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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르네상스 회화의 지역별 특색과 작품들

   

  • 지역별 특색

    15세기 르네상스(Quattrocento)의 회화는 피렌체와 플랑드르 지역을 중심으로 상이한 화풍을 보여주며 발전하였다.

    • 피렌체 -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이태리의 르네상스가 인본주의적 관심에 입각하여 기독교적 주제 이외에 그리스, 로마 신화를 주제로 도입하여 이를 사실주의적 회화 기법으로 재현하려 했다.
      • [이태리와 플랑드르의 차이]- [과학적인 인체의 묘사 시도, 빛, 채향성으로 공간 재현]이태리 르네상스 화가들은 명암법, 원근법, 단축법, 해부학을 통해 과학적인 인체의 묘사를 시도하였으며 아울러 빛의 방향성, 건물의 채향성을 고려하여 완벽에 가까운 공간을 재현하였다. 반면 플랑드르의 회화는 [국제 고딕 전통]의 연장선 상에서 발전하였다. 미시적 관점에서 세부 사항들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감춰진 상징주의(disguised symbolism)를 보여주었다.
        • [마사치오(Masaccio, 1401-1428)]는 장엄한 구조와 엄격한 조소적 양감을 완벽한 원근법에 적용시킨 최초의 화가로 15세기 르네상스 회화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의 <성 삼위일체,>는 브루넬레스키의 수학적인 법칙에 근거해서 그려진 최초의 그림 중의 하나로 브루넬레스키의 건축 양식에 따른 납골당을 배경으로 큼직하고 육중한 인물들을 묘사함으로써 국제 양식의 시각적인 즐거움 대신 훨씬 더 진지한 감동과 극적인 장엄함을 선사한다.
        •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37-1455)]는 보수적인 기법을 통해 경건하고 종교적인 분위기를 창출하여 영적 경험에 대한 비젼을 그림으로 시각화함으로 성스러운 장면을 목도할 수 있도록 보는 이를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 그의 <수태고지>, <Noli me tangere> 등에서도 이런 특색을 찾아볼 수 있다.
        •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의 <죽은 예수>는 단축법을 사용한 대표적인 예로 예수의 신체를 발끝에서 내려다 보는 시점으로 묘사하였는데 의도적으로 크게 표현된 머리는 의도적인 단축법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즉 그의 단축법은 인물의 재현보다는 공간의 깊이감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이를 통해 여전히 르네상스 회화에서 인물보다는 배경이 되는 건축이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4-1492)]는 <비너스의 탄생>과 <primavera>을 통해 신화적인 주제를 보여주었는데 이교도의 신이었던 비너스가 이렇게 회화의 주제로 적극적으로 사용될 수 있었던 까닭은 비너스가 더 이상 이교도 의 신이 아닌 절대적 의 알레고리, 문화적 요소로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즉 고전기의 신화는 과거의 위대한 로마의 영광을 되찾기를 갈망한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교육을 받은 이들에게 널리 유행하였고 이들에게 그리스, 로마 신화는 유쾌하고 아름다운 신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 [플랑드르 - 사실주의적 기법과 상징주의]
  • Cf. Paolo Uccello <산 로마노의 대승>

    Pierro del la Francesca <우르비노 부부의 초상화>,

    Andrea Mantena <만투와 공작의 궁전, Camera de le spouge>

       

    이태리 화가들과는 달리 플랑드르의 화가들은

    • [사실주의] - 물질 세계가 신의 거울이듯이 그림이 실제 세계의 거울이 될 때까지 세부묘사의 사실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사실주의적 기법은 얀 반 아이크의 유화발명에 힘입어 더욱 강화될 수 있었다.
    • [상징주의] 또 하나의 특징이 '상징주의'이다. 종교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공간을 일상적인 공간으로 상정함으로서 일상의 다양한 물건들이 기독교적 도상으로 병치되어 표현되었다.
    • [이상주의 추구하지 않음]플랑드르미술의 또 다른 특징은 이상화되지 않은 사실성으로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각각 개성을 가진 실제 인물처럼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이상주의를 추구하지 않는 이러한 북유럽 특유의 전통은 엄숙하고 진지한 이태리 회화와는 달리 격렬하고 비통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도록 하였다.
      • <Ghent 제단화>에서 얀 반 아이크는 그림 전체가 가시적인 세계의 거울처럼 될 때까지 끈기있게 미세한 부분을 묘사하며 놀라운 자연의 환영을 만들어내었다.
      • Robert Campin의 <메로드 제단화>는 숨겨진 상징주의의 가장 좋은 예 하나로 수태고지라는 종교적인 사건이 평범한 일상 가정을 배경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촛불은 예수를, 촛대는 성모 마리아를, 막 꺼진 촛불은 신의 인간화 혹은 예수의 죽음을, 백합은 성모 마리아의 순결함을, 흰 수건과 물양동이는 정결함을, 사자가 새겨진 의자는 왕 중의 왕인 예수를 의미한다.
      • Hugo van des Goes의 <포티나리 제단화>에서는 마치실제 인물처럼 이상화 되지않은 개성적인 성인들이 등장한다.
      • Rogier van der Weyden의<deposition>에서는 중화되지 않은 비통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특히 실신한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서 이를 잘 느낄 수 있다. (즉 이 그림을 봄으로써 예수 뿐만 아니라 모두가 수난의 고통에 동참하기를 독려하는 다분히 신학적인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

      [15세기 플랑드르 회화의 의의]

      15세기 플랑드르 지방의 사실적인 표현은 후에 Ghilarandio와 같은 이태리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풍경에 대한 묘사와 질감을 표현하는 기법에 있어서는 베니스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 뒤러와 같은 화가들이 이태리 르네상스와의 결합을 시도함으로써 그동안의 보수적인 경향은 변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16, 17세기를 거쳐 기술적 발전과 함께 종교개혁, 미술시장의 본격적인 형성과 같은 사회적 요소들로 인해 특수한 미술장르들을 생산하게 된다.

    Cf. Jan van Eyck <아놀피니의 결혼식>

    보쉬 <쾌락의 정원>

       

안드레아 만테냐

죽은 예수

1490

  

로베르트 깡팽

메로드 제단화

1427

  

위고 반 데 후스

포티나리 제단화

1476-79

  

로히르 반 데르 베이덴

십자가에서 내림

1435

  

   

   

   

   

   

   

   

   

   

   

   

   

   

   

   

   

   

02.16세기 전성기 르네상스의 지역적 구별과 화가별 작품들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오후 8:34

   

16세기 전성기 르네상스의 지역적 구별과 화가별 작품들

   

І. 피렌체, 로마

   

16세기 전성기 르네상스에 이르자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초기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던 피렌체와 더불어 막강한 교황의 후원을 바탕으로 로마가 새로운 센터로 급부상 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소위 르네상스 3대 화가라 일컬어지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 그리고 미켈란젤로가 등장하는데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제기되었던 여러 가지 한계점을 극복하여 한층 더 성숙되고 완성된 조화와 균형을 보여주었다.

   

가장 '르네상스적 인간'이라 평가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는 수학과 과학, 해부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1480년대와 90년대 동시대인들이 이룩한 것들은 모두 흡수, 소화하였다.

<암굴 속의 마돈나, 1483> 유화. 원근과 명암 등 Quattrocento의 여러 실험들이 자연스럽게 종합되어 있다. 스퓌마토 기법을 통해 부드럽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창출하며 신비로운 배경과 명암법으로 성스러운 종교화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최후의 만찬, 1495> 유화. 중앙의 그리스도와 다양한 감정을 표출하며 동요하는 성인들의 모습이 치밀한 구도 하에 균형을 잃지 않고 구현되고 있으며 보는 이의 시점이 예수에게로 집중되도록 유도하고 있다.

<모나리자, 1503> 유화. 단순 삼각형구도와 스퓌마토 기법을 통해 개인의 초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원성을 내포한 듯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플랑드르 화풍의 영향으로 프로필 초상 일색이었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3/4면을 사용하였다.

   

우르비노 태생인 라파엘(1483-1520)은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 전형적인 르네상스의 화가로 절제되고 조화로운 구성 아래 묘한 기품과 감미로움이 도는 인물들을 그렸다. 독창적인 그만의 화풍을 추구하기 보다는 모든 것을 융합하는 종합적인 양식을 구사하였다.

<전원의 마돈나, 1506> 성인의 이미지 보다는 모성의 부드러운 느낌을 강조한 작품으로 대칭적인 구도를 통해 단순함 속의 절제와 균형을 강조하였다. 이런 라파엘의 특성은 후기 로마로 이주하여 미켈란젤로를 만난 이후 복잡하고 뒤틀린 자세를 통해 내재적 에너지를 표현하는 화풍으로 변하게 된다.

<아테네 학당, 1511> 교황의 서재를 장식하기 위해 그려진 작품으로 웅장함과 절제미, 조화미를 통해 고대 로마의 융성함을 재현해 내었다. 깊은 원근법을 사용하여 거대한 공간감을 창조하고 엄격한 좌우 균형 속에서 움직임을 표현하였다.

<갈라테아, 1511>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아 초기 화풍에 비해 근육질의 인체와 역동적인 모습, 뒤틀린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인물에 초점이 맞추어 인물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색채보다는 선이 강조되어 조각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미켈란젤로(1475-1564)는 다방면에 걸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지만 자신은 조각가임을 주장하였다. 회화보다 조각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는데 신플라톤주의에 입각하여 '돌 속에 잠겨있는 생명을 해방시키는 것이 조각가의 임무'라고 주장하였다.

<피에타, 1499> 미켈란젤로는 총 4점의 피에타상을 남겼는데 초기의 피에타는 안정된 삼각형 구도를 취하고 있다. 이 초기 작품에서 마리아는 이상화된 젊고 고아한 여인으로 표현되었으며 구도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실제보다 크게 만들어졌다.

<다비드, 1501-04> 돌을 던지려는 순간의 팽팽한 긴장감과 동시에 느슨함을 함께 표현하였다. 새로운 도약을 시작한 젊은 도시 피렌체의 이미지를 고취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피렌체 시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이 像은 젊은 남성의 누드라는 다분히 르네상스 적인 주제를 긴장에 가득 찬 수직적이고 남성적인 표현방법으로 풀어내었다.

<메디치 무덤, 1531-1533> 줄리아노 메디치와 로렌조 메디치의 석관무덤으로 밤과 낮, 황혼과 새벽의 알레고리 상을 표현. 과장된 근육의 표현과 비례를 깬 인체의 표현은 앞으로 다가올 매너리즘을 예견한다.

<시스틴 채플 內 최후의 심판, 1537-41> 인체로 가득 메워진 공간은 더 이상 르네상스적인 깊은 공간이 아니며 비대한 몸과 강한 모델링, 배가된 힘의 표현을 보여준다.

   

II. 베니스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동방 무역의 핵심 거점이었던 베니스가 미술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는데 베니스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은 '색채'로 요약될 수 있다. 엄격하고 완벽한 소묘를 추구한 중부 이탈리아의 화풍과는 달리 베니스에서는 색채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베니스는 무역으로 돈을 번 부유한 후원자들이 많아서 지성미보다는 화려함을 강조하는 그림이 각광을 받았다. 특히 베니스에서는 당시에는 매우 귀한 '울트라 마린'을 쉽게 구할 수가 있었고 반짝이는 푸른 바다로 둘러싸인 베니스의 시민들은 특히 '빛'에 있어서 매우 민감하였기 때문에 색에 대한 그들의 높은 관심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도색적이며 세속적인 주제를 표현하는 것도 베니스 화풍만의 특징이다.

   

지오반니 벨리니(1431-1516)는 베니스 미술의 스승으로 논리적인 공간과 비례를 추구하는 피렌체의 양식과 플랑드르의 세밀한 화풍을 통합하였다.

<성 프란치스코의 법열, 1470-80> 풍요로운 색채와 초자연적인 광선의 효과를 보여준다.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생활 속에서 종교적 사건의 느낌을 잘 표현했으며 예전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풍경의 표현을 볼 수 있다.

<성모와 성자들, 1505> Saint Zaccaria 제단화로 정교하게 구현된 원근법과 화면 전체를 감싸는 고요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지오르지오네(1478-1510)는 티치아노와 함께 베니스 2대화가 중 한사람으로 초기에는 매제인 만테냐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모든 것을 감싸는 따뜻한 대기와 자연스러운 빛의 사용을 보여준다.

<템페스타, 1506> 안개가 낀 듯한 미묘한 색채의 변화와 풍경에 대한 관심의 증가.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 1504> 카스텔프랑코 베네토 대성당, Sacra Conversazione 주제를 황혼 녘의 하늘을 배경으로 나타내고 있다.

   

티치아노(1485-1576)는 베니스 미술의 특징과 함께 바로크로 계승되는 역동성과 회화적 처리를 함께 보여주었다.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관능적이고 세속적인 베니스 특유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며 촉각적인 신체의 표현이 특징이다.

<바카날, 1518-23> 지오르지오네의 영향을 받은 색의 대비와 함께 자유롭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

<성모의 승천, 1516-18>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프라리 교회. 다채로운 포즈의 인물들은 역동적인 동세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유기적인 공간감을 구현하고 있다.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 1514> 여성의 누드를 통한 알레고리상.

<유로파의 강탈, 1562> 스페인 펠리페 2세를 위해 제작한 7점의 신화화 중 하나. 직각 삼각형의 구도와 공간과 대기에 대한 환상적인 묘사, 찬란한 색채감을 보여준다.

   

   

   

   

   

   

   

   

   

   

   

   

   

   

   

   

   

   

   

   

   

   

   

   

   

   

   

   

   

   

   

   

   

   

라파엘

갈라테아

1511

  

미켈란젤로

줄리아노 메디치 석관 조각

1533

  

미켈란젤로

로렌조 메디치 석관 조각

1531

   

  

   

   

   

   

   

   

   

   

   

   

   

   

   

   

   

   

   

   

   

   

   

03.매너리즘의 특징과 주요 작가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오후 8:40

   

매너리즘의 특징과 주요 작가

   

매너리즘은 전성기 르네상스가 끝나고 바로크가 시작되기 전인 1520년에서 1600사이에 등장한 사조로 원래의 뜻은 라파엘이나 미켈란젤로의 기교적이고 타성적인 성과를 본받아 소화하려 한 로마와 피렌체의 화가 그룹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숙달되고 탁월한 면을 보이지만 어딘가 이해하기 힘든, 이상미와 어긋나는 불편함, 부조화가 나타난다. 왜곡된 비례와 불안한 자세를 가진 인체들, 불안정한 공간,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한 소재들, 신비롭고 비현실적인 빛의 효과 등이 그 특징인데 지오르지오 바자리는 그 자신을 성공한 매너리즘 화가로 간주하여 '매너리즘'이란 용어를 긍정적으로 사용하였으나 그 이후 세대들은 매너리즘에서 등장하는 비합리적 특징들을 근거로 이 시대를 성기 르네상스 이후의 퇴보의 시대로 이해하였다.

이태리에서 나타난 매너리즘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극에 달한 테크닉의 능숙함, 세련미, 지적 유희를 위한 의도적인 소재의 왜곡이었다. 그 결과 구불구불한 선, 길게 늘여진 형태, 기묘한 포즈와 색채, 수수께끼 같은 소재들, 병적이고 도색적인 분위기가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매너리즘은 이미 미켈란젤로의 개인적인 특성과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라파엘 후기 작품에서 태동하고 있었다. 야코포 폰토르모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1528> 속의 공간은 안정적인 구심점이 사라진 채 압축되어 나타난다. 강렬한 포즈와 표정의 인물들은 불명확한 공간에서 부유하고 있으며 날카로운 빛에 의해서 색채는 비현실적인 특징을 보이게 된다. 로소 피오렌티오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1521>에서 인물들은 한층 더 그로테스크하게 그려진다. 심하게 왜곡된 인물들, 빛나는 색채가 자아내는 금속적인 광채는 로소 종교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파르미지아노의 <긴 목의 성모,1535>는 원근법과 비례를 표현적으로 왜곡하여 성모는 작은 얼굴, 긴 목, 그리고 길게 늘어진 몸을 가지고 있으며 품에 안긴 아기 예수는 떨어질 듯 불안정하다. 배경이 되는 주두가 없는 기둥은 이공간이 실내인지 실외인지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코지모의 궁정화가이자 피렌체 매너리즘의 진수였던 브론지노는 뛰어난 기교가로 세련되고 감성적인 초연함이 특징이다. 그의 <알레고리, 1545>에서는 갖가지 상징을 뜻하는 알레고리 상들과 함께 비너스와 큐피드가 도자기 인형처럼 매끈하고 정적이며 차갑게 표현된 채 도색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피렌체와 로마에서 시작한 매너리즘은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데 베니스에서는 그 등장이 다소 늦어 16세기 후반에서야 비로소 틴토레토 작품 등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성 마르코, 1548>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비틀린 자세를 취하며 혼란스럽게 화면을 메우고 있어 매너리즘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한편 바로크적인 특징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스페인의 매너리즘은 극렬한 반종교시대의 상황 속에서 이태리와는 달리 '영성'적인 성격을 강하게 보이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작가는 엘 그레코로 <오르가주 백작의 매장, 1586-88>에서 그는 혼란한 공간과 길게 늘어난 인물들의 비례, 일렁이는 형태를 통해 비현실적이고 종교적인 색채를 강조하였다.

이처럼 정교한 테크닉과 형태의 왜곡, 강한 광선과 혼란한 공간감으로 요약할 수 있는 매너리즘은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퇴보한 시대, 부정적인 시대로 평가절하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연구가치가 있는 독자적인 양식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아놀드 하우저는 사회사와 연관시켜 매너리즘을 당대의 혼란한 정치, 종교적 상황에서 비롯된 불안감이 미술에 반영된 것으로 평가하기도 했으며 이와 다른 한편에서는 2세기 동안 지속된 르네상스의 반동으로 일탈적이고 파격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요구로 등장한 일련의 움직이라고 재정의 하기도 한다.

   

야고포 폰토르모

십자가에서 내림

1528

  

로소 피오렌티노

십자가에서 내림

1521

  

파르미지아노

긴 목의 성모

1535

  

브론지노

알레고리 (비너스와 큐피트)

1545

  

   

엘 그레코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

1586

  

   

   

   

   

   

   

   

   

   

   

   

   

   

   

   

   

04.바로크(Baroque)미술의 특징과 지역적 전개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오후 8:42

   

바로크(Baroque)미술의 특징과 지역적 전개

   

원래 어원은 'Barocco, 이지러진, 불규칙한 진주'로 17세기부터 18세기 중반에 걸친 대부분의 유럽 미술에 적용되는 사조를 일컫는다. 바로크 미술은 매너리스트 양식의 인위성에 대한 사실주의의 반발이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각 지역의 상이한 사회적, 정치적 상황 속에서 다양한 양상을 띄며 나타났다. 새로이 강화된 카톨릭 신앙, 절대주의 국가, 과학의 새로운 역할이라는 시대 상황과 함께 발전한 사조로 이태리, 플랑드르, 네덜란드, 스페인, 프랑스, 영국 등 전 유럽에걸쳐 각각의 양식을 나타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바로크 미술을 종합하여 특징지을수 있는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기술적인 완벽과 드라마틱한 효과 2) 움직임의 강조, 실제 장면에 참여하는 듯한 사실주의적 illusion 효과 3) 교회나 국가의 홍보/미화에 기여

17세기 이탈리아는 거대한 반종교개혁의 정신 아래 대대적인 카톨릭 포교활동을 펼쳤다. 주와 교회의 영광을 재현하고 찬미하기 위해 로마를 중심으로 거대한 미술 프로젝트를 추진하였고 그에 상응하는 막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카라바지오(1517-1611)는 이탈리아 바로크 미술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 후기 매너리스트 화가인일 카빌리에레 다르피노의 지도 이후 당시 추기경이었던 델 몬테 등의 부유한 후원자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이로 인해 많은 종교적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전의 종교화는 현저히 다른 특징이 있었는데 첫째 종교화를 일상의 한 장면과 같이 표현함으로써 일반적으로 종교화에 등장할 수 없다고 여겨지던 하층 계급의 서민을 주인공으로 선택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순간의 장면을 강한 명암 대조를 통해 드라마틱하게 제시함으로써 관람자로 하여금 그림 속에 동참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 다는 점이며 셋째는 자연주의에 입각한 태도를 바탕으로 이상미를 제시하려는 것이 아닌 실제 세계를 관찰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Bacchus, 1597>, <성 마태오의 소명, 1599-1600>, <성 바울의 개종, 1600-01> 등 그의 작품은 여러 가지가 남아 있으며 그의 화풍은 전 유럽을 걸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 기술적으로는 네덜란드의 유트레히트 화파에 큰 영향을 끼쳤으나 그의 시각적 진수는 후에 렘브란트, 스페인의 리베라, 벨라스케스, 프랑스의 라 투르와 르냉 형제 등에 의해 한층 더 이해, 발전되었다. 회화와 더불어 바로크의 건축은 질서정연하고 반복적인 특성의 르네상스 양식을 벗어나 중심이 가운데 나타나며 클라이막스와 그에 부속되는 종속적 존재가 존재하며 보다 감성적, 장식적,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예는 성 베드로 성당으로 마데르토와 베르니니가 함께 참여한 이 프로젝트에서 성당은 중앙의 오벨리크스앞에 열주를 건축하여 마치 교회가 팔을 벌려 사람들을 끌어 안으려는 포교활동을 상징한다. 이탈리아 바로크 조각의 대표적인 인물은 베르니니로 <다윗상, 1623>, <성 테레사의 엑스터시, 1645-52>등의 조각을 통해 격렬한 정서의 표현과 역동적인 동작을 구현해 내었다. <다윗상>에서는 돌을 던지려는 극적인 순간을 다중시점의 열린 구조 안에서 극대화된 감정을 노출하며 표현했으며 <성 테레사의 엑스터시>에서는 정신적 뿐만 아니라 육체적 황홀경이 동시에 표현되었다.

스페인은 르네상스의 전통이 별로 확립되지 않은 곳이었다. 때문에 아카데미의 영향도 적었고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바로크를 수용, 발전시켰다. 스페인의 바로크는 주로 카라바지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의 영향으로 격한 광선의 대립과 자연주의적 묘사, 어두운 색채가 많이 나타난다. 특히 종교화의 경우 고통스럽고 어두운 면에 초점을 맞췄는데 이러한 면은 후에 피카소, 고야, 달리 등으로 이어지는 괴기스러움과 환상, 파괴성으로 연장된다.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는 스페인 바로크시대의 최고 화가로 궁정화가로써 경제적 안정과 명예를 모두 얻은 화가이다. 그는 초기에 카라바지오 풍의 그림을 그리다가 1620년대 말경 이후 루벤스와 티치아노의 영향으로 유려하고 풍부한 취향의 화풍으로 전환하게된다. <세빌리아의 물장수, 1623>는 그의 대표적인 초기 작품으로 평범한 인물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에서 카라바지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Las Meninas, 1656>는 그의 최고작으로 일종의 초상화지만 일상생활의 자연스러움을 부여하여 풍경 + 그룹 초상화의 복합적 성격을 띄고 있다. 그림 속의 그림을 보고 있는 사람은 거울에 비춰진 왕과 왕비이면서 동시에 관람자일 수도 있다는 시각적 퍼즐을 사용하였고 optical realism에 입각하여 관습에 의한 그림을 거부함을 알 수 있다. 자신의 관찰력에 의해 보여지는 정도를 확실하게 구별해서 그림을 그렸으며 특히 빛이 주는 효과에 매료된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플랑드르는 이 시기 스페인 전제 군주의 통치 하에 있었기 때문에 엄격한 카톨릭의 영향권 내에 있었다. 때문에 국가나 교회가 위촉하는 주문 제작이 많았으며 당연히 주제도 종교적이고 왕권을 과시, 찬양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플랑드르의 대표적 인물은 피터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로 그는 가장 성공한 17세기 거장 중의 한 사람이다. 이탈리아 유학을 통해 얻은 고전주의적 양식과 플랑드르의 고유 양식, 루벤스 특유의 역동성을 가미시켜 그는 독창적인 미술을 나타내었다. <십자가를 올림, 1610>은 그가 이태리에서 돌아와 처음 그린 그림으로 예술의 실제 모습은 사실적으로 나타나고 광선은 위에서 떨어져 예수에게 집중되며 확연한 명암의 차이를 보여준다. 미켈란젤로적인 인체의 표현은 르네상스 미술의 영향을 보여주지만 실제 그 지역 사람들의 얼굴로 모두 표현되고 있다. 대각선의 긴장된 화면 구성과 화면을 뚫고 나올 듯한 착각의 효과는 전형적인 바로크의 특징이다.

네덜란드는 1648년 독립하여 신교 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교회의 후원을 받은 대규모의 작품이 드물다. 중산층과 신교도들의 지위가 성장함에 따라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소재들이 주로 다뤄졌고 미술 시장이 일찍이 발달하여 화상을 통한 그림의 교환이 활발하였다. 일상 생활 용품으로서의 그림이 발달하면서 작은 규모의 이해하기 쉬운 초상화, 정물화, 풍경화가 주로 제작되었다. 대표적인 화가는 렘브란트(1606-69)인데 그는 루벤스와 더불어 바로크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네덜란드 미술의 거의 전 분야에 영향을 미치게 된 인물이다. 그는 특히 카라바지오의 자연주의적 표현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인간의 감정과 반응에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루벤스나 벨라스케스와 달리 어두운 색채들을 사용하였다. 초기의 대표적인 작품은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32>로 이 그림은 중심이 밝고 주변이 어두운 전형적 바로크 형식을 다루고 있으며 해부되는 시체의 시신을 급속한 축도로 표현함으로써 긴장감을 더해준다. 또한 대각선을 많이 사용했으며 각각의 얼굴을 정확히 묘사한 특징을 가진다. <야간 순찰대, 1642>는 암스테르담의 시민 방범 조직대의 집단 초상화이다. 역동적인 구성 안에 등장인물들은 혼란스럽게 움직이고 있으며 빛과 색채의 대조, 인물의 개별묘사, 복잡한 구성을 아우르는 통제력으로 렘브란트의 최고 정점의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 시기 이후의 작품들은 매우 인간적이며 심오한 감정, 정적인 느낌들을 보여준다. 요하네스 베르메르(1632-1675)는 생애가 거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로 그는 독특하게 거의 전 작품을 방 한구석을 배경으로 하는 풍경화로 제작하였으며 조용하고 사색적인 일상 생활의 한 장면만을 선택하여 정확한 묘사를 하였다. 또한 camera obscura를 사용하여 전광과 후광의 차이를 포착하여 중심은 선명하게 주변은 흐릿하게 그림을 제작하였다.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부상하며 17세 말에 이르러서는 파리가 로마를 대신해 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 프랑스 바로크는 사실주의적 경향과 함께 고전주의풍, 궁정양식풍의 결합되어 George de la Tour(1593-1652), Louis le Nain(1593-1643), Nicolas Poussin(1594-1665), Claude Lorrain(1600-1682)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는데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변화무쌍한 곡선과 섬세함을 특징으로 하는 로코코 양식으로 이어진다.

   

   

카라바지오

성 마태오의 소명

1599-1600

  

카라바지오

성 바울의 개종

1600

   

벨라스케스

세빌리아의 물장수

1623

  

   

   

   

   

   

   

   

   

   

   

   

   

   

   

   

   

   

   

   

   

   

   

   

   

   

   

   

   

   

   

   

05아카데미의 성립과 발전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오후 8:44

   

아카데미의 성립과 발전

   

플라톤의 Academia에서 유래된 이 단어는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신플라톤주의가 유행하면서 철학이나 문학 모임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미술 아카데미의 시작은 지오르지오 바자리(Giorgio Vasari, 1511-74)와 토스카나의 대공 코지모 데 메디치(Cosimo de'Medici)가 이미 존재하던 콩파니아 디 루카를 개혁해 설립한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Academia del Disegno)라고 할 수 있다. Disegno라는 용어는 그대로 번역하면 디자인(design)이지만 여기서는 회화, 조각, 건축을 이루는 구상, 드로잉, 창조력 등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단어로 이해해야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철저한 이론 교육에 중점을 두었던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의 교육과정은 코지모 1세의 후원을 업고 미술가들이 장인의 위치에서 벗어나 전문인으로서 자신들의 분야를 관장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즉, 아카데미아 회원이라는 것은 미술가들에게 사회적 신분상승을 의미하는 것으로 더 이상 주문을받아 작업을 하는 장인이 아니라 지적인 진실을 추구하는 자유인으로서의 입지를 확인시켜주는 하나의 증거였다.

이후 로마, 파리, 런던 등지에도 미술 아카데미가 설립되는데 특히 프랑스에서는 1648년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Acadé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가 설립됨으로써 명실상부 최고의 권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 아카데미에서는 기하학과 비례에 의한 명확한 공간의 강조하였고 여러 미술의 장르 중 역사화를 가장 고상한 주제로 여기는 교육을 지속해 나아갔다. 그러나 길드의 규제로부터 미술가들을 자유롭게 하려는 이탈리아의 아카데미와는 달리 프랑스의 아카데미는 루이 14세와 재상 콜베르의 주도 下에 절대국가의 중앙중심주의와 연결되어 문화를 통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프랑스 아카데미의 이상적인 양식은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를 기본으로 하였다. Nicolas Poussin의 양식은 로얄 아카데미의 모본으로 여겨졌고 후에 Jean-Auguste-Dominique Ingres를 아카데미양식의 정점으로 보아, 학생들은 모두 이 양식으로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 점차 아카데미는 획일화된 예술, 공식화된 미술이라고 인식되었고 아카데미 미술가들은 사회적 지위와 부를 얻은 대신 독립성과 창의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아카데미 회원들의 독점적인 특권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면서 프랑스의 화단을 이루는 요소는 Institut de France, Ecole des Beaux-arts, 그리고 젊은 미술가들의 등용문인 salon展으로 변하였다. 19세기 전반, 부르주와의 성장으로 부유한 중상층이 새로운 미술수요의 계층으로 등장하면서 미술 시장은 엄청나게 성장하게 되었고 회화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맞물려 살롱전의 영향력은 비대해져서 미술가의 생존이 살롱전에 받아들여지느냐에 따라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살롱전은 필연적으로 제도적 모순과 편견, 차별에 가득 차 있었고 1870년경에 이르러 이에 반발하는 젊은 화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인상파 화가들이다.

인상파 화가들이 이룩한 근대미술의 혁명이 아카데미 살롱체계에 대한 반발에 근간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로, 마네, 드가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성공한 살롱화가였다는 점은 반드시 생각해 봐야 할 사항이다. 그리고 아카데미와 대립한 '인상주의'라는 전위적 흐름 역시 그 이후에 등장한 사조에 대해서는 역시 또 하나의 아카데미즘 일 수 밖에 없는 원리 역시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06 19세기 신고전주의의 발생 배경과 발전 과정, 의의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오후 8:45

   

19세기 신고전주의의 발생 배경과 발전 과정, 의의

   

유럽 미술에 있어서 그리스, 로마의 고전에 대한 향수는 르네상스 이래로 바로크, 로코코로 이어져 온 하나의 전통이었다. 신고전주의는 이러한 전통을 정면으로 수용한 19세기의 미술사조로서 그 발생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가 18세기 말에 극단적인 사치와 화려함, 장식성을 가진 로코코 미술에 대한 반작용, 둘째로는 폼페이와 헤라클레네움, 파에스로 등의 고대 건축 발굴과 그리스 문화의 재발견, 그리고 빙켈만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고대에 대한 새로운 관심, 셋째로는 프랑스 혁명 전후 로마 공화정으로의 회귀를 지향했던 계몽주의적 경향이 그 원인들이다. 하지만 신고전주의는 르네상스시대처럼 창조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고전을 재해석한 것이 아니라 고전의 형식상의 모방과 추종에만 그치는 경향이 더 강했고, 고전의 위대함을 정부의 권위를 상징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여 정부에 봉사하는 미술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미술가는 자크-루이 다비드(1748-1825)이며 그의 작품인 <호라티우스家의 맹세, 1784-85>는 흔히 신고전주의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 회화에서는, 형식면에서는 표현의 명확성, 형식과 내용의 균형성, 엄격한 구도, 명확한 윤곽, 입체적인 형태의 완성을 우선시 했고 주제면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철학적 이상과 관련된 도덕적인 주제 下에 초기 로마의 금욕적이고 공화주의적인 미덕을 표현하는 것을 중요시 했다. 그러나 이 시기 발표된 고대 유물의 발굴 결과 유물 대부분이 조각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부조를 변형시킨 듯한 형태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었다. 대기원근법의 사용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았고 형태의 윤곽선을 강조했으며 인물들을 화면에 횡렬로 마치 조각처럼 배열하였다. 그리고 평면적인 색채의 배경과 짧게 표현된 그림자 등을 통하여 그림 깊은 공간감을 차단함으로써 무대가 되는 화면을 부각시켰다. 바로크/로코코를 거쳐 강조되던 3차원적 일루전 기법은 철저하게 부정되었고 오히려 2차원적 공간의 표현으로 회귀하였는데 소수의 학자는 이점을 근거로 현대미술의 효시를 다비드로 보기도 한다. 다비드의 양식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계승되거나 변형되었는데 안 루이스 지로데나 안토니 장 그로는 신고전주의에서 출발하였으나 후기에는 낭만주의적 요소를 강하게 보였고 게랭의 경우는 오히려 다비드의 반대에 서서 제리코, 들라크루와 등의 낭만주의 회화의 선구자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다비드의 신고전주의를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 발전시킨 인물은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1780-1867)이다. 그는 평생 신고전주의 화풍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인물인데 이탈리아에서 오래 머무는 동안 라파엘의 회화에서 받은 영향을 재현하여 오히려 다비드보다도 더 고전적인 작품을 남겼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고전주의의 차가운 형식 존중은 곧 반발을 사게 되고, 개인적인 감정의 존중과 자아의 해방, 무한한 상상력을 반영하는 주관적/감각적 미술이 풍미하게 되는데 이것이 낭만주의이다. 낭만주의는 독자적인 명확한 양식적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주로 16세기 베니스화풍이나 루벤스가 그린 풍만하고 화려한 육체, 감정에 호소하는 색채 효과를 즐겨 사용하였다. 낭만주의의 대표적 화가인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 1818-19>, 들라크루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 1830>을 다비드의 작품과 비교해 보면, 다비드는 광택이 나는 듯한 고른 화면과 정면성의 균형적 구도, 고전적 주제를 엄격한 색채로 표현한 반면, 들라크루와는 루벤스나 렘브란트의 painterly한 화면을 부활시켰고 구도 역시 깊이 있는 비대칭의 사선구도,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이국적 주제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색채 자체가 그림의 전체적인 인상을 주도하도록 풍부하고 감정적으로 색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 영국의 낭만주의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열렬한 감정 표현을 바탕으로 한 풍경화 위주로 발전하게 되는데 윌리엄 터너, 콘스타브, 윌리엄 블레이크가 대표적 화가이다. 스페인에서는 고야를 중심으로 한 낭만주의가 발전하게 되는데 특히 그가 노년에 선보인 인류의 사악함과 잔혹성에 뿌리를 둔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는 20세기 표현주의의 원시적 비관주의를 예고한다.

자크 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가의 맹세

1784-85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

  

들라크루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의 뗏목

1818-19

  

   

   

   

   

   

   

   

   

   

   

   

   

   

   

   

   

   

   

   

   

   

   

   

   

   

   

   

   

   

   

   

   

   

   

   

   

   

   

   

   

   

07 사실주의의 특징과 지역별 전개 양상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오후 8:47

   

사실주의의 특징과 지역적 전개 양상

   

1840년에서 1880년 사이에 형성된 사실주의는 낭만주의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예술 양식이라기 보다는 훨씬 더 넓은 관심의 영역에 적용되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평등의 사상을 고취시켰고, 근대적 자본주의는 현실주의, 물질주의를 강화시켰으며 여기에 사회주의가 가세하게 된다. 사실주의의 주창자들은 아카데미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인위성을 거부하고 예술 작품이 대중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동시대 의식이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따라서 역사나 알레고리, 미적 대상 등 전통적 주제를 탈피하고 그때까지 등한시되었던 일반 서민들의 모습과 가치관에 관심을 가지며 동세대의 삶과 사회의 면모를 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中 프랑스는 가장 일관성 있는 사실주의를 보여주었다. 쿠르베는 "회화는 본질적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의 표현으로 구성될 뿐이다." 라고 주장하며 과거의 장면 등과 같은 전통적 소재를 용납하지 않았다. 보들레르가 이야기한 "근대 화가들은 군중 속 익명의 인물이 되어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편견 없는 시각을 갖고서 당대의 생활과 유행으로부터 끌어온 주제를 직접적인 인상을 반영할 수 있고 널리 유포되기에 적합하고 재빠른 매체를 통하여 그려내야 한다."라는 말을 통해서도 이 시기 현재에 대한 강조를 중시했던 사회적 관심을 짐작할 수 있다. 도미에(Daumier, 1808-1897)는 서정성을 배제한 사회풍자적인 그림을 주로 그렸는데 1840년대 노동계급을 주제로 하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1860년경 <삼등열차>에서 노동계급의 삶의 본질을 시각적 이미지로 집약해내었다. 사실주의의 전형을 보여주는 쿠르베(Courbet, 1817-1877)의 작품에는 도미에만큼의 의식적 사회비판도, 밀레의 서정성도 없다. 그는 단지 사물에 대한 관찰이나 작화법에 있어서 조금의 과장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재현을 중시했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던 그의 회화관은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1855년 자신의 작품이 파리 국제 박람회에 거부당하자 임시천막에서 독자적인 사실주의의 전시를 개최하였는데 이는 사실주의에 대한 공식적인 선언으로 후대에 평가되고 있다. <오르낭의 장례식, 1849>은 회화가 그 자체로서 하나의 현실이 될 수 있으며 화가가 할 일은 그 세계를 규정하는 것이라는 그의 인식을 기록한 최초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화가의 작업실, 1854-1855>은 사회의 이상적인 하모니를 이루는 자본, 노동, 능력의 관계를 개인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예술을 창조하는 영웅적 이미지의 화가를 일상적인 삶의 모습에 부여한 작품이다.

영국에서의 사실주의는 종교적 열정을 담아내는 형태로 나타났다. 1848년 화가이자 시인인 Dante Gabriel Rossetti를 중심으로 일련의 젊은 화가들이 모여 전성기 르네상스 이전의 미술(15세기)로 돌아가자는 라파엘前파를 결성하였다. William Holman Hunt, John Everett Millias, Ford Madox Brown으로 대표되는 라파엘전파는 기독교적인 주제를 중심으로 모든 매너리즘적, 바로크적 기교를 거부한 채 라파엘이 출현하기 이전 15세기의 원시적 대가들에게서 영감의 원천을 모색하였다. 예술을 통해 현대문명의 질병을 치유하려는 동기를 표방하며 자연주의적 묘사, 밝은 색조, 순백의 바탕이 하나의 색채효과를 내도록 하였다. 전통적인 명암대조법(chiaroscuro)과 율동적인 붓질을 거부하고 순수하게 자연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주며 중세 예술이 지닌 순수한 회화 양식으로 회귀할 것을 주장하였다.

   

  

도미에

삼등열차

1863

  

구스타브 쿠르베

오르낭의 장례식

1849

  

구스타브 쿠르베

화가의 작업실

1855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수태고지

1850

  

존 에버릿 밀레

오필리어

1852

  

   

   

   

   

   

   

   

   

   

   

   

   

   

   

   

   

   

   

   

   

   

   

   

   

   

   

   

   

   

   

   

   

   

   

   

   

   

   

08 인상주의의 등장 배경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오후 8:51

   

인상주의의 등장 배경

   

1874년 4월 5일 사진작가 Félix Nadar의 스튜디오에서 열린 "화가 조각가 및 판화가 무명협회 제 1회전"이 사실 제1회 인상주의전이였으며 이를 시작으로 인상파가 본격적인 활동을 보이게 되었다. 인상주의란 명칭은 이들의 전시회를 본 후 기자 Louis Leroy가 4월 25일자 신문에 조롱의 의미로 "인상주의자(impressionists)"라는 어투로 그들을 부른 것에 기인한다.

산업혁명 이후 사회는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었으며 풍요로운 물질적 혜택을 시민들에게 선사하였다. 당시의 근대문명은 획기적이었으며 이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였다. 당시의 예술가들도 이러한 근대문명을 새로운 시대의 활기차고 생동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예술적 대상으로 인식하였다. 뿐만 아니라 물질적 풍요는 화가들에게 튜브에 든 물감과 종이, 휴대성이 용이한 미술도구 등 새로운 도구들을 보급해주었고 아울러 교통수단의 발달은 그들에게 자유로운 여행을 가능케 하여 야외에서도 스케치를 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었다. 또한 카메라의 발달로 인해 화가들은 객관성의 재현과 우연성의 포착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러한 카메라적 기법은 실제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해 19세기 후반부터는 기존의 귀족과 교회 중심의 후원에서 전문적인 직업 화상들과 신흥부유층인 개인 수집가들도 후원의 계층도 변하였다. 때문에 미술의 주제 역시 좀 더 중산층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19세기 말에 수입된 일본의 우끼요에는 당시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예술 계에 큰 유행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고 인상주의를 비롯한 이후 서양 미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우끼요에는 당시 파리에 자포니즘이라는 새로운 유행을 낳을 정도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그 특유의 가장자리를 절단한 구도, 조감도적인 구도, 강렬한 원색의 사용은 드가, 로트렉, 고흐, 고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하에 등장한 인상주의는 고전적인 아카데믹 회화와는 판이하게 다른 양상을 보이며 발전해 나아갔다.

인상주의 이전에 등장 했던 미술사적 사조를 통해서도 앞에서 언급한 사회적 배경 이외에 미술계 자체의 변화 역시 인상주의의 태동에 큰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들라크루와 식의 밝은 색조 사용방식을 꼽을 수 있다. 둘째로 바르비종파를 비롯한 영국 낭만주의 풍경화의 영향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자연을 직접 관찰하여 표현하는 이들의 방식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 활동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쿠르베의 사실주의적 작품들은 당대 평범한 인물을 주제로 그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인상주의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마네의 작품도 이후 전개되는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마네는 시각적인 조형성을 부각시키면서 고전적인 색채변화를 통한 원근법이나 입체감의 사용을 과감히 포기하고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강렬한 색채 대조를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색채의 사용은 시간적 요소를 단축화시키는 경향을 대두시켰다. 그의 모던한 화풍은 이후 주제의 전달 보다는 객관적인 재현에, 항구적인 순간보다는 일시적인 찰나의 모습의 재현에 몰두했던 이후 인상주의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근대화 사회와 풍요로운 물질문명을 바탕으로 새로운 회화의 장을 연 인상주의는 마네 이후 드가, 모네, 르느왈, 카사트 등에게 이어졌다. 인상주의는 19세기 말 산업사회의 중산층의 모습을 주제로 그 순간적인 장면을 포착하여 미묘한 색채의 사용을 통해 시각적인 조형성을 구축하고자 노력하였고 이러한 그들의 경향은 당대의 사회적 배경과 이 전의 미술사적 전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09 앵그르-드가-피카소 누드의 비교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오후 8:51

   

앵그르-드가-피카소 누드의 비교

   

앵그르는 다비드의 뒤를 잇는 신고전주의의 대표적 주자로 뛰어난 dessin과 극사실적인 표현, 촉각적인 묘사로 당대에 많은 각광을 받았다. <발팽송의 목욕녀, 1808>에서 볼 수 있는 그의 누드는 형태 표현에 있어서 탁월한 솜씨와 엄격하고 명료한 구도, 대상에 대한 정밀한 묘사를 보여주고 있다. <대 오달리스크, 1814> 의 누드는 해부학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늘어진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러한 독특한 묘사 방식은 앵그르 미학을 반영한다. 그는 섬세하고 길면서 흐르는 듯 유려한 선 자체를 훌륭한 미적 요소로 보았고 인체의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선 자체의 美感이 연장되는 것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형태를 모순되게 표현한 것이다. 피카소의 주장대로 이미 앵그르는 이미 형태의 추상화 경향을 다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앵그르는 아직까지 인체를 감각적으로 재현하는데 전념하고 있다. <터키탕, 1863>은 앵그르의 여체에 대한 관심이 당시 프랑스를 지배하던 동양적 기호와 만나 화려하고 나른한 '육체의 정물화' 를 만들어 낸 앵그르 말년의 작품이다. 앵그르는 이 그림을 처음에는 정방형으로 포맷하려고 했다가 나중에 타원형으로 포맷하여, 남성 관람자들에게 열쇠구멍을 통해 몰래 여탕을 들여다 보는 관음증적 만족감을 주고 있다.

드가 또한 구도와 소묘에 깊은 관심을 두어 앵그르를 존경하였다. 그러나 그의 누드는 앵그르의 형태와는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의 후기 연작인 <bath tub, 1890>은 여성 누드와 남성의 관음적 시선을 주제로 삼은 작품이다. 구멍으로 들여다 본 듯한 구도는 앵그르의 터키탕을 연상시키지만 이 작품 안의 여인들은 더 이상 어떤 성적 이미지를 강조하지 않는다. 목욕을 위해 구부린 등과 다리, 탕 안으로 발을 뻗는 여자의 뒷모습은 평면적이고 딱딱하다. 공간 안에서 순간적인 동작을 보이는 여성의 몸은 이미 입체감이나 사실감을 많이 상실했기 때문이다. 드가는 여인의 누드를 남성 관객의 탐미적 대상으로 여겼던 과거의 환상을 제거한다. 여성 누드라는 장르에서 해방된 여인들은 더 이상 관객을 환상을 자극하지 않은 채 아주 건조하게 표현되기 시작한다.

드가를 비롯한 이전의 화가들이 눈에 보이는 인상을 평면적인 패턴으로 단순화 시켰다면 피카소는 <아비뇽의 처녀들, 1907>에서 평면성을 피하면서도 사물을 단순하게 환원하는 동시에 파편화 시키고 입체감과 깊이감을 유지하는 그림을 보여주었다. 주제 면에서도 지금까지의 누드화에서 등장한 풍요와 미적 알레고리인 인물들이 아니라 거리의 여인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문명화된 사람들을 향한 분노와 슬픔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뚤르즈 로트렉이 그랬듯이 단순히 천한 여자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 전통에 아무것도 얽매이지 않고 인체표현에 있어 어떤 공식을 발견해 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카소에게 누드는 의미 있는 깊은 형태를 창조해내는 수단이었다. 신체는 격렬한 전이와 강조된 단순화에 의해 새롭게 재창조 되었다.

   

   

   

10 후기인상주의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오후 8:52

   

후기 인상주의

   

인상주의에 대한 회의가 생긴 후 일군의 새로운 화가들은 인상주의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독자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인상주의가 지나치게 순간적인 찰나의 포착과 시시각각 빛에 따라 달라지는 변화를 표현하는 데만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고 보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에 근거한 미술을 추구하였다. 1884년 창설된 Independent전을 시작으로 Seurat, Signac 등 신인상주의자들은 그러한 그들의 경향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작품 활동을 펼쳤으며 Félix Fénéon은 이를 "신인상주의는 인상주의를 보다 체계화하고 영속화시키려는 새로운 시도"라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후에 등장하는 후기인상주의자들로 인해 인상주의를 극복하고 항구적이고 본질적인 형태를 이룩하고자 하는 노력을 계속되었다.

쇠라는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1884-1886>와 <퍼레이드, 1887-1888> 등에서 정확한 색채분할과 점묘법에 의해서 대상을 묘사하고 있다. 주제나 작품에 넓게 스며든 빛은 인상주의 화풍을 떠올리게 하지만 쇠라의 감수성과 기법, 철저히 계산된 구성과 리듬감은 초기 인상주의자들이 집중한 순간성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이러한 색점과 기하학적인 분할주의는 색점과 평면적 곡선양식으로 구성된 추상에로의 변화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시도는 후에 야수파와 큐비즘의 작가들의 색선실험으로 이어지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추상표현주의자와 색면파 화가들의 등장에 의해 완성되었다.

세잔느은 후기 인상주의자 들 중에 이후 세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으며 20세기 미술의 실험적 작업의 개척자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인상주의에 의해 빛 속으로 소멸된 형태를 회복하기 위해 자연을 원추, 원기둥, 구의 형태로 재구성하였으며 단일화된 시각을 해체하여 다원적 시점을 보여줌으로써 큐비즘을 예비하였다.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 1890-94>에서 보면 하나의 정물이 다양한 시각을 통해 새롭게 재구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대상과 대상 사이의 공간이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단단한 어떤 공간이나 혹은 대기에 의해 메워지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공간을 대상만큼이나 중요한 구성 요소로 간주하였다. 그의 후기 작품인 <쌩 빅트와르 산 연작, 1885-1904>은 세잔느가 대상에 대한 신중한 분석을 선호하여 풍경이 화면 구성연습을 위한 소재로 변해가는 정도로까지 나아갔음을 설명해준다. 세심하게 고려된 건축적 구성방식과 회화적인 입체와 평면을 사용하여 자연의 변하지 않는 본질적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던 세잔느는 선과 면, 입체 등 구성적 요소를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하는 20세기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고갱은 좀 더 심리적이고 인간 내면에 자리잡은 깊숙한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상징적이며 신비스러운 인간의 내면과 상상의 세계를 율동감 넘치는 장식적 선과 평면적인 색채를 사용하여 표현하였고 이는 후에 나비파 화가들 뿐만 아니라 그가 교류했던 상징주의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설교 후의 환상, 1888>은 고갱이 브르타뉴 시기에 제작한 작품으로 '종합주의'라고 알려진 양식을 잘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브르타뉴 전통 의상을 입은 여성이 등장하는 현실의 모습과 성경에 나오는 야곱과 천사의 씨름을 담은 상상의 장면을 결합시키고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98>는 단순화된 형태, 종합적이고 기하학적인 윤곽, 강한 명암대조와 인물들의 엄숙한 자세를 통해 소박하고 신비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반 고흐는 <밤의 까페, 1888>, <자화상, 1890>의 작품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율동감이 강한 선을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여 작가의 주관적인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반 고흐의 작품경향은 야수파와 독일 표현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자연에서 벗어난 완전히 주관적이고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색채의 사용은 대표적인 야수파 작가인 마티즈에게 영감을 주었다. 붓터치에 의한 동적인 화면 구성과 인위적인 형태의 왜곡은 그의 병적인 심리적 내면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했다는 면에서 20세기 독일 표현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조르주 쇠라

일요일 오후의 그랑 자트 섬

1884-86

  

세잔느

큰 소나무가 있는 쌩 빅트와르 산

1885-87

  

폴 고갱

설교 후의 환영

1888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에

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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