들 역시 당대의 옷과 당대 사람들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빛의 효과적인 이용이 역시 바로크적 요소를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바울의 개종

유태인을 박해하던 바울이 말타고 하인이랑 가다가 눈이 안보이면서 말에서 떨어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다.

이것도 극적임 연극적인 분위기

   

   

   

   

   

   

   

③베르니니

-다윗상(1623)

   

원본 클로즈업(얼굴표정 주목)

   

몸을 최대한 틀어 돌을 던지기 직전의 모습을 그림. 르네상스의 다윗은 그냥 서 있었던 것에 비하여 애는 운동감이 느껴짐(르네상스 는 콘트라 포스토) 그러나 르네상스식 이상적 신체를 갖고 있으며 만지는 것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 바로크의 조각은 여기저기서 보는 조각이고 르네상스 상은 볼 때 한 시점에서 관람하는 것

   

여기에서 다윗의 시선이 뒤로 향하면서 다윗이 마치 골리앗을 노려보는 듯한 느낌을 주며 다윗과 골리앗 사이에서 보고 참여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전시장 전체가 작품의 일부가 되는 듯한 느낌.

   

-테레사의 무아지경(1657~ 1666)

   

몸이 옷 속에 녹은 듯한 느낌 얼굴, 발만 거의 제대로된 신체이다. 종합적 드라마틱 효과/ 얼굴표정이 포인트(무아지경에 빠져있음)/관람자를 참여시킴

   

빛이 실제로 내려오는 듯한 모습 실제 창문이 있다.

아름다운 교회에서 이러한 장면을 실제로 보는 듯 하다. 스페인 성인 성 테레사가 부모의 간호중 기진맥진한 현장. 잠자는데 능금빛 뺨의 천사가 화살로 가슴을 꿰뚫는다.

   

<플랑드르의 바로크-루벤스>

루벤스는 Prince of the painting 일 만큼 짱 잘 그림. 어린시절 이태리에서 유학(르네상스 습득) 자신의 고장서 그림

-십자가를 올림 1610

이태리 유학갔다온 루벤스의 초기작으로써 미켈란젤로의 영웅적 신체의 영향을 볼 수 있다. 대각선 구도는 역동적으로 보이게 해 주며, 상승하는 힘과 하강하는 힘이 부딪혀 역동성을 더해준다.

초기의 작품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선과 형태를 중시한 모습

이후 점점더 색채에 신경을 쓴 모습으로써

   

플랑드르의 전통으로서 사실적인 얼굴과 배경을 보여준다.

   

루벤스는 말등 사나운 동물들을 잘 그렸던 것으로도 유명 그러한 면모가 이 그림에서 나타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사랑의 정원(1638)

이것을 그리던 시기쯤 되면 인기가 너무 많아져서 주문이 쇄도. 조수가 300명이나 있고. 조수가 다 그리면 마지막 5%만 루벤스가 그리는 식. 이 그림은 첫 번째 부인이 죽고난후 거의 50살? 넘은 루벤스가 (내 기억에) 20살 신부와 결혼한후 어린신부에게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자전적 작품으로

   

실제와 신화의 혼합을 보여준다. 왼쪽은 수줍어 하는 신부를 루벤스가 자신들이 사교모임에 소개시켜주고 오른쪽으로 진행될 수록 가까워져서 (사랑의 대화) 오른쪽 끝은 행복한 부부의 모습. 오른쪽끝 빨간색 옷 입은 사람 아래의 강아지는 충성을 상징하며 큐피트가 날아다니고 사랑의 여신인 비너스조각의 등장

-프랑스 앙리 4세 부인 메디치가의 마리아 드 메디치 24점의 그림

(불란서 화가들이 루벤스 그림을 볼 수 있는 기회)

루벤스의 가장 야심적인 대작은 프랑스의 여왕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를 기념하는 연작화이다. 그녀는 왕실의 재정을 마구 탕진하고 남편인 왕과 매우 사이가 안좋았던 어리석은 여자였는데 남편이 살해당한 후 잠시 프랑스의 왕위를 계승했던 군주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루벤스에게 루브르 궁의 2개의 방에 자신의 "혁혁한" 업적을 영원불멸하게 기록할 연작화를 그리도록 주문 그는 21개의 마르드 메디치 시리즈를 3년만에 조수도 쓰지 않고 완성. 이 그림을 그리는데 가장 큰 어려움은 이렇다할 업적이 없는 그녀의 생애를 어떻게 영광스럽게 윤색해 내느냐는 문제. 그는 마리 드 메디치가 아들을 낳는 장면을 장엄한 탄생화로 바꾸고 있다. 마리의 교육 장면에서는 미네르바와 아폴로 신이 직접 음악과 웅변술을 가르치고 있음

   

<마리 드 메디치의 마르세이유 입성 1622~23 루브르 박물관>

지금 이 그림에서는 명예의 여신이 황금 나팔을 불며 그녀의 프랑스 입성을 환영하고 있다. 그는 일부러 마리의 이중 턱을 그려 넣지 않았는데 대신 보는 이의 시선이 전면에 있는 풍만한 육체의 관능적인 바다 요정들에게 가도록 하고 있음. 루벤스는 풍부한 색채, 호화로운 의상, 금으로 만든 배와 같은 바로크 시대의 과장된 표현을 봉주고 있다. 루벤스의 생애와 작품은 모두 활력에 넘치는 것이다. 주제가 무엇이든 간에 루벤스는 금방 그림 전체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감싸버린다. 그것은 오래 사는 것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루벤스 자신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프랑스의 바로크>

①루이 14세의 베르사이유 궁전

당시 프랑스에서 지방 영주들이 아직 권력이 있었던 시대로서 그래서 루이 14세는 베르사이유에 매주 귀족들을 불러놓고 party를 했었다. 원래 왕들이 사냥하던 곳으로써

궁전 뒤는 숲이 있고 그 앞에는 조경을 조성해 놓았다.

Le Vau 와 Mansart는 궁전설계 Le Norte 는 조경을 설계하였다. (궁전설계와조경설계다름)

르네상스와 비슷한 분위기이며 바로크적인 지나친 화려함이 느껴지지 않는 절제된 화려함은 프랑스 바로크의 특징이며 이를 classical 바로크 라고 부른다.

정원역시 절제된 분위기이며 기하학적이다. 이는 인간이 자연을 control 한다는 분위기

화려하긴 하지만 지나치게 화려하지는 않음

거울의방 (gallery of mirror)역시 규칙적인 반족과 질서정연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거울은 확장된 공간으로써 이러한 면은 바로크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베르사이유 궁전은 그 거대한 규모로부터 바로크 적임을 알 수 있다. 18c 에 여기 저기 비슷한 흉내내는 애들이 나타났으며 이들은 터키, 이스탄불등의 궁전을 지음

   

②푸생 Poussin 사비니 여인들의 강탈 1636~37

소위 말하는 미술의 개념과 미술교육의 개념을 확립한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서 미 美란? 사람들이 보고 교훈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 즉

"주제" 가 중요하다고 생각. 과거의 위대한 인물, 사건을 그리는 "역사화" 가 중요하며 정물화등은 솜씨가 부족한 화가나 그리는 좋지 않은 주제로 생각하였다.

주제 결정 이후 MODE (난폭, 행복 등....)를 결정한다.

   

사비니 여인들의 강탈

     

  고래 로마가 제국으로 커지기 전 인구가 적었다. 특히 여성이 부족하여 사비니 여인들을 강탈함. 스케치의 정확성. 미술은 무언시이기 때문에 말없이도 주제가 전달되도록 연극적인 모습. 거의 판토마임 같은 동작과 개인별로 나타나는 특징적인 표정이 있다. 하나씩 보고 따라 그리고 합쳐서 그리기를 반복함. 인체나 로마조각을 놓고 하는 이러한 드로잉의 방법은 미술교육의 시작 "아카데미식" 교육의 시작이었다. 이후 인상파 화가들이 나타나기 전인 200여년동안 프랑스 미술교육과 영국 미술교육의 방법으로 화단의 파워 형성

   

위의 그림을 보면 혼란의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수평선과 수직선의 모습이 굉장히 계획적이면서 절제美가 느껴진다. 선과 형태 중심의 미술이다.

   

포키온의 장례 1648

풍경이 중요하다. 그러나 역사화이다. "포키온" 이 누명을 쓰고 사형당한 뒤 아테네 시 밖으로 시체가 치워지고 있다. 시선의 구도가 굉장히 계획적이다.

이런 그림을 보면 서양사람들은 자연을 지배하려 하였고 동양사람들은 자연에 동화되어 살려 하였다는 일반적인 인식론이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 사람들 작품 중 이상적 자연의 풍경도 많다. (상상적)

   

<스페인의 바로크>

벨라스케스

시녀들 LAS MENINAS (시녀들)1656

그룹 portrait. 제일 재미없는 그룹 포트레이트는 일렬로 서있는 것일 테지만 이 그림은 마치 지나다니다가 얼핏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으로 매우 신선하다. 초상화 +일상장면 (풍속화 genre painting) 을 합쳤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것은 왕과 왕비의 모습. 어찌보면 보는 사람이 왕과 왕비의 느낌을 준다. 난쟁이의 등장 이러한 난쟁이는 궁전에서 왕족들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놀이의 대상이었다.

고야의 그림중 카를로스 3세의 가족 초상화를 보면 고야가 이 그림을 보고 차용한것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에서 벨라스케스는 가슴에 빨간 훈장을 달고 있는데 이것은 받고 싶었는데 당신은 받은 적이 없었던 훈장이다. (이 그림을 받고 난후에 받았다. ) 벨라스케스의 그림중 이정도로 큰 것은 이 것 밖에 없다. 꽃등의 묘사가 정확히 묘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붓터치와 하이라이트로 묘사되어 있으며 또한 그림 내에서 자기가 보는 정도만 그린 것으로 매우 시각적이며 광학적이다. (optical) 광선이 왔을 적 오는 하이라이트가 미묘하고 복잡한 느낌이다. 이당시 이런 식으로 보이는 "만큼" 만 그리는 것에 집중한 사람은 벨라스케스가 유일하다.

-----> 나중에 인상주의 화가들에 영향

   

<네덜란드>

해군력이 강하고 무역으로 부를 축적. 중산층이 두터운 나라로서 신교를 믿었기 때문에 종교화와 종교조각이 거의 없다. 초상화와 정물화 풍경화가 인기가 있었으며 사이즈는 작을것을 좋아하였다. 대게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는 주문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여기에는 화상이 존재가 두드러진다. 그룹 초상화가 발달 하였고 그래서 군소 작가가 엄청 많았다. 초상화의 가격은 전신상은 반신상의 2배 뭐 이런식이었다.

   

①렘브란트

1632 Dr. Tulp 의 해부학 강의

   

렘브란트는 그룹 초상화는 자칫 딱딱해 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드라마틱하게 그렸다. 렘브란트 초기는 바로크 양식의 강한 명암의 대조가 느껴진다. 그러나 얼굴 부분은 정확히 그려져 있다. 주로 당시에는 사형수의 신체로 해부학을 진행하였다고 하며(2번 벌을 받는다는 느낌) 메멘토 모리 즉 항상 죽음을 기억하라(교훈적 효과) 는 의미도 포함

이 인물 portrait 의 사람들은 각기 생각하는 사람, 문헌대조하는 사람. 관찰하는 사람 등등 각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렇게 주제가 있는 집단 초상화로 렘브란트는 지루할 수 있는 집단초상화의 분위기에 활기를 주었으며 이러한 면 때문에 인기작가였다.

   

-야경 1642

새벽의 광선, 일종의 사수들의 부대 (총쏘는 사람들). 이들이 모여서 마리드 메디치의 방문기념 퍼레이드를 준비하고 있는 장면으로써 야경은 잘못된 이름이다. 굉장히 많은 인물들이 존재한다.

v자 구성, 대각선을 많이 사용하였다. 빛의 효과가 복잡하다. 이러한 이유는 이렇게 미묘한 빛조정을 하지 않으며 통일된 구성을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 여자아이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 빛을 발하고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부대원들 전부가 그룹 초상화를 위해 똑같이 비용을 부담하였으나 램브란트가 어떤 인물은 어두운 배경 속에서 희미하게 처리했는가 하면 서로 겹쳐서 안보이는 사람도 있어 불만을 사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렘브란트는 인기가 떨어지게 되었으며 인기보다 개인의 예술성을 추구하는 작품들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또한 당시 1650년대 경이면 더 화려한 그림을 선호하게 되고 그래서 램브란트의 인기가 떨어지게 된 것이다.

-탕자의 귀환 1665

램브란트는 네덜란드의 화가중 몇 안되는 종교화를 많이 그린 인물로써 이는 그의 말기의 그림이다.

하이라이트는 아들을 용서하는 아버지의 얼굴로 여기서 그리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안간을 용서하는 것(영혼이 담긴 듯한 느낌)

그의 후기의 그림들은 명암이 더 훈훈하고 신비스러워진다. 점점 오래볼 수록 형체가 드러나는 느낌이다. 또한 하이라이트의 부분들은 더 두텁게 그렸으며 어두운 부분은 얇다. 물감의 두터움에 의한 그림 윤곽이 창출되었고 이를 회화적 방법 즉 paintery한 방법이라고 한다.

②베르메르 vermeer

베르메르는 화상이다. 전문화가가 아니며 국제적인 흐름을 잘 알고 있었다. 30여점 밖에 않되는 그림을 갖고 있었으며 전문화가가 아니고 취미적으로 그렸었기 때문에 19세기에 처음 그의 그림이 발견되었다. 작은 그림을 그렸다. 자기집 방 한구석에서 그렸으며 다 일생생활을 그린 painting 이다.

세속적이지 않으며 조용하고 색체는 파스텔톤 으로 몽환적인 분위기이다.

   

(교수님 여담: 1920~ 30 년쯤 한 인물이 사실적 화가를 그리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추상화를 요구하였고 이 사람은 베르미어의 모작을 그려서 팔았다. 17세기의 싸구려 캔버스를 사서 페인트를 다 벗겨 버리고 자신이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이 그림 을 가지고 미술관에 갔다. 이후 제 2차 세계대전 나치 "괴링" 이 미술품을 수집하였는데. 괴링의 것을 압수하였다. 그중 베르메르(1945~6년) 것이 밝혀지고 판 사람을 추적한 결과 그 인물은 모작인 것을 밝히지 않으면 반역죄로 처벌 받을 형편에 처하였다. 그래서 그 그림을 위조한 것을 자기 입으로 불었다. ---> 책 이름 I was vermeer

   

16~ 17세기는 Camera obscura의 시대이다.

카메라의 원조로써 여기서 보이는 인물들을 그린것 포커스가 하나 정물들의 부분이 완벽이 초점이 맞지 않는 느낌이다. (이거 무슨 말인지 내가 써놓고도 모르겠습니다;;)

   

  - 우유항아리를 가진 여인

③루이스 달 Ruis dael

프랑스에서 푸생이 이상화된 자연을 그렸다면 네덜란드의 루이스달은 이상화 되지 않고 "진짜" 네덜란드의 풍경을 그렸다. 토착지역의 느낌을 그대로 보여주며 넓은 공간을 느끼게 하는 그의 그림은 (뉴턴의 시기-> 하늘 우주로 관심) 을 반영한다. 파란하늘과 구름의 다양한 형태와 거칠 것 없는 구도가 인상적이다.

밀밭풍경 (1662)

네덜란드의 17c 특징을 묻는 문제가 나온적이 있습니다.

집단초상화, 풍경화, 정물화 중심으로 서술하시면 될 것이지만 교수님 께서는 " 정물화" 부분에 대하여 적당한 작가를 들어주시진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완해 주시면 더 좋을 듯합니다.

   

<로코코> 바로크의 마지막 양식으로써 훨씬 더 가는선과 섬세하고 우아한 표현이 특징. 곡선을 많이 사용하며 귀족적이다. 로코코에서 문제 나온적 한번도 없음

hotel de soubise salon de al princess Bdfrand 1732

   

굉장히 불규칙 하면서 화려하고 가볍고 반짝반짝한 느낌 왕권력이 미약해지면서 나타난것.

=====> 프랑스에서 굉장히 가볍고 요론 양식이 유행하였다. (가볍고 피상적 인물이 인기/여성의 시대-마담 드 퐁파드루) 장식 그림도 역사화적 그림이 아닌 사랑그림과 칼라도 파스텔화, 은빛 그림등이 유행 주로 그림보다는 실내 양식에 더 많은 영향을 미쳤다.

   

   

①Antoine Watteau 바토(불어)/와토(영어)

-키테라 섬에서의 귀환(1717)

키테라섬은 상상의 섬으로 비너스의 섬이다. (보티첼리의 그림에서 나오는 비너스가 육지로가는섬). 당시 문학 작품에 나오는주제. 키테라 섬에 가면 짝이 없는 청춘남녀가 짝이 생긴다고 하는 전설. 그림의 설명이 to 인지 from 인지의 여부가 불확실했으나 from 으로 생각된다. 이유는 둘씩 둘씩 돼서 각자의 길로 돌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

단계, 단계, 단계 로 나뉘는 행동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은 루벤스의 사랑의 정원의 영향이다. ( 바토는 플랑드르와 가까운데 살았던 것) 실제+환상+신화가 섞인 가볍고 파스텔톤이다. 가냘프고 우아하며 연극적인 사람들이 등장한다. 와토의 인물들은 중량감이 가볍고 전체적으로 환상같은 느낌을 준다. 와토 자신은 여성을 사귀어 본 적이 없다고 하며 결핵에 걸려서 일찍 죽었던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은 사랑의 주제에도 불구 멜랑콜리한 분위기를 풍기며 와토 이후 이렇게 사랑을 속삭이는 듯한 그림이 유행한다.

②프랑스와 부세 Francois Boucher

-목욕한 후의 다이아나 여신의 휴식 1742

다이아나는 사랑의 여신이다. 나무와 풀이 구불구불거리는 것이 특징(와토와 같은 효과) 신화를 핑계로 그린 여성의 누드라고 생각됨. 핑크 무드의 달콤한 부위기가 느껴지며 비단의 질감, 피부의 표현이 눈을 즐겁게 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와토의 인물보다 더 사람 같다. 다음에 나타날 신 고전주의적 인 면모는 이러한 것에서 드러나며 또한 남성화가의 입장이 여실히 드러난 그림이다.

   

   

   

   

   

신고전주의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20

   

<신고전 주의 Neo Classicism>

18c 중후반에는 폼페이 유적의 발굴(A.D.79<CE>),프랑스 대혁명 등 굵직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이로 인하여 로마에 대한 향수 다시 자극, 계몽주의 철학이 재등장 하게 되었으며 귀족취향의 로코코를 비판. 미술사학자로 불릴만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 EX)빙켈만: 고대로마 이집트 등에 대한 책들이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 Hubert Robert, Pont du Gard (수로) 로베르 1787

  ①자크 루이 다비드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로 보내는 것에 찬성했던 인물로서 미술의 존재 이유는 사람들에게 멧세지를 주기 위한 것으로 생각. 그의 신고전주의의 특징은 다른 신고전주의자들보다 정치적이라는 평이다.

이무렵의 화단 분위기는 salon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일종의 국전과 같은 것 당시 심사위원들은 푸생적이었다. (로코코 작가들은 잘 입선이 되지 않음) 로마상이라고하는 상이 생겨. 이 상에 입선하면 이태리로 4년간 유학을 공짜로 보내주는 제도가 있었었다. (Price to Rome) 자크 루이 다비드는 이 상으로 4년간 이태리에서 그림공부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 89년 혁명)

다비드가 로마 유학중 그려서 국가에 보낸 작품. 로마에 대한 충성 결의 등을 표현한 이 작품을 받고 루이 16세는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다비드는 혁명파 였으므로 왕정에 대한 충성보다는 혁명정부에 대한 충성 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옆나라와의 싸움에 앞서서 승리를 다짐하는 형제들의 모습으로써 로코코를 벗어나고자하는 의도적인 분위기와 결의에 찬 모습이 느껴진다. 아주 세밀한 자연주의적 묘사가 돋보이며 강인한 남성에 비하여 여성은 연약하게 표현되었다. 선의 표현에서도 남성은 직선 여성은 곡선으로 표현하여 개인의 감정을 억제하지 않는 약한 여성들로 표현했다.

색채의 아름다움은 느껴지지 않는 절제된 색채를 사용하였으며 푸생의 고전주의를 계승하여 단순한 배경에 오해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그림을 그렸다.

옆나라 알바? 와 3대 3으로 싸우기로한 로마의 대표로 호라티우스 가문의 형제 3명이 나가기로 되어버림 그렇지만 호라티우스 가문과 상대방 국가의 대표선수 가문은 사돈간으로 맺어진 사이였다. 그래서 국가를 위해서는 이겨야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기가막힌 상황

다비드는 이러한 상황을 그림으로써 국가에 대한 충성을 더욱더 강조함.

   

-마라의 죽음

소개장을 받고 온 여자에게 살해당한마라. 혁명을 반대했던 그 여자는 마라를 죽이고. 다비드는 이 장면을 재현하였다. 피비린내나는 장면을 세밀하게 그려 죽음의 장면을 직접 보는 듯한 효과를 준다.

앞의 탁자는 거의 비석과 같은 역할을 하고 목욕탕은 무덤과 같다. 마치 순교자를 보는듯 (그리스도의 이미지)

모든지 평행이 되는 그림 가운데 죽은 이의 머리만 사선으로 배치( 시선이 먼저간다. ) 그리스도를 연상시키는 분위기를 갖고 있다.

-사비니 여인의 강탈 1799

비교적 장면이 혼란스러워졌다. 사비니 여인이 로마에 가서 애 낳고 살고 있는데. 다시 여인들을 찾으러 사비니에서 오고 로마와 사비니 사이에서는 다시 전토가 벌어진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이제 로마인의 아내이자 그들의 아이의 어머니가 된 사비니의 여성이 중재역할을 하는 장면이 화면에 중심부에 등장. 이는 당대 사회에 보내는 David의 메시지였다. 양식은 복잡하면서 섬세해 졌다. 초기 스케치는 누드가 없는 것으로 초기에는 이러한 집단 누드화? 를 그릴 생각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누드가 되었다.

그의 초기그림은 로마식이지만 이것은 후기 그리스적이다. (고전주의 양식에도 종류가다양함)

   

-나폴레옹의 대관식-> 노트르담 대사원

   

②그로

-왕실 근위대의 장교 1812

러시아와의 전쟁 모습

앞의 다비드보다 훨씬 더 혼란스럽고 감정적이고 분위기적이다. (낭만주의적 기류)

색채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다비드 이후 신고전주의의 새 리더였으나 매우 낭만주의적인 인물로써 나중에 자살한다.

   

-일라우의 전투 1808

   

아래에서 위를 보게하는 그리스도와 같은 느낌으로 나폴레옹을 그렸다. 얼어죽은 시체등의 등장으로 전쟁의 영광스러움이 표현되었던 전쟁화가 피해자 위주의 discription이 생김을 알수 있다. -> 작가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

   

③앵그르 1804년까지도 살롱은 여전히 신고전주의인 가운데 낭만주의자들도 많아짐

-아킬레스와 사신들 1804

앵그르의 고전주의와 다비드의 고전주의 는다름.

아킬레스를 찾기 위해 아킬레스가 숨어있는 수녀원에 방물장사로 분하고 찾아간 오딧세이와 일행은 많은 물건중 방패를 하나 숨긴다. 다른 수녀들은 예쁜 물건에 관심을 갖지만 한 명의 수녀는 예쁜 물건이 아닌 방패에 관심을 갖고 , 결국 아킬레스 발각/

   

초기 호라티우스에서는 명암대조가 강하고 색채가 별로 쓰이지 않은 것에 반하여 이 그림은 선이 더 아름답고 명암이 덜 강하며, 색채가 역시 아름답다.

   

 -대 오달리스크 1814

옷 입은 마하, 우르비노의 비너스 등으로 많이 그려진 와상, 동방 女의 느낌으로 터번을 두르고 있다. 공작새털 부채등의 등장으로 보아 모슬램 이집트 쪽인듯. 이집트의 나폴레옹 원정 후 오리엔탈리즘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의 동방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 여행기"에서 나온 것인데. 화가는 대부분 남성이었던 탓에 女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할렘등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들을 그림으로 그렸다. 이 그림에서 중요 포인트는 허리가 길다는 것인데 이는 거의 매너리즘적 분위기가 느껴질 정도로 허리가 길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름다움을 위하여 인체의 사실성을 포기한 격이다.

   

   

   

낭만주의-19세기 미국풍경화 허드슨 화파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19

   

<낭만주의 -19c>

낭만주의는 양식이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넓게보면 신고전주의에 들어가지만 지금 말하는 것은 좁은 의미이다.

   

①Theodore Gericauit, 메두사의 뗏목 1816

제리코는 기질적으로 반항아적 인물이어던 듯 싶다. (rule 을 따르지 않음) 고전이나 옛날 이야기가 아닌 당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근대성)

   

150명정도 유람선박이 프랑스에서 아프리카로 향하던 어느날 폭풍에 의해 떠내려가 15일 후 뗏목에 있던 12명이 구조되었다. 신문 보도 되고 일대에 이야깃거리가됨

   

당시 선박의 선장은 면허가 없었다고(부정부패) 제리코는 사실성있는 그림을 위하여 多노력--->제리코는 1대1로 인터뷰를 하는 등 르포르 따쥬

생존자중에는 목수도 있었는데 뗏목을 만들어 달라고 졸라서 만들어 보고

띄어 봄/ 이렇게 사실적 회화는 살롱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인간의 절망과 희망의 단계를 3단계로 나누어 형성-> 맨 아래 죽은사람. 조금기운있는

사람, 맨 끝에 살아서 구원을 요청하는 사람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우리는 지나가는 배가 이 사람

들을 구출했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고전적인 이야기가 아님, 어둠고 거친 분위기, 감정적으로 반응하게하는그림

   

이그림의 중요point: * 색채자체가 중요 요소

* 강한 대각선 구도(바로크에 多)

* 낭만주의 중요주제---> 자연 (바다, 난파선, 폭풍의 난폭함)

난파선의 주제가 많이 그려진다.

낭만주의는 로맨티시즘이 아니라 격정적인것

* 본능, 직감

*지그재그한 몸이 밖으로 나와우리를 불편하게함

②들라크루아

   

-단테의 보트 1821 Eugene Delacroix

--> 상상력을 자극하는 주제(지옥)

동심원으로 되어있는 9개의 circle중 로마시대 시인과 함께 제 5circle로 가고 있는 장면

이것은 수많은 지옥의 장면중

" 영원히 빠져죽는 형벌" 을 받는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영혼들을 그렸으며 저주 받은 영혼들은 일행을 위협하고 있다. 누드는 굉장히 영웅적이며 "신 고전주의 의 느낌" 이다. 미켈란 젤로의 최후의 심판이 떠오르는 영웅적 신체의 인물들이 등장. 삼각형 구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공포, 두려움의 감정을 유발한다. 난파장면은 아니지만 항해의 장면으로 색채의 중요성이 커졌다. 어두컴컴한 색채, 색채끼리의 대조가 두드러진ㄷ.ㅏ (---> 루벤스 같은 색채화가에 관심) 

   

-키오스 섬의 학살(1822~24)

그리스섬으로 그리스 인이 반란/터키인이 억압 하는 구도로써 이 사건은 지식인들의 분노를 샀다. 왜냐하면 그리스는 "서양 문명의 요람" 으로도 불리워 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색채가 중요하다는 개념이 처음 파생되었으며 전경에 사람이 많고 그후 대지가 쫙 펼쳐진 구도는 낭만주의적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어머니는 기진맥진하고 애는 젖빨고, 연인들이 희망을 잃고 서로 기대고 있다. 사납고 용맹하지만 무지한 터키인들은 그리스 여인들을 끌고 가고 있다.

   

산업 혁명전이기 때문에 색채의 상태가 나쁜 그림이다. 또한 마무리로 빨간 초록의 눈에 보이는 붓터치를 한 것은 당시 영국작가인 콘스터블의 붓터치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그림의 색체가 생생하게 보이는데 일조한다.

   

당시 "회화의 학살이다." 라는 평을 받았다. 색채중심의 그림으로 보색대비를 잘 이용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1828

낭만주의자는 중세와 근동이야기를 주제로 삼기를 좋아했다. (신고전주의 작가들이 고대. 그리스, 로마 이야기를 주제로 좋아했던 것과는 반대)

이는 아비규환의 장면으로. 감정의 거대혼란이 느껴짐 맨 왼쪽의 검은 피부의 인종 등장은 오리엔탈리즘의 영향.

사나워 보이지만 부지해보이는 다른민족들을 그림

주홍색과 흰피부의 대비는 감각적인 효과

   

   

<여기서부터는 영국>

③영국작가 콘스터블

-건초마차 1824

이슬을 머금고 흔들리는 듯한 나무의 표현과 변화무쌍한 하늘이 인상적이다. 붓터치에서 (보색대비효과) 이용한 초록색 옆에 쪼끄맣게 빨강색을 칠하여 초록을 훨씬 더 강렬하게 만들었으며 초록이 이로 인하여 더 생생해지는 효과

   

낭만주의 시대에는 풍경화가 많이 그려지게 되는데. 콘스터블은 자기가 살던 주변 풍경을 그렸다. 실제 자연을 관찰하고 수십 개의 스케치를 그리고 완성, 이렇게 풍경을 관찰하여 그리는 것은 새로운 개념이었다.

매일 나가서 관찰하고 그리기를 반복. 하늘의 변화 무쌍함이 중요 관전 포인트. 거의 기상학자수준으로 관찰. 새생함을 진실되게 표현하였다.

   

======> 자연의 풍요로움에 대한 낭만적 반응. 아직까지는 밖에서 완성하는 단계는 아니다.

   

   

영국은 프랑스보다 아카데미즘이 약해서 훨씬 자유로운 작업들이 가능했다. 아직 미술사의 전통이 확립되지 않은 것이다. 위의 그림에서 빛을 표현할 때 흰색을 턱턱 쳐발러서 반짝반짝거리는 물의 현상과 흐름을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

전형적 영국날씨와 풍경을 전해주는 느낌이다. (영국--> 비가 多/ 평원이 多)

   

-와이무스의해안 1816

앵그르 같은 경우에는 꼼꼼히 끝까지 다듬었지만, 이 사람의 그림에서는 터치감이 엄청나게 많이 나타난다. 낭만주의에서는 개인의 창의성이 중요함. 규범을 깨고 뭐 이런 경향

   

④윌리엄터너

-불타는 국회의사당 1835

인공물인 다리의 모습========> 당대의 모습과 근대성 , modernity의 표현

   

불타는 것이 장관

수증기, 자연의 재앙 불. 증기 등 이 이사람의 주제였다. 콘스타블이 영국의 풍경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면 이 사람은 우주적 대기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추상화에 가까운 부분 존재: 특히 부분적으로 " 임파스토 기법" 으로 노란색으로 그림 이렇게 두텁게 바르는 독자적인 기법을 개발한것 ( 영국의 자유성이 있기에 可 했던일)

-노예선 1839

난파선의 주제.

배가 난파되고 다시 해가 떠오르고 맨 오른쪽 아래에는 사람들의 다리와 물고기가 등장함.

   

-눈보라 1842

독자적 표현, 우주적 혼란이 느껴짐. 사람이 만든 구조물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부터는 독일 낭만주의>

⑤ Caspar David Friedrich

- 떡갈나무 숲의 수도원

수도원 공동묘지 등, 음산한 그림을 그렸다. 자연자체에 신이 들어있다고하는 생각이 강했던 독일인들 특유의 시선이 느껴짐.

자연에 대한 숭고성이 느껴지는 독일의 사고 

-북극해, 또는 얼음바다 (1824)

인류는 1821년 처음 북극을 탐험했다. 북극은 일종의 미지의 땅인샘이다.

   

배가 난파한 장면으로써

하얗다 못해 파란 얼음들이 보인다.

뒤에는 고요한 자연의 모습이 인생적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해석하여 독재 행정에 의해 마비당한 언론을 상징한다고 보기도 했다. (배)

   

위에서 본 것과 같이 기본적으로 신 고전주의는 양식이 존재했지만 낭만주의는 개인적이기 때문에 양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사람>

⑥미국 Thomas Cole, Oxbow 1836

미국에서는 가장 이해하기 쉬운 그림인 풍경화와 초상화가 많이 그려졌다.

     

뉴욕중심의 허드슨 리버스쿨에서는 일련의 풍경화들이 많이 나온다. 영국과 독일의 풍경화와는 다른 야생적이고 또한 굉장히 낙천적인 그림으로 광활한 공간이 느껴지지만 인간에 대하여 적대적이지 않은 풍경화들이 생겨난다.

   

   

서양에서의 풍경화 변천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24

   

<풍경화> 풍경화는 이거 문제가 나온 적이 있어요. 앞의 내용에서 조금씩 보완해서 쓰는 연습을 하시면 좋으실 듯 합니다.

보시면 낭만주의 같은거에서 풍경화 많이 다루잖아요. 교수님께서 그런것 까지는 풍경화 설명하시면서 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 대지 미술" 부분 같은거는 작년 시험문제로 나왔지만 또 나올리야 없겠지만 이런식으로 틈틈이 나오는것을 놓치지 않고 하시는게 중요한듯.

   

①폼페이

일종의 별장도시 , 79년경 베수비오스 화산이 터지면서 폼페이와 에르꼴라뇨라는 지역의 피해가 가장 막심했다. 18c 에 들어서 발견되면서 발굴이 시작되었고, 이는 세계적인 뉴스거리였다. 약간의 향락의 도시였던 듯 (30명당 술집 하나) 벽화가 많이 발견되며 그중 몇 개는 거의 포르노;;

   

프레스코는 붉은색 계열을 많이썼으며, 폼페이 전성기 양식은 밖에서 풍경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양식으로 이를 "illusionism" 이라고 부른다.

풍경화들이 많이 나타났다. 기본적으로 서양화에서는 풍경을 배경에 그치는 정도에서만 그렸지만 여기에서는 풍경 자체에 관심을 갖음을 알 수 있다.

- Odyssey Landscape BC50~40

   

-Garden Scene 2nd style Villa Livia, Primaporta bc1

   

=========> 순수한 풍경자체가 나옴 스케일이 꽤 크다.

   

   

그이후로 이제 중세 뭐 이러면서 자연관찰에 대한 생각은 별로 나타나질 않습니다. 왜냐면 너무 기독교 중심으로 돌아가서~

<15~ 16세기>

②베니스

   

   

동방무역의 중심지였던 베니스는 감각적이고 화려하며 물질적인 르네상스를 자랑한다.

     

Tiziano ? Fete Champetre, (Pastonai Concert)

   

전원의 음악회, 조르조네가 시작하여 티치아노가 완성했다고 한다. 2명의 누드녀는 신화에 나오는 뮤즈(세속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로 생각. 베니스 당대의상을 입은 2명등장(새틴의 광택이남) 풍경화가발달한 베니스 의 면모가 보이지만 인공적인 풍경으로 보인다.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이상향을 그리고있다. (시골, 자급자족)

   

   

   

③독일

Aldonfen Issus 의 전투 1529 다리우스와 알렉산더의 전투

거의 우주적인 풍경, 독일은 늘 풍경을 중요시함 (forest 가 많은 환경탓), 독일동화도 보면 숲에서 만들어진게 많다는거, 독일서 자라는 나무는 기세가 험준한데. 그래서 그런지 독일 풍경화들도 대체적으로 험준하다.

이그림은 보면 시야가 엄청 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당시 코페르니쿠스등이 등장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이 글루 쏠린거

  

-Aldorfer Issus 의 전투 1529:

다리우스 vs 알렉산더

   

==> 거의 우주적인 풍경, 독일은 늘 풍경을 중시해 왔다.

   

④네덜란드 -플랑드르

네덜란드의 경우 일상을 그리면서 풍경도 나왔다.

Piter Breugel, the elder , 사냥꾼의 귀환 1565

정말 지역의 풍경으로 계절감의 표현이 두드러진다.

   

   

<17세기====> 풍경화가 다양해짐>

①Claude lorraine 성 우르슐라의 항구 1641

   

     

<인상파==> 풍경을 多 그림>

- Claude Monet

1872 일출 인상

완성되지 못한 그림같다는평이 지배적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그림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거였지만 인상파들은 인상만 그리려고 했다. 당시 인상파는 조롱섞인 비아냥을 들었다.

   

인상파들은 색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기후와 시간등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인상파 그림은 야외에서 완성된 탓에 대부분의 그림들이 작다.

그당시는 산업혁명의 시대임으로 알루미늄 튜브 물감이 발명되어 화가들이 밖에서 작업하는 것을 편하게 해주었다.

   

인상파 화가들은 붓터치를 섞어서 색깔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사용(초록색+노란색=연두색)

물감의 색을 생생하게 살리기 위함이었다. 짧은 터치를 사용

흔들리는 나무나 물등 가변적인 것을 多그렸다. 우연한 한 순간의 느낌을 마치 스냅촬영 한 듯 (사진기 유행) 친밀감 들고 주변의 한순간 같은 느낌(초상화도 요롷게 그리기 시작)

   

====> 또한 이쯤 되면 화랑도 많아짐===> 작가들이 남들과 다른 그림을 그릴 필요가 생 겼다. monet 는 1890년대쯤 인정 받고 지베르니라는 집을 살정도로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화가가된다.

====>19c 말 자포니즘의 유행

모네는 일본 holic 하게 되어 일본식 다리를 연못에 설치하고 그림그리기 시작

   

   

-monet 수련

물밖의 풍경의 반사와 물표면의 수련의 모습이 어울려 소우주와 같은 느낌을 준다.

수련 시리즈는 점점 물 밖의 풍경이 없어지면서 화면자체가 연못 풍경이 되어버린다.

이쯤 되면 단지 눈에 보이는 Sensation을 쫓는 느낌이다. 또한 그림이 점점 커진다.

   

<현대>

1960년대~ 대지운동 Earth Works =========> 작년 문제 출제

①Robert Smithson

-The Spiral Jetty (나선형의 둑) 1970

대지운동은 미술품이 수집품 또한 상품화 되어가는 것에 반대하면서 자연을 등한시한 것에 대한 반성으로 일어났다. 자연에 대한 낭만주의를 불러 일으키며 ECO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작업을 하기위해서 자본은 이것의 설치 과정과 설치후의 과정을 기록한 사진이나, 초기 드로잉등을 팔아서 마련. 위의 작품 같은 경우는 유타주의 솔트레이크이며 대부분 스미슨 같은 대지 미술가들은 한적한 장소를 선호한다. 이러한 작업은 그 시작에서부터 작업허가를 받는 일이 힘들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지미술에서 중요한 점은 설치 후 자연속에서 어떻게 변해가느냐가 중요한데

위의 작품의 경우 솔트레이크 속에 있으면서 나선형 주변에 소금으로 둘러쌓이게 되었고 현재는 점점 밑으로 가라앉는 중이다.

   

②Christo

-Running Fence : 1972~76

LA에서 샌프란시스코에 이르는 50km의 거리를 5m 이상 높이의 천으로 잇다. 여러 가지 협상이 필요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으며 제단등에서 돈을 받고 사진등을 판매하고 이러한 사진들은 미술관에서 소장용으로 산다거나 했음

   

   

   

-raping작업 호주

   

-크리스토도 한국에 한번 왔었다. 당시 판문점OR 불국사를 쌀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으나 그냥 왔다만 갔다.

   

-크리스토는 독일 베를린 국회의사당( 옛 나찌의 본부) 퐁네프, 세느강 다리중 가장 유명한 다리를 쌌다.

   

-우산프로젝트: 일본의 해안가와 일본과 태평양을 건너서 접하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해변가를쌌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태풍이 많이 부는 나라 였다는 것을 계산에 넣지 못했던 크리스토.... 결국 우산 몇 개가 뽑히고 사람이 죽어버림

   

   

③월터 드 마리아

라이트닝 필드, 뉴 멕시코에 설치 400여개의 철봉을 꽂음 

   

   

   

근대적 삶과 미술(사실주의와 인상주의)(인상파 뒷부분빠짐)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26

   

<근대적 삶과 미술>

19C 중반 미술

--> 산업혁명의 진전으로 물질적 해택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

--> 도시와 공장이 늘어났다.

--> 여태껏 미술들이 영웅, 종교 이런게 주제 BUT 이제 근대적 사람사는 애기를 다루기 시작하였다.

   

<사실주의>

광범위한 사실주의가 아닌 시대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나타남

Realism--->(보통 우리가 애기하는 것은 realism) 미술사에서 쓰는 리얼리즘은 대문자 R

로 표기. 문학으로 치자면 에밀졸라. 사회적 논쟁의 대상이됨

①구스파브 쿠르베: " 나한테 천사를 보여달라. 그러면 천사를 그리겠다. "

(Gustave Curbert) 미술의 주제가 당대 사회로 감

-돌깨는 사람들 (1850)

전위적 의식(아방가르드)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아방가르드(맨 앞에 서는 군사) 의 뜻. 미술용어로 바뀌면서 앞선 의식을 나타내는 미술을 이야기하는 용어로 쓰인다.

옆에서 보는 그림은 당대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전 주제는 교훈적인 주제이거나 영웅을 그린것 혹은 성경의 이야기 였다고 하면 이 그림은 하잘 것 없는 직업과 사회 계급이 그림의 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사회주의 탄생, 각종 혁명등의 시대로 농민과 노동자의 개념이 널리퍼짐. 또한 쿠르베 역시 사회주의자들과 잘 어울리기도 하였다. 당시 이 그림에서 읽혀지는 "선동적" 인 느낌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그는 이것은 본것을 그렸다고한다. 과거 예술가들은 멋있는 구성을 그렸지만 이 그림은 구성의 맛이 없고, 또한 명암의 효과가 급격하다.

물감을 두텁게 발라서 물질성이 느껴지는 것 (<-> 아카데미식 말끔한 마무리)

   

영국에서 나타나는 물감의 임파스토 기법등을 이용하여 물감의 물질성을 이용하는 것이 두드러지는 이 그림은 2차 세계대전때 드레스덴에서 소실됨

-오르낭의 장례(1849)

북부 프랑스는 쿠르베의 고향으로 돌이 쫌 많은 시골이었다. 오르세 미술관에 있음. 이들은 실제 인물 크기보다 좀더 큰 스케일의 것이다. 당시 역사화가 그려졌을 법한 스케일이지만 그가 그린 것은 장례식의 장면이다. 그러나 누구의 장례식인것이 중요치 않음

   

   

   

1) 보잘것 없는 사람을 그 랜드 스케일로 그린점

2)슬퍼하는 사람들은 마을사람들의 초상임--> 이러한 것은 마을 사람들을 파르테논신전의 프리즈가 겹쳐지도록 표현

   

3)엘그레코의 영향 (블란서에 스페인 붐) 엘그레코의 "오르가즈 백작의 장례"(하단그림)

아래 그림은 그리스 인이지만 스페인에서 활동하였던 화가 엘그레코의 그림으로써 천상의 부분과 지상의 부분을 따로 처리한 것이 돋보인다. 이렇게 처리함으로써 오르가즈 백작이 천당에 갔다는 암시가 잘 드러난다. 그러나 쿠르베의 그림에는 사후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틀림

   

   

   

   

*오르세 미술관; 보통 우리가 가르키는 미술사와 매우 다르게 되어있다. 근대의 시작을 쿠레베에서부터 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디자인적인 것을 전시하는 경우가 많다.

   

   

*쿠르베는 스타기질이 있던 양반인듯 당대 사회주의는 진보적인 이념이었다.

   

②도미에

-3등객실 1865

생전에 예술가로도 생각되지 않음. 직업은 카투니스트였다. 당시 사회만평적 작업으로 물의를 일으킴(감옥에서 6개월) 아카데믹한 양식이 아닌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 (지저분해보임) 도시 영세민들을 소재로 그렸다.

   

3등객실에서는 매우 고단한 삶 뒤 집에 돌아오는 3세대를 그렸다. /군중(새로운 주제): 지루하고 불편하고 피곤한 포장되지 않은 모습 그러나 해부학적 지식이 느껴지는 대생실력으로 그림 /객실(모더니티를 상징)/이러한 이들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인다.

   

그는 이외에도 변호사, 위선자, 프로페셔널한 중산층의 소시민적 습성을 많이 그렸으며 그림들은 주로 취미의 그림이었다.

   

③밀레 Millet

-이삭줍기(1858~59) 사실주의 +낭만주의적 요소

우리나라 사람들이 밀레를 좋아하는 경향 농민화가로 알려져있음/ 생활이 어려웠으며 누드를 그리다가 혹평을 받고 진실된 그림을 그리기위해 시골로 갔다는 이야기는 거짓말 (밀레에 관하여 잘못 알려진 진실)

   

실제로는 그리 가난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농의 가족으로 교육도 잘 받은 사람이었다. 바르비종으로 가서 이러한 그림을 그렸는데 그는 유럽의 화가임에도 불구 미국에서 더 애호되었다. 이는 그의 그림이 미국적 (청교도적)이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논란의 대상이된다.

계절에 따른 인간 노동의 존엄성이 느껴지며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림들이다. 이들은 매우 가난한 극빈농으로 부농의 맡에서 혹시 남은 낱알이 있지 않을까 해서 줍고 있는 장면이다. (이렇게 줍기 위해서는 극빈농 허가서를 정부로부터 받아야 했다.) 이는 극심한 빈부격차이다. 이들의 굽은 허리는 숙명적인 가난을 상징한다. 그러나 볼륨감이 있는 사람의 표현(미켈란젤로를 존경) 존엄성있게 표현

   

===> 이그림의 메시지에 대하여

프랑스에서는 ==>빈부격차

미국에서는====>인간 노동의 존엄성 으로 표현 이것이 일본과 우리나라에도 전달

   

<인상주의 ===> 인상주의도 사실주의의 한 부류임/ 현실에대한 그림으로 인상파들의 시대

에는 중산층들이 훨씬 잘 살았다. 이들은 중산층의 생활을 그렸고

광선에 대한 관심이 느껴짐>

인상파 부분은 수업을 하루 결석한 탓에 모두다 필기하지는 못했습니다. 따로 책에서 공부를 하셔야 할 듯 합니다.

①마네 Manet

-튈러리의 음악회 1862

중산층 생활을 그림. 파리팽창 파리도시계획(1870년대)===>사람들이 多 모이는 장소 생김

구성된 요소가 없는 우연적으로 보이는 그림이다.

스냅촬영 등이 성행한 영향이 있다.

당대의 분위기가 완연히 느껴진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느껴진다.)

남자들의 모습은 영웅적 모습이 아니고 댄디한 인물들이었다. (화술 잘차려입음)

여가의 모습을 즐기는 모습, 가로등/까페/기차여행/카바레

이러한 사람들의 주된 하루일과는 "산책" 만보자 였다. ==>지팡이를 들고 삶을

관찰하는

우리나라에서도 1920년 변화한 삶==>"산보" 를 해서 변화한 삶을 관찰하고자함

이러한 산보하는 것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특징

   

-풀밭 위의 점심 1863

   

Salon of the refused "낙선전" --> 나폴레옹 3세의 창안

낙선한 사람들의 그림을 모은 낙선전에 사람들이 잘 출품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조롱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마네의 그림도 조롱당하였다.

옷 벗은 여자와 남자 2명이 등장하는 그림에서 ===> 실제 이렇게 빤히 쳐다볼수

있느냐의 문제

마네는 너무 많은 것을 그렸다. 인물, 초상, 풍경, 정물, 이러한 요소요소 마다 그림이 그려진 방법이 다르다.====> 조화가 잘 되지 않는 듯한 느낌?

여인의 신체는 볼륨감을 상실하였다. ===> 어두운 부분 vs 밝은 부분==> 생략

뒤의 배경 부분은 얇게 발려 있다. 오일을 많이 섞지 않고 옅게 그렸기 때문 이는 얼핏 본 듯한 순간적인 느낌을 준다.

주제와 매시지가 없지만 이 화가는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화가임 (현대적)

=====> 마네 VS 쿠르베=====> 현대 미술의 시초로 보는

   

②에밀졸라-이사람은 화가가 아님

세잔느의 친구이자 마네의 옹호자

" 주제가 중요한 것이 아닌 어떻게 그리냐는 것이 중요하다. 벗은 女와 男로 이루어지는 구도는 많이 있었다. 그는 이러한 고대적 요소를 창조성과 섞어 사용한 것이다"

라고 옹호

   

   

   

  당시 살롱에서 높은 평가를 받던 그림은 이러한 류의 그림이었다. (Cabanel,비너스의 탄생 1863)형식적이고 기술에 치우치나 기술적으로는 완벽

   

③모네 : 더 이상 아카데미 등에 관심을 갖지 않고 살롱에 올인하지 않아도 전시를

할 수 있다는 것 1973년 첫 전시회 인상파 전시회 (나다르의 스튜디오)

-1866~67

모네는 원래 캐리커쳐를 그리던 사람이었다. 노르망디에 살던 위젠부뎅이라는 사람이 어느날 모네의 캐리커쳐를 보고 그림을 같이 그리자고 하고 모네는 부뎅영감과 같이가서 그림을 그렸다. ===> 자연이 변화 약동하는 유동의 모습에 눈이 트이게 된다. (빛)

   

<- 수업시간의 그림은 이 그림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느낌의 물에 있는 보트를 그린 그림이었음 또한 이 그림역시

1866년에 그려진 그림.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그림과 비슷하다고 예상

   

-생타드레스의 해변 1870년작

터치들이 커졌으며 옷과 의자 에 흰색을 가미하여 물체의 고유색이 아닌 빛의 색으로나타냄

초기에는 빛의 색을 흰색으로 그렸으나 이후 인상주의 기법의 발달로 점점 빛의 색도 분화시켜서 그렸다.

<-그러나 이작품은 동명의 1866년작임

선생님이 보여주신 그림을 찾을 수 없었음

대략1870년작이면 이것보다 4년 뒤의 작품 이므로 이 작품보다 터치가 더 커지고 좀더 대담하게 표현했을 것이라고 생각

     

   

-일출(인상)1872

   

-그루누이에르의 보트놀이1869

물의 풍경좋아짐. 터치가 분할적으로 나타남. 중산층의 여가+인간이나 보트나 다 인상주의적으로 나타난다. 나중에 자기 부인이 죽어서도 죽은 후 변화하는 부인의 변화를그림

르누아르는 아직도 풍경보다는 사람이 중요한 그림을 그렸지만 모네는 그렇지 않다.

   

   

   

이들은 주로 작은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은 화구를 들고 나가서 밖에서 그리기위함

-파라솔을 쓴 여인 1886

빛과 바람에 따라 옷의 색이변한다.

검정색이 추방되었다. 잔디등을 그릴때는 색을 섞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막 그렸다.

강렬한 순색의 사용으로 강렬한 느낌을 주며 하얀 캔버스가 공장에서 생산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 이전의 화폭은 화가가 이에 약을 칠해서 누르티티한 기운이 있었지만 흰 화폭의 생산으로 색채는 더더욱 강렬해짐

   

-루앙성당 1894

   

-> 이후의 인상파들은 필기 못함

   

   

   

   

폴고갱부터-미술의엘리트주의(모더니즘-ART FOR ART SAKE)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27

   

①폴 고갱

19c 말 유럽은 산업혁명의 결과로 잘 살게 되었으며 제국주의 시대였음.

타히티는 이미 프랑스령이 되어있었고, 전기가 들어와 있었다.

고갱은 그곳에서 불란서 관리들과 문제가 많았다고

-이아 오라나 마리아(1892)

우리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마리아 넓은 색면색채, 일종의 성모마리아와 예수 경배하는 2명의 천사를 그림 내용은 서양문명인데 인물은 타히티. 색채가 다양하고 섬세해진다. (타히티 와서의 변화) 블란서의 색채(핑크, 보라) 가 많이 쓰였다. 감각적이다. 고갱의 그림이 훨씬 사실에서 왔다. 문학적 주제, 상상적 세계의 탐구 인상파에서 벗어남

-white horse 1898

   

여기서 보이는 주황색은 사실과 관계 없이 주관적인 색채를 사용한 것이다. 사실 그대로 그리는게 아니라 구성상 필요한 컬러를 넣는다. 카메라의 발전으로 더 이상 미술은 현실세계의 재현이 아닌 화가의 주관적 표현이 되었다. ===> 이에 따라 미술이 어려워지고 일반인에게는 어려운 엘리트 미술화됨 (특정층 겨냥)

   

②로트렉=====> 이부분은 김영나 선생님저 서양현대 미술의 기원 참조 도저히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어서 필기를 제대로 못했음

물랑루즈 1892

채색 석판화

 

③뭉크도 마찬가지 ----> 언뜻 기억으로는 베를린 분리파 ? 가 중요

   

<추상미술> 현대미술은 무엇을 그렸는가가 아닌 어떻게 그렸느냐의 문제가된다. 미술의 엘리트 주의

①마티스

-후식1897 아주 초기 인상파의 영향이 보이는 빛의 영향이 느껴짐. 패턴에 대한 관심과 물감자체의 쌓인 느낌등이 특징 (넷상에 그림 찾을 수 없음. 서양 현대미술의 기원참조)

   

-사치, 고요, 쾌락 1905

보들레르의 시에서 가져옴 눈에 보이는 주제가 아닌 문학적인 주제(<->인상파) 남부 프랑스 바캉스를 즐기는 동안 해 두었던 스케치에서 나온다. 마티스의 아들과 부인을 그린 스케치에 누드를 그렸다. 색이 밝고 강렬하고 순수하다. 색을 섞어쓰지 않았다.

쇠라의 기법과 비슷하다. (신인상주의적 터치의 영향) 그러나 색이 더 강렬하고 신인상주의에서 더욱 발전시켜 존재하지 않는 색까지 나타냄. 사람보다 인물과 인물사이의 공간을 부곽시킴. "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은 하루의 힘든 일을 마치고 휴식이되는 듯한 그림 ~~~" 마티스의 그림은 쾌락 사치, 고요한 분위기가 물씬나온다. (색채, 형태, 선)

기본적으로 색채+형태+선을 묘사적기능이 없이 표현적기능으로 사용

(이것도 책 참조)

   

-마티스 부인의 초상(1905) 당시 살롱전은 권위가 추락하였고 새로운 살롱전들이 생기기 시작하였으니 이러한 것의 대표적인 예가 살롱 도톤느이다. => "앞서가는 그림"

한 방에 전시를하였다. => 도나텔로가 야수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것 같구나. 색체의 범람이 느껴진다. 얼굴의 초록색(완젼 지 멋대로의 색), 해부학적 중요성이 중요하지 않음.

원근법이 다시 없어졌다. 그러나 찬색의 수축성, 노란색 빨간색의 팽창성으로 인하여 원근법이 느껴짐.

   

   

   

-생의 기쁨 (1906): 완전한 상상화 낙원. 색의 하모니

   

-선원(1906~1907) 

-빨강색의 하모니 (1908) 원근법이 없어져 벼렸다. 명암법도 없어졌다. 빛이 오는 방향도 없어졌다. 붉은색이 따스하고 호사스러운 느낌을 준다. 무엇을 그렸느냐 보다 어떻게 그렸느냐가 더 중요하다. 창문인지 그림인지?잘 분간이 않가는 이것은 그림의 구성요소이기 때문에 크게 중요치 않은것임

     

-춤(1910) 실제 색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닌 색체 자체의 뷰티가 느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간의 뷰티도 느껴진다. 마티스의 색채는 그 이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배색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른 여타 화가들의 배색과의 다르다. 기가 막힘. 예를 들어서 초록색과 파란색의 배색은 이전에는 이 둘이 맞는 색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던 것이다. 이 그림은 에르미따쥬 미술관에 있음

   

-서커스(1939) paper cut out 작업임

   

   

   

그래도 아직까지 마티스는 형태가 남아 있다.

   

   

피카소-추상미술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31

   

추상미술-피카소-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29

<추상 미술>

①Pablo Picasso

-First communion, 1896 어렸을 때부터 신동이었기 때문에 이런 그림 그리고 15세에 이거 그려서 상탐 (한마디로 구상 회화는 그에게 재미가 없었을 수도 있겠다. 싶음 너무 잘그려서 그릴게 없는거지 ..)

-젊은시절 바르세이유에서 옛날 고딕식 까페인 4마리의 고양이라는 까페에서 친구들이랑 놀면서 예술 토론하고 뭐 그랬다. 당시 로트렉등의 영향이 보이는 그림을 그림

-Blue period : 청년기의 세기말적인 우울함이 돋보이는 시기이다. 여기서 청색은 하나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억눌리고 디프레싱한 청색은 상징적인 색체로 쓰인 것이다.

이 시기의 대표작

라비 (삶) 1903

   

그의 친구인 카사헤마스의 죽음을 소재로한 그림이다. 카사헤마스는 어릴적 친구로서 같이 파리여행을 하는등 친하게 지냄. 사랑하던 여자가 마음을 받아주지 않자 상사병에 걸렸으며 여자에게 총을 쏜 뒤 (죽지는 않음) 총쏘고 죽었다. 피카소의 그림들은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그 원동력이다. 카사헤마스의 어머니와 그를 떠올리는 모자상이 등장하며 거의 뭉크를 연상시키는 절망적인 여인들이 그림속에 나타난다. 젊은 시기에 인생을 보는 철학적 사고를 나타낸다.

   

  -파리시기시작 1904

-1905 화장 : 핑크시대 여자도 생기고 생활도 폈다. 이것은 고전적 조각의 콘트라 포스토를 생각게 한다. (화음, 조화, 균형)

   

-1906 두 누드 : 굉장히 조각적이된다. 명암 표현을 강조하였다. 신체의 비례가 숏다리이다. 얼굴은 크다. 실제 사람이라기 보다는 마스크 같은 느낌이다. 스페인의 고졸이라는곳에서 바캉스후 고대 스페인 1, 2C 의 이ㅔ리아 조각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이것은 커텐을 들춰서 밖에 보면서 고객이 누구인지 보는 매춘부들이 주제

-1907 아비뇽의 아가씨들

형태가 뾰족해진다. 그러나 위의 주제와 같은 주제 커텐의 존재로 매춘부라고 생각된다. 맨 왼쪽에서 두 번째 사람은 커텐밖으로 나온다. 아비뇽가는 바르셀로나의 홍등가 같은데이다.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그리기 위해 많은 스케치를 한 작품으로서 초기 기획에서는 맨 왼쪽 아가씨 부분은 양복입은 남자가 해골(인생무상) 을 들고 들어오는 구상이었다. 피카소는 이 남자를 의과대학생으로 생각하고 이후 선원이 등장하는 것으로 바꾸어 그렸다. 그러나이를 나중에는 다섯명의 여자로 바꾸었다.

   

이를 큐비즘의 시초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큐비즘은 이 그림을 표현하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여태껏의 그림은 화가가 1점에서 본다는 전제에서 나오지만 여기서 피카소는 뒷모습과 앞모습을 합쳐 그렸다. 이러한 그림이 그려지게 된 배경으로 당시 보여지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다는것을 들 수 있다. 대상과 공간과의 관계가 이전에는 원근법의 고악ㄴ에서 인물의 위치를 그렸다면 피카소의 그림에서는 커텐이나 사람이나 다 같은 면에 있는 것으로 보이며 몸이 여러 각도로 분해가 되고 빛이 오는 방향도 다 제각각으로 명암이 표현되어 있다. 인물과 공간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분석하여 파편화가 된다. 이전에는 (나는 인간이고 주변은 비었다. ) 의 관점에서 ====> 모든 공간과 인간이 평등하게 중요해 지면서 공간의 파편화가 진행된다. 이러한 그림이 그려지게 된 배경에는 아프리카 조각에 대한 관심이 나타난다. 그들은 아프리카 조각이 주술적 기능에 목적이 있다거나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그저 아프리카 조각 특유의 요술적이고 사나워 보이는 느낌에 주목한 것이다. 이 그림에서 나오는 것들도 마스크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맨 오른쪽 2명의 얼굴===> 매우 사나운 얼굴들

당시 칸바일러라는 화상이 다달이 돈주고 피카소와 계약을 함 이 당시는 피카소는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린게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대담한 실험이 가능했다는 추측도 가능

실험미술===> 큐비즘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됨

   

-1907베일을 가진 댄서=> 인체 뾰족뾰족 공간의 물질화

     

- 1909~ 1910 점점 그림에서 공간의 파편화 된 것이 라인이 수직 수평에 가깝게 되면서 날카로운 사선이 없어져 간다. 이후

1911 그림에는 사람이 있느지 없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공간과 사람이 분간이 안간다. 이러한 그림 스타일은 1914년 까지 지속된다. 입체주의 큐비즘시기임 이후 피카소의 그림은 다시 물질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는 꼴라주 기법을 통해서이다.

-1912 피카소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

캔버스를 동그랗게 한다. (예전 그림은 일종의 거울이다. 뭐 이런 말을 의미 하는 거) 그러나 앞에서보면 거울 위에서 보면 탁자임 헝겊을 붙였는데 마치 등나무로 짠 것 같은 느낌을 주는것이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글자인 JOU 는 뉴스 페이퍼의 뉘앙스를 주는 그림이다. 활자체의 부분으로 탁자위에 신문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위에서 본듯한 유리컵과 옆에서 본 레몬 같은게 그려 있다.

     

   

   

   

본격추상미술 - 칸딘스키, 몬드리안, 드 스틸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31

   

<이후 완전한 추상으로의 이행이 나타나는 애들을 배워보자 >

①칸딘스키

30살 이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굉장히 지적인 인물이다. 법학교수로의 영입을 거절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 인물은 뮌헨으로 가서 활동했는데 러시아 인이지만 독일어가 바이링구어 수준이었던 듯

-1903 청기사: 청기사의 앞서 나가는 이미지를 좋아했다. 신비 스러운 분위기

-파란산 1908~09 주관적 색체로 포비즘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기사의 모티브가 재등장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원근법의 느낌이 든다.

-구성2를 위한 스케치 1910 : 원근법이 없어짐 흰색이 많이 쓰여지면서 색이 밝아지고 공간이 유동화되고 이 인물은 당시 색체에 관한 글을 썼다. 붉은 색은 성장하고, 흰색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검정색은 죽음, 초록색은 부르주아적 분위기의 색으로 묘사

음악과 색체를 비교하기도함 예를 들어 갈색은 첼로, 푸른색은 플롯. 뭐 요론스타일

색체의 표현적이고 상징적인 면에 주목하여 그림은 일종의 교향악이라고 생각하였다. 각기 다른 색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어울어진다. 정반합의 원리를 이용하였다. 색체의 대비효과를 많이 이용하였다. (빨+희==> 오케이, 빨+자주=> 낫 오케이)

   

이 사람은 1910년이 물질적이고 정신적으로 타락했다고 생각했기에 이러한 타락한 세계를 그리는 것이 싫어서 추상적으로 갔다. 당시 신지학의 유행: 기본적으로 인도 WHDRYFHtj 동서양 종교를 섞음. 당시 지식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제 5싸이클 이후 한 싸이클 후에 유토피아가 도래한다고 믿은 것이다. 앞으로 올 유토피아의 질서를 그리기 위해 정신적 그림이야 말로 우리의 내면을 울리는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 시에 자원입대하였다. (이는 신지학을 믿던 인물들의 공통적 사고이기도했는데 그들은 파괴가 있어야 창조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세계대전에 대하여 긍정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 )

-1910 천사 가브리엘,1911 모든 성인들

두 그림 모두 최후의 심판 이런 것을 주제로 한거 천사 가브리엘이 트럼펫을 불면~ 뭐 이런거 표현

   

   

- 잠깐!!! 바실리 칸딘스키의 추상의 과정 추적

1911 모든성인들

1912최후의 심판

추상화로 이행하는 과정 완전한 비대상

   

1911 구성 4

완전한 추상 비대상 완전히 대상이 없어짐

=

   

   

===> 기본적으로 정신적 세계를 향한 탐구를 보여줌 완전한 추상은 1913년이라 보통 이야기한다. 당시 추상은 공유된 어느 현상이었다.

   

-1914 즉흥

엄밀히 따지면 하나의 풍경화로 볼 수도 있다. 긴장감 격돌 변화, 충돌의 느낌을 준다. 어두운색은 죽음의 느낌으로 이는 1차 대전의 전쟁의 기운이 느껴지기도한다. 이 시기 즈음 칸딘스키는 제목을 통일하여 (구성-오랜시간, 즉흥-격렬 자연스러움, 인상-자연과의 연결) 로 표현하였는데 그는 이 요소들이 회화의 구성요소로 생각.

칸딘스키 역시 추상이 장식적으로 흐를 가능성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1923 검은 사각형의 속

혁명 정부는 추상미술을 격려하였고 (러시아 혁명 정부 왜냐면 혁명 정신에 걸맞은 새로운 미술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 러시아 아방가드르가 나타나는 등 현상. 그러나 혁명이후 변질이되고 칸딘스키 역시 회의를 느끼고 1921년 바우 하우스의 교수로 갔다.

   

바우하우스는 실제 사람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美+기능) 에 초점을 두고 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나치의 정권하에서 바우하우스 교수들 자르고 해서 나중에 와해됨

   

   

   

-1941여러가지 행동들: 당시 우주, 미생물이 발견되던 시기로서 이러한 영향이 보이는 그림들.

(뭉글뭉글거리는 느낌의 현미경으로 소우주를 보는 듯한 그림 그림 찾지 못함)

   

   

   

   

   

   

   

②몬드리안

네덜란드인임 이 당시 1906년 정도는 마티스가 막 야수주의하고 피카소가 핑크시대일때임

<몬드리안의 그림 스타일 변천은 추상으로의 이행과정의 고전적 예를 볼 수 있다. >

-농가의 풍경

대칭이 되는 그림 국제사조와 관계가 없고 색채에 대한 관심도 느껴 지지 않는다. 균형이 잡혀있다.

   

   

   

-빨간나무 1908: 위의 그림의 나무와 비교해 보았을 때 색채가 강조되기 시작. 푸른색과 빨간색의 컴포지션. 이 시기 파리에서 마티스의 영향으로 야수주의의 영향이 보임 (빨간색===> 감정적 성향의 색깔임)

가지와 가지 사이가 늘어뜨려짐 아직은 배경이 배경에 불과 . (이후 뒤의 그림에서는 나뭇가지 사이의 공간이 공간이 아닌 대상만큼이나 중요하게되는것을 목격)

   

   

   

   

-회색의 나무 1912: 조금전의 나무와 달라졌다. 나뭇가지 사이의 공간이 그냥 공간이 아님. 빈 공간이 대상만큼 중요하게됨. 원근법이 없어지고 선과줄기줄기 사이에 규칙적인 패턴과 상호관계에 관심을 갖는것을 보여준다.

색채의 제한, 나무에 사실적 묘사가 없다. 반원형으로 패턴화된다.

   

-꽃피는 사과나무1912 : 제목이 없이 봤을 때는 뭐가뭔지 잘 모르겠는 지경. 금욕적인 색채 (큐비즘적이다.)

-파랑, 회색, 분홍의 구성 1912: 선과 면이 90도각도임

   

   

-바다와 부두 1913 : +,ㅡ 시리즈

   

=> 이그림 제목이 바다와 부두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제가 필기랑 제가 그림 그린것을 중심으로 다시 정리를 하기 때문에 대략 이러한 경향의 그림으로 보시면 됩니다.

   

   

   

WHY?? 왜 이사람의 그림이 이러한 전개를 보였을 까 ????

이 사람은 이원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은 빨<->파 남<->녀 이 2가지가 팽팽히 균형을 이룰 대 유토피아가 도래한다고 믿었다. 이사람에게 가장 관심있는것은 균형임. 모든 것이 팽팽하여 우주의 평화도래 신지학의 영향 현세는 혼란한 시대로 보고 이 세계를 넘어 또다른 싸이클이 와야지 유토피아가 도래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이러한 생각을 화면에 구성하였다.

   

네덜란드로 컴백 (1차 세계대전)

-구성 1916 : 색채를 추가하였다. 색채>선의 생각. 그래서 이러한 것이 색채와 건의 평형이 맞는 구성 ? (뭔말이여;;;)

여기서 그림의 예시로 든것은 COMPOSITION NO 6 인데 선생님 께서 예시 든것인지는 정확치 않으나 대략 이런 느낌이었던듯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1930 (1920년부터 이러한 그림)

그는 그림은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림이 유토피아가 되려면 쉬워야 한다고 말함 (삼원색+삼비색) 만 씀. 그는 조화의 원리를 이루기 위해 "비대칭" 의 원리를 사용함.

자로 그린것이 아님. 그의 그림은 대체적으로 작다. 왜냐하면 큰 그림은 컨트롤이 어렵기 때문이다. 색채 역시 끊임 없이 조정한 색. 최적의 비율과 균형을 찾음

(김영나 선생님 한미은행이 이거 로고 따라했다고 조금 분노하심) 모든 것은 유기체적 균형과 성격 그는 이후로 작품의 제목이 컴포지션이 되었는데!!!! 이유는 제목을 문학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왜냐면 선면으로도 충분히 표현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구조적 FRAME 빨간색(우리쪽으로 전진) VS (들어가는 느낌) : 과거와 다른 색채 자체로 구조적, 원근법의 느낌을 준다.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1422:뉴욕시기 변화.뉴욕의 활기에 영향. 훨씬 더 재즈 같은 리드믹컬한 그림이다.

   

③몬드리안의 그룹 활동 De stil (The style 영어 )

미술과 환경을 아름답게 하는 목적임 . 미술은 보편성이 있어야 한다. 그림은 미술관에 있는 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주거환경을 유토피아에 맞게 바꿔야한다.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디자이너와 건축가의 활동임

-Gerrit Rietveld, <슈뢰더 하우스> 1923 : 원래는 목수였지만 그의 건축은 개인의 집이지만 몬드리안의 화면을 그대로 옮긴듯한 느낌이다.

  

  

   

   

빨강 파랑의 의자 1917

인간미 결여 (이것은 더 스타일 운동의 나쁜 점이기도 하다. 이것을 보안하여 1920년 독일의 바우하우스 가 생김(기능미 강조, 재료, 가죽~ 기능 +아름다움)

   

   

   

   

현대미술 또하나의 흐름- 뒤샹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33

   

<현대미술: 또하나의 흐름>

①마르셀 뒤샹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 1912 : 입체주의 (파편화) 색체가 입체주의 (갈색류 금욕적인색) 그러나 입체주의와 다른 점은 입체주의는 누드를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그림은 그러나 기계를 연상케한다. 피스톤이나 뭐 이런거가 생각나게 한다. 움직임이 느껴진다. (큐비즘은 정적임) 또한 움직임이 우아하지 않다. 그림이 퇴짜 맞음.

   

  

  

  

1913년 무렵 거의 미술에 뚜렷한 활동이 없던 미국에서 유럽 회화전을 열었다. 아모리쇼 AMORY SHOW (무기창고 이용) 그 때 뒤샹이 이그림을 출품하였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아직까지도 사실주의 가 팽배하던 시절. 미국인들은 뒤샹의 그림을 굉장히 재미있어하였다. ===> 뒤샹 유명해짐 뒤샹은 " 자유롭고 가능성의 나라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결심하였다.

   

   

뒤샹은 미술이 지금껏 눈을 즐겁게 해왔지만 이러한 것은 동물적이라고 생각하였다. 미술은 뇌를 즐겁게 하는 것 이라는 생각을 함(사람을 생각게 하는것). 패인팅을 포기 하지만 아트는 포기하지 못함.

   

   

-자전거바퀴 1913 : 저게 어떻게 미술이냐 저건 몬드리안 보다 더 쉽다. (김영나 샘 말씀) 어떤 것을 미술이냐 하는 질문을 생각하게 한다. 결국 싸인만 하면 좋은 것 일까? 미술의 정의는 무엇일까 뒤샹의 의도는 아름다움을 주려는게 아니다. Ready made 공장 물건들을 작품으로 만듦

   

   

-1917 fountain : 이 변기 만든 회사 싸인을 해놓음. 사람을 어리둥절 하게 만든다.

 

   

- L.H.O.O.Q 1919 : 모나리자 에다가 장난질 이그림의 제목을 불어로 빨리 읽으면 L (she) H (ASS-엉덩이라는 뜻의 송어) " She has a hot~~" 모나리자의 미소를 모나리자가 음탕한 생각에 웃는다는 의미로 바꿈.

그는 수염을 그리고 제목을 붙인 것 밖에 한 일이 없다. 실제 보기 힘든 모나리자, 그러나 명화로서 각인이 되어있는 모나리자. 모나리자는 여성으로서 상당히 비대한편

안정감 있는 삼각형 구도이나 몸이 상당히 크고 실제 남자였다는 소문도 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동성애자여서 그렇다는 애기도 있고 그렇다.

   

뒤샹은 말장난을 이용한 작업을 많이했다.

   

   

   

   

   

다다-초현실주의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33

   

<다다 DADA>

일차세계대전 중 중립국으로 모인 예술가들 사이에서 유행한 운동

전쟁의 비참함 때문에 예술가들은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었고 인류의 합리주의에 대한 실망을 하게됨. 반미술 반문명 (반합리)

다다의 어원에서는:불란서 사전에서 D를 찾고 그다음에 A 를 찾고 아무튼 그랬다는 설도 있고, 루마니아 말로 목마라는 말도 있고, 애들이 처음하는 말이라는 설도 있고 미술운동이라기 보다는 미술, 문학, 전반에 걸친 운동이다.

사람들이 이 운동이 막 시작했을 때는 충격을 받았지만 이내 3~4년 후에 식상해졌다. (그냥 좀 설치는 악동의 이미지) ===> 사람들은 이내 익숙해졌고, 이해하게 됨. (다다로서는 극약) 이후 초현실주의로 이행한다.

   

다다의 아이러니는 그들은 미술을 반대 했지만, 결국 미술사의 중요한 파트가 됬다는 것이다.

   

-Hugo Ball at zunich cafe 볼테르 1916: 전쟁의 비참함에 허무주의. 인류의 합리주의에 대한 실망 반미술, 반문명 (비합리)

(사진 찾는 거 실패) - 카페에서 모여서 말도않되는 시짓고 시시덕 거리고 그럼

-Hugo Ball : 마분지 옷을 입고 시를 읊는다. (아방가르드적) 부루주아를 경멸한다.

   

-슈비터스 Merz회화: 1920 아무런 뜻이 없는 여태껏 미술재료로 생각하지도 않았던 쓰레기 문짝들을 갖다 붙였다. 당시는 충격적이였다. 그러나 균형있고 아름다운 구성을 보여준다.

   

다다의 의의: 결국 미술로 생각되지 않은 것들을 미술로 데려오고 반미술의 정신 전파.

   

   

<초현실 그룹으로의 이행>

①Max Ernst

-두개의 모호한 형태들 1919~20

당시는 기계의 시대 였다. 많은 사람들이 기계의 정확함에 매혹되었고 또 반대로 어떤이들은 혐오하게 되었다. 기계에대한 태도를 볼 수 있다. 사람들을 기계처럼 그렸다.

  

  

   

   

-종달새에게 위협당하는 아이들 1924: 종달새가 엄청 작음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에 쫓기는 듯한 느낌. 이런 일은 꿈 속에서는 가능하다. 근거없는 불안감을 표현

   

   

초현실주의 : 앙드레 브루통 제창. 서양 미술의 이성 중시하지만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는 이성에 의해 억압된 무의식이 있고 이것을 표현하자는 주의이다. 프로이튼의 이론과 연관

다다는 지멋대로 초현실주의는 좀더 교조적 (리더 앙드레 브루통)

문제는 어떻게 무의식을 그릴 수 있을까? 인데 방법은 많다. 에른스트는 사실주의 꿈에서 보는 듯한 느낌을 그림===> 당시 사실주의로 역행했다는 비판 존재.

   

②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고집 1931: 사실적인 묘사 능력 최고 말도 않되는 그림이지만 너무 사실적이어서 부정할 수가 없다. 바닷가의 풍경이나타남(달리네 고향동네), 알 수 없는 물체(앞에 새부리+뒤에 인간 손목), 시계가 늘어져 있다. .

함축된의미들:개미=> 간통의 의미

혀가 축 늘어진 듯한 모양의 시계=> 어릴적 감기 걸렸을 때 혀를 내보이는것 몬트레 불어로 시계의미

몬트레의 뜻은 혀를 보여달라는 말이다.

   

-해변에 나타난 과일 접시와 얼굴 1948

풍경이면서 정물 DOUBLE VISION

개얼굴, 누드, 서양배, 엎어진 항아리, 해변이면서 식탁이 나타남

   

③후앙미로

-사냥꾼 1924: 섹슈얼리티와 유머를 결합

환상적인 세계의 알수 없는 생명체들을 그림 태양과 거미를 합친것도 같고 그렇다.

사냥꾼같이 생긴 이상한 도형의 집합은 총을 들고 있고 마치 파이프를 입에 문 듯하다. 뾰족한 삼각형은 남성적인 것을 상징하고

egg 모양의 물체는 여성적인 것을 상징하고 암튼 그렇다.

   

   

   

   

   

뉴욕파의 등장 - 폴록,드 쿠닝, 바넷 뉴먼, 로스코,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34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전쟁복구중 뉴욕이 새로운 미술의 중심으로 등장하였다. 많은 유럽 미술가들이 미국으로 이민감 (앙드레 브루통+뒤샹)

1950년대부터 현대미술의 중심지가 미국으로 옮겨진 것이다.

①JACKSON POLLOCK :

완전 미국인 여태껏 미국 화가들은 죄다 유럽에서 교육을 받았다. (블란서) 어린 시절 불우, 10대 때 이미 알콜중독 이때 잭슨폴락의 심리 카운슬러가 "융" 의 심리학을 하던 사람이었다. 초기 작품은 초현실주의 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토박이

10대 때 대지측량하는 사람의 조수를 했다고한다.

일종의 문제아

자라면서 경제공황을 겪은 세대

청년기에는 2차 세계대전이후

전후 세대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합리주의를 부정하며

직감에 몸을 맡기고자하는 것이다.

이사람은 천을 밑에 깔고 (엄청 큰거) 물감통 잔뜩 넣고 휙 뿌림(몸을 통하여 나아감)

몬드리안의 작업과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쉬운 작업이 아니고, 몸 컨트롤이 중요하다. 화면가 작가의 대면인셈이다.

   

미국평론가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이 슈퍼파워가 됨을 느꼈다.

추상 표현주의 new york school 이라고도 이야기 한다.

초기 잭슨폴록은 청소를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1950년대 WMa 되면 그는 영웅시기를 지냈다. 당시 잡지 같은것에서도 주목함. 잭슨폴록은 "미국은 모든 실험이 가능한 나라" 라고 하는 이미지에 도움이 되는 인물이었다. 당시 냉전 시기에 유용하게 쓰여졌다고 한다. (이러한 이론들이 1970년대에 많이 이야기됨- 그 당시는 음모론 같은거 유행하던 시기)

   

   

No.14

그의 그림의 특징은 눈을 흥분시키고 all over의 느낌을 준다. 중심이 아닌 전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스피드를 느낄 수 있고 그냥 흩 QN린 것이아니라 위에서 통통 떨어뜨린 것도 있고 그렇다.

상당히 운율감이 나타남

   

②Willem de Kooning 여인 152

처음에는 예쁜 여자를 그렸으나 나중에는 괴물같은 여자들을 그림. 공격적으로 보이는 여상 그러나 아직은 그대로 여인의 형상이 남아있기는 하다. 여성의 Sexual한 부분을 강조해서 그렸다. (예를 들어서 LIPSTICK을 강조한다던가) 여성의 원형같은 느낌

   

   

   

=========>뉴욕 화파들이 다른 화가들과 두드러지게 다른점

1. 색체: 여태껏 유럽 화가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세련된 색채의 배합이 아니다. 상품에서 쓰는 페인트 색같은것을 섰다. ex)잭슨폴록-> 에나멜 프린트

날 것 같은 색들 (미국이 유럽과 다른 특징이다. )

2. 대화면

   

   

   

1950년 말경의 변화 ===> 드라마틱함은 잦아들고 면으로 바뀌기 시작함

추상표현주의 제 2세대 색면화가 나타나기 시작

③Barnett Newman 영웅적인 숭엄함을 향하여 1951~52

거의 벽화 같은 내 주변의 환경을 둘러싸고 있는 듯한 느낌. 이럴 때 회화는 다른 느낌이다. 뉴면은 경외감, 숭고감 등 추상적인 느낌을 표현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그는 그림 색면사이의 선같은 것을 zip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화면을 나누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가 되기 위해 쓰는 선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Adam 1952

   

     

④Mark Rothko

-Blue Green 1968

물감을 들이듯이 그림 화면 천 속에 먹어들어가는 느낌이다.

확실한 경계가 있는것이 아닌 숨을 쉬는 듯한 그런 그림이다. 추상적 감정, 종교적 느낌을 주고자 한다. " 내 그림은 중세의 종교화 같은 그림이다. 내 그림을 보다가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있다." 뭐 요론식으로도 말했다고 한다.

실지로 BOSTON의 러스코 채플에서는 러스코의 그림을 높이 걸어놓았다.

그의 그림은 편안하고 예쁜 그림이 아니라 가라앉으면서도 엄숙한 느낌

리움에 하나 있다고 한다.

예민하고, 은밀하고 끌어당긴다.

(이그림 완전히 이름 비슷한거 못찾음)

-Mark Rothko Untitled, 1968 (Blue on Blue Ground) Print

뉴욕 스쿨 끝

   

   

   

네오다다- 라우셴버그, 재스퍼 존스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32

   

<네오다다> 황당한 그림 그 당시 "다다" 적이라고 해서 NEO dada 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 네오다다의 경우 저는 이해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제가 정리하고도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책을 봐도 너무 개념이 뭔가 어려워요 시험으로 출제 경향도 낮고 하여 열심히 할 필요는 없지만 불안하시다면 쉽게 나온책 한번만 훑으시는게 좋으실 듯. 제스퍼 존스에 대한 설명도 불충분 합니다. 제가 이해 하기도 힘들고 좀 그런 부분.

①Robert Raushenberg

blue mountain colleage 를 다니면서 존케이지(작곡을 하는데 있어서 음을 구성하는 것은 과거의 행위로써 우연을 이용하여 작곡을 해야한다고 생각함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미복을 입고 연주회에서 피아노위에 4분 43초동안 그냥 팔만 올려놓는 연주를 하였다.--라우센버그의 작업과 굉장히 비슷한 면을 보여줌) 라는 작곡가를 만나다. 이둘은 미술이 우리의 생활과 유리되었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결합" 우리의 생활이 더 재미있다. "

-White painting

그냥 흰 물감을 화판에다가 칠하고 그곳에 조명을 비춰서 사람들의 그림자가 보이게 설치 (미술과 생활을 연결하였다. )

-모노그램 1559

지나다니다가 뭐를 주워서 작업함. 염소도 주워서 작업한것임. 헌타이어를 사용한 것은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 적인 면을 볼 수 있고 물감을 마구 칠한것은 추상표현주의를 보여주고 문자 꼴라주를 한것은 큐비즘 적인 요소를 보여줌.

라우센 버그는 다시 물건에 대한 관심들을 드러내고 있다. 라우센 버그를 비롯한 뉴욕의 새로운 작가들은 그전의 추상표현주의는 너무 화가 중심적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물건 중심으로 돌아감

   

   

   

   

-캐논 1559

애매한 그림이다. 조각인지 회화인지도 불분명하다. 삶의 여러 가지 단편들을 집어 넣어서 표현

(그림 찾지 못함)

   

②Jasper Johns

원래 백화점 쇼윈도 디스플레이 하던 사람

레오 파스텔리? 인가 하는 엄청나게 유명한 화상의 서포팅을 받다.

제스퍼 존스와 러쉬엔 버그는 이상한 관게였다고 함 파트너 쉽인지 동성애인지

러쉬엔 버그는 다양하고 활기 있는데 이 사람은 좀더 은폐적이며 수수께기 같다.

-네 개의 얼굴이 있는 과녁 1955

   

   

   

팝아트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37

   

   

<여기부터 팝아트>

①앤디 워홀 : 원래 디자인 하던 사람 순수로 돌아온 이유는 러쉬엔 버그 때문이라고 함 (나도 저렇게 유명하게 ....)이사람으로부터 순수미술과 현대미술의 경계가 무너짐. 판화 , 실크스크린으로 찍어서 만들었다. 고상한 미술이 없어지게 됨

60년대 이후 미국생활의 변화가 느껴짐: 교외에는 커다란 슈퍼가 생기고, 광고는 엄청 많이 틀어줘서 소비를 부추기고. 사람들이 다 도시로 가서 일하고

-켐벨 스프 1965

가장 기본적인 미국사람들의 대중적인 식품중에 하나. 어디서나 볼수 있는 이미지

-1962년작

기존의 포장 이미지를 활용 

     

   

-BRILLO 앤디 워홀_브릴로 박스(Brillo Box)_혼합매체_1964

슈퍼마켓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세제 브릴로 박스가 예술 작품으로 미술관에 전시되자 사람들은 '미술의 종말'을 애도했다. 세제 브릴로 박스와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는 외관상 비슷하지만,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어떤 요소에 의해 워홀의 박스는 예술 세계에 편입된다. 이와 같이 다원주의 시대에 작품의 외형은 미술의 자격을 부여하는 절대적 요소가 아니다(이거 인터넷에 있는 책 소개 배낀거임)

-60년대 TV의 공급 보급으로 스타들이 생기기시작 앤디워홀은 이러한 스타들을 따라한 사진들을 찍기도 하였다.

당시 최고의 유명인 본인이 유명인인양 설정

(자기가 스타라도 되는양 스타 사진 보고 똑같이 따라함 )

   

-Marlyn diptych 1962

앤디 워홀, <마릴린 먼로 2면화(Marilyn Monroe diptych)> 1962

마릴린 먼로를 주제로 작업 당시 마리린 먼로는 나이아가라란 영화를 찍을 때로 이 사진을 홍보용 사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먼로는 이 사진을 실크스크린으로 작업하였다. 네가티브 판화를 해야지 인물이 나오는데 작업 과중에 밀리면 얼굴이 이상하게 나온다. 이건 마린린의 실제 참모습에 관심이 없고 상품화 포장화된 이미지이다.

이 그림을 그린 1962년에 공교롭게도 마릴린 먼로는 자살함. 워홀의 주제는 죽음이라는에기도 있다.

   

   

   

-Gold Marlyn Monroe

이콘화의 전통??

②Roy Lichtenstein

-Drawning gril 1963

오하이오 스테이트의 교수. 만화에서 차용 . 아슬아슬하거나 극적인 순간을 뽑아서 커다랗게 확대함 이후 불필요한 것을 없애거나 강조 그는 개인적인 터치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게 작업함 (워홀도 마찬가지) 기계 생산된 듯한 느낌을 준다.

동그랗게 생긴 구멍이 무수하게 뚫린 철제 판같은 (철조망?) 같은 것을 개발해 내어 인쇄를 확대한 것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내었다. 또한 강조하려는 것은 점을 2개 찍는다거나 하는 방법을 이용함

-희망이 없음 1963

   

===> 개성과 터치가 중요한게 아니라 생활 주벼의 사실적 이미지로 다시 돌아옴

③올덴버그-> 이사람도 팝아트

-Floor burger 1962

   

   

-Spoonbridge&cherry

아상블라주=> 여러 가지 것을 설치한 작업을 의미

   

④키엔홀츠

-Dodge38년형 뒤 좌석 1964

당시 서민들이 많이 타던차 젊은 남녀 학생이 색슈얼한 행위를 하고 있음 여러 가지 직업을 가졌던 인물(바텐더, 주립병원 간호사) 그는 주위의 일들을 3차원으로 재현 어떻게 보면 사회 비판적 이미지도 갖고 있다.

   

   

   

   

   

   

사회비판적인 예술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52

   

근대에 들어서 작가의 자율성이 늘어나면서 사회비판적 미술이 늘어나게 되었지만, 이전에도 엄연히 사회비판적인 미술이 존재하긴 했다.

   

   

  • 고야, 5월 3일의 학살 1814
    • 근대사회에 오면서 주문자에 얽매이지 않는 그림을 시장에 내놓게 되면서, 화가는 조금 더 자유를 얻게 된다. 이에 짜라 사회비판적 미술이 그전보다 가능한 여건이 형성되었다(로마시대에도 정치인 비판같은 것은 존재했다) 누구에게 팔기 위한 것이 아니다.
    • 이것은 1808년 5월 나폴레옹군 침략때를 그린 것이다. 스페인 왕실은 무능하여 프랑스의 비위를 맞추기 긍긍했다. 마드리드에서 시민봉기가 일어났다. 황태자를 프랑스로 볼모로 잡아간다는 소문에 시민이 봉기를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시민들이 무자비하게 진압되고 학살되었다. 이것을 본것은 아니고 상상을 통하여 재구성했다.
    • 이 그림은 역사를 넘어서 사람들에게 일깨움을 준다. 1808년 5월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역사를 넘어서 현재 어딘가에서도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고 있음을, 또한 선한 시민의 저항을 유니버설하게 정서적으로 공감을 일으킨다.
    • 어두운 밤의 성당- 결국은 나중에 선이 이길 것이라는 종교적 암시
    • 자신이 대항해도 소용없는 것을 알아도 용감하게 항거하는 모습이다.
    • 인물들의 각기 다른 모습 -
      • 죽은 사람, 두려움에 떠는 사람, 두손을 펴고 예수처럼 항거하는 사람. 중간의 사람은 흰색 노란색으로 하이라이트되어있다. 얼굴이 거뭇거뭇한 이 사람은 손에 자국이 있으며, 이때문에 그리스도와 동일시하여 그렸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 피해자 그룹과 가해자 그룹 - 다양한 인간의 감정이 보이는 인간적인 것이 피해자그룹,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룹은 가해자그룹. 똑같은 자세, 똑같은 유니폼으로 얼굴이 보이지 않고 비인간적이다.
  • 오노레 도미에 - 프랑스 노랭가 1834년 석판화
    • 프랑스 리옹에서 파업이 있었고, 노랭 가의 사람들은 파업에 가담한다. 파업이 있던 거리에서 정부군이 조사를 위해 왔는데, 시민 몇몇이 군인들을 향하여 총을 쏘았고, 이에 군인들은 그쪽 거리에 있는 집에 쳐들어가 그시간에 잠자던 많은 시민들을 학살함. 이 그림은 사건 다음날 신문의 삽화로서, 국가권력에 의한 학살을 보여준다.
    • 누가 보아도 잠옷차림의 남자와 어린아이, 여자들, 그리고 침실이라는 배경은 이들이 무고한 시민임을 보여준다.
  • 보티첼리 - 비방 1494

    • 과거의 사회비판
    • 기록상 있는 그림을 기록을 토대로 재현하라 주문받아 그렸다. 그리스 고대의 화가인 아펠레스가 남긴 그림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 왼쪽부터 인물
      • 진실 - 손으로 하늘을 찌르는 벗은 사람
      • 양심의 가책 - 검정색 망토를 입은 이
      • 시기와 속임수 - 주황색 옷입은여자와 그여자와 한패인 여자
      • 죄없는 희생자 - 털썩 주저앉은 사람
      • 비방 - 흰옷을 입은 사람 - 흰옷을 들고 횃불을 들고 정의인척하는 사기꾼
      • 시기 - 검은 옷을 입은 사람
      • 재판관 - 재판관의 귀가 당나귀귀이다. 당나귀귀를 한 재판관에게 온갖 비방을 하고 있기에 판단을 할 수 없고 귀가 잡혀있다.
    • 보티첼리는 아펠레스의 그림을 다시그린것만이 아니고 그 자신의 상상력을 더하여 덧붙이기도 한것같다. 아펠레스의 기록이 별로 안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 이 알레고리화가 뜻하는 바
      • 메디치가문이 파지가문의 모함으로 한동안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사건을 말하는 듯(메디치가가 후원한 화가)
      • 메디치 축출기간동안 피렌체 신정을 주도한 수도사 사보나롤라- 후에 화형됨.
  • 히에로니무스 보슈 - 이브의 창조, 쾌락의 동산, 지옥
    • 세폭 제단화이다.
      • 이브의 창조 - 에덴동산임에도 불길한 느낌이 든다. 아담의 얼굴이 넋이 나가있다. 맨 오른쪽의 연못은 검정색으로 각종 상상의 벌레들이 동라다니고(중세 우화의 영향?) 서로 잡아먹고있다. 중간의 상상의 식물(눈) - > 어떤 사람들은 당시의 연금술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 쾌락의 동산 - 연약하게 생긴 남녀들이 온갖 쾌락의 행위를 한다. 중간에 등장하는 목욕탕은 당시 불륜의 장소로 생각되었다. 그림에 과일이 많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나오는 과일은 -> 달콤한지만 썩는 것을 뜻하므로 인생무상을 뜻한다. EGG의 형태가 등장-> 달걀 역시 금방 깨질 수 있는 것이므로 인간들은 온갖가지 쾌락을 추구하다가 결국에는 지옥에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 지옥 - 중간에 작가의 자화상이 등장한다. 우리를 바라보기만 하면서 자신은 벌을 받고 있지 않는다. 계란모양의 주막집이 있고 물고기 부레같은 것이 등장한다
    • 당시 현실에 대한 비판?
      • 보쉬같은 경우 성직자 비판을 많이 하였다. 보쉬같은 경우 많은 후원자가 있었고, 중세에 악기는 악마의 소리를 뜻한다(아름다운 소리로 홀림)
  • 윌리엄 호가스 - 방탕아의 편력 1735
    • 8면으로 나뉘어 일종의 일일연속극처럼 묘사되어있다. 탐레이크라는 인물은 부자아버지를 두었으나, 아버지는 엄청난 구두쇠였다. 옥스퍼스 대학에서 공부중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돌아온다.

         

  

  • 아버지가 구두쇠라는 증거 - 구멍뚫린 성경책, 난방도 안되고 낡은 집, 숨겨진 금화닢에 펜을 들고 있는 변호사는 탐레이크가 안보고 있는 동안 훔치고 있다. 예쩐에 사귀던 여자 사라는 사기결혼. 엄마가 내 딸 책임져라 이러고 이쓴데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 술집 내지 이런데같다. 왼쪽 여자는 색깔 스타킹 입는 걸 보아 창녀.
  •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인도풍 의상을 차려입은 탐 레이크, 윌리엄 호가스는 프랑스 스타일을 혐오하였다고 한다. - 레이크의 사치의 현장
  • 왕궁파티에 가는 도중 빛쟁이들의 추궁을 받는다
  • 늙은 여자와 결혼
  • 정신못차리고 다시 도박
  • 감옥소 간다 신춘문예 실패
  • 미치광이. 세라는 눈물을 흘린다.

모호하긴 하나 새로운 비판의 방법이다. 일화를 가지고 우의적으로.

  • 자크 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
    • 다비드는 당시 유행했더 부셰 등의 로코코- 쾌락적 달콤한 예쁜 여자의 그림이 유행하던 때에 미술을 일신하고자 했다.
    • 사회적 덕목을 강조하고 도덕적인 그림을 그렸다. 당시 로코코풍 그림에 대한 비판에서 왔다.
  • 들라크루아 바리케이드를 넘어가는 자유 1830
    •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연상시키는 그림이다. 프랑스의 애국심을 자극한다.
    • 각각 노동자(낫), 지식인(모자, 옷차림, 총), 아이(??) 등 사회 각계층을 다 집어넣었고, 이러한 사람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이끌어가는 프랑스의 자유의 여신
    • 이는 19세기 프랑스의 격변하는 사회에 따른 계급의 문제도 거론했다.
  • 농민문제 - 밀레
    • 씨뿌리는 사람 1850
      • 다리가 분명하게 표현되어있지 않다. 마치 땅속에서 태어난듯, 에너지가 느껴진다. 힘이 나온다. 그당시 어느그림보다도 농민이 우람하게 그려져있는데, 당시 계급문제가 부각되던 19세기 사정을 감안하면 정치적으로 다가올수도 있다. 농업의 고귀함을 나타내는 낭만주의적 그림으로 볼 수도 있다.
    • 밀레 - 괭이를 든 사람 1863
      • 푸석푸석한 땅위에 괭이에 기대선 사람 - 기름진 땅의 느낌이 아니다. 지친 듯 하면서 절망에 찌든 농민의 모습 - 이런 그림들은 쿠바에서 유행했다(선동적이기 때문에)
      •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그린듯하다.
  • 디에고 리베라 -
    • 꽃의 날, 1925 멕시코 화가
      • 프랑스 유학파, 프랑스에서 큐비즘 등을 접하였으나, 멕시코로 돌아와서는 "멕시코적 그림"을 그리고자 하였다. 그림스타일이 이때 완전히 바뀌었다. 당시 멕시코는 스페인으로부터 300년 압제에서 벗어났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멕시코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것이 필요했던 듯 하다.
      • 벽화는 그릴 시에 서양식 프레스코를 이용하지 않고 선인장 즙을 이용하려 해보았지만 실패했다.
    • 디에고 리베라, 노동자의 해방, 1931
      • 당시 문교부 청사 프로젝트를 맡아 하였다. 이는 거의 대부분의 멕시코 사람들이 문맹이었기 때문에 기획되엇던 프로젝트인데, 리베에라는 공산당에 입장, 사회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협업의 중요성을 역설하곤 했지만, 나중에는 좀 이상해졌다.
    • 디에고 리베라, 백만장자의 만찬 1923-27
      • 미국에 대한 비판? 자유여신상이 탄알과 함께 있다.
    • 우리들의 빵(멕시코 의식)
    • 록펠러 센터의 벽화그림 ->여기다가 레닌 얼굴을 그려서 벽화를 지워버렸다. 미국에서의 일거리도 다 날아가버렸다. 멕시코 벽화운동
  • 피카소
    • 게르니카 1937
      • 벽화에 가까운 대작이다. 스페인 내란 당시 소도시 게르니카는 공화파 지지지역, 나치 공군기에 의해 3시간동안 32톤의 폭격을 받았고, 피신하는 주민들까지 기관총으로 공격.
      • 당시 피카소는 프랑스에 있었는데, 조국에서 벌어진 학살을 고발하고자 2개월만에 게르니카를 그려 파리 만국박람회에 공개, 게르니카는 그 후 학정에 대한 저항과 화해의 상징이 되었고, 침묵하던 세계의 지식인들이 직접 스페인으로 달려가 총을 들게 함.
      • 그림에는 말에 올라탄 사람 아래 여러 사람들이 짓밟혀있는 것이 보인다. 말은 히틀러의 나치정권을 의미하며, 말위의사람들은 프랑코 세력을 의미한다고 함.
  • 듀안 핸슨 DUANE HANSON 쇼핑백을 든 여인 1972
    • 우울증, 무기력한 군중, 소비사회, 뭐 이런것을 비판한 작품인듯
      • 1960년대 후반부터 실제 사람과 똑같은 인물상을 제작하였는데, FRP로 모양을 만들어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자세히 표현하고, 옷을 입혀 만들었다. 초기에는 뚜렷한 사회적 논점을 가진 인종문제, 베트남전 등을 작품 주제로 하였으나, 나중에는 일상적인 삶에 지친 평범한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활동.

           

           

         

         

         

         

   

   

여성과 미술 3개- 페미니즘, 역사속의 여성 미술가, 남성의 시선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8:55

1969년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작

1960년 이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전후 평화가 지속되던 시대는 지나고 여러가지 갈등이 야기. 흑인폭동, 히피폭동, 케네디 암살 등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베트남전은 그동안 테크놀러지가 인류에 봉사해왔다는 생각을 바꾸어놓았고, 새롭게 과학의 발달에 따른 환경문제 등 다른 면을 보게 만들었다. 기존의 가치는 전복되었고, 이것 중 하나는 여성미술의 새로운 대두이다.

여지껏 백인, 서구, 남성중심의 사고가 해체되어 일종의 다원주의가 일어났다. 옛날엔 서구중심이었던 세계는 아시아로 눈을 돌리기 시작,

  • 페미니즘

    (18?19?)40년경부터 시작(정치적), 1969년을 기점으로(사회운동으로) 증폭. 페미니즘은 미술사와 미술사외의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여성운동은 19세기 무렵부터 계속되어 19세기 말에는 여성은 투표권을 얻게 되었고 코르셋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기본적으로 페미니즘은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자는 운동이다. 최근에는 여성보다는 개인

    • NEW YORK TIMES CARTOONS
      • 여자 원시인들이 그림을 그리면서"이제껏 위대한 남성 미술가가 한명도 없었던 것이 이상하지 않아?"라고 얘기한다. 우리가 원시인들의 벽화를 떠올리며 누가 그렸을까 생각했을 때에 당연히 떠오르는것이 남성화가이다. 그 만화는 이러한 것을 꼬집어서 웃음을 준다.
    • GUER(R)ILLA GIRLS
      • ACTIVISTS 행동중에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 고릴라 모양의 가면을 썼다.
    • 전단지 "The advantages of being a woman artist"
      • Susan Lacy <여성의 강간, 살인에 대한 무언의 해프닝"
        • 시청앞에서 장례?의 장면을 연출하는 전투적인 모습
        • 20세기 초에 나오기 시작한 퍼포먼스는 50 60년대에 특히 활발했다. 또한 페미니즘 활동가들의 퍼포먼스는 전투적인 양상을 띤다.
      • Hannah Wilke (퍼포먼스, 60-70년대)
        • 껌을 씹어서 자궁모양을 만들어서 몸에 붙임
        • 그러나 이러한 작가의 작업방식은 페미니즘 견지에서 공격받고 있다 (essentialism때문인듯, 게다가 페미니즘 미술가 치곤 예뻐서^^;;- 또한 마치 남성의 시선을 의식하는 듯 느껴지기도 해서)

             

             

  • 역사 속의 여성 미술가(20세기 이전)

    19세기까지 여자 화가는 거의 없었다. 화가로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 당시 화가 교육기관에서는 남자의 누드를 그려야 했는데, 드로잉 수업에 여자가 참여할 수 없었으므로 여자는 아예 입학이 되지 않거나, 입학했다 하더라도 누드 드로잉은 할 수 없었다.

    19세기 정식 입학이 가능하긴 했지만 에콜 데 보자르에는 여자가 없었다. 때문제 여자인 유명한 미술사학자도 미술가도 없어서 미술사가 남성중심의 시각으로 전개된 층면이 없지 않다.

    존재했던 여자 화가들은 주로 가족, 초상화, 정물화를 그렸다.

    매우 드문 경우로 sofonisba Anguissola, Attarani 가족의 이중 초상화1580 - 있기는 했다.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7세기, 홀로페르넷의 목을 베는 유디트
      • 아버지가 화가, 15세에 화실에 다니다가 강간, 2년여에 걸친 소송, 그 후 그린 그림들은 자신을 강간한 사람에 대한 복수를 그리고 있다. 끔찌한 장면이 카라바지오에 영향받은 화법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뛰어난 화가였음에도 여자였던 탓인지 많은 기록은 없다.
    • Rosa Bonheur 말시장, 1853-55
      • 거의 자신을 남자로 생각했던 화가였다. 남장을 하고 다녔다. 이 당시 여자가 바지를 입으려면 경찰서에 반년 단위로 허가증을 받아야 했다.

           

  • 20세기 이후에 발굴된 여자화가(70년대까지 페미니스트, 여성성이 미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심)
    • 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EEFE, 1887-1986
      • 작품은 LIGHT IRIS와 양귀비 등..
        • 사진가 스티글리츠의 애인이자 모델, 불행히도 스티글리츠의 애인이라는 것 때문에 화가로서 역량이 가리워짐. 화가로서 주목받는 것은 70년이후 거의 80년대. 뉴멕시코의한적한 곳에서 생활. 은둔생활, 지금은 굉장히 인기작가.
      • 17년대에 많이 발굴된 화가들은 여성만의 특징을 보여주는 경우가 굉장히 많지만, 80년대에 가면서 바뀌었다. 남녀가 같이 태어났으나, 교육의 차이라고 생각하는 이론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 제3세계 여성의 발견. 멕시코 부유층 의과대학생, 전차 교통사고 거의 죽을뻔 했고 여러 번의 수술, 일생을 고통스럽게 살았다. 당대 최고의 미술가인 리베라와 결혼(오) 완전 바람둥이(?)
      • 그러한 것들을 그림으로 그림
      • 헨리 포드 병원(디트로이트) - 아이를 계속 유산한 경험을 그림으로 그린 자전적..
      • 칼로 몇번 찌르기
        • 당대 일어났던 살인사건을 자신과 디에고로 인물을 변형하여 그렸다.
        • 이렇게 프리다 칼로는 솔직한 자신만의 세계를 한 여성의 경험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그렸다.
    • 루이스 부르주아 Louis Bourgeois
      • Cumul 1, 1969
        • 프랑스인, 어릴적 어머니가 죽고, 유모 경 가정교사가 이 여성을 돌보았다. 아버지가 유모와 불륜. 이에 상처받고 아버지를 증오
        • 자꾸 움직이는듯한 물질적인 것을 조각으로 나타냄
          • <아버지의 파멸>
    • Judy Chicago, Dinner Party, 1979
      • 39명의 역사적 여성을 뽑아서 그림. 그들을 위한 만찬을 차려주는 식으로 제작, 300여명의 여성이 합작. 도자기, 천 등의 재료를 사용, 결국 이것은 남성중심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매우 정치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업을 산다는 사람이 없어서 전부 해체된다.
  • 80년대 들어서 여성미술의 변화
    • 80년대에 들면 여성미술이 많이 달라진다.
    • 신디 셔먼 Cindy sherman, untitled film
      • 소피아 로렌, 마릴린먼로가 나온 영화의 장면을 재현한 열출사진, 굉장히 평범하고 진부한 장면을 표현하였다. 대체적으로 치동적인 인물로 분하여, 음지에서 자신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인물인듯한 느낌. 여성에는 스테레오타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뀔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 90년대 이후에는 역사적 초상화를 패러디하기 시작. 원작과 달리 셔먼의 패러디는 무섭고 음침하기도 하다. 우리 관습적으로 믿었던 것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하며, 역사적 진실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 바바라 쿠르거
      • 원래 마드모아젤이라는 잡지의 기자이너엿다. 잡지디자이너답게 타이포그라피와 이미지를 조합한 작업, 여성의 피동적 이미지를 그렸다. 남자와 여자의 다름은 성의 다름이 아닌 사회에서 스테레오타입과 온순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순치된 것이라는 것이다.
      • 여성의 이미지를 공격적으로 표출하기도 하였다.
      • 또한 그녀는 권력이 왕이나 국가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분산되고 잘 보이지 않는 권력이 개인을 종속시킨다고 생각하였다. 권력은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메커니즘이며, 권력의 도구는 언어라고 생각하였다.
        • 사내대장부가 ~~, 여자는~해야지
      • 80년대 이후 여자의 경제역의 이유를 들어, 여자가 피동적인 이유는 남자가 경제력을 쥐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보급되었다. 경제력은 권력과 힘을 의미한다고 생각.
      • <YOU ARE YOURSELF> <I SHOP THEREFORE I AM>
      • 맑시스트적인 이론을 갖고 있다. 지금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지만 이러한 철자와 사진을 합친 것은 당시로서 획기적인 것이다. 그녀는 이러한 이미지를 전광판으로 띄우기도 했다. 여성미술이 파급효과가 크려면 퍼블릭스페이스에 전시되어야 한다고 그랬다.
    • JENNY HOLZER
      • <INFLAMMATORY ESSAYS> 연작
        • 여러 책에서 문구들을 발췌해와서 하나하나 봤을때는 맞는 얘기지만 조합하면 상반되는 이야기들이다.
          •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안된다 - 전쟁때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은 영광된것이다
          • 누가 한 말인지 모르지만 사회적으로 퍼진 이야기들을 조합.
      • 1982년 어느 은행앞에 이러한 설치도 했다. 그리고서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것.
      • 티쳐츠나 전광판에도 이러한 글자 장난질을 했다.
      • 구겐하임에서 1990년 전광판에 글씨를 띄웠다.
    • Rebecca Hom
      • Unicorn - 1970
        • 원래 조각하던 사람인데 마스크를 쓰지 않고 조각하다가 다쳐서 1년간 병원신세.
        • 그동안 사람들과 단절되어 통화의 여러가지 방법을 생각.
        • Paradise window - 1975-77 새를 이용한 작업을 많이 했다. 새는 예로부터 인간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메신저
        • The moon the chid, the river & the anarchy 1992

       

       

  • 남성의 시선
    • 라파엘로, 성모(아무거나)

      19세기까지도 주로 스테레오타입의 여자를 많이 그렸다.

      종교화에서 성모마리아의 이미지는 라파엘로의 마돈나가 원조이다.

      다정다감한 모성을 부드럽게 표현했다.

    • CHARDIN, 식사전의 기도, 1740
      • 계몽주의 시대 인간은 교육시키고 깨우치면 점점 더 발전할 수 있다는 사상. 따라서 자녀교육이 부각되며, 자식을 잘 양육하는 현명한 여성 - 그림으로 표현됨.
    • MARY CASATT, 모자상(아무거나, 많이그려서 여러 개 남아있다)
      • 메리 카사트같은 여류화가들이 모자상을 많이 그렸다. 미국화가로서 프랑스에 유학, 드가, 모네의 영향이 나타난다. 엄마와 아이의 물리적 접촉이 강조되는 분위기에서 이런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 (교육학적으로) 여성미술이 70년대의 경우 남자와 여자의 그림이 다른 점을 연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었는데, 여성화가는 남성화가와 달리 경험에서 나온 그림들을 그린다는 생각들이 생겼으며, mary cassatt의 이러한 그림은 이러한 가설의 근거로써 제시되었다.
    • Dorothea Lange, Migrant Mother, 1936
      • FSB(연방농업정책국?) 프로젝트로 대공황당시 빈민들을 취재함
      • 남자는 여러가지 인간형으로 그려졌지만, 여자들은 몇 개 안된다.
    • 팜므 파탈의 이미지 들라크루아 메데아, 1838

      • 그리스 연극 인물, 메데아가 남편에 대한 복수에서 자신의 아이들을 죽이고 돌아버린다. 연극적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림에서 인물의 눈이 정확히 묘사되지 않는 등 감정이 느껴진다

        연극적인 요소를 많이 느낄 수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 나오는 여인. 남편 제이슨에게 버림받고 복수심에 불타 두 사람의 사이에 난 아이들을 다 죽여버리는 여성. 여기서 보여지는 감정 - 복수 사랑 미움이 섞여지는.. 마녀로 변해서 악인이 된다는 이야기. 일종의 팜므파탈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요녀- 아름답지만 남자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시커먼 동굴 속에, 공포에 질린 어린아이들, 번쩍이는 단도, 어둠에 얼굴의 반 이상이 가려져있음에도 눈빛이 느껴지고,

        *이런데도 불구하고 볼륨형태등이 아직까지 고전주의적 누드의 형태가 남아있다.

        **빅토르 위고의 문학작품에서 나오는 우울하고 이국적이면서 극적인 요소와 비슷한, 굉장히 칼라풀한, 색채가 있는 표현, 규칙규범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 하지만 들라크루아는 훨씬 고전적 형식을 맞추려고 함(위고는 훨신 투쟁적).

    • 클림트, 홀로페르네스와 유디트(유명한 유디트 말고 아르누보분위기)
      • 데카당하지만 아름답고 세련됨
    • 프락시텔레스,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 bc 350
      • 크니도스 섬에 놓았는데 이것을 보려고 선원들이 내려서 껴안고 갔다고 한다.
      • 여성의 누드가 sexual object로 생각되었다는 것이다.
    •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 와상 - 남성을 토대하는 수동적인 여성의 그림. 요즘에는 많은 핀업걸 이미지.
      • 워낙 촉각적이라 감각적, 자신을 디스플레이하는 느낌
    • 조르지오네, Sleeping Venus 1508
      • 인체의 굴곡과 자연의 굴곡이 공명한다. 여성과 자연을 동일시.
      • 여성=자연=동물=순진무구 / 남성은 culture라는 인식
    • Toulouse Lautrec - 병원에서의 검사
      • 툴루즈 로트렉, 드가처럼 교묘하게 표현한 것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그렸다. 매우 저널리스트적 감정없이 그림.
    • Picasso 아비뇽의 아가씨들
    • 고갱 이아 오라나 마리아
    • 메리 카사트 오후5시의 차, 1880
      • 19세기까지의 그림에서 여성들은 대부분 활발하게 활보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private한 공간에서 생활하는 모습, 집안이 없더라도 배경은 울타리 속에.
      • 모리소 basket chair

         

  • 우리나라의 여성 미술
    • 천경자
      • 생태 1950
        • 일제시대 일본에서 그림, 해방되고 일본화를 그리는 사람을 매도하는 분위기 - 천경자는 뱀을 그리는 여류화가로 유명해짐. 친구가 햄이 허리띠인줄 알고 집었다가 물려죽었다. 상호(가명)라는 유부남과 사귀었는데, 35마리의 독사를 그림(상호37살이래서두마리 더그림) ㄷㄷ
      • 전설 1959
        • 올빼미 (마녀의 새) 면사포 쓰고 있는 자기를 그림. 독버섯, 실제와 환상의 조화, 색채가 곱고 화사한 면은 여성적이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이 자전적인 작품이다.
      • 여인과 새 1982
        • 천경자는 여행 관련 그림을 많이 그리고 글솜씨가 좋았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림이 아닌 자신의 다른 점을 잘 이용하여 유명해졌다고 볼 수 있다. 별스러운 여자로서의이미지를 구축, 자기자신을 잘 셀링했다.

             

             

    • 90년대 이후 - 이불
      • 알리바이 1991

        아시아의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작업. 나비부인같은 조그맣고 그런 여성. 실리콘 안에 나비 있고 핀 있음. 장식물, 공예물 같은것을 많이 이용. 또한 PENETRATE의 이미지 - 고통스럽지만 아름답고 감각적 - SEXUAL

        아시아 페미니즘

      • 아마릴리스 1999
        • 괴기스러움
      • 무제 2002
        • 에일리언같은 이미지, 여성, 목성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촉수같은 것들
      • 사이보그 시리즈 1998
    • 니키 리
      • 한국의 정체성에서 자유로움. 초기의 프로젝트는 신디셔먼처럼 정체성 아이덴티티에 관함.
      • 아이덴티티는 늘 유동적이며 바뀔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줌
      • 한 집단에 들어가서 완전히 그 집단의 인건인 것처럼 꾸미고 그들과 먹고 마시며 나중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사진찍어달라고 함.
      • 히피 프로젝트, 스케이트보더 프로젝트, 할머니 프로젝트(시니어 시티즌), 레즈비언 등등

        <PARTS>2004

        남성은 부분만 나오고 자기만 나온다. 표정도 화장법도 다르고 완전히 다른 인간인 양 매 사진이 연출사진 -> 관계에 대한 고찰

      • 영화도 찍음. 니키가 두명. 한명은 아카데믹하고 한명은 사교적, 결국 어느쪽이 진짜인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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