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aluing Minimalism: Patronage, Aura, and Place
Anna C. Chave
현대미술에서 후원연구가 드문 데에는 이유가 하나 있다. 후원자들이 미술의 과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적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미니멀리즘 운동 쥐세페 판자(Giuseppe Panza)와, 디아 파운데이션(Dia Foundation)의 설립자인 하이너 프리드리히(Heiner Friedrich), 필리파 펠리치(Philippa Pellizzi)에 의해 주도된 미니멀리즘의 정신적 관점은 미니멀리즘 영역의 특정 작가들을 부각시켰는데, 이 점은 특히 어마어마한 규모로 제작된 장소 특정적 미술(Site-specific art)에서 그러하다. 이들 후원자들의 후원으로 말미암아 월터 드 마리아의 1977년 작"Lightening Field"같은 작품이나 디아 비콘 뮤지엄(Dia Beacon Museum)과 같은 곳이 생겨났는데, 언론들은 그곳을 순례지, 혹은 성전으로 묘사했으며, 따라서 그 시작부터 미니멀리즘의 제도적 구분과 모순되는 상황에 대해 세속화, 물질주의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판자는 1967년 댄 플래빈(Dan Flavin)과 로버트 모리스의(Robert Morris)의 작품을 시작으로, 도널드 저드(Donald Judd), 칼 안드레(Carl Andre),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 로버트 어윈(Robert Irwin) 등의 작품들을 초기에 사들여 시장을 독점하였다. 미니멀리즘 초기에 판자의 미니멀리즘을 보는 시각은 "단순한 형태를 통한 진리의 탐구"로, 본래의 작품에 무언가 "본질적인" 아우라와 같은 것이 부여되는 작업이었다. 디아 파운데이션의 작가후원으로 만들어지는 대형 미니멀리즘 작품에 대해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텅 빈" 작품에 무언가 "본질적인 것"을 덧씌우는 것이라 비판하였다.
1975년 설립된 디아 파운데이션의 목적은 "비용과 크기상 개인이 만들거나, 후원하거나, 소장하기 힘든 작품을 기획하고 만들어내며 유지하는 것"이었다. 프리드리히는 재단의 목적이 "통로"(그리스어로 "–를 통해서")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이름을 디아라고 골랐다. 디아는 또한 "신과 같은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디아에 의해 천재들이 만들어낸 신의 선물들로 윤색된, 이 작가들의 작품들은 종종 언론에 의해서 "디아 화" 되었다. 예술가와 후원자들은 서로를 초인적인 천재성을 지닌 자들로 인가한 것이다.
언론은 종종 로스코 채플(Rothko Chapel)을 제작하게 한 드 메닐(de Menil)가를 메디치가에 비유하였고, 프리드리히는 디아의 설립을 문화적인 르네상스와 같은 것이라 말했다. 하이너 프리드리히와 필리파 펠리치는 플래빈, 저드, 터렐, 드 마리아(Walter de Maria), 마리안 제질라(Marian Zazzila)부자, 그리고 행위예술가 로버트 휘트만(Robert Whitmann)의 작품을 후원, 소장했다. 이들 후원자들은 그들이 아우라가 느껴진다고 생각되는 작품들을 찾았고, 그들은 캘리포니아 미니멀리스트 중 몇명을 뉴욕 미니멀리스트와 동등하게 포함시켰다. 하지만 미니멀리즘 담론이 진화하면서, 수많은 비평가와 미술사가들이 "빛과 공간"의 작가인 어윈, 터렐 등을(모두 서부 출신인) 완전한 미니멀리스트가 아니라, 전혀 동떨어진, 정신화(idealized)된 작가들 혹은 "캘리포니아 숭고"의 예로 분류한다. 1991년 크라우스가 프랭크 스텔라와 애드 라인하르트를 떼어내듯 모이스와 플래빈의 그룹과 어윈과 터렐 등의 서부 그룹을 떼어낸 것이 대표적인데, 그는 20세기 초에 태어난 바넷 뉴먼과 마크 로스코, 토니 스미스, 론 블레든, 아그네스 마틴, 앤 트루잇과 같은 화가들이 그들의 유대인-크리스천 혹은 동양철학의 배경에서 정신적인 접근을 하는 예가 이미 오래전에 존재했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위와 같은 작가들은 미니멀리즘의 단순성에 영향을 준 이들로 저드와 같은 세대들에게 존경받고 있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미니멀리즘의 기하학적 단순성이 산업적인 물질주의에 기반한 세속적인 미술이라고 생각한다. 미니멀리즘이 하나의 운동으로 뚜렷히 모여진 시기, 즉 1960년대 중반에는, 많은 사람들이, 리차드 쉬프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즉각적인 물리적 팩트를 넘어선 상상을 하게 하는 요소가 없는" 오브제를 보여주려 한다고 생각했다.
미니멀리즘 작가들의 초기 중요한 전시에는(예를 들어 66년 뉴욕 Jewish Museum의 Primary Structures 전시) 동부와 서부의 작가들 모두가 참여했다. 하지만 그레고리 뱃콕의 1968년 작품집 Minimalism의 에세이들은 갑자기 몇 명의 캘리포니아 출신 작가들만 다루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편견은 더욱 굳어졌다.
동부와 서부의 미니멀리즘을 합치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있다면 두 그룹은 어떻게 교차했으며, 어떻게 비교하는 것이 유용한지는 중요한 질문이다.
사실, 미니멀리스트로 분류된 작가들 중 뉴욕 태생은 플래빈 하나였다. 저드와 모리스는 미주리, 또한 모리스는 뉴욕에 오기 전 캘리포니아에서 성장기를 지냈다. 저드는 뉴욕을 떠난 뒤 상당기간 텍사스에서 지냈다고 하였고, 솔 르윗과 안드레는 본래 뉴잉글랜드 출신이며, 안드레는 그러한 자신의 정체성을 종종 말하곤 했다. 퍼포먼스와 음악에서 미니멀리즘 작가들은 비록 대부분 뉴욕으로 이주해서 살았다. 무용에서 사이먼 포트(Simone Fort)와 이본 레이너(Yvonne Rainer)가 있다. 음악가 존 케이지는 선조부터 뉴욕에 살았으며, 라 몬트 영과 테리 라일리도 뉴욕 사람이다. 캘리포니아 출신인 드 마리아도 뉴욕에 정착했다. 반면 어윈, 터렐, 벨, 맥크래큰(McCracken),등은 그들이 태어난 서부에 계속 남았고, 그들 전부가 서부해안 가까이 살지는 않았다.
최근의 미니멀리즘 전시들은(LA현대미술관, 뉴욕의 구겐하임미술관(미니멀리즘을 역사로 돌아보는 최초의 전시) 판자가 얼마나 미니멀리즘을 자기 방식대로 지원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일는지 모른다. 현대미술시장에서 판자의 처음 행동은 남들처럼 작품을 계속 구입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공공미술을 성당의 지위에 올려놓고자 했던 이상주의적 야심을 키웠다. 이것은 디아의 설립자들과도 강하게 공유되었으며, 마침내 드 마리아의 <Broken Kilometer>와 같이 성소와 같이 영원할듯한 작품들을 만들게 되었다. 디아만큼의 재력이 없었던 판자는 장소특정적 미술과 환경미술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나름의 방식대로 주문, 전시, 홍보를 하여 주도적 인물이 되었다. 그는 터렐과 플래빈에게 자신의 바레세(Varese)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 터렐의 1975년 작품 <Skyspace I과>, 플래빈의 1977년 작<Varese Corridor>를 주문하는 한편, 여러 나라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의 주거도 마련했다.
판자의 장소특정적 미술에 대한 관심 프리드리히에 의한 것으로, 그는 독일과 뉴욕에 최첨단 상업갤러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미술가를 "사회의 최고봉"으로, 미술을 "새로운 세계를 세우는 시스템"으로 생각하던 프리드리히는 1963년 뮌헨에 첫 갤러리를 열었다. 그는 1938년 독일에서 태어나, 전쟁 기간동안 부자가 된 사업가의 아들이었다. 따라서 그는 요셉 보이스처럼 미술이 전쟁의 참상을 치유할 무언가 심오한 치료제이며, 전쟁의 파괴로도 무서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그는 드 마리아, 저드, 플래빈, 터렐, 그리고 영과 재질라가 합작한 소리와 빛의 설치미술 작품 등을 전시했다.
1977년에 드 마리아는 그의 대량의 흙을 21인치로 깔아 만든 첫 번째 <New York Earth Room>는 프리드리히가 연 뉴욕의 갤러리에서 전시되었다. 제작, 전시 비용들은 필리파 펠리치로부터 조달되었다. 펠리치는 대부호인 슐름베르거(Schlumberger)집안 출신인 드 메닐(de Menil) 부부의 막내로, 1964년 휴스턴의 사막 한가운데에 로스코 채플을 주문했던 집안이었다.
에큐메니컬 교회인 로스코 채플에는 다양한 종교의 순례자들이 찾아왔는데, 이후 그녀는 프리드리히와 1979년에 수피즘식 결혼식을 갖고, 파리하(Fariha)라는 이름을 받았다. 수피즘은 신비롭고 명상적인 이슬람 종파로서, 예술과 철학 방면에 대해 깊이 탐구한다. 1981년 지은 부부의 모스크에는 그들의 주거공간과 공연장 등 성과 속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여기에는 플래빈이 제작한 여러개의 빛 설치작품 또한 있었다.또한 음악, 언어, 신학, 역사등의 연구 모임을 하거나, 종교가들을 초빙하고, 무슬림 신앙과 철학을 담은 사진, 영화, TV 프로그램을 공급하여 을 지원했다.
플라빈은 1979년에 이 건물의 조명을 의뢰았는데, 프리드리히는 1957년 지오토의 프레스코를 보게 된 파두아의 아레나 채플을 본 경험과 아레나 채플의 경험은 동일하다고 후에 생각했다. 1960-70년대의 현대미술의 아방가르드는 정교한 기술이나 재료, 천재와 같은 관념을 포기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는데도, 프리드리히는 로스코 채플을 통해 로스코가 천재임을 알아챘으며, 그 작품은 그 대담함과 크기, 비중에서 걸작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그러한 작가들에게 비용을 아끼지 않고 후원했다.
이러한 예가 있기 전의 아방가르드 미술에서는 1960년대 후반의 대지미술, 그리고 최근 미니멀리즘에서 리차드 세라와 같은 경향 이전에는 거대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므로 디아가 소장한 거대 작품들의 무언가 산업적인 공간들은 분명 미니멀리즘 미학과 후원자 간에 조정을 거친 것들이다. 산업재료 역시 가난한 미술가 생활의 산물이었다.
초기 미니멀리즘 조각을 예로 들어보자면, 드 마리아의 1961년 무제 박스는, 합판 상자로, 일일이 광을 낸 동판 500개를 늘어놓은 1979년 작 "Broken Kilometer"에 비하면 값싸고 쉬운 작업이었다. 이러한 예들은 미니멀리즘의 역사에 있어 막대한 후원을 받는 시기의 변화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작품의 규모와 이런 것을 주문한 이유, 작품에 사인은 있는지, 작가에게 돈을 너무 퍼주는 것은 아닌지, 매우 전체주의적이라는 평 등, 주로 비용과 작가의 노동(Authorship)에 대한 질문을 했으며, 일부는 비난하고 일부는 열광하였다. 전문가들 중 에이프릴 킹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치 방탄유리 너머의 금괴들을 바라보듯, 매우 흥분되지만 절대 가질 수 없는 금으로 된 집같다." 반면 브라이언 월리스는 로스코 채플과 이 작품에서 "기계와 정신간의 팽팽한 긴장감"을 느꼈다고 적고 있다.
디아가 추구했던 거대 프로젝트들의 엄숙함과 고요, 그리고 적극적인 재단의 배려는 작가들이 어떤 질문이나 비판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작가들을 사회와 유리시킨다고 하였다고 하며 "컬렉터는 작품을 구입하는 것이지, 작품으로 성전을 만들지는 않는다."고 평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반응들이 미국인의 자유시장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자나 디아의 후원방식은 요즘의 자유시장과 배치되는 것이다. 2001년에 비평가 데이브 히키는 저드와 플래빈을 비교하며 그들이"18세기 신고전주의 대가 팔라디오와 같으며, 유럽 귀족 취향일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붙들려 있다"고 말했다. 작가들은 이후 독점적인 후원방식에 대해 불평하었지만, 그런 불평은 오일쇼크와 같은 경제난 당시에는 없었다.
프리드리히와 부인은 수피즘 신자이지만, 작가들에게 신앙을 강요하진 않았다. 그의 작가들 중 신앙이 있는 사람은 영과 재질라였다. 이 둘이 1981-1985년에 제작한 Dream House는 "전자음악이 24시간 흘러나오고, 6층짜리 작품이 보랏빛으로 수놓아져"있었는데, 재단은 수피즘의 음악론을 따르는 인도가수를 초청하여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디아의 첫 대지미술 후원은 드 마리아의 <Lightning Field>(1977)였다. 텍사스 마파(Marfa)에는 1979년에 개관한 치나티 파운데이션(Chinati Foundation)이 있다. 저드는 디아가 매입한 군수 폐기물로 작업하였고. 제임스 터렐은 1975년부터 아리조나 주의 로든 크레이터에 하늘을 볼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중이다. 세계의 미술품이 대개 도시에 집중되어있는 것에 비교할 때 이것은 매우 두드러지는 것으로, 벤야민이 정의한 미술품 특유의 특성인데, 언론에서는 위와 같은 장소를 다녀온 경험을 순례처럼, 작품을 아우라를 가진 것으로 묘사했다.
1960년대는 선불교와 아방가르드가 만나 이루어진 정신적인 운동의 시기였다. 칼 안드레의 벽돌과 플래빈의 형광등 작업에서 관람자는, 무언가 해탈(transfiguration)의 순간을 경험한다고도 평하며, 마치 선불교와 선험철학 등에서 나올 법한 여러 가지 반응들을 보인다.
반면 물건을 보는 사람들은 물건만을 보는 것을 고집한다. 이렇기에 미니멀리즘의 아우라를 경험하려면 모종의 입도 과정이 필요하다. 모리스는 미니멀리즘의 오브제는 "축성"을 한 후에야 감상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디아 파운데이션은 아예 허스든강 화파의 지역에 대성당 격인 디아 비콘을 지었고, 언론에서는 이것을 실제 역사와 달리 미니멀리즘의 바티칸인 듯 묘사한다.
미니멀리즘의 제도적 역사를 통틀어 후원자들은 무엇보다 정신적이며, 규모면에서 엄청난 작품들을 끝까지 후원했고, 판자와 프리드리히는 비평가들의 편견에 맞서 캘리포니아 미니멀리스트들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우리가 미니멀리즘의 역사에서 이런 후원자들이 없다고 가정해도, 물질주의적인 미술의 움직임은 있었을 것이다. 미니멀리즘 작가들은 동부이든 서부이든 낭만성 추구라는 1960년대의 특징을 띤다고들 말한다. 이들은 모두 미술을 보는 경험을 혁신하고 대지를 이상화한다. 안드레아 지텔(Andrea Zittel)은 미술에 있어 미니멀리즘적 혁신의 요인이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주관성의 반발뿐만이 아니라, 공간에서의 환영, 환각 문화, 격렬한 시민운동, 인간을 대자연의 일부로 보는 동양종교의 자아관 등이 함께 작용했다고 말한다. 그의 이러한 통찰은 동부와 서부지역 모두의 작가들에게 왜 판자와 같은 콜렉터들이 개인적 감명을 느끼고 이들의 작품들을 독점하려 했는지를 이해하는데에 도움을 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