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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윌리엄 리스 데이비즈 [Thomas William Rhys Davids, 1843~1922]

 

 

요약

 

영국의 불교학자로 팔리어 성전협회(聖典協會)를 창립하여 팔리어 경전을 로마자로 옮겨 출판한 일이 가장 큰 공적으로 꼽힌다. 저서《Buddhist birth stories》등이 있다.

 

국적

영국

활동분야

종교학

주요저서

《Buddhist birth stories》(1880)

 

 
 

 

본문

스리랑카에서 재판관으로 있었으며, 1866년부터 런던대학 교수로서 팔리어(語)를 강의했고 맨체스터대학에서도 비교종교학을 가르쳤다(1904∼1915). 그의 가장 큰 공적은 팔리어 성전협회(聖典協會)를 창립하여 팔리어 경전을 로마자(字)로 옮겨 출판한 일이다. 저서에 《Buddhist birth stories》(1880), W.스테드와 공저인 《PāliEnglish dictionary》(1921∼1925) 등이 있다. 그의 아내 캘롤린 오거스타불교학의 권위자로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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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토머스 윌리엄 리스 데이비즈 [Thomas William Rhys Davids ]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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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廣大莊嚴經

Pronunciations 

Basic Meaning: Extensive Merriment

Senses:

The Fangguang da zhuangyan jing (Skt. Lalitavistara; Tib. rgya cher rol pa; Eng.). The Buddha describes his life in the Tuṣita heaven and his descent to save the world. Thus, it is a biographical account of the life of the Buddha based upon a Mahāyāna perspective. It covers the period from the Buddha's birth in Tuṣita Heaven until his first sermon. This work agrees generally with the Sanskrit text and the Tibetan version.It was translated into Chinese four times, but the first and third translations had already been lost by 730. The Sanskrit text has been edited by R. Mitra and revised by S. Lefmann.The extant translations are:

  1. 27 chapters in 12 fasc. T 187.3.539-617, alt. 神通遊戲經, abbr. 大莊嚴經, trans. Divākara 地婆訶羅 in 683. Vaipulya-mahāvyūha-sūtra
  2. 30 chapters in 8 fasc. T 186.3.483-539; also called the Puyao jing 普曜經, alt. Fangdeng benqi jing 方等本起經, trans. Dharmarakṣa 竺法護. For an Eng. translation and Mongol ed. see Poppe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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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ctionary References]

Bukkyō jiten (Ui) 948

Bulgyo sajeon 250a

The Korean Buddhist Canon: A Descriptive Catalogue {digital}

Japanese-English Buddhist Dictionary (Daitō shuppansha) 112b/123

Ding Fubao

Buddhist Chinese-Sanskrit Dictionary (Hirakawa) 0584

Bussho kaisetsu daijiten (Ono) 431b*/433d

Bukkyō daijiten (Mochizuki) (v.1-6)4594c,4478b

Bukkyō daijiten (Oda) 1387-2

(Soothill's) Dictionary of Chinese Buddhist Terms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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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노영(金魯永) 영조 5, 정조 12.

1. 영조 1144638(을유) 1번째기사 / 김노영의 선공감의 가감역으로, 박상덕을 좌천하여 충청 수사로 삼다

2. 영조 12350821(임인) 1번째기사 / 입시한 과차에 김노영 등을 뽑다

3. 영조 12350821(임인) 2번째기사 / 이재간·조영진·조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4. 영조 12350828(기유) 1번째기사 /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을 소견하다

5. 영조 12350829(경술) 1번째기사 / 조정·심발·윤양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6. 정조 11524(정미) 3번째기사 / 경루를 잘못 전한 것을 살펴 계책하지 못한 병조 참지 김노영을 파직하다

7. 정조 1251215(계미) 1번째기사 / 상참과 차대를 겸행하다

8. 정조 26121016(갑진) 1번째기사 / 김재찬을 대사헌, 김노영 대신 정존중을 대사간으로 삼다

9. 정조 2713711(을미) 1번째기사 / 금성위 박명원의 상소로 인하여 영우원을 천장하기로 결정하다

10. 정조 2914220(신미) 4번째기사 / 황인점·김노영·서영보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11. 정조 3014613(임술) 3번째기사 / 김노영에게 사헌부 대사헌을 제수하다

12. 정조 31141210(병진) 2번째기사 / 봉산 사람 곽시복의 처 허씨가 징을 치고 억울한 일을 호소하다

13. 정조 321533(정축) 1번째기사 / 김노영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윤확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다

14. 정조 331592(갑술) 4번째기사 / 이민보를 파주 목사로, 김노영을 수안 군수로 특별히 보임하다

15. 정조 371729(임신) 3번째기사 / 김로영을 개성부 유수로 삼다

16. 정조 38171125(갑인) 1번째기사 / 개성부 유수 김노영, 경력 최경악과 풍덕 부사 임성운을 파직하다

17. 정조 391819(정유) 1번째기사 / 명정전에 나아가 조참례를 행하고, 전 개성 유수 이시수의 탐오를 문죄하다

   

조선왕조실록 총 17

   

   

   

   

영조 114, 46(1770 경인 / 청 건륭(乾隆) 35) 38(을유) 1번째기사

임금이 육상궁에 있었다. 김노영(金魯永)을 선공감(繕工監)의 가감역(假監役)으로 삼고, 이조 판서 박상덕(朴相德)을 좌천(左遷)시켜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삼았다. 이때 임금이 김노영에게 관직을 제수하려고 해조(該曹)에 명하여 해당한 자리에 의망(擬望)해 들이도록 하였으나, 갑작스런 일이므로 미처 거행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심하게 화를 내어 임금의 명령을 조종한다고 여겨 박상덕은 좌천시키고, 김노영에게 들어와 숙배 사은(肅拜謝恩)하라고 독촉하였다. 대체로 감역(監役)의 제수에는 연한(年限)이 있고, 사은하는 일이 없었으니, 그 제수와 사은은 모두 고례(古例)가 아니다. 얼마 안되어 박상덕을 내직(內職)에 의망하라 명하고, 김노영은 계방(桂坊)으로 옮겨 제수하였는데, 김노영은 곧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의 손자로서 나이 겨우 약관(弱冠)이었다.

乙酉/上在毓祥宮, 以金魯永爲繕工假監役, 貶吏曹判書朴相德爲忠淸水使時上欲除魯永職, 命該曹擬入當窠, 倉卒未及擧行上怒甚, 以爲操縱君命, 遂貶相德, 促令魯永入肅蓋監役之除, 有年限, 而無謝恩, 其除與謝, 皆非古例也未幾命相德內擬, 移除魯永桂坊, 魯永乃月城尉金漢藎孫, 年才弱冠矣

   

영조 123, 50(1774 갑오 / 청 건륭(乾隆) 39) 821(임인) 1번째기사

입시(入侍)한 과차(科次)18987) 에 김노영(金魯永) 20명을 뽑았다.

壬寅/入侍科次, 取金魯永等二十人

   

영조 123, 50(1774 갑오 / 청 건륭(乾隆) 39) 821(임인) 2번째기사

이재간(李在簡)을 이조 참의로, 조영진(趙英鎭)을 대사간으로, 조엄(趙曮)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김노영은 문과 장원을 하였는데, 등과하기 전에 자궁(資窮)18988) 이었으므로 가자(加資)하였다.

以李在簡爲吏曹參議, 趙英鎭爲大司諫, 趙曮爲藝文提學, 金魯永以文科第上下一人上下, 登科前資窮, 加資

   

영조 123, 50(1774 갑오 / 청 건륭(乾隆) 39) 828(기유) 1번째기사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김노영(金魯永)에게 이르기를,

"너는 부모가 다 살아 있는데도 풍악을 베풀지 않았다고 하니, 이는 네 아비의 뜻인 것 같다. 네가 사는 동네가 바로 나의 옛집과 같은 동네이다. 용호영(龍虎營)의 삼현(三絃)18991) 을 특별히 내려 줄 터이니, 너는 오늘 유가(遊街)하라."

하였다. 이어 해조(該曹)에 명하여 곡식과 피륙을 제급(題給)하게 하니, 김노영은 곧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의 손자였다.

己酉/上御德游堂, 召見新恩, 上謂金魯永曰: "汝以具慶, 不爲張樂云, 似是汝父之意也汝之所居洞, 卽予舊邸龍虎營三絃特給, 汝今日遊焉" 仍命該曹, 米綿題給, 魯永卽月城尉金漢藎之孫也

   

영조 123, 50(1774 갑오 / 청 건륭(乾隆) 39) 829(경술) 1번째기사

조정(趙晸)을 이조 참의로, 심발(沈墢)을 대사헌으로, 윤양후(尹養厚)를 부제학으로, 황경원(黃景源)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고, 김노영(金魯永)을 승지로 특별히 임명하였다.

庚戌/以趙晸爲吏曺參議, 沈墢爲大司憲, 尹養厚爲副提學, 黃景源爲弘文提學, 金魯永特除承旨

   

정조 11, 5(1781 신축 / 청 건륭(乾隆) 46) 24(정미) 3번째기사

병조 참지 김노영(金魯永)을 파직하였는데, 경루(更漏)를 잘못 전한 것을 살펴 계칙하지 못했기 대문이었다.

罷兵曹參知金魯永職以更漏誤傳, 不能察飭也

   

정조 12, 5(1781 신축 / 청 건륭(乾隆) 46) 1215(계미) 1번째기사

상참(常參)하였는데, 차대(次對)도 겸하여 행하였다.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이 아뢰기를,

"경기 관찰사 이형규(李亨逵)가 상소하여 교동(喬桐)에 다시 수곤(水閫)을 설치한 것과 장단(長湍)에 다시 방영(防營)을 설치한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전도되게 소각(銷刻)한다는 혐의가 있고 또 하나는 상당히 백성들을 동요시키는 일이 있게 되니, 아울러 우선 버려 두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대사헌 이갑(李)이 아뢰기를,

"전 참봉 송헌규(宋獻圭)는 곧 송덕상(宋德相)의 종손(從孫)인데, 송덕상의 위세를 팔아서 마음대로 방자한 짓을 하면서 송덕상을 도왔고 역모에도 참섭(參涉)하였습니다. 송덕상의 죄악이 환히 드러난 뒤에 이르러서는 당여(黨與)의 주참(誅斬)이 마땅히 먼저 그에게 내려졌어야 하는데, 멋대로 마음으로 끊었다는 말을 하면서 요행히 주참을 면할 계교를 세우려 했으니, 그 정상이 이미 그지없이 간교하고 악랄합니다. 그러나 대론(臺論)이 준열하게 발론되어 끝내 면할 수 없게 되자 또 불령(不逞)한 무리들과 교결하여 감히 영호(營護)할 마음을 내어 암암리에 사람을 배포하여 인심을 광혹(誑惑)시켰습니다. 저 기호(畿湖)에서 일어난 변괴도 이들이 주장(譸張)3038) 한 것에 연유된 것이 아니라고 기필할 수 없으니, 전 참봉 송헌규는 우선 절도(絶島)에 정배(定配)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전 지평 강문환(姜文煥)은 송덕상과 구생(舅甥)의 친척이 되는데, 송덕상에 의해 보호 양육되었고 송덕상의 조아(爪牙)3039) 가 되어 음흉한 계모(計謀)를 참섭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세상에서 곁눈질하며 비웃고 손가락질해 온 지 오랬습니다. 송덕상의 죄악이 환히 드러난 뒤에도 뻔뻔스레 도성(都城) 안에 거처하고 있으면서 전혀 돌아보고 꺼리는 기색이 없는 채, 조론(朝論)을 정탐해서 은밀히 흉적(凶賊)에게 알렸다는 전설(傳說)이 낭자하여 듣기에도 놀랍고 두렵습니다. 전 지평 강문환에게 속히 변방으로 귀양보내는 형전(刑典)을 시행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편배(編配)는 번거롭기만 할 뿐이니, 먼저 삭판(削版)시키는 형전부터 시행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규위(李奎緯)가 마땅히 갚아야 할 민채(民債)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미 다 받은 뒤에 처분(處分)하라는 하교에서 특별히 보방(保放)하게 한 내용이 있었던 것은 실로 관대하게 하는 덕의(德意)에서 나온 것이니, 그의 도리에 있어서는 진실로 서둘러 준비하여 갚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1년이 지나도록 전혀 아무런 동정(動靜)이 없으니, 조정의 명을 어긴 것이 진실로 이미 놀랍습니다. 거기다가 그는 의막(依幕)을 집으로 삼고 태연히 스스로 거처하고 있어, 조가(朝家)에서의 감죄(勘罪)가 또한 이를 연유하여 지체되고 있으며 따라서 일이 끝날 기약이 없으니, 어찌 이런 사체가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더구나 그의 아우 이규경(李奎景)의 일이 발생한 뒤에는 더욱 한결같이 그대로 있게 해서는 안됩니다. 청컨대 전후 금오(金吾)의 당상들을 아울러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해부(該府)로 하여금 기일을 지켜 독봉(督棒)하게 한 다음 이어 해당되는 율(律)을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 조상진(趙尙鎭)이 아뢰기를,

"전 장령 박종언(朴宗彦)은 부민(富民)을 추착(推捉)3040) 하여 대각(臺閣)에 수모를 끼쳤으므로, 그 뒤 대각에 들어오는 사람은 박종언을 경계로 삼아서 풍문(風聞)의 고사(故事)를 일절 폐각(廢却)하고 있습니다. 박종언에 의해 풍문은 간개(刊改)되었지만 구규(舊規)를 폐기해서는 안되며, 부례(府隷)들이 농간을 부리는 것도 또한 징즙(懲戢)시켜야 하니, 이런 내용으로 신칙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부교리 윤확(尹㬦), 부수찬 이경일(李敬一)이 아뢰기를,

"방축 죄인(放逐罪人) 김상복(金相福)은 정처(鄭妻)·김귀주(金龜柱)·송형중(宋瑩中) 3(三凶)의 예(例)에 의거 우선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키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먹은 마음이 흉특(凶慝)하고 세운 계모가 위포(危怖)스러운 것은 역적 홍인한(洪麟漢)·송형중과 털끝만큼도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이 한 짓을 본보기로 삼아 따르면서 그들의 전모(前茅)가 되어 상청(上聽)을 현혹시켜 은밀히 저궁(儲宮)을 해쳤고 심지어는 심상운(沈翔雲)의 급서(急書)를 환출(幻出)시켰으며, 윤양후(尹養厚)의 흉언에 메아리처럼 응하였으니, 삼척(三尺)의 법전이 있다면 어떻게 저자에서 죽이는 율(律)을 면할 수 있겠는가? 특별히 대관(大官)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갑자기 대벽(大辟)에 두려 하지 않는 것뿐이다. 이는 주토(誅討)에 소홀히 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일전의 동가(動駕)할 때 부사직 김노영(金魯永)이 평상복에 모구(毛具)3041) 차림으로 반행(班行) 앞을 지나갔으니, 그 거조가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속히 삭직(削職)시키는 형전을 시행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문(拿問)하여 조처하게 하라. 양사(兩司)에서 연(輦) 앞에서 도가(導駕)하면서 이런 일을 목격하고도 아직껏 한마디도 하지 않음으로써 옥당(玉堂)으로 하여금 언관(言官)의 일을 대신 행하게 하였으니, 대각(臺閣)에 수모를 끼치게 한것이 무엇이 이보다 더 크겠는가? 그날의 시신(侍臣)·양사(兩司)는 아울러 파직시키라."

하였다. 우승지 이재학(李在學)이 아뢰기를,

"헌서(憲書)의 재자관(齎咨官)이 돌아올 때에 본도(本道)의 도사(都事)가 수험(搜驗)하는 책임을 관장하고 있는데도, 근래에는 도사들을 택차(擇差)하지 않기 때문에 수모를 끼치게 하는 일이 없지 않습니다. 청컨대 이제부터는 도사를 보내지 말고 도내(道內)의 수령(守令)을 택차하여 차원(差員)으로 정하여 보내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癸未/常參兼行次對領議政徐命善啓言: "京畿觀察使李享逵, 疏請喬桐復置水閫長湍更設防營, 而一則有顚倒銷刻之嫌, 一則有多少擾民之事, 竝姑置之" 從之大司憲李啓言: "前參奉宋獻圭, 卽德相之從孫也藉賣德相, 恣行胸臆, 左右德相, 參涉逆謀及其德相罪惡彰著之後, 黨與之誅, 當先於渠, 則肆發心絶之言, 欲爲倖逭之計者, 情狀已極巧惡臺言峻發, 終始不免, 則又結不逞之徒, 敢生營護之意, 暗地排布, 誑惑人心惟彼畿湖之變怪, 未必不由於此輩之譸張也, 請前參奉宋獻圭, 爲先絶島定配" 從之又啓言: "前持平姜文煥, 與德相爲舅甥之親, 而(卯)育於德相, 爪牙於德相, 陰謀凶計, 無不參涉, 爲世側目, 嗤點久矣德相罪惡彰露之後, 偃處城闉, 略無顧忌, 偵探朝論, 密報凶賊, 傳說狼藉, 聽聞駭懼請前持平姜文煥, 亟施屛裔之典" 敎曰: "徒煩編配, 先施削版之典" 又啓言: "李奎緯之當報民債者, 未知其幾何, 而業有畢捧後處分之敎, 特爲保放, 實出於寬大之德意則在渠道理, 固當汲汲備償, 而已過周年, 了無動靜, 其違拒朝令, 固已駭痛, 而渠則乃以依幕爲家, 晏然自居, 朝家勘罪, 亦由此而稽滯, 究竟無期, 寧有如許事體? 況其弟奎景事出後, 尤不可一任其自在請前後金吾諸堂, 竝從重推考, 令該府, 刻期督捧, 仍施當律焉" 從之大司諫趙尙鎭啓言: "前掌令朴宗彦, 推捉富民, 貽羞臺閣, 其後入臺者, 以宗彦爲戒, 風聞故事, 一切廢却朴宗彦則刊改風聞, 舊規可以不廢, 府隷作奸, 亦爲懲戢請以此申飭" 從之副校理尹嚄副修撰李敬一啓言: "放逐罪人相楅, 依鄭妻龜柱瑩中三凶例, 姑先絶島安置" 敎曰: "設心之憯慝, 造謀之危怖, 與逆麟賊瑩, 毫無加損若乃看作軌牽, 爲渠前茅, 眩惑上聽, 陰害儲宮, 甚至幻出翔雲之急書, 響應養厚之凶言, 倘有三尺之典, 豈逭肆市之律? 特因已經大官, 不欲遽置大辟此非忽於誅討而然也" 又啓言: "日前動駕時, 副司直金魯永, 以便褻毛具, 掠過班行, 擧措駭然亟施削職之典" 敎曰: "令該府拿問處之兩司輦前導駕, 而目擊此事, 迄無一言, 致使玉堂, 替行言官之事其貽羞臺閣, 孰大於是? 伊日侍臣兩司, 竝罷職" 右承旨李在學啓言: "憲書賫咨官回還時, 本道都事, 掌其搜驗, 而近來都事, 多不擇差, 不無貽羞請自今勿送都事, 擇差道內守令, 定送差員" 從之

   

정조 26, 12(1788 무신 / 청 건륭(乾隆) 53) 1016(갑진) 1번째기사

김재찬(金載瓚)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노영(金魯永)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노영이 수원 부사에 잉임(仍任)되었기 때문에 정존중(鄭存中)을 대신 제수하였다.

甲辰/以金載瓚爲司憲府大司憲, 金魯永爲司諫院大司諫魯永, 以水原府使仍任, 以鄭存中代之

   

정조 27, 13(1789 기유 / 청 건륭(乾隆) 54) 711(을미) 1번째기사

영우원(永祐園)을 천장(遷葬)할 것을 결정하였다. 상이 원침(園寢)의 형국이 옅고 좁다고 여겨 즉위 초부터 이장할 뜻을 가졌으나, 너무 신중한 나머지 세월만 끌어온 지가 여러 해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상소하기를,

"원소(園所)는 그 사체가 어떠하며 관계 또한 어떠합니까. 오늘의 신하된 자로서 만세의 대계를 생각할 때 마음을 끝까지 쓰지 않을 수 없고 의리로 보아 감히 스스로 숨길 수 없기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신은 본래 감여(堪輿)4959) 에 어두워 귀머거리나 소경과 일반이므로 다만 사람마다 쉽게 알고 쉽게 볼 수 있는 것만을 가지고 논하겠습니다.

첫째는 띠가 말라죽는 것이고, 둘째는 청룡(靑龍)이 뚫린 것이고, 셋째는 뒤를 받치고 있는 곳에 물결이 심하게 부딪치는 것이고, 넷째는 뒤쪽 낭떠러지의 석축(石築)이 천작(天作)이 아닌 것입니다. 이로써 볼 때 풍기(風氣)가 순하지 못하고 토성(土性)이 온전하지 못하고 지세가 좋지 않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하나만 있어도 신민(臣民)들의 지극한 애통스러움이 되는데, 더구나 뱀 등속이 국내(局內) 가까운 곳에 또아리를 틀고 무리를 이루고 있으며 심지어 정자각(丁字閣) 기와에까지 그 틈새마다 서려 있는데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비록 옛 장릉(長陵)에 혈도(穴道)까지 침범했던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으나, 국내에 이미 많이 있고 보면 지극히 존엄한 곳까지 침범하지 않았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성상께서 갑오년에 원(園)을 처음으로 참배하신 때로부터 병신년에 즉위하신 뒤에 이르기까지 걱정하신 일념이 오직 원소의 안부에 계시어, 새벽에 종소리를 듣고 밤에 촛불을 대하실 때 깊은 궁중에서 눈물을 뿌리신 것이 얼마인지 모르며, 봄비가 오고 가을 서리가 내릴 때이면 조회에 임해서도 자주 탄식하셨다는 것을 신이 여러번 들었습니다. 병신년 초에 천장해 모실 것을 연석(筵席)에서 처음으로 발언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데 성상께서도 아마 기억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 병오년 5월과 9월의 변고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성상께서 외로이 홀로 위에 계시며 해는 점점 서산으로 기울어가는데 아직까지 뒤를 이을 자손이 더디어지고 있습니다. 옛날 영종 대왕 7년 신해년에 장릉(長陵)을 천장할 때, 대신과 여러 재신(宰臣)들이 무신년 이후로 중외(中外)에 공경하고 삼가야 한다는 마음이 있다 하여 주문공(朱文公)의 혈식 구원(血食久遠)이란 말을 이끌어 어전으로 가서 다시 길지(吉地)를 골라 천장해서 국운을 장구하게 하기를 건의하였는데, 실로 지금까지 그 덕을 힘입고 있습니다. 이미 선왕조의 고사(故事)가 있고 보면 더욱 오늘날에 천장할 수 있는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바라건대 조정에 있는 신하들에게 널리 물으시고 지사(地師)들을 널리 불러 모아 길흉을 물으시어 신도(神道)를 편안하게 하시고 성상의 효성을 펴시어 천추 만대의 원대한 계책이 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리석게도 지금까지 밤낮으로 가슴속에 담아 두고 답답해 하기만 하였는데 경의 요청이 이런 때에 이르렀으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 결정하겠다."

하고, 이어 대신·각신(閣臣)·예조 당상과 종친부·의빈부·삼사의 2품 이상을 희정당으로 불러 접견하고서 승지에게 명하여 박명원의 소를 읽게 하였다. 대신과 예조 당상들이 한 목소리로 빨리 성명(成命)을 받들기를 청하니, 상이 눈물을 삼키며 목메인 소리로 이르기를,

"나는 본래 가슴이 막히는 증세가 있는데 지금 도위(都尉)의 소를 보고 또 본원(本園)에 대해 언급하는 경들의 아룀을 들으니 가슴이 막히고 숨이 가빠지는 것을 스스로 금할 수 없다. 갑자기 말을 하기가 어려우니 계속 진달하지 말고 나의 기운이 조금 내리기를 기다리라."

하였다. 조금 뒤에 상이 이르기를,

"만약 화복(禍福)의 설에 현혹되어 갑자기 오래된 묘를 옮기는 것이라면 비록 여항(閭巷)의 서인의 집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불가하다고 할 수 있는데 하물며 국가의 막중하고 막대한 일이겠는가. 지금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이 어찌 한 도위(都尉)의 소로 인해서 그러는 것이겠는가. 나의 심정이 정상인으로 자처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경들도 아는 바일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지극한 슬픔이 가슴속에 맺혀 있는데, 만약 흙이 시신에 가까이 닿아 있다[土親膚]고 말한다면 나의 망극한 마음이 다시 어떠하겠는가. 지하의 체백(體魄)이 편안하지 못하다는 것은 오렴(五廉)4960) 운운하는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판단할 수 있다.

대체로 광중(壙中)의 흙은 기운이 없는 죽은 흙이니 지극히 말하기 곤란한 염려가 충분히 있다. 그리고 감여가(堪輿家)들이 항용하는 말로 말하더라도, 패철(佩鐵)의 내반(內盤)으로는 갑좌(甲坐)가 되고 외반(外盤)으로는 묘좌(卯坐)가 되며 신술방(辛戌方) 득수(得水)4961) 이고 해방(亥方) 득파(得破)4962) 이니, ··해가 모두 목(木)이다. 신술방의 물은 바로 이른바 황천 득수(黃泉得水)4963) 로서 내명당(內明堂)4964) 에 물이 없다. 그러나 한쪽에 있는 물만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 더구나 을입수(乙入首)4965) 로서 용세(龍勢)가 더욱 논할 만한 것이 없는데이겠는가. 갑오년에 성묘(省墓)하고 나서부터 옮겨 모셔야겠다고 계획하였으나 새로 정하는 자리가 지금의 자리보다 천만 배 나은 뒤에야 거의 여한이 없을 수 있을 것인데, 오늘날 행용(行用)하는 지사(地師)로서 누가 땅속의 일을 분명히 알 수 있겠는가.

도위도 병신년에 옮겨 모시자는 의논이 있었다고 하였거니와, 대체로 즉위한 처음부터 간절한 나의 일념이 오직 이 일에 있었다. 그 때에 과연 상하가 말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고, 기유년이란 세 글자를 이미 그 때의 연교(筵敎)에서 언급했었다. 내가 즉위한 이후로 14년 동안에 오직 금년만이 연운(年運)·산운(山運)·원소(園所) 본인의 명운(命運)이 상길(上吉)함이 되기 때문에 나의 마음이 더욱더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도위의 소를 보고 여러 경들의 말을 듣건대 숙원(宿願)을 이룰 수 있겠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전에 봉표(封標)해 두었던 곳으로 문의(文義) 양성산(兩星山) 해좌(亥坐)의 언덕은 예전부터 좋다고 운운하는 자리이지만 조산(祖山)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것이 흠이어서 답답하게 막힌 기색을 면하지 못하였고 지질과 물이며 용세(龍勢)도 결코 언급할 만한 것이 없다. 장단(長湍) 백학산(白鶴山) 아래의 세 곳은 국세(局勢)가 혹은 협소하기도 하고 혹은 힘이 없고 느슨하기도 하다. 광릉(光陵) 좌우 산등성이 중의 한 곳은 바로 달마동(達摩洞)으로서 문의의 자리와 함께 찬양되는 곳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가운데 한 곳은 바로 절터이니, 신당(神堂)의 앞이나 불사(佛寺)의 뒤나 폐가(廢家) 또는 고묘(古廟)에 묘를 쓰는 것은 옛사람들이 꺼린 바이다. 용인(龍仁)의 좋다고 운운하는 곳도 역시 그러하다. 이밖에 헌릉(獻陵) 국내의 이수동(梨樹洞)과 후릉(厚陵) 국내의 두 곳, 강릉(康陵) 백호(白虎) , 가평(加平)의 여러 곳들도 마음에 드는 곳이 한 곳도 없다.

그러나 오직 수원(水原) 읍내에 봉표해 둔 세 곳 중에서 관가(官家) 뒤에 있는 한 곳만이 전인(前人)들의 명확하고 적실한 증언이 많았을 뿐더러 옥룡자(玉龍子)가 이른바 반룡 농주(盤龍弄珠)의 형국이다. 그리고 연운·산운·본인의 명운이 꼭 들어맞지 않음이 없으니, 내가 하늘의 뜻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를 이름이다. 나라 안에 능이나 원(園)으로 쓰기 위해 봉표해 둔 것 중에서 세 곳이 가장 길지(吉地)라는 설이 예로부터 있어 왔는데, 한 곳은 홍제동(弘濟洞)으로 바로 지금의 영릉(寧陵)이 그것이고, 한 곳은 건원릉(健元陵) 오른쪽 등성이로 바로 지금의 원릉(元陵)이 그것이고, 한 곳은 수원읍(水原邑)에 있는 것이 그것이다.

수원의 묏자리에 대한 논의는 기해년 《영릉의궤(寧陵儀軌)》에 실려 있는 윤강(尹絳)·유계(兪棨)·윤선도(尹善道) 등 여러 사람과 홍여박(洪汝博)·반호의(潘好義) 등 술사(術士)들의 말에서 보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시말로 말하면 윤강의 장계(狀啓)와 윤선도의 문집 중에 실려 있는 산릉의(山陵議) 및 여총호사서(與摠護使書)보다 자세한 것이 없다. 내가 수원에 뜻을 둔 것이 이미 오래여서 널리 상고하고 자세히 살핀 것이 몇 년인지 모른다. 옥룡자의 평(評)이 그 속에 실려 있는데, 그의 말에 '반룡 농주의 형국이다. 참으로 복룡 대지(福龍大地)로서 용(龍)이나 혈(穴)이나 지질이나 물이 더없이 좋고 아름다우니 참으로 천 리에 다시 없는 자리이고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자리이다.' 하였으니, 이곳이야말로 주자(朱子)가 이른바 종묘 혈식 구원(宗廟血食久遠)의 계책이란 것이다.

대체로 그 형국으로 말하면 비록 범인의 안목으로도 판단할 수 있다. 유두(乳頭) 아래 평탄한 곳에 재혈(裁穴)하고 작은 언덕을 안대(案對)해서 좌향(坐向)을 놓으면 바로 이른바 구슬을 안대한다는 것이다. 구슬을 안대하려면 두 봉우리 사이 빈 곳으로 안(案)이 가는데, 이것이 또 이른바 구슬을 안대하면 빈 곳으로 향(向)이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금(分金)4966) 도 이렇게 재혈하고 이렇게 좌향을 놓고 이렇게 안대할 것으로 결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나의 뜻은 이미 수원으로 결정하였다. 지금 경 등을 대하여 속에 쌓아 두었던 말을 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하늘의 뜻이 음으로 돕고 신명(神明)이 묵묵히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판중추부사 김익(金熤)이 아뢰기를,

"지금 성상의 분부를 들으니 신도 어슴푸레하게나마 알겠습니다. 옥룡자는 바로 도선(道詵)의 호인데 그의 논평이 이와 같다면 이곳을 버리고 어디에서 구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수원산론(水原山論)을 읽게 하니, 연신(筵臣) 모두가 아뢰기를,

"옛사람의 논한 바가 이미 이와 같은데 지금에 와서 어찌 다른 말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해년에 봉표해 둔 곳이 바로 이른바 유두(乳頭)로서, 아래쪽의 낮은 곳에 비하면 너무 올라오고 드러나는 혐의가 없지 않으니, 오직 달무리처럼 둥그렇게 평탄한 곳이 바로 진정한 복룡 길지(福龍吉地)이다. 길일(吉日)이 머지않았으니 오늘날의 급선무로는 그 고장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다음으로 고을을 옮길 계획을 의논하는 것이 가장 마땅하다. 나는 인정이 편안한 뒤에야 지리(地理)도 길해진다고 생각한다. 백성을 옮기는 일에 관해서는 내가 이미 여러모로 계획을 세워 각각 살 곳을 정해 안주하게 하였거니와, 왕명을 선포하고 백성들을 무마하는 책임을 맡은 나의 신하는 감사와 지방관이 바로 그들이다."

하고, 이어 경기 관찰사 조정진(趙鼎鎭)과 수원 부사 김노영(金魯永)을 내직(內職)으로 옮기고, 서유방(徐有防)을 경기 관찰사로, 조심태(趙心泰)를 수원 부사로 삼았다. 그리고 상이 이르기를,

"천장해 모시는 일은 사체가 막중하므로, 본원(本園)의 제사 의식도 태묘(太廟)에 버금가는 것으로 대부(大夫)의 예를 사용해서 제사할 것이니 총호사(摠護使)를 차출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때에는 삼공(三公)을 의당 갖추어야 할 것이다. 총호사의 임무는 으레 영의정이 관장하는 것이니, 좌상과 우상은 복상(卜相)한 뒤에 가서 봉심(奉審)하라."

乙未/定永祐園遷奉之禮上以園寢形局淺挾, 自御極初, 有移奉之意, 而鄭重荏苒, 且有年至是錦城尉朴明源上疏曰:

園所事體, 顧何如也, 關係亦何如也? 爲今日之臣子, 思萬世之大計, 心無所不用其極, 義有所不敢自隱, 玆敢冒死仰陳崇聽臣素昧堪輿, 便同聾瞽, 只以人人易知易見者論之, 莎草枯損也, 靑龍穿鑿也, 後托水勢之衝激也, 後節築石之非天作也以此觀之, 則風氣之不順, 土性之不全, 地勢之汚下, 推可知也有一於此, 尙爲臣民之至慟, 而況蛇虺之屬, 局內近處, 蟠結成群, 至於丁字閣瓦子, 張張罅欹雖與舊長陵穴道侵犯, 差有間焉, 局內旣多有之, 則安知其不犯於至敬至重之地乎? 我聖上自甲午拜園之初, 至丙申御極之後, 憧憧聖念, 惟在園所安否晨鍾夜燭, 幾灑深宮之淚, 春雨秋霜, 頻發中朝之歎, 臣之承聆屢矣丙申初, 有以遷奉發端於前席者, 伏想聖聰, 亦或記有矣嗚呼! 丙午五九月之變, 尙何言哉? 我聖躬惸惸獨立於上, 海籌漸向晼晩, 瓜瓞尙遲綿蔓昔在英宗大王七年辛亥, 長陵遷奉時, 大臣諸宰, 以戊申以後, 中外顒若之情, 引朱文血食久遠之語, 前席建議, 改卜吉地, 國祚靈長, 寔至今賴焉旣有先朝之故事, 則尤爲今日之明證矣伏願博詢在廷, 廣招地師, 諮諏休咎, 以安神道, 以伸聖孝, 俾爲千萬代遠猷

批曰: "冥頑至今, 夙宵結轖于中卿請際至, 當問于大臣諸臣決之"乃召見大臣閣臣禮堂宗親儀賓三司二品以上于熙政堂, 命承旨, 讀明源疏大臣禮堂一辭請亟奉成命上飮泣哽咽曰: "予素有膈氣, 今見都尉疏, 又聞卿等之奏語到本園, 自不禁臆塞氣短猝難發言, 姑勿繼陳, 以待予氣小降" 移時, 上曰: "若惑信禍福之說, 遽移久遠之塋域, 則雖閭巷匹庶之家, 尙云不可, 況國家莫重莫大之擧乎? 今予此言, 豈因一都尉之疏而發哉? 予之情事, 不欲以常人自處者, 卿等之所知數十年至慟, 結轖胸中, 若言土親膚三字, 則予懷罔極, 當復如何? 地中之不安, 不待五廉云云, 可以決之大抵穴星卽無氣死土, 有十分至難言之慮且以堪輿家恒用說話言之, 內作甲坐, 外作卯坐, 辛戌得水亥破, 甲卯亥俱木也辛戌水, 卽所謂黃泉得水, 內堂無水, 不可但以偏水言又況乙入首, 而龍勢尤無可論自甲午展省, 經營移奉, 而新卜之地, 千勝萬勝於今日以前, 然後庶可無憾以行用地師, 孰能明見地中之事乎? 都尉亦云, 丙申有遷奉之議, 蓋自御極之初, 予之洞屬一念, 惟在此事伊時果有上下酬酢, 而己酉年三字, 已發於伊時筵敎十四年之間, 惟今年運山運園所, 本命運爲上吉, 予心益復憧憧今見都尉疏, 聞諸卿言, 宿志可遂, 豈非天意耶? 自來封標之處, 文義兩星山亥坐之原, 則自古云云, 而離祖終欠太近, 不免有菀弗之氣, 砂水龍勢, 決難議到長湍白鶴山下三處, 則局勢或狹小, 或微緩, 光陵左右岡中一處卽達摩洞, 與文義齊稱之地, 而俱未合意其中一處卽寺基, 神前佛後, 廢屋古廟, 古人之所忌, 龍仁云云處亦然外此獻陵局內梨樹洞, 厚陵局內二處, 康陵白虎邊, 加平諸處, 無一合意處唯水原邑內封標三處, 官家後一處, 多前人明的之證, 況玉龍子所謂盤龍弄珠之形局且年運山運本命運, 無不沕合, 予所謂天意者此也國中陵園封標中, 三處最吉之說, 自古有之, 一則弘濟洞, 卽今寧陵是也, 一則健元陵右岡, 卽今元陵是也, 一則水原邑也水原山地之論, 觀於己亥寧陵儀軌, 如尹絳兪棨尹善道諸人及洪汝博潘好義等術士之言, 可以知之其始末則莫詳於尹絳狀啓尹善道文集中, 山陵議與摠護使書, 而予於水原留意已久, 博考而詳察, 不知爲幾年玉龍子所評, 詳載其中, 其言以爲: '盤龍弄珠之形, 眞是福龍大地, 而龍穴砂水, 盡善盡美, 誠千里所無, 千載一遇之地' 此正朱子所謂: '宗廟血食久遠之計也' 槪其形局, 雖凡眼可辨, 穴星則乳頭下坦處, 而坐向則案對小阜, 是謂對珠, 而欲對珠, 則兩峰間空處, 此又所謂對珠, 則向空者也且分金則以此穴以此坐以此案亦當決之, 予意已定水原今對卿等, 喩以蘊中之說, 此非天意之所陰騭, 神明之所默佑乎?" 判中樞府事金熤曰: "今承聖敎, 臣亦怳然玉龍子卽道詵之號, 所論如此, 捨此何求乎?" 上命承旨, 讀水原山論》。 筵臣僉曰: "古人所論旣如此, 到今豈有他說乎?" 上曰: "己亥封標處, 卽所謂乳頭也比諸稍低處, 則不無登露之嫌, 惟坦處圓暈處, 是眞正福龍吉地也吉日不遠, 目下急先務, 最宜安接本土之民, 次議移邑之計予則曰: '人情安然後, 地理亦吉民人遷徙, 則予已有多般經紀, 俾各奠安, 而任予宣布撫摩之責者, 道伯及地方官是也" 仍命京畿觀察使趙鼎鎭水原府使金魯永內移, 以徐有防爲京畿觀察使, 趙心泰爲水原府使上曰: "遷奉之擧, 事體莫重本園祭儀, 皆以亞於太廟, 祭以大夫之禮用之, 摠護使當差出此時三公宜備, 而摠護之任, 自是領相例管, 左右相卜相後, 進去奉審"

   

정조 29, 14(1790 경술 / 청 건륭(乾隆) 55) 220(신미) 4번째기사

황인점(黃仁點)을 성절 겸 사은 정사(聖節兼謝恩正使), 김노영(金魯永)을 부사(副使), 서영보(徐榮輔)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고, 구상(具庠)을 이조 참판으로, 홍병찬(洪秉纘)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창한(李昌漢)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병찬과 창한은 얼마 안 가 체차되고, 이성규(李聖圭)를 대사헌으로, 박천행(朴天行)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以黃仁點爲聖節兼謝恩正使, 金魯永爲副使, 徐榮輔爲書狀官, 具庠爲吏曹參判, 洪秉纉爲司憲府大司憲, 李昌漢爲司諫院大司諫昌漢尋遞, 以李聖圭爲大司憲, 朴天行爲大司諫

   

정조 30, 14(1790 경술 / 청 건륭(乾隆) 55) 613(임술) 3번째기사

김노영(金魯永)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以金魯永爲司憲府大司憲

   

정조 31, 14(1790 경술 / 청 건륭(乾隆) 55) 1210(병진) 2번째기사

봉산(鳳山) 사람 곽시복(郭始復)의 처 허씨(許氏)가 징을 치고 호소하였는데, 그 내용에 의하면, 그의 남편 곽시복이 서울에 사는 차이원(車履遠)과 형조(刑曹)에서 송사를 하게 되어 관청에서 시복을 잡아가니 허씨의 시어미가 허씨의 남편을 붙들고 놓지 않자, 형조의 하인이 허씨 남편의 의관을 찢고 허씨 시어미를 구타하여 방금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 사건은 홍수영(洪守榮)과 관련된 것으로서 당상관은 홍최영(洪最榮)의 처남이고 당하관 역시 홍수영과 절친한 사이이므로 허씨를 말려서 호소하지 못하게 하였다. 형조에서 아뢰기를,

"차이원과 곽시복이 토지 값을 가지고 송사하게 된 것은 이달 11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곽시복이 도로 물리겠다는 뜻으로 공술하고는 기한이 지나도록 이행하지 않으므로 참의 강이정(姜彛正)이 붙잡아갔는데, 그때에 보기에는 갓은 비록 찢어졌으나 몸에 상처난 곳은 없었습니다. 지금 이 공술을 보면 그 남편이 구타를 당하였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형조의 하인이 조용히 압송하지 못하여 갓이 부서진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본조의 하인은 신의 조에서 엄격히 다스리겠습니다만, 본 송사는 호소가 허용된 네 가지 일[四件事]5065) 에 들지 않았으니 내버려두기 바랍니다. 허씨 여인은 신의 조에서 법률에 의하여 엄히 다스리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어버이를 위하여 호소하는 것도 또한 호소가 허용된 네 가지 일 이외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송사는 이렇거나 저렇거나 우선 그만두고라도 본 사건은 외척집안의 토지이고 당상관은 외척 관리의 처남이었다. 더구나 하인을 지방에 풀어놓아 이처럼 제멋대로 행패를 부리게 내버려두었지 않은가. 동료 당상관을 두둔하는 경의 마음으로도 오히려 사실을 완전히 숨기지 못하여 쓰고 있던 갓이 부서졌다고 하였으니, 그들이 행패를 부렸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노파가 그 아들을 위해 붙잡고 말리는 통에 상처를 입게 된 것도 사세로 보아 그럴 법하다.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대개 근래에 다른 외척 집안이건 이 외척 집안이건 막론하고 지나치게 으시대며 기세를 부리는 꼴을 항상 남몰래 걱정해왔는데, 이때 마침 이 사실을 듣게 되었다. 홍최영같이 무식하고 패려한 자에 대해서는 마음 속으로 늘 민망히 여기던 자로서 반드시 청탁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알겠지만, 그의 형으로 말하면 지방에 있었을 뿐 아니라 자못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최영이야 어떻게 자기의 죄를 모면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횡포를 부리는 버릇은 발각되는 즉시 징계하여야만 허물을 고치지 못하고 있는 옛날 외척과 그것을 본뜨고 있는 새 외척들이 또한 경계할 줄을 알게 될 것이다. 대사령이 방금 지났으니 십분 참작하여 홍최영은 그 직명을 삭탈하여 문안드리는 반열에서 빼어버리라. 자궁(慈宮)의 겸손한 덕망으로 얼마나 거듭 훈계하였겠는가마는 그의 성명이 사소한 일로 이와 같은 문서에 오르내리니 이 어찌 통분한 일이 아니겠는가.

참판을 자주 사송(詞訟) 관리로 제수하는 것은 처음 제수하였을 때의 명성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뒤에 제수되었을 때가 처음 제수되었을 때만 못하고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소문으로 변하여 결국 이처럼 일을 그르치게 되었다. 그 집 어른이 너무도 어질고 유순하여 능히 그 자제들을 단속하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다. 본조의 참판 김노영(金魯永)에 대해서는 해부로 하여금 부탁을 받고 송사를 처리하며 하인을 놓아 백성을 괴롭힌 율문을 적용하게 하라. 비록 경으로 말하더라도 참으로 이른바 초록은 동색이다. 애매한 혐의를 받는 것은 생각지 않고 드러나게 감싸주려는 기색만 있다. 더없이 엄격한 것이 송사인데 이처럼 편을 들고 있으니, 너무도 해괴한 일이다. 경은 파직시키겠다. 본 송사는 황해 감사로 하여금 엄히 조사하여 장계로 보고하게 할 것이며, 그 하인도 황해 감사를 시켜 고문하여 엄히 가두어놓고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

하였다. 이때에 와서 시수가 사실을 조사하여 보고하였으나 상의 마음에 들지 않아 그 계본을 되돌려주게 하고 회유하기를,

"경이 재상의 지위에 이르고 감사의 부절을 안게까지 된 것은, 대개 병신년 봄 이전에는 경의 이름이 요망한 환관 무리의 입에 거론되지 않았고 을미년 겨울 이전에는 경의 나가는 방향이 외척 집안을 가까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대대로 지키는 가문의 명성을 조금도 떨어뜨리지 않았다고 보아 수년 동안 의금부 관리로 있는 처지에서 발탁하여 언책(言責)과 논사(論思)의 직책을 거쳐 승지에까지 순차를 따라 등용하였던 것인데, 이 조사 보고를 보면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경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잘못 알았다. 진작 경이 마음을 쓰는 것이 사(私)에 있고 공(公)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면 잘못 알았다는 후회가 어찌 오늘에 나왔겠는가. 비단 홍최영 형제의 나쁜 소식이 될 뿐 아니라 또한 어찌 경의 집에 있어서도 좋은 계기가 되겠는가. 처음 조사하라고 명한 것은 그 토지가 정말 최영의 집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었는데, 경은 차가(車哥)의 부탁에 귀를 기울여 긴요치 않은 일에 간섭하였으니, 평소에 경계한 본의와는 크게 어긋난다.

그리고 곽시복도 비록 시골에 사는 한미한 사람이긴 하지만 듣건대 홍의 장군(紅衣將軍)의 후예라고 하며 또 이른바 이춘로(李春老)도 금년에 '충장(忠壯)'이란 시호를 내린 집안 사람이라고 하니, 명색이 그래도 사족(士族)이다. 그런데 관청에서 보낸 사람이 곽시복의 어미를 향해 돌입하여 뿌리치고 밀었으니, 이것이 기세를 부린 처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일개 차이원의 송사의 승부가 그렇게도 갈등을 일으키니 이 또한 어찌 까닭이 없이 그렇겠는가. 그때 참판은 설령 알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지난달 초부터 20일경까지 곽시복의 어미가 징을 치고 호소하겠다는 등의 말로 위협하였는데 최영이 어찌 듣지 못하였을 리가 있겠는가. 듣고서 응당 그 처남에게 말을 전달하였을 것이다. 참판이 된 자로서는 그 즉시 송사를 가라앉혔어야 하는데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으니, 그 패려하고 추악한 습성은 손발같이 다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다. 이뿐이 아니다. 금호문(金虎門) 밖 부인의 교자를 사람을 보내 위협하며 끌어내는 것도 부족하여 그의 외로운 아들을 차디찬 옥중에 가두었다. 날씨가 추움으로 인하여 특별히 석방을 명한 후에도 완전히 놓아주지 않았다. 이것은 조정에 임금이 있는 이상 권력이 있는 자도 감히 하지 못하는 일로서 위로는 호소하려는 길을 막고 아래로는 외로운 사람을 박해하였다.

이런 일이 한 가지만 있어도 중벌을 면하기 어려운 것인데 더구나 최영의 처지로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비록 최영이 일일이 지시하여 그렇게 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알면서도 그대로 묵인하였으니 최영의 마음 속에는 '(㥘)'이란 한 글자는 전연 없다. 그처럼 어리석은 부류가 이와 같이 겁이 없으니, 이것이 곧 내가 차이원이 최영의 집에 끈덕지게 붙어 최영의 집에 청탁한 사실의 전말을 알고자 하여 경에게 넘겨 조사 보고하게 한 이유이다. 그런데 경은 허다한 사관(査官) 중에서도 기어코 필요한 증인이라는 왕한정(王漢禎)을 보내왔으니, 차이원이 비록 토설하고 싶은들 사관이 재갈을 물려놓은 격이라 차이원이 입을 다물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 다물어지고 말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엄한 처분을 내릴 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조사하기 시작한 일이라 경의 손으로 결정지으려 하였기 때문에 아직까지 우선 참작하여 다시 조사한 보고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겠다.

곽시복에 대해서는 별로 물어볼 것도 없으니 즉시 놓아보내고, 이른바 차이원은 이번의 공초 외에도 그의 지친이 병신년에 묘자리를 볼 때부터 한번 호되게 다스리려고 하던 자였다. 그러한 자로서 그러한 죄를 저질렀으니 참으로 이른바 용서하기 어렵다. 각별히 엄하게 고문하라. 그가 토지값을 가지고 무엇 때문에 최영 형제에게 청탁하였으며 징을 치고 호소하겠다는 말이 나온 후에도 오히려 형조의 관리에게 뇌물을 바치는 등 갖가지 죄상이 여지없이 탄로되었다. 이 여러 가지 사건이 어느것이나 모두 분명히 캐물어야 할 일인데 경은 일체 은폐하고 이미 환하게 알고 있는 토지의 주객만을 가지고 하나하나 따져 물어서 보고서를 만들었으니, 경의 의사를 알 만하다. 더구나 해당 당상관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또 본 송사의 곡직은 유사에게 넘기라고 하교한 이상 이를 조사하여 보고하는 것은 해당 조의 회답 공문을 쓰면 되는 것인데, 어찌 감히 이처럼 모르는 척하면서 능청맞게 엉뚱한 대답을 하는가. 경은 기질적인 병통을 끝내 각성하고 고치지 않아 구태의연한 전일 그대로의 경이다. 경이야 애석할 것이 없고 애석한 것은 대신이며 경의 집안이다.

이 보고서를 도로 내려보내니 다시 시급히 수정하여 보고하라. 또 혹시라도 저항하거든 차이원을 즉시 진영으로 넘겨 남의 재물을 훔친 것으로 간주하여 먼저 강도의 율문으로 다스리고, 다음은 외척의 세력을 빙자하여 국법을 무시하며 저항한 것을 다스려야 한다. 전교에 의하여 엄히 신문한 결과의 죄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경이 비록 다시 차이원의 낯을 보아주고자 한들 그리할 수 있겠는가. 이 점을 일체 알고 있으라."

하니, 시수가 다시 조사하여 차이원이 뇌물질한 절차를 가지고 치계하였다. 이에 회유하기를,

"자주 조사를 하게 하였으나 본 사건의 곡절을 모르는 것은 아니고 본 송사의 대략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토지는 홍최영의 토지가 아니고 판결도 김노영이 판결할 일이 아니라는 것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사건은 유사가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맡길 것이지, 조정에서 무엇 때문에 수다스럽게 윤음을 내리겠는가. 그러나 한 번 조사하고 두 번 조사하고 계속 밝히기에까지 이른 이유의 하나는 홍최영이 혹시 차이원을 위하여 김노영에게 간접적으로 청탁할 수 있기 때문이고, 또 혹시 기만하고 엄폐하기에 급급하여 곽시복을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조사 보고를 보면 홍최영과 김노영은 이렇다할 범죄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사전에 조심할 줄을 몰랐으니 홍최영도 전연 죄가 없다고 이를 수는 없고 애매한 혐의를 받게 된 것도 전연 소홀히 하였으니, 김노영도 혼매한 죄를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이미 애당초 생각했던 것과 다른 점이 있는 이상 그대로 중벌을 적용할 수 없다. 전 참판 김노영은 파직시키는 것으로 다시 전지를 받을 것이며, 전 판관 홍최영은 도태시키는 것으로 다시 전지를 받으라. 이른바 차이원에 대해서는 이미 엄한 형벌을 내렸으나 섣달 그믐날도 며칠 남지 않았으니 즉시 결단을 내려야겠는데, 속였는가 속이지 않았는가는 막론하고 하찮은 그로 인하여 여러 차례 번거롭게 지시를 내린 것만해도 용서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형조에 뇌물을 바쳤다는 것을 그가 이미 자복하였으니 이와 같은 간사한 소인배는 형장을 쳐 귀양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대사령이 금방 지나갔으니 귀양보내는 대신 속전을 받고 다시 엄한 형장을 가한 후 해조에 압송하여 처결하게 하라.

경은 첫번째 조사 보고할 때 왕한정(王漢禎)을 조사관으로 차임하여 사실을 추적하려고 하였는데 겉으로 보기에도 과연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앞서 내린 유지(有旨)에서 빠짐없이 타이르고 책망하였는데, 그중에는 경으로서 감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도 있었을 것이다. 이미 본심이 참으로 잘못된 것이 아닌줄 알면서 그대로 억압을 가한다는 것은 자못 사실을 밝히는 본의가 아니며 또한 신하를 예로 부리는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앞서 내린 유지 중 한 구절은 다 지워버리게 하였다. 이것은 대신이 안심하고 감영에 있게 하기 위해서다. 경은 이 구절을 지워버렸다 하여 죄를 면하였다고는 생각지 말라. 이후부터는 조정의 명령이 내릴 때면 매사에 성의를 다할 것이며 혹시라도 종전처럼 하여 스스로 죄과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鳳山人郭始復妻許氏, 擊錚原情以爲, 其夫始復與京居車履遠訟於刑曹, 自官推捉, 其媤母挽執其夫曹隷裂破其夫衣冠, 敺其媤母, 方在死境, 而本事干涉於洪守榮, 堂上則洪最榮妻娚, 郞廳又是切親之間, 故禁渠不得呼籲刑曹啓言: "車履遠郭始復田價相訟, 始於今月十一日始復以還退之意納供, 過限不成參議姜彛正推捉, 而伊時所見, 笠雖破而身無傷處今觀此供, 其夫被打, 旣不顯著, 曹隷不能從容押來, 笠子破碎, 事極驚駭曹隷則自臣曹嚴懲, 本訟則係是四件之外, 請置之, 許女, 則自臣曹照法嚴勘" 敎曰: "爲親上言, 亦可謂之四件外事乎? 訟理之如此如彼, 姑舍是, 本事則戚里家田土也, 堂上則戚臣之妻娚也況縱隷於外邑, 任其行惡乃爾? 以卿曹右袒僚堂之心, 猶不敢全諱事實, 曰以所着之笠毁損, 則其所作挐, 足爲明證老婆之爲其子挽救之際, 致傷, 勢所使然, 不致命, 幸耳大抵近來, 無論他戚家此戚家, 騰揚太過, 肆氣之漸, 每切隱憂, 際此聞此以洪最榮之無識麄悖, 心常悶然者, 決知有干囑至於乃兄, 不但在外任, 頗似畏愼最榮焉逭其罪乎? 此等豪橫之習, 須從露處卽嚴懲, 舊戚里之不悛者新戚里之學習者, 亦庶知戒赦令才過, 十分參酌, 洪最榮削其職名, 拔之起居之列以慈宮謙德, 敎戒何等申複, 而渠之姓名, 以屑越之事, 上下於似此文書, 尤豈不痛憤乎? 至於亞堂之頻除詞訟, 以其初除時, 不無名稱故也後叨不及初叨, 治聲變爲疪政, 果然有此僨誤惜其家老純善太柔, 不能束子弟本曹參判金魯永, 令該府, 施以受托聽訟縱隷虐民之律雖以卿言之, 眞所謂草綠一色, 而莫念瓜田之嫌, 顯有掩覆之跡莫嚴者議讞, 而阿好如許, 極爲駭然卿則罷職本訟, 令海伯嚴査狀啓該隷, 亦令海伯刑推嚴囚, 以待處分" 至是, 時秀査實以啓, 未稱旨, 命給其啓本, 回諭曰: "卿之致位卿月, 至擁藩節, 蓋於丙申春以前, 卿之姓名, 不聞於妖宦輩, 乙未冬以前, 卿之趨向, 不近於戚里家, 意謂世守之家聲, 或有一分不墜落, 拔之於數年烏帶之餘, 言責論思, 以至喉舌, 節次推擢矣觀此査啓, 一言以蔽之曰, 予於卿錯料誤知早覺卿宅心用意, 在私不在公, 則錯誤之悔, 豈發於今日乎? 不但爲洪最榮兄弟惡消息, 亦豈卿家好關捩乎? 當初行査之命, 非不知本土地之果非最榮家物也傾聽車漢之囑, 干涉不緊之事, 大非平日戒飭之本意且其郭童, 雖曰鄕曲冷跡, 聞是紅衣將軍之後裔, 所謂李春老, 又爲今年賜謚忠壯家人, 則名是士族也官差之向郭母突入揮斥, 此非肆氣之端乎? 一車哥之訟理立落, 如彼其葛藤, 亦豈無所一以而然? 其時亞堂藉令不知, 自去月初至念間, 郭母以上言擊錚等說威脅, 則最榮寧有不聞之理? 聞當送言於渠之妻娚爲亞堂者, 期於卽地息訟, 而任其所爲, 其愚悖麄惡之習, 可謂手脚之己綻不惟是也, 金虎門外婦人轎, 發差驅曳之不足, 囚其孤兒於冷獄因日寒, 特敎放釋之後, 又不永放者, 此朝廷當陽, 有權力者所不敢爲上而阻遏籲徹之路, 下而虐害窮獨之人, 有一於此, 難逭重法況最榮地處乎? 雖非最榮之一一指囑使爲者, 知而唯唯, 最榮胸中, 都沒一怯字如渠癡騃之類, 無怯若此, 此所以欲知車哥緊於最榮家囑於最榮家之顚末淺深, 付卿査啓, 則許多査官, 必以切證之王漢禎差來, 車哥雖欲吐舌, 査官爲含枚, 車哥口吻, 不期鎖而自噤非不知嚴賜處分, 而旣始之査事, 欲自卿手決折之, 故今姑參酌, 以待更査啓本之入徹郭哥別無更問之端, 卽爲放送所謂車履遠, 本招之外, 渠之至親, 自丙申相地時, 一欲痛治者也以渠有渠罪, 直所謂難貰, 各別嚴刑以渠土價, 緣何請囑於最榮兄弟, 而上言擊錚之說旣出之後, 猶復納賄曹吏, 種種情狀, 綻露無餘以此諸件, 無非當覈當問之事, 一切掩諱, 以已洞知之田土主客, 斷斷發問, 以此修啓者, 卿之意思, 不難知也況於該堂疏批, 又以本訟曲直, 付之攸司爲敎, 則此査啓, 用於該曹回移則可也, 焉敢爲此佯若不諦悉, 無難問東答西乎? 卿於氣質之病, 終不能刻意矯革, 依舊是前日之卿非所惜於卿, 所惜者, 大臣也, 卿家也此啓本還下送, 更卽星火修啓又或抵賴, 車哥直付鎭營, 以盜竊人財貨, 先治强盜之律, 次當繩以憑藉戚畹之勢, 侮蔑國法, 抵賴因傳敎嚴問之罪到此卿雖欲更顧車哥之面, 得乎? 一體知悉" 時秀更査, 以車履遠行賂節次馳啓, 回諭曰: "屢令行査, 本事委折, 非不知也, 原訟槪略, 非不悉也土非洪最榮之土, 決非金魯永之決, 亦非不洞燭也似此事件, 皆屬有司, 聽理之如何, 朝家豈煩絲綸乎? 一査再査, 至於屢覈者, 一則洪最榮或有爲車哥轉囑於金魯永也, 又或急於欺蔽, 使郭童罹困苦也觀此査啓, 最榮魯永, 似無緊切所犯然不念先事之懼, 最榮不可謂全然無罪; 專忽納履之嫌, 魯永焉逭昏昧之罪乎? 旣與當初所料有異, 則不可仍施重典前參判金魯永, 以罷職, 更捧傳旨; 前判官洪最榮, 以汰去更捧傳旨所謂車履遠, 旣施嚴刑矣, 歲除隔日, 宜卽決折, 而毋論見欺與否, 因渠蟣蝨, 屢煩辭敎, 卽此可謂罔赦況納賂於曹吏, 渠旣自服, 如許奸細之類, 刑配當然, 而赦令纔過, 定配收贖更加嚴刑後, 押付該曹, 使之決處卿於初次査啓, 以王漢禎差査官執跡, 驟觀果涉如何? 前下有旨, 誨責備至, 間有卿不敢承聞之句語矣旣知本情之眞箇無妄, 則仍以勒加, 殊非覈實之意, 亦違禮使之道前下有旨中一句, 竝許抹去此蓋爲大臣便意在營, 卿勿以句語抹改, 謂以免罪, 此後朝令之下, 隨事盡心, 無或如前自抵罪過"

   

정조 32, 15(1791 신해 / 청 건륭(乾隆) 56) 33(정축) 1번째기사

김노영(金魯永)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윤확(尹㬦)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丁丑/以金魯永爲司憲府大司憲, 尹㬦爲司諫院大司諫

   

정조 33, 15(1791 신해 / 청 건륭(乾隆) 56) 92(갑술) 4번째기사

이민보(李敏輔)를 파주 목사로, 김노영(金魯永)을 수안 군수(遂安郡守)로 특별히 보임하였다. 상이 민보 등이 금부 당상으로서 영희의 공술을 받을 때 조종하였다 하여, 이런 명령이 있었다.

特補李敏輔爲坡州牧使, 金魯永爲遂安郡守上以敏輔等以禁堂, 扶抑於永僖之捧供, 有是命

   

정조 37, 17(1793 계축 / 청 건륭(乾隆) 58) 29(임신) 3번째기사

김로영(金魯永)을 개성부 유수로 삼았다.

以金魯永爲開城府留守

   

정조 38, 17(1793 계축 / 청 건륭(乾隆) 58) 1125(갑인) 1번째기사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김노영(金魯永), 경력(經歷) 최경악(崔景岳)과 풍덕 부사(豊德府使) 임성운(林性運)을 파직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개성 유수 김노영이 장계 올리기를 '사람을 살해한 죄인 음세형(陰世亨)의 공초에 의하면, 첩 유순랑(劉順娘)과 동거하는데 장사를 나갔다가 돌아온 날에 본디 친하게 지내던 주지현(朱之賢)이 순랑의 집에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분한 마음이 울컥 일어나 처음엔 때려주려 하였으나 지현이 상당한 완력이 있기 때문에 몸을 빼 피하여 달아났습니다. 세 차례나 그렇게 하다가 지난 6월에 길에서 문태혁(文太爀)을 만났는데 태혁이 말하기를, 순랑이 지금 주지현과 함께 임 조이(林召史)의 집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곧장 뒤를 밟아 가보니 과연 순랑과 지현이 함께 임 조이의 집에 있기에 불같은 분노가 치밀어 따져볼 겨를도 없이 먼저 오른손으로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지현의 왼쪽 다리를 찌르고 다음에 왼손으로 지현의 상투를 잡고서 머리로 지현의 이마와 가슴팍을 들이받았으며 또 발길로 등줄기와 옆구리 등을 찼는데 그 다음날 지현이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법에 따라 심리하여 처단하게 하고, 그 나머지 관련된 유순랑 등은 그대로 수감하고 결말이 나기를 기다려 신의 영문에서 중한 쪽으로 처리할까 합니다.' 하였습니다. 이 옥사는 사형에 해당되는 옥사이니 의정부에 통보하여 상세한 심리를 가하여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판부하기를,

"일에는 원리 원칙과 임시 변통이라는 것이 있고, 법도 사건에 따라 오르내림이 있기는 한 것이지만 대체로 임시 변통은 아랫사람이 제멋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나아가서 원칙적인 불변의 법률에 대해서 법을 맡은 사람은 더더욱 판례가 그렇다는 것만 알고 있어야지 설령 그 정상이 매우 동정이 가더라도 섣불리 자기가 융통성을 보이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그와는 반대다. 음세형은 남편이고 순랑은 첩인데, 순랑이 간부인 주지현과 저지른 음행에 대해서는 남들이 다 알 만큼 소문이 파다하였다. 세형은 우매하고 용렬하기 짝이 없어서 여러 차례 간음하는 장소에 갔으면서도 도리어 뒤집어 쓸까봐 두려워하다가 다행히도 그날은 음부와 간부가 함께 한방에 앉아있는 것을 분명히 잡고서 곧장 앞으로 내달아 날쌔게 간부를 찔렀으니 이는 법조문에 이른바 간통의 현장에서 잡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세형을 엄하게 신문하여 진술을 받고 옥안을 작성하면서 논리라고는 한 마디도 없으니 이것이 법을 어긴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첫 번째로 불가한 것이다. 이름이 설사 화초첩이라고 하더라도 음분이 난 여자와는 전혀 달라 장가든 근거가 있고 평소 동거도 하였으며 그 여자도 남자마다 모두 남편으로 삼는 계집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음부가 간통한 죄를 그 여자에게 시행하지 않고 어디다가 할 것인가. 그런데 간부를 죽였다 하여 도리어 본 남편을 죽인다면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러한 인륜 강상이 어디 있겠는가. 두 번째로 불가한 일이다. 그리고 삼가 선왕에서 받은 전교를 상고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치마를 잡아당기거나 마주앉아 밥먹는 것을 그 남편이 보고는 분기를 내거나 혹 분한 김에 실수로 죽였을 경우에는 모두 가벼운 쪽으로 법을 적용하도록 서울과 지방의 법관들에게 반포했었다. 그런데 그 계집과 그 놈은 그 현장에서 잡혔으니 그것이 어디 치마를 잡아당기거나 마주앉아 밥먹는 것에 비할 일인가. 그렇게 막중한 수교 내용을 애당초 장계에 한 마디 거론조차 않고 곧바로 옥안을 작성하여 문서로 보고한 것은 구구절절 소홀히 한 것으로 그것이 세 번째 불가한 일이다.

유수의 직임이 비록 임금의 교화를 펴는 직임은 아니지만 역시 한 고을의 풍속 교화를 맡고 있는 사람인데 그가 처리한 일이 그처럼 상식에 반한 일을 하였으니 개성 유수 김노영을 파직시키는 법으로 처리하여 법률을 중히 하고 풍속과 교화를 부지하며 수교가 존중되도록 하라. 그리고 세형은 신임 유수로 하여금 관아의 뜰에 불러다가 타일러서 놓아보내도록 하고, 순랑도 신임 유수로 하여금 법조문을 상고하여 처리하게 하라. 그리고 경들은 법을 다루는 위치에 있으면서 의견을 내어 논리를 전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스스로 법을 위반하는 죄과를 범했으니 모두 중한 쪽으로 추고하고, 초검관(初檢官)도 옥을 꾸밀 일이 아닌 사건으로 옥사를 꾸몄으니 그 죄가 똑같으며, 복검관(覆檢官) 역시 그러하다. 경력 최경악과 풍덕 부사 임성운도 모두 파직시키라."

하였다.

甲寅/罷開城府留守金魯永經歷崔景岳豐德府使林性運職刑曹啓言: "開城留守金魯永狀啓以爲: '殺獄罪人陰世亨供, 與妾劉順娘同居矣出商還鄕之日, 目見素親人朱之賢在於順娘之家, 憤心陡起, 初欲敺之, 而之賢頗有膂力, 故脫身走避如是者三, 而去六月, 路逢文太爀, 則太爀云: 順娘方與朱之賢, 同在林召史家, 故卽往追踵, 則順娘之賢, 果同在林家憤火弸撑, 不暇計量, 先以右手拔所佩刀, 刺之賢左胯, 次以左手執之賢頭髻, 以頭觸之賢之額上及胸膛, 又以足踢其脊背脅肋等處其翌日之賢致死云令該曹照法勘斷, 其餘干連人劉順娘等, 仍囚待決末, 自臣營從重勘處' 云矣係是一罪, 請報議政府, 詳覆施行" 判曰: "事有經權, 法有低昻, 大抵權宜, 非自下之擅便也至於金石之法律, 爲有司者, 尤當但知斷例而已設有其情之絶可矜, 豈或輕生闊狹之見, 而此事則反於是陰世亨, 夫也; 順娘, 妾也順娘與奸夫朱之賢, 狼藉行淫, 人人皆知爲世亨者, 昏劣莫甚, 屢往奸淫之所, 恐被反荷之杖幸於伊日, 的執淫婦奸夫之同坐一室, 直前快刺奸夫者, 此乃律文所謂奸所被捉也今乃嚴訊世亨, 直招結案, 無一言論理者, 此非違法而何? 此一不可也名雖謂之花妻, 判異於行露之鶉奔其娶也有據, 其居也有素, 厥女又似非人盡夫之蹤跡, 則淫婦作奸之律, 不施於厥女而何哉? 然則以殺奸夫, 反殺本夫, 往古來今, 豈有如許倫常? 此二不可也敬考先朝受敎, 與他人挽裳對飯, 而其夫見而出忿, 或有忿頭枉殺, 幷許從輕之律, 頒示京外法官厥女之與厥漢, 被捉於厥處, 又豈比於挽裳而已對飯而已, 則莫重受敎, 初不槪論於狀辭, 直以結案文書登聞者, 節節踈忽此三不可也居留雖非旬宣之任, 亦掌一府之風化, 則其所處決, 若是反常開城留守金魯永, 施以罷職之典, 以重法律, 以扶風敎, 以尊受敎世亨令新留守招致官庭, 曉諭放送; 順娘亦令新留守, 考律處置卿等在按法之地, 不惟不能出意見敷陳, 乃反自歸於違法之科, 幷從重推考初檢官之不當成獄而成獄, 其罪均矣, 覆檢亦然經歷崔景岳豐德府使林性運, 幷罷職"

   

정조 39, 18(1794 갑인 / 청 건륭(乾隆) 59) 19(정유) 1번째기사

명정전에 나아가 조참례를 행하였다. 좌의정 김이소가 아뢰기를,

"하늘에 천명(天命)이 영원하기를 구하는 근본은 참으로 백성들을 화합하게 하는 데에 있고 백성들을 잘 보호하는 방법은 탐오한 풍습을 징계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각도에 특별히 신칙하여 자세히 탐문해서 보고하게 하여 무거운 법으로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참으로 좋다. 일전에 개성 유수의 말을 듣고 미처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살펴 묻지 못하고 단지 착복한 재물을 받아내게만 하였었다. 어제야 비로소 자세히 들어보니 재상의 반열에 있는 사람도 이런 무엄한 버릇이 있었다. 그러니 어찌 대단히 한심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전교하기를,

"대신이 탐오를 징계한다[懲貪]는 두 글자로 백성들을 화합하게 하는 급선무로 삼았으니 그의 말이 매우 옳다. 모름지기 대신이라도 법망(法網)에서 빠져나가는 일이 없어야 법을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대신에 대해서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경재의 반열에 있고 유수의 직임에 있는 사람이 새로 반포한 사목(事目)을 무시하고서 꾸어쓰고 횡령하여 국가의 재물에 손을 댄단 말인가. 규정을 정한 지 얼마 안 되어 이렇게 허물어뜨렸으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제 들으니 전 유수 김노영(金魯永)이 가장 그렇다고 한다. 이러한 위치에 있으면서 그러한 불법을 범하였으니 단지 보잘것없는 사람이 무엄한 짓을 한 것 정도로만 말할 수 없다. 명목은 꾸어썼다고 하지만 어찌 관리를 맡은 자가 직접 도적질한 법조문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 사이에는 비록 사우(祠宇)를 모시고 받드는 데에 쓴 것도 있고 노인을 위한 수연(壽宴)을 많이 열어주는 데에 쓴 것도 있기는 하지만, 사사로운 것을 가지고 어떻게 공적인 규정을 덮어 가릴 수 있겠는가. 불법을 저지른 것은 매한가지이다. 이러한 사람에게 곱절 더 무거운 법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개성 유수 김노영을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라."

하니, 이소가 아뢰기를,

"전 유수 김노영이 이미 먼 지방으로 귀양가는 처벌을 받았으니, 그 이외의 국가 재물을 불법으로 사용한 모든 사람들도 사용한 수량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구별을 두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 가운데 임기 전에 앞질러 교체되고 사용한 수량도 적은 자의 경우는 물론 용서할 수도 있겠지만, 몇백 섬이나 되는 수량을 떼어먹은 자에 대해서는 다같이 죄를 따져서 처벌하는 것이 징계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신은 전 유수 이시수(李時秀)와 이가환(李家煥)에게도 모두 귀양보내는 벌을 시행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자, 전교하기를,

"수량이 가장 많은 데다가 그 지위가 어떠한가. 이것이 김노영에 대하여 특별한 처분을 하게 된 까닭이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경이 아뢴 말도 옳다. 대체로 죄가 발각되기 전에 제 스스로 속죄한 자는 자수한 경우와 다름이 없으므로 따지지 않는 것이지만 사면령이 이제 막 지났으니 의당 참작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전 개성 유수 이시수는 관직을 삭탈하여 내쫓는 벌을 시행하고, 이가환은 백수(百數)의 분량을 횡령한 명목이 있으므로 의당 차등을 두어야 하니 관직을 삭탈하라."

丁酉/御明政門, 朝參左議政金履素曰: "祈天永命之本, 亶在於諴小民, 懷保小民之道, 亦莫先於懲貪風另飭諸道, 詳探啓聞, 繩以重律" 上曰: "卿言儘好日前聞松留言, 未及査問其誰某, 而第使徵捧矣, 昨始詳聞位居宰列者, 亦有此等無嚴之習, 豈不大可寒心乎?" 敎曰: "大臣以懲貪二字, 爲諴小民之先務, 其言甚是須使大吏, 莫或漏網, 法可施矣大吏猶然, 況身忝卿宰之列, 職在居留之地者, 不有新頒之事目, 借貸攛挪, 容手於公貨? 定式未久, 毁畫若此, 豈不駭然? 今聞前留守金魯永爲最云以若地處, 有若干犯, 不可但以無狀無嚴言名雖貸用, 焉逭自盜之律? 間雖有陪奉祠宇, 過行壽宴之擧, 私豈可揜公? 其爲不法一也此等之人, 若不施加倍之律, 其可曰國有法乎? 開城留守金魯永, 遠地定配" 履素曰: "前留守金魯永, 旣被遠配之典, 則其外犯用諸人, 恐不當以數爻多少有所區別其中徑遞而數少者, 雖或可恕, 至於累百之見逋者, 一體論勘, 似爲懲戢之道臣謂前留守李時秀李家煥, 竝施竄配之典, 宜矣" 敎曰: "最多之外, 地處何如? 此所以別有處分於金魯永者也不然, 不必區別卿之所奏亦然大凡未現發前, 私自贖罪者, 無異於自首者, 勿問赦令纔過, 合有商量前開城留守李時秀, 施以削黜之典; 李家煥有百數之名, 宜有差等, 削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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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전기)조선시대 전기 분원과 도자의 제작양상에 관해 논술하시오.

전기의 시기: 1468년(분원설치)/1592(임진왜란 발발)

분원설치: 건국이후 왕실에 필요한 자기양증가

<경국대전>에 명시된 바와 같이 사옹원은 법적,제도적으로 보장된 가운데 왕실자기를 전

문적으로 제작하는 관요인 분원을 설치/이유: 조선 왕실이 국내외로 사용할 최고급 백자 대량

필요. 세종연간 조선백자는 명조공용, 명 사신 접대용으로 그 수요가 늠. 금은기 부족했던 태종

-세종 연간에는 자기가 금은기 대용품으로 사용. 세조 연간에도 왕실에서 청화 백자를 본격적

으로 쓰기 시작. 태종~세조 조에 걸쳐 왕실용 일상기, 의기 대명, 조공용 기명등에 사용될

백자 수요 크게 증가

분원 설치이후 변한점: 왕실에 상납하는 자기의 성격변화(공납자기->진상자기=상품백자)

분청사기 쇠퇴: 지방 여러가마에서 분원 관요 진상백자 모방하려함

인화분청, 귀얄분청->일정기간제작. 철회분청->번성기 이미 쇠퇴기에 접어든

태토와 유약이 매우 조잡. 전기 2기가 시작되는 16세기 중엽부터 분청사기와

상감백자 등은 사라지고 순 백자와 청화백자가 주류.

분원자기의 유출과 사기장인의 도망: 연산군대 부터 관장이 크게 부족, 왕실 자기제작 곤란.

연산군(1494~1505)&중종(1506~1544)연간 관영수공업체제 흔들림->분원자기 외부유출 사용한 사

례 기록에 등장. 유출 사건에 사옹원 운영에 간여했던 종친들 연루

10년에 한번씩 가마이전: 연료문제 이러한 상황은 숙종 연간까지도 지속/분원 가마에서 도자기를 구울

때 사용하는 연료는 시장으로 지정된 광주 6개면과 양근 1개면에서 조달. 가마는 바로 이 떌감처

안에 위치. 이후 숙종 이후 분원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분원을 고정시키고 떌감을 외부에서

사오는 방식으로 바뀜

가마의 이원화: 중, 하품vs상품백자 청화백자와 같은 고급자기와 왕실 전용백자는 품질 유지를 위해 갑발

등에 넣어 정성을 다해 번조.

대표적 가마터: 경기도 광주 번천리, 도수리, 우산리, 무갑리

성종연간: 분원자기생산 안정화.사치풍조. 중국에서부터 들여오는 청화백자 수요 증가. 분원 청화백자

생산도 증가. 분원에서의 청화백자 생산도 초기에 비해 늘어났으며 수요층도 확대. ==>왕실이나

서울의 사대부가뿐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분원 백자를 향유하고자 하는 사람이 확산됨 반증

   

도자의 양식: 조선 전기는 상감백자와 순백자, 음 양각백자. 청화백자가 유행하던 시기 분원가마터를 조

사해보면 백자 중에는 상감백자가 가장먼저 유행 이후 순백자, 철화백자, 청화백자가 그 뒤를

이은 것으로 보인다.

백자: 고려에서 제작되던 연질백자는 15세기까지만 생산되었으며 이후 원, 명 초기의 영향을 받은 경질 백자가 주.조선 전기 백자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기형으로는 대접, 병, 항아리, 묘지석 등이 있다. 대접이나 완은 고려 청자와 달리 구연부가 밖으로 벌어진 것이 대부분이며, 굽은 높고 밖으로 벌어지거나 낮고 수직으로 뻗은 두 종류로 구분된다. 접시는 구연부가 밖으로 벌어진것이 대부분인데 청화 백자 보상당초문 접시가 대표적인 예이다. 잔의 경우 특이하게 양옆에 귀가 붙은 형태가 있는데 1466년 (세조12)진양군영인정씨묘지석과 동반출토된 태일전(太一殿)명 상감백자 잔탁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고족배와 합, 각배 등이 있다.

상감백자: 15세기말~16세기초 점차 소멸. 고려 청자, 분청사기 사용된 상감기법에 연원

청화백자: 초기의 청화백자 문양장식은 한국식과 중국식으로 구분되어 중국 자기는 송죽매가 병렬되거나 혼재되어 중경에 배치된데 비해, 조선 청화백자는 한두 소재를 부각시켜 근경에 배치하고 표현이 절제 되고 회화적이다. 청료가 귀했던 시기인 만큼 이 시기의 청화백자 수요층에 대한 제재는 엄격해서 <경국대전>형전 금제조에 세조 13년(1467)"청화백자 사용 금지법" 제정=======>(변화)

전기 성종조에 중국에서 청료 개발 그 영향으로 청화백자와 청료가 사무역, 밀무역 등의 비공식적 교류를 통해 다량 수입, 다양한 계층에서 널리 사용. 국내 제작 기술 역시 우수했지만 국내에서 청료가 생산되지 않아 여전히 청화백자는 귀하였다. 이에 청화 백자 무역 금지와 사용금지령이 공표되기도. 초기에 중국 도자기를 모방했던 조선 자기의 문양은 전기에 이르러 한국적인 정서가 깃든 격조 있는 회화풍으로 바뀌었다. 당초문이 빈틈없이 꽉 들어차던 기면은 매화가지 위에 앉아있는 새, 나무 아래 들국화 등 한국적인 화조화로 장식되었다. (홍치2년명청화백호, 백자청화매조문호)또한 보조문양 없이 매화절지의 주 문양만을 충분한 여백을 두고 표현 한 점도 전기의 특징. 16세기 전반 중종대에는 회회청을 들여오지 못하여 청화백자 제작이 어렵게 되었다.

홍치이년명 백자청화송죽문호(1489)

백자청화매조문호,15세기,국보170호

철화백자: 순백자와 청화백자에 비해 소량으로 생산. 초기에는 보조제를 제대로 정제하지 않아서인지 안료가 휘발하여 색상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으며, 색상에 대한 선호도가 청화에 비해 낮았기 때문.

15세기 제작 분원자기굽-內用, 見樣./, , , 글자를 한글자씩 음각한것 발견. 궁중에서 사용한다는 뜻인 "내용"과 왕실 공예품의 견본이라는 "견양"은 각각 대전에서 사용하던 것임을 의미, . . , 은 경복궁 내 창고를 지칭

좀 더 늦은시기-, , 명도 발견: 은 별번 즉 원래 진상할 기명 이외 왕실의 행사있을 떄 별도로 제작하는 그릇에 표기/좌, 우명은 좌우로 나누어 분원을 관리했다는 <용재총화>의 기록으로 보아 분원 가마를 좌우 두 부류로 나눈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

------------------------------------------------------------------------------------------------------------------2001후기)조선시대 후기 도자사의 제 양상에 관해 논술하시오.

후기의 시기:1752년(영조28)~1884(고종21)현재의 분원리로 이전하여 고정된 1752년부터 민영화되는 고종 20년까지 약 130년간의 기간

전대의 도자관련 여러 조항들:

분원고정론의 논의: 숙종23년(1779)에 대두. 분원을 원료의 운송이나 제작에 편리한 강변으로 옮겨 고정시키자는것.

남종면 분원리에 영구 정착 1752년 가마를 옮기는 비용 절감. 강을 이용하여 도자의 재료가 되는 백토와 떌감, 그리고 완성된 자기를 운반하기에 유리한 상황이 갖추어져 1884년 가마 운영이 민영화될 떄까지 안정적인 요업체계를 유지 더욱 다양한 도자를 제작할 수 있는 변화의 시대를 열게됨. 그러나 여러가지 대내외적 민영화의 길을 걷게됨

   

도자의 양식:

후기 전반부- 대개 금사리 계통의 것과 유사하나 후반부의 제품은 보다 대중화되어 가며 또한 순백자보다는 청화백자가 양적으로 많아지고 무늬도 민화풍으로 서민화되어 가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구하기 어려웠던 고가의 청화안료의 구득이 상당히 용이해지고 있는데 아마도 국내에서 많이 생산되었든가 아니면 서양으로부터 저렴한 청화안료의 수입이 비교적 자유로왔던 것이 아닌가 생각

18세기후기(중기의 전반부): 18세기 후기에는 중기의 여운이 많이 남아 있는 유색은 영청을 띠며 푸른 기가 도는 것이 특징. 무늬는 간결한 국란, 문자, 칠보, 산수, 초화등의 무늬가 그려지며 필치는 크고 굵어지는 경향을 보이면서 민화풍의 분위기가 나타나고, 떄로는 청화, 진사, 철화 등을 섞어 다채로운 무늬를 나타낸 예도 있다. 항아리 동부 중심에는 난 계통의 초화무늬와 여기에 매조, 화분과 파초무늬가 조합되어 복잡한 새로운 무늬로 등장한다. 또는 넓어진 능화형 안에 초화무늬, 산수인물무늬 등의 무늬가 그려지기도 한다. 이밖에 어깨에 시문된 보조무늬인 여의두 무늬가 커지고 병이나 항아리 하부에는 연판무늬가 시문되며 때로는 항아리의 아래에서부터 3분의 2되는 곳에 여의두 무늬가 한줄 돌려져 문양포치에 어색함이 나타난다. 진사백자등장-> 그릇 표현 전체를 진사로 무늬를 나타낸 몇몇의 예외는 있으나 진사는 예부터 필요한 부분에만 조금 쓰이던 안료이다. 진사자기가 대량으로 제작되지는 않았지만 18세기에 들어와 진사백자의 제작이 늘어나고 있는점 주목. 무늬는 연화무늬, 포도무늬, 대나무무늬, 호랑이무늬, 송학무늬등 이것은 당시 특수한 시대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후기 후반부인 19세기-청화백자 무늬는 전성기를 맞지만 격조가 떨어지고 구성의 묘가 없이 복잡한 무늬가 그려지는 그릇들이 많아진다. 때로는 무늬가 단순화되어 자유분방한 새로운 무늬로 변하고 있다. 단순생략 과정에서는 기하무늬가 나타나기도 하며 무늬의 소재로는 초화, 십장생, 문자, 봉황, 학, 남중문인화풍의 산수, 신선, 포도, 파초, 연어 등 매우 다양한 내용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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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후기)한국의 청자 발생 및 편년 문제를 서술하시오., 쟁점과 이설이 있으면 그 점도 구체적으로 언급하시오.

고려청자의 발생 문제는 일제강점기의 학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논쟁거리로서 대체적인 발생배경으로는 통일신라 경질토기에 나타나는 회유기술등의 내적인 기술 수준 상승, 나말여초 장보고로 대표되는 중국과의 활발한 해상교역과 그에 따른 중국 도자기 기술의 전래, 당시 중국 월주 청자의 영향, 선종 승려들과 지배층의 차문화 수요에 따른 도자 수요 증가 등이 거론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 방향은 가장 오래된 절대편년자료인 <순화4년>명 항아리를 청자의 초보적 단계로 보는 실증적 연구방법과 해무리굽 양식을 포함하는 초기 청자의 제반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한국보다 먼저 청자를 완성한 중국 기술이 언제 전해졌는가 하는 전파와 수용의 관점에서 본 양식 비교를 통한 연구 방법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먼저 실증적 연구 방법에 대해 살펴보면<순화4년> 명항아리라는 절대편년자료를 바탕으로 10세기 후반 발생설을 주장한다. 유약과 태토가 조잡하기 때문에 이것을 발생기 수준을 나타내는 초보적 청자로 본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태조묘당의 제기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청자라는 신소재가 충분한 숙련기간을 거쳐, 당시의 안목을 기준으로 우수한 재질이라 판단되는 수준에 이르렀을 떄 비로소 채택되었을 것이라는 상식적인 문제가 고려되지 않은 문제점이 있다. 또한 최근에 발견된 새로운 자료의 등장과 함께 설득력을 잃고 있다.

이러한 한계점 때문에 중국과의 비교 연구에 초점을 맞추는 양식사적 방법론에 관심이 기울어지고 있다. 초기 연구는 주로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월주요와 강진 청자요지군의 출토품이 유사하다는 점을 토대로 10세기 후반설, 장보고가 활동하던 당시의 중국, 한국, 일본의 관계 속에서 해무리굽 청자 발생이 일본보다 늦게 나타날 수 없다고 보아 9세기 전반설 등이 제기되었다.

보다 최근의 견해들을 정리해 보면 9세기 전반설, 9세기 후반설, 10세기 후반설 등이 제기되고있다.

9세기전반설:

-김재열: 김재열은 용인 서리 출토 유물을 토대로 해무리굽 형식보다 앞서는 선해무리굽의 형태의 청자가 존재한다고봄. 해무리굽보다 이른 시기의 청자와 백자는 굽의 접지면이 좁고 내저원각이 없으며 포개어 군 예가 많다는 등의 특징을 언급. 그렇다면 용인 서리 최하층위의 도편 성격은 내저원각이 없고 접지면이 좁은 청자로서 이들을 우리나라 최초의 자기로 봄. 이러한 종류의 가마는 시흥방산동, 봉천 원산리 또한 해무리굽 양식은 당대 자기 특징의 하나이고 8~9세기로 비정, 일본에서도 9세기 후반에 시유토기에 해무리굽완의 영향이 반영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한국에서 백자 해무리굽 발생시기는 늦어도 9세기 말이여야 하며 최하층의 고식청자(혹은 선해무리굽완류)는 1m이상 퇴적되어 있어 제작시기가 길었을 것으로 보고 선해무리굽완의 고식청자는 9세기 전반 장보고의 해상활동과 통일신라 후기 선종의 유입과 함께 음다풍습의 유행등을 배경으로 청자 발생 9세기 전반 주장

-최건: 해무리굽 완이 성행하는

 

   

   

   

   

   

   

   

   

   

2002전기*후기

2010년 5월 1일 토요일

오후 3:38

1.청화백자의 시원과 전개양상에 대해 논술하시오.

백자.-순백색 바탕흙 위에 투명한 유약을 씌워서 번조한 자기를 말함 동양에서 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575년경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顯) 북제(北齊)시대 (武平6년: 575년) 비교적 깨긋한 백자편 출토. 범수묘의 발견으로 6세기 후반경 이미 만들어 지기 시작함이 확인

당대는 백자의 발달기로서 하북성(河北省) 형요(邢窯)가 북방 백자 생산 가마중 대표생산지로 부각. 당나라 시기에는 백자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 정선된 바탕흙이 아닌 기면에는 화장토를 입히고 소성하는 풍조도 생김.

수, 당시대에는 하남성 공현(鞏縣)지방에서 정선된 순백자가 최초로 생산되었다.

정요백자의 출현과 발달-10c후반경 정요백자가 북망에서 만들어 짐(977년 화북 중국 정지사 탑기 밑부분에서 양질의 백자가 출토) 이후 12세기 후반 크림색의 질좋은 백자를 생산. 13~14세기에는 청백자가 출현하였다.

청백자:(13~14세기 출현)

   

   

   

   

   

   

   

   

   

   

   

   

   

   

원대(1271~1368)-1320년경 경질백자 탄생. 이러한 백자를 토대로 1351년경 청화백자를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 요주요, 여요, 남송 관요 등으로 대표되는 송 대의 청자 문화권에서 원대는 백자를 선호 이는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여 사치를 금하고 절약, 소비를 줄였던 풍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색도 무색에 가까운 백색을 숭상한것. 그러나 14세기 전반 양질의 백자생산을 토대로 한 1351년의 청화백자의 대량 생산은 초반기의 이념과 대치되는 것으로 이는 무역품으로 팔아먹기 위한 것이었다.

1323년경 신안앞바다-그 제작시대가 지대통보(至大通寶) 전( )에 의한 1310년의 상한과 지치(至治)3년명목간(木簡)에 의한 1323년의 하한년도가 밝혀짐. 그런데 여기에서 중국 청화백자가 한 점도 없다는 점을 들 수 있고 그로 인해 청화백자의 본격적인 제작 시기는 14세기 중기 이후라고 보게 된것

영파에서 출발하여 일본으로 가는 도중 난파. 중국도자기(약 60%가 용천요청자/대부분 경덕진요계의 백자 30%/나머지 건요, 길주요),한국도자기(고려청자 7점).일본도자기 4점.

1351년 1929년 영국 David중국 예술 기금회소장 지정(至正11년-1351년)의 연호가 적힌 "청화 용문 상이병" 현 대영박물관 소장 약 60cm의 대형자기, 청화백자의 가장 연대가 내려가는 예

지정형: 페르시아 수입청화안료사용. 망간소량, 철분 =>청화발색이 농염 처액이 진한부분은 흑색의 반점/중국산 청색안료:망간 성분 , 철분 =>청화 발색이 회색및이 나며 흑색의 반점이 없다. 이렇듯 청화의 사용으로 회화적 문양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감상용 도자기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명대: 명 초기 정치 불안정으로 전반적인 도자 생산 상황이 좇지 않음. 1425년 명사 윤봉이 우리나라에 백자요구(15세기 전반 조선 백자의 수준을 반영하는 동시에 명의 상황 반증)

선덕시대 다시 청화백자 경덕진서 부흥: 영락시대부터 청화백자의 장식이 산뜻하고 간략화 되면서 서서히 중국인의 전통적인 심성과 부합되면서 중국자기의 주류가 되었다. 자기의 기벽은 얇고 유색이 부드러우며 문양장식은 화조와 과실 위주이고 그림은 산뜻하고 자연스럽고 명쾌하다. 이 때부터 관요에서 생산된 자기는 황제의 연호를 써넣기 시작했으며 전서로 "永樂年製"로 썼으나 극히 적은 수에 불과하다. 선덕 시기의 청화백자는 비교적 무게가 있어 보이며 기벽이 두껍다. 유색은 청색을 띠며, 그림은 세련되고 힘이 있고 호방하다. 용맹하고 신성해 보이는 다섯 발가락을 가진 용문양이 많이 보이며, 화훼, 봉황, 사자, 해수, 인물, 원앙문 등이 보인다. 본격적으로 그릇의 밑바닥에 해서(楷書)로 황제 연호를 "大明宣德年製" 로 썼다.

   

우리나라로의 전래: 청화백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으나 고려말기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말기록 <효종실록>에 의하면 태종이 왕세자로 국자박사로 있을 떄 성균관에서 중국 청화백자잔으로 술을 마심(1380년대)/그 후의 청화자기 유입기록은 세종조에 집중

세종즉위년(1418)유구에서(당시유구는 명에 예속/세종5년(1423)일본에서 중국 청화백자와 청자를 조공품으로 받친기록.그외에도 명에서 선덕제가 즉위하여 명 황실로부터 세련된 청화백자가 전래된것으로 보임. 상당수의 중국그릇이 수입, 전래, 진상, 하사 등의 방법으로 국내에 유입되어 청화백자 생산에 자극을 주었다.그리하여 1463년 이후 세조는 국내산 회청의 개발을 서둘렀고 또 광주 관요를 중심으로 백자와 청화백자의 본격적 제작되었을것.

   

청화백자는 청화의 안료를 중국으로부터 고가로 수입하여 사용하였으므로 국가의 재정이 곤란하여 수입이 어려울때는 그 제작의 양도 격감하고 있다. 특히 임진란과 호란 전후기에 이러한 현상이 뚜렷하다. 또한 그 무늬는 조선시대 회화의 변천에 따라 시대적인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특징은 화원이 그림을 담당했기 때문이며, 조선후기로 내려올수록 그릇과 무늬는 대중화되어 가는 경향이 짙어 특히 무늬에서는 전문화가의 필치가 사라지고 대개가 서민화 혹은 민화화하고 있어 청화백자 사용층이 보다 대중화되어 확대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원대도자의 특징: 기형이 대체적으로 크고 풍만하며

큰쟁반, 큰대접, 편항아리(이슬람 문화의 영향)

큰항아리, 매병, 호로병, 고족배, 잔탁

기면에 층을 나누고 전체를 장식하는 것 문양 장식이 간단한 송대와 당대 자기형태와 많이 달라진점임

인물고사, 동물문, 물고기, 곤충과 당초문 등의 식물문이 꽃잎이 둥글고 대칭을 이루며 도식화되어 있다.

용문양이 본격적으로 제작되었고 왕과 관련된 상층민용으로 제작.

   

   

2004전기*후기

2010년 5월 1일 토요일

오후 4:38

   

   

2005전기*후기

2010년 5월 1일 토요일

오후 4:41

1.분청사기의 기원과 특징 및 변천

<분청사기의 기원>

분장회청사기의 준말. 퇴락해 가던 14세기 상감청자의 뒤를 이어 발생 15세기 초 조선왕조의 기반이 튼튼히 닦여진 시기와 떄를 같이하여 퇴락해 가던 상감청자가 일변하여 새롭게 서서히 탈바꿈한것. 세종대에 기법이 다양하여 그 발전기 15세기 후반 이후 경기도 광주 일대에 백자 생산의 관요가 국가에 의해 운영됨으로써 분청사기는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생산이 거의 끝난다. 그러므로 14세기 중엽 발생으로부터 16세기 중엽경까지 약 200여 년간 생산. 우리나라 도자기 중 가장 순박하고 민예적인 성격. 양식상 12세기 중엽 발생한 고려상감청자에 그 연원을 두고 있으며 13세기 후반 이후, 원 나라와는 일가관계에 놓여 밀접한 유대가 이루어지므로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 일어난다. 상감 기법은 조잡, 해이해지고 능화형 안에 무늬가 그려지며 대접 안바닥에는 간지가 새겨진다. 그뿐아니라 화금 청자와 같은 소수 수요층을 위한 화금 기법등도 고안 사용되었다. 이러한 여러가지 요소들이 분청사기 발생에 영향을 주었다.

조선왕조는 14세기 중엽 이후 새로이 등장한 지방 향리와 평민 층으로부터 성장한 신진사대부가 주축이 되어 조선왕조가 성립 . 훈민정음창제, 천문관측기의 발명등 맥성을 위한 "민본"을 전제로 한 독창적인 민족문화의 계발과 창달. <농사직설>과 <향약집성방>등의 편찬. 우리에게 맞는 농사법을 찾고자 함과 우리의 산천에 나는 약초등을 조사하여 우리나라 사람의 질병은 우리나라의 약으로써 고치고자함. 민족적인 자각과 기층문화를 포용하고자하는 성격이 15세기 문화의 특색.

분청사기는 토산공물로서 중앙에 상납되었기 때문에 특히 관사명이 들어 있는 것이 많고 특히 관사명이 새겨 있는 그릇은 왕실 및 관아에서 주로 사용. 또한 전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생산지. 고려말 조선 초에 걸쳐 정치의 불안, 관기의 문란, 신분층의 와해, 새로운 지배세력의 성장, 왜적의 침입 등으로 관요의 기능이 마비되었고 이들 기술자들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퇴락한 상감청자를 제작하기에 이르른것.

   

<초기,발생기 약1360년~1420년경)

초기제1기: 태동기 상감청자 쇠퇴기, 분청사기 태동기, 고려의 쇠운과 함께 고려청자는 퇴락일로. 태토가 조잡해지고 기벽이 두껍고 투박하며 암록색을 띤다. 운학무늬 의 경우 구름무늬가 빗방울무늬로 변형되어 고려 상감청자의 전통을 유지. 대접의 경우 포류수금무늬, 연당초무늬 같은 무늬가 생략되고 몇 줄의 선만 돌려 민무늬의 경향을 보이기도 . 매병에 있어서는 굴곡이 심한 기형의 변화와 더불어 어깨에 간략한 자무늬, 연판무늬 등이 상감될 뿐이다. 고려말기의 기형, 무늬 등이 정형을 잃었지만 그대로 분청사기로 연결된다. 전남 강진군 대구면 미산과 당전 부락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14세기 말 청자가마터가 이 시기에 속한다.

   

   

초기제 2기: 초기 후반 약 30년간 조선왕조의 기반이 다져지는 시기이므로 분청사기에서도 새로운 방향이 모색. 퇴화된 상감청자의 무늬가 그대로 이어지는 한편 기형, 무늬 , 유태가 재정비되어 조선적인 무늬 형태로 변모하기 시작. 또한 고려 상감기법에서 간혹 채택되던 인화기법이 대접의 중심무늬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인화기법의 발생기.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분청상감공안명연당초무늬대접과 분청인화공안부명국화무늬대접이다. 전자는 청자상감정릉명 연당초무늬대접에 근원을 둔 연당초무늬의 변형도니 상황이고, 후자는 성긴 국화무늬의 발생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1420년은 공안부가 폐지되는 해일 뿐 아니라 대접무늬에서도 뚜렷이 한 획을 그을 수 있기 때문에 초기와 중기를 여기서 구분. 그러므로 이 시기에 속하는 그릇의 무늬는 퇴화된 연당초무늬, 풀무늬, 중권무늬, 빗방울무늬, 성긴 인화무늬가 많다. 부수적인 무늬로는 여의두 무늬, 연판무늬, 자무늬, 방사성파상무늬 등이 사용된다. 기형은 대접의 경우 안으로 휜 투박한 모양이 주종을 이루며 대마디 굽의 특징을 보인다. 제작 방법은 태토 빚음 받침에 포개어 제작했으며 유약은 청자유 계통의 투명유이지만 태토가 짙은 회흑색을 띠고 있어 유조는 여전히 암록색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편년자료로 최운해 무덤출토 분청상감파도무늬완(1404년), 등이 있음.

   

   

   

<중기, 발전기 약 1420년경~약 1480년경>

분청사기 발전기 1480년 전후가 되면 상감 기법은 자취를 감추고 인화 기법도 쇠미해지는 반면 귀얄 기법이 크게 유행한다.

중기 제 1기: 세종 치세년간에 해당 조선 전기 문화의 융성시기. 도자공예에서도 기법상의 다양한 발전을 보여 상감, 인화, 박지 음각 등에서 참신하게 변모한 양상. 혹은 새로운 기법이 고안되기도. 태토는 정선되어 밝아지며 유약은 잡물이 없이 투명해져 분청사기의 특징이 유감없이 발휘되며 또한 조선백자의 생산이 뚜렷해짐. 이와 같이 중기 제1기는 무늬와 기법이 다양하게 발전 세련되며 고려적인 전통에서 조선적인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 기법은 상감과 인화기법이 많으며, 인화 기법은 대접의 경우 내측면에 듬성듬성한 시문에서부터 점차 발전하여 기면 전체를 가득히 채워 무늬구도가 세련된다. 인화 기법에 사용되는 단독무늬 도장에는 국화무늬, 톱니바퀴형 원무늬, 육각판무늬 등이 있으며 또한 집단연권무늬가 그릇 전체에 압인되어 민화무늬의 새로운 특징이 정착되는 시기이다. 상감 기법의 연당초무늬는 변형하여 활달한 새로운 무늬로 변모한다. 한편으로 대접 외면에는 청자상감정릉명연당초무늬에 연원을 둔 당초무늬와 이중원권내 국화무늬를 네 곳에 배치하는 무늬의 구도는 퇴화되지만 다시금 고려상감청자의 무늬가 소생하기도 한다. 이밖에도 변형된 운학무늬가 상감되어 고려청자의 새로운 환원기를 맞이한 듯하며 이떄의 유조는 고려청자와 구별할 수 없다. 충남 공주군 의당면 가산리와 중흥리가마터로부터 물고기 무늬가 상감 혹은 인화기법으로 시문되며 또한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가마터로부터는 면상감의 모란무늬, 모란당초무늬의 편병과 큰항아리가 출토되어 분청사기의 새로운 면을 보인다.

편년자료로는 정소공주무덤출토 분청상감초화무늬네귀항아리와 분청인화집단연권무늬네항아리(1424), 분청박지연어무늬고봉화상뼈항아리(1430)등

   

   

   

   

청자상감정릉명 연당초무늬대접(왼편)

청자상감덕천명연버들무늬병

분청상감의성고명병등

청자상감정릉명 연당초무늬 대접의 내면무늬인 연당초무늬는 초기 분청사기 대접의 변천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며 청자상감덕천명연버들무늬병과 분청상감의성고명병은 기형, 거친 태토, 간략한 자 무늬와 연판무늬, 황색을 띤 회청의 유약 등의 특징들은 청자상감의 쇠퇴와 분청사기 발생의 과도기적 양상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2006전기*후기

2010년 5월 1일 토요일

오후 5:25

1)이제까지 발굴된 한국의 도자 가마터를 요점적으로 정리 서술하되 도자사의 추이와 연결하여 설명하시오.,

1.전남 영암구림리, 전북 보령진죽리-청자 발생 문제와 연결되는 8~9세기 통일신라시대 가마터

2,청자 가마터 강진 사당리 가마터에 대한 조사와 발굴 일제 시대 잘못된 인식에서 출발 . 청자에 대한 관심을 1910년대부터 일본인들의 골동취미에 의해 개성의 왕릉 도굴을 비롯 강진일대 지표조사가 실시되면서 고조 그 결과 왕릉은 물론이요 가마터 역시 훼손이 심하여 강진뿐만 아니라 부안 유천리 일대가 도굴되어 파편산일 다행히 유천리 도편의 일부는 그후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이들이 정리되어 1983년에 특별전이 개최되기도.

3.녹청자 관련<인청경서동가마터, 해남진산리 가마터>

인천경서동 가마의 경우 1965년~66년 국박과 인천시립박물관이 함께 발굴함으로써 알려진 조질의 녹청자가마터이다. 발굴 당시에는 토기제작에서 청자로 넘어오는 과도기의 가마터로 보았으나 82년~84년 대규모 녹청자 가마터들이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에서 지표조사되었고 또 진산리 제품을 실은 배를 완도 어두리 앞바다에서 인양발굴함으로써 녹청자에 대한 생각이새로이 정리 인천 경서동이나 해남 진산리 녹청자들은 11세기경의 생산품이라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이 결과, 우리나라 청자의 생산은 강진을 중심으로 한 양질의 청자와 해남 진산리나 인천 경서동을 중심으로 한 조질녹청자의 두 종류의 생산품이 공존했음을 파악. 진산리 제 17호로 명명된 녹청자가마터 91년도 발굴 보고서에 의거 10세기말~11세기 전반이라는 연대 추정

4.초기청자관련<용인서리고려백자가마터, 고창용계리 청자가마터,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가마터, 봉천원산리가마터, 강진 대구면 용운리 가마터> 이들 가마터의 공통된 특징은 무수한 원통 M자형 갑발로 거대한 퇴적층이 이루어져 있고 도편의 대부분 민무늬 이며 해무리굽 양식의 완, 얇은 내화토 받침이 특징. 유색은 암록색, 황갈색, 녹갈색 등을 띠며 유빙렬이 없다. 밖으로 벌어진 대접, 접시 완, 항아리등 생활용기의 기종이 다양하게 보임.

-용인서리 고려백자가마터: 1084~88년까지 3차에 걸쳐발굴. 모두 3차의 가마가 축조 최초의 가마는 벽돌가마요, 최후의 가마는 진흙가마로 그 길이가 약 84m에 달함. 4개층위를 확인한 6m의 자연퇴적층의 존재는 청자의 시원문제로부터 백자의 자체변화의 모습까지 알려줌. 즉 선해무리굽->해무리굽->퇴화해무리굽->윤형굽으로의 굽형태의 변화과정을 밝혀주었다.

   

   

   

-고창용계리가마터: 1983년 영광 원자력 발전소의 상수원 취수댐걸설을 위해 원광대학교 박물관 발굴. 발굴당시 가마와 관계있는 건물터 주변에서 태평임술(太平壬戌二年)명(1022)평와편의 발견으로 대체로 1022년전후 활동했으리라는 정보. 접시, 꽃모양접시, 대접, 큰사발, 병항아리, 주전자, 등잔 등다양한 기종

출토. 해무리굽의 완굽이 특징. 뚜껑있는완, 편병, 유병등은 안압지 풀토의 토기 기형가 비슷하며 잔받침, 주전자, 향로등은 11세기 후반~12세기 기형의 선구적인 것으로 주목 민무늬의 무늬 , 음각과 양각기법이 모두 있으며 음각기법으로는 구름무늬, 연판무늬,앵무무늬, 초화무늬 수목무늬등이 양각기법으로는 연판무늬가 있다. 아직 비색청자의 유조가 아닌 회청색, 녹청색, 녹갈색등의 유조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 가마터: 벽돌가마터 진흙가마로 진행하지 않고 벽돌가마에서 자기제작 중단. 또한 청자 퇴적층이 간층없이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토기현들의 퇴적위에 존재했다는 점 확인 용인서리의 최초 가마가 벽돌가마였으므로 최초의 서리가마는 방산동 가마와 거의 같은 시기일 것이며 오히려 방산동 가마가 조금 앞설 것이라는 점.

   

   

-봉천원산리 가마터

   

   

2007전기*후기

2010년 5월 1일 토요일

오후 6:08

1)분청사기의 종류와 지역적 특성에 대해 서술하시오.

< 분청사기의 지역별 특색-경기도, 충청도(제1군)/전라남,북도(제2군)/경상남,북도(제3군)>

(경기도, 충청도)-1군

15세기 전반 연당초무늬의 상감기법과 육각판무늬, 국화무늬 같은 인화기법이 중심이다. 15세기 후반 경기도 광주 같은 지방은 관요가 성립됨에 따라 분청사기의 제조는 끝이 나고 백자 생산의 중심이 되므로 귀얄과 담금분장과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있다.

충남 공주군 반표면 학봉리에서는 청화백자의 영향에서인지 철화기법의 분청사기라는 독특한 지방양식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16세기가 되면 회백자에 백토분을 입힌 도편이 남양주군 별내면 청학리와 과천군 문원리 등지에서 채집되고 있어 지방에서의 백자이행 양상의 한 단면을 알 수 있다. 서울의 우이동과 도봉동에는 14세기말~15세기, 이를테면 전기 제2기에 속하는 가마터가 존재하는데 이들은 분청사기의 특질을 갖추기 이전의 가마터이다. 이와 같은 성격의 가마터는 전국에서 발견되며 이는 고려 말기 청자 가마터가 전국으로 확산된 현상과 상통한다. 충청도 공주와 연기 지방의 중기 제1기에 속하는 분청사기 가마터 근방에는 대단위 백자 가마터가 좀처럼 발견되지 않아 이러한 현상은 15세기 전반에 이 지방에서는 아직 백자의 생산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말한다. 대체로 15세기 후반~16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 학봉리 철화분청 가마터에서는 백자 도편이 많이 수집되므로 15세기 후반 광주 관요의 백자 생산의 영향이 서서히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사기막리의 분청사기의 성격도 인화분청에서 바로 백자화해 간 15세기 후반의 가마터가 있다. 이와 같이 경기도와 충청도의 분청사기의 성격은 전라도 지방에서 크게 유행한 귀얄이나 담금분장의 성행 없이 대체로 15세기 후반 이후 백자로 이행해 간다.

(전라남, 북도)-2군

다른 어느 지역에서보다 가장 뛰어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15세기에는 박지 기법과 음각기법에서 특이한 발전을 하며 15세기 후반~16세기에는 귀얄 기법과 백토가 두껍게 입혀진 담금분장 기법에서 아름다운 묘미를 살리고 있다. 15세기 전반에서 후반을 걸쳐서 활동한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가마터는 양이나 내용에 있어서 학봉리 가마터와 쌍벽을 이루는 개성있는 지역 특색을 보이는 가마터이다. 편병, 큰항아리와 같은 기형이라든지, 물고기, 모란, 모란당초, 연화 등과 같은 무늬, 그리고 면상감, 인화, 박지, 음각, 귀얄 기법 등은 제 2군을 대표하며 면상감 기법에서 특히 특징이 두드러진다. 전남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의 분청사기 가마터는 15세기 후반~16세기 전반에 활동한 가마터로서 담금분장기법에서 개성있는 지역적 특색을 보인다. 전북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와 부안면 수동리 가마터에서는<내섬(內贍)>명 도편이 수집되며<내섬>명 그릇은 전라도 지방에서만 제작되고 있어 제 2군의 특징으로 꼽힌다. 광주 충효동 분청사기 가마터는 특히 각종의 명문이 수십종 발굴된 바 있어 제 2군의 지방적 특색을 또한 보인다.

(경상남, 북도)-3군

인화기법을 새로운 경지로 발전시킨다. 특히 집단연권무늬의 그릇은 동일 무늬의 반복으로 인해 현대 추상미술을 연상시키는 것이 있다. 인화 기법의 그릇은 당시 상품 그릇으로 주로 중앙관아에 상납했고 따라서 <인수부><장흥고>의 관청 이름뿐만 아니라 생산지 이름도 같이 새겨 상납하고 있다. 상납 그릇의 생산지 이름이 경상도 지방이 많다는 점이 제 3군의 제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양질의 태토가 경상도 지방에서 많이 산출되는 데도 기인한다.

   

<분청사기의 종류-상감, 인화, 박지, 음각, 철화, 귀얄, 담금기법>

(상감기법)

고려상감기법의 연속 무늬의 음각선에 백토나 자토를 넣어 유약을 씌워 번조하는것. 분청상감기법에는 선상감과 면상감이 있는데 특히 면상감에서 특징을 보인다. 면상감은 박지 기법으로 이행된다. 선상감은 처음에는 고려 상감무늬를 답습하다가 1420년대 이후에는 조선적인 무늬로 신선하게 변한다. 분청상감 기법은 조선백자에 영향을 주어 상감백자가 약간 제작되나 15세기 후반 이후로는 상감 기법은 도자 무늬로서 크게 이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자기에 적용된 상감 기법은 12세기 중엽에 발생하여 15세기 중엽경까지 애용되었던 한국 독자적인 도자 무늬 기법으로 발전되었음은 이미 언급한 바이다. 무늬로는 연당초무늬, 연꽃무늬, 버드나무무늬, 모란당초무늬, 모란무늬, 초화무늬, 갈대무늬, 물고기무늬, 어룡무늬, 파도무늬, 돌림무늬 등이 있으며 때로는 이들이 도식화되거나 변형되어 새로운 무늬의 경지를 나타낸다. 분청상감 기법의 그릇에는 유색과 태토가 고려청자상감 그릇과 구별하기에 매우 모호한 것이 많다.

(인화무늬_

인화 기법은 원하는 무늬를 새긴 도장을 가지고 그릇 표면에 질서 정연히 찍은 후 백토를 넣어 무늬를 나타낸 기법으로 넓은 의미로는 상감기법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도장을 찍는 기법은 통일신라시대 뼈항아리에 많이 사용되었고 고려상감청자에도 일부 사용되나 표면 장식무늬로서 특색을 십분 발휘한 것은 단연 분청사기에서이다. 모든 종류의 기형에 응용되며 처음에는 대접의 내면에 국화무늬, 육각판무늬, 삼원무늬와 같은 도장이 한 줄 또는 두 줄 정도로 단독으로 듬성듬성 압인되다가 차츰 전체를 메워 나가며 한편으로는 집단화된 국화무늬, 연권무늬, 빗방울 무늬 등이 그릇 전체를 뺵뺵히 찍혀 그릇은 전체가 하얗게 백토분장되어 인화 기법은 절정에 이른다. 그릇 아가리나 굽 주위에 부수적으로 시문되는 종속무늬로는 풀잎무늬 당초무늬, 여의두무늬, 연판무늬, 자무늬, 빗방울무늬, 잎무늬 등이 있다. 가마터를 조사하면 듬성듬성 인화된 초기 인화분청 파편이 청자상감의 여운이 짙은 파편과 함꼐 출토되는 것이 보통이다. 대체로 분청인화 기법은 15세기 초에 발생하여 1420년경에는 무늬 구도가 안정되고 15세기 중엽경에는 세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화 기법은 모든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발견된다.

특히 인화분청 그릇 중에는 관사 일므, 생산지 이름, 도공 이름을 압인 혹은 상감 기법으로 새긴 것이 있어 제작 시기, 생산지간의 특색 비교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예컨대 공안부, 경승부, 인녕부, 인수부, 덕녕부, 내섬시, 내자시, 예빈시, 장흥고 등의 관사일므,고령, 합천, 경주, 언양, 안동, 상주, 군위, 성주, 금산, 경산, 밀양, 창원 울산, 양산, 진주, 진해, 김해, 의흥, 예안, 삼척, 해주, 무안 등의 지방 이름이 있는데 경상도 지방이름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특색이다.

이밖에 , , , . 와 같은 과낫이름의 약자. , , , ,, 의 지명의 약자. 李金, , , 良金, 와 같은 도공이름. 기타 公衙,(공아), (공), 光上(광상), 光公(광공) 과 같은 관아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명문이 있다.

(박지기법)

박지 기법은 상감과 인화 기법과는 달리, 먼저 그릇 전체 혹은 일부에 백토로 분장한 후 시문하고자 하는 무늬를 음각으로 그리고 백토가 남아 있는 무늬 이외의 배경을 긁어내어 무늬의 백색과 회색의 바탕이 대조되게 하는 기법을 말한다. 백색과 바탕색과의 대비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긁어낸 바탕에 철채를 가하여 흑갈색을 띠게 한 기법도 있다. 박지 기법은 세종떄에 이미 세련되며 모란무늬, 모란당초무늬, 연꽃무늬, 연화당초무늬, 잎무늬, 물고기무늬 등에서 생동감이 넘치는 활달한 무늬를 나타내는 분청사기의 정수를 보여 준다. 박지 기법의 도편이 발견되는 가마터로는 전남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광주 직할시 충효동,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운대리 등이다.

(음각기법)

음각 기법은 박지 기법과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많으며 무늬가 간소화될 때 주로 많이 사용된다. 이 기법은 기면을 백토분장한 후 원하는 무늬를 선조하면 회색의 바탕색이 무늬선으로 나타나며 고려자기의 음각 기법과 같다. 회화적인 사실 표현에서부터 추상화된 무늬에 이르기까지 능숙한 필치를 보이며 모란무늬, 모란당초무늬 연꽃무늬, 연당초무늬, 물고기무늬, 잎무늬, 버드나무무늬, 인물무늬, 가옥무늬 등 다양한 무늬소재를 보인다. 꽃무늬가 많기 때문에 일명 조화무늬 혹은 조화 기법이라고도 한다.

(철화기법)

철화 기법은 백토분장한 후에 철분이 많이 포함된 안료로 그림을 그리면 흑갈색 혹은 흑색으로 나타난다. 이 기법은 긁어내거나 선조하는 것이 아니고 붓으로 무늬를 그리기 때문에 회화성이 높다. 무늬는 도식적인 것, 추상적인 것, 희화적인 익살스러운 것 등 서민들의 익살과 해학적인 분위기가 나타나 현대인의 감각과도 잘 영합된다. 대개 15세기 후반~16세기 전반에 걸쳐서 충남 곶우군 반포면 학봉리 일대에서 제작된 독특한 기법 중의 하나이다. 당시 관요인 경기도 광주에서는 중앙의 화원이 파견되어 청화백자가 활발히 제작되고 있었기 때문에 상호 영향관계가 주목된다.

(귀얄 기법)

귀얄이라는 도구를 써서 백토를 바르는 것으로 귀얄 자국이 운동감 있게 남아 있어 또다른 효과를 보인다. 대체로 포개어 구워 대량 생산한 막사기에 많이 있다. 박지, 음각, 철화 기법에는 기본적으로 귀얄을 사용하여 백토를 분장하며 귀얄 자국만 남는 순수한 귀얄 기법은 대개 분청사기의 쇠퇴 과정에서 많이 사용하였고 표면이 백자화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담금분장기법)

백토 물에 그릇을 덤벙 담가 백토 분장하는 법이다. 귀얄과 같은 자국이 없으므로 표면이 차분하다. 백토가 두껍게 씌워지면 표면이 완전히 백자화하여 역시 분청사기 말기에 많이 보인다. 대접 경우에는 굽다리를 잡고 거꾸로 담그기 때문에 굽 언저리에 백토가 묻지 않고 흘러내린 자국만이 있어 백토분장의 또다른 추상성을 보인다.

   

   

2008전기*후기

2010년 5월 1일 토요일

오후 9:34

1.고려청자와 중국도자기의 관련성을 서술하시오.

월주요청자의 영향으로 청자 발생 이후 북송대 여요, 요주요, 남송관요, 경덕진요 등의 새로운 조형기법이 이때 영향

1.초기(908~1095)-월주요청자:청자의 발생은 절강성에 위치했던 오월국과의 교섭을 주시

월주요는 춘추시대 의 영역인 절강성을 중심으로 동한시대부터 청자를 구웠던 요군을 말한다. 850년경 만들어져 무역도자로써 수출이 되었으며 이러한 월주요무역자기는 안압지, 황룡사, 미륵사, 부소산성, 완도 등에서서도 출토되고 있다. 고려청자의 발생에 있어서 월주요 청자의 유입으로 이루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현재 그 시기는 9세기 말~10세기전반으로 논의되고 있다. 월주요 청자의 영향은 먼저

1)가마구조-벽돌가마:서남부지방의 전축요 계열 가마들 시흥방산동 가마, 봉천원산리가마, 용인서리, 등의 가마들 원통형 m자형 갑발을 사용하며 대부분 민무늬이며, 해무리굽 양식 완, 내화토 받침이 특징, 유색은 암록색, 황갈색, 녹갈색을 띤다.

2)해무리굽완-중국에서는

3)기형-화형완,발 ,주자,잔탁--> 당말 오대의 기형들 한국 초기청자가마터에서 비슷한 양상으로 출토

4)문양-

고려의 초기 청자는 소문청자였다. 이것은 중국 월주요 당말-오대의 청자에서도 보이는 특징으로 청자 발달 초기에는 거의 문양이 없는 素文시대였다. 중국에서는 10세기후반 오대말-북송초 월주청자에서 가는 음각기법으로 새긴 연판문과 당초문 형식의 식물문과 파도어문, 용문, 쌍나비문,쌍앵무문등이 등장한다.

5)요도구-갑발, 갑발받침,도침

   

요주요청자: 요주요는 섬서성 동천시 황보진에 위치하며 당대부터 원말 명초를 거쳐 요업을 계속하였던 중국 고대의 저명한 요자아운대 하나이다. 당대에서 오대에 해당하는 기간은 월주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송대 이후로는 특징적인 압출양각 기법등을 통하여 하나의 계를 이룰만큼 세력 확장. 올리브 그린색을 띄는 청자가 특징적으로 도범의 사용으로 대량생산에 까지 이어졌다. 고려청자의 경우 북방청자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졌으며 문양에 있어서도 선조 음각 등에서 요주요 청자같은 장식적 문양이 12세기경 출현 또한 강진용운리, 붕나 유천리, 대전 구완동 등지의 가마터에서 압출양각청자출토. 거란의 침입 후 공식적으로 단절되었던 고려와 송은 11세기 후반에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양국의 공식관계가 활성화되는 1071~1126년 사이에 고려는 송을 중화로 인식하면서 그 분화를 받아들였고, 예종과 인종의 "화풍" 에 대한 흠모는 고려로 하여금 송의 선진문물 수용과 유교 이념에 입각한 체제 정비를 본격화하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11세기 말 중국 내에서 가장 광범하게 확산되고 있었던 요주요계 압출양각 기법의 급속한 국내 전래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임.

1)원상감기법

2)양인각기법과문양-고려 중기 청자에 보이는 압출양각기법

3)청자화판형접시

4)청자화형완

5)청자향로

6)과형병

그러나 요주요 가마구조는 석탄을 땔감으로 사용하는 만두요 구조이다. 따라서 요주요로부터 축요법은 영향 받은 바 없고 제자기법만 일부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여요: 11세기 말부터 12세기 북송과의 교섭으로 이루어졌다.

1)고려도경의기록-12세기초 북송 여요를 모방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2)사각받침=>인종장릉출토 사각받침(사당리출토).

3)화형잔

그러나 여요청자의 경우 우리나라에 수출된 예가 발견되지 않으므로 考古圖,宣和博古圖등을 모방한게 아닌가 생각된다.

   

   

   

2009전기*후기

2010년 5월 1일 토요일

오후 9:34

1)17세기 조선시대 백자의 특징과 성격에 대하여 서술하시오.

조선은 임진왜란(1592)으로 전 국토가 황폐해지고 국력이 소진된 상태에서 재건을 위해 노력하던 중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등으로 다시 혼란에 빠졌다. 병자호란 직후에는 인조15년(1637)분원에서 자기 번조가 일시 중단되어 왕실도자기도 부족한 실정이었다. 또한 효종, 현종시기에는 전에 없는 가뭄과 흉년, 전염병 등으로 국가는 안팎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전쟁외에도 분원에서 자기 번조가 어려웠던 또 다른 이유는 장인들이 작업장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분원 설치 당시 <經國大典> 工典에 사기장이 1,140명인데 인조 3년(1625)에는 821명만 남은 사실만으로도 그 심각성이 드러난다. 이렇듯 전쟁과 재해로 인한 어려움 그리고 분원경영의 내부적인 병폐로 인해 도자제작에도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이에 대한 분원의 새로운 변화와 정비를 위한 노력이 시도된다. 그 변화의 시도로서 숙종 23년1697년 분원의 경공장에 대해 사기장이 번갈아 입역하는 分三番立役制에서 通三燔立役制인 비계약직 임금노동자로 변화한 것인데, 다시말해 공인들에 대해 이전의 부역제에서 임금을주는 고용제로 변화한 것이다. (분삼번입역제는 장인을 셋으로 나누어 교대로 입역하던 것이고, 통삼번입역제는 일시적인 기거를 위해 분원에 머문 것이 아니라 분원 주위에 마을을 형성하여 기거하는 전속 장인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관요는 수준높은 전속장인을 거느리고 고급의 원료를 사용하여 우수한 백자를 생산하게 되는 등 기술제작과 양식에 있어 큰 변화의 계기가 된다.) 그럼에도 분원에서의 도자유출과 사번이 빈번하여 영조는 고급 자기인 갑기가 왕실 이외의 수요처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고 분원장인의 생활보장을 위해 화전세를 거두었다. (1727)

도자 양식적 측면에서도 임진왜란 이후 도자양식의 번반적인 변화는 불가피하였다. 백자는 그릇의 형태와 유약, 장식 등에서 이전과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 청화안료를 구하기 어려워 이를 대신한 철화백자가 주로 제작되었으며 색도 회백색을 보이는 백자가 주류를 이룬다. 대접과 접시 등 일상생활용 그릇이 주로 제작되었으며, 그릇의 종류도 이전만큼 다양하지 못하다. 이러한 상황은 17세기 후반까지도 여전히 지속되었으며, 전국각지에서는 대부분 질이 다소 좋지 못한 순백자와 철화백자가 제작되었다.

광주시 탄벌동(1606~1612), 도척면 상림리(163`~1640), 초월면 선동리(1640~1649), 광주시 송정동(1649~1659), 실촌면 유사리(1661~1664), 실촌면 신대리(1665~1677), 초월면 지월리(1677~1680년대), 도척면 궁평리(1680~1717년이전), 퇴촌면 관음리(1680~1717년 이전), 실촌면 오향리(1717~1720년 이전), 남종면 금사리(1721~1751)로 이동하면서 운영되었다.

임란직후 질적 쇠퇴와 사옹원 분원의 제작을 정비하고자 한 노력으로 역삼각형굽 그릇의 밑면에 음각으로 "*+干支"의 간지가 등장 1604~1630년까지로 조질백자의 경우 오목굽에 모래빚음눈이 사라지게 된다. 양질, 조질 모두 회백색 유조에 태토에 잡물이 많은 현상이 두드러 지며 전체적으로 질이 떨어진 모습이다.

1631~1680년경은 "* +干支+숫자" 로 명문의 내용이 바뀌고 조질백자의 경우 오목굽에 굵은 모래받침을 사용한다. 철화의 사용이 빈번해지고 소량의 청화를 사용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선동리, 송정동 등지에서는 다양한 굽이 등장하면서 질을 향상시키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 선동리 요지(1640~1649)""자가 청료로 쓰여진 청화백자편이 출토된바 17세기 전반기말부터 청화백자 소량이나마 번조된것. 또한 선동리 가마터의 수집된 자료에 따르면 접시의 굽은 4종류로 v자형의 높은굽과 낮은곱, u자형의 넓은 굽, 안으로 파진 오목굽 등이 있다. )

1680년경부터 1751년까지로 명문의 내용이 "*+기타"로 바뀌며, 백자의 질이 전반적으로 향상된다. 양질백자의 경우 흙모래받침을 사용한 순백색의 백자가 늘어나고, 조질백자의 오목굽에 굵은 모래받침은 그 제작량이 감소하게 된다. 이렇게 질의 향상과 함꼐 청화백자의 제작이 늘어나고 명문은 점차 사라지게 되는것.

17세기 후반에는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백자청화난초문각병에서 보듯 간결하게 그려진 난초와 대나무 문양은 청화 안료를 소량 사용한 듯 옅은 청색을 띤다. 치밀한 백토에 엷은 청색을 머금은 투명한 백자유 문양으로 보면 한쪽에는 각진 면에 걸쳐 대나무가 사선으로 쭉 뻗어 올라간 대담한 구도가 두드러지며, 반대쪽에는 난초 잎과 꽃이 거의 좌우대칭으로 표현된 문양이 안정적이다. 이렇게 한쪽엔 힘차게 뻗은 동적인 대나무를, 반대쪽에는 차분하고 정적인 난초를 대조적으로 배치한 발상이 독특하다. 대나무, 난초와 같은 문양장식은 중기 백자에 애용 경기도 광주 송정리 요지(1649~1659)에서도 대나무, 난초등의 초화문이 그려진 청화백자편들이 수습되었다.

17세기는 철화백자의 전성기답게 철화문양이 다채롭게 시문 그중 대표적으로 시문된 것은, 종속문으로 주로 쓰인 당초문을 비롯해서 운룡문, 각종 꽃과 호랑이와 사슴 등 동물을 그린 화훼* 영모문, 매죽문과 같은 사군자류의 문양이다. 운룡문이 시문된 대표적인 자기로는 17세기 초기 작품인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철화백자 운룡문항아리를 들 수 있다. 이 항아리에는 종속문으로 위쪽에 당초와 연판문을, 아래쪽에 삼각문과 당초문을 시문하였다. 용은 약간 굴곡진 목 부분과 직선에 가까운 몸통을 지니고 있으며 발톱은 세 개이다. 조선 전기에는 촘촘하던 비늘이 넓은 부채꼴 형태로 성글게 시문되었고, 입이 짧고 머리가 우스꽝스러운 모양이다. 용은 전체적으로 신비함과 위엄이 느껴지기보다는 약간 어설픈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철화로 바뀐 시문 상황에 익숙지 않은 탓인지 선이 중간중간 끊어지거나 채색이 고르지 못하다.

   

   

2)고려시대 백자에 대하여 서술하시오.

중국에서는

백자.-순백색 바탕흙 위에 투명한 유약을 씌워서 번조한 자기를 말함 동양에서 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575년경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顯) 북제(北齊)시대 (武平6년: 575년) 비교적 깨긋한 백자편 출토. 범수묘의 발견으로 6세기 후반경 이미 만들어 지기 시작함이 확인

당대는 백자의 발달기로서 하북성(河北省) 형요(邢窯)가 북방 백자 생산 가마중 대표생산지로 부각. 당나라 시기에는 백자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 정선된 바탕흙이 아닌 기면에는 화장토를 입히고 소성하는 풍조도 생김.

수, 당시대에는 하남성 공현(鞏縣)지방에서 정선된 순백자가 최초로 생산되었다.

정요백자의 출현과 발달-10c후반경 정요백자가 북망에서 만들어 짐(977년 화북 중국 정지사 탑기 밑부분에서 양질의 백자가 출토) 이후 12세기 후반 크림색의 질좋은 백자를 생산. 13~14세기에는 청백자가 출현하였다.

6세기 중엽 이후 우리나라는 중국으로부터 전래품 혹은 무역품의 성격으로 이미 중국 백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도 사용하고 있었다. 그 예로는 백제 무녕왕릉 출토의 완, 경북 의성 출토의 당 형주요 백자병, 안압지 출토의 형주요 백자완과 정요대접, 황룡사지 목탑지 심초석 밑에서 출토된 백자 작은항아리,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대중12년명(858)토기편과 동일층으로부터 나온 중국자기 등이 있다.

고려시대 백자는 대체적으로 청자의 발생과 거의 동시대로서 대체로 10세기 전반경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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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e Rodin

   

로댕 조각의 전통성과 현대성을 구체적인 작품을 예로 들어 논하시오. <2005 후기>

19세기 조각사에서 가장 빛나는 작가는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이었다. 로댕은 전통을 종합하면서 혁신을 이룬 조각가로 20세기 현대조각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 하였다.당시 회화는 아카데믹한 회화의 급진적 변화와 전개가 이루어졌지만, 조각에 있어서는 매체자체의 제한이 크기 때문에 회화의 진전에 비해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것에서 급격한 변화를 이끌어낸 사람이 로댕이다.

로댕은 문학적 상징적 주제를 사실주의적인 인체의 표정과 동작을 통한 극적이고 감정에 충만한 인물로 표현하였고, 궁극적으로는 19세기의 사조인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상징주의, 그리고 표현주의의 영역을 두루 거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광선에 녹아드는 듯한 표면효과와 음영의 대비는 인상주의자들의 관심과도 일치한다. 인상주의의 회화가 일으킨 변혁을 잘 알고 있었고 순간적 변화와 움직임, 빛과 색채변화의 포착을 조각으로 실현하는 것에 큰 역할을 하였다.

로댕의 전통성과 현대성을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청동시대>는 로뎅의 이름을 알린 작품이다. 콘트라포스토의 자세나 인체의 비례는 그가 이탈리아에서 보았던 미켈란젤로의 <다윗>이나 <죽어가는 노예>의 영향으로 고전조각에서 유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창과 같은 소도구도 갖고 있지도 않고, 이상화되지도 않은 채 피부의 생생한 촉감이나 얼굴에서 생명력 넘치는 평범한 인간을 느낄 수 있으며, 모델링을 통한 명암효과를 최대한으로 살려 인상주의 화가들과 동질성을 보여주는 점 등은 전통성에서 탈피한 화가의 현대성이라 할 수 있다.

원래 파리장식미술학교의 정문으로 주문받은 <지옥의 문>은 단테 「신곡」의 지옥편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원래는 우주는 구획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중세의 개념을 반영하여 문을 네모 형태의 패널의 연속으로 만들 예정이었다. 이는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의 전통을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구획이 없어진 문은 파도가 치는 듯 유동적 표현과 인물의 dynamic한 표현과 인물이 바닥에서 돌출된 정도는 거의 환조에 가까워 전형적 부조의 개념에서 벗어났다. 지옥의 문에서 파생된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 사색하는 사람의 근육은 에너지와 율동감이 과장되어 매우 표현적이다. 또한 <키스>는 인간의 세속적 애욕이 주재이다. 의도적으로 거친 대리석을 미완성으로 남겨 둔 것은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작품으로부터 받은 영향이지만 한편으로는 각 부분이 완성되지 않아도 오히려 그것이 표현적 요소로서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는 시사는 곧 현대조각의 새로운 한 면을 열어주게 되었다.

공공조각의 대표적인 작품인 <칼레의 시민>은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 시 영국이 칼레시를 포위한 것에 대해 용감한 6명의 시민의 영웅적 행위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격렬한 비난을 샀고 결국 거절당하게 되었다. 기존 공공조각의 기념비적이고 용감한 영웅상은 유대감이 없고 포기, 좌절, 공포, 불안 등의 굉장히 인간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인물들로 표현되었으며, 기존의 공공조각이 높은 단에 위치하는 것에 반해 ground level로 조각되어 전통적인 영웅상과 반대되었다.

이러한 그의 조각의 원천은 르네상스, 고딕, 바로크의 전통에서부터 시작되었으나, 조각의 표면은 그자체로서 중요한 표현적 요소가 되었으며, 신체의 일부분만으로 충분한 완성작품이 될 수 있다든지, 미완성 형태의 작품 요소로서의 가능성 발전, 나아가 조각이 사회적 기능을 갖기 이전에 작가의 개인적 표현매체라는 그의 미학은 현대조각의 새로운 개념이 되었다. 감정적인 그의 조각은 정신적으로는 고딕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2

   

Hellenism 미술

<2008 전기 簡>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인 기원전 4세기 말에 이르면 그리스 문화는 지중해 전역으로 스며들고 문화의 선도지인 아테네와는 멀리 떨어진 각 지역에 문화 중심지가 성장하고 있었다. 이때에 북쪽에서는 마케도니아라는 강력한 세력이 새로이 등장하였으며, 알렉산더에 이르러 페르시아제국 전체를 정복하고, 다뉴브강에서 나일강까지, 지중해에서 인도 너머에까지 그리스의 세력권을 확장시켰다.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제국의 건설은 그리스 미술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리스 미술은 이 제국이 건설됨에 따라 몇 개의 작은 도시 국가를 벗어나 세계의 절반에 해당되는 지역의 조형 언어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이 후기 시대의 미술은 그리스 미술이라고 부르지 않고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이 동방의 나라에 건설한 제국의 이름을 따서 헬레니즘 미술이라고 부른다.

이 제국의 수도들이었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티오크,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등은 그리스 본토에서 미술가들에게 요구했던 것과는 상이한 요구를 하였다. 그들은 기원전 4세기의 자연주의에 대한 매혹을 고전기 조각의 이상화된 영웅상과는 동떨어진 주제로까지 확장하여 술 취한 사티로스, 노파, 어부 등 시대를 초월하여 다양한 분위기를 갖는 인물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헬레니즘 양식은 유연하고 생동감이 있으며 불규칙적이고 때로는 비대칭적이다. 이들 조각들은 움직임의 표현에서나 자세, 몸짓, 얼굴 표정을 통해 생생한 감정을 보여주기 위해, 기술적인 극치를 최대한으로 보여주고 있다. 건축에서는 이전 도리아 양식이나 이오니아 양식의 평이함과 우아함에서 벗어나 기원전 3세기 초에 고안된 코린트양식이 유행하였으며, 일반적으로 건물 전체에 더 많은 화려한 장식물을 입혔다.

헬레니즘 양식의 대표적인 예는 기원전 160년경에 새워진 페르가몬의 거대한 제우스 신전이다. 이 제단의 프리즈에 표현된 <신들과 거인들의 전투>에서는 초기 그리스 조각의 조화미와 세련미를 찾아볼 수 없으며, 대신 강력하고 드라마틱한 효과를 느낄 수 있다. 모든 형상마다 격렬한 몸짓과 나부끼는 옷주름이 충만하며, 거의 환조의 형태로 되어 제단의 계단으로 흘러넘치기도 한다. 또한 1506년에 발견된 <라오콘, 기원전 175-150년경>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드》에 나오는 라오콘이 포세이돈이 보낸 바닷뱀들에게 공격당하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뒤틀리고 변형된 인물들의 역동적인 자태나 라오콘의 몸에서 보여 지는 과장된 근육표현, 파토스가 승화되는 얼굴표정 등은 긴장이 극대화된 표현으로써 가장 절정의 극적인 모습을 형상화 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의 미술은 미술이 오래전부터 유지해왔던 주술적 종교적 연관성을 거의 상실하였다. 모뉴멘털한 조각은 더 이상 엄격한 종교의식을 위해 헌납되지 않았고, 귀족이나 왕조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점차 궁정을 장식하는 데 이용되었다. 미술가들은 기술 자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모든 움직임, 표정, 긴장 등을 담고 있는 극적인 상태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표현해내느냐 하는 문제는 한 all술가의 솜씨를 시험하는 가장 적합한 과제가 되었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2

   

Minimalism

미니멀리즘 <2005 후기 2007 전기 2008 전기 簡>

   

몇몇 사람들에게 무의미한 속박처럼 보이는 전통으로부터 예술을 해방시키기 위한 시도로서 미술가들은 예술의 군더더기를 벗겨내 그 본질만을 남겼다. 미니멀리즘은 조각부분에 특히 두드러지며, 구성주의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에 그 기원을 둔다. 미니멀리즘은 60년대 후반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하드-에지 미니멀 아트 화가의 원형이었는데 추상표현주의의 에너지가 충만한 행위적 미술을 은근히 비판하였다. 그의 같은 중심을 지나는 기하학적인 도형과 가는 선으로 패턴화 된, 일군의 엄격하고 금욕적인 흑색 회화를 통해 추상주의에 있어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개성주의는 완전히 제거되었다.

이처럼 추상표현주의의 과도한 표현과 팝 아트의 대중성에 반발하여 작가의 의지와 창조성을 배제시키고, 전통회화의 illusion과 narrative를 없애, 작품자체의 물질성만을 중요시 여겼다. 이는 스텔라가 말한 "What you see is what you see."라는 것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회화가 가진 모든 요소가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최소화 된 것을 말한다. 따라서 미니멀리즘은 매우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를 띠고, 단일한 색을 가지며, 기계적 방식으로 제작된 특징을 보인다.

또한 기존의 전통적인 작품들(모나리자)은 작품의 의미가 그 안에 내제되어 스스로 완결된 존재로써 그것이 어디에 있건 그것의 의미는 변하지 않았지만, 미니멀리즘 미술은 시공간에 구애를 받으며, 작품의 의미는 외부에 존재하는 특징을 지닌다. Tony Smith<Die, 1962>라는 작품에서 (일루전과 서사적 요소 배제) 전통적인 기단을 무시하고 바닥에 놓음으로써 실제공간과 유리된 초월적 공간이 아닌 우리들과 같은 공간을 점유하는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Robert Morris는 3개의 똑같은 L형의 빔을 서로 다르게 배치한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관람자는 그것이 똑같은 형태임을 알지만, 그것이 놓은 곳에서 그것들을 우리가 지각할 때의 느낌은 너무도 다르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이는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현상학적인 지각'이라 부른 것으로 작품의 의미는 맥락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이는 Donald Judd<무제, 1967>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러한 작품들은 점점 대형화되어 상상할 수 없는 스케일로 변화하여 공공미술에 많이 이용되었다.

미니멀리즘은 미국에서는 추상미술의 뒤를 잇는 것이 되었지만 한편으로 유럽에서는 미니멀리즘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성향, 산업주의적 영향을 거대한 스케일로 장악하고 있다고 하는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3

   

Conceptual Art

   

1960년대 말아서 70년대 초의 미술계는 "회화는 죽었다."라는 구호로 가득했다. 개념미술가라고 자칭하는 그룹의 작가들에게 있어 회화뿐 아니라 조각도 이미 한물 간 유산에 불과했다. 조셉 코주스 (Joseph Kosuth)는 "진짜 미술품이란 역사적인 호기심거리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 개념미술은 미술작품의 물질화에 대한 의문이며, '미술의 비물질화'를 표방하는 사조의 일부분이다. 간단히 말해 창의적인 아이디어야말로 미술의 기본을 이루는 요소로서 이 아이디어에 고무 받아 실제의 미술작품을 만드는 작업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개념미술은 마르셀 뒤샹이 미술에 있어 중요한 것은 미술품 그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아이디어라고 본 점, 그림을 만드는 것은 관람객이라고 하면서 관람객의 참여를 기대한 것에 의해 이미 예견되었다.

미술은 독창적 개념에 있는 것이지 실제의 작품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미니멀리스트들이 그들의 작품 속에서 이미지, 개성, 감정, 메시지, 수공예적 성격을 제거해버렸다면, 개념미술가들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미술작품 형식을 추방해버렸던 것이다. 개념미술은 예술가의 사상을 강조하는 사조는 어떤 것이든 속하는데, 따라서 언어가 재료가 될 수 있고, 몸을 재료로도 쓸 수 있다. 조셉 코주스는 <의자 Ⅰ과 Ⅲ, 1965>에서 의자가 존재하는 방식을 의자, 의자의 사진, 의자의 사전적 정의로 표현하여 언어가 미술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한스 하케(Hans Haacke)는 <응축입방체, 1963-65>에서 작품이 주변의 자연적 물리적 환경변화에 따라 변하여, 작품의 의미는 외부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Metro Mobilitan>에서는 메트로폴리탄과 모빌사의 전시후원의 가려진 진실을 폭로하며, 미술작품의 의미는 정치와 권력이 만들어 주는 것이라 주장한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3

   

Pop art

*Pop art <2003 후기 簡> *팝아트의 주요화가와 그 특징을 설명하시오. <2001 전기>

*1910년대 입체주의 미술가들과 60년대 팝아트 미술가들이 어떻게 생활 속에서 발견되는 재료들을 미술에 도입하여 사용했는지 그 차이 및 공통점에 대해서 논술하시오. <1999>

1960년대 초기에 미국에서 발달하여 미국 화단을 지배했던 구상 회화의 한 경향이다. 팝 pop이라는 명칭은 '대중적', popular에서 유래하였으며 일상생활에 범람하는 기성 이미지인 대중적 이미지에서 제재를 취했던 미술의 경향을 일컫는다. 팝 아트가 급속히 일반화된 것은 1962년 뉴욕의 시드니 제니스 화랑에서 열렸던 뉴리얼리스트전 이후의 일이나 영국에서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그 전조가 된 미술가들의 활동이 있었다. 1950년대 초부터 해밀턴, 파올로치 등의 젊은 작가들이 모여서 대중 사회의 문화, 예술, 매스 미디어와 같은 문제들을 토론하고 전시회를 개최함으로써 팝아트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영국의 팝아트는 초기부터 사회 비판으로서 사회와 예술을 접목시키고자 했던 젊은 예술가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팝 아트는 1950년대 초기의 미국화단을 휩쓸었던 추상표현주의의 애매하고 환원적인 형태와 주관적인 미학에 대한 반동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6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사회는 대량생산과 매스미디어의 발전에 의한 소비문화와 대중문화의 시대가 도래 하였다. 상품은 광고를 통해 비쳐지는 이미지가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미술이 유일한 이미지이자 작품이었지만, 이제는 이러한 이미지와 상품의 홍수 속에서 미술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팝아트는 이러한 현대의 테크놀로지 문명에 대한 낙관주의를 기조로 하고 있다. 미국 팝 아트의 가장 직접적인 선조는 라우센버그와 제스퍼 존스를 들 수 있다. 그들은 회화의 마지막 종착지 같던 추상표현주의를 넘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다시 재현으로 되돌아갔다. 라우센버그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발견되는 물체, 이를테면 콜라병, 자동차 타이어, 침대 등을 이용하여 컴바인 페인팅을 창안함으로써 팝 아트의 기틀을 마련했다. 제스퍼 존스는 라우센버그의 정열적이고 혼란스러운 제작법과 반대되는 차갑게 계산된 그림을 그렸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지만 눈여겨보지 않는 것들을 대상으로 삼아 표현함으로써 이미지와 실재사이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현대적이고 평범하며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이미지를 사용하는 특징은 팝아트에 영향을 주었다.

<모노그램, 1955-59>/ <성조기, 1598>

미국의 팝 아트는 흔히 발견되는 일상의 이미지나 물체를 미술 작품으로 전환시켰는데 이 점은 다다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다다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팝 아트가 세련된 고도의 기술에 의해 '일상'을 미술의 영역으로 또는 사회의 체계 속으로 끌어들였으며 풍자적이거나 무정부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또 화면에 나타난 이미지는 구상적이지만 회화 체계 자체는 추상성이 높다. 팝 아트는 추상표현주의에 반발하는 반대운동이긴 하지만 추상표현주의로부터 무한히 확장된 의미를 지닌 미술의 가능성과 '전면 회화'인 거대한 크기의 작품이 자아내는 효과의 의미를 물려받았다.

앤디 워홀(Andy Warhol)은 팝아트를 대표하는 작가일 뿐 아니라 대중매체가 만들어낸 60년대 당시 미국사회의 슈퍼스타(Celebrity)였다. 그는 미술의 전통적인 가치, 독창성에 대한 개념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따라서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아이콘(코카콜라 등의 상품, 마릴린 먼로 등의 유명인), 비극적인 사건 등을 소재로 삼아 작업방식도 그의 팩토리에서 실크스크린과 같은 대량생산 방식으로 제작하였다. 이는 자본주의 세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소비중심주의, 물질중심주의를 비난하기 보다는 동조하고 찬양하였다. <100개의 캠벨 수프 깡통, 1962>, <골드 마릴린 먼로, 1962>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은 당시 대중문화를 반영하는 통속적 만화(특히 로맨스/ 전쟁)만화에서 발취한 것들을 거대하게 확대시킨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디테일을 삭제하여 원작을 단순하고 크게 그렸으며, 면은 색이 분할되어 점으로 찍은 인쇄기법인 ben day-dot을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Whaam!, 1963>

제임스 로젠퀴스트(James Rosenquist)는 거대한 팝 그림들 속에 비개성적이고 일반화된 광고판 제작 기법을 사용하여 이미지를 분해하고 분해된 이러한 파편들을 무질서하게 늘어놓았다. 전쟁과 핵폭탄, 대량살상, 헤어드라이기, 파스타 등의 무과난 이미지들이 섞여있는데 이는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운 일들이 이미지화 되어 계속적으로 노출되어 무감각해지는 내성화를 드러내고 있다. <대통령 선거, 1960>, <F-111, 1965>

클레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는 우리에게 친숙한 사물들을 삼차원적이고 거대하게 확대시키고 재질도 변형시킨 작품을 만들었다. 따라서 그는 관객들의 무감한 상태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사물의 힘을 되돌려 준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공공조각도 많이 제작하였다. <부드러운 변기, 1966>, <표범의자, 1963>

미국의 팝아트는 뉴욕뿐만 아니라 서부에서도 독자적인 전개를 보여, 뉴욕 팝과 함께 켈리포니아 팝이 2대 조류를 이룬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3

   

Surrealism

초현실주의 미술운동<2005 전기 2006 전기 簡 >

다다와 초현실주의 미술운동을 간략히 설명하면서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설명하시오. <2002 전기>

초현실주의는 다다의 직접적인 계승자이다. 1차 대전 이후 합리성과 이성에 대한 반발과 저항이 일어났고 초현실주의는 합리성에 반하는 비합리성과 의식에 반하는 무의식적 세계를 체계적으로 탐구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듬해인 1919년부터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까지 약 20년 동안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과 미국에서 널리 유행한 초현실주의는 원래 문학에서 출발한 예술사조로서 그 대부는 시인 앙드레 브루통이었다. 초현실주의는 미술, 문학 운동을 넘어선 삶의 방식이자 철학적 견해의 표현이었다.

1924년 브루통이 '제 1차 초현실주의 선언'을 함으로써 공식적인 시작을 알리게 된다. 그는 다다의 허무적이고 파괴적인 특질을 개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다의 여러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비교적 조리 있는 철학을 지닌 운동을 창조하였다. 그는 현실의 상위(sur)에 존재하는 현실이 또 하나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초현실주의는 현실의 위에 있는 초월적인 현실이 있다는 믿음에 기반 한다."고 하며, 초현실도 엄연한 현실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하는 것에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적 사고가 결합되었다. 초현실주의는 프로이트의 자유연상법과 꿈의 분석에 기저를 두었기 때문에 시인과 화가들은 무의식의 이미지를 자극하기 위해 자동기술법(Automatism: 의식적인 통제를 거치지 않은 창조행위)을 사용하였다.

이탈리아 화가인 키리코(Chirico)는 공식적으로 초현실주의 작가는 아니지만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의 역할을 하였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그의 작품들에서 거의 단정적인 꿈의 이미지에 대한 언어를 발견하였는데 몇몇 미술가에게는 이것은 거의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초기부터 이 운동에는 다다에 속한 예술가들인 막스 에른스트(Marc Ernst)와 아르프가 속해 있었다. 이들은 미로, 달리, 마그리트와 같은 자체 내의 중요한 예술가들을 길러냈다. 그러나 다른 주요 예술가들도 공식적으로는 이 운동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초현실주의적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이미지들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초현실주의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유럽에서 가장 두드러진 아방가르드 예술이었다.

일반적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은 오토마티즘 원리를 중요시하였으나 단일한 양식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크게 나누어 보면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첫째는 구상을 기반으로 하여, 일반적으로 현실의 상황에서 멀리 벗어나 병치, 전환, 치환 또는 변화를 시킨 자연형태의 정확한 형태에 의존한 사실주의 양식이 있다.(달리, 마그리트) 둘째는, 추상을 기반으로, 자연에서 발견되는 형태들을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는 이미지와 무의식 내에서 탄생된 형태들을 지향하는 우연, 즉흥적 화법의 양식이 있다.(미로, 에른스트)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는 정확하고 단조로운 산문적 묘사를 하는 아카데믹하고 자연주의적이며 재현적인 기법에서는 완벽하였다. 그는 크기에 대한 모순을 놀랍게 이용하고, 중력의 법칙을 부정하며, 잘라서 이젤에다가 옮겨 놓을 수 있는 물질들로 하늘을 채우는 등, 불합리한 것들을 조합해서 충격과 불안을 일으켜 전통적인 기대감을 가장 능숙하게 실망시킨 화가였다. 그의 낯설음은 일상생활의 대상들을 사용함으로써 더욱 고조된다.

<이미지의 배반, 1928-29>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도 마그리트와 마찬가지로 비현실적 주제들이 마치 실제인 듯이 보이는 19세기 아카데미의 자연주의 기법을 적용시키는 것이었다. <기억의 영속, 1931>

호안 미로(Joan Miro)의 전매특허인 환상적인 형태들은 항상 실제 대상을 의미한다. 그는 해, 달, 동물 같은 자연의 사물들을 특유의 생물과 같은 형태의 기호로 표현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형태들은 점차적으로 사실과 환상이 결합된 아메바 같은 둥글고 작은 덩어리와 '생물형태적(Biomorph)'인 형태로 단순화 되었다. <달을 향해 짓는 개, 1926>

주로 독학을 했던 이브 탕기(Yves Tanguy)는 부르통의 소개로 초현실주의에 동참하였다. 그는 자신만의 생동감 있고 독창적인 이미지를 발견하고 발전시켜서, 정신의 환각적 상태를 실현시켰다. 탕기의 이미지는 종종 바다 속의 풍경처럼 그때까지의 과학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았던 아메바 같은 생물체를 닮은 듯한 것들이 깔려 있는 영원한 해저를 암시한다.

초현실주의는 파리에서 탄생하였고 제 2차 세계 대전 때까지 파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나 빠르게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어 갔다. 1938년 파리 전시회에는 14개국이 참가하였다. 초현실주의는 문학과 시각 예술 양쪽에서 중요한 운동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조직된 운동이 해체되고, 그 추진력이 고갈되었다 할지라도, 초현실주의의 정신과 방법들은 계속 발전하여 많은 나라들의 개개 미술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3

   

Venetian school

베니스 화파의 특징<2001 전기>

   

베네치아 화파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르네상스 시대에 활약한 화가들 및 그들의 미술을 말한다. 유럽의 동쪽 항구로 동방무역의 중심지였던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지적이고 엄격한 이상을 강조하던 피렌체나 로마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베네치아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은 빛에 의한 '색채'이다. 엄격하고 완벽한 소묘를 추구한 중부 이탈리아 화풍과는 베네치아에서는 색채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곳은 무역으로 돈을 번 부유한 후원자들이 많아서 지성미 보다는 화려함을 강조하는 그림이 곽광을 받았다. 또한 많은 이국적인 물품들이 수입되던 이곳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술 마시고 노래하며 인생을 즐기는 감각적인 쾌락의 도시였다. 따라서 베네치아 화풍에서는 도색적이며 세속적인 주제를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초기 르네상스 시대, 즉 15세기의 베네치아 화단은 벨리니 가문이 주도하였다. 자코포 벨리니(Jacopo Bellini)는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제자로, 그의 양식은 국제 고딕양식의 다소 뻣뻣하지만 화려한 양식을 보여주었다. 그의 영향은 젠틸레 벨리니, 지오반니 벨리니에게로 이어지게 된다. 젠틸레 벨리니(Gentile Bellini, 1431-1516)는 한때,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의 술탄 메흐멧 2세의 궁정에서 궁정화가로 일했으며, 형식적이고 정적인 그림을 그렸다. 지오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는 오랜 생애동안 지속적인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창의력이 풍부하고 당대의 변화하는 풍조를 민감하게 수용하였다. 그의 화풍은 논리적인 공간과 비례를 추구하는 피렌체의 양식과 플랑드르의 세밀한 화풍을 이어받았다. 그의 작품<성모와 성인들, 1505>에서는 정교하게 구현된 원근법과 부드럽고 다채로운 색채들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벨리니의 후기 걸작들을 가능케 해준 것은 유화기법의 유연성과 광택이었다. 예를 들어 <성 프란체스코의 법열, 1470-80>은 풍요로운 색채와 초자연적인 광선의 효과를 보여준다. 또한 이전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풍경과 인물의 결합은 이후 지오르지오네와 티치아노가 이루게 될 융합을 예견하고 있다. 그는 대단히 바쁜 공방의 우두머리였는데, 그의 공방에서는 친퀘첸토의 유명한 베네치아 거장인 지오르지오네와 티치아노를 배출했다.

지오르지오네(Giorgione, 1478?-1510)는 벨리니가 하지 못했던 일, 즉 풍경과 인물을 하나의 신비로운 전체로 통합시켰으며 인간과 자연사이에 새로운 조화를 성취하였다. 그는 진작으로 여겨지는 작품도 겨우 다섯 점 밖에 되지 않으며, 이들 그림들은 수수께끼와 같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의 확실한 진작인 <폭풍우, 1506>는 화면 전체에 스며있는 빛과 공기에 의해서 풍경과 인물이 하나의 전체로 융합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전과 달리 풍경은 그림의 진정한 주제가 되고 있다.

친퀘첸토의 베네치아는 호사스러움이 극에 달했지만 한편으론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미술은 여전히 활기를 띠어 16세기 중엽에 이르러는 회화의 주도권이 피렌체와 로마를 거쳐 베네치아로 넘겨졌고, 당시 베네치아 회화의 독보적 존재는 티치아노(Titian/Tiziano, 1485?-1576)였다. 그는 색채에 의해 입체감을 표현하는 베네치아 미술의 특징과 함께 바로크로 계승되는 역동성을 함께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 <페사로 마돈나, 1519-26>에서는 혁신적인 구도로 성모를 비대칭적으로 배치하였지만, 색채를 이용해 통일성을 회복하였다. <성모의 승천, 1516-18>에서는 다채로운 인물들의 역동적인 동세를 통한 극적인 율동감, 빛나는 색채 등이 나타나 바로크 미술을 예견하고 있다. 그는 또한 초상화로 가장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의 초상화는 후기로 갈수록 보다 대담하고 자유로운 양식으로 발전했다. <젊은 영국인, 1540년경>에서 보다시피 세밀한 입체감의 묘사는 눈에 띠지 않으나 엄숙하고 존엄한 모습을 한 초상화 그렸다.

cf)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년경> 관능적이고 세속적인 베니스 특유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며 촉각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유로파의 강탈, 1562> 스페인 펠리페 2세를 위해 제작한 7점의 신화화 중 하나로 직각 삼각형의 구도를 지니고 있으며 특히 공간과 대기에 대한 환성적인 묘사와 찬란한 색채감을 보여준다.

   

16세기 후반 베네치아 화파의 대가는 틴토레토(Tintoretto, 1518-94)였다. 그는 티치아노의 형태와 색채에 있어서의 단순한 아름다움을 거부했다. 그는 사람들이 극적인 긴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사물을 새로운 관점에서보고자 했으며, 과거의 전설과 신화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탐구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표현의 격렬함과 자유로움, '미완성인 채로 두는' 처리법이 특징이다. <성 마르코의 유해 발견, 1562년경>에서는 성 마르코의 유해를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로 옮겨왔던 이야기 중의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빛과 어둠, 원경과 근경, 조화가 결여된 몸짓은 극적인 긴장감을 유발한다.

틴토레토의 경쟁자였던 사람은 파올로 베로네제(Paolo Veronese, 1528~88)였다. 그는 틴토레토와 달리 티치아노의 초기 작품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베로네제는 감각의 기쁨과 베네치아 문화생활의 고상함을 찬양하는 풍요한 축제그림(pageant painting)들로 유명하다. 그는 위대한 초상화가이기도 했으며 마음이나 정신의 활동보다는 오히려 모델들의 풍만한 육체와 모피, 실크 등으로 감싸여 있는 귀족 신분의 물질적 화려함을 전달하였다. 그의 작품<레비가의 향연, 1573>에는 편안하고 충분히 알기 쉬운 장관 속에 풍부한 세부들을 조직해 낸 점이 그의 작품의 특징이자 업적이다.

   

베네치아 화파가 부각되었던 마지막 시기는 18세기였다. 지오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 1696~1770), 프란체스코 구아르디(Francesco Guardi, 1712-93)

국제적 명성을 지닌 뛰어난 화가들이 이 시기에 여러 명 배출되었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4

   

대지미술 Earth work <2009 후기 簡>

   

대지미술은 기하학적이고 구조적인 관심과는 대조를 이루지만 전통적인 방법과 형식을 거부하고자 하는 점에서는 개념미술, 미니멀과 공통된다. 대지미술은 풍경, 대지, 지구 그 자체를 강조하는 경향이다. 이들은 종종 미술관이나 화랑에서 전시할 수 없는 종류의 작품을 제작했는데,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미술 오브제나 작품을 만들지 않고 바위, 토지, 잔디, 눈과 같은 물질로 작업한다. 그들의 작품은 근본적으로 익명적이고 비영구적이다.

대지미술에서 가장 유명하고 두드러진 미술가인 크리스토(Christo)는 기념비적인 공공건물인 베른 미술관을 마치 거대한 소포처럼 플라스틱 막으로 포장한 포장 설치작업으로 국제적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는 북부 캘리포니아의 두 지방을 가로지르는 40킬로미터의 나일론 울타리<길게 뻗은 울타리, 1972-76>을 세웠고, 마천루를 포장하는가 하면, 오스트레일리아 해안의 100만 평방피트를 포장하였다. 그에게 있어 이러한 작품들의 포장을 세우는 기술, 주변 풍경과 주변사람들에게 끼친 충경, 환경적 사회적 영향과 같은 것들은 전체의 개념에서 중요한 요소들이다.

또한 전형적 지구미술가인 로버트 스미손(Robert Smithson)은 부패, 화석화에 반대되는 지칠 줄 모르는 자연의 무한한 풍요로움을 주제로 담을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하여, 자연 풍경을 원재료로 삼았다. <나선형의 둑, 1970>에서 불도저를 동원해 수십 톤의 흙을 옮겨놓는 거대한 작업을 지휘했다. 단순한 형태와 분명한 상징은 방대한 규모로 실현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같게 되었지만 스미손은 특히 변화라는 주제(이 방파제는 즉시 부식되기 시작했다)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4

   

라파엘 전파

Pre-Raphaelites <2001 후기 簡>

   

1848년경, 가브리엘 로제티를 필두로 젊은 아티스트들이 모여서 만든 화파이다. 그들은 르네상스의 라파엘의 회화적 혁신 이후, 아카데미 미술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타락했다고 보고, 라파엘이 만들어 놓은 세련되게 다듬어놓은 형식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동경한다는 의미로 라파엘 전파라고 이름 하였다. 라파엘은 1520년에 죽었기 때문에 1500년 이전의 초기 르네상스, 중세를 도덕적인 미술로 생각하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영국의 미술을 개혁하고자 했던 모임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 종교적인 동경, 현재에 대한 혐오는 낭만만주의적 성격을 띤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물질에 사람들이 집착하고 물질화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대의 사회를 혐오하였고, 당시 아카데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값싼 부르주아들의 취향이며, 이러한 것들은 너무 관습적이고 정형화되어 더 이상 아무 자극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물질 사회에서 도피하여 과거의 영광스러운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들의 작품은 센티멘털하고 도덕성을 중시하며, 상징적인 그들의 화풍은 확실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것이 또한 특징이다. 그들의 작품에는 모든 디테일에 상징이 들어나 굉장히 상징적이며, 그들은 세부를 성실히 묘사하는 것이 화가가 가질 수 있는 도적적인 자세라고 생각하여 모든 부분을 아주 세밀하고 정확하게 그린 것이 특징이다. 그들은 사실주의자들의 장르화도 그리지만 주로 추구했던 주제는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 영국 극작가들의 소설과 같은 전통적인 주제를 따르고 있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는 종교적 감성에서 시작하여 점점 개인적 상징, 탐미주의로 나가갔고 이 때문에 라파엘 전파와 갈라서게 되었다. 그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수태고지, 150>가 있다. 존 밀레는 그의 대표적 작품인 <요셉의 집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1850>에서 세부를 정확히 그리는 중세적 특징과 일상모습과 그 세부에 모든 종교적 상징을 부여하였다.

브라운은 공식적으로 라파엘 전파에 합류했던 사람은 아니나 주요멤버들이 그를 스승으로 여겼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영국이여 안녕, 1855>, <노동, 1855>이 있다.

헌트는 일관적으로 종교와 관련한 주제를 그렸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깨어나는 양심, 1852-54>, <고용된 양치기, 1852>가 있다.

사실상 이들은 당시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었고, 그렇게까지 성공한 운동을 하지는 못했다. 감상적이고 센티멘털한 느낌이 강하여 당대 사회와 많이 유리된 느낌이 있었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4

   

미술과 공예운동

미술과 공예운동의 성립배경과 주요 특징.<2002 전기 簡>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에 의한 변화와 근대화라는 것은 19세기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영국은 1851년 최초로 '만국박람회'를 개최했다. 만국박람회는 산업혁명에 의한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새로운 산업제품을 전시할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자국의 대외적 과시, 각국의 정치, 외교, 문화를 대변하는 장이 되었다. 당시 영국은 자신들이 자랑하던 섬유제품을 전시하여, 과시를 하려고 했었는데, 실제로 박람회에 출품한 섬유제품들은 디자인이 서툴렀다. 이는 기계에 의해 모든 것이 표준화되어 빠른 시간 내에 효과적으로 대량생산하는 방식으로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따라서 박람회가 끝난 다음에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점을 약점으로 생각하였다. 이를 주도했던 사람은 앨버트 공으로, 그는 미술과 문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디자인이야말로 경제를 살린다고 보았다.

이러한 배경으로 디자인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때에 나왔던 움직임의 하나가 미술과 공예운동이었다. 중심인물은 철학자이자 평론가였던 존 러스킨, 윌리엄 모리스였다. 이들은 도시가 엔진소리와 공장으로 가득 차있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였고, 산업제품을 굉장히 혐오하였다. 인간을 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다시 중세로 돌아가는 것이고, 수공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산업화에 대한 과격한 비판을 하게 된다.

모리스는 산업화에 밀려서 장인적인 솜씨와 수공이 파괴되고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수공, 중세의 장인체제를 통경하였다. 미술이란 것이 그 동안 대중과 멀어져서 그들과 유리된 존재였다고 생각하고, 예술가의 역할은 사람의 사회적, 문화적 환경을 바꾸어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건축, 실내장식, 벽지, 가구, 카펫, 책의 삽화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을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존 러스킨은 기본적으로 도덕주의자였는데 미술작품은 도덕적인 의지의 결과여야 하는데, 기계로 만든 산업제품은 도덕과 양심이 없기 때문에 혐오하였다. 그는 기계와 당대의 제도자체가 인간의 삶을 점점 더 추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였다.

1. 디자인이라는 것은 실용적이고, 사람들이 금방 사용할 수 있고, 그래서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수공예야 말로 대체무기라고 생각했다.

2. 건축가, 디자이너, 화가, 조각가가 평등한 관계를 위해 협동하는 Total design개념을 내세웠다.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토털 디자인으로 형태는 단순하고 견고한 형태, 재료도 굉장히 기본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자연에 영감을 받은 디자인을 많이 했다. 윌리엄 모리스의 디자인은 꽃과 새 등 자연에서 모티프를 따서 정교하고 풍요로운 디자인을 많이 하였다. 이렇듯 미술과 공예운동은 디자인사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내세웠던 수공 디자인 제품들은 너무 비싸서 일반대중들은 도무지 사고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아르누보 운동에서는 기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운동은 이후 아르누보 운동을 비롯하여 회화 뿐 아니라 건축, 가구 등 이른바 토탈 디자인에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5

   

바우하우스

바우하우스는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에 의해서 1919년에 바이마르에 설립되었다. 1919년 창립 선언문의 서두에서는 "시각미술이라는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작품행위의 최종목적은 완전한 건축이다. 미술은 결코 전문 직업이 아니다. 미술가와 장인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고 주장하였다. 그들에게 영감을 준 것은 반 데 벨데의 예술에 있어서의 종합화와 순수한 형식의 주장,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과 공예운동의 이론이었다. 또한 중세 시대의 길드제도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바우하우스에 영향을 준 선각자들과는 달리 바우하우스는 기계문명 시대의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열렬히 환영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구조적으로, 이론적으로, 미학적으로 충분히 이용하였다.

바우하우스는 6개월 기초과정부터 시작하며, 각 과정은 기본이론을 가르치는 담임과 근대적 의미의 장인의 지도하에 이루어졌다. 학생들은 중세 시대의 도제와 거의 다름없었고, 이론과 실습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었다. 바우하우스에서 가르쳤던 칸딘스키의 『점, 선, 면』등과 같던 교재는 전 세계 미술 교재의 고전이 되었다. 교육과정은 계속해서 바뀌고 보강되어졌다. 시행착오가 거듭되던 초기에는 이론 쪽으로는 형식론, 재료학, 과학 및 수공예적이고 기숙적인 숙련에 치중되었다. 그러나 1923년부터 모든 예술적인 원리들을 하나로 통일시켜주는 분야로서의 건축적인 측면이 두드러지게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바우하우스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분야는 가구, 도자기, 직물 등의 건축과 공업 및 실내디자인 분야였다. 단순하고 기능적인 디자인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이 수립됨과 아울려, 새로운 기술과 재료를 이용하기 시작하였으며 플라스틱과 같은 대량 생산방식도 이용하였다.

그로피우스의 천재성 가운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각국에서 뛰어난 교수진을 불러 모아 강단에 서게 한 점이었다. 잇텐, 파이닝거, 칸딘스키, 파울 클레 등의 뛰어난 교수진에도 불구하고, 바우하우스는 학생 중에서 이렇다 할 화가나 조각가를 배출하지 못했고, 자유롭게 회화나 조각을 제작할 기회마저 줄어들어갔다. 그로피우스와 모흘리-나기는 1928년에 바우하우스를 떠난 후 새로운 책임자의 지도아래 보다 기능주의적인 성격으로 변모하였다. 바우하우스는 나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1933년 강제 폐쇄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가 이루어낸 디자인론, 미술과 산업 사이의 관계, 형식론 및 교수 방법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바우하우스에 몸 담았던 일원들이 나치의 압제를 피해 외국으로 뿔뿔이 흩어짐에 따라 서방세계, 특히 미국에 널리 전파되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5

   

베르니니: 성 테레사의 무아지경

17세기 이탈리아 조각가 베르니니의 <성 테레사의 무아지경>에 나타나는 바로크 양식의 특성에 대해 논하시오.<2000>

   

<성 테레사의 法悅>은 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의 코르나로 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해 베르니니가 만든 제단이다. 이 예배당은 베네치아 출신의 교황 코르나로의 주문에 의해 1645년부터 1652년 까지 7년간의 노력 끝에 완성되었다. <성 테레사의 法悅>은 베르니니가 직접 제작한 것으로 비범한 재능을 지닌 그의 다양한 능력이 완벽하게 구현되었다. 이 제단은 스페인의 성 테레사에게 봉헌된 것이다.

성 테레사는 16세기의 수녀로 그녀가 본 신비스러운 환영을 글로 쓴 유명한 책을 남겼다. 그 책에서 그녀는 천상의 환희를 느낀 순간을 이야기하면서 주님의 한 천사가 황금으로 된 뜨거운 화살로 자기 심장을 꿰뚫자 아픔과 함께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로 충만됨을 느꼈다고 한다. 베르니니가 표현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순간의 광경이다. 성녀는 구름을 타고 황금빛 햇살의 형태로 위로부터 쏟아지는 빛줄기를 향해서 하늘로 올라간다. 천사는 공손하게 그녀에게 다가서고 있으며 성녀는 기절한 채 황홀감 속에 빠져 있다. 배치된 방법이 교묘해서 이들은 제단이 제공하는 틀 속에 아무런 받침도 없이 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위쪽의 보이지 않는 창으로부터 광선을 받고 있는 듯이 보인다.

바로크 양식의 최고의 걸작으로 인정받는 이 작품은 어떤 작품보다도 바로크 양식의 특성을 잘 대변하고 있다. 바로크 미술은 고대 미술의 권위를 인정하지만, 보다 많은 다양성과 인상적인 효과를 살리기 위해 보다 극적인 효과를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의 모든 요소들은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외적인 수단을 통해 神性을 드러내려는 베르니니 예술의 경향이자 바로크 양식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반쯤 감긴 눈꺼풀 밑에 초점을 잃은 채 머리는 뒤로 젖혀지고 입은 반쯤 열린 황홀경에 빠진 인물의 표현은 그녀의 고통스런 환희의 강렬함을 똑같이 경험하는 옷주름의 찬란한 파동에 의해 강조되고 있다. 특히, 베르니니의 옷주름의 처리 방법은 아주 새로운 것이다. 즉, 고전적인 방식인 품위 있는 옷주름으로 흘러내리게 하지 않고 흥분과 움직임의 효과를 보다 강조하기 위해서 옷자락이 몸부림을 치듯 펄펄 날리게 표현했다.

또한, 조각과 회화가 서로 공존의 상태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조각과 회화사이의 선명한 구별을 하지 못하는 점 또한 바로크 미술의 특징이다. 조각과 회화는 건축과 결합해서 무대와 같은 복합적인 환각을 형성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그것이 놓여진 장소까지 포함해서 고려해야만 올바른 감상을 할 수 있다.

<성 테레사의 법열>을 포함한 코르나로 예배당의 다양한 요소들은 훌륭한 조화를 이루며 결합되어 조각가로서의 베르니니의 생애에 최상의 종합체가 되었으며 한 세기 반 동안 세계적인 경탄을 자아냈다. 그 후로 엄격한 신고전주의의 교리 때문에 이 작품은 바로크적인 과장된 표현의 가장 터무니없는 예로서 악명 높고 의심스런 작품이 되었다가 20세기 인들의 안목에 맞추어 재평가되고 당당하게 복권되었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5

   

샤르트르 성당의 고딕적 특징 <2009년 후기 簡>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9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는 샤르트르 대성당은 11294년에 있었던 화재 이후 새로 재건축되었다. 이 성당은 노트르담 성당의 5랑식-이중복도구조를 그대로 이어받아 전체규모를 조금 더 확대시킨 모습을 하고 있다. 샤르트르 성당은 무엇보다 전성기 고딕건축의 문을 연 건축물로써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뒤를 이어 13세기에 등장한 고딕양식은 세계 건축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높이 솟구친 내부를 가진 혁신적인 구조물을 만들어 내였다. 이러한 건축물을 건설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늑골궁륭(Libbed-vault)'과 '공중부벽(Flying-buttress)', 그리고 '첨두아치(Pointed-arch)'의 발명 덕분이었다. 이 덕분에 건축가들은 작은 창문이 달린 육중한 벽을 가진 로마네스크의 '전투적 교회'와는 달리, 커다란 스테인드 글라스를 설치한 창을 통해 밝은 빛이 들어오게 해 내부를 환하게 밝힐 수 있었고, 신랑의 높이를 더욱 높여 위로 상승하려는 수직성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전성기 고딕의 문을 연 건축물로써 샤르트르가 갖는 중요한 의미는 천장이 직사각형 4분 볼트로 처리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초기와 전성기 고딕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기존 정사각형 6분 볼트보다 직사각형 4분 볼트는 기둥간 거리를 넓힐 수 있는 성질을 지녔다. 이는 창문을 설치할 수 있는 면이 더욱 확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빛이 더욱 많이 들어와 실내를 더욱 넓어 보이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장미창문이 기존 신랑의 정면의 중앙 뿐 아니라 신랑의 측면에도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샤르트르 성당은 고딕양식의 건축 중에 스테인드 글라스를 가장 많이 사용하였고, 스테인드 글라스의 설치로 화려함과 아름다움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천상의 예루살렘의 광경이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고딕양식은 건축물의 구조 뿐 아니라 성당 외부 벽에 있는 조각들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샤르트르 성당의 대표적인 고딕 조각상은 서쪽현관과 북쪽현관에 있다. 서쪽 현관의 문설주에 부착된 조상들은 좁은 기둥의 몸체에 맞추기 위해 길게 늘어나 있으며 옷의 선도 몸체와 마찬가지로 가늘고 직선적이어서 사실적인 흔적은 거의 없다. 이에 반해 북쪽 현관에 있는 성상들은 하나하나 살아있는 듯이 묘사되어 있다. 왼쪽부터 멜기세덱, 아브라함, 이삭, 모세 등을 묘사하고 있는데, 조각상들은 성인들의 개별적인 특징을 분명하게 표시하고 있으며, 원주로부터 강하게 돌출되어 있고, 신체의 구조가 옷주름의 아래로 보이는 사실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결국 이 두 고딕조각의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고딕양식이 하나의 형상을 더욱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점진적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형상을 실감나게 묘사하기 위해 오래도록 잊혀져왔던 고전예술의 전통을 따르게 된 것이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5

   

서양 외광풍경화의 전통: 인상주의까지의 전개과정

서양 풍경화의 변천과 전개 과정을 서술하시오.< 2006 후기>

외광파(plein air painting) <2005 전기 簡>

   

서양의 풍경화는 근본적으로 관념적인 자연의 모습이며 실제의 경관을 그린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1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보기 어려웠으며, 대부분의 풍경화는 스튜디오에서 창작되었다. 이 전통은 19세기 후반에 인상주의가 대두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자연에서의 실경을 담은 외광풍경화는 인상주의에서 절정을 이루고 이후 자연의 외적인 형상에 만족하지 않고 내적인 면을 파고들어 추상화 되었다.

풍경을 그린 그림은 고대 이집트나 미노스의 벽화에서부터 그리스의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시대에 그려지지만 단순히 인물의 배경으로, 도식적인 모습을 띤다. 기독교사상이 유럽사회를 지배한 중시에는 정신세계가 중요시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자연이란 미지의 세계이고 두려운 대상이었고, 따라서 회화에서 풍경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고딕 후기에 들어서면 자연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하여 풍경화는 주제 자체가 풍경을 요구하는 작품에서 장식적이고 도식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며, 꽃이나 나무들이 종교적인 상징성을 갖는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중세 후기의 랭부르 형제의 <베리 공의 호화로운 기도서, 1409-15>는 중세의 상징성에서 탈피해 계절에 따라 변화는 경치를 사실적으로 관찰하고 그렸다. 채색필사본에 부분적으로 그려진 풍경화인 얀 반 아이크의<예수의 세례, 15초>는 플랑드르 특유의 사실적 풍경화를 시도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면 과학이 발달로 자연에 대한 호기심이 유발되어 자연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옮기려 하였다. 고전주의 전통이 강했던 피렌체의 회화는 이상화된 상상의 풍경을 추구하였으며, 이와는 달리 베네치아에서는 벨리니, 지오르지오네, 티치아노를 중심으로 목가적이며 시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편안하고 무르익은 풍경화가 발달한다. 북유럽의 르네상스회화는 극히 세부적 묘사에 치중하는 사실주의 경향을 보여 왔으며, 자연과 좀 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특징을 보였다. 콘라드 비츠의 <기적적인 물고기의 낚음, 1444>은 지형적인 사실성을 보여주는 최초의 풍경화 이다. 15세기 말 알브레히트 뒤러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여행한 기억을 수채화로 생생히 묘사하였다. <숲속의 연못> 16세기 말에는 가톨릭 세력의 감소로 종교화가 줄어들고 회화의 주제가 세속화 되었다. 브뤼겔은 계절에 따른 인간의 활동을 다루어 자연에 좀더 밀착되는 자연관은 엿보게 한다. <숲속의 사냥꾼, 1565>

17세기에 풍경화는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하게 된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는 고전주의가 정착되고 상상적이며 이상화된 풍경화가 계승되면서 특색 있는 화풍이 형성되었다. 고전적 풍경화의 전형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이탈리아의 안니발레 카라치의 고전성과 베네치아 화파의 시적인 분위기를 살리면서 새로운 풍경화의 방향을 제시한 회가는 니콜라 푸생이었다. 그의 풍경화는 엄격하고 정확하여 이전의 전통보다 더 고전적 풍경화를 창조했다. <포키온의 매장, 1648> 푸생과 같은 시기 로마에 거주하던 또 한명의 프랑스 화가 클로드 로랭은 푸생과 달리 야외에서 자연의 여러 변화를 관찰해 그려, 신선한 광선으로 공간을 깊숙하고 부드럽게 감싸면서 북유럽의 사실주의와 조화되고 있다. 그의 풍경은 17세기 네널란드에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림과 같은(picturesque)'이란 단어로 수식되는 풍경화의 대명사가 되어, 18-19세기 영국 풍경화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실비아의 사슴을 죽이는 아스카니우스, 1682> 프랑스에서는 루벤스가 과장되고 외향적인 전형적 바로크 양식을 보여주는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실경을 바탕으로 풍경화를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당시의 두터운 중산계층은 미술품 구입에 열성적이었고, 그들은 고전적 그림보다 자신의 실내에 걸어놓고 즐길 수 있는 조그마한 정물화, 초상화, 풍경화를 선호하였다. 따라서 야콥 반 로이스탈, 얀 반 호이엔 등과 같은 많은 풍경화가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시각적인 관찰 및 경험을 기초로 사실에 충실하고 미화하지 않은 풍경화를 그렸으며, 화면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는 하늘을 강조하고 시점을 낮게 잡아 지평선을 강조하였다. 그들에게 풍경화는 실제 풍경에 근접한 평범한 모습이라는 사고에서 이들은 로랭과는 달랐다. 야콥 반 로이스달<오버빈의 모래언덕에서 본 하를렘의 정경, 1670?>

18세기 이탈리아에는 유럽 각국에서 그랜드 투어 붐이 일어나면서 '베두테(vedute)'라는 유명 도시 및 유적을 사실 그대로 세밀하게 그린 풍경화가 탄생하였고, 폼베이와 헤라클레니움의 발굴은 고전주의를 부활시켰다. 로마에는 프랑스 아카데미 분원이 설치되었고 로마를 무대로 하여 화가들 사이에 외광스케치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자연에 관심을 보이는 낭만주의가 회화에도 파급되어, 18세기 중반부터 풍경화 붐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수채화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거듭해 19세기 중반에는 전성기를 맞게 된다. 그랜드 투어의 붐으로 여행에 관심이 국내여행의 붐을 일으켰고, 가보지 못한 지방의 경치를 그림으로 감상하는 '그림여행(voyage pittoresque)'종류의 책과 풍경화가 팔리게 되고 수채화가 생생한 하나의 작품으로 제작되었다. 리처드 윌슨은 로랭의 영향으로 광선이 스며드는 전원풍의 그림을 그렸고, 토마스 게인즈버러도 초기에는 네덜란드의 사실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풍경을 그렸으나, 후기에는 상상적이고 낭만적인 풍경으로 전환하게 된다.

19세기 초반에 영국의 풍경화는 이들에 의해 확고한 전통을 수립하게 되면서 자연서 느끼는 비장감, 숭고미 등을 보여주는 종류와, 그림과도 같은 아름답고 감상적인 종류의 두가지 새로운 미학을 형성하게 된다. 수채화가 일반에까지 인기를 끌게 되고 회화의 한 분류로 인정되면서 존 컨스터블, 윌리엄 터너와 같이 우수한, 풍경만을 전문으로 그리는 화가를 배출하게 되었다. 이들은 프랑스 화가들과 자주 교류했고, 자연과의 좀더 긴밀하고 직접적인 접촉을 권장하면서 네덜란드의 사실적인 풍경화 지식 및 수채화 기법을 가르쳐 주게 된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교량 역할을 한 화가는 보닝턴이었는데, 자연의 변화하는 순간적인 인상을 수채화로 화면에 빨리 기록하는 방법을 소개해 주었다. 또한 존 컨스터블은 아카데믹 교육을 받은 젊은 프랑스 화가들에게 붓질의 자유스러움과 표면의 생동감이, 안정감 있는 회화 구성 체계와 동시에 복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해주었고, 자연에 나가 직접 유화로 스케치하는 방법도 흥미를 끌었다.

프랑스에서 외광풍경화의 전통은 1830년대 바르비종화파에 의해 정착되었다. 여기서 그림을 그리던 화가는 카미유 코로, 테오도르 루소, 장-프랑수아 밀레, 도비니 등이 있었다. 이들은 아직까지도 스튜디오에 돌아와서 작품을 완성하는 태도에서는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들 작품에서부터 이전과 같은 '완성된 작품'과 '스케치와의 경계선이 모호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바르비종파의 도비니는 자연주의와 인상주의를 연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스케치뿐 아니라 하나의 작품과정 전체를 야외에서 완성하였을 뿐 아니라, 수면에서 교차하는 빛을 잡기 위해 강에 띄운 배 위에서 제작하기도 하였는데, 후기의 테크닉과 정신은 초기 인상주의자들과 상당히 가까웠다.

거칠고 깎아지른 절벽과 훌륭한 구름의 형태, 바다를 찾아 노르망디 해안 일대에 몰려든 생-시메옹 화파가 있다. 이는 위에, 이자베이, 용킨드, 외젠 부뎅으로 이들은 인상주의의 선구자들로 불리운다. 용킨트는 같은 장소에서 순간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분위기 들을 포착하여 인상파들처럼 생생하게 광선과 대기의 순간적인 효과를 화면에 기록하고 있다. 외광풍경화의 전통이 완전하게 자리 잡은 것은 부댕에 의해서이다. 그의 가벼운 소품들, 특히 그의 해변가 그림들은 바르비종의 화풍을 따른 것이었는데 거기에 색채의 생동감이 더해져 인상주의적 효과를 낳고 있다. 용킨트, 부댕, 코로, 루소 등이 닦아 놓은 외광풍경화의 실습은 곧이어 모네, 르느와르, 피사로 등 인상파 화가들에 의해 절정에 이른다. 이들은 처음으로 야외에 이젤을 놓고 그 자리에서 완성하였다. 그러나 인상주의가 끝나감과 동시에 이후의 화가들은 자연에 대해 느끼는 주관적인 감정표현에 주력하게 되며, 이것은 19세기 말 이후 미술의 주관화추상화 그리고 표현주의적인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게 하는 주원인이 된다. 따라서 외광풍경화는 하나의 미술전통속에 자리를 잡게 되며 그 위에 뻗어간 20세기 새로운 미술은 내면풍경화로서 또 다른 전개를 하게 되는 것이다. 부댕,<트루빌의 비치, 1868>

   

외광파

외광파(plein air painting) <2005 전기 簡>

외광파는 특정한 유파를 가리키는 경우엔 인상주의가 이에 해당되나, 보다 폭넓은 개념으로서, 인상파의 수법에 의하지 않더라도 실외의 공기와 자연 광선에 의한 회화적 효과를 표현하기 위하여 야외에서 그리는 화가들을 가리킨다. 이 운동이 일어난 것은 19세기 후반으로 그때까지 유럽의 화가들은 대부분 광선이 적은 아틀리에에서 그렸고, 야외에서 모티브를 취재하더라도 아틀리에에서 마지막으로 손질을 가해 완성하는 것이 통례였다. 색채는 다갈색의 나뭇가지, 녹색의 나뭇잎 등 이렇게 고정된 색채개념에 지배되어 어두운 화면을 지니며, 야외광선에 비친 변화하는 색채의 아름다움을 포착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한 대상의 고유색을 신봉하는 고정관념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는데 19세기 사질주의 사조가 일어나면서 자연관찰이 정밀하고도 객관적이 된 결과 야외의 밝은 빛의 효과를 의식하게 되니 이것을 실제로 나타내기 위해서 직접 야외에서 제작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19세기의 영국 화가 컨스터블과 터너는 아틀리에에서 야외로 나와 자연광선에 의한 풍경의 변화하는 양태를 밝은 색을 써서 직접 그리기 시작하여 외광파의 선구자가 되었고, 이는 아직까지 역사화와 같은 관학적인 그림이 발달했던 프랑스의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9세기 중기 마키아이오리파의 화가들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인상주의 화가들에 선행하여 바르비종파의 화가들과 노르망디 해안에 모인 생-시메옹 화파들이 있었고, 이들은 모두 인상주의의 선구자로서 이후 인상주의의 태동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특히 바르비종파의 도비니는 자연주의와 인상주의를 연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후기의 테크닉과 정신은 초기 인상주의자들과 상당히 가까웠다. 그는 스케치뿐 아니라 하나의 작품과정 전체를 야외에서 완성하였을 뿐 아니라, 수면에서 교차하는 빛을 잡기 위해 강에 띄운 배 위에서 제작했는데, 이러한 제작 태도가 후에 마네, 피사로, 시슬리, 모네 등 인상주의의 화가들에 의해 채용되었다. 또한 생-시메옹 화파 중의 외젠 부댕과 용킨드는 인상주의의 주도적인 선구자가 되었는데, 이들의 가벼운 소품들 특히 해변 가 그림들은 바르비종 화풍을 따랐으나, 거기에 색채의 생동감이 더해져 인상주의적 효과를 낳고 있다. 그리고 색채분해와 여러 가지 색채의 병치(竝置)에 의해 태양빛에 비친 색채현상을 묘사하려고 한 마네, 훗날 그의 영향을 받고 이 파 특유의 화법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 모네, 피사로, 시슬레 등이 있으며 그들에 의해 정점에 달하였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5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운동 <1999 전기 2006전기 簡>

서양미술사에서 '아방가르드'미술 운동을 하나 예로 들어 설명하고 '아방가르드'의 개념을 정의할 것.<2005 전기>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 사회는 봉건 제국에서 '민중을 위한 공화국'이 되었다. 그 이전의 러시아는 수세기 동안 문화적 영감을 유럽에서 받아왔다. 러시아 미술에 남긴 가장 큰 업적은 (비잔틴 전통에 뿌리를 둔) 성상화(Icon)였다. 하지만 19세기에는 주로 사실주의, 상징주의, 아르누보같은 서구의 양식을 기초로 하면서도 러시아의 특성을 살린 다양한 작품으이 문화적 중심지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혁명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결성된 '예술세계'라는 그룹은 농민들의 토속미술 전통에 아주 가까운 경향을 띠고 있었다. 점차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의 실험적 작품들이 모스크바로 들어왔고, 1908년 전시회에는 후기인상주의 뿐만 아니라 나비파와 야수파까지 포함되었다.

혁명적인 러시아 추상 운동을 이끌었던 두 선구자는 생생하고 강렬한 선과 과감하고 표현적인 평면적 패턴들을 사용했던 나비파와 야수파의 기법에 흥미를 가지고, 러시아 민속미술의 기법과 작품세계에 이를 접합시켰단 바로 미카일 라리오노프(Mikhail Larionov)와 그의 파트너 나탈리아 곤차로바(Natalia Goncharova)였다. 이들이 루브키(lubki: 대중적 목판화)와 그라피티에서 영감을 받아 이룩한 직접적이고 거친 표현은 독일 표현주의 운동조차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들은 1911년에서 17년 사이에 러시아에서 급속히 진행됐던 구상에서 비구상으로의 발전 중 한 단계를 말하는 것으로 모스크바를 유럽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지로 부상시켜 주었다.

이후 모스크바의 추상운동은 말레비치와 타틀린에 의해 계속되었다. 레닌은 아방가르드적인 예술사조에 관대했다. 그는 아방가르드 미술을 통해 새로운 시각적 매체를 개발함으로써 거의가 문맹인 대중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전파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스탈린이 이러한 예술을 금지시키기 전까지, 이 모험심 넘치는 화가들은 미술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혁명을 이끄는 아방가르드 세력이었다. 카시미르 말레비치(Kasimir Malevich)는 그의 작품에서 시간이 갈수록 기하학적 경향이 매우 급속히 증가되어 1915년에는 최초로 기하학적 요소들로만 구성된 절대주의 작품을 전시하였다. 그의 기하학적 형태들은 복합했는데 그 이후 복잡성으로부터 극단적인 단순성과 순수함으로 나아가, 1917년에서 18년 사이에는 순수한 본질만 남는 상태까지 진전시킨 <흰색 위의 흰색, 1918>역작을 제작하였다. 그가 이룬 비대상으로의 발전은 몬드리안과는 달리 실제 자연의 형태로부터 추상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관념적인 기초로부터 추출된 것이었다. 이는 전통적인 회화에서 보이는 회화와 무관한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회화를 최소화 시켜 회화의 가장 궁극적인 본질로 나아간 것이다.

블라디미르 타틀린(Vladimir Tatlin)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에 제일 먼저 동참했으나 절대주의를 버리고 보다 엄격한 구성주의적 개념을 추구하게 되었다. 구성주의는 종합적 입체주의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는 파리로 가서 피카소의 3차원적 구조에 적용된 콜라주 기법의 실험을 보게 된다. 실생활에 사용되는 매체로 그 특성에 잘 맞는 형태를 만들어서 공간속에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조각이었다. 그는 러시아로 돌아와서 전통적 조각의 틀이나 대좌의 개념을 내던진 부조 구성물을 만들게 되는데, 매체자체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제작과정이 쉽게 유추 가능한 그의 작품은 러시아 구성주의를 잘 나타내준다. 그의 작품인 <제3 인터네셔널 기념물>은 모스크바에 한가운데 세워질 예정이었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유리와 철골로 된 이 개방된 구조물은 인류 사회가 점진적으로 상승하면서 진보하고 있음을 연속적인 나선형을 통해 상징화하고 있다. 1920년 이후 그의 구성주의가 실생활을 위한 사회주의적 디자인을 하는 생산주의와 합쳐지게 되자, 미술은 유물론적으고 기능적인 목적을 위하여 생활에 적용되었고,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과학기술의 진보에 의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의 꿈은 깨지고 말았다.

   

아방가르드

   

아방가르드는 전위, 선두, 선구 등의 뜻으로 프랑스의 군사 용어인 전위(부대의 전초로서 선발된 소수 정예부대)에서 나온 말이다. 정치적 의미로 오늘날에는 좌익과 같은 말로 특히 예술상으로는 인습적인 권위와 전통에 대한 반항, 혁명적인 예술 정신의 기치를 내걸고 행동하는 예술 운동을 말한다. 문화적인 혁신자들의 어떤 신조를 나타내기 위한 특정의 주의나 형식을 가리키는 용어라기보다는 신시대의 급진적인 예술 정신 전반에 걸쳐서 사용되는 말이지만 특히 제 1차 세계대전, 후의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를 중심으로 한 조형 활동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이들 활동의 배후에는 기계 문명의 발달과 무의식 세계의 규명, 원시 예술의 발굴, 사회의식의 확대 등 신시대적인 여러 가지 요인이 내포되어 있다. 또한 이 말은 반자연주의라는 점에서 동시대의 문학, 연극, 영화 등의 분야에 있어서도 그 실험적, 혁명적인 행위에 대해서 쓰여 진다.

칸딘스키는 그의 저서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에서 미술가들은 좀 더 위대한 정신성을 향해 인류를 고양시키는 삼각형의 최고 정점에 있다고 하였고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아방가르드 미술을 대중문화와는 거리가 먼 필연적으로 엘리트주의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몇몇 저술가들은 단지 미술의 전통적인 형식뿐만 아니라 미술이 존재하는 제도적 상황에도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현대 미술에만 이 용어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5

   

아카데미의 성립과 발전

19세기 프랑스 미술의 아카데미즘 또는 아카데미즘의 역사적 기원과 성격에 대해서 논하시오.<1999>

고대 아테네 플라톤의 Academia에서부터 시작된 이 의미는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신플라톤주의가 유행하면서 철학이나 문학 모임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미술을 인문학의 영역으로 정당화시키려는 알베르티나 레오나르도의 미술이론은 16세기 후반기에 본격적인 미술 아카데미의 시작을 알렸고, 이는 지오르지오 바자리(Giorgio Vasari, 1511-74)와 토스카나의 대공 코지모 데 메디치(Cosimo de'Medici)가 이미 존재하던 콩파니아 디 루카(Compania di Luca)를 개혁해 설립한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Academia del Disegno)라고 할 수 있다. Disegno 라는 용어는 그대로 번역하면 디자인(design)이지만 여기서는 회화, 조각, 건축을 이루는 구상, 드로잉, 창조력 등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단어로 이해해야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철저한 이론 교육에 중점을 두었던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의 교육과정은 국가적인 후원을 업고 미술가들이 장인의 위치에서 벗어나 전문인으로서 자신들의 분야를 관장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즉, 아카데미아 회원이라는 것은 미술가들에게 사회적 신분상승을 의미하는 것으로 더 이상 주문을 받아 작업을 하는 장인이 아니라 지적인 진실을 추구하는 자유인으로서의 입지를 확인시켜주는 하나의 증거였다.

이후 로마, 파리, 런던 등지에도 미술 아카데미가 설립되는데 특히 프랑스에서는 1648년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Acade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가 설립됨으로써 최고의 권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는 왕실의 직속기관이었으며 원장은 왕에게 복속되어 있었다. 그림의 주문과 전시는 아카데미가 관정하였고 당시 가장 강력한 주문자였던 왕과 귀족의 주문을 받기 위해선 화가로서 아카데미의 멤버가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해졌다. 당시 가장 중요한 미술전시회는 salon展으로 2년에 한번 루브르에서 열렸다. 당시 상류층 지식인들은 살롱전의 작품에 대해 비평문을 쓰고 팜플렛으로 발간하여 여론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살롱의 영향력은 상상이상으로 강력하였다.

이 아카데미에서는 르네상스시기부터 이어져 온 전통인 기하학과 비례에 의한 명확한 공간을 강조하였고 미술의 장르들을 위계질서로 나누어 도덕적인 교훈을 줄 수 있는 역사화를 가장 고상한 주제로 여기는 교육을 지속해 나아갔다. 그러나 길드의 규제로부터 미술가들을 자유롭게 하려는 이탈리아의 아카데미와는 달리 프랑스의 아카데미는 루이 14세와 재상 콜베르의 주도 下에 절대국가의 중앙중심주의와 연결되어 문화를 통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프랑스 아카데미의 이상적인 양식은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를 기본으로 하였다. Nicolas Poussin의 양식은 로얄 아카데미의 모본으로 여겨졌고 후에 Ingres를 아카데미양식의 정점으로 보아, 학생들은 모두 이 양식으로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 점차 아카데미는 획일화된 예술, 공식화된 미술이라고 인식되었고 아카데미 미술가들은 사회적 지위와 부를 얻은 대신 독립성과 창의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프랑스의 아카데미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로 바뀌었고 아카데미의 아성은 흔들리게 되었다. 회화, 조각, 건축과 같은 순수미술 중심의 아카데미는 그 후 수공예, 응용미술이 다시 미술의 중심으로 들어오면서 과거와 같은 교육을 지속시킬 수 있는 의미를 잃어버렸다. 19세기 중반 이후 미술후원자들이 국가, 교회 중심에서 개인이나 화랑 등으로 바뀌면서 미술작품의 유통은 자유경제체제로 바뀌었다. 이제 화가들은 아카데믹한 교육에 반발하면서 다른 화가들과 구별되는 독창적인 양식을 추구하게 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아카데미, 아카데미시즘은 고루하거나 보수적 양식의 부정적인 의미로 인식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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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자의 초상을 비롯해..

영나쌤이 문제를 내던 시대의 내용들이다.

혹시 기출소스를 가지러 내 블로그에 오셨다면 영나샘것은 잊으시라..

-16C~ 17C:강력한 국가들이 등장 <스페인과 프랑스> 왕의 초상화들이 많이 나타난다.

   

16세기 베네치아

티치아노-1548 율버그의 찰스 5세

당시 최고의 색채화가 티치아노

베니스는 무역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안료를 수입하는 중계도시여서 값싸게 안료 구할수 있었음.

다른 나라의 르네상스보다 향락적 분위기

이 그림에서는 찰스 5세가 몸이 매우 약한 사람이었지만 기마상을 그림으로써 용맹성을 돋보이게함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포즈)

   

유화 15c부터 발견 예전의 조그만 그림은 템페라화임 유화의 등장 이후 나무나 천 위에 그림그리기 시작 새로운 색을 만들 수 있고 광택이 나며 텍스쳐의 표현이 자유로워지고 견고해짐

   

얼굴보다 색채와 아름다운 풍경에 더 신경쓴 분위기

17세기 스페인

디에고벨라스케스-1650 인노켄티우스10세

통치자 앞에서 그리는 초상화는 미화되어 있기 마련인데 벨라스케스는 자신의 느낌대로 그림 이는 어느정도 사실과 해석이 공존함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얼굴(악몽의 대상)

   

이 당시 교황은 굉장히 의심이 많은 강력한 힘의 소유자. 번쩍거리는 빨간색과 하얀옷의 조화

   

약간 움직이는 듯한 손

17세기 영국

안토니 반다이크

-1635 찰스 1세의 초상

영국 귀족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린 안토니 반다이크 뛰어난 초상화가라 불리는 이유는 왕을 돋보이게 하는 방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1.모자로 가린얼굴-> 얼굴이 눈에 제일뜀

2.말과하인의 등장->높은지체 상징

3말도 경배하듯 숙이고 있음

4.나무도 왕을 호위하는 느낌

5.하인들 2명을 겹쳐서 그린다.

17세기~18세기프랑스

루이 14세의 초상

-1701 리그

백합 모티브는 루이 14세 왕가의 문양

왕의 권위 상징문장이 다 나옴

   

   

   

1800년대 프랑스: 혁명의 이미지

나폴레옹의 집권

1800년대스페인의 엉망진창인 정국

자크루이 다비드: 알프스를 넘어가는나폴레옹 (1800)

나폴레옹은 대중앞에서 자기 이미지를 만들기 좋아했던 인물. 정복자이면서 통치자의 가장 적합한 기마상의 motive 실제로는 당나귀를 타고 넘지만 큰 말을 타고 넘는 모습으로 그림 뒤에 군인은 쪼그맣게 그리고자기만 크게 그림 알프스 위이자 미래를 약속하는 이미지.

한니발: 알프스 보나파르트 샬르마뉴 칼대제의 이름을 동시에 왼쪽편돌에새김으로써 동일시

고야 : 카를로스 4세의 가족초상화(1800년대)

뒤에 화가의 모습과 화폭이 있다.고야는 당시 궁정화가 얼굴의 모양을 자세히 보면 볼수록 교만해 보이고 겸손해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면모는 반짝거리는 옷등으로 무마 고야가 그들을 조롱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게 이상함

고야 자신은 이들과 다르다는뉘앙스 (화가의 자율성-근대에 가까움)

-20c 에 들어 개인숭배가 줄어 들면서 초상화가 줄었다.

ehrler 총통 1939 건축도구를 히틀러 옆에 그림으로써 히틀러가 일종의 새로운 제국의 건축가로써 그려지다.

   

-Lenin, Moscow

사회주의 국가 소련 중국에서는 통치자의 두상이 많이 새워진다. 엄청나게 많은 레닌의 동상은 많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레닌 자신은 이런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로버트 라슈엔버그 1960

대통령 꼴라쥬

자기와 특별히 의미 있지 않은 잡동사니를 붙임

단지 하나의 이미지중의 하나로 케네디가 들어간다.

통치자 우상시 하는 이미지는 아니다.

   

   

00파일 이탈리아 르네상스(피렌체)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10

   

00.이태리 불란서의 신의 이미지.HWP 

그치만 앞에 아마르나 양식이나 뭐 헬레니즘 이런거나 아니면 아무튼 비잔틴이런건 따루 정리를 하셔야 되요

<이태리 불란서의 신의 이미지>

   

<전기르네상스>

①마사치오

-brancacci chapel 마사치오 성전세 1425~ 28

brancacci의 개인용 채플임 그린 목적은 세금좀

더 잘내라는 메시지

선원근법과 풍경의 색과 앞의 전경색차이로

나타나는 대기원근법을 다 적용함 그러나

아직도 중세적 요소-> 한 장면에 여러 가지

이야기

   

-에덴에서의 추방: 사람크기의 적나라한 누드표현

르네상스를 뜻함

   

  

②도나텔로

-성조지 1415~ 17

당당하고 이상적 아름다움을 지녔다. 그러나

그저 이상화 되지 만은 않은 상황을 파악하려는 인물이라는것

얼굴은 젊고 이성적으로 다시 그리스 로마 청년상으로 변하였으며

기사로서 방패를 들고 있고 밑부분의 부조는

대기 원근법과 선원근법이 들어가 있다.

-다윗

중세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고대 이후 첫 번째 등신대

누드 조각상 그러나 얼굴은 그리스 조각보다 사실적임

그리스의 콘프라 포스토 자세를 하고 있음

비례는 아름다운 신체 비례

완전히 성숙되어 보이지 않는다.(12~13살: 도나텔로 양성애자?

다윗이 처음 자신의 신체 능력을 깨달은 장면

르네상스인들이 자신의 신체능력을 깨달은 장면?)

흐르는 듯한 윤기의 청동질감을 갖고 있음

승리한 뒤의 다윗으로서 도나텔로가 투스카니 지방의 한

목동을 모델로함

   

   

③브루넬레스키

-산로렌조 교회:

높이가 낮아지고 수평으로 잘린 천장. 기둥등도 심플해졌다.

코린트식주구. 정확한 수학적인 비례와 기둥과 기둥의 사이

를 1로 보았을 때 기둥서 코린트 양식도 1 (정사각형)

그 위에 반원의 형태 굉장히 수학적 비례 파르테논 신전

등에 보이는 비례가 나타난다.

고대로마 연구를 통하여 교회에 적용했다.

   

why 수학: 이 당시 수학은 명확한 진리를 나타낸다고

생각하였다.

-파찌 채플: 메디치 가문과 경쟁하던 가문 정면 파사드

형태가 개선문 같다. 역시 1대1의 비례가 되풀이됨

   

④종교화의 인간화

1. fra fillip lippo 배경이 일반 가정집과 같으며

마리아에게 후광이 없다.

그이전보다 더욱 인간적인 마돈나의 형태로서

모든 것이 더욱 인간화됨

사실적이지만 부드러운

   

2.마사치오

후광이 있으며 물리적 육중함과 집중된 힘을 읽을 수 있다.

명암의 대조가 너무 세다.

   

   

3. Fra Angelico 수태고지 1440~45

매우 수학적인 건축이다. 일직선상에 원근법을 적용

원근법 : 원근법은 기본적으로 휴머니즘이 기본바탕

내가 본 장면 시야에서 건축과 인물을

조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piero della francesca 부활 1463

: 이사람은 은빛이 비치는 듯한 그림을 그리는게 특징이었다.원래는 예수의 오른쪽이 예수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에게서 보는 오른쪽이 예수 이후의 세계 암시 (르네상스 시대의 휴머니즘) = 왼쪽은 황폐한 숲 오른쪽은 울창한 숲

밑의 4명의 인물 측면/정면/3/4면/뒷면

뒤로 젖힌 얼굴의 사람은 원근법에 대한 도전

삼각형구도: 정적이며 안정감을 주는 느낌이다. 예수의 얼굴이 거의 정면 부동적 영원한 조각적

중량감과 조각적인 느낌은 프렌체의 특징이다.

     

   

⑤1400~1500 초기 르네상스 => 콰트로첸토 후기에 보티첼리가 나옴

1. Botticelli 비너스의 탄생 1482

조각적이지 않은 누드 (why? 명암 의 대조가 엄청 강하지 않기 때문)

원근법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당시 피렌체는 원근법이 붐이었음

어떻게 보면 유니크한 화가이다. 지

적이면서 수줍은 비너스는

(why? neo 플라톤학파의 영향 )

네오 플라톤 학파란: 정말 플라톤을 잘 이해했다기 보다는 플라톤과 + 기독교의 결합으로 미(美) 를 통하여 기독교 하나님의 세계가 합치 될 수 있다. 기독교적인 비너스 왼쪽은 제피로스라는 북풍의 신

사실적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선 자체의 흐름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섬세하지만 약하지 않고 생동감있는 그림

Primarena봄 1478

왼쪽에서 시작해서 지그재그 하는 구성

강한 명암의 대조가 아니지만 구불구불한 선과 옷의 아름다운 흐름이 느껴진다. (특히 삼미신)

===> 중요한건 보티첼리의 이러한 원근법이 느껴지지 않는 그림은 당시 피렌체 스타일이 아니었다는거

   

<전성기 르네상스>

①레오나르도 다빈치

1.암굴속의 마돈나 1485

   

화가라기 보다는 과학자의 면모가 있는 "르네상스 인간" 이사람의 note (수기원고) 원래 왼손잡이였기 때문에 왼손을 씀 거울에 놓고 봐야 한다.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보통 사람같은 마돈나(후광이없다.)

그러나 범인과는 다른 매우 성숙해 보이는 이상적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암벽의 모습이 과학적으로 묘사되어있으며 암굴에 자라는

식물들만 나오는 것을 볼수 있다. (경험론자)

   

삼각형 구성, 얼굴만 보면 원형의 느낌이다

심리적 신체적으로 하나의 그룹인 느낌이며 오른쪽의 천사가 우리쪽을 보고 있음으로 해서 관객역시도 연결되는 효과

왼쪽애기는 요한으로서 축복을 받아들이는 동작을 하고 있고 오른쪽 애기는 축복을 내리는 동작을 하고 있다(축복의 동작---> 예수나 하나님만 가능함)

정확한 선이 아닌 스푸마토-> 경계선이 부드럽다.

레오나르도의 얼굴은 신비롭게 느껴진다.

   

=======> 그러나 첫 번째 그림이 퇴짜 받음 런던버전은 그 이후에 "후광" 을 포함하여 그

린 것으로 오리지널이 아닌거다.

2. 최후의 만찬 1499

밀라노 수도원의 식당그림이다.

예수님 홀로 있다-> 앞으로 홀로 받을수난암시

이전의 최후의 만찬에서는 유다가 따로 떨어져 나가 있었으나

성경을 토대로 이들 제자의 성격을 하나하나 연구하여

성미가 급한 성 토마스 맨 먼저 손가락 치켜들고 예수께 묻는다.

제일 어린 애제자 요한

모든 선이 예수의 머리에서 만나고 뒤의 3개의 창문은 하늘을 등지고 있어 성3위일체를 뜻한다.

   

예수는 반듯한 삼각형이고 예수의 얼굴을 중심으로 완벽한 원이 이루어진다.

마치 실제 인간사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을때의 반응은? 이런 느낌

   

②라파엘

1.1505 마돈나의 초원 (메이비 이거?)

2. 1505 그랑두카의 마돈나 ============> 르네상스 최성기와 일치하다.

그는 종합의 귀재 이제껏 발견을 종합함(르네상스의

특징을 잘 나타냄)

   

아기가 진짜 애기 같다.

   

보다 인간적 자애로움 모성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하였다.

    

3.1510~1511 아테네 학당

   

고대 그리스 아테네 문명을 찬양하는 일종의 상상화이다. 깊은 공간을 내다 보는 듯한 원근법의 자유로운 사용이느껴짐 . 같은 건물 내에 천지 창조 천장화를 그리고 있었다.

라파엘의 아테네 학당의 자세 등은 당대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았다.

   

   

=> 사족을달기(2004년도 전기) 흔히 라파엘을 르네상스 미술정신을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한 화가라고 한다. 이 말의 의미를 그의 작품을 예를 들어 설명하시오

제 생각에는 라파엘은 그의 선배 거장인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업적을 반씩 섞은 사람입니다. 다빈치의 그림은 미켈란젤로의 그림보다 좀더 회화적이고 안정적인 느낌을 주지요. 그것은 선을 스푸마토 기법을 이용하여 뿌옇게 처리해주고, 르네상스의 창안이 삼각형 구도를 적극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건 위의 그림에서 확인하실 수 있을거에요

   

근데 미켈란젤로는 그렇지 않다는 거죠 굉장히 조각적입니다. 그는 회화보다 조각을 더 좋아했는데 조각이 더 신에 가까운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조각을 "대리석 안에 갇혀있는 인물을 해방시키는 것" 이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의 그림은 이런 그의 생각이 반영된 탓인지 마치 조각을 그린 듯한 효과를 내고 있지요.

   

결론은 라파엘은 그란두카의 마돈나같은 그림은 레오나드도 다빈치 식으로 아테네 학당은 미켈란젤로식으로 그린것.

   

   

③미켈란젤로

  

  

1.미켈란젤로 다윗 1501~4

머리가좀 큰이유는 밑에서부터 보도록 고안되어있는상이기때문

그림, 건축, 조각을 다했지만 그는 자신이 조각가라는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도나텔로의 다윗과의 차이는 가장 신체적 절정기의 다윗이라는 점이다. 또한 돌을 갖고는 있는데 던질까 말까하는 갈등을 그리고 있다.

굉장히 큰 거상으로 4m? 가량 원래 야외에 놓여지게 되어있던

것이지만 오리지널은 미술관에 있고 광장에 있는 것은 카피이다. 커다란 대리석이 필요했기 때문에 조각가로서는 대리석 확보가 중요했을 것이다. 이 사람은 남이 하다만 조각을 이용하였으며 때문에 다윗의 옆은 상당히 얇다. (덩어리 부족)

기본적으로 관람위치는 르네상스에서는 앞에서만 본다(정적인조각) 그러나 바로크에 이르러서는 관람자의 위치는 사방팔방

   

콘트라 포스토의 자세는 그리스 조각의 영향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리스 조각과의 차이는 몸 전체가 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는 편안한 반면 얼굴 표정도 개성

적 양식이기 때문.

미켈란 젤로는 불필요하리만큼 신체를 불편하게 보이도록

그림을 그리거나 만드는 경향이 있다. (성격탓인듯)

   

  2.미켈란 젤로 시스티나채플

   

이런류의 대형그림은 후원자가 있는 상황에서만 나올수 있는것

1508~1512(천정화를 그림)-두개 사이에서 양식의 차이가 나타남-1535~1541(벽화그림)

-천정화(1508~1512)

   

   

  

  

   

   

부분샷:

르네상스란: 옛날 그리스 로마의 재생의미. 그러나 아직까지도 종교적 사회이다. 중세 시절 의 종교적 영향+인간을 아름답게 생각한다. 르네상스는 중세의 부정은아님/

다시 그리스의 누드 (이상적 인간형이 나타나면서)

신도 아름다운 사람같이 만들어 버림. 이 장면은 아담을 떠나보내는 장면이다.

아담의 몸은 육중함에도 불구하고 얼굴에는 힘이 없는 반면 백발노인인 하나님

의 얼굴은 역동적기운.

프레스코화로써 천정에 그려있다.

-1535~1534 시스티나 성당 최후의 심판

본인은 조각가라고 생각하던 미켈란젤로이지만 율리우스 2세 때문에 천장화를 그리고 그후 벽화를 그렸다. 이 그림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중앙의 인물로서 자비로운 예수그리스도가 아닌 결의에 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교황권이 흔들리던 당시 상황과 연관이 있다.

(루터) 매우 어지러운 시기로써 르네상스의 원근법이 사라지고 전반적으로 중세적 느낌이 다시 나타난다.

예수 조금 아래쪽에 바톨로메오(껍데기가 벗겨져 순교한 인물)는 항상 자신의 껍질을 들고 다니는데 이 껍질에 미켈란젤로는 그의 자화상을 그려넣음. 이것은 신체보다 다시 정신것만 추구하는 중세적 분위기를 암시함

전반적으로 인물들이 몸이 커지고 허리가 비대해진다. 이는 미켈란젤로의 후기양식이다.

   

밑에는 지옥도임 공포에 찬 영혼들과 배타고 오는 악마 등 실질적으로 사람이 처음 이그림을 접했을때 보는 장면은 예수의 그림이 아닌 지옥도 부분 . 재미있는 점은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 가장 잘 보이는 부분은 뱀이 뚤뚤 말고 있는 사람인데 이 사람의 얼굴에 추기경의 얼굴을 그려넣었다. (맨날 잔소리하던 인물)

  -----> 지금까지는 피렌체의 르네상스임

   

   

베니스 르네상스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16

   

베니스의 르네상스

<베니스의 르네상스: 베네치아 는 당시 무역의 중심지/ 중계무역의 도시

때문에 베니스의 물감은 비싼 물감이 조금 쌌음 그런탓인지

베네치아의 르네상스는 보다 향락적이며 색채가 화려하다.

물질적인 분위기가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베니스에서는 이상하게 풍경화가 발전하였다.

1.티치아노, 페자로 가족과 마돈나(1526)

   

마돈나와 아기예수

천국의 수문장 베드로(열쇠)

성프란체스코

페자로 가족들(맨오른쪽 밑에-> 1526년 쯤 되면 옛날에는 종교화에 사람이 들어가지 않았으나 이때는 완전히 세속화되어서 사람이 막 들어간다.)

   

대각선 구도의 강조: 역동적 느낌

아기천사가 날아다니고, 파란하늘, 햇살이 따뜻함

   

기존의 마돈나 그림은 마돈나가 중앙에 있고 양옆에 성인이 있거나 이런식 으로 비례가 맞게 했지만 티치아노의 경우 색으로 비례를 맞춘걸 알 수 있다.

전반적으로 구도가 오른편으로 쏠림에도 불구하고

왼쪽 오렌지색 깃발이 비례도 맞고 화면에

신선함도 줌

그는 레오나르도의 "소묘실력" 만큼 "물감" 을 잘 다루었다.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여성의 피부 vs 시트

붉은 천 vs 흰천

두꺼운 우단 커튼

   

==> 감각적인 그림

   

비너스가 빤히본다. 실제 세계의 한여인같은 느낌 그냥 여자 그려놓고 제목만 붙인게 아닐까?

와상-> 드러누워 있는상

   

페미니즘미술사적 견지에서 여성의 드러누운 상은 일종의 핀업걸?

가장 많이 서양 미술사에서 그려진 것으로써 invite 의 의미

남성을 위해 그린 남성의 그림

--> 여자는 드로잉 연습도 할 수 없었다. (왜? 누드화로 연구하니가)

주로 르네상스 시기 여성 화가들은 아빠가 화가이거나 한 경우

거의 99%가 가 19세기 까지 남성화가 여성화가들은 온리 정물화와 초상화

   

   

플랑드르와 독일의 르네상스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18

   

<플랑드르(네덜란드 , 벨기에)의 르네상스>

Master of Aemalle 또는 Robert Campin, Merode

제단화 1425~ 28

실제 얼굴에 가까운 얼굴들이 나타난다.

오른쪽의 요셉은 쥐 덮을 만든다. (악마들을 잡아들일 그리스도 의미)

왼쪽의 주문자는 문 밖에 있다.

가운데 방에 초에 촛불은 꺼졌고 백합이 있다.

사람들의 주름이 매우 독특-> 실제감 이 x

======> 원근법 적용이 안되 있다. 시선이 매우 부자연스럽다.

방이 교회 사원이 아니고 중산층의 집 가구등 물건이 잔뜩

정물이 훨씬많다.

세속화로의 종교화가 여기서도 그려지고 있다.

중요 point: 플랑드르의 원근법은 아직 발달하지 않았다.

또한 정물을 통하여 함축된 의미를 전달한다.

사실주의 화법 (얼굴만 봐도 훨씬 실제 얼굴에 가까운 얼굴들 등장)

세밀한 표현 (옷, 주름 장황)

공간과 인체의 상관 관계가 매우 어색하다.

   

   

①얀 반 에이크, Jan van Eyck, Arnolfini의 결혼 1434

유화의 사용, 깊이감 있고 보석 같은

사실주의의 대가인 반 아이크는 네덜란드에 온 이탈리아 상인 아르놀피니와 그 신부의 결혼식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뒤의 벽에 걸린 거울에는 서약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화가인 판 아이크 자신의 모습도 반영

거울 위에 " 얀 판 아이크가 여기 있다. 1434년"이라고 쓰여져 있는데. 이는 화가가 이 결혼식을 증명하는 입회인임을 나타낸다. 그림 속에 그려진 모든 사물들은 이 그림의 주제인 결혼의 신성함을 상징하고 있다.

-삽살개: 충성

-대낮인데도 오직 하나 켜있는 촛불: 그리스도를 상징

-두 사람이 신발을 벗은 이유는: 성소이기 때문

-거울옆의 묵주: 순결

   

   

==========>도상학 Icon=이미지 graphy=reading

Ex) 비둘기 (옛날) 평화 (NOW) : 당시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

②유고 반 데르 관, 포티나리 제단화 1476

Hugo van der Goes, Portinari Altarpiece 

   

   

<독일>

알브레히트 뒤러 (제 생각에 뒤러 부분은 더 첨가를 하셔야 할듯)

   

1500 자화상

DURER

그당시 자화상은 많이 그려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실물을 정밀하게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해석한 자화상

독일의 레오나르도로서

인문주의자, 이론적, 이태리 여행후

르네상스 미술을 잘알 고 그림

마치 그리스도 같은 자화상

   

   

뒤러: 4 성인

1526

요한, 바울, 마가, 누가

4 신약의 성인들

마틴루터 신교화 되기 시작한 독일

당시 종교 변화와 맞물려 해석

   

   

바로크와로코코 - 로마와 네덜란드, 스페인과 프랑스 바로크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18

   

<바로크 미술>

바로크: 괴이하다는 뜻 "불규칙한 진주" 라는 의미 (좋은의미가 아니다.)

당시에는 르네상스를 잘 이어간다는 생각이었겠지만 그러나 19c 에는 그렇게

보지않았기에 이런 이름이 붙여짐

17c 변화->1. 교황 권력 < 왕의 권력

2. 스페인이 강대국으로 부상(콜롬버스) 아직 독일 등은 발달하지않음

3. 루이 14세의 프랑스

4.네덜란드의 독립(무역의 중심지)

====>바로크는 국가별로 특색있게 진행된다. 르네상스 처럼 통일 양식이 아닌 국가 중심

정확히 말하려면 17세기 라고 보는 것이 좋다.

①건축

교회의 위기-> 마틴루터이 신교의 위협에 따라 카톨릭 자체의 부흥운동이 일어남 로마를

신앙의 중심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베드로 대 성당 중심(바티칸)

   

이 건물은 사람들을 끌어안는 제스쳐를 취 하는듯한 디자인이다. 이 성 베드로 대사원의 콜로네이드는

베르니니가 (1656~57) 지음

공간속을 침투하는 이러한 구조는 바로크의 특징이다.

바로크의 특징: 적극적, 운동감, 드라마틱, 조화보다는 효과

르네상스: 정적, 균형

   

(내부)

베르니니 성 베드로의 옥좌

1952~ 66

여태껏 단순 명확했던 르네상스와 달리 명확하지 않는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함 이것이 바로 바로크 적이다.

왼쪽은 카톨릭 오른쪽은 그리스 정교 상징

구름과 아기천사들이 위에서부터 팍 퍼져서 나오는 듯 하다.

회화, 건축, 조각이 합치되는 극적 idtlr

   

   

당시에는 르네상스 양식을 최고로 여겼기에 못마땅했지만 19세기 말부터는 다 이해~

   

   

   

②카라바지오: 카라바지오는 바로크의 선구자적 인물로 이 사람이 창안한 암흑양식(il tenebrose )를 창시한 인물 이거 굉장히 바로크적인 양식으로 앞으로 나올 바로크의 거장들 렘브란트나 벨라스케스도 이러한 것에서 영향을 받은것을 보여서 굉장히 중요한 화가입니다.

   

-1600년 에마우스의 저녁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비교해 봤을 때 매우 대조 )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후 처음 나타난 순간으로서 "내가 예수다" 라고 하는 장면이다. 이전의 성인들은 성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반하여 여기의 사람들은 세속적이고 여태껏 등장하지 않았던 서민의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들은 종교적 성인들이 갖추어야 할 것을 갖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연극적이고 과장된 몸짓 양 옆의 사람들의 팔은 화면 밖으로 경계선을 밀고 침입하고 있으며 식탁 위에 가자미가 있는 그릇을 보면 식탁에서 나올 것 같은 것을 알 수 있으실 것임. 이것은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불안 한 마음을 주고 또한 그림에 참가 시키는 요소이다. 전반적으로 이들은 주름살 가득한 모습과 헤진 옷을 입고 있고 여기서 묘사는 매우 사실적인데 이것을 "자연주의" "사실주의" 라고한다.

굉장히 극적인 명암을 사용하였다. 그림속의 사람과 그림보는 사람의 경계가 굉장히 가깝다. 마치 번개가 앞에서 친 듯한 닭다리 빵등을 정밀묘사했다.

-1599~1602년 성 마태의 소명

예수님이 성 마태에게 나타나셔서 이리로 와서 나를 따르라 하는 장면으로써 맨 오른편에 팔을 쳐들고 있는 인물이 예수입니다. 여기서 손을 쭉 뻗고 있는 인물이 예수님인데 이것은 시스티나채플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에서 하나님의 손동작으로써 카라바지오는 자신이 그림에 대하여 안다는 것을 이런식으로 표현했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지식을 자랑? 하는 것이 당시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이들 역시 당대의 옷과 당대 사람들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빛의 효과적인 이용이 역시 바로크적 요소를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바울의 개종

유태인을 박해하던 바울이 말타고 하인이랑 가다가 눈이 안보이면서 말에서 떨어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다.

이것도 극적임 연극적인 분위기

   

   

   

   

   

   

   

③베르니니

-다윗상(1623)

   

원본 클로즈업(얼굴표정 주목)

   

몸을 최대한 틀어 돌을 던지기 직전의 모습을 그림. 르네상스의 다윗은 그냥 서 있었던 것에 비하여 애는 운동감이 느껴짐(르네상스 는 콘트라 포스토) 그러나 르네상스식 이상적 신체를 갖고 있으며 만지는 것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 바로크의 조각은 여기저기서 보는 조각이고 르네상스 상은 볼 때 한 시점에서 관람하는 것

   

여기에서 다윗의 시선이 뒤로 향하면서 다윗이 마치 골리앗을 노려보는 듯한 느낌을 주며 다윗과 골리앗 사이에서 보고 참여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전시장 전체가 작품의 일부가 되는 듯한 느낌.

   

-테레사의 무아지경(1657~ 1666)

   

몸이 옷 속에 녹은 듯한 느낌 얼굴, 발만 거의 제대로된 신체이다. 종합적 드라마틱 효과/ 얼굴표정이 포인트(무아지경에 빠져있음)/관람자를 참여시킴

   

빛이 실제로 내려오는 듯한 모습 실제 창문이 있다.

아름다운 교회에서 이러한 장면을 실제로 보는 듯 하다. 스페인 성인 성 테레사가 부모의 간호중 기진맥진한 현장. 잠자는데 능금빛 뺨의 천사가 화살로 가슴을 꿰뚫는다.

   

<플랑드르의 바로크-루벤스>

루벤스는 Prince of the painting 일 만큼 짱 잘 그림. 어린시절 이태리에서 유학(르네상스 습득) 자신의 고장서 그림

-십자가를 올림 1610

이태리 유학갔다온 루벤스의 초기작으로써 미켈란젤로의 영웅적 신체의 영향을 볼 수 있다. 대각선 구도는 역동적으로 보이게 해 주며, 상승하는 힘과 하강하는 힘이 부딪혀 역동성을 더해준다.

초기의 작품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선과 형태를 중시한 모습

이후 점점더 색채에 신경을 쓴 모습으로써

   

플랑드르의 전통으로서 사실적인 얼굴과 배경을 보여준다.

   

루벤스는 말등 사나운 동물들을 잘 그렸던 것으로도 유명 그러한 면모가 이 그림에서 나타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사랑의 정원(1638)

이것을 그리던 시기쯤 되면 인기가 너무 많아져서 주문이 쇄도. 조수가 300명이나 있고. 조수가 다 그리면 마지막 5%만 루벤스가 그리는 식. 이 그림은 첫 번째 부인이 죽고난후 거의 50살? 넘은 루벤스가 (내 기억에) 20살 신부와 결혼한후 어린신부에게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자전적 작품으로

   

실제와 신화의 혼합을 보여준다. 왼쪽은 수줍어 하는 신부를 루벤스가 자신들이 사교모임에 소개시켜주고 오른쪽으로 진행될 수록 가까워져서 (사랑의 대화) 오른쪽 끝은 행복한 부부의 모습. 오른쪽끝 빨간색 옷 입은 사람 아래의 강아지는 충성을 상징하며 큐피트가 날아다니고 사랑의 여신인 비너스조각의 등장

-프랑스 앙리 4세 부인 메디치가의 마리아 드 메디치 24점의 그림

(불란서 화가들이 루벤스 그림을 볼 수 있는 기회)

루벤스의 가장 야심적인 대작은 프랑스의 여왕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를 기념하는 연작화이다. 그녀는 왕실의 재정을 마구 탕진하고 남편인 왕과 매우 사이가 안좋았던 어리석은 여자였는데 남편이 살해당한 후 잠시 프랑스의 왕위를 계승했던 군주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루벤스에게 루브르 궁의 2개의 방에 자신의 "혁혁한" 업적을 영원불멸하게 기록할 연작화를 그리도록 주문 그는 21개의 마르드 메디치 시리즈를 3년만에 조수도 쓰지 않고 완성. 이 그림을 그리는데 가장 큰 어려움은 이렇다할 업적이 없는 그녀의 생애를 어떻게 영광스럽게 윤색해 내느냐는 문제. 그는 마리 드 메디치가 아들을 낳는 장면을 장엄한 탄생화로 바꾸고 있다. 마리의 교육 장면에서는 미네르바와 아폴로 신이 직접 음악과 웅변술을 가르치고 있음

   

<마리 드 메디치의 마르세이유 입성 1622~23 루브르 박물관>

지금 이 그림에서는 명예의 여신이 황금 나팔을 불며 그녀의 프랑스 입성을 환영하고 있다. 그는 일부러 마리의 이중 턱을 그려 넣지 않았는데 대신 보는 이의 시선이 전면에 있는 풍만한 육체의 관능적인 바다 요정들에게 가도록 하고 있음. 루벤스는 풍부한 색채, 호화로운 의상, 금으로 만든 배와 같은 바로크 시대의 과장된 표현을 봉주고 있다. 루벤스의 생애와 작품은 모두 활력에 넘치는 것이다. 주제가 무엇이든 간에 루벤스는 금방 그림 전체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감싸버린다. 그것은 오래 사는 것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루벤스 자신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프랑스의 바로크>

①루이 14세의 베르사이유 궁전

당시 프랑스에서 지방 영주들이 아직 권력이 있었던 시대로서 그래서 루이 14세는 베르사이유에 매주 귀족들을 불러놓고 party를 했었다. 원래 왕들이 사냥하던 곳으로써

궁전 뒤는 숲이 있고 그 앞에는 조경을 조성해 놓았다.

Le Vau 와 Mansart는 궁전설계 Le Norte 는 조경을 설계하였다. (궁전설계와조경설계다름)

르네상스와 비슷한 분위기이며 바로크적인 지나친 화려함이 느껴지지 않는 절제된 화려함은 프랑스 바로크의 특징이며 이를 classical 바로크 라고 부른다.

정원역시 절제된 분위기이며 기하학적이다. 이는 인간이 자연을 control 한다는 분위기

화려하긴 하지만 지나치게 화려하지는 않음

거울의방 (gallery of mirror)역시 규칙적인 반족과 질서정연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거울은 확장된 공간으로써 이러한 면은 바로크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베르사이유 궁전은 그 거대한 규모로부터 바로크 적임을 알 수 있다. 18c 에 여기 저기 비슷한 흉내내는 애들이 나타났으며 이들은 터키, 이스탄불등의 궁전을 지음

   

②푸생 Poussin 사비니 여인들의 강탈 1636~37

소위 말하는 미술의 개념과 미술교육의 개념을 확립한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서 미 美란? 사람들이 보고 교훈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 즉

"주제" 가 중요하다고 생각. 과거의 위대한 인물, 사건을 그리는 "역사화" 가 중요하며 정물화등은 솜씨가 부족한 화가나 그리는 좋지 않은 주제로 생각하였다.

주제 결정 이후 MODE (난폭, 행복 등....)를 결정한다.

   

사비니 여인들의 강탈

     

  고래 로마가 제국으로 커지기 전 인구가 적었다. 특히 여성이 부족하여 사비니 여인들을 강탈함. 스케치의 정확성. 미술은 무언시이기 때문에 말없이도 주제가 전달되도록 연극적인 모습. 거의 판토마임 같은 동작과 개인별로 나타나는 특징적인 표정이 있다. 하나씩 보고 따라 그리고 합쳐서 그리기를 반복함. 인체나 로마조각을 놓고 하는 이러한 드로잉의 방법은 미술교육의 시작 "아카데미식" 교육의 시작이었다. 이후 인상파 화가들이 나타나기 전인 200여년동안 프랑스 미술교육과 영국 미술교육의 방법으로 화단의 파워 형성

   

위의 그림을 보면 혼란의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수평선과 수직선의 모습이 굉장히 계획적이면서 절제美가 느껴진다. 선과 형태 중심의 미술이다.

   

포키온의 장례 1648

풍경이 중요하다. 그러나 역사화이다. "포키온" 이 누명을 쓰고 사형당한 뒤 아테네 시 밖으로 시체가 치워지고 있다. 시선의 구도가 굉장히 계획적이다.

이런 그림을 보면 서양사람들은 자연을 지배하려 하였고 동양사람들은 자연에 동화되어 살려 하였다는 일반적인 인식론이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 사람들 작품 중 이상적 자연의 풍경도 많다. (상상적)

   

<스페인의 바로크>

벨라스케스

시녀들 LAS MENINAS (시녀들)1656

그룹 portrait. 제일 재미없는 그룹 포트레이트는 일렬로 서있는 것일 테지만 이 그림은 마치 지나다니다가 얼핏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으로 매우 신선하다. 초상화 +일상장면 (풍속화 genre painting) 을 합쳤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것은 왕과 왕비의 모습. 어찌보면 보는 사람이 왕과 왕비의 느낌을 준다. 난쟁이의 등장 이러한 난쟁이는 궁전에서 왕족들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놀이의 대상이었다.

고야의 그림중 카를로스 3세의 가족 초상화를 보면 고야가 이 그림을 보고 차용한것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에서 벨라스케스는 가슴에 빨간 훈장을 달고 있는데 이것은 받고 싶었는데 당신은 받은 적이 없었던 훈장이다. (이 그림을 받고 난후에 받았다. ) 벨라스케스의 그림중 이정도로 큰 것은 이 것 밖에 없다. 꽃등의 묘사가 정확히 묘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붓터치와 하이라이트로 묘사되어 있으며 또한 그림 내에서 자기가 보는 정도만 그린 것으로 매우 시각적이며 광학적이다. (optical) 광선이 왔을 적 오는 하이라이트가 미묘하고 복잡한 느낌이다. 이당시 이런 식으로 보이는 "만큼" 만 그리는 것에 집중한 사람은 벨라스케스가 유일하다.

-----> 나중에 인상주의 화가들에 영향

   

<네덜란드>

해군력이 강하고 무역으로 부를 축적. 중산층이 두터운 나라로서 신교를 믿었기 때문에 종교화와 종교조각이 거의 없다. 초상화와 정물화 풍경화가 인기가 있었으며 사이즈는 작을것을 좋아하였다. 대게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는 주문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여기에는 화상이 존재가 두드러진다. 그룹 초상화가 발달 하였고 그래서 군소 작가가 엄청 많았다. 초상화의 가격은 전신상은 반신상의 2배 뭐 이런식이었다.

   

①렘브란트

1632 Dr. Tulp 의 해부학 강의

   

렘브란트는 그룹 초상화는 자칫 딱딱해 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드라마틱하게 그렸다. 렘브란트 초기는 바로크 양식의 강한 명암의 대조가 느껴진다. 그러나 얼굴 부분은 정확히 그려져 있다. 주로 당시에는 사형수의 신체로 해부학을 진행하였다고 하며(2번 벌을 받는다는 느낌) 메멘토 모리 즉 항상 죽음을 기억하라(교훈적 효과) 는 의미도 포함

이 인물 portrait 의 사람들은 각기 생각하는 사람, 문헌대조하는 사람. 관찰하는 사람 등등 각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렇게 주제가 있는 집단 초상화로 렘브란트는 지루할 수 있는 집단초상화의 분위기에 활기를 주었으며 이러한 면 때문에 인기작가였다.

   

-야경 1642

새벽의 광선, 일종의 사수들의 부대 (총쏘는 사람들). 이들이 모여서 마리드 메디치의 방문기념 퍼레이드를 준비하고 있는 장면으로써 야경은 잘못된 이름이다. 굉장히 많은 인물들이 존재한다.

v자 구성, 대각선을 많이 사용하였다. 빛의 효과가 복잡하다. 이러한 이유는 이렇게 미묘한 빛조정을 하지 않으며 통일된 구성을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 여자아이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 빛을 발하고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부대원들 전부가 그룹 초상화를 위해 똑같이 비용을 부담하였으나 램브란트가 어떤 인물은 어두운 배경 속에서 희미하게 처리했는가 하면 서로 겹쳐서 안보이는 사람도 있어 불만을 사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렘브란트는 인기가 떨어지게 되었으며 인기보다 개인의 예술성을 추구하는 작품들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또한 당시 1650년대 경이면 더 화려한 그림을 선호하게 되고 그래서 램브란트의 인기가 떨어지게 된 것이다.

-탕자의 귀환 1665

램브란트는 네덜란드의 화가중 몇 안되는 종교화를 많이 그린 인물로써 이는 그의 말기의 그림이다.

하이라이트는 아들을 용서하는 아버지의 얼굴로 여기서 그리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안간을 용서하는 것(영혼이 담긴 듯한 느낌)

그의 후기의 그림들은 명암이 더 훈훈하고 신비스러워진다. 점점 오래볼 수록 형체가 드러나는 느낌이다. 또한 하이라이트의 부분들은 더 두텁게 그렸으며 어두운 부분은 얇다. 물감의 두터움에 의한 그림 윤곽이 창출되었고 이를 회화적 방법 즉 paintery한 방법이라고 한다.

②베르메르 vermeer

베르메르는 화상이다. 전문화가가 아니며 국제적인 흐름을 잘 알고 있었다. 30여점 밖에 않되는 그림을 갖고 있었으며 전문화가가 아니고 취미적으로 그렸었기 때문에 19세기에 처음 그의 그림이 발견되었다. 작은 그림을 그렸다. 자기집 방 한구석에서 그렸으며 다 일생생활을 그린 painting 이다.

세속적이지 않으며 조용하고 색체는 파스텔톤 으로 몽환적인 분위기이다.

   

(교수님 여담: 1920~ 30 년쯤 한 인물이 사실적 화가를 그리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추상화를 요구하였고 이 사람은 베르미어의 모작을 그려서 팔았다. 17세기의 싸구려 캔버스를 사서 페인트를 다 벗겨 버리고 자신이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이 그림 을 가지고 미술관에 갔다. 이후 제 2차 세계대전 나치 "괴링" 이 미술품을 수집하였는데. 괴링의 것을 압수하였다. 그중 베르메르(1945~6년) 것이 밝혀지고 판 사람을 추적한 결과 그 인물은 모작인 것을 밝히지 않으면 반역죄로 처벌 받을 형편에 처하였다. 그래서 그 그림을 위조한 것을 자기 입으로 불었다. ---> 책 이름 I was vermeer

   

16~ 17세기는 Camera obscura의 시대이다.

카메라의 원조로써 여기서 보이는 인물들을 그린것 포커스가 하나 정물들의 부분이 완벽이 초점이 맞지 않는 느낌이다. (이거 무슨 말인지 내가 써놓고도 모르겠습니다;;)

   

  - 우유항아리를 가진 여인

③루이스 달 Ruis dael

프랑스에서 푸생이 이상화된 자연을 그렸다면 네덜란드의 루이스달은 이상화 되지 않고 "진짜" 네덜란드의 풍경을 그렸다. 토착지역의 느낌을 그대로 보여주며 넓은 공간을 느끼게 하는 그의 그림은 (뉴턴의 시기-> 하늘 우주로 관심) 을 반영한다. 파란하늘과 구름의 다양한 형태와 거칠 것 없는 구도가 인상적이다.

밀밭풍경 (1662)

네덜란드의 17c 특징을 묻는 문제가 나온적이 있습니다.

집단초상화, 풍경화, 정물화 중심으로 서술하시면 될 것이지만 교수님 께서는 " 정물화" 부분에 대하여 적당한 작가를 들어주시진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완해 주시면 더 좋을 듯합니다.

   

<로코코> 바로크의 마지막 양식으로써 훨씬 더 가는선과 섬세하고 우아한 표현이 특징. 곡선을 많이 사용하며 귀족적이다. 로코코에서 문제 나온적 한번도 없음

hotel de soubise salon de al princess Bdfrand 1732

   

굉장히 불규칙 하면서 화려하고 가볍고 반짝반짝한 느낌 왕권력이 미약해지면서 나타난것.

=====> 프랑스에서 굉장히 가볍고 요론 양식이 유행하였다. (가볍고 피상적 인물이 인기/여성의 시대-마담 드 퐁파드루) 장식 그림도 역사화적 그림이 아닌 사랑그림과 칼라도 파스텔화, 은빛 그림등이 유행 주로 그림보다는 실내 양식에 더 많은 영향을 미쳤다.

   

   

①Antoine Watteau 바토(불어)/와토(영어)

-키테라 섬에서의 귀환(1717)

키테라섬은 상상의 섬으로 비너스의 섬이다. (보티첼리의 그림에서 나오는 비너스가 육지로가는섬). 당시 문학 작품에 나오는주제. 키테라 섬에 가면 짝이 없는 청춘남녀가 짝이 생긴다고 하는 전설. 그림의 설명이 to 인지 from 인지의 여부가 불확실했으나 from 으로 생각된다. 이유는 둘씩 둘씩 돼서 각자의 길로 돌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

단계, 단계, 단계 로 나뉘는 행동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은 루벤스의 사랑의 정원의 영향이다. ( 바토는 플랑드르와 가까운데 살았던 것) 실제+환상+신화가 섞인 가볍고 파스텔톤이다. 가냘프고 우아하며 연극적인 사람들이 등장한다. 와토의 인물들은 중량감이 가볍고 전체적으로 환상같은 느낌을 준다. 와토 자신은 여성을 사귀어 본 적이 없다고 하며 결핵에 걸려서 일찍 죽었던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은 사랑의 주제에도 불구 멜랑콜리한 분위기를 풍기며 와토 이후 이렇게 사랑을 속삭이는 듯한 그림이 유행한다.

②프랑스와 부세 Francois Boucher

-목욕한 후의 다이아나 여신의 휴식 1742

다이아나는 사랑의 여신이다. 나무와 풀이 구불구불거리는 것이 특징(와토와 같은 효과) 신화를 핑계로 그린 여성의 누드라고 생각됨. 핑크 무드의 달콤한 부위기가 느껴지며 비단의 질감, 피부의 표현이 눈을 즐겁게 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와토의 인물보다 더 사람 같다. 다음에 나타날 신 고전주의적 인 면모는 이러한 것에서 드러나며 또한 남성화가의 입장이 여실히 드러난 그림이다.

   

   

   

   

   

신고전주의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20

   

<신고전 주의 Neo Classicism>

18c 중후반에는 폼페이 유적의 발굴(A.D.79<CE>),프랑스 대혁명 등 굵직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이로 인하여 로마에 대한 향수 다시 자극, 계몽주의 철학이 재등장 하게 되었으며 귀족취향의 로코코를 비판. 미술사학자로 불릴만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 EX)빙켈만: 고대로마 이집트 등에 대한 책들이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 Hubert Robert, Pont du Gard (수로) 로베르 1787

  ①자크 루이 다비드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로 보내는 것에 찬성했던 인물로서 미술의 존재 이유는 사람들에게 멧세지를 주기 위한 것으로 생각. 그의 신고전주의의 특징은 다른 신고전주의자들보다 정치적이라는 평이다.

이무렵의 화단 분위기는 salon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일종의 국전과 같은 것 당시 심사위원들은 푸생적이었다. (로코코 작가들은 잘 입선이 되지 않음) 로마상이라고하는 상이 생겨. 이 상에 입선하면 이태리로 4년간 유학을 공짜로 보내주는 제도가 있었었다. (Price to Rome) 자크 루이 다비드는 이 상으로 4년간 이태리에서 그림공부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 89년 혁명)

다비드가 로마 유학중 그려서 국가에 보낸 작품. 로마에 대한 충성 결의 등을 표현한 이 작품을 받고 루이 16세는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다비드는 혁명파 였으므로 왕정에 대한 충성보다는 혁명정부에 대한 충성 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옆나라와의 싸움에 앞서서 승리를 다짐하는 형제들의 모습으로써 로코코를 벗어나고자하는 의도적인 분위기와 결의에 찬 모습이 느껴진다. 아주 세밀한 자연주의적 묘사가 돋보이며 강인한 남성에 비하여 여성은 연약하게 표현되었다. 선의 표현에서도 남성은 직선 여성은 곡선으로 표현하여 개인의 감정을 억제하지 않는 약한 여성들로 표현했다.

색채의 아름다움은 느껴지지 않는 절제된 색채를 사용하였으며 푸생의 고전주의를 계승하여 단순한 배경에 오해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그림을 그렸다.

옆나라 알바? 와 3대 3으로 싸우기로한 로마의 대표로 호라티우스 가문의 형제 3명이 나가기로 되어버림 그렇지만 호라티우스 가문과 상대방 국가의 대표선수 가문은 사돈간으로 맺어진 사이였다. 그래서 국가를 위해서는 이겨야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기가막힌 상황

다비드는 이러한 상황을 그림으로써 국가에 대한 충성을 더욱더 강조함.

   

-마라의 죽음

소개장을 받고 온 여자에게 살해당한마라. 혁명을 반대했던 그 여자는 마라를 죽이고. 다비드는 이 장면을 재현하였다. 피비린내나는 장면을 세밀하게 그려 죽음의 장면을 직접 보는 듯한 효과를 준다.

앞의 탁자는 거의 비석과 같은 역할을 하고 목욕탕은 무덤과 같다. 마치 순교자를 보는듯 (그리스도의 이미지)

모든지 평행이 되는 그림 가운데 죽은 이의 머리만 사선으로 배치( 시선이 먼저간다. ) 그리스도를 연상시키는 분위기를 갖고 있다.

-사비니 여인의 강탈 1799

비교적 장면이 혼란스러워졌다. 사비니 여인이 로마에 가서 애 낳고 살고 있는데. 다시 여인들을 찾으러 사비니에서 오고 로마와 사비니 사이에서는 다시 전토가 벌어진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이제 로마인의 아내이자 그들의 아이의 어머니가 된 사비니의 여성이 중재역할을 하는 장면이 화면에 중심부에 등장. 이는 당대 사회에 보내는 David의 메시지였다. 양식은 복잡하면서 섬세해 졌다. 초기 스케치는 누드가 없는 것으로 초기에는 이러한 집단 누드화? 를 그릴 생각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누드가 되었다.

그의 초기그림은 로마식이지만 이것은 후기 그리스적이다. (고전주의 양식에도 종류가다양함)

   

-나폴레옹의 대관식-> 노트르담 대사원

   

②그로

-왕실 근위대의 장교 1812

러시아와의 전쟁 모습

앞의 다비드보다 훨씬 더 혼란스럽고 감정적이고 분위기적이다. (낭만주의적 기류)

색채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다비드 이후 신고전주의의 새 리더였으나 매우 낭만주의적인 인물로써 나중에 자살한다.

   

-일라우의 전투 1808

   

아래에서 위를 보게하는 그리스도와 같은 느낌으로 나폴레옹을 그렸다. 얼어죽은 시체등의 등장으로 전쟁의 영광스러움이 표현되었던 전쟁화가 피해자 위주의 discription이 생김을 알수 있다. -> 작가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

   

③앵그르 1804년까지도 살롱은 여전히 신고전주의인 가운데 낭만주의자들도 많아짐

-아킬레스와 사신들 1804

앵그르의 고전주의와 다비드의 고전주의 는다름.

아킬레스를 찾기 위해 아킬레스가 숨어있는 수녀원에 방물장사로 분하고 찾아간 오딧세이와 일행은 많은 물건중 방패를 하나 숨긴다. 다른 수녀들은 예쁜 물건에 관심을 갖지만 한 명의 수녀는 예쁜 물건이 아닌 방패에 관심을 갖고 , 결국 아킬레스 발각/

   

초기 호라티우스에서는 명암대조가 강하고 색채가 별로 쓰이지 않은 것에 반하여 이 그림은 선이 더 아름답고 명암이 덜 강하며, 색채가 역시 아름답다.

   

 -대 오달리스크 1814

옷 입은 마하, 우르비노의 비너스 등으로 많이 그려진 와상, 동방 女의 느낌으로 터번을 두르고 있다. 공작새털 부채등의 등장으로 보아 모슬램 이집트 쪽인듯. 이집트의 나폴레옹 원정 후 오리엔탈리즘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의 동방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 여행기"에서 나온 것인데. 화가는 대부분 남성이었던 탓에 女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할렘등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들을 그림으로 그렸다. 이 그림에서 중요 포인트는 허리가 길다는 것인데 이는 거의 매너리즘적 분위기가 느껴질 정도로 허리가 길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름다움을 위하여 인체의 사실성을 포기한 격이다.

   

   

   

낭만주의-19세기 미국풍경화 허드슨 화파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19

   

<낭만주의 -19c>

낭만주의는 양식이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넓게보면 신고전주의에 들어가지만 지금 말하는 것은 좁은 의미이다.

   

①Theodore Gericauit, 메두사의 뗏목 1816

제리코는 기질적으로 반항아적 인물이어던 듯 싶다. (rule 을 따르지 않음) 고전이나 옛날 이야기가 아닌 당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근대성)

   

150명정도 유람선박이 프랑스에서 아프리카로 향하던 어느날 폭풍에 의해 떠내려가 15일 후 뗏목에 있던 12명이 구조되었다. 신문 보도 되고 일대에 이야깃거리가됨

   

당시 선박의 선장은 면허가 없었다고(부정부패) 제리코는 사실성있는 그림을 위하여 多노력--->제리코는 1대1로 인터뷰를 하는 등 르포르 따쥬

생존자중에는 목수도 있었는데 뗏목을 만들어 달라고 졸라서 만들어 보고

띄어 봄/ 이렇게 사실적 회화는 살롱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인간의 절망과 희망의 단계를 3단계로 나누어 형성-> 맨 아래 죽은사람. 조금기운있는

사람, 맨 끝에 살아서 구원을 요청하는 사람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우리는 지나가는 배가 이 사람

들을 구출했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고전적인 이야기가 아님, 어둠고 거친 분위기, 감정적으로 반응하게하는그림

   

이그림의 중요point: * 색채자체가 중요 요소

* 강한 대각선 구도(바로크에 多)

* 낭만주의 중요주제---> 자연 (바다, 난파선, 폭풍의 난폭함)

난파선의 주제가 많이 그려진다.

낭만주의는 로맨티시즘이 아니라 격정적인것

* 본능, 직감

*지그재그한 몸이 밖으로 나와우리를 불편하게함

②들라크루아

   

-단테의 보트 1821 Eugene Delacroix

--> 상상력을 자극하는 주제(지옥)

동심원으로 되어있는 9개의 circle중 로마시대 시인과 함께 제 5circle로 가고 있는 장면

이것은 수많은 지옥의 장면중

" 영원히 빠져죽는 형벌" 을 받는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영혼들을 그렸으며 저주 받은 영혼들은 일행을 위협하고 있다. 누드는 굉장히 영웅적이며 "신 고전주의 의 느낌" 이다. 미켈란 젤로의 최후의 심판이 떠오르는 영웅적 신체의 인물들이 등장. 삼각형 구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공포, 두려움의 감정을 유발한다. 난파장면은 아니지만 항해의 장면으로 색채의 중요성이 커졌다. 어두컴컴한 색채, 색채끼리의 대조가 두드러진ㄷ.ㅏ (---> 루벤스 같은 색채화가에 관심) 

   

-키오스 섬의 학살(1822~24)

그리스섬으로 그리스 인이 반란/터키인이 억압 하는 구도로써 이 사건은 지식인들의 분노를 샀다. 왜냐하면 그리스는 "서양 문명의 요람" 으로도 불리워 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색채가 중요하다는 개념이 처음 파생되었으며 전경에 사람이 많고 그후 대지가 쫙 펼쳐진 구도는 낭만주의적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어머니는 기진맥진하고 애는 젖빨고, 연인들이 희망을 잃고 서로 기대고 있다. 사납고 용맹하지만 무지한 터키인들은 그리스 여인들을 끌고 가고 있다.

   

산업 혁명전이기 때문에 색채의 상태가 나쁜 그림이다. 또한 마무리로 빨간 초록의 눈에 보이는 붓터치를 한 것은 당시 영국작가인 콘스터블의 붓터치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그림의 색체가 생생하게 보이는데 일조한다.

   

당시 "회화의 학살이다." 라는 평을 받았다. 색채중심의 그림으로 보색대비를 잘 이용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1828

낭만주의자는 중세와 근동이야기를 주제로 삼기를 좋아했다. (신고전주의 작가들이 고대. 그리스, 로마 이야기를 주제로 좋아했던 것과는 반대)

이는 아비규환의 장면으로. 감정의 거대혼란이 느껴짐 맨 왼쪽의 검은 피부의 인종 등장은 오리엔탈리즘의 영향.

사나워 보이지만 부지해보이는 다른민족들을 그림

주홍색과 흰피부의 대비는 감각적인 효과

   

   

<여기서부터는 영국>

③영국작가 콘스터블

-건초마차 1824

이슬을 머금고 흔들리는 듯한 나무의 표현과 변화무쌍한 하늘이 인상적이다. 붓터치에서 (보색대비효과) 이용한 초록색 옆에 쪼끄맣게 빨강색을 칠하여 초록을 훨씬 더 강렬하게 만들었으며 초록이 이로 인하여 더 생생해지는 효과

   

낭만주의 시대에는 풍경화가 많이 그려지게 되는데. 콘스터블은 자기가 살던 주변 풍경을 그렸다. 실제 자연을 관찰하고 수십 개의 스케치를 그리고 완성, 이렇게 풍경을 관찰하여 그리는 것은 새로운 개념이었다.

매일 나가서 관찰하고 그리기를 반복. 하늘의 변화 무쌍함이 중요 관전 포인트. 거의 기상학자수준으로 관찰. 새생함을 진실되게 표현하였다.

   

======> 자연의 풍요로움에 대한 낭만적 반응. 아직까지는 밖에서 완성하는 단계는 아니다.

   

   

영국은 프랑스보다 아카데미즘이 약해서 훨씬 자유로운 작업들이 가능했다. 아직 미술사의 전통이 확립되지 않은 것이다. 위의 그림에서 빛을 표현할 때 흰색을 턱턱 쳐발러서 반짝반짝거리는 물의 현상과 흐름을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

전형적 영국날씨와 풍경을 전해주는 느낌이다. (영국--> 비가 多/ 평원이 多)

   

-와이무스의해안 1816

앵그르 같은 경우에는 꼼꼼히 끝까지 다듬었지만, 이 사람의 그림에서는 터치감이 엄청나게 많이 나타난다. 낭만주의에서는 개인의 창의성이 중요함. 규범을 깨고 뭐 이런 경향

   

④윌리엄터너

-불타는 국회의사당 1835

인공물인 다리의 모습========> 당대의 모습과 근대성 , modernity의 표현

   

불타는 것이 장관

수증기, 자연의 재앙 불. 증기 등 이 이사람의 주제였다. 콘스타블이 영국의 풍경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면 이 사람은 우주적 대기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추상화에 가까운 부분 존재: 특히 부분적으로 " 임파스토 기법" 으로 노란색으로 그림 이렇게 두텁게 바르는 독자적인 기법을 개발한것 ( 영국의 자유성이 있기에 可 했던일)

-노예선 1839

난파선의 주제.

배가 난파되고 다시 해가 떠오르고 맨 오른쪽 아래에는 사람들의 다리와 물고기가 등장함.

   

-눈보라 1842

독자적 표현, 우주적 혼란이 느껴짐. 사람이 만든 구조물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부터는 독일 낭만주의>

⑤ Caspar David Friedrich

- 떡갈나무 숲의 수도원

수도원 공동묘지 등, 음산한 그림을 그렸다. 자연자체에 신이 들어있다고하는 생각이 강했던 독일인들 특유의 시선이 느껴짐.

자연에 대한 숭고성이 느껴지는 독일의 사고 

-북극해, 또는 얼음바다 (1824)

인류는 1821년 처음 북극을 탐험했다. 북극은 일종의 미지의 땅인샘이다.

   

배가 난파한 장면으로써

하얗다 못해 파란 얼음들이 보인다.

뒤에는 고요한 자연의 모습이 인생적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해석하여 독재 행정에 의해 마비당한 언론을 상징한다고 보기도 했다. (배)

   

위에서 본 것과 같이 기본적으로 신 고전주의는 양식이 존재했지만 낭만주의는 개인적이기 때문에 양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사람>

⑥미국 Thomas Cole, Oxbow 1836

미국에서는 가장 이해하기 쉬운 그림인 풍경화와 초상화가 많이 그려졌다.

     

뉴욕중심의 허드슨 리버스쿨에서는 일련의 풍경화들이 많이 나온다. 영국과 독일의 풍경화와는 다른 야생적이고 또한 굉장히 낙천적인 그림으로 광활한 공간이 느껴지지만 인간에 대하여 적대적이지 않은 풍경화들이 생겨난다.

   

   

서양에서의 풍경화 변천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24

   

<풍경화> 풍경화는 이거 문제가 나온 적이 있어요. 앞의 내용에서 조금씩 보완해서 쓰는 연습을 하시면 좋으실 듯 합니다.

보시면 낭만주의 같은거에서 풍경화 많이 다루잖아요. 교수님께서 그런것 까지는 풍경화 설명하시면서 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 대지 미술" 부분 같은거는 작년 시험문제로 나왔지만 또 나올리야 없겠지만 이런식으로 틈틈이 나오는것을 놓치지 않고 하시는게 중요한듯.

   

①폼페이

일종의 별장도시 , 79년경 베수비오스 화산이 터지면서 폼페이와 에르꼴라뇨라는 지역의 피해가 가장 막심했다. 18c 에 들어서 발견되면서 발굴이 시작되었고, 이는 세계적인 뉴스거리였다. 약간의 향락의 도시였던 듯 (30명당 술집 하나) 벽화가 많이 발견되며 그중 몇 개는 거의 포르노;;

   

프레스코는 붉은색 계열을 많이썼으며, 폼페이 전성기 양식은 밖에서 풍경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양식으로 이를 "illusionism" 이라고 부른다.

풍경화들이 많이 나타났다. 기본적으로 서양화에서는 풍경을 배경에 그치는 정도에서만 그렸지만 여기에서는 풍경 자체에 관심을 갖음을 알 수 있다.

- Odyssey Landscape BC50~40

   

-Garden Scene 2nd style Villa Livia, Primaporta bc1

   

=========> 순수한 풍경자체가 나옴 스케일이 꽤 크다.

   

   

그이후로 이제 중세 뭐 이러면서 자연관찰에 대한 생각은 별로 나타나질 않습니다. 왜냐면 너무 기독교 중심으로 돌아가서~

<15~ 16세기>

②베니스

   

   

동방무역의 중심지였던 베니스는 감각적이고 화려하며 물질적인 르네상스를 자랑한다.

     

Tiziano ? Fete Champetre, (Pastonai Concert)

   

전원의 음악회, 조르조네가 시작하여 티치아노가 완성했다고 한다. 2명의 누드녀는 신화에 나오는 뮤즈(세속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로 생각. 베니스 당대의상을 입은 2명등장(새틴의 광택이남) 풍경화가발달한 베니스 의 면모가 보이지만 인공적인 풍경으로 보인다.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이상향을 그리고있다. (시골, 자급자족)

   

   

   

③독일

Aldonfen Issus 의 전투 1529 다리우스와 알렉산더의 전투

거의 우주적인 풍경, 독일은 늘 풍경을 중요시함 (forest 가 많은 환경탓), 독일동화도 보면 숲에서 만들어진게 많다는거, 독일서 자라는 나무는 기세가 험준한데. 그래서 그런지 독일 풍경화들도 대체적으로 험준하다.

이그림은 보면 시야가 엄청 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당시 코페르니쿠스등이 등장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이 글루 쏠린거

  

-Aldorfer Issus 의 전투 1529:

다리우스 vs 알렉산더

   

==> 거의 우주적인 풍경, 독일은 늘 풍경을 중시해 왔다.

   

④네덜란드 -플랑드르

네덜란드의 경우 일상을 그리면서 풍경도 나왔다.

Piter Breugel, the elder , 사냥꾼의 귀환 1565

정말 지역의 풍경으로 계절감의 표현이 두드러진다.

   

   

<17세기====> 풍경화가 다양해짐>

①Claude lorraine 성 우르슐라의 항구 1641

   

     

<인상파==> 풍경을 多 그림>

- Claude Monet

1872 일출 인상

완성되지 못한 그림같다는평이 지배적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그림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거였지만 인상파들은 인상만 그리려고 했다. 당시 인상파는 조롱섞인 비아냥을 들었다.

   

인상파들은 색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기후와 시간등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인상파 그림은 야외에서 완성된 탓에 대부분의 그림들이 작다.

그당시는 산업혁명의 시대임으로 알루미늄 튜브 물감이 발명되어 화가들이 밖에서 작업하는 것을 편하게 해주었다.

   

인상파 화가들은 붓터치를 섞어서 색깔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사용(초록색+노란색=연두색)

물감의 색을 생생하게 살리기 위함이었다. 짧은 터치를 사용

흔들리는 나무나 물등 가변적인 것을 多그렸다. 우연한 한 순간의 느낌을 마치 스냅촬영 한 듯 (사진기 유행) 친밀감 들고 주변의 한순간 같은 느낌(초상화도 요롷게 그리기 시작)

   

====> 또한 이쯤 되면 화랑도 많아짐===> 작가들이 남들과 다른 그림을 그릴 필요가 생 겼다. monet 는 1890년대쯤 인정 받고 지베르니라는 집을 살정도로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화가가된다.

====>19c 말 자포니즘의 유행

모네는 일본 holic 하게 되어 일본식 다리를 연못에 설치하고 그림그리기 시작

   

   

-monet 수련

물밖의 풍경의 반사와 물표면의 수련의 모습이 어울려 소우주와 같은 느낌을 준다.

수련 시리즈는 점점 물 밖의 풍경이 없어지면서 화면자체가 연못 풍경이 되어버린다.

이쯤 되면 단지 눈에 보이는 Sensation을 쫓는 느낌이다. 또한 그림이 점점 커진다.

   

<현대>

1960년대~ 대지운동 Earth Works =========> 작년 문제 출제

①Robert Smithson

-The Spiral Jetty (나선형의 둑) 1970

대지운동은 미술품이 수집품 또한 상품화 되어가는 것에 반대하면서 자연을 등한시한 것에 대한 반성으로 일어났다. 자연에 대한 낭만주의를 불러 일으키며 ECO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작업을 하기위해서 자본은 이것의 설치 과정과 설치후의 과정을 기록한 사진이나, 초기 드로잉등을 팔아서 마련. 위의 작품 같은 경우는 유타주의 솔트레이크이며 대부분 스미슨 같은 대지 미술가들은 한적한 장소를 선호한다. 이러한 작업은 그 시작에서부터 작업허가를 받는 일이 힘들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지미술에서 중요한 점은 설치 후 자연속에서 어떻게 변해가느냐가 중요한데

위의 작품의 경우 솔트레이크 속에 있으면서 나선형 주변에 소금으로 둘러쌓이게 되었고 현재는 점점 밑으로 가라앉는 중이다.

   

②Christo

-Running Fence : 1972~76

LA에서 샌프란시스코에 이르는 50km의 거리를 5m 이상 높이의 천으로 잇다. 여러 가지 협상이 필요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으며 제단등에서 돈을 받고 사진등을 판매하고 이러한 사진들은 미술관에서 소장용으로 산다거나 했음

   

   

   

-raping작업 호주

   

-크리스토도 한국에 한번 왔었다. 당시 판문점OR 불국사를 쌀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으나 그냥 왔다만 갔다.

   

-크리스토는 독일 베를린 국회의사당( 옛 나찌의 본부) 퐁네프, 세느강 다리중 가장 유명한 다리를 쌌다.

   

-우산프로젝트: 일본의 해안가와 일본과 태평양을 건너서 접하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해변가를쌌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태풍이 많이 부는 나라 였다는 것을 계산에 넣지 못했던 크리스토.... 결국 우산 몇 개가 뽑히고 사람이 죽어버림

   

   

③월터 드 마리아

라이트닝 필드, 뉴 멕시코에 설치 400여개의 철봉을 꽂음 

   

   

   

근대적 삶과 미술(사실주의와 인상주의)(인상파 뒷부분빠짐)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26

   

<근대적 삶과 미술>

19C 중반 미술

--> 산업혁명의 진전으로 물질적 해택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

--> 도시와 공장이 늘어났다.

--> 여태껏 미술들이 영웅, 종교 이런게 주제 BUT 이제 근대적 사람사는 애기를 다루기 시작하였다.

   

<사실주의>

광범위한 사실주의가 아닌 시대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나타남

Realism--->(보통 우리가 애기하는 것은 realism) 미술사에서 쓰는 리얼리즘은 대문자 R

로 표기. 문학으로 치자면 에밀졸라. 사회적 논쟁의 대상이됨

①구스파브 쿠르베: " 나한테 천사를 보여달라. 그러면 천사를 그리겠다. "

(Gustave Curbert) 미술의 주제가 당대 사회로 감

-돌깨는 사람들 (1850)

전위적 의식(아방가르드)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아방가르드(맨 앞에 서는 군사) 의 뜻. 미술용어로 바뀌면서 앞선 의식을 나타내는 미술을 이야기하는 용어로 쓰인다.

옆에서 보는 그림은 당대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전 주제는 교훈적인 주제이거나 영웅을 그린것 혹은 성경의 이야기 였다고 하면 이 그림은 하잘 것 없는 직업과 사회 계급이 그림의 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사회주의 탄생, 각종 혁명등의 시대로 농민과 노동자의 개념이 널리퍼짐. 또한 쿠르베 역시 사회주의자들과 잘 어울리기도 하였다. 당시 이 그림에서 읽혀지는 "선동적" 인 느낌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그는 이것은 본것을 그렸다고한다. 과거 예술가들은 멋있는 구성을 그렸지만 이 그림은 구성의 맛이 없고, 또한 명암의 효과가 급격하다.

물감을 두텁게 발라서 물질성이 느껴지는 것 (<-> 아카데미식 말끔한 마무리)

   

영국에서 나타나는 물감의 임파스토 기법등을 이용하여 물감의 물질성을 이용하는 것이 두드러지는 이 그림은 2차 세계대전때 드레스덴에서 소실됨

-오르낭의 장례(1849)

북부 프랑스는 쿠르베의 고향으로 돌이 쫌 많은 시골이었다. 오르세 미술관에 있음. 이들은 실제 인물 크기보다 좀더 큰 스케일의 것이다. 당시 역사화가 그려졌을 법한 스케일이지만 그가 그린 것은 장례식의 장면이다. 그러나 누구의 장례식인것이 중요치 않음

   

   

   

1) 보잘것 없는 사람을 그 랜드 스케일로 그린점

2)슬퍼하는 사람들은 마을사람들의 초상임--> 이러한 것은 마을 사람들을 파르테논신전의 프리즈가 겹쳐지도록 표현

   

3)엘그레코의 영향 (블란서에 스페인 붐) 엘그레코의 "오르가즈 백작의 장례"(하단그림)

아래 그림은 그리스 인이지만 스페인에서 활동하였던 화가 엘그레코의 그림으로써 천상의 부분과 지상의 부분을 따로 처리한 것이 돋보인다. 이렇게 처리함으로써 오르가즈 백작이 천당에 갔다는 암시가 잘 드러난다. 그러나 쿠르베의 그림에는 사후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틀림

   

   

   

   

*오르세 미술관; 보통 우리가 가르키는 미술사와 매우 다르게 되어있다. 근대의 시작을 쿠레베에서부터 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디자인적인 것을 전시하는 경우가 많다.

   

   

*쿠르베는 스타기질이 있던 양반인듯 당대 사회주의는 진보적인 이념이었다.

   

②도미에

-3등객실 1865

생전에 예술가로도 생각되지 않음. 직업은 카투니스트였다. 당시 사회만평적 작업으로 물의를 일으킴(감옥에서 6개월) 아카데믹한 양식이 아닌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 (지저분해보임) 도시 영세민들을 소재로 그렸다.

   

3등객실에서는 매우 고단한 삶 뒤 집에 돌아오는 3세대를 그렸다. /군중(새로운 주제): 지루하고 불편하고 피곤한 포장되지 않은 모습 그러나 해부학적 지식이 느껴지는 대생실력으로 그림 /객실(모더니티를 상징)/이러한 이들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인다.

   

그는 이외에도 변호사, 위선자, 프로페셔널한 중산층의 소시민적 습성을 많이 그렸으며 그림들은 주로 취미의 그림이었다.

   

③밀레 Millet

-이삭줍기(1858~59) 사실주의 +낭만주의적 요소

우리나라 사람들이 밀레를 좋아하는 경향 농민화가로 알려져있음/ 생활이 어려웠으며 누드를 그리다가 혹평을 받고 진실된 그림을 그리기위해 시골로 갔다는 이야기는 거짓말 (밀레에 관하여 잘못 알려진 진실)

   

실제로는 그리 가난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농의 가족으로 교육도 잘 받은 사람이었다. 바르비종으로 가서 이러한 그림을 그렸는데 그는 유럽의 화가임에도 불구 미국에서 더 애호되었다. 이는 그의 그림이 미국적 (청교도적)이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논란의 대상이된다.

계절에 따른 인간 노동의 존엄성이 느껴지며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림들이다. 이들은 매우 가난한 극빈농으로 부농의 맡에서 혹시 남은 낱알이 있지 않을까 해서 줍고 있는 장면이다. (이렇게 줍기 위해서는 극빈농 허가서를 정부로부터 받아야 했다.) 이는 극심한 빈부격차이다. 이들의 굽은 허리는 숙명적인 가난을 상징한다. 그러나 볼륨감이 있는 사람의 표현(미켈란젤로를 존경) 존엄성있게 표현

   

===> 이그림의 메시지에 대하여

프랑스에서는 ==>빈부격차

미국에서는====>인간 노동의 존엄성 으로 표현 이것이 일본과 우리나라에도 전달

   

<인상주의 ===> 인상주의도 사실주의의 한 부류임/ 현실에대한 그림으로 인상파들의 시대

에는 중산층들이 훨씬 잘 살았다. 이들은 중산층의 생활을 그렸고

광선에 대한 관심이 느껴짐>

인상파 부분은 수업을 하루 결석한 탓에 모두다 필기하지는 못했습니다. 따로 책에서 공부를 하셔야 할 듯 합니다.

①마네 Manet

-튈러리의 음악회 1862

중산층 생활을 그림. 파리팽창 파리도시계획(1870년대)===>사람들이 多 모이는 장소 생김

구성된 요소가 없는 우연적으로 보이는 그림이다.

스냅촬영 등이 성행한 영향이 있다.

당대의 분위기가 완연히 느껴진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느껴진다.)

남자들의 모습은 영웅적 모습이 아니고 댄디한 인물들이었다. (화술 잘차려입음)

여가의 모습을 즐기는 모습, 가로등/까페/기차여행/카바레

이러한 사람들의 주된 하루일과는 "산책" 만보자 였다. ==>지팡이를 들고 삶을

관찰하는

우리나라에서도 1920년 변화한 삶==>"산보" 를 해서 변화한 삶을 관찰하고자함

이러한 산보하는 것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특징

   

-풀밭 위의 점심 1863

   

Salon of the refused "낙선전" --> 나폴레옹 3세의 창안

낙선한 사람들의 그림을 모은 낙선전에 사람들이 잘 출품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조롱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마네의 그림도 조롱당하였다.

옷 벗은 여자와 남자 2명이 등장하는 그림에서 ===> 실제 이렇게 빤히 쳐다볼수

있느냐의 문제

마네는 너무 많은 것을 그렸다. 인물, 초상, 풍경, 정물, 이러한 요소요소 마다 그림이 그려진 방법이 다르다.====> 조화가 잘 되지 않는 듯한 느낌?

여인의 신체는 볼륨감을 상실하였다. ===> 어두운 부분 vs 밝은 부분==> 생략

뒤의 배경 부분은 얇게 발려 있다. 오일을 많이 섞지 않고 옅게 그렸기 때문 이는 얼핏 본 듯한 순간적인 느낌을 준다.

주제와 매시지가 없지만 이 화가는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화가임 (현대적)

=====> 마네 VS 쿠르베=====> 현대 미술의 시초로 보는

   

②에밀졸라-이사람은 화가가 아님

세잔느의 친구이자 마네의 옹호자

" 주제가 중요한 것이 아닌 어떻게 그리냐는 것이 중요하다. 벗은 女와 男로 이루어지는 구도는 많이 있었다. 그는 이러한 고대적 요소를 창조성과 섞어 사용한 것이다"

라고 옹호

   

   

   

  당시 살롱에서 높은 평가를 받던 그림은 이러한 류의 그림이었다. (Cabanel,비너스의 탄생 1863)형식적이고 기술에 치우치나 기술적으로는 완벽

   

③모네 : 더 이상 아카데미 등에 관심을 갖지 않고 살롱에 올인하지 않아도 전시를

할 수 있다는 것 1973년 첫 전시회 인상파 전시회 (나다르의 스튜디오)

-1866~67

모네는 원래 캐리커쳐를 그리던 사람이었다. 노르망디에 살던 위젠부뎅이라는 사람이 어느날 모네의 캐리커쳐를 보고 그림을 같이 그리자고 하고 모네는 부뎅영감과 같이가서 그림을 그렸다. ===> 자연이 변화 약동하는 유동의 모습에 눈이 트이게 된다. (빛)

   

<- 수업시간의 그림은 이 그림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느낌의 물에 있는 보트를 그린 그림이었음 또한 이 그림역시

1866년에 그려진 그림.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그림과 비슷하다고 예상

   

-생타드레스의 해변 1870년작

터치들이 커졌으며 옷과 의자 에 흰색을 가미하여 물체의 고유색이 아닌 빛의 색으로나타냄

초기에는 빛의 색을 흰색으로 그렸으나 이후 인상주의 기법의 발달로 점점 빛의 색도 분화시켜서 그렸다.

<-그러나 이작품은 동명의 1866년작임

선생님이 보여주신 그림을 찾을 수 없었음

대략1870년작이면 이것보다 4년 뒤의 작품 이므로 이 작품보다 터치가 더 커지고 좀더 대담하게 표현했을 것이라고 생각

     

   

-일출(인상)1872

   

-그루누이에르의 보트놀이1869

물의 풍경좋아짐. 터치가 분할적으로 나타남. 중산층의 여가+인간이나 보트나 다 인상주의적으로 나타난다. 나중에 자기 부인이 죽어서도 죽은 후 변화하는 부인의 변화를그림

르누아르는 아직도 풍경보다는 사람이 중요한 그림을 그렸지만 모네는 그렇지 않다.

   

   

   

이들은 주로 작은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은 화구를 들고 나가서 밖에서 그리기위함

-파라솔을 쓴 여인 1886

빛과 바람에 따라 옷의 색이변한다.

검정색이 추방되었다. 잔디등을 그릴때는 색을 섞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막 그렸다.

강렬한 순색의 사용으로 강렬한 느낌을 주며 하얀 캔버스가 공장에서 생산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 이전의 화폭은 화가가 이에 약을 칠해서 누르티티한 기운이 있었지만 흰 화폭의 생산으로 색채는 더더욱 강렬해짐

   

-루앙성당 1894

   

-> 이후의 인상파들은 필기 못함

   

   

   

   

폴고갱부터-미술의엘리트주의(모더니즘-ART FOR ART SAKE)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27

   

①폴 고갱

19c 말 유럽은 산업혁명의 결과로 잘 살게 되었으며 제국주의 시대였음.

타히티는 이미 프랑스령이 되어있었고, 전기가 들어와 있었다.

고갱은 그곳에서 불란서 관리들과 문제가 많았다고

-이아 오라나 마리아(1892)

우리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마리아 넓은 색면색채, 일종의 성모마리아와 예수 경배하는 2명의 천사를 그림 내용은 서양문명인데 인물은 타히티. 색채가 다양하고 섬세해진다. (타히티 와서의 변화) 블란서의 색채(핑크, 보라) 가 많이 쓰였다. 감각적이다. 고갱의 그림이 훨씬 사실에서 왔다. 문학적 주제, 상상적 세계의 탐구 인상파에서 벗어남

-white horse 1898

   

여기서 보이는 주황색은 사실과 관계 없이 주관적인 색채를 사용한 것이다. 사실 그대로 그리는게 아니라 구성상 필요한 컬러를 넣는다. 카메라의 발전으로 더 이상 미술은 현실세계의 재현이 아닌 화가의 주관적 표현이 되었다. ===> 이에 따라 미술이 어려워지고 일반인에게는 어려운 엘리트 미술화됨 (특정층 겨냥)

   

②로트렉=====> 이부분은 김영나 선생님저 서양현대 미술의 기원 참조 도저히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어서 필기를 제대로 못했음

물랑루즈 1892

채색 석판화

 

③뭉크도 마찬가지 ----> 언뜻 기억으로는 베를린 분리파 ? 가 중요

   

<추상미술> 현대미술은 무엇을 그렸는가가 아닌 어떻게 그렸느냐의 문제가된다. 미술의 엘리트 주의

①마티스

-후식1897 아주 초기 인상파의 영향이 보이는 빛의 영향이 느껴짐. 패턴에 대한 관심과 물감자체의 쌓인 느낌등이 특징 (넷상에 그림 찾을 수 없음. 서양 현대미술의 기원참조)

   

-사치, 고요, 쾌락 1905

보들레르의 시에서 가져옴 눈에 보이는 주제가 아닌 문학적인 주제(<->인상파) 남부 프랑스 바캉스를 즐기는 동안 해 두었던 스케치에서 나온다. 마티스의 아들과 부인을 그린 스케치에 누드를 그렸다. 색이 밝고 강렬하고 순수하다. 색을 섞어쓰지 않았다.

쇠라의 기법과 비슷하다. (신인상주의적 터치의 영향) 그러나 색이 더 강렬하고 신인상주의에서 더욱 발전시켜 존재하지 않는 색까지 나타냄. 사람보다 인물과 인물사이의 공간을 부곽시킴. "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은 하루의 힘든 일을 마치고 휴식이되는 듯한 그림 ~~~" 마티스의 그림은 쾌락 사치, 고요한 분위기가 물씬나온다. (색채, 형태, 선)

기본적으로 색채+형태+선을 묘사적기능이 없이 표현적기능으로 사용

(이것도 책 참조)

   

-마티스 부인의 초상(1905) 당시 살롱전은 권위가 추락하였고 새로운 살롱전들이 생기기 시작하였으니 이러한 것의 대표적인 예가 살롱 도톤느이다. => "앞서가는 그림"

한 방에 전시를하였다. => 도나텔로가 야수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것 같구나. 색체의 범람이 느껴진다. 얼굴의 초록색(완젼 지 멋대로의 색), 해부학적 중요성이 중요하지 않음.

원근법이 다시 없어졌다. 그러나 찬색의 수축성, 노란색 빨간색의 팽창성으로 인하여 원근법이 느껴짐.

   

   

   

-생의 기쁨 (1906): 완전한 상상화 낙원. 색의 하모니

   

-선원(1906~1907) 

-빨강색의 하모니 (1908) 원근법이 없어져 벼렸다. 명암법도 없어졌다. 빛이 오는 방향도 없어졌다. 붉은색이 따스하고 호사스러운 느낌을 준다. 무엇을 그렸느냐 보다 어떻게 그렸느냐가 더 중요하다. 창문인지 그림인지?잘 분간이 않가는 이것은 그림의 구성요소이기 때문에 크게 중요치 않은것임

     

-춤(1910) 실제 색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닌 색체 자체의 뷰티가 느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간의 뷰티도 느껴진다. 마티스의 색채는 그 이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배색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른 여타 화가들의 배색과의 다르다. 기가 막힘. 예를 들어서 초록색과 파란색의 배색은 이전에는 이 둘이 맞는 색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던 것이다. 이 그림은 에르미따쥬 미술관에 있음

   

-서커스(1939) paper cut out 작업임

   

   

   

그래도 아직까지 마티스는 형태가 남아 있다.

   

   

피카소-추상미술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31

   

추상미술-피카소-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29

<추상 미술>

①Pablo Picasso

-First communion, 1896 어렸을 때부터 신동이었기 때문에 이런 그림 그리고 15세에 이거 그려서 상탐 (한마디로 구상 회화는 그에게 재미가 없었을 수도 있겠다. 싶음 너무 잘그려서 그릴게 없는거지 ..)

-젊은시절 바르세이유에서 옛날 고딕식 까페인 4마리의 고양이라는 까페에서 친구들이랑 놀면서 예술 토론하고 뭐 그랬다. 당시 로트렉등의 영향이 보이는 그림을 그림

-Blue period : 청년기의 세기말적인 우울함이 돋보이는 시기이다. 여기서 청색은 하나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억눌리고 디프레싱한 청색은 상징적인 색체로 쓰인 것이다.

이 시기의 대표작

라비 (삶) 1903

   

그의 친구인 카사헤마스의 죽음을 소재로한 그림이다. 카사헤마스는 어릴적 친구로서 같이 파리여행을 하는등 친하게 지냄. 사랑하던 여자가 마음을 받아주지 않자 상사병에 걸렸으며 여자에게 총을 쏜 뒤 (죽지는 않음) 총쏘고 죽었다. 피카소의 그림들은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그 원동력이다. 카사헤마스의 어머니와 그를 떠올리는 모자상이 등장하며 거의 뭉크를 연상시키는 절망적인 여인들이 그림속에 나타난다. 젊은 시기에 인생을 보는 철학적 사고를 나타낸다.

   

  -파리시기시작 1904

-1905 화장 : 핑크시대 여자도 생기고 생활도 폈다. 이것은 고전적 조각의 콘트라 포스토를 생각게 한다. (화음, 조화, 균형)

   

-1906 두 누드 : 굉장히 조각적이된다. 명암 표현을 강조하였다. 신체의 비례가 숏다리이다. 얼굴은 크다. 실제 사람이라기 보다는 마스크 같은 느낌이다. 스페인의 고졸이라는곳에서 바캉스후 고대 스페인 1, 2C 의 이ㅔ리아 조각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이것은 커텐을 들춰서 밖에 보면서 고객이 누구인지 보는 매춘부들이 주제

-1907 아비뇽의 아가씨들

형태가 뾰족해진다. 그러나 위의 주제와 같은 주제 커텐의 존재로 매춘부라고 생각된다. 맨 왼쪽에서 두 번째 사람은 커텐밖으로 나온다. 아비뇽가는 바르셀로나의 홍등가 같은데이다.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그리기 위해 많은 스케치를 한 작품으로서 초기 기획에서는 맨 왼쪽 아가씨 부분은 양복입은 남자가 해골(인생무상) 을 들고 들어오는 구상이었다. 피카소는 이 남자를 의과대학생으로 생각하고 이후 선원이 등장하는 것으로 바꾸어 그렸다. 그러나이를 나중에는 다섯명의 여자로 바꾸었다.

   

이를 큐비즘의 시초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큐비즘은 이 그림을 표현하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여태껏의 그림은 화가가 1점에서 본다는 전제에서 나오지만 여기서 피카소는 뒷모습과 앞모습을 합쳐 그렸다. 이러한 그림이 그려지게 된 배경으로 당시 보여지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다는것을 들 수 있다. 대상과 공간과의 관계가 이전에는 원근법의 고악ㄴ에서 인물의 위치를 그렸다면 피카소의 그림에서는 커텐이나 사람이나 다 같은 면에 있는 것으로 보이며 몸이 여러 각도로 분해가 되고 빛이 오는 방향도 다 제각각으로 명암이 표현되어 있다. 인물과 공간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분석하여 파편화가 된다. 이전에는 (나는 인간이고 주변은 비었다. ) 의 관점에서 ====> 모든 공간과 인간이 평등하게 중요해 지면서 공간의 파편화가 진행된다. 이러한 그림이 그려지게 된 배경에는 아프리카 조각에 대한 관심이 나타난다. 그들은 아프리카 조각이 주술적 기능에 목적이 있다거나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그저 아프리카 조각 특유의 요술적이고 사나워 보이는 느낌에 주목한 것이다. 이 그림에서 나오는 것들도 마스크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맨 오른쪽 2명의 얼굴===> 매우 사나운 얼굴들

당시 칸바일러라는 화상이 다달이 돈주고 피카소와 계약을 함 이 당시는 피카소는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린게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대담한 실험이 가능했다는 추측도 가능

실험미술===> 큐비즘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됨

   

-1907베일을 가진 댄서=> 인체 뾰족뾰족 공간의 물질화

     

- 1909~ 1910 점점 그림에서 공간의 파편화 된 것이 라인이 수직 수평에 가깝게 되면서 날카로운 사선이 없어져 간다. 이후

1911 그림에는 사람이 있느지 없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공간과 사람이 분간이 안간다. 이러한 그림 스타일은 1914년 까지 지속된다. 입체주의 큐비즘시기임 이후 피카소의 그림은 다시 물질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는 꼴라주 기법을 통해서이다.

-1912 피카소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

캔버스를 동그랗게 한다. (예전 그림은 일종의 거울이다. 뭐 이런 말을 의미 하는 거) 그러나 앞에서보면 거울 위에서 보면 탁자임 헝겊을 붙였는데 마치 등나무로 짠 것 같은 느낌을 주는것이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글자인 JOU 는 뉴스 페이퍼의 뉘앙스를 주는 그림이다. 활자체의 부분으로 탁자위에 신문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위에서 본듯한 유리컵과 옆에서 본 레몬 같은게 그려 있다.

     

   

   

   

본격추상미술 - 칸딘스키, 몬드리안, 드 스틸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31

   

<이후 완전한 추상으로의 이행이 나타나는 애들을 배워보자 >

①칸딘스키

30살 이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굉장히 지적인 인물이다. 법학교수로의 영입을 거절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 인물은 뮌헨으로 가서 활동했는데 러시아 인이지만 독일어가 바이링구어 수준이었던 듯

-1903 청기사: 청기사의 앞서 나가는 이미지를 좋아했다. 신비 스러운 분위기

-파란산 1908~09 주관적 색체로 포비즘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기사의 모티브가 재등장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원근법의 느낌이 든다.

-구성2를 위한 스케치 1910 : 원근법이 없어짐 흰색이 많이 쓰여지면서 색이 밝아지고 공간이 유동화되고 이 인물은 당시 색체에 관한 글을 썼다. 붉은 색은 성장하고, 흰색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검정색은 죽음, 초록색은 부르주아적 분위기의 색으로 묘사

음악과 색체를 비교하기도함 예를 들어 갈색은 첼로, 푸른색은 플롯. 뭐 요론스타일

색체의 표현적이고 상징적인 면에 주목하여 그림은 일종의 교향악이라고 생각하였다. 각기 다른 색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어울어진다. 정반합의 원리를 이용하였다. 색체의 대비효과를 많이 이용하였다. (빨+희==> 오케이, 빨+자주=> 낫 오케이)

   

이 사람은 1910년이 물질적이고 정신적으로 타락했다고 생각했기에 이러한 타락한 세계를 그리는 것이 싫어서 추상적으로 갔다. 당시 신지학의 유행: 기본적으로 인도 WHDRYFHtj 동서양 종교를 섞음. 당시 지식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제 5싸이클 이후 한 싸이클 후에 유토피아가 도래한다고 믿은 것이다. 앞으로 올 유토피아의 질서를 그리기 위해 정신적 그림이야 말로 우리의 내면을 울리는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 시에 자원입대하였다. (이는 신지학을 믿던 인물들의 공통적 사고이기도했는데 그들은 파괴가 있어야 창조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세계대전에 대하여 긍정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 )

-1910 천사 가브리엘,1911 모든 성인들

두 그림 모두 최후의 심판 이런 것을 주제로 한거 천사 가브리엘이 트럼펫을 불면~ 뭐 이런거 표현

   

   

- 잠깐!!! 바실리 칸딘스키의 추상의 과정 추적

1911 모든성인들

1912최후의 심판

추상화로 이행하는 과정 완전한 비대상

   

1911 구성 4

완전한 추상 비대상 완전히 대상이 없어짐

=

   

   

===> 기본적으로 정신적 세계를 향한 탐구를 보여줌 완전한 추상은 1913년이라 보통 이야기한다. 당시 추상은 공유된 어느 현상이었다.

   

-1914 즉흥

엄밀히 따지면 하나의 풍경화로 볼 수도 있다. 긴장감 격돌 변화, 충돌의 느낌을 준다. 어두운색은 죽음의 느낌으로 이는 1차 대전의 전쟁의 기운이 느껴지기도한다. 이 시기 즈음 칸딘스키는 제목을 통일하여 (구성-오랜시간, 즉흥-격렬 자연스러움, 인상-자연과의 연결) 로 표현하였는데 그는 이 요소들이 회화의 구성요소로 생각.

칸딘스키 역시 추상이 장식적으로 흐를 가능성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1923 검은 사각형의 속

혁명 정부는 추상미술을 격려하였고 (러시아 혁명 정부 왜냐면 혁명 정신에 걸맞은 새로운 미술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 러시아 아방가드르가 나타나는 등 현상. 그러나 혁명이후 변질이되고 칸딘스키 역시 회의를 느끼고 1921년 바우 하우스의 교수로 갔다.

   

바우하우스는 실제 사람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美+기능) 에 초점을 두고 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나치의 정권하에서 바우하우스 교수들 자르고 해서 나중에 와해됨

   

   

   

-1941여러가지 행동들: 당시 우주, 미생물이 발견되던 시기로서 이러한 영향이 보이는 그림들.

(뭉글뭉글거리는 느낌의 현미경으로 소우주를 보는 듯한 그림 그림 찾지 못함)

   

   

   

   

   

   

   

②몬드리안

네덜란드인임 이 당시 1906년 정도는 마티스가 막 야수주의하고 피카소가 핑크시대일때임

<몬드리안의 그림 스타일 변천은 추상으로의 이행과정의 고전적 예를 볼 수 있다. >

-농가의 풍경

대칭이 되는 그림 국제사조와 관계가 없고 색채에 대한 관심도 느껴 지지 않는다. 균형이 잡혀있다.

   

   

   

-빨간나무 1908: 위의 그림의 나무와 비교해 보았을 때 색채가 강조되기 시작. 푸른색과 빨간색의 컴포지션. 이 시기 파리에서 마티스의 영향으로 야수주의의 영향이 보임 (빨간색===> 감정적 성향의 색깔임)

가지와 가지 사이가 늘어뜨려짐 아직은 배경이 배경에 불과 . (이후 뒤의 그림에서는 나뭇가지 사이의 공간이 공간이 아닌 대상만큼이나 중요하게되는것을 목격)

   

   

   

   

-회색의 나무 1912: 조금전의 나무와 달라졌다. 나뭇가지 사이의 공간이 그냥 공간이 아님. 빈 공간이 대상만큼 중요하게됨. 원근법이 없어지고 선과줄기줄기 사이에 규칙적인 패턴과 상호관계에 관심을 갖는것을 보여준다.

색채의 제한, 나무에 사실적 묘사가 없다. 반원형으로 패턴화된다.

   

-꽃피는 사과나무1912 : 제목이 없이 봤을 때는 뭐가뭔지 잘 모르겠는 지경. 금욕적인 색채 (큐비즘적이다.)

-파랑, 회색, 분홍의 구성 1912: 선과 면이 90도각도임

   

   

-바다와 부두 1913 : +,ㅡ 시리즈

   

=> 이그림 제목이 바다와 부두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제가 필기랑 제가 그림 그린것을 중심으로 다시 정리를 하기 때문에 대략 이러한 경향의 그림으로 보시면 됩니다.

   

   

   

WHY?? 왜 이사람의 그림이 이러한 전개를 보였을 까 ????

이 사람은 이원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은 빨<->파 남<->녀 이 2가지가 팽팽히 균형을 이룰 대 유토피아가 도래한다고 믿었다. 이사람에게 가장 관심있는것은 균형임. 모든 것이 팽팽하여 우주의 평화도래 신지학의 영향 현세는 혼란한 시대로 보고 이 세계를 넘어 또다른 싸이클이 와야지 유토피아가 도래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이러한 생각을 화면에 구성하였다.

   

네덜란드로 컴백 (1차 세계대전)

-구성 1916 : 색채를 추가하였다. 색채>선의 생각. 그래서 이러한 것이 색채와 건의 평형이 맞는 구성 ? (뭔말이여;;;)

여기서 그림의 예시로 든것은 COMPOSITION NO 6 인데 선생님 께서 예시 든것인지는 정확치 않으나 대략 이런 느낌이었던듯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1930 (1920년부터 이러한 그림)

그는 그림은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림이 유토피아가 되려면 쉬워야 한다고 말함 (삼원색+삼비색) 만 씀. 그는 조화의 원리를 이루기 위해 "비대칭" 의 원리를 사용함.

자로 그린것이 아님. 그의 그림은 대체적으로 작다. 왜냐하면 큰 그림은 컨트롤이 어렵기 때문이다. 색채 역시 끊임 없이 조정한 색. 최적의 비율과 균형을 찾음

(김영나 선생님 한미은행이 이거 로고 따라했다고 조금 분노하심) 모든 것은 유기체적 균형과 성격 그는 이후로 작품의 제목이 컴포지션이 되었는데!!!! 이유는 제목을 문학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왜냐면 선면으로도 충분히 표현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구조적 FRAME 빨간색(우리쪽으로 전진) VS (들어가는 느낌) : 과거와 다른 색채 자체로 구조적, 원근법의 느낌을 준다.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1422:뉴욕시기 변화.뉴욕의 활기에 영향. 훨씬 더 재즈 같은 리드믹컬한 그림이다.

   

③몬드리안의 그룹 활동 De stil (The style 영어 )

미술과 환경을 아름답게 하는 목적임 . 미술은 보편성이 있어야 한다. 그림은 미술관에 있는 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주거환경을 유토피아에 맞게 바꿔야한다.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디자이너와 건축가의 활동임

-Gerrit Rietveld, <슈뢰더 하우스> 1923 : 원래는 목수였지만 그의 건축은 개인의 집이지만 몬드리안의 화면을 그대로 옮긴듯한 느낌이다.

  

  

   

   

빨강 파랑의 의자 1917

인간미 결여 (이것은 더 스타일 운동의 나쁜 점이기도 하다. 이것을 보안하여 1920년 독일의 바우하우스 가 생김(기능미 강조, 재료, 가죽~ 기능 +아름다움)

   

   

   

   

현대미술 또하나의 흐름- 뒤샹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33

   

<현대미술: 또하나의 흐름>

①마르셀 뒤샹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 1912 : 입체주의 (파편화) 색체가 입체주의 (갈색류 금욕적인색) 그러나 입체주의와 다른 점은 입체주의는 누드를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그림은 그러나 기계를 연상케한다. 피스톤이나 뭐 이런거가 생각나게 한다. 움직임이 느껴진다. (큐비즘은 정적임) 또한 움직임이 우아하지 않다. 그림이 퇴짜 맞음.

   

  

  

  

1913년 무렵 거의 미술에 뚜렷한 활동이 없던 미국에서 유럽 회화전을 열었다. 아모리쇼 AMORY SHOW (무기창고 이용) 그 때 뒤샹이 이그림을 출품하였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아직까지도 사실주의 가 팽배하던 시절. 미국인들은 뒤샹의 그림을 굉장히 재미있어하였다. ===> 뒤샹 유명해짐 뒤샹은 " 자유롭고 가능성의 나라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결심하였다.

   

   

뒤샹은 미술이 지금껏 눈을 즐겁게 해왔지만 이러한 것은 동물적이라고 생각하였다. 미술은 뇌를 즐겁게 하는 것 이라는 생각을 함(사람을 생각게 하는것). 패인팅을 포기 하지만 아트는 포기하지 못함.

   

   

-자전거바퀴 1913 : 저게 어떻게 미술이냐 저건 몬드리안 보다 더 쉽다. (김영나 샘 말씀) 어떤 것을 미술이냐 하는 질문을 생각하게 한다. 결국 싸인만 하면 좋은 것 일까? 미술의 정의는 무엇일까 뒤샹의 의도는 아름다움을 주려는게 아니다. Ready made 공장 물건들을 작품으로 만듦

   

   

-1917 fountain : 이 변기 만든 회사 싸인을 해놓음. 사람을 어리둥절 하게 만든다.

 

   

- L.H.O.O.Q 1919 : 모나리자 에다가 장난질 이그림의 제목을 불어로 빨리 읽으면 L (she) H (ASS-엉덩이라는 뜻의 송어) " She has a hot~~" 모나리자의 미소를 모나리자가 음탕한 생각에 웃는다는 의미로 바꿈.

그는 수염을 그리고 제목을 붙인 것 밖에 한 일이 없다. 실제 보기 힘든 모나리자, 그러나 명화로서 각인이 되어있는 모나리자. 모나리자는 여성으로서 상당히 비대한편

안정감 있는 삼각형 구도이나 몸이 상당히 크고 실제 남자였다는 소문도 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동성애자여서 그렇다는 애기도 있고 그렇다.

   

뒤샹은 말장난을 이용한 작업을 많이했다.

   

   

   

   

   

다다-초현실주의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33

   

<다다 DADA>

일차세계대전 중 중립국으로 모인 예술가들 사이에서 유행한 운동

전쟁의 비참함 때문에 예술가들은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었고 인류의 합리주의에 대한 실망을 하게됨. 반미술 반문명 (반합리)

다다의 어원에서는:불란서 사전에서 D를 찾고 그다음에 A 를 찾고 아무튼 그랬다는 설도 있고, 루마니아 말로 목마라는 말도 있고, 애들이 처음하는 말이라는 설도 있고 미술운동이라기 보다는 미술, 문학, 전반에 걸친 운동이다.

사람들이 이 운동이 막 시작했을 때는 충격을 받았지만 이내 3~4년 후에 식상해졌다. (그냥 좀 설치는 악동의 이미지) ===> 사람들은 이내 익숙해졌고, 이해하게 됨. (다다로서는 극약) 이후 초현실주의로 이행한다.

   

다다의 아이러니는 그들은 미술을 반대 했지만, 결국 미술사의 중요한 파트가 됬다는 것이다.

   

-Hugo Ball at zunich cafe 볼테르 1916: 전쟁의 비참함에 허무주의. 인류의 합리주의에 대한 실망 반미술, 반문명 (비합리)

(사진 찾는 거 실패) - 카페에서 모여서 말도않되는 시짓고 시시덕 거리고 그럼

-Hugo Ball : 마분지 옷을 입고 시를 읊는다. (아방가르드적) 부루주아를 경멸한다.

   

-슈비터스 Merz회화: 1920 아무런 뜻이 없는 여태껏 미술재료로 생각하지도 않았던 쓰레기 문짝들을 갖다 붙였다. 당시는 충격적이였다. 그러나 균형있고 아름다운 구성을 보여준다.

   

다다의 의의: 결국 미술로 생각되지 않은 것들을 미술로 데려오고 반미술의 정신 전파.

   

   

<초현실 그룹으로의 이행>

①Max Ernst

-두개의 모호한 형태들 1919~20

당시는 기계의 시대 였다. 많은 사람들이 기계의 정확함에 매혹되었고 또 반대로 어떤이들은 혐오하게 되었다. 기계에대한 태도를 볼 수 있다. 사람들을 기계처럼 그렸다.

  

  

   

   

-종달새에게 위협당하는 아이들 1924: 종달새가 엄청 작음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에 쫓기는 듯한 느낌. 이런 일은 꿈 속에서는 가능하다. 근거없는 불안감을 표현

   

   

초현실주의 : 앙드레 브루통 제창. 서양 미술의 이성 중시하지만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는 이성에 의해 억압된 무의식이 있고 이것을 표현하자는 주의이다. 프로이튼의 이론과 연관

다다는 지멋대로 초현실주의는 좀더 교조적 (리더 앙드레 브루통)

문제는 어떻게 무의식을 그릴 수 있을까? 인데 방법은 많다. 에른스트는 사실주의 꿈에서 보는 듯한 느낌을 그림===> 당시 사실주의로 역행했다는 비판 존재.

   

②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고집 1931: 사실적인 묘사 능력 최고 말도 않되는 그림이지만 너무 사실적이어서 부정할 수가 없다. 바닷가의 풍경이나타남(달리네 고향동네), 알 수 없는 물체(앞에 새부리+뒤에 인간 손목), 시계가 늘어져 있다. .

함축된의미들:개미=> 간통의 의미

혀가 축 늘어진 듯한 모양의 시계=> 어릴적 감기 걸렸을 때 혀를 내보이는것 몬트레 불어로 시계의미

몬트레의 뜻은 혀를 보여달라는 말이다.

   

-해변에 나타난 과일 접시와 얼굴 1948

풍경이면서 정물 DOUBLE VISION

개얼굴, 누드, 서양배, 엎어진 항아리, 해변이면서 식탁이 나타남

   

③후앙미로

-사냥꾼 1924: 섹슈얼리티와 유머를 결합

환상적인 세계의 알수 없는 생명체들을 그림 태양과 거미를 합친것도 같고 그렇다.

사냥꾼같이 생긴 이상한 도형의 집합은 총을 들고 있고 마치 파이프를 입에 문 듯하다. 뾰족한 삼각형은 남성적인 것을 상징하고

egg 모양의 물체는 여성적인 것을 상징하고 암튼 그렇다.

   

   

   

   

   

뉴욕파의 등장 - 폴록,드 쿠닝, 바넷 뉴먼, 로스코,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34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전쟁복구중 뉴욕이 새로운 미술의 중심으로 등장하였다. 많은 유럽 미술가들이 미국으로 이민감 (앙드레 브루통+뒤샹)

1950년대부터 현대미술의 중심지가 미국으로 옮겨진 것이다.

①JACKSON POLLOCK :

완전 미국인 여태껏 미국 화가들은 죄다 유럽에서 교육을 받았다. (블란서) 어린 시절 불우, 10대 때 이미 알콜중독 이때 잭슨폴락의 심리 카운슬러가 "융" 의 심리학을 하던 사람이었다. 초기 작품은 초현실주의 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토박이

10대 때 대지측량하는 사람의 조수를 했다고한다.

일종의 문제아

자라면서 경제공황을 겪은 세대

청년기에는 2차 세계대전이후

전후 세대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합리주의를 부정하며

직감에 몸을 맡기고자하는 것이다.

이사람은 천을 밑에 깔고 (엄청 큰거) 물감통 잔뜩 넣고 휙 뿌림(몸을 통하여 나아감)

몬드리안의 작업과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쉬운 작업이 아니고, 몸 컨트롤이 중요하다. 화면가 작가의 대면인셈이다.

   

미국평론가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이 슈퍼파워가 됨을 느꼈다.

추상 표현주의 new york school 이라고도 이야기 한다.

초기 잭슨폴록은 청소를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1950년대 WMa 되면 그는 영웅시기를 지냈다. 당시 잡지 같은것에서도 주목함. 잭슨폴록은 "미국은 모든 실험이 가능한 나라" 라고 하는 이미지에 도움이 되는 인물이었다. 당시 냉전 시기에 유용하게 쓰여졌다고 한다. (이러한 이론들이 1970년대에 많이 이야기됨- 그 당시는 음모론 같은거 유행하던 시기)

   

   

No.14

그의 그림의 특징은 눈을 흥분시키고 all over의 느낌을 준다. 중심이 아닌 전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스피드를 느낄 수 있고 그냥 흩 QN린 것이아니라 위에서 통통 떨어뜨린 것도 있고 그렇다.

상당히 운율감이 나타남

   

②Willem de Kooning 여인 152

처음에는 예쁜 여자를 그렸으나 나중에는 괴물같은 여자들을 그림. 공격적으로 보이는 여상 그러나 아직은 그대로 여인의 형상이 남아있기는 하다. 여성의 Sexual한 부분을 강조해서 그렸다. (예를 들어서 LIPSTICK을 강조한다던가) 여성의 원형같은 느낌

   

   

   

=========>뉴욕 화파들이 다른 화가들과 두드러지게 다른점

1. 색체: 여태껏 유럽 화가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세련된 색채의 배합이 아니다. 상품에서 쓰는 페인트 색같은것을 섰다. ex)잭슨폴록-> 에나멜 프린트

날 것 같은 색들 (미국이 유럽과 다른 특징이다. )

2. 대화면

   

   

   

1950년 말경의 변화 ===> 드라마틱함은 잦아들고 면으로 바뀌기 시작함

추상표현주의 제 2세대 색면화가 나타나기 시작

③Barnett Newman 영웅적인 숭엄함을 향하여 1951~52

거의 벽화 같은 내 주변의 환경을 둘러싸고 있는 듯한 느낌. 이럴 때 회화는 다른 느낌이다. 뉴면은 경외감, 숭고감 등 추상적인 느낌을 표현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그는 그림 색면사이의 선같은 것을 zip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화면을 나누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가 되기 위해 쓰는 선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Adam 1952

   

     

④Mark Rothko

-Blue Green 1968

물감을 들이듯이 그림 화면 천 속에 먹어들어가는 느낌이다.

확실한 경계가 있는것이 아닌 숨을 쉬는 듯한 그런 그림이다. 추상적 감정, 종교적 느낌을 주고자 한다. " 내 그림은 중세의 종교화 같은 그림이다. 내 그림을 보다가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있다." 뭐 요론식으로도 말했다고 한다.

실지로 BOSTON의 러스코 채플에서는 러스코의 그림을 높이 걸어놓았다.

그의 그림은 편안하고 예쁜 그림이 아니라 가라앉으면서도 엄숙한 느낌

리움에 하나 있다고 한다.

예민하고, 은밀하고 끌어당긴다.

(이그림 완전히 이름 비슷한거 못찾음)

-Mark Rothko Untitled, 1968 (Blue on Blue Ground) Print

뉴욕 스쿨 끝

   

   

   

네오다다- 라우셴버그, 재스퍼 존스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32

   

<네오다다> 황당한 그림 그 당시 "다다" 적이라고 해서 NEO dada 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 네오다다의 경우 저는 이해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제가 정리하고도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책을 봐도 너무 개념이 뭔가 어려워요 시험으로 출제 경향도 낮고 하여 열심히 할 필요는 없지만 불안하시다면 쉽게 나온책 한번만 훑으시는게 좋으실 듯. 제스퍼 존스에 대한 설명도 불충분 합니다. 제가 이해 하기도 힘들고 좀 그런 부분.

①Robert Raushenberg

blue mountain colleage 를 다니면서 존케이지(작곡을 하는데 있어서 음을 구성하는 것은 과거의 행위로써 우연을 이용하여 작곡을 해야한다고 생각함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미복을 입고 연주회에서 피아노위에 4분 43초동안 그냥 팔만 올려놓는 연주를 하였다.--라우센버그의 작업과 굉장히 비슷한 면을 보여줌) 라는 작곡가를 만나다. 이둘은 미술이 우리의 생활과 유리되었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결합" 우리의 생활이 더 재미있다. "

-White painting

그냥 흰 물감을 화판에다가 칠하고 그곳에 조명을 비춰서 사람들의 그림자가 보이게 설치 (미술과 생활을 연결하였다. )

-모노그램 1559

지나다니다가 뭐를 주워서 작업함. 염소도 주워서 작업한것임. 헌타이어를 사용한 것은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 적인 면을 볼 수 있고 물감을 마구 칠한것은 추상표현주의를 보여주고 문자 꼴라주를 한것은 큐비즘 적인 요소를 보여줌.

라우센 버그는 다시 물건에 대한 관심들을 드러내고 있다. 라우센 버그를 비롯한 뉴욕의 새로운 작가들은 그전의 추상표현주의는 너무 화가 중심적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물건 중심으로 돌아감

   

   

   

   

-캐논 1559

애매한 그림이다. 조각인지 회화인지도 불분명하다. 삶의 여러 가지 단편들을 집어 넣어서 표현

(그림 찾지 못함)

   

②Jasper Johns

원래 백화점 쇼윈도 디스플레이 하던 사람

레오 파스텔리? 인가 하는 엄청나게 유명한 화상의 서포팅을 받다.

제스퍼 존스와 러쉬엔 버그는 이상한 관게였다고 함 파트너 쉽인지 동성애인지

러쉬엔 버그는 다양하고 활기 있는데 이 사람은 좀더 은폐적이며 수수께기 같다.

-네 개의 얼굴이 있는 과녁 1955

   

   

   

팝아트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37

   

   

<여기부터 팝아트>

①앤디 워홀 : 원래 디자인 하던 사람 순수로 돌아온 이유는 러쉬엔 버그 때문이라고 함 (나도 저렇게 유명하게 ....)이사람으로부터 순수미술과 현대미술의 경계가 무너짐. 판화 , 실크스크린으로 찍어서 만들었다. 고상한 미술이 없어지게 됨

60년대 이후 미국생활의 변화가 느껴짐: 교외에는 커다란 슈퍼가 생기고, 광고는 엄청 많이 틀어줘서 소비를 부추기고. 사람들이 다 도시로 가서 일하고

-켐벨 스프 1965

가장 기본적인 미국사람들의 대중적인 식품중에 하나. 어디서나 볼수 있는 이미지

-1962년작

기존의 포장 이미지를 활용 

     

   

-BRILLO 앤디 워홀_브릴로 박스(Brillo Box)_혼합매체_1964

슈퍼마켓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세제 브릴로 박스가 예술 작품으로 미술관에 전시되자 사람들은 '미술의 종말'을 애도했다. 세제 브릴로 박스와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는 외관상 비슷하지만,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어떤 요소에 의해 워홀의 박스는 예술 세계에 편입된다. 이와 같이 다원주의 시대에 작품의 외형은 미술의 자격을 부여하는 절대적 요소가 아니다(이거 인터넷에 있는 책 소개 배낀거임)

-60년대 TV의 공급 보급으로 스타들이 생기기시작 앤디워홀은 이러한 스타들을 따라한 사진들을 찍기도 하였다.

당시 최고의 유명인 본인이 유명인인양 설정

(자기가 스타라도 되는양 스타 사진 보고 똑같이 따라함 )

   

-Marlyn diptych 1962

앤디 워홀, <마릴린 먼로 2면화(Marilyn Monroe diptych)> 1962

마릴린 먼로를 주제로 작업 당시 마리린 먼로는 나이아가라란 영화를 찍을 때로 이 사진을 홍보용 사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먼로는 이 사진을 실크스크린으로 작업하였다. 네가티브 판화를 해야지 인물이 나오는데 작업 과중에 밀리면 얼굴이 이상하게 나온다. 이건 마린린의 실제 참모습에 관심이 없고 상품화 포장화된 이미지이다.

이 그림을 그린 1962년에 공교롭게도 마릴린 먼로는 자살함. 워홀의 주제는 죽음이라는에기도 있다.

   

   

   

-Gold Marlyn Monroe

이콘화의 전통??

②Roy Lichtenstein

-Drawning gril 1963

오하이오 스테이트의 교수. 만화에서 차용 . 아슬아슬하거나 극적인 순간을 뽑아서 커다랗게 확대함 이후 불필요한 것을 없애거나 강조 그는 개인적인 터치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게 작업함 (워홀도 마찬가지) 기계 생산된 듯한 느낌을 준다.

동그랗게 생긴 구멍이 무수하게 뚫린 철제 판같은 (철조망?) 같은 것을 개발해 내어 인쇄를 확대한 것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내었다. 또한 강조하려는 것은 점을 2개 찍는다거나 하는 방법을 이용함

-희망이 없음 1963

   

===> 개성과 터치가 중요한게 아니라 생활 주벼의 사실적 이미지로 다시 돌아옴

③올덴버그-> 이사람도 팝아트

-Floor burger 1962

   

   

-Spoonbridge&cherry

아상블라주=> 여러 가지 것을 설치한 작업을 의미

   

④키엔홀츠

-Dodge38년형 뒤 좌석 1964

당시 서민들이 많이 타던차 젊은 남녀 학생이 색슈얼한 행위를 하고 있음 여러 가지 직업을 가졌던 인물(바텐더, 주립병원 간호사) 그는 주위의 일들을 3차원으로 재현 어떻게 보면 사회 비판적 이미지도 갖고 있다.

   

   

   

   

   

   

사회비판적인 예술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6:52

   

근대에 들어서 작가의 자율성이 늘어나면서 사회비판적 미술이 늘어나게 되었지만, 이전에도 엄연히 사회비판적인 미술이 존재하긴 했다.

   

   

  • 고야, 5월 3일의 학살 1814
    • 근대사회에 오면서 주문자에 얽매이지 않는 그림을 시장에 내놓게 되면서, 화가는 조금 더 자유를 얻게 된다. 이에 짜라 사회비판적 미술이 그전보다 가능한 여건이 형성되었다(로마시대에도 정치인 비판같은 것은 존재했다) 누구에게 팔기 위한 것이 아니다.
    • 이것은 1808년 5월 나폴레옹군 침략때를 그린 것이다. 스페인 왕실은 무능하여 프랑스의 비위를 맞추기 긍긍했다. 마드리드에서 시민봉기가 일어났다. 황태자를 프랑스로 볼모로 잡아간다는 소문에 시민이 봉기를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시민들이 무자비하게 진압되고 학살되었다. 이것을 본것은 아니고 상상을 통하여 재구성했다.
    • 이 그림은 역사를 넘어서 사람들에게 일깨움을 준다. 1808년 5월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역사를 넘어서 현재 어딘가에서도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고 있음을, 또한 선한 시민의 저항을 유니버설하게 정서적으로 공감을 일으킨다.
    • 어두운 밤의 성당- 결국은 나중에 선이 이길 것이라는 종교적 암시
    • 자신이 대항해도 소용없는 것을 알아도 용감하게 항거하는 모습이다.
    • 인물들의 각기 다른 모습 -
      • 죽은 사람, 두려움에 떠는 사람, 두손을 펴고 예수처럼 항거하는 사람. 중간의 사람은 흰색 노란색으로 하이라이트되어있다. 얼굴이 거뭇거뭇한 이 사람은 손에 자국이 있으며, 이때문에 그리스도와 동일시하여 그렸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 피해자 그룹과 가해자 그룹 - 다양한 인간의 감정이 보이는 인간적인 것이 피해자그룹,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룹은 가해자그룹. 똑같은 자세, 똑같은 유니폼으로 얼굴이 보이지 않고 비인간적이다.
  • 오노레 도미에 - 프랑스 노랭가 1834년 석판화
    • 프랑스 리옹에서 파업이 있었고, 노랭 가의 사람들은 파업에 가담한다. 파업이 있던 거리에서 정부군이 조사를 위해 왔는데, 시민 몇몇이 군인들을 향하여 총을 쏘았고, 이에 군인들은 그쪽 거리에 있는 집에 쳐들어가 그시간에 잠자던 많은 시민들을 학살함. 이 그림은 사건 다음날 신문의 삽화로서, 국가권력에 의한 학살을 보여준다.
    • 누가 보아도 잠옷차림의 남자와 어린아이, 여자들, 그리고 침실이라는 배경은 이들이 무고한 시민임을 보여준다.
  • 보티첼리 - 비방 1494

    • 과거의 사회비판
    • 기록상 있는 그림을 기록을 토대로 재현하라 주문받아 그렸다. 그리스 고대의 화가인 아펠레스가 남긴 그림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 왼쪽부터 인물
      • 진실 - 손으로 하늘을 찌르는 벗은 사람
      • 양심의 가책 - 검정색 망토를 입은 이
      • 시기와 속임수 - 주황색 옷입은여자와 그여자와 한패인 여자
      • 죄없는 희생자 - 털썩 주저앉은 사람
      • 비방 - 흰옷을 입은 사람 - 흰옷을 들고 횃불을 들고 정의인척하는 사기꾼
      • 시기 - 검은 옷을 입은 사람
      • 재판관 - 재판관의 귀가 당나귀귀이다. 당나귀귀를 한 재판관에게 온갖 비방을 하고 있기에 판단을 할 수 없고 귀가 잡혀있다.
    • 보티첼리는 아펠레스의 그림을 다시그린것만이 아니고 그 자신의 상상력을 더하여 덧붙이기도 한것같다. 아펠레스의 기록이 별로 안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 이 알레고리화가 뜻하는 바
      • 메디치가문이 파지가문의 모함으로 한동안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사건을 말하는 듯(메디치가가 후원한 화가)
      • 메디치 축출기간동안 피렌체 신정을 주도한 수도사 사보나롤라- 후에 화형됨.
  • 히에로니무스 보슈 - 이브의 창조, 쾌락의 동산, 지옥
    • 세폭 제단화이다.
      • 이브의 창조 - 에덴동산임에도 불길한 느낌이 든다. 아담의 얼굴이 넋이 나가있다. 맨 오른쪽의 연못은 검정색으로 각종 상상의 벌레들이 동라다니고(중세 우화의 영향?) 서로 잡아먹고있다. 중간의 상상의 식물(눈) - > 어떤 사람들은 당시의 연금술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 쾌락의 동산 - 연약하게 생긴 남녀들이 온갖 쾌락의 행위를 한다. 중간에 등장하는 목욕탕은 당시 불륜의 장소로 생각되었다. 그림에 과일이 많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나오는 과일은 -> 달콤한지만 썩는 것을 뜻하므로 인생무상을 뜻한다. EGG의 형태가 등장-> 달걀 역시 금방 깨질 수 있는 것이므로 인간들은 온갖가지 쾌락을 추구하다가 결국에는 지옥에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 지옥 - 중간에 작가의 자화상이 등장한다. 우리를 바라보기만 하면서 자신은 벌을 받고 있지 않는다. 계란모양의 주막집이 있고 물고기 부레같은 것이 등장한다
    • 당시 현실에 대한 비판?
      • 보쉬같은 경우 성직자 비판을 많이 하였다. 보쉬같은 경우 많은 후원자가 있었고, 중세에 악기는 악마의 소리를 뜻한다(아름다운 소리로 홀림)
  • 윌리엄 호가스 - 방탕아의 편력 1735
    • 8면으로 나뉘어 일종의 일일연속극처럼 묘사되어있다. 탐레이크라는 인물은 부자아버지를 두었으나, 아버지는 엄청난 구두쇠였다. 옥스퍼스 대학에서 공부중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돌아온다.

         

  

  • 아버지가 구두쇠라는 증거 - 구멍뚫린 성경책, 난방도 안되고 낡은 집, 숨겨진 금화닢에 펜을 들고 있는 변호사는 탐레이크가 안보고 있는 동안 훔치고 있다. 예쩐에 사귀던 여자 사라는 사기결혼. 엄마가 내 딸 책임져라 이러고 이쓴데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 술집 내지 이런데같다. 왼쪽 여자는 색깔 스타킹 입는 걸 보아 창녀.
  •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인도풍 의상을 차려입은 탐 레이크, 윌리엄 호가스는 프랑스 스타일을 혐오하였다고 한다. - 레이크의 사치의 현장
  • 왕궁파티에 가는 도중 빛쟁이들의 추궁을 받는다
  • 늙은 여자와 결혼
  • 정신못차리고 다시 도박
  • 감옥소 간다 신춘문예 실패
  • 미치광이. 세라는 눈물을 흘린다.

모호하긴 하나 새로운 비판의 방법이다. 일화를 가지고 우의적으로.

  • 자크 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
    • 다비드는 당시 유행했더 부셰 등의 로코코- 쾌락적 달콤한 예쁜 여자의 그림이 유행하던 때에 미술을 일신하고자 했다.
    • 사회적 덕목을 강조하고 도덕적인 그림을 그렸다. 당시 로코코풍 그림에 대한 비판에서 왔다.
  • 들라크루아 바리케이드를 넘어가는 자유 1830
    •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연상시키는 그림이다. 프랑스의 애국심을 자극한다.
    • 각각 노동자(낫), 지식인(모자, 옷차림, 총), 아이(??) 등 사회 각계층을 다 집어넣었고, 이러한 사람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이끌어가는 프랑스의 자유의 여신
    • 이는 19세기 프랑스의 격변하는 사회에 따른 계급의 문제도 거론했다.
  • 농민문제 - 밀레
    • 씨뿌리는 사람 1850
      • 다리가 분명하게 표현되어있지 않다. 마치 땅속에서 태어난듯, 에너지가 느껴진다. 힘이 나온다. 그당시 어느그림보다도 농민이 우람하게 그려져있는데, 당시 계급문제가 부각되던 19세기 사정을 감안하면 정치적으로 다가올수도 있다. 농업의 고귀함을 나타내는 낭만주의적 그림으로 볼 수도 있다.
    • 밀레 - 괭이를 든 사람 1863
      • 푸석푸석한 땅위에 괭이에 기대선 사람 - 기름진 땅의 느낌이 아니다. 지친 듯 하면서 절망에 찌든 농민의 모습 - 이런 그림들은 쿠바에서 유행했다(선동적이기 때문에)
      •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그린듯하다.
  • 디에고 리베라 -
    • 꽃의 날, 1925 멕시코 화가
      • 프랑스 유학파, 프랑스에서 큐비즘 등을 접하였으나, 멕시코로 돌아와서는 "멕시코적 그림"을 그리고자 하였다. 그림스타일이 이때 완전히 바뀌었다. 당시 멕시코는 스페인으로부터 300년 압제에서 벗어났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멕시코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것이 필요했던 듯 하다.
      • 벽화는 그릴 시에 서양식 프레스코를 이용하지 않고 선인장 즙을 이용하려 해보았지만 실패했다.
    • 디에고 리베라, 노동자의 해방, 1931
      • 당시 문교부 청사 프로젝트를 맡아 하였다. 이는 거의 대부분의 멕시코 사람들이 문맹이었기 때문에 기획되엇던 프로젝트인데, 리베에라는 공산당에 입장, 사회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협업의 중요성을 역설하곤 했지만, 나중에는 좀 이상해졌다.
    • 디에고 리베라, 백만장자의 만찬 1923-27
      • 미국에 대한 비판? 자유여신상이 탄알과 함께 있다.
    • 우리들의 빵(멕시코 의식)
    • 록펠러 센터의 벽화그림 ->여기다가 레닌 얼굴을 그려서 벽화를 지워버렸다. 미국에서의 일거리도 다 날아가버렸다. 멕시코 벽화운동
  • 피카소
    • 게르니카 1937
      • 벽화에 가까운 대작이다. 스페인 내란 당시 소도시 게르니카는 공화파 지지지역, 나치 공군기에 의해 3시간동안 32톤의 폭격을 받았고, 피신하는 주민들까지 기관총으로 공격.
      • 당시 피카소는 프랑스에 있었는데, 조국에서 벌어진 학살을 고발하고자 2개월만에 게르니카를 그려 파리 만국박람회에 공개, 게르니카는 그 후 학정에 대한 저항과 화해의 상징이 되었고, 침묵하던 세계의 지식인들이 직접 스페인으로 달려가 총을 들게 함.
      • 그림에는 말에 올라탄 사람 아래 여러 사람들이 짓밟혀있는 것이 보인다. 말은 히틀러의 나치정권을 의미하며, 말위의사람들은 프랑코 세력을 의미한다고 함.
  • 듀안 핸슨 DUANE HANSON 쇼핑백을 든 여인 1972
    • 우울증, 무기력한 군중, 소비사회, 뭐 이런것을 비판한 작품인듯
      • 1960년대 후반부터 실제 사람과 똑같은 인물상을 제작하였는데, FRP로 모양을 만들어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자세히 표현하고, 옷을 입혀 만들었다. 초기에는 뚜렷한 사회적 논점을 가진 인종문제, 베트남전 등을 작품 주제로 하였으나, 나중에는 일상적인 삶에 지친 평범한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활동.

           

           

         

         

         

         

   

   

여성과 미술 3개- 페미니즘, 역사속의 여성 미술가, 남성의 시선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8:55

1969년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작

1960년 이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전후 평화가 지속되던 시대는 지나고 여러가지 갈등이 야기. 흑인폭동, 히피폭동, 케네디 암살 등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베트남전은 그동안 테크놀러지가 인류에 봉사해왔다는 생각을 바꾸어놓았고, 새롭게 과학의 발달에 따른 환경문제 등 다른 면을 보게 만들었다. 기존의 가치는 전복되었고, 이것 중 하나는 여성미술의 새로운 대두이다.

여지껏 백인, 서구, 남성중심의 사고가 해체되어 일종의 다원주의가 일어났다. 옛날엔 서구중심이었던 세계는 아시아로 눈을 돌리기 시작,

  • 페미니즘

    (18?19?)40년경부터 시작(정치적), 1969년을 기점으로(사회운동으로) 증폭. 페미니즘은 미술사와 미술사외의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여성운동은 19세기 무렵부터 계속되어 19세기 말에는 여성은 투표권을 얻게 되었고 코르셋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기본적으로 페미니즘은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자는 운동이다. 최근에는 여성보다는 개인

    • NEW YORK TIMES CARTOONS
      • 여자 원시인들이 그림을 그리면서"이제껏 위대한 남성 미술가가 한명도 없었던 것이 이상하지 않아?"라고 얘기한다. 우리가 원시인들의 벽화를 떠올리며 누가 그렸을까 생각했을 때에 당연히 떠오르는것이 남성화가이다. 그 만화는 이러한 것을 꼬집어서 웃음을 준다.
    • GUER(R)ILLA GIRLS
      • ACTIVISTS 행동중에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 고릴라 모양의 가면을 썼다.
    • 전단지 "The advantages of being a woman artist"
      • Susan Lacy <여성의 강간, 살인에 대한 무언의 해프닝"
        • 시청앞에서 장례?의 장면을 연출하는 전투적인 모습
        • 20세기 초에 나오기 시작한 퍼포먼스는 50 60년대에 특히 활발했다. 또한 페미니즘 활동가들의 퍼포먼스는 전투적인 양상을 띤다.
      • Hannah Wilke (퍼포먼스, 60-70년대)
        • 껌을 씹어서 자궁모양을 만들어서 몸에 붙임
        • 그러나 이러한 작가의 작업방식은 페미니즘 견지에서 공격받고 있다 (essentialism때문인듯, 게다가 페미니즘 미술가 치곤 예뻐서^^;;- 또한 마치 남성의 시선을 의식하는 듯 느껴지기도 해서)

             

             

  • 역사 속의 여성 미술가(20세기 이전)

    19세기까지 여자 화가는 거의 없었다. 화가로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 당시 화가 교육기관에서는 남자의 누드를 그려야 했는데, 드로잉 수업에 여자가 참여할 수 없었으므로 여자는 아예 입학이 되지 않거나, 입학했다 하더라도 누드 드로잉은 할 수 없었다.

    19세기 정식 입학이 가능하긴 했지만 에콜 데 보자르에는 여자가 없었다. 때문제 여자인 유명한 미술사학자도 미술가도 없어서 미술사가 남성중심의 시각으로 전개된 층면이 없지 않다.

    존재했던 여자 화가들은 주로 가족, 초상화, 정물화를 그렸다.

    매우 드문 경우로 sofonisba Anguissola, Attarani 가족의 이중 초상화1580 - 있기는 했다.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7세기, 홀로페르넷의 목을 베는 유디트
      • 아버지가 화가, 15세에 화실에 다니다가 강간, 2년여에 걸친 소송, 그 후 그린 그림들은 자신을 강간한 사람에 대한 복수를 그리고 있다. 끔찌한 장면이 카라바지오에 영향받은 화법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뛰어난 화가였음에도 여자였던 탓인지 많은 기록은 없다.
    • Rosa Bonheur 말시장, 1853-55
      • 거의 자신을 남자로 생각했던 화가였다. 남장을 하고 다녔다. 이 당시 여자가 바지를 입으려면 경찰서에 반년 단위로 허가증을 받아야 했다.

           

  • 20세기 이후에 발굴된 여자화가(70년대까지 페미니스트, 여성성이 미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심)
    • 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EEFE, 1887-1986
      • 작품은 LIGHT IRIS와 양귀비 등..
        • 사진가 스티글리츠의 애인이자 모델, 불행히도 스티글리츠의 애인이라는 것 때문에 화가로서 역량이 가리워짐. 화가로서 주목받는 것은 70년이후 거의 80년대. 뉴멕시코의한적한 곳에서 생활. 은둔생활, 지금은 굉장히 인기작가.
      • 17년대에 많이 발굴된 화가들은 여성만의 특징을 보여주는 경우가 굉장히 많지만, 80년대에 가면서 바뀌었다. 남녀가 같이 태어났으나, 교육의 차이라고 생각하는 이론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 제3세계 여성의 발견. 멕시코 부유층 의과대학생, 전차 교통사고 거의 죽을뻔 했고 여러 번의 수술, 일생을 고통스럽게 살았다. 당대 최고의 미술가인 리베라와 결혼(오) 완전 바람둥이(?)
      • 그러한 것들을 그림으로 그림
      • 헨리 포드 병원(디트로이트) - 아이를 계속 유산한 경험을 그림으로 그린 자전적..
      • 칼로 몇번 찌르기
        • 당대 일어났던 살인사건을 자신과 디에고로 인물을 변형하여 그렸다.
        • 이렇게 프리다 칼로는 솔직한 자신만의 세계를 한 여성의 경험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그렸다.
    • 루이스 부르주아 Louis Bourgeois
      • Cumul 1, 1969
        • 프랑스인, 어릴적 어머니가 죽고, 유모 경 가정교사가 이 여성을 돌보았다. 아버지가 유모와 불륜. 이에 상처받고 아버지를 증오
        • 자꾸 움직이는듯한 물질적인 것을 조각으로 나타냄
          • <아버지의 파멸>
    • Judy Chicago, Dinner Party, 1979
      • 39명의 역사적 여성을 뽑아서 그림. 그들을 위한 만찬을 차려주는 식으로 제작, 300여명의 여성이 합작. 도자기, 천 등의 재료를 사용, 결국 이것은 남성중심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매우 정치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업을 산다는 사람이 없어서 전부 해체된다.
  • 80년대 들어서 여성미술의 변화
    • 80년대에 들면 여성미술이 많이 달라진다.
    • 신디 셔먼 Cindy sherman, untitled film
      • 소피아 로렌, 마릴린먼로가 나온 영화의 장면을 재현한 열출사진, 굉장히 평범하고 진부한 장면을 표현하였다. 대체적으로 치동적인 인물로 분하여, 음지에서 자신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인물인듯한 느낌. 여성에는 스테레오타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뀔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 90년대 이후에는 역사적 초상화를 패러디하기 시작. 원작과 달리 셔먼의 패러디는 무섭고 음침하기도 하다. 우리 관습적으로 믿었던 것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하며, 역사적 진실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 바바라 쿠르거
      • 원래 마드모아젤이라는 잡지의 기자이너엿다. 잡지디자이너답게 타이포그라피와 이미지를 조합한 작업, 여성의 피동적 이미지를 그렸다. 남자와 여자의 다름은 성의 다름이 아닌 사회에서 스테레오타입과 온순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순치된 것이라는 것이다.
      • 여성의 이미지를 공격적으로 표출하기도 하였다.
      • 또한 그녀는 권력이 왕이나 국가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분산되고 잘 보이지 않는 권력이 개인을 종속시킨다고 생각하였다. 권력은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메커니즘이며, 권력의 도구는 언어라고 생각하였다.
        • 사내대장부가 ~~, 여자는~해야지
      • 80년대 이후 여자의 경제역의 이유를 들어, 여자가 피동적인 이유는 남자가 경제력을 쥐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보급되었다. 경제력은 권력과 힘을 의미한다고 생각.
      • <YOU ARE YOURSELF> <I SHOP THEREFORE I AM>
      • 맑시스트적인 이론을 갖고 있다. 지금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지만 이러한 철자와 사진을 합친 것은 당시로서 획기적인 것이다. 그녀는 이러한 이미지를 전광판으로 띄우기도 했다. 여성미술이 파급효과가 크려면 퍼블릭스페이스에 전시되어야 한다고 그랬다.
    • JENNY HOLZER
      • <INFLAMMATORY ESSAYS> 연작
        • 여러 책에서 문구들을 발췌해와서 하나하나 봤을때는 맞는 얘기지만 조합하면 상반되는 이야기들이다.
          •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안된다 - 전쟁때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은 영광된것이다
          • 누가 한 말인지 모르지만 사회적으로 퍼진 이야기들을 조합.
      • 1982년 어느 은행앞에 이러한 설치도 했다. 그리고서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것.
      • 티쳐츠나 전광판에도 이러한 글자 장난질을 했다.
      • 구겐하임에서 1990년 전광판에 글씨를 띄웠다.
    • Rebecca Hom
      • Unicorn - 1970
        • 원래 조각하던 사람인데 마스크를 쓰지 않고 조각하다가 다쳐서 1년간 병원신세.
        • 그동안 사람들과 단절되어 통화의 여러가지 방법을 생각.
        • Paradise window - 1975-77 새를 이용한 작업을 많이 했다. 새는 예로부터 인간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메신저
        • The moon the chid, the river & the anarchy 1992

       

       

  • 남성의 시선
    • 라파엘로, 성모(아무거나)

      19세기까지도 주로 스테레오타입의 여자를 많이 그렸다.

      종교화에서 성모마리아의 이미지는 라파엘로의 마돈나가 원조이다.

      다정다감한 모성을 부드럽게 표현했다.

    • CHARDIN, 식사전의 기도, 1740
      • 계몽주의 시대 인간은 교육시키고 깨우치면 점점 더 발전할 수 있다는 사상. 따라서 자녀교육이 부각되며, 자식을 잘 양육하는 현명한 여성 - 그림으로 표현됨.
    • MARY CASATT, 모자상(아무거나, 많이그려서 여러 개 남아있다)
      • 메리 카사트같은 여류화가들이 모자상을 많이 그렸다. 미국화가로서 프랑스에 유학, 드가, 모네의 영향이 나타난다. 엄마와 아이의 물리적 접촉이 강조되는 분위기에서 이런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 (교육학적으로) 여성미술이 70년대의 경우 남자와 여자의 그림이 다른 점을 연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었는데, 여성화가는 남성화가와 달리 경험에서 나온 그림들을 그린다는 생각들이 생겼으며, mary cassatt의 이러한 그림은 이러한 가설의 근거로써 제시되었다.
    • Dorothea Lange, Migrant Mother, 1936
      • FSB(연방농업정책국?) 프로젝트로 대공황당시 빈민들을 취재함
      • 남자는 여러가지 인간형으로 그려졌지만, 여자들은 몇 개 안된다.
    • 팜므 파탈의 이미지 들라크루아 메데아, 1838

      • 그리스 연극 인물, 메데아가 남편에 대한 복수에서 자신의 아이들을 죽이고 돌아버린다. 연극적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림에서 인물의 눈이 정확히 묘사되지 않는 등 감정이 느껴진다

        연극적인 요소를 많이 느낄 수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 나오는 여인. 남편 제이슨에게 버림받고 복수심에 불타 두 사람의 사이에 난 아이들을 다 죽여버리는 여성. 여기서 보여지는 감정 - 복수 사랑 미움이 섞여지는.. 마녀로 변해서 악인이 된다는 이야기. 일종의 팜므파탈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요녀- 아름답지만 남자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시커먼 동굴 속에, 공포에 질린 어린아이들, 번쩍이는 단도, 어둠에 얼굴의 반 이상이 가려져있음에도 눈빛이 느껴지고,

        *이런데도 불구하고 볼륨형태등이 아직까지 고전주의적 누드의 형태가 남아있다.

        **빅토르 위고의 문학작품에서 나오는 우울하고 이국적이면서 극적인 요소와 비슷한, 굉장히 칼라풀한, 색채가 있는 표현, 규칙규범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 하지만 들라크루아는 훨씬 고전적 형식을 맞추려고 함(위고는 훨신 투쟁적).

    • 클림트, 홀로페르네스와 유디트(유명한 유디트 말고 아르누보분위기)
      • 데카당하지만 아름답고 세련됨
    • 프락시텔레스,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 bc 350
      • 크니도스 섬에 놓았는데 이것을 보려고 선원들이 내려서 껴안고 갔다고 한다.
      • 여성의 누드가 sexual object로 생각되었다는 것이다.
    •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 와상 - 남성을 토대하는 수동적인 여성의 그림. 요즘에는 많은 핀업걸 이미지.
      • 워낙 촉각적이라 감각적, 자신을 디스플레이하는 느낌
    • 조르지오네, Sleeping Venus 1508
      • 인체의 굴곡과 자연의 굴곡이 공명한다. 여성과 자연을 동일시.
      • 여성=자연=동물=순진무구 / 남성은 culture라는 인식
    • Toulouse Lautrec - 병원에서의 검사
      • 툴루즈 로트렉, 드가처럼 교묘하게 표현한 것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그렸다. 매우 저널리스트적 감정없이 그림.
    • Picasso 아비뇽의 아가씨들
    • 고갱 이아 오라나 마리아
    • 메리 카사트 오후5시의 차, 1880
      • 19세기까지의 그림에서 여성들은 대부분 활발하게 활보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private한 공간에서 생활하는 모습, 집안이 없더라도 배경은 울타리 속에.
      • 모리소 basket chair

         

  • 우리나라의 여성 미술
    • 천경자
      • 생태 1950
        • 일제시대 일본에서 그림, 해방되고 일본화를 그리는 사람을 매도하는 분위기 - 천경자는 뱀을 그리는 여류화가로 유명해짐. 친구가 햄이 허리띠인줄 알고 집었다가 물려죽었다. 상호(가명)라는 유부남과 사귀었는데, 35마리의 독사를 그림(상호37살이래서두마리 더그림) ㄷㄷ
      • 전설 1959
        • 올빼미 (마녀의 새) 면사포 쓰고 있는 자기를 그림. 독버섯, 실제와 환상의 조화, 색채가 곱고 화사한 면은 여성적이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이 자전적인 작품이다.
      • 여인과 새 1982
        • 천경자는 여행 관련 그림을 많이 그리고 글솜씨가 좋았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림이 아닌 자신의 다른 점을 잘 이용하여 유명해졌다고 볼 수 있다. 별스러운 여자로서의이미지를 구축, 자기자신을 잘 셀링했다.

             

             

    • 90년대 이후 - 이불
      • 알리바이 1991

        아시아의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작업. 나비부인같은 조그맣고 그런 여성. 실리콘 안에 나비 있고 핀 있음. 장식물, 공예물 같은것을 많이 이용. 또한 PENETRATE의 이미지 - 고통스럽지만 아름답고 감각적 - SEXUAL

        아시아 페미니즘

      • 아마릴리스 1999
        • 괴기스러움
      • 무제 2002
        • 에일리언같은 이미지, 여성, 목성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촉수같은 것들
      • 사이보그 시리즈 1998
    • 니키 리
      • 한국의 정체성에서 자유로움. 초기의 프로젝트는 신디셔먼처럼 정체성 아이덴티티에 관함.
      • 아이덴티티는 늘 유동적이며 바뀔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줌
      • 한 집단에 들어가서 완전히 그 집단의 인건인 것처럼 꾸미고 그들과 먹고 마시며 나중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사진찍어달라고 함.
      • 히피 프로젝트, 스케이트보더 프로젝트, 할머니 프로젝트(시니어 시티즌), 레즈비언 등등

        <PARTS>2004

        남성은 부분만 나오고 자기만 나온다. 표정도 화장법도 다르고 완전히 다른 인간인 양 매 사진이 연출사진 -> 관계에 대한 고찰

      • 영화도 찍음. 니키가 두명. 한명은 아카데믹하고 한명은 사교적, 결국 어느쪽이 진짜인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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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르네상스 회화의 지역별 특색과 작품들

   

  • 지역별 특색

    15세기 르네상스(Quattrocento)의 회화는 피렌체와 플랑드르 지역을 중심으로 상이한 화풍을 보여주며 발전하였다.

    • 피렌체 -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이태리의 르네상스가 인본주의적 관심에 입각하여 기독교적 주제 이외에 그리스, 로마 신화를 주제로 도입하여 이를 사실주의적 회화 기법으로 재현하려 했다.
      • [이태리와 플랑드르의 차이]- [과학적인 인체의 묘사 시도, 빛, 채향성으로 공간 재현]이태리 르네상스 화가들은 명암법, 원근법, 단축법, 해부학을 통해 과학적인 인체의 묘사를 시도하였으며 아울러 빛의 방향성, 건물의 채향성을 고려하여 완벽에 가까운 공간을 재현하였다. 반면 플랑드르의 회화는 [국제 고딕 전통]의 연장선 상에서 발전하였다. 미시적 관점에서 세부 사항들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감춰진 상징주의(disguised symbolism)를 보여주었다.
        • [마사치오(Masaccio, 1401-1428)]는 장엄한 구조와 엄격한 조소적 양감을 완벽한 원근법에 적용시킨 최초의 화가로 15세기 르네상스 회화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의 <성 삼위일체,>는 브루넬레스키의 수학적인 법칙에 근거해서 그려진 최초의 그림 중의 하나로 브루넬레스키의 건축 양식에 따른 납골당을 배경으로 큼직하고 육중한 인물들을 묘사함으로써 국제 양식의 시각적인 즐거움 대신 훨씬 더 진지한 감동과 극적인 장엄함을 선사한다.
        •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37-1455)]는 보수적인 기법을 통해 경건하고 종교적인 분위기를 창출하여 영적 경험에 대한 비젼을 그림으로 시각화함으로 성스러운 장면을 목도할 수 있도록 보는 이를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 그의 <수태고지>, <Noli me tangere> 등에서도 이런 특색을 찾아볼 수 있다.
        •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의 <죽은 예수>는 단축법을 사용한 대표적인 예로 예수의 신체를 발끝에서 내려다 보는 시점으로 묘사하였는데 의도적으로 크게 표현된 머리는 의도적인 단축법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즉 그의 단축법은 인물의 재현보다는 공간의 깊이감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이를 통해 여전히 르네상스 회화에서 인물보다는 배경이 되는 건축이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4-1492)]는 <비너스의 탄생>과 <primavera>을 통해 신화적인 주제를 보여주었는데 이교도의 신이었던 비너스가 이렇게 회화의 주제로 적극적으로 사용될 수 있었던 까닭은 비너스가 더 이상 이교도 의 신이 아닌 절대적 의 알레고리, 문화적 요소로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즉 고전기의 신화는 과거의 위대한 로마의 영광을 되찾기를 갈망한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교육을 받은 이들에게 널리 유행하였고 이들에게 그리스, 로마 신화는 유쾌하고 아름다운 신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 [플랑드르 - 사실주의적 기법과 상징주의]
  • Cf. Paolo Uccello <산 로마노의 대승>

    Pierro del la Francesca <우르비노 부부의 초상화>,

    Andrea Mantena <만투와 공작의 궁전, Camera de le spouge>

       

    이태리 화가들과는 달리 플랑드르의 화가들은

    • [사실주의] - 물질 세계가 신의 거울이듯이 그림이 실제 세계의 거울이 될 때까지 세부묘사의 사실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사실주의적 기법은 얀 반 아이크의 유화발명에 힘입어 더욱 강화될 수 있었다.
    • [상징주의] 또 하나의 특징이 '상징주의'이다. 종교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공간을 일상적인 공간으로 상정함으로서 일상의 다양한 물건들이 기독교적 도상으로 병치되어 표현되었다.
    • [이상주의 추구하지 않음]플랑드르미술의 또 다른 특징은 이상화되지 않은 사실성으로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각각 개성을 가진 실제 인물처럼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이상주의를 추구하지 않는 이러한 북유럽 특유의 전통은 엄숙하고 진지한 이태리 회화와는 달리 격렬하고 비통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도록 하였다.
      • <Ghent 제단화>에서 얀 반 아이크는 그림 전체가 가시적인 세계의 거울처럼 될 때까지 끈기있게 미세한 부분을 묘사하며 놀라운 자연의 환영을 만들어내었다.
      • Robert Campin의 <메로드 제단화>는 숨겨진 상징주의의 가장 좋은 예 하나로 수태고지라는 종교적인 사건이 평범한 일상 가정을 배경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촛불은 예수를, 촛대는 성모 마리아를, 막 꺼진 촛불은 신의 인간화 혹은 예수의 죽음을, 백합은 성모 마리아의 순결함을, 흰 수건과 물양동이는 정결함을, 사자가 새겨진 의자는 왕 중의 왕인 예수를 의미한다.
      • Hugo van des Goes의 <포티나리 제단화>에서는 마치실제 인물처럼 이상화 되지않은 개성적인 성인들이 등장한다.
      • Rogier van der Weyden의<deposition>에서는 중화되지 않은 비통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특히 실신한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서 이를 잘 느낄 수 있다. (즉 이 그림을 봄으로써 예수 뿐만 아니라 모두가 수난의 고통에 동참하기를 독려하는 다분히 신학적인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

      [15세기 플랑드르 회화의 의의]

      15세기 플랑드르 지방의 사실적인 표현은 후에 Ghilarandio와 같은 이태리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풍경에 대한 묘사와 질감을 표현하는 기법에 있어서는 베니스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 뒤러와 같은 화가들이 이태리 르네상스와의 결합을 시도함으로써 그동안의 보수적인 경향은 변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16, 17세기를 거쳐 기술적 발전과 함께 종교개혁, 미술시장의 본격적인 형성과 같은 사회적 요소들로 인해 특수한 미술장르들을 생산하게 된다.

    Cf. Jan van Eyck <아놀피니의 결혼식>

    보쉬 <쾌락의 정원>

       

안드레아 만테냐

죽은 예수

1490

  

로베르트 깡팽

메로드 제단화

1427

  

위고 반 데 후스

포티나리 제단화

1476-79

  

로히르 반 데르 베이덴

십자가에서 내림

1435

  

   

   

   

   

   

   

   

   

   

   

   

   

   

   

   

   

   

02.16세기 전성기 르네상스의 지역적 구별과 화가별 작품들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오후 8:34

   

16세기 전성기 르네상스의 지역적 구별과 화가별 작품들

   

І. 피렌체, 로마

   

16세기 전성기 르네상스에 이르자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초기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던 피렌체와 더불어 막강한 교황의 후원을 바탕으로 로마가 새로운 센터로 급부상 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소위 르네상스 3대 화가라 일컬어지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 그리고 미켈란젤로가 등장하는데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제기되었던 여러 가지 한계점을 극복하여 한층 더 성숙되고 완성된 조화와 균형을 보여주었다.

   

가장 '르네상스적 인간'이라 평가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는 수학과 과학, 해부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1480년대와 90년대 동시대인들이 이룩한 것들은 모두 흡수, 소화하였다.

<암굴 속의 마돈나, 1483> 유화. 원근과 명암 등 Quattrocento의 여러 실험들이 자연스럽게 종합되어 있다. 스퓌마토 기법을 통해 부드럽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창출하며 신비로운 배경과 명암법으로 성스러운 종교화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최후의 만찬, 1495> 유화. 중앙의 그리스도와 다양한 감정을 표출하며 동요하는 성인들의 모습이 치밀한 구도 하에 균형을 잃지 않고 구현되고 있으며 보는 이의 시점이 예수에게로 집중되도록 유도하고 있다.

<모나리자, 1503> 유화. 단순 삼각형구도와 스퓌마토 기법을 통해 개인의 초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원성을 내포한 듯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플랑드르 화풍의 영향으로 프로필 초상 일색이었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3/4면을 사용하였다.

   

우르비노 태생인 라파엘(1483-1520)은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 전형적인 르네상스의 화가로 절제되고 조화로운 구성 아래 묘한 기품과 감미로움이 도는 인물들을 그렸다. 독창적인 그만의 화풍을 추구하기 보다는 모든 것을 융합하는 종합적인 양식을 구사하였다.

<전원의 마돈나, 1506> 성인의 이미지 보다는 모성의 부드러운 느낌을 강조한 작품으로 대칭적인 구도를 통해 단순함 속의 절제와 균형을 강조하였다. 이런 라파엘의 특성은 후기 로마로 이주하여 미켈란젤로를 만난 이후 복잡하고 뒤틀린 자세를 통해 내재적 에너지를 표현하는 화풍으로 변하게 된다.

<아테네 학당, 1511> 교황의 서재를 장식하기 위해 그려진 작품으로 웅장함과 절제미, 조화미를 통해 고대 로마의 융성함을 재현해 내었다. 깊은 원근법을 사용하여 거대한 공간감을 창조하고 엄격한 좌우 균형 속에서 움직임을 표현하였다.

<갈라테아, 1511>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아 초기 화풍에 비해 근육질의 인체와 역동적인 모습, 뒤틀린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인물에 초점이 맞추어 인물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색채보다는 선이 강조되어 조각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미켈란젤로(1475-1564)는 다방면에 걸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지만 자신은 조각가임을 주장하였다. 회화보다 조각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는데 신플라톤주의에 입각하여 '돌 속에 잠겨있는 생명을 해방시키는 것이 조각가의 임무'라고 주장하였다.

<피에타, 1499> 미켈란젤로는 총 4점의 피에타상을 남겼는데 초기의 피에타는 안정된 삼각형 구도를 취하고 있다. 이 초기 작품에서 마리아는 이상화된 젊고 고아한 여인으로 표현되었으며 구도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실제보다 크게 만들어졌다.

<다비드, 1501-04> 돌을 던지려는 순간의 팽팽한 긴장감과 동시에 느슨함을 함께 표현하였다. 새로운 도약을 시작한 젊은 도시 피렌체의 이미지를 고취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피렌체 시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이 像은 젊은 남성의 누드라는 다분히 르네상스 적인 주제를 긴장에 가득 찬 수직적이고 남성적인 표현방법으로 풀어내었다.

<메디치 무덤, 1531-1533> 줄리아노 메디치와 로렌조 메디치의 석관무덤으로 밤과 낮, 황혼과 새벽의 알레고리 상을 표현. 과장된 근육의 표현과 비례를 깬 인체의 표현은 앞으로 다가올 매너리즘을 예견한다.

<시스틴 채플 內 최후의 심판, 1537-41> 인체로 가득 메워진 공간은 더 이상 르네상스적인 깊은 공간이 아니며 비대한 몸과 강한 모델링, 배가된 힘의 표현을 보여준다.

   

II. 베니스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동방 무역의 핵심 거점이었던 베니스가 미술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는데 베니스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은 '색채'로 요약될 수 있다. 엄격하고 완벽한 소묘를 추구한 중부 이탈리아의 화풍과는 달리 베니스에서는 색채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베니스는 무역으로 돈을 번 부유한 후원자들이 많아서 지성미보다는 화려함을 강조하는 그림이 각광을 받았다. 특히 베니스에서는 당시에는 매우 귀한 '울트라 마린'을 쉽게 구할 수가 있었고 반짝이는 푸른 바다로 둘러싸인 베니스의 시민들은 특히 '빛'에 있어서 매우 민감하였기 때문에 색에 대한 그들의 높은 관심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도색적이며 세속적인 주제를 표현하는 것도 베니스 화풍만의 특징이다.

   

지오반니 벨리니(1431-1516)는 베니스 미술의 스승으로 논리적인 공간과 비례를 추구하는 피렌체의 양식과 플랑드르의 세밀한 화풍을 통합하였다.

<성 프란치스코의 법열, 1470-80> 풍요로운 색채와 초자연적인 광선의 효과를 보여준다.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생활 속에서 종교적 사건의 느낌을 잘 표현했으며 예전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풍경의 표현을 볼 수 있다.

<성모와 성자들, 1505> Saint Zaccaria 제단화로 정교하게 구현된 원근법과 화면 전체를 감싸는 고요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지오르지오네(1478-1510)는 티치아노와 함께 베니스 2대화가 중 한사람으로 초기에는 매제인 만테냐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모든 것을 감싸는 따뜻한 대기와 자연스러운 빛의 사용을 보여준다.

<템페스타, 1506> 안개가 낀 듯한 미묘한 색채의 변화와 풍경에 대한 관심의 증가.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 1504> 카스텔프랑코 베네토 대성당, Sacra Conversazione 주제를 황혼 녘의 하늘을 배경으로 나타내고 있다.

   

티치아노(1485-1576)는 베니스 미술의 특징과 함께 바로크로 계승되는 역동성과 회화적 처리를 함께 보여주었다.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관능적이고 세속적인 베니스 특유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며 촉각적인 신체의 표현이 특징이다.

<바카날, 1518-23> 지오르지오네의 영향을 받은 색의 대비와 함께 자유롭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

<성모의 승천, 1516-18>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프라리 교회. 다채로운 포즈의 인물들은 역동적인 동세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유기적인 공간감을 구현하고 있다.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 1514> 여성의 누드를 통한 알레고리상.

<유로파의 강탈, 1562> 스페인 펠리페 2세를 위해 제작한 7점의 신화화 중 하나. 직각 삼각형의 구도와 공간과 대기에 대한 환상적인 묘사, 찬란한 색채감을 보여준다.

   

   

   

   

   

   

   

   

   

   

   

   

   

   

   

   

   

   

   

   

   

   

   

   

   

   

   

   

   

   

   

   

   

   

라파엘

갈라테아

1511

  

미켈란젤로

줄리아노 메디치 석관 조각

1533

  

미켈란젤로

로렌조 메디치 석관 조각

1531

   

  

   

   

   

   

   

   

   

   

   

   

   

   

   

   

   

   

   

   

   

   

   

03.매너리즘의 특징과 주요 작가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오후 8:40

   

매너리즘의 특징과 주요 작가

   

매너리즘은 전성기 르네상스가 끝나고 바로크가 시작되기 전인 1520년에서 1600사이에 등장한 사조로 원래의 뜻은 라파엘이나 미켈란젤로의 기교적이고 타성적인 성과를 본받아 소화하려 한 로마와 피렌체의 화가 그룹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숙달되고 탁월한 면을 보이지만 어딘가 이해하기 힘든, 이상미와 어긋나는 불편함, 부조화가 나타난다. 왜곡된 비례와 불안한 자세를 가진 인체들, 불안정한 공간,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한 소재들, 신비롭고 비현실적인 빛의 효과 등이 그 특징인데 지오르지오 바자리는 그 자신을 성공한 매너리즘 화가로 간주하여 '매너리즘'이란 용어를 긍정적으로 사용하였으나 그 이후 세대들은 매너리즘에서 등장하는 비합리적 특징들을 근거로 이 시대를 성기 르네상스 이후의 퇴보의 시대로 이해하였다.

이태리에서 나타난 매너리즘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극에 달한 테크닉의 능숙함, 세련미, 지적 유희를 위한 의도적인 소재의 왜곡이었다. 그 결과 구불구불한 선, 길게 늘여진 형태, 기묘한 포즈와 색채, 수수께끼 같은 소재들, 병적이고 도색적인 분위기가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매너리즘은 이미 미켈란젤로의 개인적인 특성과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라파엘 후기 작품에서 태동하고 있었다. 야코포 폰토르모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1528> 속의 공간은 안정적인 구심점이 사라진 채 압축되어 나타난다. 강렬한 포즈와 표정의 인물들은 불명확한 공간에서 부유하고 있으며 날카로운 빛에 의해서 색채는 비현실적인 특징을 보이게 된다. 로소 피오렌티오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1521>에서 인물들은 한층 더 그로테스크하게 그려진다. 심하게 왜곡된 인물들, 빛나는 색채가 자아내는 금속적인 광채는 로소 종교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파르미지아노의 <긴 목의 성모,1535>는 원근법과 비례를 표현적으로 왜곡하여 성모는 작은 얼굴, 긴 목, 그리고 길게 늘어진 몸을 가지고 있으며 품에 안긴 아기 예수는 떨어질 듯 불안정하다. 배경이 되는 주두가 없는 기둥은 이공간이 실내인지 실외인지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코지모의 궁정화가이자 피렌체 매너리즘의 진수였던 브론지노는 뛰어난 기교가로 세련되고 감성적인 초연함이 특징이다. 그의 <알레고리, 1545>에서는 갖가지 상징을 뜻하는 알레고리 상들과 함께 비너스와 큐피드가 도자기 인형처럼 매끈하고 정적이며 차갑게 표현된 채 도색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피렌체와 로마에서 시작한 매너리즘은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데 베니스에서는 그 등장이 다소 늦어 16세기 후반에서야 비로소 틴토레토 작품 등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성 마르코, 1548>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비틀린 자세를 취하며 혼란스럽게 화면을 메우고 있어 매너리즘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한편 바로크적인 특징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스페인의 매너리즘은 극렬한 반종교시대의 상황 속에서 이태리와는 달리 '영성'적인 성격을 강하게 보이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작가는 엘 그레코로 <오르가주 백작의 매장, 1586-88>에서 그는 혼란한 공간과 길게 늘어난 인물들의 비례, 일렁이는 형태를 통해 비현실적이고 종교적인 색채를 강조하였다.

이처럼 정교한 테크닉과 형태의 왜곡, 강한 광선과 혼란한 공간감으로 요약할 수 있는 매너리즘은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퇴보한 시대, 부정적인 시대로 평가절하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연구가치가 있는 독자적인 양식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아놀드 하우저는 사회사와 연관시켜 매너리즘을 당대의 혼란한 정치, 종교적 상황에서 비롯된 불안감이 미술에 반영된 것으로 평가하기도 했으며 이와 다른 한편에서는 2세기 동안 지속된 르네상스의 반동으로 일탈적이고 파격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요구로 등장한 일련의 움직이라고 재정의 하기도 한다.

   

야고포 폰토르모

십자가에서 내림

1528

  

로소 피오렌티노

십자가에서 내림

1521

  

파르미지아노

긴 목의 성모

1535

  

브론지노

알레고리 (비너스와 큐피트)

1545

  

   

엘 그레코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

1586

  

   

   

   

   

   

   

   

   

   

   

   

   

   

   

   

   

04.바로크(Baroque)미술의 특징과 지역적 전개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오후 8:42

   

바로크(Baroque)미술의 특징과 지역적 전개

   

원래 어원은 'Barocco, 이지러진, 불규칙한 진주'로 17세기부터 18세기 중반에 걸친 대부분의 유럽 미술에 적용되는 사조를 일컫는다. 바로크 미술은 매너리스트 양식의 인위성에 대한 사실주의의 반발이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각 지역의 상이한 사회적, 정치적 상황 속에서 다양한 양상을 띄며 나타났다. 새로이 강화된 카톨릭 신앙, 절대주의 국가, 과학의 새로운 역할이라는 시대 상황과 함께 발전한 사조로 이태리, 플랑드르, 네덜란드, 스페인, 프랑스, 영국 등 전 유럽에걸쳐 각각의 양식을 나타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바로크 미술을 종합하여 특징지을수 있는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기술적인 완벽과 드라마틱한 효과 2) 움직임의 강조, 실제 장면에 참여하는 듯한 사실주의적 illusion 효과 3) 교회나 국가의 홍보/미화에 기여

17세기 이탈리아는 거대한 반종교개혁의 정신 아래 대대적인 카톨릭 포교활동을 펼쳤다. 주와 교회의 영광을 재현하고 찬미하기 위해 로마를 중심으로 거대한 미술 프로젝트를 추진하였고 그에 상응하는 막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카라바지오(1517-1611)는 이탈리아 바로크 미술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 후기 매너리스트 화가인일 카빌리에레 다르피노의 지도 이후 당시 추기경이었던 델 몬테 등의 부유한 후원자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이로 인해 많은 종교적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전의 종교화는 현저히 다른 특징이 있었는데 첫째 종교화를 일상의 한 장면과 같이 표현함으로써 일반적으로 종교화에 등장할 수 없다고 여겨지던 하층 계급의 서민을 주인공으로 선택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순간의 장면을 강한 명암 대조를 통해 드라마틱하게 제시함으로써 관람자로 하여금 그림 속에 동참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 다는 점이며 셋째는 자연주의에 입각한 태도를 바탕으로 이상미를 제시하려는 것이 아닌 실제 세계를 관찰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Bacchus, 1597>, <성 마태오의 소명, 1599-1600>, <성 바울의 개종, 1600-01> 등 그의 작품은 여러 가지가 남아 있으며 그의 화풍은 전 유럽을 걸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 기술적으로는 네덜란드의 유트레히트 화파에 큰 영향을 끼쳤으나 그의 시각적 진수는 후에 렘브란트, 스페인의 리베라, 벨라스케스, 프랑스의 라 투르와 르냉 형제 등에 의해 한층 더 이해, 발전되었다. 회화와 더불어 바로크의 건축은 질서정연하고 반복적인 특성의 르네상스 양식을 벗어나 중심이 가운데 나타나며 클라이막스와 그에 부속되는 종속적 존재가 존재하며 보다 감성적, 장식적,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예는 성 베드로 성당으로 마데르토와 베르니니가 함께 참여한 이 프로젝트에서 성당은 중앙의 오벨리크스앞에 열주를 건축하여 마치 교회가 팔을 벌려 사람들을 끌어 안으려는 포교활동을 상징한다. 이탈리아 바로크 조각의 대표적인 인물은 베르니니로 <다윗상, 1623>, <성 테레사의 엑스터시, 1645-52>등의 조각을 통해 격렬한 정서의 표현과 역동적인 동작을 구현해 내었다. <다윗상>에서는 돌을 던지려는 극적인 순간을 다중시점의 열린 구조 안에서 극대화된 감정을 노출하며 표현했으며 <성 테레사의 엑스터시>에서는 정신적 뿐만 아니라 육체적 황홀경이 동시에 표현되었다.

스페인은 르네상스의 전통이 별로 확립되지 않은 곳이었다. 때문에 아카데미의 영향도 적었고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바로크를 수용, 발전시켰다. 스페인의 바로크는 주로 카라바지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의 영향으로 격한 광선의 대립과 자연주의적 묘사, 어두운 색채가 많이 나타난다. 특히 종교화의 경우 고통스럽고 어두운 면에 초점을 맞췄는데 이러한 면은 후에 피카소, 고야, 달리 등으로 이어지는 괴기스러움과 환상, 파괴성으로 연장된다.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는 스페인 바로크시대의 최고 화가로 궁정화가로써 경제적 안정과 명예를 모두 얻은 화가이다. 그는 초기에 카라바지오 풍의 그림을 그리다가 1620년대 말경 이후 루벤스와 티치아노의 영향으로 유려하고 풍부한 취향의 화풍으로 전환하게된다. <세빌리아의 물장수, 1623>는 그의 대표적인 초기 작품으로 평범한 인물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에서 카라바지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Las Meninas, 1656>는 그의 최고작으로 일종의 초상화지만 일상생활의 자연스러움을 부여하여 풍경 + 그룹 초상화의 복합적 성격을 띄고 있다. 그림 속의 그림을 보고 있는 사람은 거울에 비춰진 왕과 왕비이면서 동시에 관람자일 수도 있다는 시각적 퍼즐을 사용하였고 optical realism에 입각하여 관습에 의한 그림을 거부함을 알 수 있다. 자신의 관찰력에 의해 보여지는 정도를 확실하게 구별해서 그림을 그렸으며 특히 빛이 주는 효과에 매료된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플랑드르는 이 시기 스페인 전제 군주의 통치 하에 있었기 때문에 엄격한 카톨릭의 영향권 내에 있었다. 때문에 국가나 교회가 위촉하는 주문 제작이 많았으며 당연히 주제도 종교적이고 왕권을 과시, 찬양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플랑드르의 대표적 인물은 피터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로 그는 가장 성공한 17세기 거장 중의 한 사람이다. 이탈리아 유학을 통해 얻은 고전주의적 양식과 플랑드르의 고유 양식, 루벤스 특유의 역동성을 가미시켜 그는 독창적인 미술을 나타내었다. <십자가를 올림, 1610>은 그가 이태리에서 돌아와 처음 그린 그림으로 예술의 실제 모습은 사실적으로 나타나고 광선은 위에서 떨어져 예수에게 집중되며 확연한 명암의 차이를 보여준다. 미켈란젤로적인 인체의 표현은 르네상스 미술의 영향을 보여주지만 실제 그 지역 사람들의 얼굴로 모두 표현되고 있다. 대각선의 긴장된 화면 구성과 화면을 뚫고 나올 듯한 착각의 효과는 전형적인 바로크의 특징이다.

네덜란드는 1648년 독립하여 신교 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교회의 후원을 받은 대규모의 작품이 드물다. 중산층과 신교도들의 지위가 성장함에 따라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소재들이 주로 다뤄졌고 미술 시장이 일찍이 발달하여 화상을 통한 그림의 교환이 활발하였다. 일상 생활 용품으로서의 그림이 발달하면서 작은 규모의 이해하기 쉬운 초상화, 정물화, 풍경화가 주로 제작되었다. 대표적인 화가는 렘브란트(1606-69)인데 그는 루벤스와 더불어 바로크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네덜란드 미술의 거의 전 분야에 영향을 미치게 된 인물이다. 그는 특히 카라바지오의 자연주의적 표현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인간의 감정과 반응에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루벤스나 벨라스케스와 달리 어두운 색채들을 사용하였다. 초기의 대표적인 작품은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32>로 이 그림은 중심이 밝고 주변이 어두운 전형적 바로크 형식을 다루고 있으며 해부되는 시체의 시신을 급속한 축도로 표현함으로써 긴장감을 더해준다. 또한 대각선을 많이 사용했으며 각각의 얼굴을 정확히 묘사한 특징을 가진다. <야간 순찰대, 1642>는 암스테르담의 시민 방범 조직대의 집단 초상화이다. 역동적인 구성 안에 등장인물들은 혼란스럽게 움직이고 있으며 빛과 색채의 대조, 인물의 개별묘사, 복잡한 구성을 아우르는 통제력으로 렘브란트의 최고 정점의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 시기 이후의 작품들은 매우 인간적이며 심오한 감정, 정적인 느낌들을 보여준다. 요하네스 베르메르(1632-1675)는 생애가 거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로 그는 독특하게 거의 전 작품을 방 한구석을 배경으로 하는 풍경화로 제작하였으며 조용하고 사색적인 일상 생활의 한 장면만을 선택하여 정확한 묘사를 하였다. 또한 camera obscura를 사용하여 전광과 후광의 차이를 포착하여 중심은 선명하게 주변은 흐릿하게 그림을 제작하였다.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부상하며 17세 말에 이르러서는 파리가 로마를 대신해 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 프랑스 바로크는 사실주의적 경향과 함께 고전주의풍, 궁정양식풍의 결합되어 George de la Tour(1593-1652), Louis le Nain(1593-1643), Nicolas Poussin(1594-1665), Claude Lorrain(1600-1682)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는데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변화무쌍한 곡선과 섬세함을 특징으로 하는 로코코 양식으로 이어진다.

   

   

카라바지오

성 마태오의 소명

1599-1600

  

카라바지오

성 바울의 개종

1600

   

벨라스케스

세빌리아의 물장수

1623

  

   

   

   

   

   

   

   

   

   

   

   

   

   

   

   

   

   

   

   

   

   

   

   

   

   

   

   

   

   

   

   

05아카데미의 성립과 발전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오후 8:44

   

아카데미의 성립과 발전

   

플라톤의 Academia에서 유래된 이 단어는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신플라톤주의가 유행하면서 철학이나 문학 모임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미술 아카데미의 시작은 지오르지오 바자리(Giorgio Vasari, 1511-74)와 토스카나의 대공 코지모 데 메디치(Cosimo de'Medici)가 이미 존재하던 콩파니아 디 루카를 개혁해 설립한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Academia del Disegno)라고 할 수 있다. Disegno라는 용어는 그대로 번역하면 디자인(design)이지만 여기서는 회화, 조각, 건축을 이루는 구상, 드로잉, 창조력 등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단어로 이해해야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철저한 이론 교육에 중점을 두었던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의 교육과정은 코지모 1세의 후원을 업고 미술가들이 장인의 위치에서 벗어나 전문인으로서 자신들의 분야를 관장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즉, 아카데미아 회원이라는 것은 미술가들에게 사회적 신분상승을 의미하는 것으로 더 이상 주문을받아 작업을 하는 장인이 아니라 지적인 진실을 추구하는 자유인으로서의 입지를 확인시켜주는 하나의 증거였다.

이후 로마, 파리, 런던 등지에도 미술 아카데미가 설립되는데 특히 프랑스에서는 1648년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Acadé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가 설립됨으로써 명실상부 최고의 권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 아카데미에서는 기하학과 비례에 의한 명확한 공간의 강조하였고 여러 미술의 장르 중 역사화를 가장 고상한 주제로 여기는 교육을 지속해 나아갔다. 그러나 길드의 규제로부터 미술가들을 자유롭게 하려는 이탈리아의 아카데미와는 달리 프랑스의 아카데미는 루이 14세와 재상 콜베르의 주도 下에 절대국가의 중앙중심주의와 연결되어 문화를 통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프랑스 아카데미의 이상적인 양식은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를 기본으로 하였다. Nicolas Poussin의 양식은 로얄 아카데미의 모본으로 여겨졌고 후에 Jean-Auguste-Dominique Ingres를 아카데미양식의 정점으로 보아, 학생들은 모두 이 양식으로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 점차 아카데미는 획일화된 예술, 공식화된 미술이라고 인식되었고 아카데미 미술가들은 사회적 지위와 부를 얻은 대신 독립성과 창의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아카데미 회원들의 독점적인 특권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면서 프랑스의 화단을 이루는 요소는 Institut de France, Ecole des Beaux-arts, 그리고 젊은 미술가들의 등용문인 salon展으로 변하였다. 19세기 전반, 부르주와의 성장으로 부유한 중상층이 새로운 미술수요의 계층으로 등장하면서 미술 시장은 엄청나게 성장하게 되었고 회화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맞물려 살롱전의 영향력은 비대해져서 미술가의 생존이 살롱전에 받아들여지느냐에 따라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살롱전은 필연적으로 제도적 모순과 편견, 차별에 가득 차 있었고 1870년경에 이르러 이에 반발하는 젊은 화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인상파 화가들이다.

인상파 화가들이 이룩한 근대미술의 혁명이 아카데미 살롱체계에 대한 반발에 근간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로, 마네, 드가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성공한 살롱화가였다는 점은 반드시 생각해 봐야 할 사항이다. 그리고 아카데미와 대립한 '인상주의'라는 전위적 흐름 역시 그 이후에 등장한 사조에 대해서는 역시 또 하나의 아카데미즘 일 수 밖에 없는 원리 역시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06 19세기 신고전주의의 발생 배경과 발전 과정, 의의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오후 8:45

   

19세기 신고전주의의 발생 배경과 발전 과정, 의의

   

유럽 미술에 있어서 그리스, 로마의 고전에 대한 향수는 르네상스 이래로 바로크, 로코코로 이어져 온 하나의 전통이었다. 신고전주의는 이러한 전통을 정면으로 수용한 19세기의 미술사조로서 그 발생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가 18세기 말에 극단적인 사치와 화려함, 장식성을 가진 로코코 미술에 대한 반작용, 둘째로는 폼페이와 헤라클레네움, 파에스로 등의 고대 건축 발굴과 그리스 문화의 재발견, 그리고 빙켈만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고대에 대한 새로운 관심, 셋째로는 프랑스 혁명 전후 로마 공화정으로의 회귀를 지향했던 계몽주의적 경향이 그 원인들이다. 하지만 신고전주의는 르네상스시대처럼 창조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고전을 재해석한 것이 아니라 고전의 형식상의 모방과 추종에만 그치는 경향이 더 강했고, 고전의 위대함을 정부의 권위를 상징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여 정부에 봉사하는 미술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미술가는 자크-루이 다비드(1748-1825)이며 그의 작품인 <호라티우스家의 맹세, 1784-85>는 흔히 신고전주의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 회화에서는, 형식면에서는 표현의 명확성, 형식과 내용의 균형성, 엄격한 구도, 명확한 윤곽, 입체적인 형태의 완성을 우선시 했고 주제면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철학적 이상과 관련된 도덕적인 주제 下에 초기 로마의 금욕적이고 공화주의적인 미덕을 표현하는 것을 중요시 했다. 그러나 이 시기 발표된 고대 유물의 발굴 결과 유물 대부분이 조각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부조를 변형시킨 듯한 형태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었다. 대기원근법의 사용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았고 형태의 윤곽선을 강조했으며 인물들을 화면에 횡렬로 마치 조각처럼 배열하였다. 그리고 평면적인 색채의 배경과 짧게 표현된 그림자 등을 통하여 그림 깊은 공간감을 차단함으로써 무대가 되는 화면을 부각시켰다. 바로크/로코코를 거쳐 강조되던 3차원적 일루전 기법은 철저하게 부정되었고 오히려 2차원적 공간의 표현으로 회귀하였는데 소수의 학자는 이점을 근거로 현대미술의 효시를 다비드로 보기도 한다. 다비드의 양식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계승되거나 변형되었는데 안 루이스 지로데나 안토니 장 그로는 신고전주의에서 출발하였으나 후기에는 낭만주의적 요소를 강하게 보였고 게랭의 경우는 오히려 다비드의 반대에 서서 제리코, 들라크루와 등의 낭만주의 회화의 선구자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다비드의 신고전주의를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 발전시킨 인물은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1780-1867)이다. 그는 평생 신고전주의 화풍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인물인데 이탈리아에서 오래 머무는 동안 라파엘의 회화에서 받은 영향을 재현하여 오히려 다비드보다도 더 고전적인 작품을 남겼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고전주의의 차가운 형식 존중은 곧 반발을 사게 되고, 개인적인 감정의 존중과 자아의 해방, 무한한 상상력을 반영하는 주관적/감각적 미술이 풍미하게 되는데 이것이 낭만주의이다. 낭만주의는 독자적인 명확한 양식적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주로 16세기 베니스화풍이나 루벤스가 그린 풍만하고 화려한 육체, 감정에 호소하는 색채 효과를 즐겨 사용하였다. 낭만주의의 대표적 화가인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 1818-19>, 들라크루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 1830>을 다비드의 작품과 비교해 보면, 다비드는 광택이 나는 듯한 고른 화면과 정면성의 균형적 구도, 고전적 주제를 엄격한 색채로 표현한 반면, 들라크루와는 루벤스나 렘브란트의 painterly한 화면을 부활시켰고 구도 역시 깊이 있는 비대칭의 사선구도,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이국적 주제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색채 자체가 그림의 전체적인 인상을 주도하도록 풍부하고 감정적으로 색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 영국의 낭만주의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열렬한 감정 표현을 바탕으로 한 풍경화 위주로 발전하게 되는데 윌리엄 터너, 콘스타브, 윌리엄 블레이크가 대표적 화가이다. 스페인에서는 고야를 중심으로 한 낭만주의가 발전하게 되는데 특히 그가 노년에 선보인 인류의 사악함과 잔혹성에 뿌리를 둔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는 20세기 표현주의의 원시적 비관주의를 예고한다.

자크 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가의 맹세

1784-85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

  

들라크루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의 뗏목

1818-19

  

   

   

   

   

   

   

   

   

   

   

   

   

   

   

   

   

   

   

   

   

   

   

   

   

   

   

   

   

   

   

   

   

   

   

   

   

   

   

   

   

   

07 사실주의의 특징과 지역별 전개 양상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오후 8:47

   

사실주의의 특징과 지역적 전개 양상

   

1840년에서 1880년 사이에 형성된 사실주의는 낭만주의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예술 양식이라기 보다는 훨씬 더 넓은 관심의 영역에 적용되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평등의 사상을 고취시켰고, 근대적 자본주의는 현실주의, 물질주의를 강화시켰으며 여기에 사회주의가 가세하게 된다. 사실주의의 주창자들은 아카데미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인위성을 거부하고 예술 작품이 대중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동시대 의식이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따라서 역사나 알레고리, 미적 대상 등 전통적 주제를 탈피하고 그때까지 등한시되었던 일반 서민들의 모습과 가치관에 관심을 가지며 동세대의 삶과 사회의 면모를 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中 프랑스는 가장 일관성 있는 사실주의를 보여주었다. 쿠르베는 "회화는 본질적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의 표현으로 구성될 뿐이다." 라고 주장하며 과거의 장면 등과 같은 전통적 소재를 용납하지 않았다. 보들레르가 이야기한 "근대 화가들은 군중 속 익명의 인물이 되어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편견 없는 시각을 갖고서 당대의 생활과 유행으로부터 끌어온 주제를 직접적인 인상을 반영할 수 있고 널리 유포되기에 적합하고 재빠른 매체를 통하여 그려내야 한다."라는 말을 통해서도 이 시기 현재에 대한 강조를 중시했던 사회적 관심을 짐작할 수 있다. 도미에(Daumier, 1808-1897)는 서정성을 배제한 사회풍자적인 그림을 주로 그렸는데 1840년대 노동계급을 주제로 하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1860년경 <삼등열차>에서 노동계급의 삶의 본질을 시각적 이미지로 집약해내었다. 사실주의의 전형을 보여주는 쿠르베(Courbet, 1817-1877)의 작품에는 도미에만큼의 의식적 사회비판도, 밀레의 서정성도 없다. 그는 단지 사물에 대한 관찰이나 작화법에 있어서 조금의 과장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재현을 중시했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던 그의 회화관은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1855년 자신의 작품이 파리 국제 박람회에 거부당하자 임시천막에서 독자적인 사실주의의 전시를 개최하였는데 이는 사실주의에 대한 공식적인 선언으로 후대에 평가되고 있다. <오르낭의 장례식, 1849>은 회화가 그 자체로서 하나의 현실이 될 수 있으며 화가가 할 일은 그 세계를 규정하는 것이라는 그의 인식을 기록한 최초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화가의 작업실, 1854-1855>은 사회의 이상적인 하모니를 이루는 자본, 노동, 능력의 관계를 개인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예술을 창조하는 영웅적 이미지의 화가를 일상적인 삶의 모습에 부여한 작품이다.

영국에서의 사실주의는 종교적 열정을 담아내는 형태로 나타났다. 1848년 화가이자 시인인 Dante Gabriel Rossetti를 중심으로 일련의 젊은 화가들이 모여 전성기 르네상스 이전의 미술(15세기)로 돌아가자는 라파엘前파를 결성하였다. William Holman Hunt, John Everett Millias, Ford Madox Brown으로 대표되는 라파엘전파는 기독교적인 주제를 중심으로 모든 매너리즘적, 바로크적 기교를 거부한 채 라파엘이 출현하기 이전 15세기의 원시적 대가들에게서 영감의 원천을 모색하였다. 예술을 통해 현대문명의 질병을 치유하려는 동기를 표방하며 자연주의적 묘사, 밝은 색조, 순백의 바탕이 하나의 색채효과를 내도록 하였다. 전통적인 명암대조법(chiaroscuro)과 율동적인 붓질을 거부하고 순수하게 자연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주며 중세 예술이 지닌 순수한 회화 양식으로 회귀할 것을 주장하였다.

   

  

도미에

삼등열차

1863

  

구스타브 쿠르베

오르낭의 장례식

1849

  

구스타브 쿠르베

화가의 작업실

1855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수태고지

1850

  

존 에버릿 밀레

오필리어

1852

  

   

   

   

   

   

   

   

   

   

   

   

   

   

   

   

   

   

   

   

   

   

   

   

   

   

   

   

   

   

   

   

   

   

   

   

   

   

   

08 인상주의의 등장 배경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오후 8:51

   

인상주의의 등장 배경

   

1874년 4월 5일 사진작가 Félix Nadar의 스튜디오에서 열린 "화가 조각가 및 판화가 무명협회 제 1회전"이 사실 제1회 인상주의전이였으며 이를 시작으로 인상파가 본격적인 활동을 보이게 되었다. 인상주의란 명칭은 이들의 전시회를 본 후 기자 Louis Leroy가 4월 25일자 신문에 조롱의 의미로 "인상주의자(impressionists)"라는 어투로 그들을 부른 것에 기인한다.

산업혁명 이후 사회는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었으며 풍요로운 물질적 혜택을 시민들에게 선사하였다. 당시의 근대문명은 획기적이었으며 이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였다. 당시의 예술가들도 이러한 근대문명을 새로운 시대의 활기차고 생동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예술적 대상으로 인식하였다. 뿐만 아니라 물질적 풍요는 화가들에게 튜브에 든 물감과 종이, 휴대성이 용이한 미술도구 등 새로운 도구들을 보급해주었고 아울러 교통수단의 발달은 그들에게 자유로운 여행을 가능케 하여 야외에서도 스케치를 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었다. 또한 카메라의 발달로 인해 화가들은 객관성의 재현과 우연성의 포착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러한 카메라적 기법은 실제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해 19세기 후반부터는 기존의 귀족과 교회 중심의 후원에서 전문적인 직업 화상들과 신흥부유층인 개인 수집가들도 후원의 계층도 변하였다. 때문에 미술의 주제 역시 좀 더 중산층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19세기 말에 수입된 일본의 우끼요에는 당시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예술 계에 큰 유행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고 인상주의를 비롯한 이후 서양 미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우끼요에는 당시 파리에 자포니즘이라는 새로운 유행을 낳을 정도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그 특유의 가장자리를 절단한 구도, 조감도적인 구도, 강렬한 원색의 사용은 드가, 로트렉, 고흐, 고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하에 등장한 인상주의는 고전적인 아카데믹 회화와는 판이하게 다른 양상을 보이며 발전해 나아갔다.

인상주의 이전에 등장 했던 미술사적 사조를 통해서도 앞에서 언급한 사회적 배경 이외에 미술계 자체의 변화 역시 인상주의의 태동에 큰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들라크루와 식의 밝은 색조 사용방식을 꼽을 수 있다. 둘째로 바르비종파를 비롯한 영국 낭만주의 풍경화의 영향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자연을 직접 관찰하여 표현하는 이들의 방식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 활동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쿠르베의 사실주의적 작품들은 당대 평범한 인물을 주제로 그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인상주의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마네의 작품도 이후 전개되는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마네는 시각적인 조형성을 부각시키면서 고전적인 색채변화를 통한 원근법이나 입체감의 사용을 과감히 포기하고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강렬한 색채 대조를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색채의 사용은 시간적 요소를 단축화시키는 경향을 대두시켰다. 그의 모던한 화풍은 이후 주제의 전달 보다는 객관적인 재현에, 항구적인 순간보다는 일시적인 찰나의 모습의 재현에 몰두했던 이후 인상주의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근대화 사회와 풍요로운 물질문명을 바탕으로 새로운 회화의 장을 연 인상주의는 마네 이후 드가, 모네, 르느왈, 카사트 등에게 이어졌다. 인상주의는 19세기 말 산업사회의 중산층의 모습을 주제로 그 순간적인 장면을 포착하여 미묘한 색채의 사용을 통해 시각적인 조형성을 구축하고자 노력하였고 이러한 그들의 경향은 당대의 사회적 배경과 이 전의 미술사적 전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09 앵그르-드가-피카소 누드의 비교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오후 8:51

   

앵그르-드가-피카소 누드의 비교

   

앵그르는 다비드의 뒤를 잇는 신고전주의의 대표적 주자로 뛰어난 dessin과 극사실적인 표현, 촉각적인 묘사로 당대에 많은 각광을 받았다. <발팽송의 목욕녀, 1808>에서 볼 수 있는 그의 누드는 형태 표현에 있어서 탁월한 솜씨와 엄격하고 명료한 구도, 대상에 대한 정밀한 묘사를 보여주고 있다. <대 오달리스크, 1814> 의 누드는 해부학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늘어진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러한 독특한 묘사 방식은 앵그르 미학을 반영한다. 그는 섬세하고 길면서 흐르는 듯 유려한 선 자체를 훌륭한 미적 요소로 보았고 인체의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선 자체의 美感이 연장되는 것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형태를 모순되게 표현한 것이다. 피카소의 주장대로 이미 앵그르는 이미 형태의 추상화 경향을 다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앵그르는 아직까지 인체를 감각적으로 재현하는데 전념하고 있다. <터키탕, 1863>은 앵그르의 여체에 대한 관심이 당시 프랑스를 지배하던 동양적 기호와 만나 화려하고 나른한 '육체의 정물화' 를 만들어 낸 앵그르 말년의 작품이다. 앵그르는 이 그림을 처음에는 정방형으로 포맷하려고 했다가 나중에 타원형으로 포맷하여, 남성 관람자들에게 열쇠구멍을 통해 몰래 여탕을 들여다 보는 관음증적 만족감을 주고 있다.

드가 또한 구도와 소묘에 깊은 관심을 두어 앵그르를 존경하였다. 그러나 그의 누드는 앵그르의 형태와는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의 후기 연작인 <bath tub, 1890>은 여성 누드와 남성의 관음적 시선을 주제로 삼은 작품이다. 구멍으로 들여다 본 듯한 구도는 앵그르의 터키탕을 연상시키지만 이 작품 안의 여인들은 더 이상 어떤 성적 이미지를 강조하지 않는다. 목욕을 위해 구부린 등과 다리, 탕 안으로 발을 뻗는 여자의 뒷모습은 평면적이고 딱딱하다. 공간 안에서 순간적인 동작을 보이는 여성의 몸은 이미 입체감이나 사실감을 많이 상실했기 때문이다. 드가는 여인의 누드를 남성 관객의 탐미적 대상으로 여겼던 과거의 환상을 제거한다. 여성 누드라는 장르에서 해방된 여인들은 더 이상 관객을 환상을 자극하지 않은 채 아주 건조하게 표현되기 시작한다.

드가를 비롯한 이전의 화가들이 눈에 보이는 인상을 평면적인 패턴으로 단순화 시켰다면 피카소는 <아비뇽의 처녀들, 1907>에서 평면성을 피하면서도 사물을 단순하게 환원하는 동시에 파편화 시키고 입체감과 깊이감을 유지하는 그림을 보여주었다. 주제 면에서도 지금까지의 누드화에서 등장한 풍요와 미적 알레고리인 인물들이 아니라 거리의 여인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문명화된 사람들을 향한 분노와 슬픔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뚤르즈 로트렉이 그랬듯이 단순히 천한 여자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 전통에 아무것도 얽매이지 않고 인체표현에 있어 어떤 공식을 발견해 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카소에게 누드는 의미 있는 깊은 형태를 창조해내는 수단이었다. 신체는 격렬한 전이와 강조된 단순화에 의해 새롭게 재창조 되었다.

   

   

   

10 후기인상주의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오후 8:52

   

후기 인상주의

   

인상주의에 대한 회의가 생긴 후 일군의 새로운 화가들은 인상주의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독자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인상주의가 지나치게 순간적인 찰나의 포착과 시시각각 빛에 따라 달라지는 변화를 표현하는 데만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고 보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에 근거한 미술을 추구하였다. 1884년 창설된 Independent전을 시작으로 Seurat, Signac 등 신인상주의자들은 그러한 그들의 경향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작품 활동을 펼쳤으며 Félix Fénéon은 이를 "신인상주의는 인상주의를 보다 체계화하고 영속화시키려는 새로운 시도"라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후에 등장하는 후기인상주의자들로 인해 인상주의를 극복하고 항구적이고 본질적인 형태를 이룩하고자 하는 노력을 계속되었다.

쇠라는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1884-1886>와 <퍼레이드, 1887-1888> 등에서 정확한 색채분할과 점묘법에 의해서 대상을 묘사하고 있다. 주제나 작품에 넓게 스며든 빛은 인상주의 화풍을 떠올리게 하지만 쇠라의 감수성과 기법, 철저히 계산된 구성과 리듬감은 초기 인상주의자들이 집중한 순간성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이러한 색점과 기하학적인 분할주의는 색점과 평면적 곡선양식으로 구성된 추상에로의 변화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시도는 후에 야수파와 큐비즘의 작가들의 색선실험으로 이어지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추상표현주의자와 색면파 화가들의 등장에 의해 완성되었다.

세잔느은 후기 인상주의자 들 중에 이후 세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으며 20세기 미술의 실험적 작업의 개척자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인상주의에 의해 빛 속으로 소멸된 형태를 회복하기 위해 자연을 원추, 원기둥, 구의 형태로 재구성하였으며 단일화된 시각을 해체하여 다원적 시점을 보여줌으로써 큐비즘을 예비하였다.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 1890-94>에서 보면 하나의 정물이 다양한 시각을 통해 새롭게 재구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대상과 대상 사이의 공간이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단단한 어떤 공간이나 혹은 대기에 의해 메워지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공간을 대상만큼이나 중요한 구성 요소로 간주하였다. 그의 후기 작품인 <쌩 빅트와르 산 연작, 1885-1904>은 세잔느가 대상에 대한 신중한 분석을 선호하여 풍경이 화면 구성연습을 위한 소재로 변해가는 정도로까지 나아갔음을 설명해준다. 세심하게 고려된 건축적 구성방식과 회화적인 입체와 평면을 사용하여 자연의 변하지 않는 본질적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던 세잔느는 선과 면, 입체 등 구성적 요소를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하는 20세기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고갱은 좀 더 심리적이고 인간 내면에 자리잡은 깊숙한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상징적이며 신비스러운 인간의 내면과 상상의 세계를 율동감 넘치는 장식적 선과 평면적인 색채를 사용하여 표현하였고 이는 후에 나비파 화가들 뿐만 아니라 그가 교류했던 상징주의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설교 후의 환상, 1888>은 고갱이 브르타뉴 시기에 제작한 작품으로 '종합주의'라고 알려진 양식을 잘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브르타뉴 전통 의상을 입은 여성이 등장하는 현실의 모습과 성경에 나오는 야곱과 천사의 씨름을 담은 상상의 장면을 결합시키고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98>는 단순화된 형태, 종합적이고 기하학적인 윤곽, 강한 명암대조와 인물들의 엄숙한 자세를 통해 소박하고 신비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반 고흐는 <밤의 까페, 1888>, <자화상, 1890>의 작품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율동감이 강한 선을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여 작가의 주관적인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반 고흐의 작품경향은 야수파와 독일 표현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자연에서 벗어난 완전히 주관적이고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색채의 사용은 대표적인 야수파 작가인 마티즈에게 영감을 주었다. 붓터치에 의한 동적인 화면 구성과 인위적인 형태의 왜곡은 그의 병적인 심리적 내면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했다는 면에서 20세기 독일 표현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조르주 쇠라

일요일 오후의 그랑 자트 섬

1884-86

  

세잔느

큰 소나무가 있는 쌩 빅트와르 산

1885-87

  

폴 고갱

설교 후의 환영

1888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에

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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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다비드

2010년 3월 10일 수요일

오전 3:55

   

<<20100303수 19세기서양미술 + 중국의 회화 첫강의.WMA>>

3/3

*발표

다다음주 수요일까지 계획서 제출해서 검사 맡으세용

서양미술사 책- 영어로 된 것들 많음.Internet 위키피디아, 이미지 검색

   

   

   

  • 로코코 양식

       

       

    >Hotel de Soubise

    바로크의 거의 마지막 양식. 귀족들의 살롱문화. 밝은 은빛과 파스텔 tone, 가벼운 터치. 주제는 serious한 것 피하고, 남녀의 사랑. 재치 있고 여성들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들이 ideal.

    로코코는 곡선적: 다각형의 형태,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연결하여 구불구불. 그래서 로코코 양식은 실내장식을 많이 의미함. 거기에 그려진 그림도 주로 남녀의 사랑. 이것이 18세기 귀족문화를 많이 대변하는 양식

       

    >다이애나 여신의 목욕, 프랑수아 부셰

    제목은 신화적인 제목을 가졌지만, 당대 사람들의 생활을 그렸음.

       

  • 신고전주의의 등장1750년경부터

    신고전주의 등장의 배경으로 두 사람이 있다. 둘다 고고학자.

    • Antone raphael mengs 안톤 라파엘 멩즈
    • Winckelmann 빙켈만

      빙켈만은 도서관 사서. 그리스미술에 관심을 갖고 로마를 방문.

      1750년경부터 신고전주의 양식이 나타남

      빙켈만은 그리스에 가본 적은 없고, 로마에 갔다. "noble simplicity and quiet grandeur" - 고상한 단순미와 조용한 장엄함 이런 단어로 그리스 미술을 설명함.

      History of Ancient Art (1763) : 미술사의 본격적인 학문의 시작이 빙켈만에서 됐다고도 함. 빙켈만은 양식론을 기본으로 함: 자세한 묘사를 통해서 그리스미술을 최고로 이야기함. 점점 로코코에서 벗어나서 다시 고전주의로 감. 그래서 신고전주의, Neo Classicism !

  • 신고전주의의 성격
    • 낭만주의의 한 형태로서 신고전주의전체를 엄밀하게 보면 신고전주의는 낭만주의의 한 가지 형태. so 시 새롭게 관심 가졌던 사람이 17세기 푸생과 같은 사람들. 그래서 푸생의 그림을 다시 보기도 함.

Antonio Canova, 큐피드와 사이키

Paolina Borghese as Venus

신고전주의는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나타난 현상. 특히 이태리에서~

볼게제는 가문. 실제 여성을 비너스로 나타낸 조각을 함. 누구나 보아도 고전주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능적이기는 하나 그리스 조각과는 차이가 있음.

  • 주제의식상 프랑스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고전주의를 도덕적 방향으로 발전시킴.

    디드로, 예술가는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내용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예술이라는 것은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깨우치게 해야 하며, 공공의 선을 위해 봉사하는 고대 로마의 이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프랑스에서 발전시킨 신고전주의는 사회적 역할, 도덕심 등이 강조된 형태로 나타나고, 그것을 처음 실현한 사람이 바로 자크 루이 다비드! (cf. 카노바의 그림에서는 어떠한 도덕적 의미를 찾기 어렵지) 당시로서는 굉장히 혁신적인 양식이었음. 다비드가 나올 당시에는 아주 혁신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 자크 루이 다비드
    • Vien 아래에서 수학

         

      >vien 마르스와 아테네 여신의 싸움, 1780

      David는 Vien이란 사람 아래서 공부. 비앙의 그림은 키치적? 대단히 훌륭한 기술을 가졌지만, 주제와 같은 것이 엄격한 고전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의 밑에서 공부하면서 부쉬에를 좋아했음. 이 작품은 그의 초기그림. 옷자락, 광선, 배경에서 약간 로코코양식이 남아있음.

    • Prix de rome

      당시에 젊은 작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데뷔를 해야 했는데, 그 당시 고전의 본거지 로마로 유학을 가는 것이 꿈이었다. 로마를 가서 공부할 수 있는 프리 드 롬(Prize to Rome; 로마상) 장학금이 있었음. 다비드는 스승의 허락 없이 자기 스스로 이 그림을 내고, 심사위원이었던 비앙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여 다비드는 떨어지게 됨. 충격을 받아 굶어서 죽을 생각을 했는데, 설득당하고 결국 다섯 번째로 로마상을 받고 결국 로마로 감. 그러나 체제에 대한 불신, 아카데미에 대한 불신이 가득하게 되고 나중에 프랑스 혁명이 났을 때 아카데미를 닫아버림. 정치적 혼란기에 살았던 사람의 경우, 정치 또는 일생의 사건들과 떨어져서 생각하기 어렵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사람의 그림들이 많이 좌우되게 됨.

         

      제도? ①accademy, ②salon展: 전시장면, 당시에는 벽을 녹색, 붉은색 벨벳에다 그림을 다닥다닥 붙여서 걸었음.

    • 그림의 서열 - 인체 드로잉과 역사화

      >다비드, 누드습작, 1780

      17세기 파리 아카데미는 가장 중요한 것이 인체 드로잉.

      Why? 당시에는 그림에 서열이 있었다! 생각하는 그림, 예를 들면 역사화 같은 것. 서양의 미술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사람을 통해서 감정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인물이 어떤 감정을 나타내는지 잘 알아야함. 공포를 느끼게 하는 표정, 즐거움을 나타내는 표정 등을 따로 공부했다. 이러한 것을 잘 그려야지 가장 훌륭한 화가들이 그리는 역사화를 잘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

    • 다비드의 미술의 성격

      다비드의 미술은 선과 형태 중심의 미술이고, 이것이 서양미술의 주류. 미켈란젤로~푸생~다비드 계열은 그림을 조각적으로 그리고, 색보다는 선을 강조. 색채는 동물적인 본능의 요소이므로 지적인 그림에는 색채를 부차적인 요소로 생각했다. 스케치 단계에서도 잘 알 수 있듯이 정확한 해부를 통해 근육 등을 그리고 있음.

      >다비드, 호라티우스의 맹서, 1784

      왕에게 이 그림을 바침. 로마상 역시 국가(왕) 관장. 당시의 주문자는 왕, 국가. 당시에는 'machine painting'이라고 할 만큼 어마어마한 대작. 오랜 시간에 걸쳐서 그림이 완성됨. 이를 통해 내가 로마에 가서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는지 보여주게 됨. 모두가 흡족하게 생각했음,

      호라티우스? 로마의 공화정 원로.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음. 알바라는 옆의 나라와 싸우고 있었는데, 대표 셋이 나와서 판단하자고 함. 알바의 가문은 큐리아티. 오른쪽 맨 뒤의 여성은 알바의 큐리아티의 딸. 내일 자신의 오빠와 남편이 싸우게 되어 굉장히 슬퍼하고 있음. 한 아들은 큐리아티의 약혼자. 이 이야기가 희곡으로 쓰여서 공연이 되었는데, 다비드가 감동을 받음.

      사사로운 개인의 감정을 떠나서, 개인을 희생하고 국가를 위해 싸우고 충성하는 의미가 명백함. 시민적 덕목, 자기희생은 계몽주의 철학자들도 요구했지만, 왕 역시 나름대로 만족. 국가가 나니까. 훌륭한 주제로 평가받았음.

      • 그림의 형식 분석

        그림이 굉장히 명확함. 뒤에 로마의 아치가 세 개 있음. 중앙에 인물이 있고, 빛이 들어옴.

        왼쪽의 세 인물은 자세가 매우 긴장해있고, 결의에 찬 모습. 아버지의 얼굴은 로마의 알프스 아울렐리우스 기마상에서 온 것. 팔을 들고 제우스신에게 맹세하는 장면. 의미가 매우 확실함.

        오른쪽의 사사로운 감정에 슬퍼하고 있는 여성은 남성과 의도적으로 대비되고 있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 아니다. 남아있는 드로잉 有

        실제로 싸웠을 때의 story= 큐리아티 쪽에서 호라티우스 형제를 죽여 막내만 남게 되었는데, 막내가 큐리아티 삼형제를 죽이고 승리하여 들어옴. 형수가 막내를 뭐라고 하면서 여자를 죽임. ??살해를 하여 원로원에서 재판을 하는데, 아버지가 와서 결국 풀려남. 원래는 다비드가 이러한 장면을 고안하였는데, 훨씬 불분명하고 상황이 복잡하다.

        처음 드로잉단계

        눈금이 있음/ 당시 캔버스 색깔: 흰 캔버스는 인상파 때 처음 등장. 그 전에는 칙칙한 노랑색, 갈색을 주로 천으로 해서 화가들이 만들어 썼음. 이러한 바탕색이 통일 되니까 색이 충돌하지 않고 색이 어느 정도는 조화를 이룸. 인상파에 와서 흰색 캔버스를 쓰자, 서로 맞지 않는 색을 쓰면 그것이 훨씬 강하게 눈에 자극되게 되는 것. 그러나 옛날식의 캔버스는 색채에서 충돌되는 경우가 생기지 않았음.

      • 영웅의 이미지

        도덕적이면서 영웅. 특히 다비드의 경우 이러한 공공의 영웅 이미지를 많이 내세움. 굉장히 단순하고, 근육의 힘 등이 세밀하게 그려졌고, 구도에서 보이는 삼각형의 형태 역시 고전에서 많이 사용되던 것. 카라밧지오적인 효과를 주는 것(카라바지즘). 로마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그림을 그렸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 (in Metropolitan)

        소크라테스가 사약을 받고 죽음: 주제가 고전주의일 뿐 아니라, 구성이 매우 '고전주의적'

        양식분석과 주제의도

        맨 앞에 사람이, 그 다음에 침대가, 그 다음에 벽이, 그 다음에 층계가 있다. 고전 구성이라는 것은 단계적, 점차적으로 깊이를 가지면서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저 사람이 어느 위치에 있다는 것이 명확하게 들어올 때를 말하는 것.

        그림에서 제일 앞에 있는 선이 유리로 되어있다고 가정했을 때: 'picture plane' (그림의 면)

        강건, 수직적으로 올라가는 소크라테스와 다른 제자들은 선이 다름: 제자들은 선이 흘러내림. 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약한 사람들과 영웅적인 소크라테스를 비교했다. 이 그림 역시 인간의 도덕과 법에 대한 교훈적인 작품임을 알 수 있다.

       

    • 영웅의 이미지

      도덕적이면서 영웅. 특히 다비드의 경우 이러한 공공의 영웅 이미지를 많이 내세움. 굉장히 단순하고, 근육의 힘 등이 세밀하게 그려졌고, 구도에서 보이는 삼각형의 형태 역시 고전에서 많이 사용되던 것. 카라밧지오적인 효과를 주는 것(카라바지즘). 로마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그림을 그렸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 (in Metropolitan)

      소크라테스가 사약을 받고 죽음: 주제가 고전주의일 뿐 아니라, 구성이 매우 '고전주의적'

      양식분석과 주제의도

      맨 앞에 사람이, 그 다음에 침대가, 그 다음에 벽이, 그 다음에 층계가 있다. 고전 구성이라는 것은 단계적, 점차적으로 깊이를 가지면서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저 사람이 어느 위치에 있다는 것이 명확하게 들어올 때를 말하는 것.

      그림에서 제일 앞에 있는 선이 유리로 되어있다고 가정했을 때: 'picture plane' (그림의 면)

      강건, 수직적으로 올라가는 소크라테스와 다른 제자들은 선이 다름: 제자들은 선이 흘러내림. 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약한 사람들과 영웅적인 소크라테스를 비교했다. 이 그림 역시 인간의 도덕과 법에 대한 교훈적인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다비드, 형장의 마리 앙트와네트

  • 혁명과 다비드
    • 1789 프랑스혁명: 다비드는 혁명에 적극 참여. 당시 최고위원회의 위원이 됨. 결정한 것 중 하나가 마리 앙트와네트를 단두대로 보내는 쪽에 투표함. 죽기 직전 그녀의 모습을 앉아서 스케치했는데, 아름답지 않은 중년의 여성의 모습으로 그렸다.
    • 다비드는 혁명의 중심에 있으면서, 혁명 퍼레이드 전체를 조직하는 일을 했음. 혁명이라는 것을 이끌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열기를 유지해야 했으므로, 거의 매일 파리에서 사람들의 행진이 있었음.

         

      >Brutus에게 아들의 시신을 가져오는 간수들, 1789

      브루투스: 로마 공화국의 원로, 어머니의 사죄에 의해서 두 아들이 왕정으로 복귀하려는 음모에 가담함. 아버지가 새로운 정치질서에 반대하는 두 아들을 죽일 것을 명령함. 간수들에 의해 시신이 들어오고 있는 장면.

      • 주제의식과 표현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자식을 희생하는 것이 주제이긴 한데, 초기의 호라티우스와는 달라짐. Where is the hero? 우선, 영웅이 분명하게 눈에 띠지 않음. 중앙에 영웅적 인물이 앉아있어야 하지만, 이 그림의 주인공인 브루투스는 그림자가 지는 화면 가장자리에 앉아있음.

        물론 아직도 남성과 여성은 대비되어 나타나고 있지만, 중앙은 완전히 비워져있음. 행동이 산만하게 흩어져있음. 다비드는 계속해서 이러한 그림을 그려서, 명료하게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음.

           

        루이 16세는 혁명이 났을 때 자신의 가족을 피신시키고 했으므로, 여기서 보듯이 브루투스가 명령을 내렸지만 그림자 진 곳에 앉아있는 것은 자신의 슬픔을 나타내지 않기 위해서임. 이러한 것이 그 당시에는 굉장히 성공적으로 보여졌고, 이러한 것이 초기에 사회적 메시지를 강하게 주는 그림이었다.

      •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

        로베스 피에, 당통, 마라가 혁명의 3人: 마지막으로 마라 역시 피살당하면서 마지막에 공공장례를 치렀던 인물. 이후에는 완전히 혁명이 혼란에 접어듦. 서로 갈라지고 분열. 다비드 역시 혁명이 변질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음.

        마라가 병이 있어서, 습기가 많은 곳에 있어야 했음. 그래서 자기 집에 있는 목욕탕 속에서 집무를 했음. 샬롯 드 콜데이(Corday)가 초대장을 가지고 왔음. 콜데이가 와서 단검으로 마라를 찔러 죽임. 바닥에 떨어진 피 묻은 나이프.

        • 그림구성

          굉장히 단순. 벽이 있는 뒷부분= 회색빛의 아무 것도 없음. 우리에게 제일 가깝게 떨어지는 것이 마라의 머리가 되어서, 우리가 직접 마주하고, 직면하는 느낌을 준다.

        • 죽음의 이미지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영웅적인 죽음이었으나, 여기서 나타나는 죽음은 '순교자의 이미지'가 됨

          수건으로 머리를 말았는데, 이것은 후광과 같은 의미를 줌. 종교적인 순교자와 같이 됨. 영웅이지만 조금 더 순교자적이고 신비스러운 광선에 의해 비쳐짐.

          모든 세부를 너무나 정확하게, 상처자국, 피 묻은 나이프 등을 굉장히 세밀하게 나타내어서, 살인의 현장을 불멸의 미술로 만들어 냄!

           

        cf. illustration과의 비교

        이야기 전개는 이것이 더 정확하게 보여줌. 칼로 찔려 소리를 지르니 옆방에서 사람이 달려 나와 발견했다? 그러나 미술의 형태로서 감명을 주거나 어떠한 인상을 주는 것은 여기에 없다. 미술을 이야기할 때 명작이냐 아니냐는, 같은 이야기라도 실제 현장과 다른 의미로 만들어낼 수 있는가의 여부에 달렸으며, 그것이 곧 작가의 능력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다비드, 바라의 죽음, 1793

        공공의 리더, 전쟁터의 영웅과는 달라지고, 조금 더 개인에 대한 관심으로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혁명 때 쓰러진 젊은 청년의 모습. 여성처럼 보임. 이런 식의 그림이 다비드에게도 가능했다 ! 자신이 생각하는 미술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사회적, 영웅적, 약간 dry한 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로마인과 사비니인들의 싸움, 1799

        변화

        단순한 구조에 몇몇 사람이 있는 구성이 아님. 어마어마하게 큰 그림. 인물들도 키가 커지고 늘씬해짐. 이러한 비례는 그리스의 헬레니즘 조각에서 많이 나타나는 비례. 훨씬 더 우아하고 부드럽고 미묘하게 변하는 쪽으로 감. 초기의 로마영향에서 그리스적 영향으로 가게 되었음.

        여성의 역할이 달라짐. 중재자 역할. 인물들도 공들여서 다듬어지고 훨씬 우아함

        초기의 호라티우스와 많은 부분 달라졌음. 그림이 훨씬 더 복잡해졌다. 로마와 사비니가 싸워서 로마 사람들이 사비니의 여성들을 강탈하여 결혼하여 인구가 많아지면서 로마가 부강해짐. 그런데 사비니 사람들이 다시 쳐들어옴.

           

           

        준비 스케치: 이러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뼈대를 그리고, 근육을 붙이고 해야 했다. 이 사람의 모델은 그리스의 벨베데레 아폴로, 천을 두르고 있는 그 아폴로에서 모델로 하여 그렸으며 나중에는 누드로 된 것. 한동안 감금되어 있다가 이 작품으로 다비드가 부활하게 됨.

        >알프스를 넘어가는 나폴레옹, 1800

        다비드는 나폴레옹에게서 새로운 영웅을 찾았고, 나폴레옹 역시 자신의 정부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공적인 미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낌. 자신을 불멸의 영웅으로 만들어 줄 화가가 필요했음. 그래서 다비드가 나폴레옹의 그림을 여러 개 그리게 됨. 이 그림을 그려 받기 위해서 나폴레옹이 다비드를 많이 방문했음. 몇 년 후에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나폴레옹이 원했던 것은 어떻게 자신을 나타낼 것인가, Image making이 중요했던 것. 그리고 다비드는 그 역할을 충실히 다함.

       

    알프스를 넘어갔던 사람들= 보나파르트, 한니발, 카를로스(신성로마제국의 칼 대제) 보나파르트가 그 옆에 있다는 것은 그들과 자신을 똑같이 놓음.

    표현.

    말을 보면 사나운 바람이 부는 듯: 갈귀, 망토, 모두 다 상향 그리고 그러한 사나운 말 위에서도 참착하게 앉아있는 나폴레옹. 기마상은 고대로부터 통치자들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 많이 쓰였음. 실제로는 노새를 타고 알프스를 넘었다고 함. 상당한 정치가, 어떻게 하면 자신을 잘 선전할 수 있을까.

    >대관식, 1805-08

    3년에 걸쳐 그려짐. 높이 6m x 가로 10m. 다비드 60세에 그림. 커다란 교회를 빌려서 여러 조수와 작업함. 모든 구성과 스케치의 단계 단계마다 검열 당함.

    대관식의 조세핀과 나폴레옹(당시 조세핀은 41세였다고 함)원래는 황제가 되기 위해 로마 교황에게 엎드려 관을 받아야 함. 그러나 실제로는 교황이 앉아있는데 자신의 머리 위에 썼다고 함. 자신이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순간으로 연출.

    놀랄만한 기술 옷의 질감(모피, 벨벳, 보석 등)이 굉장히 세부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제2강 다비드 후 (그로, 제라르, 지로데, 앵그르)

2010년 3월 10일 수요일

오전 3:55

<<201003008월 19세기서양미술 2강.WMA>>

   

3/8

제2강 다비드의 후계자들 - 안트완 그로, 지로데, 앵그르

  • 다비드의 영향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유배를 가게 되고 거기서 생을 마감. 다비드가 확립했던 신고전주의가 19세기 전반에 아카데미나 살롱의 하나의 지배적인 흐름이 되고, 그 후계자로 비춰졌던 사람이 그로.

  • 그로 - 당시 나폴레옹의 종군화가로 활약했음.

    • >Antione Jean Gros, Napoleon Visiting the Pesthouse at Jaffa, 1804

      구성

      모든 것은 나폴레옹이 있는 쪽으로 집중. 환자를 손으로 만지는, 부가는 손수건을 코에 대고 차마 보지 못함. 나폴레옹은 두려워하지 않고 손을 갖다 대고 있음. 이는 그리스도가 나자로를 치유하는 모습을 연상케 함. 주변 부관이나 사람들은 굉장히 조용하고 무서워 함.

      그로 자신은 다비드에게서 배운 준비단계의 그림, 스케치, 오일스케치, 완성작. 그는 스스로 고전적인 그림을 많이 그린다고 생각했지만 주위에서는 낭만적인 느낌을 가진다고 말함. 내가 왜 좋은 모범을 못 보일까? 그는 루벤스를 더 좋아했음. 강렬한 붉은 색, 따뜻한 색이 루벤스적인 따스함과 비슷함.

    • >Eylau의 전투, 1808

      길이 8m의 거대한 작품. 실제 있었던 사건. 1807년 러시아를 쳐들어가서 패배하고 25000명의 사상자가 났음. 이후부터는 나폴레옹의 몰락이 시작됨.

      영웅의 이미지

      나폴레옹이 축복을 내리는 동작은 고대의 아우구스투스 동상에서부터 로마 황제의 조각상, 그리스도의 모습 등에서 보임. 머리 주위를 비워놓음으로써 후광으로 보이게 하고, 이 거대한 그림 속에서도 나폴레옹을 금방 찾을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시선이 아래에서 위로 우러러 보게 함. 종교적인 영웅화에 대해서 분명.

      아래에 보이는 공포. 너무 추워서 얼어 죽은 모습이 아래에 있음. 워낙 큰 그림이므로 앞에서 우리의 시선이 닿는 곳은 희생자와 죽음의 부분. 여기서는 희생자 쪽으로 향하게 됨. 결국 자기 자신의 감정과 반응이 여기에서 보이게 됨.

      전쟁화는 누가 그것을 주문했는가가 중요. 국가나 왕이 주문했을 경우, 그것은 선전을 의도한 것. 애국심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 근대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가 나옴. 이전에는 자기의 목소리를 종군화가로서 국가에 대한 의무로 그렸지만 자기가 실제로 본 증언의 목소리 내기 시작.

  • Gerard제라르

    • >Gerard, Cupid and Psyche, 1798

      16세부터 다비드의 스튜디오에서 공부함. 실제로는 하인의 집안에서 났다고 함. 혁명 이후 루이 18세가 즉위했을 때 궁정화가가 되고, 나중에는 공작으로까지 올라간 화가. 그로가 결국 자살을 하고, 제라르와 지로데.

    제라르 그림의 특성

    제라르는 다비드의 강렬함에 비해 연약, 절제됨

    스토리 역시 영웅이 아닌 신화의 이야기. 많이 다르지만 그 당시 살롱과 국가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여는 국전(le Salon)에서 굉장한 성공을 거두어 그 당시 명성이 대단했음. 예쁜 그림^^

    19세기 아카데미 그림이라고 하면 이러한 것. 약간 에로틱. 그렇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신화를 끌어들인 것. 오늘날의 해석으로 보면 에로틱을 노골적으로 표출하지 않고 음미하는 듯한.

  • Girodet

    • >Girodet, Endymoin(엔디미온)의 잠, 1791

      귀족 출신. 다비드의 제자. 실제로 혁명이 났을 때는 프리드롬의 상을 받고 로마에 가 있었으나, 혁명에 동조했었던 사람.

         

      신화에 나오는 주제. 로맨틱한 월광이 보임. 앤디미온은 아름다운 미소년. 달의 여신이 그에게 사랑에 빠져서 큐피드를 보내는 장면. 달의 여신 셀레네가 언제든지 앤디미온을 찾아갈 수 있게, 영원한 잠에 빠뜨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옴. 달의 여신이 아름다운 남자의 누드. 큐피드가 왼쪽에 와서 있음. 사실은 신화와 달리, 이 그림에서 보이는 것은 큐피드와 앤디미온의 모습. 어떻게 보면 거의 큐피드(로마에서는 에로스)와 앤디미온 두 사람 간의 사랑으로 보임. 둘 다 남성. 그러므로 동성애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앤디미온은 매우 여성적인 아름답고 매끄러운 신체를 갖고 있음. 그리고 그것이 잠에 빠져 의식이 없는 듯한 완전히 무방비상태,

         

      다비드의 영웅적 감성, 도덕적 환기력, 공중에 대한 메시지, 자기희생 등은 사라져버림.

         

      달의 여신이 아름다운 남성에게 사랑에 빠져 적극적인 방식으로 그를 잠에 빠뜨리게 하는 것은 성에 대한 인식이 많은 부분 달라지고 있다는 것. 동성애라는 것이 그리스에서부터 상당히 나쁘게 나타나고 있지만 8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이 되면서 성에 대한 연구가 많아짐. 상당히 많은 이러한 그림들이 있다.

    • >Atala의 매장, 1808

      신고전주의자들의 테크닉이란 매우 뛰어남. 어떻게 저렇게 그릴 수 있지?

      표면 마무리, 이상적인 신체는 고전주의. 그러나 낭만주의적 요소가 보인다. 광선, 분위기 등

      르네 드 샤또 브리앙이라는 소설 아탈라에서 나온 것. 소설이 나온 지 7년 후에 이 그림이 그려졌고, 그 소설의 마지막 장면. 그 배경은 신대륙인 미국의 캐롤라이나 주에서 있었던 이야기. 아탈라는 인디언 혼혈. 아탈라의 어머니가 어렸을 때 일생을 마리아를 위해 살도록 맹세하겠다고 함. 그러나 청년과 사랑에 빠짐. 어머니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남자가 있음에도 자결함.

      아탈라는 그리스의 여성처럼 아름답고 이상적. 남성 역시 이상적. 굉장히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낭만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음. 사제가 있음; 종교와 사랑의 열정이 둘 다 똑같이 나타남. 죽음, 절망적 사랑, 장례로 이어짐.

      당시에 대단한 성공을 거둔 작품이 되었음. 굴 속에 있음. 십자가가 보임. 굴 속에 있으므로 어둡고 밝은 부분이 잘 보이고 광선이 흘러들어옴. 야생, 미국의 배경이 굉장히 개인적. 사사로운 개인감정을 다루고 있음. 여기서 여자가 희생한 것은 정치와는 아무 상관없는 개인적인 것.

      >다비드, Madame Recamier, 1800

      다비드도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다. 머리가 원래 흑발이었고,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겼음. 검은 머리가 안 맞는다고 브라운으로 그려서 여자가 화를 내고 갔다고 함. 다비드의 중요한 제자 앵그르가 왼쪽의 램프를 그렸다고 함.

  •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오래 살았음. 1860년대까지 살아서 다른 사람들보다 작품도 많고, 탁월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음. 당시에 굉장히 많은 초상화가 그에게 의뢰되었음. 같이 활약하고 오래 살았던 사람이 들라크루아.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시대. 당시로는 서로 반대편에 있었음.

    • >Venus wounded by Diomedes, 1803

      신들의 전쟁 중에 디오메데스에게 부상당한 비너스. 전쟁의 신 마르스의 전차 속으로 다시 돌아온 비너스의 모습. 전차를 모는 아이리스 신. 당시에는 고딕적이라고 함. 어색하지 않음. 하나의 선과 형태로 보면 여기서 손이 더 길면 이상하게 보이게 됨. 앵그르는 실제 사람의 해부보다는 그림 자체의 선으로 생각했던 것

      디오메데스와 비너스가 같은 공간과 거리에 있는 것으로 보일만큼 굉장히 좁은 공간에서 둘 다 측면인데 서있는 면적이 굉장히 좁은 공간.

>프라 안젤리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15세기

  

  

cf.그리스의 항아리 그림들(francois Vase, Greece, Archaic)

  

  

  

cf. John Flaxman, the fight for the body of patro

일러스트. 아주 섬세하고 부드럽고 움직임이 활발하지 않지만, 움직임의 뉘앙스를 주는 인체

  

  

이러한 고전주의는 어디서 많이 나타날까? 15세기 르네상스.

자세가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약간 딱딱한 자세. 16세기 전성기에 가면 움직임이 나타남. 초기 르네상스에는 그러한 것들이 많지 않았음.

   

   

   

  • >아킬레스와 사신들, 1801,

       

    부드러운 리듬감. 프리 롬의 상을 받은 작품. 아킬레스의 어머니가 그를 여자들이 있는 수녀원에 여장시켜 숨겨두었음. 박물장사가 수녀원에 물건을 팔러가서 그 속에 방패를 숨겨두었음. 여자들을 유심히 관찰했더니, 방패를 보자 한 여자의 눈이 반짝. 들통남.

    누드는 아카데미에서 요구하는 고전주의를 충족시키는 정확한 누드. 그러나 다비드와 같은 입체표현을 제한시켜서 볼륨보다는 선을 미묘하게 쓰고, 굉장히 세련됨.

       

  

Raphel Sistine Madonna

  • >LoUis 13세의 맹세, 1820 - 1824년 살롱에 전시됨. 누가 봐도 뻔한 그림. 당시의 국가가 제일 중요하게 여겼던 유명작가가 되면 이러한 종류의 왕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 바쳐야 함. 완전히 루이 13세, 부르봉 왕가를 선전하는 그림을 그리게 됨.

    루이 13세가 마리아에게 바치고 있고, 주위에 천사들이 있음. 당시에는 교회와 왕권이 가까웠음. 교회와 국가를 이상화시키는 의도가 담긴 작품. 작가의 양식이 달라질 수 있음. 자기가 정말 원해서 그리고 싶어서 그린 그림. 국가에서 원하는 것은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있어서, 거기에 맞춰서 그린 그림은 양식이 매우 다를 수 있다.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타협. 대중이 보면 감탄하는 것.

    cf. 왕도 마음에 듦. 어떤 것을 보고 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됨

    시스틴 마돈나를 염두에 두고 그린 것이 분명. 앞의 것이 달라졌지만

    cf. 프로파겐다적인 성격이 있어서, 결국은 국가나 교회가 원하던 양식. 이렇게 되었을 때 갈등을 빚는 화가가 있고, 안하겠다는 화가가 있음. 작가가 잘 타협하여 원하는 식으로 그려줌.

  • >Jupiter와 Thetis, 1811

    신고전주의 회화가 새로운 리더를 찾았음. 계속해서 이러한 그림을 그리게 됨. 테티스는 바다의 요정.

    제우스= 제왕 같은 엄숙함. / 테티스= 여성의 몸. 두 사람이 서있는 공간이 똑같은, 면적이 작은 공간 안에 서있음. 남성의 몸 옆에 여성이 있는 것이 굉장히 sexual함. 앵그르는 노총각이었다고 함. 남성의 몸에 밀착되어있는 여성의 몸이라든지, 여성의 몸이 구조가 있는 느낌이 나지 않고, 거의 고무처럼 흐물흐물해 보인다. 여성의 목에서 보듯이 선의 윤곽을 보면 아름다운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음. 앵그르는 순수한 선의 윤곽을 가지고 있음. Draw line(선을 그려라). 드가는 굉장히 드로잉을 잘했던 화가. 유명한 예가 있음.

  • Ingres, Madame Rivière, 1805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였고, 유명한 사람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려서 돈도 많았음.

    대체적으로 앵그르의 그림을 보면 친한 사람들의 경우 성격까지 잘 묘사되어 있으나, 주문받아 그릴 때에는 어떠한 사회의 계급 등에 맞추어 이상화시킴.

    성격이 잘 나타나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부유한 여성이었음에는 분명함. 손의 비례가 너무 길다. 색채도 배경의 푸른색의 비로드. 빛에 의해 하얗게 보임. 차가운 파랑에서 따뜻한 흰 블루. 화이트. 크림. 화이트의 변화. 아름다운 수를 놓은 천의 색을 보아도 정교하고 아름다움.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손이 길고 이러한 것은 다 잊게 됨. 이것이 앵그르의 중요한 특징.

  • >마담 르블랑, 1823

    소도구, 숄, 보석, 의상을 보면 어느 정도 사회적 위치가 있는 사람. 이상화 됨.

    정교하고 꽃무늬. 얼굴에도 집중하게 되지만 사람은 그냥 이상화됐다는 정도일 뿐. 오히려 친구들의 초상에서는 가능해짐.

  • >마담 M.. ?

    얼굴은 퉁퉁한 중년 여인. 화려한 중국자기, 의자에 시선을 뺏김. 이러한 것들이 전형적인 주문초상화. 눈이 즐거워지는 것들~

       

  • >그랑 오달리스크

    여기서 프랑스 화단에서 일어난 붐이 '오리엔탈리즘' 북아프리카 원정을 가면서 600명의 학자를 데리고 감. 거기에서 많은 자료들을 가지고 옴. 그 중 하나가 로제타스톤, 오벨리스크.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처음으로 해독하는 것이 샹폴리옹이라는 사람.

    오리엔트(orient) 이집트 뿐 아니라 모로코, 터키 등 소위 이슬람 국가를 이야기 하는 것.

    유럽에 오리엔트, 동방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스핑크스를 그림에 그리거나 하면서 사람들이 여행을 가게 됨. 여행객이 쓴 것들은 첫인상에 불과하고 대체적으로 여행기라는 것이 여러 잘못된 정보도 들어옴. 일반인들에게 퍼지는 것은 이러한 것. 자기네보다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지역에 갔을 때, 특히 남자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그 곳의 이국적인 여성에 대한 호기심. 술탄이 거느리는 후궁들과 같은 이야기가 호기심을 유발. 후궁의 모습을 상상하여 그린 것. 누워서 흘끗 뒤를 보는 것은 서양미술사에서 굉장히 많이 나오는 것. 서양미술이 오리엔탈리즘적인 주제와 결부됨.

    얼굴은 라파엘, Madonna of the Chair의 얼굴을 가지고 옴.

   

빛이 내려와서 밝고 어둡고, 피부에 들어오는 ... 오감을 자극함. 피부의 질감과 시트의 질감. 털, 공작새 등. 선만 강조했지만 선명하고 풍요로운 색채. 등

이 여자의 팔이 너무 길다.팔로 보지 않고 형태로 보았을 때, 커튼의 주름과 팔이 이어지면서 전체가 U자 형태를 이루게 됨. 다리가 너무 길고, 실제로 포즈를 취해보면 어깨가 쳐지고, 이러한 형태가 안 나옴. but 추상적인 눈으로 보면 나무랄 데가 없음.

당시의 누드를 이야기하면

클락, 누드는 벗은 것으로 보지 말아라, 예술의 형태다!

그러나 아무리 예술의 형태로 보여주더라도 실제와 분명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feminist, 이것은 남성들에게 환상을 준다. 언제든지 가질 수 있는... 그러한 것으로 의도된 것

   

와상 - 서양미술사상 가장 많이 그려진 주제

조르지오네 티션 고야 마네 마티스 등..

그다음

   

   

   

  • INGRES, ODALISQUE WITH THE SLAVE,1842

    나이가 들면서 좀 더 에로틱하게 간다.

    그림 뒤에 보면 검은 피부의 얼굴이 있다.

    그랑 드 오달리스크는 실내내부가 터키의 암시가 있는데 이 그림은 북아프리카인 것 같고.

    그리스 고전(백인 젊은 청년과 아름다운 소년 소녀가 나오는)과는 달리, 외국인, 타인종의 것이 관심의 대상이 되니깐(이 사람이 신고전주의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보아 낭만주의적 요소라 볼 수 있다.

    아까 본 대 오달리스크보다 곡선을 더 강조하고 더 따뜻 요염 풍만하게 되어있고, 액세서리가 더 나오는 섹슈어리티인데 더 권태로운것이랄까 하는 분위기가 후기에 가면서 더 강해지는 걸 알 수 있다.

    이 사람은 1850년부터는 더 이상 전시를 하지도 않고(많은 명예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그렸는데, 이것을 보면

  • A SOURCE 샘 1856

    1820년에 작업을 시작해서 56년쯤 거의 80인데, 조수와 함께 완성했는데, 여기서 보면 콘트라포스토(왼쪽이나 오른족 다리에 무게중심이 오고 다른 한쪽 다리는 편안히 쉬니깐 몸이 경직된 대칭이 아니라 골반 등이 자연스레 취해지는 편안한 자세가 되는 ) 고전적 인물상에서 가장 많이 나타내는 자세.

    이런 것을 보면 그리스 조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호평을 받은 작품,.

    김환기 항아리 작품을 보면 그런 게 나온다.

  • TURKISH BATH 1852-63

    52년부터 10년간 그린.

    사실 터키탕은 없다.. 상상의 목욕장.

    여기 나온 누드는 여기저기 나온 누드를 다 종합한 것이다.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앵그르중에 발 팽송 목욕녀라는 작품의 것에서 시타를 켜는 여자가 나오고, 클레오파트라 그림중에 또 그런 예가 있다.

    자기가 여태까지 그린 모든 누드를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시켰다.

    원래는 네모난 그림이엇는데, 둥근 원형의 구도TONDO톤도로 고쳐서 63년 82세에 마쳤다.

    문양이 터키 목욕탕이라는 것 자체가 동방적인 취향을 보여주고, 거기 보여지는 여성들의 타일 등이 동물적, 감각적 느낌을 굉장히 강조하고 있다. 에로틱, 동물적인 형태가 나타나는 후기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네모의 구성보다는 톤도의 구성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3강 낭만주의(제리코, 들라크루아), 고야

2010년 3월 10일 수요일

오후 2:01

   

<<오디오 녹음.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3월 10일 수요일 오후 2:01

  • 낭만주의
  • 제리코, Theodore Gericault (1791-1824)

    • 왕실 근위대의 장교, 1812

      지금까지 본 것들이 신고전주의 다비드와 그 후계자들이었는데, 이제부터 보는 것은 낭만주의 계열 소위 ㅇ로맨티시즘 작가들을 보겠다.

      처음 보는 사람은 테오도르 제리코.

      앵그르보다 11살 아래, 그담에 낭만주의 기수인 들라크루아보다 7살 위.

      과도기적이라 할 수 있지.

      다비드나 그로와 같이 혁명을 직접 겪지 않고 혁명기에 난 사람이지만, 듣고 자란 사람이기 때문에 낭만적 기억으로 남아있고, 성격이 아주 모범생은 아니고 전통적인 이상 도덕적인 이상 등에 관심이 없이 약간 문제아적인 사람이엇나 보다. 1812년에 유부녀와 피렌체로 도피했다든가..

      이 사람이 1812년에 처음 살롱에 출품한 작품이 제리코의 왕실 근위대의 장교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그로가 그린 대규모 전쟁그림과는 달라져보인다.

      • 전투장면이 없고
      • 주인공이 다른사람 없이 혼자 떨어져있고
      • 군복이 매우 화려해보인다.

        당시 나폴레옹이 끌고 갔던 군사들은 사실 직업적 군인은 아니고 시민들이 나가서 싸우는 것이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프랑스 군복을 만들었단다. 군복을 입으면 정체성도 확실해지고 남성적이랄까 굉장히 화려해보이는 게 있다. 대 프랑스 제국의 자랑스러움 이런 것이 그림에는 나타나 있다.

      준비단계 오일 스케치

      이 사람도 다비드와 같이 아카데믹한 준비단계를 착착 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확실히 보이는 것은 - 고전주의는 완성도이다 했는데, 여길 보면 붓터치가 굉장히 달라진 것을 볼 수 있다. 완성작에는 그런 것이 많이 줄었지만, 스케치에는 굉장히 거칠다.

      스케치 두 안을 보면

      다비드적 고전주의가 아닌 루벤스같은

      • 극적
      • 따뜻한색채
      • 대각선 구도
      • 곡선

      부르크하트라는 역사학자가(19세기말) 말하길, 미술사상에 말을 잘 그리는 세 사람이 있는데, 하나가 다빈치, 루벤스, 제리코라고 이야기했다. 제리코는 어려서부터 경마장 등에 가서 말을 많이 보고 좋아했고 많이 관찰해서, 전체적으로 생생한 느김을 강조해주고 있다.

         

      배경을 보면 불확실하다. 불확실한 배경은 고전에서 나오지 않는다. 고전에선 배경이 확실히 규정되어야 한다.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이러한 효과는 다 낭만주의적인 그런것.

      지로데 앵그르 등에서도 낭만주의적 요소가 있다지만 여기에서 상당히 많아졌다.

      들라크루아에선 물론 이보다 더 완연한 낭만주의.

      고전의 훈련을 받앗음이 선 등에서 보여지지만,

      색의 대조나 터치, 운동감, 따뜻한 색 등에서 낭만주의적 요소가 보여지고 잇다.

    • 제리코. 부상당한 기병 1814

      아까같이 싸우는 용감한 군인은 사라지고, 부상당해서 전장터에서 떠나는 군인의 모습이다. 패배의 암시가 느껴지고, 아직까직도 불란서 군인의 머리랄지 화려한 건 입었지만,

      그래도 이사람이 어딜 다쳤는진 보이지 않는다.

      그로를 볼땐 나폴레옹이 어디를 방문했다는 서사적 맥락이 확실히 보이는데, 이 그림에서는 영웅이라는 이미지, 서사적 사건이란 맥락이 없어진다

    •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1816

      모든 영웅적 표지가 제거되고 완전히 서열이 부서진 사회가 보여진다.

      생존자는 문명화된 사회의 서열과 위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제리코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메두사의 뗏목.

      사실은 이것을 보면 메두사의 이야기는 실제 당시에 있었던 한 얘기이다.

         

         

      근대에 나타나는 특징 - 신고전주의라면 플루타크 등 옛 고전에서 서사를 따오는데, 이렇듯 근대 이후에서야 당대 실제 있었던 사건을 그린다는 것이 과거와는 매우 다른 현상이다.

      이 배가 아프리카로 떠나는 배였다. 폭풍을 만나서 난파했다. 그때 구명보트가 있고, 구명보트는 사람들이 탔지만 뎃목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태웠는데, 구명보트와 뗏목을 연결하는 밧줄이 떨어져서 여튼 뎃목에 탄 사람이 150명이었는데 타고 있다가 12일 후에 행방을 찾지 못하다가 찾아보니 이미 남아있는 사람이 15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당시 신문에 굉장히 크게 보도되었고, 알게 된 사실은 - 배의 선장이 원래는 자격없는 사람인데 공무원한테 뇌물을 줘서 선장으로 다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리코는신문기자처럼 생존자 15명을 다 인터뷰를 하고 실제 흘러간 해안에 가서 보고 파도가 어떻게 친지, 그리고 그 생존자중 목수가 있엇기에 목수에게 뗏목의 모형을 만들어달라고 했고, 모든 것을 준비한 후에 그것을 굉장히 대형 작품으로 그린 것.

      이것이 중요한 이유 - 이러한 큰 역사화는 대개 주인공이 유명한 인물 중요한 장군 승리의 이미지 이런 것이었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죽음 시신 이런것들이 그랜드 스타일로 그려진 것이다.

      여튼 소문이 - 표류하다 할수없어 뭐 먼저 죽은 사람의 인육을 먹었단는 것도 있어서 이걸 그릴까도 하고, 구출되는 장면을 그릴까도하고

      여튼 심리적 긴장감이 극대화될 수 있는 장면을 그리기로 한 것. 그게 이 장면.

         

      그런데 옛날에도 이런 장면들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커다랗게 그려진 것이 처음이라는 게 중요한 것이다.

         

      마지막 단계에선 다들 팔다리가 삐죽삐죽 튀어나온 것이 심리적으로 지그재그가 많이 나와 긴장을 유발, 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처음의 과슈 스케치 - 이건 좀 아니다.^^;

      사람도 너무 많고, ㄱ

      그다음 오일스케치

      이것은 좀 심심해보인다.

         

      구조선이 보이는 스케치

         

      완성작에선 다들 팔다리가 삐죽삐죽 튀어나온 것이 심리적으로 지그재그가 많이 나와 긴장을 유발, 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희망이 거의 보이지 않고 등등..

      돛줄이나 사람의 배치, 팔다리 뻗은 것 - 대각선을 형성한다. 심리적 효과

         

         

      맨아래에 - 죽어가는 사람들 / 중간 - 아직 기운 있는 사람 / 맨위 - 손을 흔드는 사람

      그 정점에는 검은 피부의 흑인이 있다. 그 사람을 정점으로 두면서 훨씬 이국적인 낭만주의적 효과가 나타나고,

      이 움직임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노끈을 가운데에 대각선으로 자른다.

         

      사실은 이 그림을 보면, 그렇게 급박해보이지가 않는다. 그냥 따로 그린 것이 뻔하지.

      마지막에 그리스 철하자처ㅓㅁ 앉아서 생각하는 사람 보면 좀 그렇고, 12일을 굶은 사람 치곤..

      지금 쓰러져있는 사람도 굶어죽기 직전이기보단 신체건장하다. 고전주의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 그런지..

      근데 이 그림에 모델로 들라크루아가 섰다고 한다.

         

      들라크루아가 단테의 보트라는 그림을 그리는데 이것도 제리코의 영향이 엿보인다.

      난파선이라는 주제는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작품이 되다시피 많이 그려지게 된다.

      터너의 난파선 노예선 이런 것, 당시 굉장히 유행한 화목이다.

      여태까지 보면, 우선 색채가 굉장히 어둡고, 묘사적인 색채가 아니라 웅변적. 색채 자체가 형태보다 중시되고, 흥분되는 터치나 이런 삐죽한 터치랄지, 흥분과 혼란의 감정(낭만주의!)이다.

      로맨티시즘은 고전주의의 반대이가 . 혼란 극적인 그런 것. 절제와는 반대인 경외감 열정 이런 것들

      젊은 미술가 사이에 불을 지핀 작품이랄 수 있다. 인간의 고통과 절망. 어찌보면 과장된 느낌도 있지만, 추함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잇다고 생각했다는 것.

      명암효과 등이 바로크적으로 강한 대조 이런 것들 - 고전주의의 밀집되고 고른 광선과 다른 모습

    • 제리코 1816 잘려진 팔과 다리

      이런 것도 그렸다. 정신병원에 가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극적인 장면을 그리기 위해서..

      상상력이 많이 필요하고, 지적인 그림보다 우리를 더 감동시키는

      이런 것에서 들라크루아같은 사람이 나오게 된다.

       

       

       

    여기서부터 고야

       

       

       

       

    고야, 파라솔, 1878

    이사람은 아주 중요한 작가인데 어디다 끼워야 할지..

    19세기 어쩌면 가장 위대한 미술가 중 한 사람이다.

    처음에 시작은 로코코양식에서 시작했으나, 하지만 자신이 관찰한 것으로 항상 작업했기에 사실주의라고 할 수 있고, 엄청난 상상력으로 작업하여 낭만주의랄 수 있고, 어떤 것은 초현실주의 , 표현주의까지 넘나들던 엄청난 사람이다.

    다비드와 비슷한 시대 사람 다비드보다 2살 더 많다. 다비드가 초기에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듯 다비드도 계몽주의를 믿었는데, 고야도 계몽주의를 믿었다. 계몽주의 - 인간은 선하기 때문에 인간을 계몽하면 달라지고 발전한다는 사상. 그래서 여튼 이사람도 영향을 받는다.

    고야는 80대까지 살았고 막판엔 귀가먹는다 - 여러가지 설 - 납을 많이 사용한 물감을 써서 그랬다는 설도 있고,

    만년에는 자기집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광기스런 그림(블랙페인팅 - 분위기가 너무 어두워서 까매서가 아니라) 그려놓고 살았다.

    60년에 가까이 작업 700점의 유화, 굉장히 많은 판화를 그렸다. 살아있는 동안 왕이 3명이나 바뀌었다. 그러면서도 부귀영화가 없었지않앗다.

    왕의 궁정화가도 되었고, 고야가 살고 있던 시대의 스페인은 아주 어리석고 천하고 무지한 왕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고, 전쟁도 부패 무지와 그런것을 다 보면서 그런 것이 작품에 나타나는 것이 재미있다.

       

    파라솔 이 작품은 젊었을 때 로코코양식의 영향을 받은 초기의 작품인데,

    와토를 생각해보면, 로코코는 프랑스에서 시작했는데, 이것을 보면 프랑스 로코코와는 같지 않다. 색이 밝지가 않다. 프랑스 로코코는 색이 밝은데..

    포즈 주제 남녀의 사랑 이런것은 같지만, 조금 더 개방되어잇달까 약간 분위기가 다른 개성이 있달까. 와토는 따듯 섬세하고 작은 붓터치가 있는데 고야는 더 가라앉은 색을 사용했다.

       

    Goya, th women and the puppet 1791-92

    거의 비슷한 때에 그린

    야외에서 여자들이 놀이하는 장면, 근데 좀 섬찟하다. 커다란 남자를 갖고 이렇게 노는 걸 보니깐 무언가 분위기가 무섭다. 비틀어놓고.. 인간사이즈를.. 그런 섬찟함이 이런데서부터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Los Caprichos 80장중 46번째 the sleep of reason produces mosters 1797-98

    카프리쵸스 도무지 알수없는 것들

    미신 악 사회비판적 인간의 욕심 등..

    제목은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여기보면 앞에 책 붓 펜도 있는데, 공부를 한다. (이성)

    공부하다 자면 (이성이 없어지고) 온갖 비이성이 판을 친다.

    세상에 이성이 없어지면 모든 것을 판을 치는 그런 의미를 가진다.

       

    스라소니같이 생긴 동물 - 아거스 영원한 눈을 가진 동물

    악몽들(올빼미로 형상화) 사회비판 - 인간의 위선, 인간은 본래 위선적 존재.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지는 순간 온갖가지 악덕이 발생한다.

    이것은 꿈을 그린다. 잠이 든다 이런것은 기본적으로 낭만주의이다.

    인간은 합리적으로 사고해나갈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결국은 이 사람은 자기가 본 세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기는 이런데서 그림을 그렸고 화가로서 성공했지만 주변의 환경을 경멸하는(왕의 무지나 이런)

    다비드는 혁명을 긍정하고 확신에 차있엇지만, 고야는 시니컬하고 비꼬는 그런 것이 보인다.

    Goya, los caprichos "out hunting for teeth"

    교수형에 의해서 죽는 사람인데, 당시 믿은에 의하면 그렇게 죽은 사람의 이빨을 뽑으면 복이 온다고 여자들이 가서 이빨을 빼는 그런 모습이다. 이런 것은 아쿠아틴트라는 기법 판화기법(슈가 아쿠아틴트)그라데이션이 굉장히 잘 나타난다. 대부분의 고야 판화가 남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자ㅣ가 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잘 알려져있지 않았다. 특히 1850년 이후에야 외국에 알려지게 된다.

       

    Disasters of the war

    전쟁의 참화. 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판화집

    1808-1814동안 스페인은 나폴레옹 침범 지배기에 있는다. 그동안 굉장히 많은 사람이 죽는등 그랬는데, 이걸 보면 사람을 자르고 있네.

    전쟁화를 많이 보면 이런 류ㅢ 그림이 그려진 것은 고야가 처음이 아닌다. 살해 잔인함 강간 강탈 인간의 극단적인 행위등이 (사실주의도 이것보다 더할것이 없네!)나오고 있다.

    또 보면, 아주 섬세한 양식으로 다루고 있다.

    사람 교수형

       

    What a sacrifice los disperate라는 판화집안에 있음

    부모가 돈이 없어서 자기딸을 늙고 형편없는 사람에게 준다.

    얼굴들을 보면

    고야라는 영화를 보길 -

       

    Los disperates(가지가지의) unbridled folly *고삐풀린 어리석음)

    Goya,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초상화1800년인가 4년인가 그근처

    상당히 큰 작품. 당시 무능한 카를로스 4세

    누가 더 중심으로 보이는가? 왕비. 왕비는 교만하고 허영심에 들떴던 왕비.

    황태자는 옆에 있고. 화려하게 옷이 되어있고, 로코코는 섬세 화려한 터치가 중요한데 ,굉장히 우아 장식적 파스텔톤의 색채 이런건 로코코양식이 보여지고 있는데,

    여기서 재밌는 것은 사실 - 이 사람들은 실제로 이그림을 받고 기뻐했다. 멋잇게 그려져있다고.

    자세히 볼수록 상당히 풍자적인 느낌이 들고, 조롱당하는 느낌이 들고 있다.

    이상화된 초상과는 다른 것이, 굉장히 미묘하다.

    이사람들 자신은 화려 번짝번쩍하니까 대단해보이는데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면 얼굴이 상당히 별로다.

    어린애 얼굴을 봐도 얼굴이 그렇지 않다.

    1655 velasquez Las Meninas

    완전 어린애 얼굴인데 순수한.

    거기에 비하면 이그림은 좀 오멘에 나오는 그런애..

    애같지가 않네.

       

    벨라스케스는 나와 이사람들은 같이 있으며 그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같은 무리로 그렸다.

    사실 그림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작품 가족 포상화에는, 고야가 커다란 캔버스와 고야가 저 뒤에 어둡게 보인다. 완전히 벨라스케스를 의식하고 그렸는데, 벨라스케스와 달리 고야는 평민의 옷을 입고 이들과 다르게 그늘 속에 있다. 나는 이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강조치 않고 숨어서 있다. 시니컬한 느낌을 주고 있다. 미묘하다.

    오늘은 여기까지.

       

   

   

3-1강 신고전주의 건축

2010년 4월 6일 화요일

오후 3:23

   

건축에서의 신고전주의를 얘기해보자(뒤에 하면 안되는데)

   

JAQUES G. SOUFFLOT PANTHEON 1755-92

자크 수플로

팡테온 - 이것은 본래 성 쥬누비에르 교회로 지어졌는데, 로코코에 반발해서 신고전주의로 지은 것

고대의 페디먼트 코린트 주두, 돔형태.

위의 것은 그리스적.

돔은 르네상스적. - ~~의 영향을 받아서

팡테옹 - 다신교 신전. PAN다 THEO신

로마에서 시작이 되서 판테온 7명의 신을 모시는 신전.

프랑스에선 이를 주요 문필가 음악가들의 묘로 마련했는데, 최초에는 교회로 지어졌다.

   

처음에 드로잉, 옆에서 본 사진

교회를 두가지 형태로 이야기하는데, 정십자형태는 라틴크로스 형태라고 해서, 이것이

명동성당은 정십자가 아닌 들어가는 길이 굉장히 긴 바실리카형태이다.

처음에는 라틴크로스로 설계되었다가 나중엔 바실리카형으로 길고, 돔도 높아졌으며,

여튼 장식이 적고 고전주의로 돌아가려는 그런것.

처음에는 창이 있었다가, 혁명때 공격이나 이런문제로 벽으로 다 막아버렸다.

   

영국rICHARD Boyle and William Kent Chiswick house 1725

여길 보면 페디먼트 코린트 주식이 보이고,

돔 형태 이런것은 고전에는 보여지지 않고

뭐, 조금더 상상력을 보여주는 (지나치게 과거를 반영한다기보다)작품이다.

Andrea palladio, villa rotunda 1591

이것을 보면 많이 흉내내는 것 같지만, 사진을 보면, 약간의 변형이 나타나고 있다.

고전을 보면 아주 엄격한 조격을 보여주고 있으나, 이런 것을 보면 풀어지면서,

   

시노아즐리 - cinoazu?? 여튼 중국풍이 유행한다.

중국스러운 것을(자기들의 시각이 반영된) 상상해서 유행.

중국식 망루 정자를 만들고 이런 것이 유행한다.

주변정원을 중국식으로 한달지 그런것이 이런 시대에 섞여서 나오게 된다.

   

우리가 고등학교대 배우기로는 신고전주의하면 딱떨어지게 배우는데, 그런것은 잘 없다. 기본적으로 신고전주의이지만 그런 요소가 섞여서 나타난다.

   

고전이라는 것은 항상 대칭이나 질서, 화음을 중시하는데, 이와 비슷한 현상이

   

Thomas Jefferson, 주청사, Richmond, Virginia, 1785-89

미국의 3대 대통령, 건축가이기도 했다. 내셔널몰에 있는 제퍼슨 기념관도 고전적으로 되어있는 것이 이사람이 신고전주의 건축가이기 때문. 이사람은 프랑스 대사로 가있어서 로마신전을 많이 봤고, 고전이야말로 순수함을 상징하고, 로마공화정을 가장 이상적 정치형태로 보았다. 고대에서 삶의 덕목 원리를 찾으려 했기 때문에, 주청사 이 건물을 보면 신고전주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것 땜누에 워싱터늬 초기건물들이 대체적으로 로마시대 건축을 많이 따온것이 그때문이다.

   

처음엔 독립은 했지만 자신드르이 과거가 유럽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것을 공부하려는 열망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뿐 아니라 대부분의 미국의 주청사를 보면 대부분 이렇게 고전적으로 되어있다.

   

미국 대학교 가보면 대부분 콜로니아스타일 - 미국의 장로교에서 지은 학교인데, (미국 대학건물과 많이 유사하다) - 문화란 것이 이렇게ㅈ렇게 왔다갔다 하는 걸 볼 수 있어 재미있다.

   

   

4강 고야

2010년 3월 15일 월요일

오후 2:11

   

<<4강.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3월 15일 월요일 오후 2:11

고야, 옷을 벗은 마하 - 1800

마하는

비너스라고 이름을 붙여야 음란죄에서 벗어난다. 고야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종교재판에

앵그르는 옆에 천사를 그린다든지.

굉장히 감각적이고, 옛날 르네상스와 같이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굉장히 선정적이다.

고야 못을 입은 마하 1807-1808

이것은 전과 달리 양식이 매우 다르다.

전통적인 누드 - 명암을 섬세하게 그려서 둥그런 입체의 표현을 만들고, TACTILE하게 만드는 것

이 다음것을 보면 좀 표면이 다르다.

훨씬 붓터치가 느껴진다. 붓이 지나간 흔적이 훨씬 나타난다. 스케치적.

프랑스에 과거에 이 그림이 있다면 완성작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

투명한 입체감 이런 것이 나서,

선생님이 보기에 - 이 두 그림을 그린 이유는

일종의 양식의 실험이다.

이것이 후기고야다. 이쯤에 보면 시각적, IMPRESSIONISTS OPTIC옵틱하게 그리는 것 인상주의자들과 같이 - 딱 보이는 그정도만 그렸다는 것. 다시 말해, 이것을 어떻게 보는냐, 눈이 그것을 어떻게 혼합시키는가. 이것이 본격적으로 혼합되는 것은 인상파.

정밀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2-3미터 앞에서 볼때처럼 그냥 시각적으로 그린다.

이 세상에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레오나르도가 한 말이고, 고야도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저 이전 누드에는 선이 존재한다.

선은 우리가 만들어놓은 것이지. 다시 보면, 침대는 스케치적으로 그렸어도 몸은 드로잉.

개인적인 실험

   

화가가 같은것을 이렇게 바꾸어서 그리는 것을 보면 실험이라고 보아야지.

정밀한 관찰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대로만

   

프라도 미술관에 나란히 전시되어있다.

고야 - 알바 공작부인

처음에는 이 여자를 그린 것으로 알려졌었는데, (고양의 후원자)

공작이 죽자 미망인이 되어 (보통 사이가 아니게 된 것으로)알려져있다.

이 그림의 색채는 프랑스와 달리 고야스런 색이다.

이 사람이 그림 반지를 끼고 있는데, 고야와 공작 부인의 이름이 새겨진 반지를 끼고 있다.

맨 아래에는

ONLY GOYA라고 적혀있다. 마흔 몇살에 죽어서,

고야 WITCHE'S SABBETH 1799 무지와 미신에 대한 풍자 그림 -

종교재판같은 것(당시 계몽사상이 배격하고 있는)에 대해

늙고 나이든 여자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은 당나귀 비슷한 동물 - 사탄

마녀는 악마를 숭배하는데, 마녀는 대개 늙고 추하고 정상이 아닌 (신체 불구)라서 마녀는 아이들의 피를 발아먹어야 젊음을 회복한다는 미신이 있다. 이 사람들이 하는 일은, 사탄에게 아이를 바치는 일을 한다. 동물의 형태를 한 사탄 주변에 모여서 의식을 치루고 있는데, 한 마녀가 데리고 있는 애는 ㅣ골이 상접한 어린애.

고야 - 콜로서스 1808-12

현실과 포초현실, 환상과 사실을 넘나드는 그림.

이런 것을 보면, 다비드의 고ㅓㄴ주의에서 보여주는 이상주의 영웅과는 다른 그런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산이 있고 인간들이 홈비백산해서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는 모습

거인은 이쪽을 향해 위협하지 않고, 맞서고 있는 사람은 아마 저쪽 어딘가.

거인은 환상처럼 나타나있다. 실제의 탄탄한 물리적 형태라기 보다는..

이런 그림들이 실제로 고야의 면모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고야 5월 3일의 학살 - 1814.

상당히 큰 그림, 대작.

역시 실제 일은 1808년에 있었던 일을 프랑스군이 후퇴한 후 그림을 그린다.

프랑스군이 마드리드를 들어와서 마드리드 시민사이에는 여러 소문이 났다.

프랑스에서 스페인황태자를 인질로 데려갔다는 소문

스페인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는데, 당시 기록에 의하면 5월 2일 저녁부터 새벽까지 계속 사람들을 죽이는 총소리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무고한 시민도 많이 죽엇다고.. 어던 재봉사는 재봉가위를 들고 잇었다는 명목으로 죽임당한다든지..

호라티우스의 맹세와 같은거오 ㅏ같기도 다르기도.

저 사람들은 하나의 집단, 또한 공포의 무리, 인간적이지 않고 기계와 같은 가해자 집단, 일률적이고 똑같은 자세.

그에 비해 인간적이고 다양한 자세와 감정을 보여주는 피해자 집단.

얖에 있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등.

고야가 이 그림을 그릴 때는 옷을 입은 마하에서 사용되던 스케치가 훨씬 거칠어졌다.

로코코의 섬세한 붓터치는 보여지지 않고 색채대비가 강하고 터치가 거칠어지는.

FOCAL POINT는 저 손든 사람.

못박힌자국이 손에 조금 있다더라. 십자가에 옷박힌 그리스도를 연상시키는 자세, 용감히 죽는 사람.

흰색 터치를 보면, 초기 정교하게 그리던 그림이 아니라, 몇가의 터치로 처리하는 - 양식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이 왜 유명하냐 - 이것은 전쟁에 대해 직설적으로 비판적인 작품.

그리고 ㅇ것은 이것을 어떤 특정한 사건으로 만들지 않았다.

스페인과 불ㄹ란서의 싸움으로 암시하는 것이 엇다.

프랑스 군인이라는 특징이 군인에겐 없다.

특정한 나라의 사건이 아니라 인간 본연에서 폭력과 희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단 것이지.

   

그림 자체의 구성도 기막히지만, 이 외에도 이 작품을 보아서 잊어버리기 어려운 이유는 이것은 끝난 이야기가 아니고,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이며 아직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보편적 공감을 얻고 있다. 사회비판적 작품중에 가장 뛰어난 작품.

그로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SATURN DEVOURING HIS SON 1820-23

고야는 오래오래 살았다. 1820년대에 자기집에 이런 음산한 그림을 그려서 걸었다.

블랙 페인팅들.

이 그림은 식당 벽에 있었다고 함.

파괴적인 것에 대한 집착, 정신적 학대 마술 이런것..

무시무시한 상사알 수 없는 공포 이런 것을 붙였다.

마지막에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거의 잃어버린 것 같다.

5월3일의 학살을 보면 어두운 밤하늘에 성당이 있긴 있다 - 마지막 희망같은 것

   

  • 종료

    들라크루아 -

    DELACOOIX TO PRE RAPHAELCROIX

    DELACROIX BARQUE OF DANTE 1822

    1820년대 나폴레옹이 몰락

    아직까지도 귀족에 의해 사회가 지배되지만, 중산층 지식인 부르주아중에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정부를 원하는 - 그래서 국가의 힘이 점점 강하게 된다. 여태까지 당연하게 생각했던 권위보다는 개인의 푷ㄴ을 중시하게 되는 경향이 오게 된다. 관습을 맞추기를 거부하고 합리주의를 거부. 감각 직관을 중시하고 냉정한 판단보다 열정을 중시하는 사조.

    신고전주의도 낭만적인 것에 들어가지만

    자연과 교감을 중시하면서 풍경화의 부흥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기도 함.

    이 때 외젠 들라크루아 - 고독함을 즐기면서 굉장히 지적이었는데, 감성, 상상력 풍부 eee        

    제리코의 뗏못 - 제리코는 보헤미안적인 사람이었다. 들라크루아는 제리코보다 전인적인 사람 교육을 잘 받았고, 부잣집 사생이였던가, 정치 사회 문화 인사들과 사교적인 교류를 많이 가지고 있었고, 도한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던, 쇼팽 이런 사람과도 친했다.

    자신은 낭만주의라 부르는 것을 싫어했고, 빅토르 위고나 그런 낭만주의자와 같이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 이론적이고 지식이 많은 균형을 갖추었던 사람.

    여기 보는 단테의 보트는 풍랑과 보트 등 낭만주의의 기본주제, 단테의 보트 장면은 원래 (다비드는 플루타크 영웅전에서 나오지만) 단테는 중세에서 가져온다. 고전주의와는 다르다.

    단테, 베르길리우스가 신곡에 보면 둘이서 지옥을 탐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옥편 - 지옥은 동심원 9개로 되어있는데, 죄를 제일 많이 지은 사람이 가장 중심 점점점- -- - 지금 이 장면은 5번째 동심원 안이다. 빠져죽는데 완전하게 죽지 않는 벌을 받는다.

    음산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 그림을 보았을 때 건장한 체격 뒤틀리고 움직이는 누드는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을 보면 알 수 있다.

    저 빠져죽는 사람 신체를 보면 저주받은 영혼보다는 좀 고전적 영웅신체같다.

    고전적 삼각구도인데 끄트머리가 잘려있다.

    고전적인데 바로크적인, 뒤틀리거나 뭐 …

    젊은 들라크루아가 여러 대가들의 것을 흡수하려는 것을 알 수 있다.

    색채의 대비 이것이 루벤스적인 것이다.

    옛날에 다비드 그림에서 볼 수 없는 시각적인 .

    제리코는 원래부터 들라크루아의 재질을 인정했고, 여러가지를 소위 색깔있는 표현, 가슴에 호소할 수 있는 이미지 자체를 호소할 수 있는 지적인 내용보다.

    첫번째 데뷔작(살롱) 사람들에ㅔ 주목받게 되었다.

    확대 사진

    물방울 - 세개의 붓터치로 되어있는데, 이것을 색채터치로 표현.

    1824 키오스 섬의 학살 1824

    1824 살롱전에 출품한 들라크루아 작품

    그리스 독립전쟁을 주제로 그리려고 했는데, 키오스섬은 그리스 섬이긴 하지만, 그때 그리스는 터키 지배를 받고 있어서 독립운동, 그리고 엄청난 탄압을 받는 것이 신문에 보도되고 있다. 900명 이상이 죽고 잡혔다.

    실제 당대 주제를 했고, 이 이야기는 파리의 지식인들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리스는 인류문명의 기초고, 민주정치의 발상지인데, 야만인에 의해 핍박받는다는 것이 센세이션을 일으킴.

    여러 준비단계를 거쳐 신고전주의적인 방식으로 그렸다. 마지막에는 이것이 중간이후에 바뀌는 것이 - 사람은 전경에 몰려있고, 황량하게 텅 비게 되는(낭만주의적)배치.

    키오스 섬의 풍경이 파노라마로 그려져있고, 앞에는 핍박받는 사람과, 끌려가는 아름다운 여인 등..

       

    건초마차 1824 컨스터블

    1824년 살롱에는 외국 작품도 있었는데, 그 때 입선된 작품이 잇었는데

    들라크루아의 눈을 끈 작품이 영국의 콘스터블이 그린 건초마차.

    영국은 아카데미의 전통이 강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테크닉하게 자유로울 수 있다.

    전통적으로 나무가 있다면 초록색이니깐 초록색을 써서 어두운색을 섞어 그리거나

    근데 이사람은 초록을 그린 위에 붓터치를 더한다.

    과학. 색채의 법칙, 보색의 대비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콘스터블은 자연의 생생함을 더하기 위해 초록 옆에 붉은색을 쓰기도 하고, 흰색을 강조하기 위해 두껍게 바르고, 표면효과와 색채효과를 주었다.

    콘스터블 개인이 그런 기법을 발견햇는데, 들라크루아가 그 기법을 보고 다시 와서, 이미 완성된 그림에다 재터치를 햇다. 빨상색이 여기저기 칠해져있다.

    어떤 평론가는 이 그림을 보고 키오스섬의학살이 아니라 회화의 학살이라고 했다.

    표면을 강조하기 위해 눈두덩에 빨간색을 바르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 신고전주의 시대에는 이런것이 거으 ㅣ형명적인 방법이었다.

    초기단계에는 보색만 가지고 했었는데, 나중에는 이런 대비를 많이 사용하여 색채화가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DELACROIX 1827 THE DEATH OF SARDANAPOLUS

    고대 근동 앗시리아의 왕.

    잘 모르는 이역 야만인의 이야기,

    성벽이 무너지고 적이 쳐들어와서 사람들이 죽기 직전

    이 사람은 자기 여인들을 자기 병사들에게 죽이도록 한다.

    아름다운 여성의 죽음, 아비규환 이런 것을 보여준다. 완전히 깊은 공간이 강한 대각선을 이루는데, 바로크 시대에 많이 나타나는 장면인데, 사람들로 가득채워져있고,

    드라마틱하고, 또 어찌보면 너무 명료한 것이 없는 것이다.

       

    바이런이 쓴 똑같은 극본이 있다. 거기서는 사르다나팔로스가 혼자 죽는데 여기서는 극적인 효과를 더하기 위해 같이 죽는것으로.

    전경에 있는 죽는 여자를 보면 앵그르같으면 그것을 명암으로 했을 것이다. 그런데 들라크루아, 루벤스는 명암의 대조를 보색의 대조로 표현한다. 검은색의 사용을 줄임으로서 색감이 두드러진다.

       

    오늘은 여기까지.

       

       

       

       

   

   

5강 낭만주의(들라크루아), 영국 풍경화(콘스터블까지)

2010년 3월 17일 수요일

오후 2:03

   

<<오디오 녹음.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3월 17일 수요일 오후 2:03

들라크루아, 바리케이드를 넘어가는 자유, 1830

실제 당대 있었던 사건1830 - 이 것을 전후로 왕정복고/

대혁명 이후에 혁명들이 일어난다. 이대 루이필립이 1830년이후에 왕이 된다.

뒤에 노트르담이 불타는 모습이 보인다.

이것은 그당시 사실적인 묘사라기보다 하나의 혁명 자체를 상징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들라크루아는 자기를 낭만주의자라 불리는 걸 싫어했듯이,

혁명 자체는 상당히 낭만주의적이지만,(쇼팽의 혁명가 에튀드)

그럼에도 불고하고 이 삼각형의 구성이나 여성의 탄탄한 몸 등은 고정적인 것들이 남아있다.

맨아래에 죽어서 넘어진 사람들이 있고, 밑에서

그로가 그린 일라우의 전투 - 아래서 올려다보거나 매달리는 사람,

이 사람이 저 여신을 쳐다보게 하는 시점 집중 - 모든 것의 정점이 삼각형의 끝에.

옆을 보면 자본가(혹은 지식인)와 노동자 두사람이 보인다.

소년 - 실제 당시 혁명기에 어린 소년이 같이 있었다는 소문이 기사에 나고 했다더라..

연기, 광선 등은 열광, 흥분, 바로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움직임이 굉장히 강하다.

재미있는 것은 저 여자인물.

사모트라케의 니케(헬레니즘) 나 라파엘의 갈라테아에서 보여지듯 둥근 몸의 형태, 볼륨등이 그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그림이 굉장히 감정적 흥분을 가져오는 그림이었다. 그림 자체는 살롱에서 환영받지 못했으나, 왕이 이 그림을 샀다.

신고전주의에서 영웅의 주제가 마라 소크라테스 등으로 남성으로 다루어지다가, 여기서는 여성으로 나타난다. 상당히 기품있는 여성으로 묘사.

마리안느 - 프랑스를 상징할때엔 여성으로 나타난다.

[들라크루아 모로코 주제 그림]

그 후에 들라크루아는 모로코를 1831년에 가게 된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 앵그르의 경우는 말로만 듣던 오리엔트(동방)를 오달리스크 등으로 묘사했는데, 들라크루아는 모로코를 직접 방문했던 사람이다. 외교사절로. 남들은 가지 못했던 술탄의 집에도 가게 되고, 그것을 자기 노트에 열심히 적었다. 이 사람의 일기가 상당히 두겁게 나온 것이 있는데, 노트에도 지형적 특징이나 복장 등, 프랑스사람들은 기후탓에 원색을 잘 입지 않는데 - 여름에 바캉스를 간다. 모로코 여행은 들라크루아에게 강렬한 햇빛과 색채에 대해 인상을 주었다. 아랍 지역에 가면 사용하는 색채가 매우 다르다. 모로코여행은 이사람에게 색채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받게 했고, 또한 동물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해서, 말이나 사자 사냥 등을 스케치했다. 현란한 빠른 터치가 나오고, 감정적인 표현을 발달시키게 된다. 또한 당시 많은 유럽사람처럼 동방의 사람을 야만인으로 보았다. 동물사냥 주제.

[다른 그림]

다비드와 앵그르와는 다른

키오스섬의 학살에서 보이던 부분적인 색채가 아주 그림 전체로 확산되게 된다.

이후에 이 사람이 스페인 여행을 가게 되는데, 티치아노의 작품이 당시 스페인에 많이 소장된다. 티치아노는 색채를 많이 사용한 화가이기 때문에 이를 보고 색채에 영향받았을듯.

또한 들라크루아는 색채를 이론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아니지만 직감적으로.

사자 사냥 1861

모로코에서 그린 스케치를 가지고 와서 그린 그림.

루벤스나 바로크 그림을 보면 그림 전체가 하나의 움직임을 이루는데, 이 그림을 보면 네 그룹으로 움직임이 나뉘고, 한 그룹 안에서도 움직임이 서로 지그재그로 상충.

각각 분리되어잇을 뿐 아니라 그 분리된 그룹 안에서 자세, 시선을 이리저리 틀고 있다 - ㅈ화로운 구성이라기보다는 눈이 자극되는 구성이다. 여러가지 구불거리는 선의 복잡함 때문에 눈이 여러군데에 정신없이..

인물들은 모두 아랍인 원주민의 모습 - 이국적

[작품을 위한 스케치]

스케치에도 터치가 난무

어떤 평론가는 술취한 빗자루라고 평함.

낭만주의 - 남들과 다르게, 독자적인 것을 추구함. 낭만주의는 양식이 아니라 일종의 라이프스타일.

영국이나 독일의 낭만주의를 보면 양식이 다 다르다.

신고전주의는 양식에서 고전적인 것을 따라가지만, 낭만주의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것, 규범을 거부하고 등등…

1838 메데아

연극적인 요소를 많이 느낄 수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 나오는 여인.

남편 제이슨에게 버림받고 복수심에 불타 두 사람의 사이에 난 아이들을 다 죽여버리는 여성.

여기서 보여지는 감정 - 복수 사랑 미움이 섞여지는

마녀로 변해서 악인이 된다는 이야기. 일종의 팜므파탈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요녀- 아름답지만 남자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

시커먼 동굴 속에, 공포에 질린 어린아이들, 번쩍이는 단도, 어둠에 얼굴의 반 이상이 가려져있음에도 눈빛이 느껴지고,

이런데도 불구하고 볼륨형태등이 아직까지 고전주의적 누드의 형태가 남아있다.

빅토르 위고의 문학작품에서 나오는 우울하고 이국적이면서 극적인 요소와 비슷한, 굉장히 칼라풀한, 색채가 있는 표현, 규칙규범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 하지만 들라크루아는 훨씬 고전적 형식을 맞추려고 함(위고는 훨신 투쟁적).

들라크루아 누드 / 앵그르 누드(대오달리스크)

같은 시대에 살았던 두 사람의 누드가 이렇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선이 거의 없이 색채 터치가 강해지고

양식 - 문헌이 없는 상황에서는 양식이 근거가 된다. 양식은 눈으로. 자꾸 작품을 보는 수밖에 없다.

붓터치를 쓰는 방법이나 손의 각도의 버릇 등..

19세기는 미술관이 세워지면서 진품을 감정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판화작품 - 두 사람의 캐리커쳐

   

프랑스 이제 끝

SATAN WATCHING ADAM AND EVE

색채로 감정을 과장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면,

영구에서는 낭만주의는 여러 사람에 의해 실천. 윌리엄 블레이크 - 매우 독특한 사람.

시인이자 화가, 천전난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특이한 경험을 많이 한다.

꿈과 환영을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능력이 있었던 사람.

이 사람이가장 존경한 사람은 미켈란젤로.

낭만주의자였지만 그래서 인체는 신고전주의같이 선, 근육, 인체.

이 사람은 유화를 거의 하지 않았고, 대개 드로잉이나 판화+수채화, 혼합재료를 많이 썼다.

아래 아담이 있고, 위에는 사탄. 이런 것들이 꿈인지 환영인지 그러나 실제처럼 썼고, 성경이야기, 셰익스피어, 밀턴으 ㅣ실락원 등을 일러스트로 그리기도 하고, 그림과 시를 곁들여 놓기도.

르네상스보다는 중세에 대한 애정을 많이 가졋고, 계몽주의에 대해 신념, 실제 미국으 ㅣ혁명을 지지.

   

연인들의 회오리 바람, 1824-27

드로잉이 굉장히 중요하고, 색채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다. 루벤스 티치아노 베로네제같은 색채화가들을 싫어하고 비난했다. 색채를 안쓰진 않고 상징적 의미가 있을때만 사용.

유화의 두터은 질감을 실험하기도 했다.

이 작품을 보면 인체 드로잉이 마구 섞여 흐르는 환상적인 것.

"유럽 찬화의 예언" 중 속표지

주카로 바울의 개종과 동일.

자신은 층계에서 이 환영을 보았다고 주장.

콤파스라는 것은 예로부터(중세로)신을 콤파스를 가진 것으로 믿는다. 콤파스는 설계자로서 하느님을 나타내는 이미지. 이성, 여기에 봄ㄴ 신이 완전히 둥그런 빛에 둘러싸여있고,

축도법 (FORESHORTENING)원근법으로 그렸고, 결국 콤파스는 이성을 나타내는데, 이성이란 모든 영감을 누르기 때문에 내면이 중요하지 이성이 중요한 것은 아니란 이야기를 한 것이다. 신고전주의를 완전히 배척하진 않지만 내면의 눈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THE GREAT RED DRAGON AND THE WOMAN CLOTHED IN SUN 1806-09

성경의 묵시록편에 같이 들어간 일러스트레이션. 혼성동물들이 블레이크 작품에 많이 등장.

중세 페르시아 이집트 인도 이런 작품들에서 많이 영향받음 괴물 이런것.

상상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

   

아이작 뉴턴 1795

뉴턴이 르네상스 미켈란젤로적인 누드로 나와서 콤파스로 뭔가 하는중.

   

1795 네부카드네자르(네부카네잘, 나부코)

아까가 이성이라면 이것은 비이성, 본능, 동물성을 상징.

이슈타르의 문도 이 왕때 완성

무시무시한 공포와 동물적인 모습 - 뉴턴과 같은 이성도 충분하지 않지만, 이런 류의 동물성 감각도 아니다.?

이런것이 블레이크의 중요한 특징

   

다른사람

심리학책에 많이 등장하는

FUSELI 악몽 1785-90

스위스 태생의 사람, 나중에 신부가 된다. 영국사람.

강한 개성, 그림양식만 보면 앵그르같은 완전한 고전주의양식을 보여주는데 , 내용에서는 악령의 세게ㅡ 꿈의 세계를 보여준다.

낭만주의적 주제.

   

그다음

영국의 낭만주의 하면 두 명의 풍경화. 한명은 존 콘스터블, 또하나는 윌리암 터너.

프랑스는 워낙 아카데미즘이 강하게 자리잡아 풍경화가는 아직도 말석에 있다. 프랑스에선. 역사화나 신화화가 제일순위.

영국은 아카데미가 있었지만 그렇게 뿌리가 깊지 않아서 풍경화가 오히려 발전,

당시 영국이 제일 잘살고(18세기 후반이후 산업혁명) 산업혁명으로 여행을 많이 가게 된다. 관광붐

돈많은 사람들은 이탈리아를 가장 많이 가고, 돈이 적으면 스코틀랜드나 그런걸 많이 간다.

GRAND TOUR라고 함. 여행 책자도 많이 나온다. 풍경화로.

당시엔 신사들이 갖추어야 할 교양 중 하나가 수채화.

투명수채 WATER COLOUR

프랑스는 스케치가 과슈(포스터칼라) 불투명.

영국은 투명수채가 발달해서, 아마추어 화가들의 소사이어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처칠경, 찰스 황태자 등도잘 그린다. 전통이 있다. 풍경화가 자리잡기에 토대가 잡혀있엇다.

지형 숲 기후에 많이 영향받을 것이다.

독일은 그림형제 이야기 등에도 우서진 숲과 산 등으로…

영국은 섬나라 비가 많이 오고 완만한 산, 언덕, 습하고..

파랑의 색이 검푸른 것이 많아서, 영국의 풍경은 야생적이라기보다는 은밀, 길들여지고 따뜻 편안함.

영국적인 풍경을 그렷던 사람이 콘스터블이다.

이 사람은 SUFFOLK에서 자랐고, 항상 그 주변을 그렸다.

실제 살아있는 풍경의 느낌을 갖오려 했던 사람은 클로드 로랭. 프랑스인, Claude Lorrain

로랭이 19세기 화가들에 미친 영향이 크고, 로랭의 영향을 콘스터블도 많이 받는다.

굉장히 성실히 작업하는 사람이라 하고, 변화무쌍한 날씨를 잘 묘사한다. 구름의 형태가 변화가 많다.

그림에 몇월 몇시 언제 라고 썼다.

이 사람에게 있어 자연의 사생은 과학, 자연의 진실. 이라고 했다. 상상력은 콘스터블에게 필요없다. 자연이 상상력을 능가한다.

터너는 자연을 하나의 신비주의로 보았지만, 이사람은 더 진실한 자연에 관심을 가졋다. 터너와는 반대되는 성격의 사람이었고, 모험을 하진 않았고 시골에서 풍경과 가축 등을 그렸다.

DEDHAM VALE 1802

자기 주변의 풍경을 계속 그렸고, 사실 풍경을 보면 비슷비슷하기도 하다.

바람이 ㅂ불 때 어떻게 반짝거리고, 이슬이 어떻게 맺히고 등..

콘스터블에게 풍경 - 자연이란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으로는 변화없이 웅장한 것이 바로 콘스터블의 풍경화. 그 나름대로 굉장히 견고하다. 자연의 풍요로움에 대한 낭만적인 반응.

클로드 로랭 17세기 CEPHALUS AND PROCRIS

고전주의자이기 때문에 2/5, 대체적으로 하늘이 3/5를 차지하고 전경이 저렇게 흐르는,

고전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그런것인데,

그 영향을 받았더라도 콘스터블은 자기자신의 느낌이 더 강하다.

CONSTABLE / WEYMOUTH BAY 1817

계속 얘기하지만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차이는 공간이다.

호라티우스의 맹서를 보면 아무리 서있어도 뒤가 막혀있다.

그런데 낭만주의는 무한히 확장되는 공간을 보여준다.

원경의 언덕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름이 더 뒤로 넘어가고 있어서 뒤가 연상된다.

고전적 풍경이 세잔. 딱 막아버린다. 그것은 고전주의적.

   

건초마차 1824

인상파와는 달리 집에 가져와서 완성을 시키는, 느리게 작업하는 방식.

이것도 3-4년에 걸쳐서 완성했다.

이것을 보면 하늘이 로랭과 같이 3/5가 하늘이고,..

여튼

시커먼 구름이 왔다 지나가는 중이고, 파란 하늘이 나오면서 개는 모습,

농가가 있고, 건초마차가 지나가고, 개가 있고 새가 날아가고.

단순하지만 진실되고 순수하고 평범하다. 자연 인간 동물이하나의 화음을 이루고 있고, 전체적으로 이슬이 맻힌 것 같은 분위기가 통일감을 주고 있다.

톡톡톡 붉은색이 튀어나와보이고, 흰색이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두텁게 바른다. 이런것은 프랑스에서는 굉장히 화면에 텍스쳐를 있게 하는 것이다.

1825년 LEAPING HORSE 보면 텍스쳐가 더 거칠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짝이는 햇볕이 강해서, 뭐

1827 Brighton 물살 -

물감을 기름과 섞는데, 여기서는 물감을 그냥 짜서 바른다.

사실묘사가 아니라 텍스쳐를 주어서, 물살에 반짝이는 햇볕을 보여주는것처럼 보인다.

완전히 자신이 창안한 방법. 자연의 신선한 것을 본대로 그리기 위한 테크닉.

이것이 프랑스같은 경우는 규범이 강해서 그리기 어렵다. 영구에서는 이런것에 자유로웠고, 터너는 이런것이 매우 강해진다.

인상파들이 가장 좋아했던 주제가 물.

유동적이고 빛에 가장 잘 반응하고 반짝반짝.

   

다음시간은 터너

   

   

   

6강 윌리엄 터너

2010년 3월 22일 월요일

오후 1:59

   

<<오디오 녹음.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3월 22일 월요일 오후 1:59

   

   

   

   

   

Turner, Decline of Cathagian Empire 1817

지난시간은 터너 전까지(콘스터블) 했음.

터너는 콘스터블과는 상당히 다른 풍경화가.

이 사람의 주제는 거의 자연의 기본적인 요소(대기 물 불 같은 것이)였다.

콘스터블처럼 스케치하거나 그런걸 거의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아직도 이 사람들이 아카데미나 역사화 전통이 뿌리깊은 나라는 아니었지만, 주제에 대한 의식이 아직 있어서, 카르타고 제국의 쇠락의 주제로 그렸다. 슬라이드를 보면 주제가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이 풍경. 해가 더오르면서 강렬한 빛. 이런것이 이 그림에선 더 중요하다. 콘스터블이 테크닉을 개발했다고하는데, 프랑스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것을 이 사람은 개발. 임파스토impasto두껍게 물감을 바르는 것. 그냥 오일을 섞지 않은. 가령 나이프로 펴지 않고 툭 바르는 것. 여길 보면 두껍게 발라진 터치를 보면 - 거칠은 질감 자체를 느끼게 한다.

이런 그림은 클로드 로랭의 영향이 분명하다. 양족에 고전적인 건물, 성우르술라가 있는 항구(1641)

사실 이걸 보면 바다의 해가 뜨고 지는 풍경이 인상적인 부분이고 그작품에서, 그리고 터너도 여기서 영향을 받는다.

19세기는 풍경화의 전성시대다. 그 최전성기가 인상파다.

영웅이나 이야기의 단지 배경에 불과했던 풍경이 이제 (당시엔 바라보는 감상의 대상이 아니다. 옛날 사람에게 산은 관찰한다 이런것은 근대이후에 등장한 것) 프랑스보다는 영국에서 풍경화가 쉽게 받아들여지면서 인상파로 이어지는 단계.

클로드로랭같은 사람이 그것에 일조했다.

   

터너 burning of Parliament,1835

실제 있었던 일.

불타는 것을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구경중. 런던시민들.

이미 근대적인 근대가 왔음을 나타내는 특징중 하나.

거대한 다리, 가스등불

산업혁명 최초가 영국이라 산업혁명의 혜택이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 보는 사람들은 중요치도 않고 어렴풋이 보이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이 타오르는 저기.

어느때보다 색채가 강렬하게 빛나고 있고, 시각적 충실성(불이 타는 장면)의 묘사가 아니라, 거의 우주적 차원에서의 용광로처럼 불과 대지 공기와 물이 엄청난 모습을 보이면서 순수한 에너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완전히 사람들을 압도하는 것 때문에 인간이 만드는 구조물은 거의 희미하게 보일 수밖에. 녹아버린 듯. 그렇게 보인다.

그래서 결국 이것은, 자연의 힘에 대한 인간의 낭만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늘이 용광로와 같이 보이는데, 완전히 노랑과 흰색이 눈부시게 빛나며 우리의 현실을 녹여내리는듯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는 태초의 혼란을 상상하게 만드는 그 에너지에 압도되게 만든다. 이것이 낭만주의가 원하는 격정적이고, 숭엄미 sublime beauty 그런것이 낭만주의에서 찾던 감정이다. 인간의 이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야말로 압도되는..

여기서도 보면 매우 자유스럽고 독자적인 테크닉 - 어떤건 임파스토도 있고, 어떤건 손으로 하는것도 있다. 테크닉으로는 자유스럽게 자신이 원하는 표현에 있어선 그렇게 표현되는 것. 그것을 표현한 것은 순수한 색채로. 더 이상은 묘사적이라기보다 표현적 추상적 의미를 가진 색채..

가운데 세부를 보면 텍스쳐 질감이 도드라지게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저 색만 보면 거의 추상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색과 그것자체로만 보면. 이것이 터너의 중요한 특징이다.

저 원초적인 힘에 비하면 인간과 인간의 구조물은 전혀 아무것도 아닌것을 알 수 있다.

1839 slave ship turner

원래 터너는 이런것을 안그렸다고 한다. 이것은 선라이즈 해가 뜨는 장면을 그린 것이었는데, 저 노예 주제가 없었더라면 그야말로 장엄한 풍경이었을텐데, 여기에 도덕적인 메시지가 더해진다.

흑인들을 아프리카에서 데려다가 미국에서 노예로 썼는데, 이것이 단시 사회적인 논의가 되고 있던 것이 덧붙여진것이다.

주제를 생각치 않더라도 공기나 물 대기 이런것이

엄청난 파괴력을 보여주는 자연에 대한 반응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해가 막 나오네. 언제 그랬냐는듯.

노예 발이 묶인 것이 보이고, 물고기가 모여들고,

1872 모네 해돋이-인상

런던에 모네가 가있는 동안에 그린 것이라 터너의 영향을 모네와 같은 사람이 받는것이다.

1842년 snowstorm

이 작품이 전시되고, 거의 배는 보이지도 않고, 눈보라에 쳐서 거의 완전히 우주적인 소용돌이와 에너지에 삼켜져버리는것같은 난폭, 상상할 수 없는 자연의 느낌. 자연의 두려운 힘을 느낄 수 있다.

자연이란 광폭 난폭할 수 있단 낭만적인 상상력. 터너 자신은 이것을 좀더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마스트에 꽁꽁묶어서 눈보라치는 바다에 나가서 4시간동안 버텼다는 이야기가 있다. 직접 경험을 통해서 나오고, 이 소용돌이 속에 인간이 만든 배는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주 두텁게 바르고 발라서 자연이 완전히 하나의 추상적인 패턴 이런 작업을 이 사람이 했다.

배 마스트 부분을 확대해보면, 배가 두껍게 흰 물감을 두껍게 발라서 효과를 내엇다.

   

증기기관차가 다니기 시작하면서 자연의 소용돌이속에 인간이 만든 구조물과 대비가 되는 ..

거의 색채가 지난번 19세기 낭만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영국의 낭만주의는 전개되어서

영국의 공통분모는 낭만주의 이것은 양식이런게 아니라 , 자연에 대한 감흥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제 독일의 낭만주의 작품

1805-06phillip otto runge 이집트 피신중의 휴식

독일은 영 프와 다르다. 독일은 완전히 통일된 상태가 아니라서

뮌헨등 남부는 카톨릭

북쪽은 프로테스탄트

문화는 독일 - 각도시마다 문화적 분산적인 특징을 갖는다. 드레스덴 베를린 슈투트가르트 다르다. 아카데미와 같은 체제도 없어서 정부에서 이끌어가는 것도 없고. 바이마르는 괴테같은 사람이 활약. 1800년 괴테가 활약하는 이시대에 낭만주의가 발생. 무언가를 동경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단어가 되엇다. 이 사람들은 특히 자연을 굉장히 많이 숭배하고 정신적인 것을 찾으려 하고, 현재의 상황이 힘들기 위해 더미화된 과거를 찾는다. 정신적인 갈망이 문학으로 나타나는 나라였다. 그리고 독일은 숲이란 게 중요. 땅이 굉장히 척박한 곳인데, 숲이 굉장히 울창하다. 오래전부터 개간해서 한 것이다. 독일은 문학이나 뭐나 숲이란 게 중요하고, 자연을 숭배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종교를 찾으려는 것이 강하다. 독일 낭만주의미술이란 것은 거의 사상 속에서 나타나게 되고, 특히 우리가 볼 사람은 두사람

필립오토 룽에

가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

   

이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종교에 대한 찾기, 그리고 제도적 종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과 개인 사이의 관계로서(영지주의같이) 많다.

이사람은 자연과 인간과 신의 융합을 찾으려했다.

옛날부터 많이 그려지더 ㄴ종교적 주제이다 이그림. 마리아와 요셉.

멀리에 피라미드가 보인다.

이집트로 피난왔다가, 떠오르는 해가 나일계곡을 비춰주는 장면이다.

요셉은 밤에 지폈던 모닥불을 끄고 있다.

여기서 보면 과거의 종교화에서 보듯이 성인이라는 특징이 거의 나타나있지 않다.

신교였기 때문에 새로운 종교화랄 수 있고, 오른쪽에 천사가 꽃이피는 나무 속에서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하나의 천사가 나무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아기는 눈을 뜨고(새벽=자연, 아기그리스도가 눈을 뜨는 것, 새벽은 부활을 상징) 즉 인간의 구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어쨌건 전통적 기독교주제를 낭만적 감정과 연결하려 한 것이 룽에의 시도. 그리고 여러가지로 상징적인(동방의 빛)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굉장히 개인적인 종교화랄 수 있다.

룽에 1809 룽에 아침

매끄럽게 다듬어지고 정교한 처리. 거의 고전주의랄 수 있다.

붉은색 파랑색 노란색을 써서 블루라는 것(푸른색)=하느님을 상징.

노랑은 성령을 상징. 바닥의 레드는 열정 혹은 수난을 상징한다.

아이는 붉은색으로 되어있어서 희망과 환생을 상징한다.

상징이 강한 그림을 그렸다. 많이 그리진 못하고 일찍 죽었다.

Casper david Friedrich.

이사람은 대부분 그린 것이 요술 마술에 걸린듯한 고요한 정적의 그림들.

사람들은 대부분 앞이 아닌 뒷모습으로 나타나있고, 신비스런 것이 마치 홀린듯. 자연의 공간의 신비로움에 끌려들어가게 하는 것 이것이 이사람의 가장 특징적인 작품들. 공동묘지, 부서진 유적, 거기에 고목 그런것이 있는 음산한, 감정적인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그래서 여기서 보는 이런걸 보면 콘스타블 터너와는 또 다른 시점을 느낄 수 있다.

콘스타블 0- 애정을 가지고 관심갖고 묘사

터너 - 에너지, 광적인

프리드리히 - 신비주의랄까.

독일 - 북유럽이나 노르웨이 스칸디나비아 특징을 어떤 사람은 자연을 초월적인 신비주의로 표현하려는 것이 강하다고 하고 있다. 뭉크의 그림 - 절규 보면 뒤에 있는 풍경이 굉장히 신비스럽게 보이는데, 그것이 북구의 특징이다.

프리드리히 홀로 서 있는 나무 1822

이것은 바닷가의 월광 1822 와 짝이 되는 그림이다.

이것은 보면 산의 풍경이고, 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오크 떡갈나무. 예수의 관이 이나무였다고 한다.

이것이 산으로 올라가고 있다.

여기서도 보듯 번개맞은 나무를 보면, 여기는 번개맞은 나무다.

이런 것이 아래서는 잎파리가 나고 있는게 이것은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오크(참나무)는 단단하고 지속적이고, 신앙과 미덕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목동이 있고, 양떼가 있다. 이런것이 인간을 의미해서, 인간과 나무와 자연이 하나로 융합되는 그런 의미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아침 풍경.

이것과 바닷과의 월광.

이것은 도시민. 이것은 저녁일몰풍경이다. 여기서 이사람들은 바닷가 돌에 앉아서 항구에 배가 들어오는 장면을 보고 있다. 예전에는 사람의 일생을 항해하고 비교했다. 항해를 하는 도중에 격풍 풍랑을 만날수도 있고, 항구로 돌아오는 것이 인생의 끝이라는 비유가 많았는데, 여기 보면 이 사람들이 앉아서 끝나가기 시작하는 인생을 보고 잇다.

달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걸 볼 수 있다. 달이 사람들의 여로를 비춰주는 광선의 역할을 하고, 사람들이 앉아있는 튼튼한 바위가 신앙임을 나타낸다.

결국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생의 항로를 발견하고 안전히 인생을 마치는 그런 풍경화.

독일낭만주의는 사실 크지도 않고 테크닉도 부족해서 별로이다. 지나친 종교적 감정이 들어가서 또 별로라는 느낌이 느껴진다. 신비주의자로서 인기있는 작가기도 하다.

황무지 겨울 밤의 풍경 등 불편한 주제들을 많이 해서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도 했다. 빈 공간을 보면 거의 죽음을 느끼게 하는 고요함 . 자기의 고립된 세계속에 살았던 화가이기도 하고, 남들같지 않게 로마에 가서 고전을 공부하거나 그런걸 거부했다.

   

이사람이 그린것중에

1824 북극해 프리드리히

상당히 큰 그림이다. 가로세로 3미터 이상 되는 대작이다.

취지 - 당시 19세기 탄험을 하기 시작해서 29년까지 페리가 북극을 탐험했고, 아무도 안가본 사람의 흔적이 없는 그곳에 대한 낭만적 상상력. 그런것이 상상력을.

여기서 보는것은 양식적으로는 정확히 그린 고전주의적인 것이지만, 이것은 춥다못해 흰색이 푸른 기를 띠는, 굉장히 신비스러운, 그리고 아주 고요한. 신비로움을 주는데, 자세히 보면 여기에 배가 난파되어있다. 결국 이것은 - 지금은 이렇게 고요하지만, 바로 전에 예측못했던 난폭한 것때문에 배가 완전히 침몰되고 인간의 패배를 나타내는 그림인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작품을 북극해라고 했는데, 어느 책을 보면 hope희망이라고도 제목이 나온다. 희망이 난파되었다고. 난파된 선박, 북극 그런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낭만주의의 상징적 해석으로 또 보느냐의 해석이 있다.

종교적인 해석 - 얼음조각들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 보잘것없는(보트)인간이 신에게 잠히 도전한 것에 대한 결과가 이것으로 나타났다

다른해석 - 역사적 은유 - 그당시 독일은 유명한 독재 메테르니히 독재하에 있엇다.얼어붙은 북극땅은 독일정치의 마비된 상황을 나타내고, 배는 자유의 관이라고 상징된 것이 아니냐.

   

여기까지 풍경화를 중심으로 보았다.

이제부터 파리.

Corot, Volterra, 1838

신고전주의 앵그르 다비드등이 활동하던 그시기에 또한편 다른화파가 등장한다.

이젤과 캔버스를 들고 밖에 나가서 그리는 화가들이 많아지기 시작. 이사람들은 인상주의 화가드링 아니다. 아직도 집에 들어와서 작품을 하는 사람들인데, 과거 프랑스 어떤 시대보다도 자연 사생을 많이 했던 화가들인데, 일련의 화가들이 간 곳이 파리에서 한시간정도 거리에 바르비종barbigon

대기의 현상과 햇빛, 풍경을 산뜻한 색으로 묘사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바르비종에 가보면 (조그만 도시인데) 프랑수아 밀레- 이사람이 간 곳이 바르비종이다. 이때만 해도 밀레와 다른 화가.

카뮤 코로,

테오돌 루소(앙리루소말고),

밀레

도비니

등이

퐁텐블로 숲을 헤메고 다니면서 강렬한 분위기와 광선을 느낄 수 있는 곳을 찾고, 밖에서 스케치만 하고 집에 와서 제작하는 태도를 완전히 극복하진 못했지만 되도록 밖에서 작업하려고 많이 함. 완성작과 스케치의 경계가 줄어들기 시작.

   

코로- 이사람은 풍경화만 한 다른사람들과 달리 나이가 좀 많았고, 전통적 미술교육을 받고 인물화등도 많이 그렸다.

조용한 성품 다른 정치 그런것에 휩쓸리기 싫어하고 그러면서 그림을 상당히 잘판 이름잇는 화가. 이사람은 ㅣ탈리아에 가서 공부를 했는데, 미켈란젤로 고전 그림을 열심히 배웠던데 비해서 이탈리아에서 이사람을 사로잡은 것은 맑고 깨끗한 이탈리아의 광선이었다. 풍경화 특히 로마의 고적을 많이 그려서 - 여기서 보여지는 볼테라, 파르네제의 정원에서 보이는 포룸

Corot, Forum seen from Farnese Garden,1826

포룸은 고대로마의 중심. 상당히 질서와 조화를 보여주고, 뛰어난 균형감각, 굉장히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그림들은 거의 실경, 실제 관찰하는 것을 기초로 하는데, 아직도 집에 와서 조금씩 편집을 한다. 이사람이 다른고전주의 푸영화가와 다른 것은 푸생은 굉장히 이사오하시켰지만, 이사람은 보이는것에 상당히 열심이었고, 그러면서도 사색적인 것에 열심.

빛의 느낌이 강하다. 형태가 굉장히 견고하게 보이지만, 건전한 관찰에 의해 구조와 형태가 드러나고, 거기서도 밝고 어두움이 지켜지는 질서있고 조화되는 것이 코로의 특징적인 초기 그림이다.

Corot, mortefontaine의 기념1864

훨씬 초기보다 섬세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은빛 녹회색으로 전체가 사로잡혀서, 모든 것은 광선의 분위기, 미묘 따뜻한 순간적인 이미지를 표현하면서도 고전적인.

광선에 감싸여있는 섬세한 관찰 - 이런것이 코로의 작품들이다.

이런 그림이 한때 달력에 많이 나왔다.

누가 봐도 싫을 수가 없는 그림. 참 분위기있다.

코로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약간 콘스터블과 같은 희냇ㄱ의 터치들이 보인다.

반짝거리는 효과.

그리고 초록색도 훨씬 가는 붓터치. 이렇게 보면 1864년인데, 이때는 이미 모네와 같은 인상파 화가들이 청년이다. 코로의 작품들을 보았을 수 있다.

고전주의에서 인상주의의 가교역할을 했다.

   

1868-70코로, 진주를 단 여인

얼굴 각도 손 이런것을 보면 모나리자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코로 자신의 오리지널한 느낌이 나오게 그렸다.

인물의 구조를 잘 이해했고, 그것을 강렬한 신비스러움은 없지만 온화하면서도 품위를 지닌 사람으로 표현했다. 단단한 견고성.

절대적인 조화, 그러면서도 상당히 예민한 것이 보여지는 작품이 모나리자랄 수 있다.

친밀함을 느끼게 한다.

Theodore Rousseau, Meadow bordered by Trees 1840-45

리더.

바르비종의 리더는 루소고36년부터 정착., 다른사람은 왔다갔다.

콘스터블이 느끼는 자연의 웅대함에 대한 반응을 보여주면서도 콘스터블보다 훨씬 자연을 세밀하게 그렸다. 팬티즘. 자연속에 신이 있는것같아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세밀하고 정확히 옮기려는 노력을 한 것이다.

세밀한 붓을 써서 전체의 어둡고 밝은 면도 대조하고, 어찌보면 굉장히 어둠과 밝음의 대조가 거의 드라마틱한 바로크적인 효과도 준다. 괴장히 극적인 느낌을 주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세밀히 관찰하면서도 굉장히 낭만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모습을 알 수 있다.

루소, 느티나무 숲

   

   

Thomas cole, View from Mt. Holyoke, After the Thunderstorm, 1836

미국의 미술

거의 유럽으로 유학을 간다. 거기서도 일년에 그림

ㅓ음에 발달하는 그림은 초상화나 풍경화다. 아카데믹한 그림은 살사람도 없고 별로 없다.

일련의 풍경화가들 이사람들이 주로 모여서 작업하던 게 동북부 허드슨강 근처 뉴욕주 위를 중심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 허드슨 강 화파

토마스 콜 - 역사화를 그린 이민자(10살)이었는데 풍경화가 인기있었다.

개간지가 낮게 보인다.

이런 그림에서 보면 독일풍경도 험준한 산을 많이 그렷지만, 인간의 세계와 야생의 풍경을 이렇게 대조해서 그린 풍경은 벼롤 없거든.

허드슨강 이 그림들 특징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도 있지만, 인간이 위협당하지 않고 낙천적인(프리드리히는 위협적인 자연, 신비로운, 들어가면 아노디는 곳을 침입한듯한)

야생의 낙천적 자연의 느낌이 강한 것이 미국. 독일의 낭만주의 느낌이 강하다지만, 미국적 풍경을 확립하는데에 성공했던 그룹이다.

Durand, Kindred Spirit 1849

동화되는 느낌(친구가 되는 느낌) 여기 보여지는 인물이 조금 전에 본 토마스 콜. 그 옆에 보이는 것은 목사님 윌리암 컨 브라이언트라는 목사

풍경 - 전체가 실제 물리적인 지형묘사도 정확하지만, 전체적으로 광활한 대지와 숲의 웅장함을 느길 수 있다. 위협받고 있다는 느김은 안든다. 서로 자연과 친밀한 느낌. 자연이란 것은 인간을 살찌우는 ㅈ대상으로서 편안히 느끼는 것들이 미국 풍경이다. 실제 자연의 장면에서 느긴 아름다움 놀라움 이런것이 미국 풍경에서 나타나는 풍경이고, 낭만주의 풍경화가 영국 독일 미국이 서로 다른 방향ㅇ으로 발전. 자연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여기까지 낭만주의 풍경화 끈.

   

다음부터는 사실주의쪽으로 다시 간다.

   

   

   

   

   

7강 미술과 공예운동, 라파엘 전파

2010년 3월 24일 수요일

오후 1:55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3월 24일 수요일 오후 1:57

   

PPT - DELACROIX TO PRE-RAPHAELITE

PPT -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3월 24일 수요일 오후 1:59

<<7강.wma>>

   

지난번에 낭만주의를 대강 했고, 지금은 사실주의 조금 전인데, 다시 영국으로 간다.

영국에서 시작한 산업혁명이 19세기의 여러가지 변화를 가져왔지만, 산업혁명에 의한 변화와 근대화는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 한 예는

1851년 런던 joseph pacton the crytal palace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 건물

산업혁명이후에는 기계와 엔지니어에 의해 생산이 대체되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진다. 대량생산 - 표준화. 표준모델과 공정. 중요해지는 것은 기계를 다룰 수 잇는 사람. 생산라인이 효과적, 조직적. 조직을 관리하는 사람이 생겨야 한다. 이런 이유로 과거에 없엇던 것이 등장한다.

좋은것은 물건이 빨리 많이만들어진다.

허나 마구생산되는 서투른 물건이 많이 나오게 되어, 영국에서는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했고, 이 사람들이 만국박람회에서 - 내놓은 물건들을 보니 디자인의 문제를 보게 된다.

만국박람회 주도한 사람이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공. 이 사람은 미술과 문화에 관심을 가졌다.

박람회 건물의 특징은 임시적. 이것을 지은 사람은 조셉 팩스톤. 이 사람은 원예가였다. 이사람은 철근과 유리를 사용해서 작업.

하이드 파크에 지은 철과 유리로 된 조립식 건물. 17주만에 완성,

빨리 짓기 위해 모든 단위를 표준화 시켰다. 건물의 길이는 세로 110미터, 가로 600미터.

영국 전체 생산 유리의 1/3이 들어왔다.

제조품이 많고 섬유 기계 자체를 전시, 원자재도 전시. 빅토리아 여왕도 여길 방문했고, 다른 유럽보다 부유했던 영국의 부 낙천주의. 600만명이 구경왔는데,이럼으로써 정치적인 불안에서 관심을 돌리게 하고(레저) 당시 대부분의 박람회는 아름다운 것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 발명품 보러 가는 것.

이것은 안의 모습. 하이드파크에 있는 고목을 베지 않고 위에 그냥 건물을 씌웠다.

19세기 후반은 발명이 늘어난다.

60 70년대 - 실생활을 혁신하는 발명이 늘어나면서 전례없는 만족스런 단계에 와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인상주의 사람들의 걱정없는 면도 이런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1830 재봉틀 개발 - (티모니에, 싱어 둘다 개발.)

이스트만 코닥, 콜트 6연발 권총…

   

미술전시회도 이때 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미술작품을 볼 기회는 만국박람회가 주로인데, 여기에 처음으로 62년부터 나오기 시작하는데, 동양 - 중국을 여태까지 생각했으나, 일본이 68년 메이지유신. 되면서 서양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대거 공예품을 출품했고, 여기서 일어나는 것이 자포니즘이다. 일본이란 나라를 확실히 인식시키는데에 성공한 것이 만국박람회, 일종의 외교이다.

당시 기계는 엄청나게 컸고, 당시 사람들은 기계의 규모와 속도에 엄청나게 매료되었다.

   

Phillip Webb, The Red house1859-60

이때나오는 움직임이 미술과 공예 운동 arts and craft 존러스킨, 윌리엄 모리스라는 사람.

그래서 이사람들은 도시가 엔진 공장으로 가득차는 것에 혐오. 산업제품의 떨어지는 획일화된 질 혐오

인간이 중세와 인간으로 수공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하게 된다. 테크놀러지.반대.

솜씨나 수공예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 수공과 중세의 장인체제에

미술과 너무 대중과 멀어져서 어렵고 비싸서 일반인은 이것에 유리되었다고 생각하기 대문에,

예술가의 역할은 사람들의 사회문화적 환경을 바꾸고 아름답게 만들어주는데에 있다고 보았다. 건축 실내장식 가구 벽지 카펫 심지어 책의 삽화에이르기까지 좀더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바꾸어서 사람들의 환경을 바구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사람은 원래도 돈이 있는 사람이고 사업가적 소양이 있다.

모든것을 손으로 하는 것.

   

러스킨과 모리스는 조금 달랐는데, 러스킨은 조금 도덕주의자. 미술작품은 도덕적 의지의 결과여야 하는데, 기계는 양심이 없기때문에 기계를 혐오. 모리스는 기게도 당대의 사회제도자체가 인간의 일상생활을 추하게 만든다고 했고,

이주변에 많은사람들(사회주의자)이 모여든다. 그중 하나가

Phillip webb이란 사람. 모리스가 결혼을 할때 이사람이 집을 지어주엇다.

우선 이사람들은 디자인이란 게 실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림의 덕이 아니라. 실용적. 사람들이 금방 사용할 수 있고 그래서 사람드르이 생활을 바로 바꾸어줄 수 있다. 수공예야말로 비인간적 인간의 삶에 변화를 준다.

토탈디자인 개념

건축조각회화공예가 하나를 이루는 총체적 디자인

단순 견고, 기본적인 재료, 예를 들어 모직 마 가죽 돌 참나무,

색채도 갈색 초록색 노랑색 등을 섯고 굉장히 자연에 영감을 받은

이것이 어찌보면 디자인사의 시작이랄 수 있는 것이 모리스의 예인데,

   

윌리엄 모리스의 문제는 무어시냐면

이 집은 벽돌로만 지어졌고, 이사람들이 원했던 집은 전원풍의 인간적인 집을 원했고,

William morris 이졸데로 분장한 제인(아내)

모리스는 다재다능. 화가였다가 디자인으로 갔지만, 이 그림은 단 하나만 남아있는 윌리엄 모리스의 그림이다.

이 그림 잘 알려진거 보면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 (로제티와 제인이 염문으로 사이가 나빠졌지만,)

로제티의 모델이 많이 되어서 로제티 그림에 이 얼굴이 많이 나온다.

The green dining room 1867

바닥 벽지 등을 전부 손으로 디자인으로 했다. 그런데 너무너무 비싸다. 가격이 엄청나게 올라서 도무지 일반인은 사고 쓸수가 없는 것이 윌리엄 모리스의 문제였는데, 원하는 만큼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수 없었다 가격 생산량 하지만 여튼 .

이것이 아르누보로 갈때(

아르누보는 기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벽지. 꽃, 아칸투스문양 - 이런 벽지에서 모리스의 패턴이 자연 식물 등에서 정교한 디자인..

모리스 컴퍼니 회사를 만들어서 실험을 했는데 80년대 이후에 이득이 생기기 시작.

   

   

   

Rosetti, Beata Beatrix, 1863

모리스와 친했던 사람이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라파엘전파. Pre-raphaelite Brothers라파엘 전파

르네상스 라파엘 이후로는 르네상스가 타락했다. 라파엘이전의 미술을 동경한다.

37살에 죽은 라파엘 1503년부터 그린 것이다. 1500년 이전의 르네상스와 중세를 생각하는 정직도덕적인 미술. 거기로 돌아가고, 그렇게 함으로서 영국의 미술을 개혁하고자 했던 모임이다.

시대에 대한 반응, 과거에 집착, 종교적 동경, 현재를 혐오한다, 약간 환상적이고, 도덕적. ->>>결국 낭만주의.

확실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이런것이 이사람들 특징인데,

   

당대를 혐오 - 산업혁명으로 물질화, 사람들이 물질에 너무 집착하여 정신이 빈곤.

물질사회에서 도피하여 과거의 영광 속으로 가겠다.

일반적으로 라파엘전파는 그렇게까지 성공한 운동은 아니다.

굉장히 센티멘탈한 느낌이 강해서 당대 사람들과 유리된 것이다.

밀레와 쿠르베는 당대와 밀접한데 이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서 그렇다.

로제티 - 시인이자 화가.

윌리엄블레이크고 그렇고.

(누이가크리스티나 로제티 - 시(교과서에도 나온다))

   

이 그림 - 비에타 베아트릭스

프라 필리포 리피의 그림 - 굉장히 긴 목, 내성적인, 아들이 있었는데,

그사람을 가르친 사람이 보티첼리이다.

보티첼리와 같은 그런식의 분위기가 로제티 그림이 나온다.

어찌보면 시적이면서도 감상적이기도 하고, 프랑스 사람들이 보기에는 뭔가 약해보인다. 사실은 얼굴표정, 동작, 의상 이런덧이 열정 또는 사랑, 죽음 이런 느낌의 전달이 되는 그런것이고, 분위기가 있긴 하다. 신비스럽고, 그런류의 그림이 비타 비아트릭스,

Lady lillith 1866 Rosette

이 그림 레이디 릴리스는 전설에 나오는 여인인데, 여러가지 설이 있다.

아담이 이브랑 만나기 전에 아내가 있었다. 릴리스

창녀, 여왕, 최초의 악녀.

여기서 나오는 이미지가 팜므 파탈.

당시 이런 여성을 그렇게 부르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운 마녀.

자신이 자신의 매력으로 남성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자기도취에 빠지고.

여기서 중요한 게 붉은 머리카락. 파우스트에 레이디 릴리스가 나오는데,

아름다운 긴 머리카락으로 남자를 한번 묶고는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아직도 남성을 지배하는 상징이 된다.

굉장히 문학적이다. 미술적이라기보다는 문학적 컨텍스트에서 얘기되는데 그것도 라파엘 전파의 특징이다.

클림트의 유디트와 비교해보자면

아직도 성의 억압이 존재했던 빅토리아시기이기 때문에 유혹이나 그런것이 완전히 드러나지는 못했고 은밀하게 감추어져있다.

아름다움 죽음 파괴가 있던 그림이 비난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Rosetti 1850 수태고지

천사가브리엘이 아이를 가졌다고 알리러 온다.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을 들고 마리아에게 간다.

수태고지는 옛날 그림에는 없다.

여기서 마리아는 두려워하고있고, 가브리엘은 빛으로 떠있고 침입한것같다.

완전히 사춘기소녀의 성의 경험으로밖에 받아들일수 없는 작품이 되는데, 섹슈얼한 것이 은밀하게 감추어져있다.

Milais, 요셉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1850

존 밀레

우리가 아는 밀레와 이름이 비슷하기 때문에 옛날 우리나라 잡지를 보면 혼동해서 보기도 한다.

여기를 보면 요셉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제목.

새로운 해석.

요셉은 원래 목수였다.

목수의 작업실. 어린 그리스도. 나무작업을 잘못해서 손에 피가 난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박히는 운명을 암시한다.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는 사실 노동자계급이엇다는 해석.

사회적 의식이 이미 미술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당시 노동자의 권익을 서포트하는 운동하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 이 사람들은 너무 부분부분을 정확하게 그려서 표면의 눈이 그것을 보는데에 왜 이렇게 그렸냐면 테크닉이 부실한 것은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옛날에 우리가 보던 주제와는 매우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1855 Brown 노동

여태까지 사람들이 일을 한다는 것은 존경받는 일이 아니었는데, 노동의 존엄성에 관한.

오른쪽에 있는 두 인물.

토마스 칼라일, 또 하나는 기독교사회운동가 모리스

길에서 도로를 파헤치고 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술을 먹고 이싸.

저 뒤에 있는 사람들은 자본가. 귀부인은 흙이 묻을까봐 조심조심 지나가고 있고,

꽃을 파는 여자 거지 -

오드리 헵번 my fair lady- 버나드 쇼의 유명한 소설을 영화로 만든 히트작인데, 오드리헵번이 꽃파는 형편없는 여자로 시작했다가, 어느 교수가 그 여자를 데려다가 훌륭한 영어를 가르치는 이야기.

올리버트위스트에 나올것같은 아이들 돌아다니고,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노동자들 오른쪽 멀리 있다.

대조된다. 일하는 사람과 노는 사람, 노동과 자본이 대조.

너무 초점이 잘 맞아서 잘 주의가 집중이 안된다.

이사람이 인상주의적 표현을 즐겨해서 ㅏ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나타나고 있다.(오른쪽에 서있는 칼라일)

오히려 전달하려는 이미지는 확실하지 않게 되어버린다.

그리고 공간도 좀 이상하고.

오른쪽원경윗부분은 축소된다든지 강력한 메시지는 나오지 않게 된다.

   

고아 거지들, 이무렵에 찰스 디킨스가 올리버트위스트를 그린 것.

Brown The last of England 1855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민가는 젊은 부부. 타이타닉처럼.

영국의 해안이 머러지고 있는데 영국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오스트레일리아(금광ㅇ)로 가고 있다. 이사람은 중사늘.

매우 감정적

사진가같이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되어있다.

   

Hunt 깨어나는 양심 1852-54

여기서 보면 도덕적 메시지 명백.

피아노레슨을 받고 있는데, 여자의 손에는 반지가 없다. 정부 mistress

갑자기 깨어나는 양심.

세밀한 실내 카펫, 피아노, 벽지, 정원의 나무랄지 이런것이 당시에 아주 정밀히 그려져있고,

테스같은 소설도(빅토리아 시대 수많은 문학에 나오는데)

존 러스킨은 근대사회가 여성을 타락으로 내몰았다고 주장, 여성은 근대사회의 희생자.

근대사회의 새로운 층이 매춘부. 187080년대 파리 매춘부 5만명.

이런것들이 당시 사회적인 것을 보여주고, 도덕적 ㅣㄴ실과 물질적 사실사이에서의 악, 속죄, 이런것들이 초점이 나타나있다.

   

Hunt 양치기의 고용, 1852

이해하는데에 지식이 무슨 필요하겠는가, 중산층들에겐 상당히 어필이 된다. 대부분은 노동계급이라 생각하면 되고, 산업혁명으로 중산층이 조금 생기는 단계.

야외. 젊은 남녀가 야외에서 즐겁게 노는 주제로 생각될만큼 야외풍경이 잘 나타나있는데,

실제 이 남녀는(양치기가 할일을 하고 있지 않고, 이 양이 절로 가고 있고..

여자하고 히히덕..

여자가 입고 있는 치마의 색이 스칼렛. 주홍글씨. 호손. 이것이 로마 카톨릭과 성공회와의 정착에 대한 . 스칼렛(로마 카톨릭)의 유혹에 빠져서 국교회(푸른색 목동)가 정신이 팔려있음

야외 광선에 관심이 너무 많은듯 하이퍼리얼리즘같다.꼭

정밀한 광선과 반사, 명암 이런것이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게 하고 그렸다는 걸 알 수 있다.

   

양이 배가 아파서 여자가 돌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이제 프랑스

앵그르, 들라크루아같은 사람들이 있었고, 프랑스는 정치적 안정을 가지지 못하고 1848년 혁명. 이때 2월달 3일간 혁명이 나서 왕이엇던 루이 필립이 물러나고 정치혼란, 실업자,

이때 최초로 선거권이 주어지며 많은 결과가 있다.

6월에는 노동자 봉기가 일어난다. 이것을 예전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성공하지 못했기 대문에 봉기라고 한단다.

당대 사회에 예전보다 훨씬 관심을 갖게 되고 그래서 나타나는 것이 사실주의 활발.

   

영국에서 공산당선언이 발표되었고, 노동자 공장 도시..이때가 1840년대 70 80까지 프랑스 미술은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로 이야기되는데, 엄밀히얘기하자면 인상주의는 사실주의의 한 맥이라 볼 수 있다.

옛날식의 그리스 르네상스 미술의 사실주의와 달리, (그건 소문자 사실주의)

이것은 역사적인 한 운동 Realism 팩트를 이야기한다. 실제 당대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

쿠르베 : 나에게 천사를 보여달라 그러면 천사를 그리겠다. 나는 눈에 안보이는 것은 그리지 않겠다. 셰익스피어, 그리스 신화 이런것은 안보인다. 그것은 소설에 나오는 것이고, 내가 관심있는 것은 내가 사는 이 시대 사람들의 운동 의상 먹는것을 보이겠다.

인상주의도 엄밀히 보면 같다.

여튼 리얼리즘은 노동자 농민 도시영세민쪽으로 갔다. 사회가 과격하게 가면서

밀레는 농민을

도미에는 노동자를.

인상주의는 사람이 잘살게 되면서 중산층이 주제가 되는 것이 다르다.

기본적으로는 엄밀히 보면 사실주의가 되고,

역사화 신화 소설주제 안그리겠다 이거다.

1870년대 파리를 떠오리라 하면 모네 르누아르.

1800년대 떠올리라 하면 안나오지. 그런 주제 그림이 없으니.

영웅과 중요한 인물을 그리다가 우리주변의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미술의 주제가 되는 것이다. 그림 뿐 아니라 문학 사실주의 작가도 마찬가지다. 이상화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풍습 경험을 보여주는 이것이

Meissonier 내전의 기억 1849

낭만주의 들라크루아와 비교해보면

왜 이것이 더 이상 낭만주의가 아닌지 알 수 있다.

애국심을 고취, 사람들의 뭉치는 것, 그런것이 안보인다.

죽어 넘어진 사람들을 단지 기록하는 것. 이것이 사실주의이다.

이런것이 차이가 있다.

   

사실주의 하면 세명의 중요한 화가.

밀레, 쿠르베, 도미에를 얘기한다. 이사람들은 낭만주의적 환상 도피주의에서 완전히 빠져나와서, 밀레경우는 조금안그렇지만. 밀레르 보면

   

밀레

   

키질하는 사람 1848

이사람이 왜 이렇게 동양에서 인기가 있는가

외국사람은 모르는 사람도 있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인기 있는 사람중 하나다 로댕 르누아르 밀레. 일본에 많은 작품이 소자오디어있는데, 농가의 출신으로 실제 농부였다 화가가 된 사람인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육을 굉장히 잘 받앗다. 고전 라틴어 교육 다 받고..

그림을 그리러 파리에 왔는데, 이 사람이 영향받는 바는

1848년 혁명에 많은 영향을 받고 사회적인 현실 이런것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한다.

전설적인 이야기에 의하면

밀레가 파리에 와서 돈이없어 누드를 그리는데, 누가 지나가다 저것도 그림이야 하고 말하는 것을 듣고 진실한 농부가 되갯다고 바르비종을 갓다고 하고 그런 전설적 이야기.

우리나라 사람은 이렇게 밀레에 대한 애착이 있다.

우리나라는 농업국가였고 농사에 대한 것이 있어서 그렇게 볼 수도 있느넫,

사실 밀레는 하녀도 있었고 식탁에 먹을것도 많았다. 결국 그것은 이사람의 친구이자 딜러였던 상시엥이란 사람이 밀레에 대한 미화된 전기르 ㄹ썼다. ㄱ

이사람의 그림이 종교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 많아서 청교도국가인 미국에서 인기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아시아에서 또한 공산화된 중국에서 밀레와 쿠르베를 인정했다.

아시아에서 조아하는 것은 만종 키질하는 사람

쿠바는 씨뿌리는 사람 투쟁적이라서.

밀레는 실제 그린의도와 달리 팝아이콘화 된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의도로 멋대로 읽힌.

   

   

당시 농부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농부와 공장노동자는 당시에 그닥 구별이 안되었다. 사회계급이 확실히 구분이 안되어.

노동하는 사람 2/3는 농부였다. 도시에서 농한기에 노동하고 이렇게 유동적이었고 경계가 굉장히 불분명했는데, 키질하는 사람이랄지 씨뿌리는 사람 -

이런그림은 살롱에서 인정받기 어렵다. 다윗상 호라티우스의 맹서 보던 사람이 저렇게 하잘것없이 생각하던 농민을 크게 영웅적으로 그렸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이렇게 불안하던 시기에는 의심을 사기 쉬웠다. 농민 그림을 크게 그리니깐 농민이 또 업라이징하는게 아닌가.

여태까지 아무도 농민을 이렇게까지 표현하던 사람은 없었다

대개가 아름다운 전원의 소도구로 표현.

땅과 하늘풍경에 걸치게 크게 그린 것은 밀레도 인식하고 그렸을 것.

많은 사람들이 비난한 것이 그림이 너무 거칠다. 앵그르 그림에 비하면 그럴것.

   

   

   

   

   

   

8강

2010년 3월 29일 월요일

오후 1:58

   

<<8강.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3월 29일 월요일 오후 2:04

   

   

   

1849 씨뿌리는 사람

(강의노트 없이 진행)

1848년 혁명(2월), 6월에 또 나서, 왕정ㅇ-공화정으로 다시 가고

49년 살롱은 심사없이 모든 사람이 출품하게 되었는데,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도 그런식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된 작품이다.

(쿠르베 오르낭의 장례도 같은 시기에 출품되었다.)

1848 키질하는 사람

이런것을 보면 여태까지 볻ㄴ 농민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보였고,

우람하고 정직 당순하게 보였는데, 당시에는 농부(키질)들이 도시에서 농한기에 노동자일을 했으므로 당시엔 농부와 노동자 구분이 적고, 당시엔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향하면서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요즘 생각하는 농민 노동자가 다르다.

밀레의 작품들이 전시되었을대 논란이 많았다.

대개 2/3은 이런 새로운 도상을 칭찬하는 평이 더 많앗다. -

1/3은 이것을 비판하는 이유가 - 시커멓고 우람한 이미지의 농민을 묘사해서 밀레가 얻는 이익은 무엇이냐. 충격적, 영웅화, 사회주의적 사상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들 했다.

공산당선언이 선포되었을 때이다.

   

그림을 보면 - 아래에 대지, 위엔 하늘, 대지와 하늘을 연결하는 것이 인간.

도시민에게 땅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할 수 있는 그림.

대지와 발의 경계가 모호, 혼합이 되어있는듯한 느낌.

노동이라는 도상에 새로운 존엄성을 부여하고 있다.

정직, 단순해보인다.

기본적으로는 농민의 사회적인 힘의 가능성, 신체적 에너지를 표현하는.

거칠은 이미지를 준다.

   

쿠르베와 비교해보면 조금씩 다른 게, 쿠르베는 농민들의 삶을 직접 다루려고 하는데,

밀레는 낭만적으로 생각한다. 이미지. 씨를 뿌리는 사실적인 묘사와는 다르다.

이사람의 둥그런 입체감 등은 자신이 존경한 미켈란젤로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1860-62 괭이를 든 사람

10년후에 그려진 괭이를 든 사람을 보면 - 초기 밀레의이미지가 나중엔 완전히 달라보이고,

절망의 , 빈곤에 찌든, 희망이 없는 농민의 이미지로 바뀌게 된다.

황폐한 땅에, 허리가 굽어있고 농민의 힘있는 이미지에서 탈피한 것을 볼 수 있다.

1852 PEASANT GIRLS WITH BRUSHWOODS

바르비종만 해도 근대화의 물결이 다가와서 일부는 근대화되기 시작하는 무렵인데, 밀레가 그린 노동하는 모습을 보면 근대화된 기기와는 관계없이 원시적인 노동(가령) 나뭇가지를 모아서 지고 간다든지, 절구를 빻는다든지 근대화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엇기 때문에,

어찌보면 근대화되지 않은 (도시를 혐오해서 도시를 떠났기 때문에, 특히 소음을 싫어햇다)

원시적인 노동에만 종사하는, 노동의 존엄성(인간이 땅에서 태어나 땅에서 일하고 땅으로 돌아가는)이런것이 밀레가 표현하고자 했던 이미지라 할 수 있다.

1850 건초작업

초기 씨뿌리는 사람에서 보였던 이미지가 후에는 매우 감상적 종교적으로 변해서

많은 사람이 밀레에서 느끼는 이미지가 그런 종교적인 느낌이다.

노동하는 장면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감상적인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후로 갈수록 감상적)

1855-57 이삭줍기

이것이 잘 나타난 것.

처음에 느낌은 전원의 생활과 아름다움 화음을 느낄 수 있는데,

전경에 있는 3사람이 있고,

뒤를 보면 넓은 지평선이 있고,

추수를 해서 낱가리를 쌓아둔 것을 볼 수 있고,

수확의 계절 가을의 인간의 노동의 존엄성을 느낄 수 있고,

인물의 표현 입체적 둥그런 표현-미켈란젤로식의 고상하고 준엄한 느낌,

   

느낌은 2가지로 엇갈리는 느낌.

  1. 땅위에서 일하는 고상한 노동의 이미지
  2. 허리가 굽혀져있고, 머리가 땅을 향해 숙이고 있는
    1. 노동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3. 실제로 이 당시에 이삭을 주울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느 ㄴ것이 아니라.

    뒤에 있는 수확한 사람들은 부농이고,

    이삭줍고 있는 사람들은 극빈자들(허가받은 사람만) 가능 / 대조적임

    보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불온해보일수도 있다.

구성 그림은 리듬감을 주는 구성, 빨강 노랑 파랑, 아름답게 그리고

ARCADIA서사시적이고 고상한 화음

전체를 어느쪽으로 보느냐가 헷갈리는 그림.

   

농민을 개인으로 표현하지 않고 일반화된 캐릭터, 고상하고 조각적인 사람으로.

   

밀레의 일생이 각색되어 미화되어 출판되었는데, 80년대에는 번역되어 미국에도 많이 전해졌고,

보스턴지역에서 이 사람의 열혈 팬이 생기고, 90년대에는 일본의 서양화가들이 밀레으 ㅣ동네를 찾아가고 성인화가로서 추앙받게 된다. 청교도인 미국은 프랑스에서보다 더 인기. 봉건제도가 없으므로 사회적인 빈부의 차에 대해 예민한 나라가 아니라, 프랑스에서 보여지는 비난이 미국에선 없다. 그것보다는 전원의 아름다움, 노동의 아름다움으로.

백화점에서 5불(당시엔 큰돈)에 팔린다. 만종 이삭줍기도 처음엔 미국사람에게 팔렸다가 루브르로 돌아가게 된다.

씨앗광고. - 밀레의 이미지로

어린애들이 놀이 (롤플레이)씨뿌리는 사람, 키질하는 사람 - 이런것도 이성ㅆ다.

목사들이 신교 - 밀레를 이용해서 선교에 동원.

우리나라는 박수근이 강원도 12살 초등학생때 원색도판을 밀레 처음 보고,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길 바래서 기도했다 하는 기록이 나와있다.

박수근이 많이 그린 것이 절구 - 밀레그림과 유사.

   

이중 하나가 대부분의 아시아 나라는 농업국가, 밀레에서 나오는 이미지 - 씨뿌리는 사람보다 이삭줍기등은 투쟁적이지 않고 복종적인 이미지, 순한, - 이사이 감성고 ㅏ맞다.

1864 양치는 소녀와 가축들

이런걸 보면 상당히 종교적.

쿠르베와 비교하면 같은 사실주의 화가지만 다르고 더 낭만주의적인 것을 알 수 있다.

1858-59만종

정말 이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이냐 하는데에서는 의도가 있다.

여자가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확실한데 남자는 그냥 모자를 쥐고 서있는것이라 기다리는것일 뿐이라는 사람도 있다.

먼 대지, 교회를 배경으로 .. 종교적.

   

   

   

   

오노레 도미에

1830 DAUMIER, LOUIS PHILLIPS AS GARGANTUA, LA CARICATURE

석판화에 그린 것이 잡지 신문에 많이 나왔고, 프랑스에선 신문이 성황하던 때이다.

도미에의 관심은 밀레가 농촌인데 비해 도시.

도시라는 것이 새로운 주제로 부각되는 것도 이시기.

영국의 찰스 디킨스, 샤를 보들레르 - 도시의 현상을 시나 소설의 주제로 잡아서 했다.

도미에의 경우에는 쁘띠부르주아 - 책방주인, 그림파는 화상, 세탁녀,

근대성을 보여주는 철도의 승객, 군중을 도상으로 다루어, 변화하는 당대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LA CARICUTURE - 신문에 그린 캐리커쳐

가르강튀아 - 먹는걸 너무 좋아했던 왕을 의미한다.

루이필립 - 가난한 사람들이 조금씩 모아둔 금덩이나 이런저런것을 집어삼킨다.

프랑스말로 서양 배를 어리석은 의미라고 한다.

밑에 있는 사람들은 아부하는 사람들.

풍자화에 들어가는 것, 고대 로마, 중세에도 낙서 등으로 나타나있다.

   

그 결과 신문은 폐간되고, 도미에는 재판(감옥엔 안갔다)

샤리 바리라는 새로운 신문으로 갔는데, 정치풍자는 할 수가 없고,

일상삶에서 보는 여러가지 사람들의 위선이나 부당함을 주제로 나타내서,

전체 드로잉 만화 합치면 4000여점이 나타난다.

나중엔 그림, 조각도 취미로 했다.

화가의 작업이 아니라서 자기 마음대로 그릴 수 있었다.

   

이사람의 중요한 작품들이 그리고 싶을 때 그렸던 조각회화 - 이런것이 독자적인 형식으로 자유롭게 그렸던 것이기 때문.

1834 트랑스노냉 거리

실제 있었던 사건

리옹 - 프랑스 중부 도시(탄광) 사건이 터져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때 군대가 도시에 들어와 진압했는데, 군인들쪽에 총알이 날아가서 날아온 방향에 있는 동네 사람들 집을 들어가서 다 죽였단다.

먼저 눈에 띈 것은 기사와 함께 실렸던 도미에의 석판화다.

근인을 향해 총을 쏘았던 사람이 아니라 일을 당한 가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잠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자다가 변을 당했네..

밑에 어린아이가 깔려있고, 다른 가족들도 쓰러져있는 것이 보인다.

이것이 보도가 되면서, 5월 8일의 학살 비슷하게 사회고발적인 작품으로 할 수 있다.

   

하지만 도미에의 그림은 정치적인 것보다 풍자적인 것이 더 많다.

이사람이 생각하기에 소위 전형적인, 소시민들을 굉장히 실제적인 사람들로.

이론적인, 도 정의보다는 자신의 안전, 편안함을 추구하고 위협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로 묘사.

도시여성노동자들이 더 자신에게 알맞은 주제로 보았다.

삶에서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

거리에서 보는 보통사람들의 태도를 그렸는데,

전혀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 치고는 인체가 어떻게 움직이고 근골격에 대해 천부적으로 이해했던 사람이다.

이사람의 선이 재미있는데, 당시엔 선을 정확하게 그려야 하는 시대인데, 이사람의 구불구불한 선으로 표정등이 잘 표현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로의 그림 앞에서 1864

누드화를 보고 놀라있는 여성 두명이 보인다.

전시회 관람자들의 반응이 삽화가들에 의해 많이 그려진다.

전시된 그림 앞에서 갓 쓴 사람들이 "일부러 모르게 그리는 것 같다" 이런 얘기도 우리나라 있다.

나다르(사진작가) 1862

공중에서 파리 시가를 찍었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사진기술이 발달되지 않아서, 10분 20분을 그냥 있어야 하는데, 후에는 발달되었다.

새로운 시각으로 찍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 공중에서 찍은 사진.

DAUMIER: GRANDES EAUX D'VESSALLES, FROM LE CHARIVARI

"베르사유에서 장대비를 맞는 사람들"

GRANDES EAUX- 베르사유의 큰 분수

   

DAUMIER, AFTER THE TRIAL 연대미상

변호사들은 굉장히 부도덕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1847 BEHIND THE RENT

세들어있는 사람이 주인을 피해다니다가 집주인이랑 만난 것.

1848 JUST THE WAY WE WERE - 새를 보면서 노부부가 우리도 한때는 우리도 그랫다고 생각하는 장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깔려 있다.

인간의 부패 위선 좌절을 표현했으나, 인간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피그말리온 이야기

조각가 피그말리온이 조각과 사랑에 빠졌는데, 어느순간 조각이 말을 걸어서

그런데 누드가 쭈그렁하다. 이런 누드는 이전에 없다.

사실주의누드 - 이상화시키지 않고 생긴 그대로.

앵그르와 같은 이상주의적인 누드는 사실주의에 나오지 않는다.

마네 올랭피아만 보아도 -

쿠르베 -

누드가 (물론 그래서 굉장히 육감적인, 살을 느낄 수 있는)

미화되거나 비너스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저런식으로 그리는

DAUMIER, SOUP, WASH DRAWING 연대미상

인생을 철학적으로 보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민 노동계급으로 보이는데,

왕성한, 건강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체격의 여성이 한쪽은 아이에게 젖을 주고 한쪽으론 수프를 먹는. 아무리 힘든 일 어려운 생활을 하더라도 인간의 생명력은 지속되고, 좌절하지 않는다. 라는 생명력 생동감이 표현되어있다.

판화 수집가 THE PRNT COLLECTOR

그러나 인간이라는 것은 그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알고 싶어하는 것 또한 인간적인 것이라

어떤 사람이 판화를 놓고 고르는 장면.

조금 전에 본 수프를 먹는 사람들에서는 먹고 자는 동물적인 장면이었지만, 여기서는 지성과 인문적인 사람을 묘사.

1865 THIRD CLASS

삼등 열차. 유화.

보통사람들이 타는 객실.

여기서 보면 불편한 사람들이 잔뜩 잇고, 할머니, 딸, 아이들,

새로이 나타나는 군중의 모습

열차라는 것도 새로운 모더니티를 나타낸다.

사람들이 하루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는데, 일하러갈때애들을 데리고 간다는 것.

노동환경 - 10대정도 되면 뭐든 다하고 그런 시대. 노동자계급이 시작되는 시대 환경도 보여주고. 아이는 엄마젖을 빨고 3세대가 나타났다는 것은 이렇게 힘들지만 인간은 계속해서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그림은 당시 기준으로 보면 완성단계 그림을 보기도 힘든 그림이다.

세부적인 묘사 없고

형태가 명확히 정의되어있지 않고,

선도 반듯한 것이 아니라 구불부굴, 외곽선만 따놓았고,

매우 못그린 그림인데, 도미에 자신도 이것을 좋은 작품이라고 하지 않앗다.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고, 여기서 보면 서민에 대한 상당한 애정이 느껴진다. 어느 한 개인으로서의 관심, 군중에 대한 관심,그들의 지루함 무표정, 그러면서도 그들의 생활력이 작품에서 느껴지고, 도시 개인의 고독, 이런것들을 표현한 (거의 표현된적이 없는)주제.

어떤것은 물감을 손으로 문지르기도 하는 등 독자적인 방법으로 묘사했다.

   

   

쿠르베

   

COURBET 돌깨는 사람들 1850-51

이사람이야말로 사실주의의 리더.

도미에 밀레도 그렇고 파리의 젊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리더로 비쳐졌고 자신도 그것을 즐겼다.

이사람도 정식 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닌데, 프랑스 스위스 사이 오르낭 태생.

부농의 아들이엇는데, 파리에 화가가 되기로 가서

최초에 17세기 스페인 그림들을 보았고, 스페인 붐이 일어나 고야의 그림이 소개되고

비제의 카르멘 , 춘희 등 문학 음악 미술에서 붐이 되어나타나는데,

이사람은 제대로 된 교육은 받지 못한 사람.

   

1849년에 밀레 씨뿌리는 사람이 나왔을때 같은때 오르낭의 장례.

이 그림은 완전히 사회주의자로 비난받았다.

쿠르베 그림을 보면 사회주의 메시지가 들어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사람이 실제 사회주의자인지?

여튼 푸르동 생시몽등 사회주의 운동가들이랑 친했고, 자신도 그런 ㄱ류관계를 좋아했다.

이사람의 신념이 그렇게 확실했었는지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이사람 - 고전에 대한 동경은 없다. 당대 사람들의 모습 -사냥꾼 창녀 술취한 신부 등

쿠르베 - 이사람의 과격성은 주제보다는 테크닉에 있다. 주제도 당대 사람이 보기엔 그렇다.

테크닉 - 현대미술의 시작을 어디로 보느냐 했을때 마네로 보는 사람도 있다. (평면성, 선 형태 중심)

여튼 이 그림 - 실제 그림은 없다. 폭격을 맞아서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잇다.

쿠르베의 그림 -파리근외에서 실제 돌을 깨고 있는 어느 할아버지와 소년을 보고 그림으로 그렸는데,

모델에게 똑같은 포즈를 취하게 해서 이 그림을 그렸다.

돌을 깨는 할아버지와 10대의 아이를 / 밀레와 비교해보면

밀레는 둥글게 이사화한 신체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그렇지가 않고,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담흘리고 잇는 사람으로 보인다.

밀레 그림은 추상적인 리듬이 있어서 아름답게 보이는데, 이 그림은 그냥 흘끗 본 장면이지, 이사람은 그림의 구도를 알까 생각이 들만큼 구서의 묘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쿠르베의 그림을 비판하는 근거가 된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나름대로 인체가 구성이 되고 잇긴 하지만..

테크닉 - 팔을 보면 둥근 팔의 느낌이 나지 않는다.

밀레의 이삭줍기를 보면 - 점차적으로 할 열번정도 명암을 조절해서 그렸다. 그에 비해 쿠르베는 한 세단계로 해버린다. 팔으 되게 평면적으로 보인다.

이것을 사람이라니깐 팔로 보이지,

대신 이사람은 물감을 두껍게 그렸다. 이것을 전반적으로 보면 힘이 보인다.

거칠은 물감을 직접 느낄 수 있고, 돌의 무게, 거칠은 질감을 느끼게 해주고, 제한된 갈색 색채 속에서 풍요로운 느낌도 준다. 어쨌든 결국 쿠르베의 그림을 보았을 때에는 최후 풍경화등을 보면 이사람은 아름답게 그리려 하는 화가라는 느낌이 난다.

   

쿠르베 - 자기자신을 오만하게, 작가로서 생각, 기본적으로 낭만주의에서부터 나오는 천재란 개념. 낭만, 아방가르드. AVANT GARDE - 전위대 - 시대에 따라가지 않고 앞서가는, 화가가 엘리트의식을 갖고 나아가는 1855년 살롱에서 12작품을 출품했는데, 9작품은 입선, 2,3작품 떨어진다.

가건물을 지고 PAVILLION OF ~~- 라는 전시회를 했다. 거의 관람자가 없었는데, 마지막에 온 사람이 80이 넘는 들라크루아가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9강

2010년 3월 31일 수요일

오후 2:01

   

<<9강.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3월 31일 수요일 오후 2:03

   

사실주의

  • 주제의식면 고전 X

       

       

       

    쿠르베 FLAGEY 지역 농민들의 귀환 1850

    잡다한 인물들이 나타나는데 과거의 그림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던 생활소재나 계급적인 asemf이 나타나고 있다. 급격한 도시화 도시사람 시골사람 구분에 대해 보여주고, 이런것도 이미지. 사람들의 특징을 살리는데에(도시 부르주아, 농민, 노동자) 관심 주어 그리고,

    일상적인 생활만이 예술적인 사실에 소스가 된다고 생각했다.

    쿠르베 1849 오르낭의 장례

    오르낭 - 쿠르베의 태어난 고장 이름. 장례식 장면을 그린 것.

    그림의 크기가 상당히 크다. 8미터정도 되는 어마어마한 그림.

    장례식을 하러 사람들이 모였지만, 이것이 누구의 장례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힌트가 없다.

    이런 류의 주제에 대해서 사람들이 익숙하지 않았는데, 뒤에 돌산들이 있고, 기독교 사제들이 장례식을 거행하고 있고, 십자가.

    이사람이 태어난 오르낭의 지형을 상당히 잘 표현하고 있다. 이사람의 개인생활의 한 부분이고,

    그러나 파리에서는 이것이 여태까지 관시베 대한 공격으로 보였고, 살롱에서 그림을 보는 사랑에게는 굉장히 못마땅히 보이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구성을 한것같지 않고, 무표정, 딴짓하고 서로 다른데 쳐다보고(사실 있는 그대로를 재현해서)

    죽음에 대한 슬픔, 죽으면 천당에 간다든지 이런 도덕적, 아름다움 그런것이 전혀 나타나있지 않고 파리 중산층에서 예상하는 세련된 느낌이 여기에는 전혀 없는 것이다.

    총 51명 쿠르베의 아버지 누이 오르낭 시장, 여기 사람들의 진짜 초상을 보여주고 있고, 기독교 교구 관리, 이런것들을 원근법의 깊이도 없고, 이렇게 그린 것이

       

    이런 스케일에 이런방식 구도로 그린것으로는 역사화가 있는데, 이것은 또한 역사화에 대한 도전처럼 보여진 것이다.

       

    이 그림에서는

    • 인물들간 서열이 없어진다.

      사람들 하나하나가 다 평등한 구성,

      따라서 서툴게 보여지고,

    • 당시 사람들의 복장이 그대로,
    • 이상화도 없고, 세속적인 하나의 죽음으로 묘사.
    • 엘 그레코, 오르가즈 백작의 장례를 보면 횡대로 서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잇다.

      누가 죽었는지 - 오르가즈 백작

      구성이 아랫부분 위엣부분이 서로 다르다.(지상과 천상의 세계를 구분)

      지상의 장면, 중요하고 그래서 실제 성인들이 나와서 관에 넣는 장면

      실제 이 그림이 걸린 바로 아래에 실제 석관이 놓여있다. 관에 집어넣는것처럼 보인다.

      손에 닿을만큼 바로 위에 천상의 세계가 있고, 지상과 분리.

      혼은

         

      이렇게 한줄로 서있는 구성이 대체적으로 고전적 구성이다. 약간씩 비키게 횡대로 서있는 것 - 파르테논 신전. 앞뒤로 서있고 공간이 확대되면 바로크적인 시각이다.

      쿠르베의 이러한것도 고대 석관이나 프리즈 조각에서 나오는 구성이다.

         

      이래서 쿠르베는 고전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사람.

      이시기는 스페인붐 시대고, 엘그레코는 스페인에서 오래 활동.

    사회의 구성원 전부가 이 한자리에

    고전적 주제의 그림과 비교하면 매우 특이. 논쟁의 대상.

    스스로 그런것을 즐겼고, 자신을 정치적인 사상사로 생각했다.

    1852 오르낭에서 마을 처녀들이 양치기소녀에게 돈을 주다

    오르낭의 지역 풍경(돌산이 많고)

    세명의 마을여자들이 거지소녀에게 돈을 주는 것.

    처음에 보면 한가로운 들의 풍경같은데, 세명의 여자들이 서있는 자세 - 옆을 보면 옛날에 보던 구성같다. - 삼미신(보티첼리) 생각난다.

    평범한 여자들이 자세를 삼미신처럼 하고 있고,

    • 얼굴이나 손이 상당히 거칠게 그려져잇어서, 이사람들이 이 고장사람들로 일을 많이 한 사람들인데, 옷은 상당히 차려입고 있다. 부농 NOUVO RICH 신부농 처녀들. 뽐내고 , 여유가 잇어서 양치기소ㅕ들에게도 돈을 주는모습.

      세명은 쿠르베의 누이동생들.

    당시 농민들이 차려입는 모습을 그린 것이 매우 새롭고, 파리의 사람들에게 불안하다.

    옛날에 그려진 삼미신에 비해서는 세련된맛은 없지만, 당대 변화하는 농가의 (돈가진 사람들의 모습)

    돌에 두터운 질감 이런 테크닉의 개발이 - 프랑스에서는 아직도 완벽한 화면의 마무리가 중요했다. 쿠르베에 이르면 이것도 상당히 느슨해진 것을 볼 수 잇다.

    이사람은 들라크루아처럼 색채화가는 아니었지만, 질감면에서 테크닉을 잘 구사해서 두터운 물감을 쌓아올리는 기법이 두드러진다.

       

    1856 세느강변의 젊은 여인들.

    이 그림은 외국에선 이상한 것이다.

    여자 둘이서 흐느적 - 동성애.

    80년대 한국에서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것.

    빛에 대한 관심이 있긴 하나 관찰해서 많이 진행된 상태는 아니다.

    진짜 쿠르베의 여자 그리기 - 살이 느껴지는, 무거운 신체, 손으로 만지는듯한 - 사실주의

    이상화시키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

    당대 동성연애 장면이 아닐까?

    이런걸 연구하는 사람들은

    동성연애 장면은 그리스 이전부터 나오는데, 실

    1866 COURBET, SLEEP

    A3용지만한 그림인데, 본격저그로 동성애 그림.

    1854 BONJOUR M. COURBET

    안녕하세요 쿠르베씨

    오른쪽이 쿠르베.

    확실하게 3명의 타입이 나타난다.

    쿠르베.

    이지여깅 몽펠리에

    그지역의 지형을 고스란히 묘사.

    그지방에서 나는 꽃도 있고, 님부 프랑스의 분위기, 거의 사진기록과 같이 정확하게 기록.

    여기서 보여지는 쿠르베의 차림은 보헤미안.

    라 보엠.

    THE BOHEMIAN

    이런것은 예술가, 방랑자, 연극인처럼

    이런 블라우스는 노동자들이 입는 옷.

    쿠르베는 노동자 옷을 입고 배낭을 매고 있으나, 턱을 치켜올려 상당히 오만한 모습으로 나타나있다. 이런 보헤미안 차림의 쿠르베에 비해

    이사람에게 인사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차려입은 사람으로서 정치적인 의식이 드러나있고,

    포즈나 제스쳐에서 쿠르베의 개성이 드러나있다. 이 그림 발표후 대단한 비판을 받는다.

       

    • 지평선이 아래에 있고,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는 구성이 실루엣이 하늘을 등지는 구성

      VELASQUEZ 이솝- 17세기 초상화에서 나온다.

    • 평면화 - 구두 - 중간톤을 없애고 그냥 센 대비로 보여주기 때문에 그부분만 떼어내서 보면 구분이 안된다 -
      • 이것은 또한 그림을 상당히 빨리빨리 그린다는 뜻도 된다.
      • 한쪽붓에는 어두운색 한족붓에는 흰색을 해서
    • 표면질감효과가 어두운 부분에서 나온다.
    • 또 하나 영향받은 것이 대중소설의 삽화다.

      프랑스 소설책에 - POPULAR IMAGE

      방랑하는 유태인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삽화.

      쿠르베의 구성과 비슷하다.

      19세기 오면 이런 잡지와 책이 많이 나온다.

      모네는 여자들을 많이 그렸는데, 패션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이것은 패션잡지에서 많이 따왓다.

    • 자신을 소외계층으로 묘사를 하지만, 자신을 천재성을 가진 사람으로 제시하는 경우가 여기도 그렇고 다른사람도 많다.
      • 렘브란트 고흐 - 화가는 자화상을 통해서 자기고백한다기보다, 남들이 생각해주었으면 하는 이미지로 만들어놓는 경우가 많다.

           

    COURBET SELF PORTRAIT WITH A PIPE 1849

    • 상당히 낭만주의적인 천재 이미지로 자신을 보이고,
      • FRANTZ HALS 17C
        • 한붓터치로 쉭쉭 그리는 것 INFORMAL
        •  
      • REMBRANDT 17C
        • 렘브란트의 젊었을때 자화상
        • 명암을 극적으로 대조한다든지. 대
      • 명암을 대조적으로, 극적, 낭만적인 예술가의 모습으로 , 이런식으로 대가들의 전통을 많이 끌어다 썼을 것.

    COURBET 화가의 화실 예술가로서의 7년을 종합한 알레고리 1855

    •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가면 1층에 엄청난 크기로 전시되어있다.
    • 작업실.
      • 농부들, 음악가, 십자가에 못박힌 마네킹, 거지, 개 등 모델. 유대인 창년 익살꾼
      • 누드도 살의 느낌이 좀 나는 살도 좀 찌고 통통한 사실주의적인 누드.
      • 쿠르베의 후원자 친구들, 보들레르, 푸르동
      • 그중의 중심은 나 쿠르베다 이런느낌?
    • 1855년에 파리에서 만국 박람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나폴레옹3세 이후 프랑스가 많은 사회적 진보를 이루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연것.
      • 거기 12점을 냈는데 9점만 입선. 그래서 전시장앞에 가건물짓고 PAVILLION OF REALISM 간판걸고. 막판에 80세가 다된 들라크루아가 왔다.
    • 이것도 7미터정도의 큰 그림.
    • 쿠르베의 미술에 대한 생각, 개인적 공식적 세계가 다 그려져있다
    • 화가 쿠르베의 일종의 선언문이다.

    파도 1869

    • 말년에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풍경화는 정치적색채가 없다. 말년의 풍경화는 시각적인 경험을 처리 물감을 겹겹이 텍스쳐를 주고 거의 색채자체는 모노크롬같지만 질감과 무게를 전달하는 - 초록색 파도의 차갑고 무거움
      • 오늘날의 화가들은 많이 하지만 그당시에는 혁신적인 테크닉이었다.
      • 그것을 삽화로 표현 - 칼로 그으면 파도가 그려지는것처럼 보였다.

       

       

    쿠르베는 끝. 마네 드가.

       

    당시에 약간 재야세력. 아직까지도 중심은 다비드앵그르를 잇는 고전주의작가들이었다.

    만인이

    토마스 토마 COUTURE 로마인의 데카당 - 거의 쿠르베의 그림과 같은 사이즈. 7.8미터 4.7미터

    역사적 고전적 장엄함 모델이 되는

    방탕한 밤을 보낸 다음에 아침에 나른하게 기대있는 모습.

    여성들의 모습도 굉장히 (다비드에서 보여지는 도덕적 모습은 없이 에로틱 데카당.)

    • 이런 사람들이 결국 관전양식 OFFICIAL PAINTING

      국립미술학교에서 재직하고 이런것은 또 대중들이 쉽게 알 수 있는 것.

    • 쿠르베등은 아방가르드. 정치적 논쟁이 되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 그리고 세번째 그룹이 마네.

      마네는 사람들 사이에서 당대 사람들의 삶을 그렸는데 실제로 그사람을 지지하는 사람은 그닥 없었다. 그담에 나오는 모네에 이르면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살롱전의 힘도 없어져버리고, 화랑들이 생겨서 살롱입선이 큰 메리트가 안되는 것이다.

      조금전세대인 마네때는 살롱전이 중요했다. 가장 살롱때문에 고통받은것이 마네다. 자기가 그림을 내면 거부당하고 웃기다. 하지만 마네는 인정받고 싶어서 계속 그림을 내고.

      마네는 문학작품(프로베르 보들레르)같은 시기, 근대적 삶에 대해 관심가진 사람.

      더 이상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당대의 사람 생활 느낌을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

      이사람들이 그린 것이 사람들에겐 기준이 TASTE가 혼란을 자아낸다.

      그전의 기조와 충돌을 빚는 시기. 반응이 각각 다르다.

      • 그중 가장 많이 문제가 방법과 형태의 변화.

        특히 명암법 원근법 해부 이런것이 중요한데, 마네이후부터는 SKETCHY해지고 즉흥적. 과거와 달리 붓터치가 많이 보인다.

      • 마네부터는 쿠르베 밀레 도미에와 달리 - 노동자 농민 별로 없고 중산층.
        • 이때의 파리가 대대적인 도시계획을 하게 되어서 1848년 혁명 당시 프랑스 정부가 깨달은 것은 봉기가 났을 때 진압하기에는 파리시가지가 너무 복잡하다. 오스망이 대대적 도시계획.
          • 폭동에 대처하기 위한 대대적 계획. 주택가를 커다란 대로로 만드는 등. 외부에서 쳐들어오는 적이 아닌 내부의 폭동을 진압할 수 있는 체계.
          • 콜레라가 발생해서 도시를 위생적으로. 수도 하수구 병원 학교 형무소.
          • 동서를 가로지르는 곳에 샹젤리제 콩코르드광장 등
      • 이때에 파리가 변화. 변화하는 도시의 새로운 삶과 행동에 관심.
      • 마네 드가는 일종의 플라네르 - FLANEUR 산책자. 왜?
        • 새롭게 변화한 파리를 보려면 산책해야하고 쇼윈도우 - 익명의 군중의 한 사람으로서 당대의 삶을 관찰하는 한가한 사람들 - 화가의 이미지. 화가가 익명의 군중속에서 도시를 관찰.
          • 소설가 구보 씨의 하루 -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동네를 돌아다니는
          • 근대적인 남녀들은 다 산보를 한다. 데이트를 할 때 산보
        • 이상적인 남성의 타입은 댄디. 우락부락 마초가 아니라 영국의 신사와 같은 매너, 예술적 지적 대화가 가능 유머 기지 심미적 신문을 읽고
        • 마네 르누아르, 당대 예술가중에 댄디 - 휘슬러 멋있는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하고 여성을 즐겁게 해주고.
        • 도시는 빨리 변화하고 일시적이고 - 이런것을 관찰하는 것 - 호들갑을 떨지 않고 마네 드가.

    마네가 떨어졌을때 입선한 작품이 부게로(부그로)최고의 아카데미 그림 - 비너스의 탄생

    기준작.

    완벽한

    드로잉

    고전적 주제 비너스

    마네가 풀밭위의 식사를 냈을 때 최고상을 타고 산것이 비너스의 탄생.

    1862튈러리의 콘서트

    여기서도 보면 마네의 친구들(마네도 이안에 있고) 문인 음악가들이 있고,

    이것이 파리의 공원 튈러리 - 이것도 도시계획으로 새로운 명소.

    이런그림을 보면 옛날 그림과 다른 것이 구성에 초점이 없다.

    어디가 중심이고 아니고가 없고, 거의 어느순간에 흘끗본것같은 느낌.

    옛날엔 구성이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쿠르베에게구성을 못한다고 말한것과 똑같은 비난이 마네에게도 가능한 것.

    앞으로 이것은 인사파에게 전형적인 구성이다.

    우연한듯한 느낌 인상파에도.

    쿠르베의 화가의 아틀리에 보면 중심이 쿠르베. 전형적인 구성을 계산적으로 한 것인데,

    그당시의 파리사람들을 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정신- 어떤 대화를 하고 냄새를 풍기고 그것을 전하고 싶었다고 이야기.

    하지만 평론가들이 보기에는 감정도 없고 이야기하고싶은것이 없고 해박한 지식도 없고. 여기서 나오는 것은 일화적 내용 상징 아무것도 없어서 사람들은 이사람이 상상력 독창성이 없이 테크닉을 얘기할 뿐.

    마네 - 그림이 무엇을 주장해야한다는데에반대한다.

    시대상을 객관적으로 그리는 것이지 작가의 주관이 어떻고가아니다.

    일상적인 장면이 주제로 나오게 된다.

    1862년 60년대 그린 정물

    뱀장어 - 냄비

    이런 정물이란 것은 유명한 대가들이 그린 것이 아니라 서열이 낮은 화목이었고, 이그림이 그렇다손 치더라도 두드러지게 보여지는 것은 -

    • 굉장한 붓터치. 윤기있고 색채가 생생한 붓획의 폭, 단순함, 신선한 느낌이 있다. 이사람은 이런것을 잘 그린 사람. 쿠르베와 같은 찬사를

      붓을 잘 구사. 정물화는 잘 그린다고 이야기했다는데,

    • 마네또한 고전에 대해 잘 알고 잇는데, 레몬에 칼이 대각선으로 놓여있는 것이 - 네덜란드 그림에도 보인다. 냄비앞에 반짝이는 것이나 - 기다란 붓이 지나간것과 같은

      샤르댕 - 일반 서민집에있는 것을 장중하게 그린것처럼 - 스페인 그림들을 굉장히 많이 공부했다.

    • 186X년 인물화(기타치는 사람, MADMOISELE? VICTORINE투우사의 모습
      • 색채 자체가 모노크롬적인 색채가 있어서 고야, 벨라스케스 영향,

        이무렵 처음으로 고야의 판화가 알려지게 된다. 굉장히

      • 두번째 그림 - 모너니즘 평면화
        • 사람을 밝게 한 것 - 그림의 구성에서 흰색과 뒷배경의 흰색을 균형을 잡고,
        • 원근법은 거의 거짓말같고.
        • 색의구성을 강하게 하는 것을 보면 - 그림이 사실을 그대로 묘사한다기보다는 색면의 배치만으로 구성을 이뤄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의도적
        • ART FOR ART SAKE - 미술이라는 것이 일화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미술은 미술 자체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마네가 그래서 중요하다는 것.
    •    

         

   

   

10강

2010년 4월 5일 월요일

오후 2:00

   

<<오디오 녹음.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4월 5일 월요일 오후 2:01

  • 마네 시대구분
    • 초기 60년대 중반 - 옛 대가들의 작품을 COPY많이- 루브르.

      특히 스페인 벨라스케스 고야 등의 MONOCHROME에 가까운 작품들을 많이.

         

      이당시 스페인열풍( 비제 카르멘 등) 문학에도..

      이때 고야의 판화등이 파리에 알려졌고, 이대는 특히 집시, 기타치는 사람 등이

      쿠르베의 경우는 아직도 정치사회적 의미가 담긴 작품들이 많은 데 비해서

      마네의 중요성 - 처음으로, 그림의 세계는 우리와는 다른 독자적인 reality를 가지고 있다는 인식.

      쿠르베는 일상에서 나오는것들이 캔버스에 드러나고, 그것을 화가가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자 하느냐가 강한 반면

      마네의 경우 그림은 현실세계의 법칙과 독립된 것이며, 순수하게 시각적인 것이다.

    • 1960중반-70년대 초기

      점점 더 독창적인 형태와 주제를 다루게 된다.

    • 70년대 초기-이후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터치가 엉성 형태가 단순, 일본판화의 영향같은 것이 보인다.

    • 그의 생각 그림은 무엇을 주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색채와 형태가 석여서 생긴 노래와 같은 것이므로 색형을 내버두는 것이면 된다는 - 주제의식 별로 확실하지 않은.
  • 보들레르, 에밀 졸라, 말라르메 등과 친해진다.

       

       

  • 1859 압상트를 마신 사람, old musician 1862
    • 드가의 경우도 이런것을 마신 사람을 그린 예가 있고, 고흐도 많이 마셨다.
    • 파리에서 볼 수 잇엇던 음악가였고, 마네 스튜디오 근처에 어린 거지들이 살았다고 한다.
    • 벨라스케스, murillo의 그림을 보면 - 벨라스케스에서 인물의 타입(서민적인), 색채나 그런 것을 이어받았음을 알 수 있다.
      • 앙투안 와토의 그림 중에 comedian de l'arte 거기 등장하는 인물의 모습을 그렸는데, 그 인물이 old musician에 같은 인물에 나온다.
      • 대가들의 작품을 섞어서 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자기 눈을 거친 그림.
    • 형태가 큼직큼직하게 그렸고, 다비드처럼 거대하게 한 화면에 작업한 게아니라, 부분부분 일관되지 않게 작업한 것을 볼 수 있다. 얼굴부분은 밀집된 붓터치로, 옷 나무 등은 큼직하게. 어떤 부분은 흰 캔버스가 전혀 칠해지지 않은 부분도.
      • 이렇게 실험적이다. 압생트를 마신 사람을 보면 시각적 환영이 아니라 굉장히 평면적 단순하게 처리했다. 나름대로 자기가 실험하던 느낌이 강하다.
    • 그외에도 (여기저기서 모티브를 가져와서 복합시켰는데, ) 잡지 등에서도 참조하고 source가 옛날에 비해 다양하다.
  • Concert at tuilries, 1862
    • Low genre 17세기 네덜란드의 용어 - 에서 벗어나 high genre, 중산층이상을 그린 고급스런그림. 이후로는 중산층이 대상이 된다.
    • 도시의 재개발, 곳곳에 문화시설이 갖추어지고, 새로운 모더니티를 보여준다. 여기 보면 옛날그림처럼 초점이 없이, 어느부분을 잘라도 그림이 된다
      • 옛날에 호라티우스의 맹세 등을 보면 한 부분만 자르면 그림이 안된다(부품역할밖에). 그에 비하면 다로따로라는걸 알 수 있다.
      • 시대상을 볼 수 있다. 댄디. 유쾌 영리 화제를 이끌고.. 이런것이 당시 댄디의 이상. 여기 나오는 시대적인 표현.
  • 풀밭위의 식사, 1863
    • 이시대에 화단의 리더가 안생기고, 아카데미는 더욱 보수화되엇다.
    • 살롱전 - 4천여명이 낙선했다.
      • 나폴레옹 3세가 살롱전을 보고 낙선전을 마련해주었다. Salon of the refused
      • 여기 고민거리 - 작품을 낼까말까 고민해서 3400명이 전시했고, 마네도 내기로 했는데, 고민은 - 사람들은 이거보고 "아 낙선할만하다"하면 안되니깐..
      • 유독 모여서 조롱한 것이 마네의 이 그림 - 거의 전설적인 그림이다.
        • 마네는 3그림을 냈는데, 자신은 소심하고 인정받길 원했고, 불명예를 원하지 않았다.
        • 이 그림을 보면 도대체 두명의 남자가 초상화인데
          • 두남자 옷 입고, 여자는 옷 벗고, 게다가 이쪽을 쳐다보고
            • 주제의식이 없다. 그림의 목적이 없다고 비판.
              • Thomas couture, decadance of romans, 1847
                • 마네 선생의 그림 당대 최고의 그림이라 불리워짐.
                • 훌륭한 그림, 도덕적, 역사적 지식, 사람 인물 하나하나가 섬세 세부적. 신고전주의.
                • 이런류의 섬세한 묘사가 마네그림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
          • 뭘 그렸나 살펴볼 필요가 없이 optic하다.(아웃포커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식으로 그림을 보는 것이 익숙치가 않다. 마네는 욕심을 부린 것 같다. 온갖 고민으로 내가 것을 모두 보여주겠다는 것.
            • 누드화, 인물화, 초상화, 목욕하는 여자도, 풍경화도, 정물화도 그렸다.
            • 가만히 보면 부분부분 그린 것이 다 다르다.
              • 테레핀유를 섞어서 전체를 대강 칠한 후에 세부를 칠해가는데, 여기서 보면 그냥 놔둔 부분이 많다. 어떤 부분은 테레핀색이 다 드러나고, 정물은 세부묘사를 잘했다.
              • 배경에 창백한 크림색을 칠하고 나서 색을 칠하니깐, ???????????????
              • 평면화되기 시작함. 쿠르베보다 훨씬 평면화.
              • 사람들의 평 - 이 여자는 트럼프카드의 퀸처럼 평면이다 라고 했다.
                • 얼굴 보면 - 앵그르의 그림과 비교하면 매우 거칠어보이고, 인체도 둥그러운 시각적환영기법이 없이 과감히 틴트변화가 생략 - 되게 평면적. 옛날같은 입체감이 많이 없어져 버렸다는 것. 터치가
          • 당시 마네를 변호해주던 사람들이 이그림을 근거로 변호함
            • Titiane or goirgione, fete champetre, 1505
              • Pastoral concert로 번역됨
              • 두 남자는 베니스풍의 옷을 입고, 여자 둘은 누드다. 변호.
                • 말이 잘 안된다. 남자들은 베니스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나머지는 뮤즈라고. 실제 남자의 눈에는 안보이는 것으로 그려져있다.
            • Copy of raphael, 파리스의 심판
              • 삼미신이 다 벗고 있고, 강의 신이 앉아있는데, 이구도를 마네가 다 가져왔다. 이것을 판화로 copy해서 그걸 많이 공부했으므로 마네가 이것을 보고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잇다.
            • 사실 이사람이 여러가지를 그리려 햇고, 여태 보던 풍경보다는 상당히 푸른색등이 신선하게 드러나고, 상당히 평면이되었고, 붓터치가 지나간것이 보이고 이런것을 알 수가 있다.
            • 마네는 무엇을 그리느냐보다 어떻게 그리느냐가 중요하다.
            • 그림은 시각적 감각이 중요하고, 세상은 광선과 색채로 가득하므로 그것들이 우리 눈에 어덯게 드러나느냐, 시각적 경험이 어떻게 드러나느냐. 그것을 그리는 것이 중요하다. 고전적 주제보다는.
            • 남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도덕적 그것이 아니라 한순간의 시각적 센세이션이 중요!
              • 앵그르의 그림을 보려면 한시간을 보아야 하는데, 예를 들어 한순간을 볼때는 밝고 어두운 두개밖에 안보인다. 마네의 이야기로 보자면 그 반짝하는 순간이 근대적인 시각적 경험이다. 흘긋흘긋 보앗을대. 그것이 더 나아간 것이 모네같은 색채화가이다.
                • 뱀장어가 있는 정물, 마네 1864
  1. 샤르댕 냄비 정물 - 영향받았다.
  2. 네덜란드 17세기 정물화들
  1. 이런것을 보면, 기름진 붓터치 뭉텅뭉텅 지나간 흔적 등이 보이는데, 오늘날에는 특별하다고 보이지 않지만, 당시로선 획기적인 그림이었다.
  2. 건강하고 가정적인 색채이다. 시각적으로 유쾌하고 편한 느낌의 그림.
  3. 레몬- 네덜란그 정물화를 보면 대각선으로 칼이 나와있어서, 전반적인 색조를 보았을 때, 마네가 이런 전통을 보고 나왔지만, 근대적인 맛이 살아나는 것을 알 수 있다.
  • Manet, medemoiselle victorine as Espada 1864
    • 투우사의 옷을 입혀 그림을 그렸다. 투우장에서 그린 것 같지만 배경은 따로 그렸고, 여자는 마네 스튜디오에서 그려진 - 배경과 인물이 잘 맞지가 않다. 다리에도 문제가 좀 있다.
    • 거으 ㅣ평면으로 보인다. 우리가 느끼는 것은 강한 색채대조, 검은색과 노랑색 핑크.
    • 그림은 무엇ㅂㅗ다 시각적인데, 여태까지는 그림이 문학역사쪽에 접근해있었는데, 그림의 순수한 면에 더 집중하게 되고, art for art sake-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림의 내용이 아닌 형식. 여기서 모더니즘이 시작, 그림의 자율성이 존중. 선 색 형태가 어떻게 배합되어 나타내느냐. 그림이 문학역사적 메시지를 줄 필요가 없이 그림은 그림이다 라는 것의 시작이 마네.!
  • Manet, 올랭피아, 1863제작,65년전시
    • 엄청난 비난과 조롱을 받아서, 그림을 안보이는 방구석 문위에다 걸었다.
    • 누가 봐도 꽃달고 목에 리본, 꽃을 보내왔다. 매춘부. 밤의 고객
      • 개성이 매우 강한 그림인데다 뻔뻔스럽게 사람을 똑바로 본다. 상상불가.
      • Titiano, urbino의 비너스 - 둥그런 입체, 손에 닿는듯한 느낌을 주는데, 여기 있는 여자 비너스 - 분명 모델이 있었나 보고, 어떠어떠한 사정을 보아 그냥 비너스라 한 것 같다. 은밀한 눈으로 보고, 강아지가 자고있고, 뒤에는 방이 있고 깊은 공간이 있다.
    • 여기 보면 공간이 생략되어 보이지가 않고 깊이깊이 보는 것이없어지고, 앞의 여자에만 눈이 가고, 까만 고양이가 여기를 보며 꼬리를 샥 세우고 있다. Titian의 비너스에서 유래된것인데 여긴 완전히 매춘부고, 많은 매춘부가 당시에도 그려졌지만, 올랭피아가 아니라 그냥 비너스란 이름을 붙였다. 고분고분하지 않고 올랭피아라는 이름은 매춘부로 소설에 나오는 이름이다. 에밀 졸라의 나나, 뒤마의 아들들 이란 소설에서 올랭피아는 창녀의 이름으로 나온다. 이것도 모더니티. 근대화되면서 새로운직업여성군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런 여성들을 마네에서도 드가, 툴루즈 로트렉이 많이 그린다.
      • 파리에 매춘부만 5만명
      • 그중에도 고급정부, 일반매춘부 차이가 있단다. 이 그림에 있는 것은 낮은 매춘부, 변두리지역. 빈민층여성으로 생각되는데, 남자들은 이런 사람들은 섹슈얼한 필요라기보다는 남자들에게 하나의 로망이었다. 고급정부는 최고 패션리더였다. 가정집 여자는 도시에 혼자 돌아다니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거의 울타리, 발코니, 한정된 공간에 있지, 도시를 걸어다니고 남자랑 팔낀 여자는 정부다. 고급주택가는 mistress들이 차지했다. 빈민촌 여성들이 매춘하면서 고분고분하지 않는 모습은 정숙한 부르주아여성들에게는 두려움, 충격이었던 것이다.
      • 여기 보면 흑인의 얼굴 - 새로운 관심(낭만주의에서도 나왔지만). 마네는 쿠르베같은 사상적이거나 이론적인 사람은 아니고, 보는대로 추하거나 아름답거나 악하거나 그런 주제의식적 생각이 없다. 누구를 그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화면이 어떻게 구성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도덕적 감상적인 마네의 코멘트가 나타나지 않는다.
        • 비판자들은 티치아노 고야의 마하의 모방이고 상상력이 없다고 생각.
    • 에밀졸라의 변호
      • 검은 고양이는 그자리에 까만고양이가필요한것이다.
      • 왜 꽃 - 그자리에 구성상 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등
      • 영화 My fair lady를 보면 의상상을 탔다. 거길 보면 거의 흑백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마네의 영향이라고 본다. 마네는 색이 신선하다. 제한된 색에서 신선한 변화가 나온다. 마네 이후의 그림은 어제 그린것처럼 순수하고 신선한 색채 맛이 나온다.
      • 매춘부 사진 - 매춘부들이 자신을 광고하기 위한 사진을 만들여 뿌린다. 우리나라도 한국기생사진이 퍼지듯. 티치아노는 고전의 비너스를 모방해 포즈를 취함.
  • 마네 피리부는 소년, 1866
    • 배경이 중간색이고 전신이 나왔을때엔 누구의 영향인가? - 스페인에서 벨라스케스에 의해 많이 그려졌다. - 이솝의 초상화 중요함! 상당히 많이 나온다
    • 부분부분이 거의 평면 색면으로 나타나있고, 굉장히 바지가 평면적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부분간 색채대조가 나오지 입체느낌이 안난다. 색채 선 형태가 강하게 들어간다. 선과 형태의 구성이지 뭘 들고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 크고 대담한 형태와 윤곽이 분명하게 튀어나오고 배경이 간단해서 시각적인 디자인적 효과를 나타내고, 얼굴은 훨씬 세밀하게 그렸다. 옷은 넓게넓게.
    • 여기에서 미술을 그리는 사람과 보는 사람의 간극이 벌어지는 것이 art for art sake미술을 위한 미술 예술을 위한 예술
  • 浮世畵우키요에 에도시대 채색판화
    • 전통적인 일본미술에서는 서민적인판화라서

      특징 - 판화니까 평면적, 주제의식상 서민적, 대중적, 미인연예인그림 표면

      40년을 자포니즘 붐이 생기고, 그때만 해도

  • 졸라의 초상 1868
    • 졸라의 아파트인데 마네와 졸라의 공통 관심사가 있다.
      • 마네의 올랭피아, 벨라스케스의 작품, 일본 병풍, 우키요에
    • 과연 졸라가 마네 그림을 잘 이해했는가? 별로 확실하진 않다.
      • 뭔가 새로운 것이 일어나고 있다는 감, 뭔가 마네가 부당하게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상통한 것.
  • 마네, 1867년 maximilian의 처형
    • 곧바로 고야 5월 3일의 처형과 비슷.
    • 고야는 전과 후, 야만적 행동에 대한 비판이 분명하게 드러나있는데, 마네의 경우에는 그런것이 하나도 없다. 감정이 없고 도덕적 심리적 충격이 없다. 거리를 두고 보는.
    • 멕시코의 왕인데 꼭두각시왕. 처형장면이 보여지고있고, 집중해서 죽이는 그런게아니라 그냥 흔한 처형정면으로 보인다. 무심히 총알을 다시 끼우는 것 보이고, 전혀 감정이 들어가지 않고 팩트 중심으로 보인다. 황제의 처형장면이 역사적으로 보이는 것 뿐. 논평이 없고 드라마도 ㅇ벗고 단지 하나의 시각적인 경험에 불과. 이것이 사실주의. 마네 자신은 물론 보지 않았다.
  • Manet, 1875 argenteulle
    • 아르장타이유 - 모네 르누아르등이 많이 가서 그림을 그렸다.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서 훨씬 터치가 짧고 빨라진다. 그러나 모네같이 진보된 것은 아니고 햇볕에 대한 관심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 모네와 이사람의 차이는 검은색이 항당 들어가고있어서 흑백의 효과가 나타나고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1874 보트위에서 그림그리는 모네
    • 완전히 인상파의 영향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 인상파 사람들이 마네를 초대해서 모임을 하자고 했는데, 마네는 늙으막에 젊은이들과 다시 전시하는 것은 명예에 먹칠하는것이 아닐까 생각해서 거부 하지만 그림은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그린다.
    • 살롱전 작품 입선이 되었다고 연락이 와서 가보니 모네그림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
  • 1875 grand canal
  • 1881-82, bar at the follies-bergeres
    • 폴리 제르제르의 바
    • 채색 석판화가 많이 나와서 광고들이 포스터로 나오게 된다.
    • 툴루즈 로트렉의 빨간 풍차, 등에서 나오는 대표적 유흥업소. 물랑루즈는 아직도 잇다.
      • 마네가 여길 자주 갓다.
    • 공간 압축 평면화 - 이 그림을 보면 라파엘로 아테네학당에서 보는것같은 넓은 공간이 아니다.
      • 거의 여자 바로 뒤가 유리.
      • 그런데 술병 바로뒤가 …
      • 두사람의 시점을 같이 그린것으로 보인다.
      • 여급 - 네고가 되면 바로 나가서 매춘할수있는 여자다. 이 남자는 무엇을 하는것이냐, 네고. T.j.clarke는 (70년대 marxistㅇ미술사학자) 이당시 도시의 근대성이란 굉장히 유동적이고, 도시의 경계도 유동적이고 확실히 잡혀지지 않은 순간성이 당시 근대성의 특징이라고 했다.

        이그림은 다시 다루겠다

   

   

11강

2010년 4월 7일 수요일

오후 1:53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4월 7일 수요일 오후 2:01

<<11강.wma>>

  • 아까 폴리-베르제르의 바

       

    • 이 그림 앞의 관람자가 보는 인상은 - 정면상이기 대문에 거울 뒤에서 똑바로 본다는 생각을 하는데, 지금 이 그림에는 두 사람의 시점이 복합되어있는 느낌을 주고,
    • 그리고 여자의 얼굴이 - 일상적인 무표정한 권태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데, 여자보다 나이든 사람
    • 거울뒤에서는 남자에게 기대서 말을 듣고 있는거같은 느낌?

    표현형식

    화면에 있는 것을 보는 즐거운 - 직접 눈으로 보는것같이 보이지만, 뒤에 거울에 비친 원경은 불분명해보이는, 결국 물감이 어떻게 발라지고 색채와 구성을 보게 되는 것이지, 원근법(입체감) 대신, 보는 사람에게 화면자체의 평면적으로 샇여있는 것을 보게 한다는 것. 주제의식보다는 그것이 시각적으로 어떻게 달라지고 비쳐지는가.

    공간 - 라파엘의 아테네 학당과 비교 - 그림이라는 것이 창밖을 내다보는 것 같은 똑같이 비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화면 자체에 어떻게 물감이 발리지고 하는가를 보게 되는, 이것이 새로운 그림을 보는 방법.

    t.j. clarke에 의해 - 노동계급의 여성, 그리고 성을 돈으로 사는 현장

    모더니티의 주체는 남성이고, 여성은 더 아래라는 것이다.

    근대에 플란넬들은 남성이다. 그리고 일하는 여성은 어디다 넣느냐.

    당시엔 일하는 여성은 여성이 아니다. 라는 것. 양쪽에 분명히 위치하지 않은 유동적 위치가 이 여성들의 위치.

    드가 - 요즘은 발레리나가 예술가에 속하지만, 그당시엔 노동자. 화가의 모델도 언제나 화가와 성적 관계를 가능성에 두고 있는 상태다.

       

       

       

       

    영국

    James Whistler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 런던으로 건너와 라파엘 전파와 친하게 지냈고, 빅토리아시대의 물질주의를 배격했던.

    • Music Room 1860
      • 거울에 반사된 여자. 또한 검은색 옷을 입은 여자의 실루엣에서도 세련된 구성을 볼 수 있다. 친밀감있는 실내 장면이면서 굉장히 informal하다. 화가가 그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 것이 아니라 한순간. 평범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형태와 형태,
      • 구성이 아주 추상적. 디자인 감각이 느껴짐. 실제로 구성을 보면 삼차원이 아닌 이차원. 커튼등의 패턴도 훌륭함 아주 감각적으로.
      • 앵그르와 같은 선의 형태를 중시.
      • 그러면서도 광선에 대한 관심
      • 동양의 도자작품 - 보스턴 출신. Boston orientalist라는 말도 있다. 한때 보스턴은 세계적으로 동양미술 콜렉션이 가장 많은 곳이다. 또한 일본 판화도 잘 알아서, 여태 보던것과는 다른 감각의 그림이란 걸 알 수 있다.
    • Symphony in white #1 The White Girl 1862
      • 그림을 소리, 음악으로 생각했다.
      • 여성이 입은 흰 옷이 있고, 뒤에는 조금 더 어두운 흰 배경이 있고, 그밑엔 모피가 깔려있고, 그밑에는 카펫이. 하나의 하모니.
      • 또한 붓을 길게 길게 사용해서 마네같이 짤막하지 않게 칠했다. 조금씩 뉘앙스가 다른 색에서, 또한 전체적으로 흰색에 머리카락은 갈색으로 써서 얼굴을 돋보이게 하는 것. 구도상으론 여성의 얼굴이 중심이 되게 만드는
      • 인물의 전신상을 이렇게 그리는 것은 스페인 영향이 있고
      • 색채와 대조를 중요하게 생각.
      • 이사람은 휘슬러 애인.
    • Caprice in Purple and Gold, : Irish Geisha, 1864
      • 청화백자, 옷이 이국적. 동양풍.
      • 동양적+19세기유럽취향이 혼합된 느낌
      • 옷등의 프린트 패턴도 디자인적 취향
      • 여태까지 이렇게 비대칭적인 자세로 앉아있는 여성상도 없다. 세련됨. 누구보다 이런 면에선 뛰어났다.
    • Caprice in Purple and Gold, The Golden Screen, 1864
      • 일본의 금칠병풍 배경으로
    • Arrangement in Black And Grey 1871
      • 원래는 어머니 초상이지만 검은색과 회색의 배열.
      • 보통 초상화라면 얼굴을 통해 그 사람의 성격을 묘사한다지만, 얼굴은 측면만 있고, 손을 모은 모습, 자세, 전체적인 흑과 백의 배열, 도한 배경의 액자 등. 전체적인 느낌이 이 사람의 성격을 보여줌. 수다스럽지 않고 그런 .
      • 이 그림의 모델이 누구인지가 무슨 상관이냐, 보이는 대로 그린다면 화가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 묘사적인것보다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중요시한 것이다.
      • 그런데 이런 개념이 pre-raphaelite의 영국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개념인 것이다. 프랑스는 이해는 못해도 마네의 그림을 보면 art for art sake가 나오는데 영국은 처음인 것이다. 휘슬러는 프랑스에서 영향을 받고 그렸다. 그런데 제목을 이렇게 대놓고 짓는 걸 보면 오히려 더 앞서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황금분할 - golden section 대체적으로 1:3:5
      • 색채도 - 검은색 흰색 회색 등 굉장히 현대적 배합. 질감도 조금씩 다르고,
      • 이사람의 생각은 오늘날의 total design이다. 사진의 사인도 나비로 사인했다. 이런 사람은 요즘의 window display 같은거 잘할거다. 추상적 감각이 뛰어났던 사람이었음에 분명하다. 이것이 현대미술의 기본 개념이 된다.
    • Whistlerm nocturne in Blue and Gold, Old Battersea Bridge, 1875
      • 푸른색과 황금색의 녹턴,
      • 젖은 표면 위에 물감을 했기 때문에(마른위에 바르면 얹혀져있게 보이는데) 캔버스 안으로 물감이 가라앉아보여서 광선과 어둠이 화면을 가로지르는 런던 야경의 황홀한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이 그렸고, 당시 이것을 본 사람들이 보기엔 완성품이 아닌것처럼 보였다. 이 것을 전시했는데,
      • 존 러스킨의 평(철학자, 문인, 평론가. pre-raphaelite나 터너를 잘 이해했고, bernard 리치와 함께 일본민예운동에도 영향을 많이 준 사람)
        • 물감냄비를 뿌린 것 같다 이렇게 제대로 그린것같지도 않은것이 200기니나 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다고 했다.이래서 휘슬러가 소송을 걸었다. 명예훼손. 판사 왈, 당신 이 그림을 그리는데에 며칠 걸렸느냐, 이틀이다. 이틀에 200기니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것은 내가 일생 배운것에 대한 가격이지 이틀이 아니다. 결국 이겼다. 판사의 판결은 - 니가 이겼으니 러스킨은 휘슬러에게 1/4페니 줘라. 해서 승소. 소송비용이 너무 들어 파산했다. 그러나 러스킨은 너무 시달려서 그 후 정신불안에 걸렸다고 한다. 자존심도 강하고 투쟁적. 책을 썼는데, Gentle way of making ways 책에 보면 소송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이 된다. 미술이란 것이 이런거구나 하는 art for art sake가 이해되는데에 중요한 사건이다. 그림과 색과 구도는 일화적 화면과 관계없이 추상적 가치는 그자체로서 존재한다고 했다. Symphony harmony 등 사실대로 보여주는것보다 그림을 그자체로서 보길 원하는.
    • Nocturne in black and gold, falling rocket 1875
      • 강가가 보이고, 사람이 서있고 불꽃놀이.
        • 무엇을 그렸는지 알기가 어려운, 하지만 황홀한 불꽃 야경 등이 보인다. 아까그림보다 형태가 더 없어져서 알아보기 힘들다. 형태가 녹아들듯함.
    • Nocturne in blue and silver
    • Nocturne in blue and gold: St.Marco 1879-80
      • 그림이 매우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수ㅏ 있다.
    • The Peacock Room
      • 레이 랭드라는 콜렉터와 친해졌는데, 이사람이 동양미술콜렉션이 붐을 일으켰다. 처음엔 중국 나중엔 일본. 자기의 집 한구석을 중국도자전시실로 만들고 싶대서 방을 리모델링해달라고 했는데 마음에 안들어서 레이랭드가 휘슬러에게 다시 리모델링하라고 해서 하다가 마음대로 다해버렸다.
        • 휘슬러 왈, 너는 나중에 아무도 기억못하겠지만 내작품은 영원히 기억될거다. 당신은 내덕에 유명해질거다. ㅋㅋㅋ
      • 패널 아무로 되어잇어서, peacock공작새 방. 공작새로 디자인해서. 공작은 동양적인 새인데, 마지막에 그린것이 두 공작이 싸우는데, 돈을 쥐고 붓을 쥐고.. 찬장같은 가구들을 세워서 중국도자를 던시. 토탈디자인의 개념이 여기서 보이고, 자시이 그린 그림을 붙여서 - <도기나라의 공주>라는 제목의 유화를 그려서 방한군데에 그려넣었다. 도자기 콜렉션
      • 나중에 찰스 프리어(미국)가 방전체를 사서 디트로이트에 있는 자기 집에 방을 고스란히 옮기고, 모든 컬렉션이 지금은 스미스소니언의 asian collection freer gallery에 옮겨져있다. 프리어가 한국소장품도 샀단다.
      • 중간고사 범위는 여기까지이다.
      • 지금부터 하는 인상주의는 학기말고사범위이다.

           

    드가Degas, (Hilaire-Germain)-Edgar

    (1834.7.19,法国 巴黎~1917.9.27,巴黎)

    이사람도 일종의 플란넬이고, 인상파들과 같이는 지냈지만 이사람은 어찌보면 사실주의화가라고도할수있고, 아버지가 은행가라 부자. 팔기 위해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다.

    르누아르와 드가 모두 여자를 많이 그렸는데, 르누아르는 뽀얗고 아름다운 그런 여자인데 드가는 어딘가 ugly한 여자를 그렸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 독신. Misogynic 혹은 게이라는 오해를 샀다. 가장 숭배했던 화가는 앵그르였다. 아버지가 앵그르를 만나게 어린 드가를 데려가니 앵그르 왈 draw lines라고 이야기했단다.

    이사람이 다른 인상파와 다른점은 고전을 잘알고 뎃생력이 뛰어난점 표면적 인체구조를 탁월히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는데, 1860년대에는 다른 화가들처럼 도시가 화제가 된다. 거리 카페 승마장 오페라. 이런곳에서 스케치를 하는데, 인물들이 단단하고 고전적인 그림들. 이사람은 단편. 전체 삶에 대한 그림보다 어느 단편적인 장면을 보여주는데, 나중에 인상파들과 함께하면서 색채나 빛에 민감한 그림 그렸지만 여튼 기억을 더듬어그리거나 드로잉은 다른 인상파와 다른 사람. 전형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 벨렐리 가족, 1859
      • 이태리계불란서 가족. 벨렐리가족은 드가 친척. 아버지가 정치적 망명을 이태리에서 하고 있었고, 드가가 이태리 벨렐리네 가서 그린 것이 가족그림. 매우 특이한 그림. 아무도 가족그림을 이렇게 그린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그림이 두개로 나뉘게 느낌이 서로 다르다.
      • 검은 옷을 입은 여자는 상을 당한 듯, 검은옷을 입은 여성이 굉장히 눈을 띄게 하고, 애가 둘이 있는데, 아버지가 소외되어있다. 아버지는 편안해보이지도 않고 긴장되어보임. 전체적으로 왼쪽은 굉장히 견고한 구도인데, 저쪽은 이상. 엄마중심의 집안에, 아버지는 이 가족에 참여하기 불편한듯한 느낌이 "구성과 양식'을 통해서 나타난다.
      •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워보이지만 어찌보면 갈등이 보이고, 심리적인 해석이 나온다. 드로잉능력, 고전주의적 사실묘사가 잘 나타난 초기그림.
    • 국화와 여인 1865(처음에 58년에 그릴때는 정물만 그렸다가 나중에 여자를 추가해서 살롱에 내었다. )
      • 드가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세계를 항상 거리를 두고 보았다. 굉장히 관심이 많다. 한 계급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귀족, 빨래하는여자 카페 여자 , 창녀 등. 자기 눈에 보이는 파리의 생활을 그려서.
      • 65년살롱전에 낼때 반응이 안좋았다. 이것이 초상화냐 정물이냐 . 여자도 몸 정물밖에. 고전적 정면관에 가운데 나와야 하는데 여자는 정물 구성에 한 부분으로밖에 안보인다. 아무 인물이나 그렸다 하기에는 너무 한 개인의 초상 느낌이 강하다. 어디를 보아야 하나, 꽃과 여인을 번갈아 보게 되어,
      • 여태까지 인물이 항상 중요하다는 거기서 벗어남. 꽃 자체를 보면 뒤에 있는 벽지의 패턴과 또 경쟁이 된다. 이런 구성이 우연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림에 있는 모든 게 다 중요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후 인상파 이후로는 초상화가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데, informal 하게 보인다. 화가가 모델을 선 사람을 그리고 그런 것이 아니라 우연한 한 초상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 여기서부터이다.
    • 파리의 오케스트라 1869
      • 드가의 그림에서 항상 보이는 것 - 왜 이것이 우연한 긤으로 보이냐, 그것은 각도때문이다.
      • 들라크루아 다비드는 정면에서 보이는데, 드가는 약간 옆으로 본것같은 각도이다.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이 다 잘린다.
      • 오케스트라 단원을 보면 하나하나 다 정확한 초상화처럼 묘사했고,
      • 뒤에 있는 무용수와 중간 사람들의 거리를 보면 공간의 축도가 상당히 앞으로 압축되어 있다.
      • 터치또한 저 뒤 무용수는 거친 터치이고 이 앞은 정밀히 묘사.
      • 드가의 플란넬 같은 그림.
    • 경마장의 마차 1870-72
      • 그냥 우연히 찍은것같은 자연스런 장면.
      • 마네시대와 다른 1870년대의 미술시장 상황. 이당시엔 화랑이 생겨나는데 베르넹 죈느, 뒤랑 뤼엘 등이 생겨서 인상파 화가들이 자기들끼리 전시를 하게 된 것도 살롱의 권위가 퇴색되고 살롱없이도 판매가 되는 것이다.
      • 이그림엔 디테일 묘사가 없다. 세부를 정확히 묘사하려는.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저것. 한 가족으로 보이는데, 가족의 초상화냐 풍경화냐. 매우 비형식, 인포멀 한 순간을 잡은 것 같은데,
      • 거리감에 맞추어서 recession은 자연스레 나타나보인다.
        • 혹은 저 뒤 사람은 심하게 작아보이는데, 일종의 포커스 느낌이 아닌가. 당시로서는 상당히 신선한 시도, 카메라 줌렌즈(안좋은 렌즈는 주변 뒤가 작아보이듯!)
      • 말은 앞을 보고 그뒤 사람은 뒤를, 그뒤는 앞을 이렇게 리듬감 재미가 있다.
      • 빛의 색 - 마차 바퀴에 비친 햇빛 반사광. 말 털에 비친 색.
      • 여자 두명 - 아이를 안고 있다고 어머니는 아니다. 아이는 키우는 보모가 있어서 엄마라는 것은 없다. 유모와 어머니일 수가 있다.
      • 그래서 드가는 아마 누구보다도 구성력이 뛰어난 사람이고, 우연한 것 같지만 그거운데에서 굉장히 계산된 우연한 구성으로, 우연히 보이지만 그림의 균형이 잘 맞는 특이한 구성으로 보일 수 있다.
    • 콩코르드 광장 1875
      • 여기서도 보면 그
        • 사진처럼 사람이 반 잘려버리네,
      • 플라네르의 전형적인 타입의 남자로 보인다. 우산을 들고 슬렁슬렁 산보하는 사람. 애를 데리고 산보하는 사람.
        • 남성이고 무명인 상태에서 거리의 일어나는 일을 보는 사람 빨리 걷지 않고 개를 데리고 천천히 다니고.. 결국 왜 이런 사람들이 일어나냐면 - 삶의 속도가 빨라지게 되고,
          • 옛날사람은 약속을 하면 점심먹고 한참 뒤에 보자. 저녁먹고나 보지. 이랬는데, 기차 증기선이 나오면서 시간에 따라 살기 시작하고,
          • 옛날처럼 fashion, 백화점 카다로그가 나오면서, 전반적으로 도시가 제조 교역이 아니라 소비 전시 볼거리 중심의 도시로 가는거다. 이것이 형성되려면 중산층이 있는 곳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접촉없이 무명으로 혼자 관찰.
          • 여성은 이런 플란넬에 해당없다.
    • 압상트를 마신 사람들 1876
      • 처음에 보면 잘 모르는데 정신이 오락가락해보임. 여염집 규수가 아니라 거리를 돌아다니는 여자.
      • 마네도 정면에서 그렸지만 여기서는 마치 카페에 앉아있는 사람이 카메라로 찍은것처럼, 그사람이 본 시각으로 본것처럼, 그리고 그것도 약간 내려다보는데 위에 보이는 시점으로 보였다. 똑바로 보지가 않네. 이런것이 일본 판화에서 나온다. 스즈키 하루노부 - 천정을 벗겨낸 안을 내려다보듯.
    • 1876 프리마 벨라
      • 수석무용수라는 제목. 수석무용수가 춤추는 것을 저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각도. 드가의 그림에 무대그림이 많은 것이 각도가 여러가지이고 조명이 세기 때문에 드라마틱한 모습이 나타난다.

           

           

           

   

   

12강

2010년 4월 12일 월요일

오후 1:52

   

<<12강.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4월 12일 월요일 오후 2:01

이다음월요일 중간고사. 공부할작품은 ETL

85작품정도이다.

  • 시험은 IDENTIFICATION문제. 슬라이드테스트. 작가 작품 연대
  • 비교문제

       

    기본적으로 정확하게 연대를 외워라.

  • Prima 발레리나
    • 이사람이 발레리나를 그린 이유
      • 소재 - 재미있다. 실내의 인공광선, 특이한 각도(특히 위에서 내려다보는), 여러 사람들이 무리로 나타나는 것, 순간적인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 고전에서는 항상 이상적인 움직임에 관심이 있었지만, 이 사람은 순간적인 행동, 하지만 나름의 균형이 있는.
    • 여기서도 보면 올라가고 내려가는 시점(우키요에같기도 하고- 압상트나 발레리나나), 스냅샷같은 구성, 광선이 비치고, 인상파들과 어울리니까 조명에 빛이 반사되어 나타나는 효과등도 관심이 나타남.
    • 드가는 실제 연습실에도 와서 스케치를 많이 한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은 그 순간에 바로 그렸기 대문에 스케치를 안했지만, 드가는 고전에 근거해 그려서 스케치를 많이 했다. 드가가 매일 와서 그림을 그렸다.
    • 발레하는 사람들은 자세가 똑바르고 흐트러지지않는다. 쉴때도 흐트러지지않는다.
  • 댄스 레슨, 1872
    •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이것은 굉장히 계산된 공간과 구도이다. 공간의 명료성과 균형이 완벽하게 보여진다. 방의 공간 안에 인물이나 사물들의 배치와 향해있는 방향이 흐트러지지 않게 해주는 것이 의자이다. 인물이 적은 쪽의 사람은 반대쪽의 많은사람보다 큰 인물로 그려서 균형을 맞춘다.
    • 자연스럽지만 정지되어있는 순간.
    • 머리등도 거의 수평을 맞추어 되어있도, 그림안에 균형을 맞추어 배치.
    • 균형과 움직임이 잘.. 구성은 드가가 최고.
  • 발레 연습, 1874
    • 시대칭적이지만 저 뒤와 오른쪽 앞이 균형이 맞고,
    • 광선에 따라 반사되는 빛과 색이 보이고
    • 이때부터 파스텔을 많이 사용했는데, 이사람이 눈이 잘 안보이는데, 거칠은 파스텔 눌러진것을 많이 사용하게 된다. 이 그림은 파스텔-오일 혼합소재. 파스텔은 가루이기 때문에 나중에 없어지기가 쉽다 이사람이 헤어스프레이같은 용액을 개발해서 파스텔의 단점을 극복해서 겹겹히 파스텔이 채색-고정-채색-고정한 작품이 있다.
    • 드가는 보수적인 사람이었고, 용액에 무엇을 넣는지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서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스프레이 비슷한것을 썼을 것이다. 하고 추측된다.
    • 초기에는 사실주의화가들과 유사한 관심을 갖지만, 18xx년에 인상파화가들과 함께하게 되는데, 드가는 인상주의들과 어울려서 득될 것이 없었다. 아방가르드라서. 그러나 드가는 이사람들이 새로운 움직임을 시작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빛과 순간적 우연한 장면등에 공감을 느꼈기 때문에 같이 활약하게 되어, 74-86년까지 종종 8번 전시에 전부 참여했다(모네는 나중에 떠나고)
    • 이들이 주로 모였던곳이 guerbois괴르보아 - 약간 귀찮은 존재였다. 많은 사람들이 드가를 좋아했지만 드가는 좋고싫고가 솔직했고, 부유하고 작품을 팔 필요가 없어서 그런지 잘난척을 했단다. 어쨌든 같이 활약했다. 여튼.
    • 드로잉
  • 14years old little ballerina
    • 주로 조소를 했고 대부분은 흙으로 빚어놓은대로 남아있다,
    • 이것은 청동으로 주조한 실제크기.
    • 옷을 그대로 입혀놓았다
  • 1886 머리를 빚는 여인
    • 인체는 기본적으로 인상파의 주제가 아니다. 고전적인 주제인데, 이사람이 보는 인체는 균형을 중시. 하지만 앵그르에서 보이는 정교 감각적 아름다움에는 관심이 없다.
    • 앵그르의 터키탕과 비교해서, 몸과 허ㅣ 팔 다리가 어떻게 움직이고 이런것을 관찰했던 사람인데, 어찌보면 뛰어난 관찰자였다.
    • 르누아르의 수욕도 - 인상파긴 하지만 상당히 전형적인 고식의 누드를 계승하고 잇고, 즐거운 여성들의 야외에서의 그런 느낌이 강하다.
    • 드가의 그림은 - 앞을 보는 누드는 전혀 없고, 이상화되지도 않고, 남을 의식하고 있지도 않다. 앵그르 그림도 보면 앞에있는 관람자를 의식하는, 약간 폼도 잡고. 르누아르도 그렇다.
  • 욕조1886
    • 또한 드가의 누드는 실내의 누드(보통은 자연이나 침대였지만!). 목욕하는 목욕탕이 아니다. 대야에서 목욕하고 있고
  • 목횩후 머리를 말리는 여인
    • 텁이 있지만 침실이나 실내에서 말리고 있지만, 과연 이사람들이 그렇게 실내에서 목욕을 했는가 - 그렇지 않다.
    • 대부분 사람들은 대중탕을 갔고, 물사정이 나빴는지 한달에 한번이상 목욕하는것은 피부에 나브다고 생각했다. 목욕을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사람들은 다 매춘부였다. 그래서 전에는 여기 나오는 여인들이 가정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저들이 매춘부로 볼 수 있지 않냐는 의견이 많이 나왔다. 게다가 등을 돌리고 있어서 남에게 보여지는것을 거부하는 듯 하고.
    • 드가의 말에 따르면 이들의 그림은 vision은 key-hole vision이다.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보듯 자기자신이 들여다본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채 움직이는- 시점은 위에서 내려다보는것이 좀 많고, 남성의 시선에 수동적인 대상인 자세이고, 모두 굉장히 불편한 자세이다. 전통적인 예전의 그림들은 아름다운 자세를 취하는데,
    • 파스텔 - 손으로 문지른, 직접적인 하나의 터치가 몸에 닿은 신체적 접촉이 암시되어있고, 굉장히 특이한 누드.
    • 색채, 거친 터치, 강한 선과 누드는 화면의 하나의 추상적인 구조가 되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 그래서 앵그르의 아름다운 윤곽선은 다 사라져버리는 그런것이 이사람의 후기 누드이다.
  • 욕조
    • 거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원래 이거 목욕하는 방의 환경이 아니다. 중산층 여성으로 보기 어렵다.

         

         

  • Boudin, trouville의 바닷가 1865

    외젠 부뎅 - 모네와 연결이 중요한 사람이다. 모네는 중요한 인상주의 화가인데 태어난 곳이 노르망디. 프랑스 사람들은 노르망이라고 - ㄱ고집센 사람들.

    • 10대후반의 모네는 드로잉실력이 상당히 좋아서 신문의 캐리커처를 그리는 일을 했다. 굉장히 잘 그림. 부뎅이란 사람이 어느날(나이많은) 모네의 캐리커처 그리는거 보고 칭찬을 하면서 같이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자고 했다. 모네는 피하다가 할 수 없이 한번 가서 그렸는데, 바로 그날 내 눈이 열렸다고 한다. 그때부터 모네는 풍경화를 그리게 된다.
    • 부뎅은 파리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지만 50 60년대 르아브르(노르망디근처)항구를 돌아다니면서 바다풍경을 많이 그렸다. 노르망디 해안의 특징은 깎아지른 절벽과 파도가 세서 험한 해안.
    • 해변의 여인이나 그런것을 그렸는데, 이것이 아직도 인상파와 달리 어두운 빛이 많이 보이지만, 생생한 느낌, 거친 파도나 하늘등 역동하는 기후 광선 등이, 거칠고 스케치한듯한 느낌이 드러난다. 어쩌면 바르비종사람들과는 또다른 그런것이다.
    • 전반적으로 회색 톤이 많은데, 순간적인 변화나 터치가 굉장히 멋있다. 잔 붓터치로 구름과 파도의 순간적인 형태를 잘 잡아냈다.
  • 모네, 바다 풍경, 폭풍우 1866-67
    • 바다의 순간적인 느낌.
    • 색채 어둡고 무거운 느낌. 터치도 두껍고. 그런것은 옛날에 쿠르베의 풍경화와 상당히 비슷하다. 초기에는 이런식의 것은 초기에. 형태에 집중하느라 중량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밝고 어두움의 대조로 자연을 이해하는 초기의 작품들이 여기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 시기는 dark impressionism이라고 말한다. 어떤사람은 pre라고.
    • 쿠르베, 바르비종, 부뎅 등의 영향을 받는 시기. 여기서 광선에 따라 색채가 변한다는 레슨을 받고.
    • 이시대에는 집에서 조절을 하지만, 아직까지 형태질감 무게에 관심을 갖던 것을 알 수 있다.
  • 1867, 모네, 정원의 여인들
    • 아까와 같은 무거움은 없어졌다. 붓터치가 훨씬 작아졌다. 더 빨리 적용이 된다. 훨씬 시각적인 느낌이 강조가 되고, 형태가 확실하다.
    • 먼데 있는 여자를 보면 아직까지는 형태와 주변 공간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수준에 머물러있지만, 대개는 빛의 효과에 대해 관심이 많이 보인다. 나무사이, 그림자속으로 들어오는 빛 이런것이 보인다. 볼륨감이 보이지만 그래도 형태와 바르는 것에서 탈피.
    • 어두운 검은색이 아닌 색을 가질 수 있다는 이해가 있게 되고, 결국은 자연에는 검은색이라는 것은 없다. 검은색을 화면에서 많이 추방하게 되는 것이 여기서 시작하게 되고,
    • 또 운에 띄는 것이 옷. 패셔너블한 드레스, 줄무늬, 상당히 멋있는 것을 (대중적인 패션잡지에서 참조)-이것도 근대성을 볼 수 있다. 생생한 광선의 느낌이. 보인다.
  • 1869 la grenouillere 라 그르누이에르
    • 검은색이 많이 없어져서
    • 이때부터 르누아르와 캔버스를 놓고 같이 그리게 되어
      • 르누dkfm 1869
    • 중산층의 여가를 즐기는 모습.
    • 물 - 물은 항상 움직이고 반짝거리고 인상파 화가들의 주제. 색이라는 것이 보면 햇빛에서 받는 것도 있지만, 받는 형태에 따라 도로 반사할수도 흡수할수도 있다. 요즘 유행하는 반짝거리는 옷을 보면 반사하게 되어있고, 흰옷입은 사람에 옆에 있으면 그사람은 광선도 받지만 옆에있는 색의 영향도 받는다. 이런것을 훨신 세밀하게 이해하게 되고, 이제 중요한 것은 색채를 섞어쓰지 않는다. 예전에는 정확하게 연두색을 그렸는데, 이젠 섞을 시간이 없어 바로 원색을 칠해서 옆에 노랑원색을 칠해서 관람자의 눈이 그것을 섞어서 연두색으로 보게 된다. 화면에는 원색 순수한 색이 발라지게 되니깐 화면이 훨신 생생하게 느껴진다. 인상파 그림은 어제 칠한것같은 신선함이 보인다.
    • 어느시각이냐 아침 점심 오후냐 비오는날이냐 무엇이냐. 색이라는 것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유동적인 것.
    • 르누아르와 비교 - 대체적으로 많이 이야기하는것은 어느쪽이 더 사람의 형태가 명확한가 - 르누아르다. 르누아르는 인물이 더 중요하다 로코코의 부셰등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인물을 포기할수가 없었다. 확실하게 좀더 정의가 내려져있는 반면, 보트 집 나무와 마찬가지로 인물이나 이런것은 모네에게 그냥 빛을 반사하는 표면에 불과하다.

         

  • Monet, beach at trouville 1870
    • 형태가 큼직큼직, 햇볕이 위에서 내려오고, 얼굴부분에 그림자가 생기고, 나머지는 그림자가 안생기는 부분. 여기를 보면 형태가 없어져버린다. 빛에 의해서 가운데 옷은 윤곽선이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눈이 부셔서 정확한 형태를 알아볼 수 없듯이. 흰색은 옷의 색이 아니라 햇빛의 색이라 할 수 잇다. 의자의 이것도 의자의 색이 아니라 햇빛의 색.
      • 이때만해도 햇빛의색을 흰색으로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더 분화.
      • 형태는 빛속에 녹아들어가버리고
  • Monet, the boat ar argeteuil 1875
    • 색으로 대체해버리려는 것이, 이것을 보면 완전히 발달된 인상주의다 라고 할 수 있다
    • Divisionism완전히섞어서 칠하는 것이 아니라 분할되서 칠하게 되고, 각 붓터치는 획을 간직하고 있어서 섞어진 것이 아닌데 멀리서 보면 섞여보인다. 색채가 더 생생하게 보인다는 것이 인상주의의 교훈. 74 75 이무렵엔 붓터치가 전 화면에 퍼져보인다.
    • 전형적인 인상파가 나타나는거임.
  • 해돋이, 인상
    • 74년 인상주의화가들이 모여서 - 원래는 코로도 초청할예정이었는데 무산 마네는 참가 안함
    • 첫번째 인상파 전시는 나다르의 사진스튜디오에서 열리게 되고, 여기 참여자는 30명정도. 전시이름이 인상파가 아니라, 화가 조각가 판화가의 연합이라는 이런류의 anonymous society of art이렇게 한사람이 여러점 165점 작품이 전시가 되었다. 거기 낸 작품이 모네의 해돋이.인상이란 작품 연대는 72년이지만 74년전시에 출품.
    • 이것을 본 사람들은 굉장히 놀라워한다. 아무도 이것이 완성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앗다. 스케치에 불과하다고 비판. 과격한 젊은 청년들이란 인상이 보였고, 임신한 여성은 보지를 말아라 충격받는다 ㅋㅋ
    • 이작품에서 인상주의란 조롱한 의미. 본질을 그린것이 아니라 단지 눈에 비쳐진 인상에 그쳤다는 것
  • Monet, blvd. Capuccines, 1873
    • 이사람들은 도덕적 가치나 그런것에 관심이 없고, 굉장히 중산층적인 가치관을 가졌다. 새로움에 대한 매혹과 만족, 그래서 처음에 인상파 화가드링 많이 그린것이 근대화에 관심. 오스망에 의해 이루어진 도시화에 관심을 보여주고 잇다.
    • 눈으로 관찰하니까 이 세계가 끊임없이 달라지고 그리고자 했는데, 카푸친대로 - 사진작가 나다르의 스튜디오에서 대로를 내려다보고 그린 그림. 새로운 도시에 대한 매혹, 근대성을 표현하고 있어서 물질적인 외향적으로 변한 이런 것을 추구했지, 정신적인 것을 추구한 사람은 아니었다.
    • 이 그림을 본 사람이 믿을 수가 없어서, 내 안경에 물기가 서렸나 해서 안경을 닦았다. 흐린날의 흐린 그림을 그려서 익숙치 않다고. 파리의 기후가 대체로 이렇다. 겨울에도 부슬부슬 이러고. 작은 터치 자잘 섬세.
  • Monet, gare st.lazare 1877
    • 생라자르 기차역
    • 새로 지어진 건물과 근대적 힘과 에너지, 소리 소음 이런것을이 이사람들이 매혹단한 도시의 변화.
  • Monet gare at.lazare 1877
    • 1880 년대 오면 1870년대까지만 해도 굉장히 행복하게 생각했다. 전례없는 positive. 80년대 오면서 정신적인 것을 찾게 되고 너무 물질적인 것이 아니냐라는 생각으로 모네는 교외로 나가게 된다. 도시에서 나와서. 지베르니 파리 기차 한시간 교외에 집을 사서 정원을 가꾸고 그후부터는 모네의 풍경은 도시를 떠나게 되었다. 이쯤되면 모네그림이 화랑에서 많이 팔려서 음 모네가 제일 잘 팔렸다. 근대적인 화랑제도때문.

         

   

   

13강

2010년 4월 14일 수요일

오후 1:58

   

<<13강.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4월 14일 수요일 오후 2:00

   

   

  • 파라솔을 쓴 여인, 1886
    • 1870년대에는 도시적 삶,
    • 1880년대에 오면 인상주의 화가들 사이에 변화가 온다.
    • 모네는 도시에서 자연으로 관심이 변화하고..
    • 이 그림을 보면 같은 날 다른 시간에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의 그림은 빛의 반사때문에 어느부분이 잔디고 옷이고 형태가 무너져있다. 옆의 그림은 약간 노란빛이 드러나있다.
      • 원색의 초록 노랑색을 캔버스에 직접 바르게 되고, 그래서 색이 훨신 밝아지게 된다. 이것이 가능해진 것은, 산업혁명으로 캔버스가 공장에서 대량으로 나오게 된다. 공장에서 흰 캔버스가 나오게 되고, 튜브에 담은 물간이 나오게 되는 것도 이 시대. 그림의 도구가 간편해져서 야외에 나와서 그림을 간편하게 그리는 것이 쉬워지게 되었다.
  • Rouen 대성당 1893
    • 루앙에 있는 고딕 성당. 육중한 돌로 만든 건물, 모네가 그린 그림은 같은 성당이지만 색이 매우 다르다. 고정색(local colour) 고유색이라는 것은 원래 없다는 것. 색이란 옆에 어떡 색과 대비되는가, 비추어지는 빛이 어떤 색이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고,
    • 이것은 성당을 그린 것이 아니라 성당에 비춰지는 광선을 그린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검은색은 없어져버리고, 붓터치가 예전보다 훨씬 작아졌다. 그림 전체가 붓터치로 덮히게 된다.
  • 지베르니의 건초가리, 해질녘 1888 아침1891
    • 표면이 2차원적인 패턴이 되어서, 완전히 인지하기 어려운 미세한 색채분할로 나타나게 되고, 형태가 사라지게 된다.
  • 1891 포플라 시리즈

       

  • 모네의 집, 지베르니(사진) 1883년에 이사
    • 연작을 하게 되면 점점 눈에 비친 것만을 그리던 초기와 달리 (objective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눈에 비친 것을) (모네는 머리도 심장도 없다고 평을 한다 하지만 얼마나 대단한 눈을 가졌느냐)
    • 1880년대에는 통일된 분위기를 가지게 된다. 이 연작에서 나타나는 것이 자주색ㄱㅘ 푸른색이 많아져서 전체적으로 통일된 분위기를 가지는 것이 이 때 연작.
    • 1870년대 과학과 실증주의 물질주의로 세상이 발전할 것이라는 것이 1880년대에는 사라지고 이 경향과 연관이 있다. 1883년 이사, 파리 화가들과도 거의 연락안한다. 지베르니에서 죽을때까지 거의30년을 살았다.
    • 스케일이 작은 그림들을 그리다가 1906년쯤에는 스케일이 큰걸 그리게 되고 , 나중에는 엄청난 큰 그림들을 그리게 된다. 큰 캔버스를 하기 어려우면 두쪽의 캔버스를 그리게도 된다.
    • 수련 바깥과 물 안과 물 표면이 다 비치는 광경.
    • 처음에는 눈이 좋아서 멀리서 그리는데, 점점 눈이 나빠지면서 물에 가갑게 놓고 그려서 작품도 점점 물에 가까워지게 (바깥세상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그려진다.
  • 1904 수련
    • 수련이 뜬 물에는 외부세계가 보이고, 색채의 조합만으로 이루어진 화면을 보여준다. 순수한 시각경험. 완전히 시각경험 그 자체로 우리를 감동시킨다.
    • 드뷔시도 인상주의에 감명을 받게 된다. 초기에는 인상파였다가(물의 반영, 성당) 후기에는 상징주의로 간다.
  • 1904 수련
    • 점점 수면으로만 프레임을 잡고, 초기와는 달리
    • 후기작품
      • 초기와는 달리 푸른색 자주색의 공통색조가 나타나고, 그림도 커진다. 집에서 계속계속 만들어서 완성하는 - 그러므로 주관적인 의도도 많이 들어가게 된다.

           

  • 1910년대 수련그림
    • 이시기에는 마티스 피카소 나오는 시기. 이시대에는 모네 드림도 추상적으로, 나중에는 표현주의적으로 간다.
  • Moma 수련 작품(캔버스 3개 대작)
    • 1910년대20년대 들어가면 인상주의가 아니라 완전히 작가의 주관적인 작품이 된다.

         

         

    르누아르

    르누아르는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지만, 아직도 인체를 많이 그렸고, 인간생활의 유쾌하고 아름다운 면을 그렸다. 가장 대조적인 것이 드가와 르누아르. 드가의 여인들은 르누아르처럼 예쁘지도 않고 단편에 관심을 가졋다면, 르누아르는 인생은 충만함,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꾸미지 않는 자세를 보여주는 이것이 이사람의 특징적인 것이다. 특히 이 사람은 로코코미술, 부쉐등의 그림을 많이 묘사한다. 18세기 로코코. 달콤한 색조가 있는데 이것이 르누아르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부쉐는 작위적인데 르누아르는 자연스럽게. 70년대에는 인상주의의 광선의 효과에 빠지게 되지만, 이사람에게서는 항상 여성과 아이들과꽃이 나타난다. 일종의 대지, 삶을 상징, 번명 번성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것이 프랑스미술에서 전통적으로 나타나는 신비 즐거움과 찬미의 대상이라는 것이 프랑스에서. 독일에선 힘들고. 여튼 인간관계의 예민함 이런것을 잘 그렸다. 그래서 대부분이 아는 르누아르의 그림은 1870년대의 화려한 색 부드러운 피부 따뜻한 색조 이런것으로 알고 있다.

       

  • Le grenouillere 1869
    • 모네와 같이 놓고 그린 그림.
    • 빛에 대한 관심이 보인다. 그림자가 광선이 비치는 것보다 어두운것만은 아니다. 광선이란 굉장히 많은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 모네는 순간적. 르누아르는 좀더 우연성보다 균형잡힌 그림을 하려. 전통의 기반이 있는 화가였기 때문에. 터치가 잘게 분할
  • Monet painting,renoir
    • 르누아르가 그린 모네의 모습. 터치가 훨씰 잘게 분할.
  • Molin de la galette 1876
    • 여기서도 보면 모네가 이런 그림을 그렸다고 상상하기 힘들다. 인물과 인체가 많이 등장한다. 인간생활의 단순함 가운데서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 초록색 나무 사이로 빛이 내려와서, 사람들에게 빛이 점점이 떨어지고 있다.
    • 이곳은 파리 야외 공원 비슷한 곳인데, 이런 것도 오스망 도시계획 이후 사람들이 즐거운 여가생활 장소로 떠오른 곳. 사람들이 담소를 즐기고 있고, 자연스럽고 포즈를 전혀 취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 인상파들의 구성 우연한듯한, 공간이 계속되는 듯한 구성 - 어느부분을 잘라도 그림이 될것같은, 늘려도 줄여도.
    • 다비드등이 영원보편적인 것을 구했다면, 르누아르는 순간적인 것을 그렸지만, 굉장히 삶에 대한 긍정적인 느낌을 주는 그림이다.
    • 그리고 르누아르에 등장하는 그림을 보면 점잖고 여성을 아끼는 남자로 나오는데, 그럼에도 르누아르에 나오는 여성의 이미지는 굉장히 순진무구하다. 굉장히 남성위주의 시각이라고 비판한다. 페미니스트들이. 아마도 지적으로 여성이 생각할 수 있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
  • 선상파티의 점심식사 1881
    • 여기 나오는 것이 전형적인 중산층의 한때. 항상 나타나는 인상파들의 주제.
    • 여기 나오는 인물들이 다 르누아르의 친구들.
      • 까이유 보트 - 우산 쓰고 가는 사람을 그린 화가인데, 인상파. 부잣집 아들. 이사람이 인상파들 작품을 사서 모았다. 제도권에서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룩상부르 미술관에서 인상파그림(까이유 소장품을) 사들이는 처음인데..
    • 일상생활의 한 장면 -genre painting genre가 우리나라에서는 종류지만, 미술사에서 genre painting이란 이런 뜻. 그러나 한편으론 초상화라고 할 수도 있다. 실제 인물들의 얼굴이니깐 그룹 초상화랄수도 있다. 초상화인데 인상주의에서 보기엔 이렇게 informal한 초상화가 되어서,
      • 옛날의 초상화는 단정 공식적 뭔가 약간 이상화되어았는, 초상화를 통해 사회적 개인적 정체성을 볼 수 있는 것이 전통적인 초상화라면, 더 이상 초상화를 위해 자세를 취하지 않는 모습이 보여지고, 편안한 자세들이 나오는 것.
      • 이시대의 삶이 보여지고 있어서, 이시대 인상파 그림은 깊이 내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보여지는 표면에 상당히 관심을 같는 것이라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철학 이런거 별로. 대부분 middle class, 가치도 중산층적인. 물질적 쾌락적. 도덕적철학적이진 않다.
      • 그림에서 옷차림이 계급을 나타내는 것도 사라짐. 이렇게 민소매를 입고 나온 사람이 처음이다. 쿠르베가 그렸다면 노동자였겠지만,
  • 1884-87 수욕도 bathers
    • 82년에 이태리 여행 르네상스 특히 라파엘 영향을 받고 다시 구성 양식 볼륨에 관심을 가진다. 그래서 그려진 작품
    • 이사람이 왜 이렇ㄱ 갔냐면, 광선만을 추구하면 너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아직도 자연에서 인상파적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인물들을 보면 선이 다시 등장, 볼륨이 등장 굉장히 전통적인, 부셰의 여성의 움직임과 리듬감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돌아오게 된다.
    • 여성이 장난치는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이런것도 부쉐, 프라고나르의 전통을 보여준다. 역간 자연스럽다기보다는 작위적인 포즈를 보여준다.
    • 페미니스트 보기에는 이것은 굉장히 남성주의적인 시각. 여기서 여성은 자연의 일부로 보여진다. 항상 여성은 자연에서 누드로 보여졌다. 문화화된 것이 아닌 다른 생각이 전혀 없는 ,그에 비해 남자는 항상 옷을 입고 서재에 있는데 이런 대비가 바로 르누아르의 예이다. 여성은 자연에 융화되어서 재생을 상징하느 ㄴ이미지이고, 여성을 보면 항상 즐겁게 집안일을 하고 그렇다. 이쯤 되면 여성이 사회문제로 제기되던 때이다. 여성이 교육받고 일하게 되고 new women 이 나타나게 되면서 여성의 권리 요구가 커지는데, 많은 책들이 나오게 된다. 어머니의 중요성 이런것….
  • Boucher 1742 목욕후의 diana 여신
    • 색이 굉장히 신선 감각적인, 빛의 효과 천과 대비되는 여성의 색채, 핑크의 피부 이런 것이 귀족들이 좋아하던 그림이다. 누드를 감상하는데, 그냥 누드라고 할 수 없으니 여신이라고 붙여서 18세기에 나온다. 이런 전통이 르누아르에 계승.
  • 1900이후 말기의 수욕도
    • 이사람도 점차 표현적. 따뜻 붉어지면서 형태가 굉장히 둥글고 커지고 해서, 혹자는 그로테스크하다고 하지만, 사조에서 완전히 자유스러운 것을 형성해서, 크기나 볼륨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 어떤 여신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 일본 화가들이 이때 유학와서 많이 보이는데
  • Caillebotte, 마루를 깎아내는 사람 1875
    • 까이유보트 - 부자, 친구들의 그림을 많이 사주고, 자신의 그림을 국가에 헌납하게 된다. 이 그림은 인상파와는 좀 다르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형태가 아직도 견고하고, 뭔가 사실주의에 가까운, 살롱전에 떨어져서 1870년 인상파전에 출품.
    • 드가가 사회의 단편을 그리는 그런것이나 구도의 임의성을 보면 드가와 유사 하지만 여전히 소극적 구도. 몸이 구조 세부묘사에 여전히 관심을 둔다. 밀레의 이삭줍기같은 리듬감과 유사하지 않나. 그래서 인상파들과 어울렸지만 사실주의와 연관있는 사람이 이사람이다.
  • Camille pissaro 정물화 1867
    • 피사로는 인상파에 늦게 합류한 사람. 쿠르베를 연상시키고 터치가 무거운 사람.
  • Pissaro, Hermitage at pontoise 1867
    • 형태 견고한 구조에서는 아직 pre-impressionism에 해당된다.
    • 왜 중요하냐면, 인상파들과 거의 관계를 갖고 있어서 세잔이 화가가 되는데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 이사람이 굉장히 좋은사람, 여러 화가를 도와주고 해서 화가로서보다는 그런의미에서 인상파에 중요했던 사람이고, 고갱에게 화가가 되기를 격려했던 사람도 pissaro.
    • 피사ㅗ는 1880년대부터는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졌고, 어떤이는 이사람이 무정부주의자로 알고있다. 1880년부터는 사회에 대해 환멸을 느끼면서 무정부주의자들이 생기기 시작하ㅡㄴ데, 어느때나 그렇지만 예술가는 항상 자기를 진보라고 생각했다. 쿠르베는 자신이 진정으로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했을까?하지만 여튼
    • 일하는 농민을 많이 그린 사람.
  • Alfred sisley bridge at villeneuve-sur-le garenne, 1872
    • 터치나 빛에서 인상주의를 알 수 잇지만 질감과 견고함, 강한 선에서는 여전히 pre적.
    • 시슬리는 코로와 더 연결된다. 코로가 바르비종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상당히 고전주의적 경향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연결이 된다.
  • 1876 flood at port marly
    • 인상주의와 같은 경향으로 나아가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도 구조와 선 속에 머물러있다. 어디상 나아가지 않는다.
  • 1876 snow at louveciennes
    • 상당히 시적인 그림이고, 굉장히 분위기가 중요하다. 약간 로맨틱하다. 결국 이들은 일종의 중도파이다.
    •  
  • 1891 어머니와 아기
    • 인상파 여성화가 둘인데 한명은 mary cassatt
    • 여성화가 둘의 공통점은 - 거의가 여성을 그렸다. 19세기에 여성 화가가 나오는데 그 배경은 이제 미술교육학교를 다닐 수가 있고(과거에는 남자모델 누드가 많아서 그릴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달라져서) 그러나 두사람이 남성을 그렸다 이런것은 없고, 1850년대에 로자 보네르 라는 여자화가가 있었는데, 상당히 남성적인 동물화나 그런 대작을 그렸는데, 바지를 입고 자신을 남자로 생각함. 당시 조르쥬 상드(쇼팽의 연인)와 둘이 남장. (그땐 바지입으려면 경찰서에 허가받아야된단다)
    • 주로 상류층, 모성(어머니와 아이들) 그림을 그렷는데, 여튼 인상파 그림에서 중요한 역할을. 주로 그리는 것이 거리는 별로 없고, 거실 침실, 베란다, 정원. 그당시만 해도 사적인 영역. 가정집 안. 남자들과 같은 공적인 세계는 그리지 않았다. 플라네르 플란넬은 남성의 영역. 당시 사람들은 도시가 위험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그렇다.
    • 이사람은 펜실페니아 아카데미 오브 파인 아츠. 이사람은 누드 말고 석고를 주로 그렸다. 1851년에 파리로 가서, 5년간 아카데믹한 그림을 그리던 장 레옹 제롬이란 화가에게 배웠다. 68-75년까지는 살롱 실제로도 그림이 좀 팔렷다. 드가와 친해서 드가가 메리 카사트를 인상파에 출품하게 되어서 18--년에는 출품하게 된다 인생을 독신으로 산다.
    • 이사람에 의해 미국에 인상파가 소개되고 인상파 화가가 생겨난다.
    • 예전에는 이런것이 유모가 하는 일이엇고 이시대에는 physical touch가 중요하다 이래서 따뜻 친밀한 모자간 관계가 보이는데, 상당히 터치가 아직도 모네등보다는 건고하다. 그리고 스케치적인 터치가 보인다. 붓이 상당히 길다. 신체는 아직도 상당히 견고하다. 어쨌든 엄마가 애를 키우고 재우는 애정에 초점이 맞추어져잇다.
  • Mary cassatt, 특별석의 여인 1879
    • 빛이 어때를 비치고, 사람들의 모습이 뒤에 보인다. 터치는 인상파적인 세밀한 터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중산층 여성의 자연스런 이미지로 보인다.
  • Mary cassatt 오페라의 여인 1880
    • 공적인 공간이지만 격리되어있는 공간에 여성이 앉아있고, 재미있는 건 저쪽의 남자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 Mary cassatt 편지 1891 판화
    • 이사람은 판화와 드가영향으로 파스텔도 했다.
    • 거의 똑같은 우키요에가 있다. 기타가와 우타마로의 그림. 이사람도 일본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았다. 평면적인 색, 각도도 특이한 각도, 이런 것이 어찌보면 인상파의 주제이기도 하지만 우키요에에서도 보여진다. 기본적으로 우키요에를 왜 좋아했냐면 화가들이) - 일상생활의 주제의식과 특이한 각도 이것이 자신들과 비슷한 관심으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이래서 많이 수집한다. 반 고흐는 거의 400점을 수집. 이당시 자포니즘이 상당히 큰. 비서구권 미술이 서양미술에 큰 영향을 준 거의 최초의 예이다.
    • 공예품은 이미 백화점에서 팔고, 우키요에는 일본에서는 고급미술이 아니다. 도자기를 수출하는데 우키요에를 싸는데에 썼다. 브라크몽이란 화가가 도자기를 싼걸 보니 호쿠사이의 판화가 있어서.
  • Mary cassatt, 여인의 초상, 1878
    • 어머니,
    • Le figaro를 읽고 있다. 남성의 시각으로 재현된 여성이 아니다. 어머니가 독서를 신문을 읽는다는 것은 지적인 의미로 재현이 되어서, 이것과 르누아르와 비교하면 남성 여성의 시각을 비교하면 이것은 남성의 시각으로 보이기는 어렵다.

         

    독일의 인상주의 화가들

    인상주의만큼 독일로 퍼진 운동이 없다. 동양이 문호를 개방하면서 처음 받아들이는 것이 인상주의부터이다. 그런데, 그중에서 보이는 것은 빌헬름 라이블이란 사람이 - 독일은 아직도

  • Leibl, linda kirchdorffer, 1871
    • 큰 붓을 사용해서 약간 쿠르베 류 earth color 하류계층의 여성같다.
  • 세 여인 1881
    • 이런것은 아카데믹한 고전주의라고 알 수 있다.
    • 상당히 종교적인 느낌. 약간 낭만주의적 감각이 느겨지는 독일의 그림.
  • Menzel, 무도회 - 상당히 인상주의적인 분위기가 느겨진다. 터치가 자유스럽게 되고, 아직도 물론 선 형태가 강조되어잇지만, 샹들리에 이런것에선 프랑스 인사웆의의 것이 드러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스는 들라크루아부터 천천히 간데 비해서 독일이 한번에 막 들어오고 게다가 조금있다 뭉크 그림이 들어오고 (철거되고 소동일어남) 그러니깐 독일은 현대미술에 대해 급속히 들어오는 현상이 드러나게 된다.

       

       

    여기까지 인상주의 끝.

ㅏ.

   

   

14강결강

2010년 4월 26일 월요일

오후 1:58

   

4/21

새로운 화가들이 나와서 미술의 방향을 인상주의에서 달리 가게 하는 역할을 했음.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룹끼리 활동하여 서로 굉장히 친했던 사람들이었지만, 후기 인상주의는 서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cf. 고흐&고갱은 친했지만)이 매우 달라서 서로 고립되어 있었음.

   

   

>Seurat, 일하는 농부들, 1882

초기작. 노동의 주제가 당시에 많이 그려짐. 이미 이러한 주제를 쿠르베나 밀레의 경우에서 보았음. 쿠르베의 노동자와는 매우 다르다. 쿠르베의 경우 인물에 강조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인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체에 인물은 단지 한 부분인 것처럼 보임. 밀레나 도미에는 인간에 대한 반응을 느낄 수 있지만, 여기서는 하나의 단순화된 형태로 보임. 쇠라는 아카데미 훈련을 받은 에꼴 데 보자르 출신이었고, 아카데미에서의 훈련을 그림 그리는 방식에 적용을 시켰음. 준비단계가 복잡(펜슬-목탄-수채-유화)한 아카데미의 각 단계를 작품에 적용시켜서 순간적인 인상보다는 여러 단계에 걸친 작업을 함. 그래서 붓터치를 다루는 것이 인상파와 많이 다름. 인상파 그림은 빛을 포착하여 빨리 그려야하므로 막 그려진 느낌. 그러나 붓질이 규칙적으로 되어있음. 인상파의 경우 빛에 의해 구조가 분해되는 것 같지만, 여기서는 밑에 깔린 구조를 느낄 수 있음. 이러한 것이 그의 초기작품에서 나타남. 아직도 빛에 대한 관심이 매우 강함. 재미있는 것은 전부 논인 배경에서 햇볕이 비치는 부분에는 오렌지색을 많이 칠했고, 어두운 부분에는 자주, 초록, 푸른색으로 하여 빛의 색깔 배합을 처리했음.

   

   

>Seurat, 돌을 깨는 사람과 수레, 1883

쿠르베와 똑같은 주제의 돌 깨는 사람.. 터치 하나하나가 빛의 색. 어두운 그림자에는 푸른색이 적용되었음. 밝은 부분에 오렌지색이 있고, 사람의 형태도 인상파처럼 빛에 의해 분해되는 것이 아니라 형태가 분명하게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쇠라의 경우 아카데믹한 교육을 받았지만, 카미유 피사로의 영향을 받아서 인상주의를 배우게 되었음.

   

   

>Seurat, Bathers from Asnieres, 1883-84

초기의 중요한 작품. 아스니에르의 목욕하는 사람들. 학교를 다니면서 들라크루아도 공부하고, 자연에서의 색채관찰이 중요함을 느꼈음. 그러면서도 굉장히 원래 타고난 고전주의적 성향, 조직적이고 자기 작품에 질서와 조화를 구현하고자 했음. 순간적인 빛의 인상과 화면 안의 인물이나 풍경을 질서 있게 조화시키고자. 모네처럼 순간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인 영원성을 주는 화면을 보여주려고 했음. 이때부터는 이미 인상주의가 인정받게 되었음. 74년부터 그룹전. 쇠라와 같은 사람이 자신도 인상주의에 뿌리를 두고 자랐지만, 이제는 인상주의에서도 보수적인 것이 느껴졌던 것. 너무나 형태와 구조가 없어지고, 희생당했다고 생각.

   

아스니에르는 파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 그 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 80년대쯤 되면 교외도 상당히 근대화되기 시작하여 뒤의 공장지대가 보임. 공장의 굴뚝과 거기서 나오는 연기. 아마도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라고 생각됨. 인상주의 붓보다는 매우 규칙적으로 적용되어있음. 물가를 보면, 수평으로 붓터치가 가있고, 풀은 풀이 자라나듯 붓터치. 빛이 화면 앞 중앙쯤에서 떨어지는 듯. 하이라이트가 생기니까 원칙적인 인상주의라면 희미하게 그렸어야. 그러나 물빛을 더 진하게 그려서 확실한 몸의 경계가 보여지게 됨. 물과 등 사이에서도 오히려 하얗게 하이라이트를 주어서 선이 더 뚜렷하게 나타나게 됨. 몸이 원통과 같은 입체의 형태로 분명하게 나타나게 됨. 이것은 과학적이지 않다. 인상파는 객관적으로 묘사하려고 했으므로 어느 정도는 과학적으로, 관찰에 의해서 그렸는데,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작가의 주관적인 결정이 들어갔다. 자신이 원하기 때문에 조정할 수 있는 subjective한 성격이 들어가게 됨. 경계가 확실, 형태가 더 확실하고 둥글게 나타남.

   

굉장히 많은 준비 작업을 함. 처음에는 훨씬 더 사실적인 그림을 그림. 훨씬 일상적인, 흔히 볼 수 있는 모습. 완성작에 조금 더 가깝게 되어있음. 스케치를 보면 붓터치를 느낄 수 있다. 훨씬 더 한가롭게 즐기는 듯 누워있음. 완성작에서는 확실한 형태가 드러남. 아무도 서로 소통이 되어있지 않음. 안정감을 주고, 일상의 한 순간이 아니라 영원한 느낌을 줌. 당시 사람들이 쇠라의 그림을 보고 이집트 적이라고 함. 순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장면이 아니라, 체계적인 시스템을 적용하여 화면이 일시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 부동적인 질서를 주려고 했음.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리듬, 디자인적인 요소가 느껴짐. 공간감, 입체감, 패턴, 색채를 살리려는 노력.

   

   

>Seurat, Sunday afternoon on La Grande Jatte, 1886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이 그림을 2년 그렸고, 그것을 위해 40점의 스케치와 20점의 소묘를 했다고 함. 크기가 크고, 테두리를 둘렀음. 보통 사람들이 여가를 즐기고 쉬는 모습은 아스니에르와 비슷하다. 옷차림을 보면 전 작품의 노동자느낌 보다도, 정장차림을 하고 패셔너블해서 중산층이라는 생각이 듦. 측면의 얼굴이 거의 대부분. 패턴화 되고 반복된 리듬감을 느끼게 되고, 전체적으로 원근을 적용시켜서 맨 앞에 있는 사람은 크고 점점 작아짐. 사람의 크기를 통해 깊은 원근감을 주는 것 같이 보임. 이런 것은 고전주의. 다비드, 점차적으로 원근의 효과를 주었던 것처럼. 모두가 정적인데, 한 소녀만 뛰어가고 있음. 측면의 얼굴 뿐 아니라 파라솔도 반복되는 움직임. 아주 전형적인 고전주의처럼 단계적으로 작아짐. 사람의 눈이 전경에서 원경 깊이로 들어가게 함. 원근의 느낌이 굉장히 강한 것도 아님. 그렇게 하려면 뒤는 훨씬 색이 흐려져야 하는데, 똑같은 강렬한 색을 썼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평면으로 보이기도 하면서, 입체로 보이기도 하는. 3차원적이면서도 2차원적인. 표면의 장식적 효과 자체는 평면으로 보인다. 순간적인 인상주의의 세계라면, 여기서는 시간이 정지한 영원하고 조화로운 세계로 변모했다고 할 수 있음.

   

터치도 아주 규칙적인데, 터치도 대강 1cm 정도. 화면에서 분할. 똑같은 잔디인데, 햇빛이 비치는 잔디에는 햇볕이 강하게 비치는 직사광선의 경우 오렌지색을 쓰고, 반사광선은 초록을 띤 오렌지 색을 씀. 그림자는 푸른색이나 자주색을 쓰는 등 그런 식으로 작업했음. 인상파의 무분별한 터치를 거의 기계적인 적용을 하여 굉장히 합리화시키려는 느낌을 준다. 쇠라는 당시에 굉장히 과학을 믿었던 사람. 무엇이든지 자연의 법칙으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함.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시대정신. positivism! 우리나라에서는 '실증주의' 무엇이든지 과학으로 설명가능하다는 생각에서 나옴. 모네 같으면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렸지만, 쇠라의 경우 그것을 과학적으로 분할함. 햇빛이 비칠 때와 그림자가 질 때의 색을 퍼센트로 나누어. 마치 화학실험실에서 성분을 정확하게 집어넣는 것과 비슷한 작업을 통해 완성된 것. 오래 걸릴만 하네. 결과적으로 세부적인 것에 관심이 없이, 굉장히 단순화되고 세부가 생략되어 서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고 확실한 구조와 견고한 형태로 나타나게 됨.

   

이것을 하기 위해서 스케치. 처음에는 인상주의에 가깝게 그렸음. 사람들을 다 빼고 잔디와 나무들만 그림.프레임을 그렸음. 목탄 스케치를 함. 흑백만 가지고 농담(tone)을 조절하여 어두운 부분, 약간 밝은 부분, 환한 부분을 연구함. 아주 견고하다. 그 다음에 붓터치로 발라가기 시작. 조금씩 광선의 색채가 완성이 되어가면서 최종.

   

구성 역시. 여러 가지로 볼 수 있지만, 예를 들어 나무를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다가 왼쪽으로 뻗쳐서 왼쪽 강의 보트로 연결. 보트 돛이 곡선적으로 돌아 나와서 다시 섬 쪽으로 돌아오게 함. 반대방향으로 되어 있다면 시선이 바깥으로 빠지게 될 것. 사람을 통해 다시 시선이 오른쪽으로 가도록 해서, 일종의 방향표 역할. 본 순간적인 모습이 아니라 화면의 질서와 안정감을 위해 철저하게 계산된 구도라는 것!

   

붓터치에 점이 있지만, 선이 아래로 내려가서 수평으로 가고 있음. 약간의 흰색 터치가 섞여있음. 팔에 흰색이 훨씬 많이 섞여있어서, 이것이 더 밝은 빛이 닿는 부분이 됨. 쇠라는 좀 신비주의였고, 나중에 그가 죽었을 때 아무도 몰랐는데,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함. 과학적, 체계적인 것을 해서 이 경우에는 '신인상주의'라는 말을 씀. 물론 인상주의 후에 나왔다고 하여 후기 인상주의라고 하지만, 쇠라의 경우 Neo-Impressionism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나머지 세 사람보다 훨씬 더 인상주의에 가깝게 그렸다는 것. 빛에 대한 관심, 그러나 인상주의와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나갔음.

   

   

>Seurat, Bridge at Courbevois, 1886

아까보다 훨씬 추상화되었음. 사람이 덜 중요해지고 전체적인 구성이 중요해짐. 다리에 굉장히 많은 선들이 나오는데, 전부 겹쳐지고 띄워져서 나옴. 황금비례와 황금분할을 적용시킴. 수학적 비례를 어떻게 함으로써 그림에서 조화를 주는가. 그랑자트 섬에서는 질서와 기하학적 구도가 덜 나타났지만, 여기서는 굉장히 명료한 체계와 엄격하고 체계적인 느낌이 난다. 선의 관계가 수학적이다? 그래서 딱딱한 것 같으면서도 무감각하지 않고 굉장히 시적인 분위기를 주는 것이 이 사람의 특징. 조화와 정적이고, 점묘, 포인트로 되어있음.

   

   

>Seurat, Pose, 1888

전부 점묘로 되어있음. 그랑자트 섬이 뒷 배경으로 그려져있고, 방에 모델이 셋 있다. 누드라는 주제는 인상주의에서 거의 쓰지 않음. 고전주의적인 주제를 다시 가져옴. 그러면서도 빛의 관심을 보임. 여기에서의 빛은 실내 광선의 빛을 적용시켰음. (cf.그랑자트 섬은 야외광선) 이 누드 하나하나에 스케치가 따로따로 되어있어서 완성되기까지 역시 1년이 걸렸다고 함. 그랑자트 섬에서는 색이 대조되었음. (ex. 빨강-노랑-초록) 그에 비해서 여기서는 색이 점차적으로 변함. 다시 삼각형 구도가 등장. 고전에서 많이 쓰는 것. 이런 식으로 앞, 뒤, 측면으로 누드를 그린 것도 고전에서 많이 하던 방식.

   

   

>Seurat, The Parade, 1889

그랑자트 섬과 비교가 됨. 아까는 대낮의 광선이었지만, 이것은 밤의 광선. 그림 맨 위에 있는 것이 가스등. 파리에는 이제 가로등이 세워졌는데, 전기가 아닌 가스등을 쓰는 야외의 불빛아래 서커스 단원들이 서커스를 하는 도중에 광고하는 모습. 무대에 선 악사들, 단장, 관람자(구경꾼)의 모습. 사람들이 거의 모두 정면으로 단순화되게 보임. 그에 비해 규칙적으로 유사하게 그려진 사람에 비해서 구경꾼들의 모자를 보면, 제각각의 형태들로 나타나고 있음. 포즈나 그랑자트 섬에서 보면 깊숙한 원근법이 나는 것에 비해서, 여기는 거의 평면으로 보임. 그래서 어떤 사람은 꼭 일본병풍 같다고 하기도.

   

완전히 비례에 의해서 평면적인 면이 연속적으로 나타남. 대체적으로 3:4:5의 비례를 많이 썼음. 이 당시에 쇠라의 친구가 솔본느에서 가르치고 있었던 샤를르 앙리라는 수학자. 그와 굉장히 친해서 이러한 것이 적용되었다고 생각함.

   

완성 전 스케치 단계. 그가 쓴 캔버스는 흰색 캔버스가 아니라, 옛날에 썼던 갈색 캔버스. 여기서도 굉장히 규칙적이지만, 뭐든지 일관적으로 처리하여 다시 최종작으로 완성되었음.

   

비교) 그랑자트 섬- 색은 대조되는 색이 아니라, 조금씩 점차적으로 변하는 색채로 되어 있음.

대낮의 야외광선/밤의 광선. 원근의 느낌/평면으로 가로막힌 느낌. 빨-노-파의 색 대조/유사한 색채로 연결. 이 두 그림은 상당히 대조되는 시도를 보임

   

   

>Seurat, Circus.

시스템을 어떤 식으로 적용했는가? 수평적인 선은 굉장히 조용하고 균형적인 느낌을 주는데, 올라간 선을 즐거움을, 내려간 선은 슬픔을 준다. 내려간 선은 차가운 색이 주는 느낌과 비슷. 올라가는 선은 따뜻한 색의 경우. 모든 것들이 이러한 system에서 인간의 감정을 어떻게 색채와 선의 방향과 움직임을 통해서 전달할 수 있느냐. 이것은 작가가 모든 것을 컨트롤 하는 것을 의미함.

   

   

>Seurat, 소란스러운 춤(La Chahut), 1890

다리가 모두 위로 올라가서, 즐겁고 생기 있는 느낌이 남. 기본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위로 올라가는 선. 그래서 전체적으로 생기 있는 느낌이 난다. 처음 보았을 때 시선이 위로 향하여 위를 쳐다보게 되는데, 위는 훨씬 공간이 열린 느낌이, 아래는 공간이 복잡한 느낌이 난다. 이 그림이야말로 쇠라가 그린 첫 번째 움직임이 많은 그림. 색채는 대조적인 색을 쓴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변하는 색을 씀. 다리의 각도도 모두 계산된 것.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주관'. 어떻게 결정하여 질서와 조화로 되돌아갈 것인가.

   

후기인상주의

인상주의 화가들은 기본적으로 객관적인objective 묘사를 하려고 함. 그러나 후기에 와서는 '작가의 주관'이 강하게 들어오는데, 그것이 쇠라에게는 질서, 구조, 고전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반 고흐의 경우에는 색채로, 고갱의 경우에는 또 다른 식으로 나타나면서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이고, 작가가 어떻게 하느냐는 자기 마음대로다. 라는 생각이 강해지던 때. 현대미술이 이때에 기본적인 방향이 잡히게 되었음. 그래서 이 시기 작가들이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이유이기도. 하나같이 고통스러운 인생을 보냈던 사람들. 그림을 잘 팔지도 못했고, 너무나 개성이 강해서 인정받지도 못했음.

   

   

>Seurat, Paul Signac, Grand Canal of Venice, 1905

쇠라가 이런 식으로 작업을 해서, 보이는 세계를 합리적으로 재구성하여 독자적인 화음과 질서를 가진 세계로 만들고, 자연을 충실하게 묘사하는 것에서 벗어나 화가의 이성이 지배적인 그림으로 나아감. 이때에 이것을 알아차린 일련의 화가들이 있었음. 그 중에 폴 시냑. 베니스의 대운하. 시냑은 쇠라와 자신이 탐구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같은 것임을 알아차림. 쇠라는 자기 그림을 떠벌리고 다닌 사람이 아닌데, 시냑은 설명하기를 굉장히 좋아해서 쇠라에서 시작한 신인상주의를 전파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 쇠라와 굉장히 비슷한데, 시냑의 경우 터치가 훨씬 크다. 쇠라는 미세한 점인데 비해, 그는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로 크게 그려져서 색채 대조가 훨씬 강하게 나타남. 나중에 시냑과 비슷한 신인상주의가 중요한 것은 화단의 중요한 인물이 되면서 대부분의 현대미술 화가들(마티스, 피카소)이 처음에 영향을 받은 것이 신인상주의. 거기의 시냑같은 사람이 젊은이들을 밀어주는 역할을 했음.

   

   

빈센트 반 고흐

멋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 네덜란드는 신교(칼뱅교)의 나라, 이 집안은 대대로 목사나 전도사가 많았다고 함. 아니면 화상. 여러 형제로 태어남. 항상 남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데,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상이 너무 높았고, 그러면서도 사랑을 갈구하여 옆에 있으면 부담스러운 사람. 처음에는 선교사도 하고, 탄광촌에서 전도사도 하고, 화랑에서 이야기도 했는데. 1880년 27세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 반 고흐가 그림을 그린 10년. 대부분 사람들이 아는 사람들은 85년부터 5년 동안의 그림. 그게 200여점 정도? 상당히 많은 양의 그림을 그렸음. 처음에 80년부터 많이 그린 것은 주로 목탄이나 크레용으로 드로잉을 많이 했음. 그는 정규 미술학교를 다니지 못하여 자기 혼자 미술학교에서 배우는 대로 독학을 했음. 열심히 드로잉을 함. 그러나 이 드로잉이 그 당시 기준의 드로잉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음. 특히 앵그르의 드로잉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서투르다. 당시 기준으로 매우 못 그린ugly 드로잉.

   

   

>Van Gogh, 땅을 파는 농부의 아내, 1882

처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소박한 배경을 많이 그렸음. 농부, 풍경.

네덜란드의 그림이 대개 이런 식. 여기에는 아직 인상파 그림이 잘 소개가 안 되어서 굉장히 어두운 그림들. 렘브란트, 할스, 도미에 류의 어두운 그림을 많이 그렸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 기독교적인 경건함을 가지고 있음. 반 고흐가 생각하기로, 종교적인 집안에서 났기 때문에 농부들의 모습이야말로 미술의 가장 심장부에 있다고 보고 농부들을 많이 그림.

   

   

>Van Gogh, Nuenen의 교회

색채는 어둡고, 드로잉이 강한 그림. 붓터치 하나하나가 거의 목탄 드로잉과 같은 느낌이 듦. 그러면서도 감정적인 그림.

   

   

>Van Gogh, 감자를 먹는 사람들, 1885

이제부터 완성된 작품이 나옴. 그것이 1885년이고, 이때에 그린 중요한 그림. 85년이 됐지만 인상파를 아직 모르고 있는 듯. 나름대로 아카데미 전통에 의해서 하나하나 스케치하고 구성해서 작업하여 자신이 나름대로 배우려는 노력을 했음. 탄광촌에 부모, 딸과 사위의 젊은 부부, 그리고 그 사이의 딸. 삼대가 감자를 저녁으로 먹는 모습. 고흐, "나는 램프 빛 아래, 땅을 판 바로 그 손으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었다." 이 당시 이 사람은 미적인 것보다도 주제에 집착하고, 밀레와 도미에와 같은 부류에 머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램프가 있고, 좁은 집.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그림이 걸려있음. 희미한 불빛이 내려와 사람들을 비쳐줌. 아이만 얼굴이 우리에게서 뒤돌아 있음. 감자에서 나오는 김이 아이의 주변을 거의 후광처럼 비춰줌. 여기에서 이 아이가 희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때 반고흐가 열심히 읽었던 것이, 스토브인이 썼던 '엉클 톰스 케빈' 굉장히 종교적인 느낌이 듦. 이러한 종교적인 느낌은 17세기 르넹이라는 형제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 평범하고 서민적인 일상생활에서 종교적인 느낌이 나는 그림들이 있음. 여기서도 농부들이 술과 빵을 먹는데, 성찬예배처럼, 그저 평범한 것이 아니라 뭔가 종교적인 느낌이 있음. 그것이 반 고흐의 초기 그림에 나타남.

   

cf. Le Nain 형제, 17세기, 프랑스

강조된 것이 거칠고 두터운 손. 하이라이트를 주어 손을 강조한 것을 보면 사실이 아니라, 표현주의적인 터치. 이러한 것들이 그 당시에는 거친 드로잉으로 보이게 됨. 이 그림을 그리고 1년 후인 86년에 파리로 가게 됨

   

   

>Van Gogh, Pere Tanguy, 1887

테오 반 고흐가 파리에서 화상을 하고 있었음. 테오가 형을 위해 많은 일을 해주는데, 여기에서 처음 인상파 화가들을 알게 됨. 페르낭 꼬르몽이라는 아카데믹한 화가의 스튜디오에서 약간 그림을 배우게 됨. 여기서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과 피사로를 만나서, 인상주의 색채로 전환하게 됨. 색채가 완전히 변해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서 일본 우키요에를 알게 되었음. 87년에 파리에 정착하면서 당시의 모든 경향을 흡수하던 때가 바로 이 때.

   

쟈포니즘

테오에게 쓴 편지에도 우키요에 이야기가 등장. 나는 일본과 같은 따뜻한 남쪽나라에 가고 싶다. 일본을 이상향으로 생각했음. 쟈포니즘의 붐이 일던 때이지만, 쟈포니즘은 아직까지도 일종의 이국취향이고 일본을 잘 알았던 것은 아님. 일종의 환상. 일본이라는 나라는 섬세하고 공예품을 잘 만들고, 게이샤가 있는데 모든 여성들은 복종적이다? 사실은 일본을 잘 모르면서 환상을 가졌던 것. 반 고흐 역시 400점의 우키요에를 테오와 함께 수집. 뻬르 땅기는 물감장수. 줄리앙 땅기가 본명. Pere는 아저씨uncle라는 의미. 작가들이 돈이 없으면 돈 대신 작품으로 많이 받았고, 특히 세잔느와 거래를 많이했음. 반 고흐의 경우 물감은 잔뜩 쓰지만 돈 대신 준 그림은 팔리지 않았으니까 문제가 되었음. 나중에 땅기가 팔게 됨.

   

굉장히 직접적인 초상. 완전히 정면을 보고 있음. 그러면서도 굉장히 조각적이다. 앞에 있는 땅기. 차가운 청색의 옷을 입고 있고, 뒤에는 밝고 화려한 색으로 되어있어서 원근의 느낌을 받을 수 없음. 앞으로 튀어나오는 밝은 노랑색을 쓰고 있으나, 우리의 시선이 앞으로 오지 않고 땅기로 가는 이유는 그의 얼굴 때문. 물리적인 존재가 아주 확고하게 견고하고 조각적으로 있기 때문에 그 주변이 화려해도 시선이 주인공에게 가게 됨. 특히 눈이 우키요에에 지거나 압도되지 않는 강한 존재를 보여주는 그림이 됨.

   

인상주의의 터치가 보임. 분할되어 있고 잔 터치. 그러나 인상주의의 터치라고 할 수가 없는 부분도 있음. 흰색은 역시 빛의 색인데, 길쭉하게 되어있고 아웃라인을 그려서 형태를 확실하게 강조하게 됨. 87년. 85년 감자먹는 사람에서 86년에 파리에서 인상주의를 배웠지만, 87년에는 이미 인상주의를 넘어선다는 것! 굉장히 주관적인, 강하고 율동감 있는 선들이 이미 이 그림에서 나타나기 시작하고, 자신의 특유한 양식과 테크닉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음. 여기서 보이는 아주 즐겁고 유쾌한 색채들이 뒤에 나와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강렬한 눈이 있어서 복잡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인물이 전체를 장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cf. 우키요에

400점을 모으고, 많이 카피함. 히로시게의 목판화를 카피하여 한문을 옮겨 쓰려는 노력까지.

   

   

>Van Gogh, Fishing boat on the beach, 1888

88년 남부 프랑스의 아를르로 가게 됨, 그 곳을 가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따뜻한 남쪽나라에의 동경. 일본 대신 아를르로 간 것. 고흐의 꿈, 작가들이 서로 작업할 수 있는 그들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싶어했음. 그가 함께 작업하고 싶었던 사람이 폴 고갱, 에밀 베르나르 등 몇몇. 테오가 말하길, 그곳은 물가가 파리보다 싸니까 가서 생활비를 보내주겠다고 하고 고갱을 구슬려서 거기서 그림을 보내오면 거래하여 생활비를 대주겠다고 약속하여 반 고흐가 간 후에 처음으로 간 사람이 폴 고갱이 되었음. 두 사람이 2~3개월을 같이 지내는데, 미술사에서 개성 강한 두 사람이 잘 맞지 않았던 것. 12월의 어느 날, 결국 고갱이 화를 내고 파리로 돌아가겠다고 하며 파리로 돌아가겠다고 하여, 완전히 절망에 빠져서 첫 번째 발작을 일으키게 됨, 불안정한 상태. 반 고흐가 왜 죽었을까? 실제로 이 집안에 정신발작을 일으킨 사람이 많았음. 귓불을 면도칼로 잘라서 그것을 싸서 자기와 한 때 살던 암스테르담의 매춘부에게 우편으로 부침. 그의 정신병은 결국 1881년 후에는 생 레미의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물론 언젠가 죽을 것을 알았지만 잘 지내다가, 테오가 갑자기 결혼할 것이라는 전보를 받음. 이것이 그를 무너뜨리는 요인이 되었고, 90년에 권총자살을 하고 이틀 후에 죽었음. 그리고 테오는 형이 죽은 후 6개월 만에 죽음.

   

아를르는 고갱이 오기 전까지 그가 가장 행복했던 시기. 갈등과 같은 것은 나타나지 않고, 조용하고 평화롭고 패턴화 된 느낌이 보임. 인상주의가 아님. 평면화로 보이게 된다. 인상주의 터치는 보이지 않고, 평면화와 윤곽선이 일본판화의 영향. 뒤에 있는 터치는 인상주의. 두 가지 터치. 인상주의적인 하늘의 터치, 보트에는 일본 판화. 나름대로 그것이 굉장히 조화가 됨. 그것을 그렸음.

   

   

>Van Gogh, Peach Blossom, 1888

파리는 항상 약간 어두컴컴하고 해가 많이 나지 않지만, 남부 프랑스에 와서 햇빛을 받고 황홀감을 느낌. 광선이 하나의 즐거움이 됨. 기본적으로 흰색의 붓으로 하늘에 흩어지는 순수한 풍경의 느낌. 감각에 도취된, 꽃이 만발하는 모습. 여기에는 질서가 하나도 없이 그저 취하는 느낌이 나게 됨. 이것이 초기에 그가 그렸던 아를르의 그림.

   

   

>Van Gogh, Sunflower, 1888

고갱이 오게 되자, 고갱이 머무를 방을 단장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 해바라기. 윤곽선, 평면의 색채는 더 이상 인상주의가 아님. 여기에서도 반 고흐 특유의 율동적인 선이 강조되고 있다. 이것이 가장 전성기의 독창적인 작품으로 나타남. 실제로 해바라기는 반 고흐에게 어떤 행복을 상징하는 꽃이었음. 정열의 노란색? 사실 이 그림을 보면 이것이 정말 행복과 정열만이 가득한 색인가? 그렇지도 않은 것이, 해바라기를 자세히 보면 꽃이 다 시든 느낌이 남. 해바라기가 시들면 중앙의 씨 때문에 거칠게 됨. 그래서 이 그림에서 행복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음.

   

   

   

15강

2010년 4월 26일 월요일

오후 1:58

   

<<15강 .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4월 26일 월요일 오후 2:00

   

Ppt제목 후기인상주의와 상징주의

   

  • 폴 시냑, grand canal of venice, 1905

       

       

    고갱의 등장

       

    고갱을 반 고흐가 아를르에 불러서 ~~

    해바라기

    고갱의 방을 장식하기 위해 고흐가 그렸다.

  • Van gogh, 반 고흐의 의자, 반 고흐, 고갱의의자, 둘다1888

    정물화가 의자 이상이라고 생각되고, 의자의 주인을 시사하는 그림.

    차이가 나는것,

    전자

    선이 직선

    선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는 엇갈리는 선.

    놓여있는 물건도 반고흐가 애용하는 파이프와 담배쌈지.

    후자

    선이 엘레간트, 곡선을 많이 사용했고,

    여기에는 책과 촛부르 뒤에는 등불이 있고,

       

    전자는 자전적 요소, 뒤에는 고갱..

    오른쪽 - 훨씬 지적인 요소, 촛불 - 상징적인 요소가 많다. 훨씬 더 상징성을 띠었다.

    앞은 단순 덜 세련됨

    결국 무슨얘기냐면,

    고갱은 상상력을 중시해서, 고갱과 반고흐의 미술 개념의 차이를 보여준다.

    그때만 해도 고갱이 나이가 더 있었고, 인정받았엇기 때문에, 충고하길,

    너는 왜 눈에 보이는 것만 그리느냐, 상상해서 그려라,

    반고흐는 일기나 편지로.. 고갱은 나한테 그러는데 난 절대 안그럴거야. 밀레, 이스라엘리(네덜란드사람)처럼 할거라고. 고흐는 항상 작품의 영감을 주는 대상이 눈앞에 있어야 한다.

    반고흐의 그림을 보면 자신의 의자, 신던 구두, 다니던 카페, 침실 이렇게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 연결이 되는 대상이나 자연 앞에서 가장 그림을 잘 그렸던 것이다. 그런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반면 고갱은 드가를 좋아하고, 고흐는 밀레를 좋아해서 서로 개념이 다르다. 서로 싸울수밖에 없다. 여기 보면 그 대조가 보여진다.

  • NIGHT CAFE, 1888

    잘 알려진 그림인데, 이쯤 되면 인상파라고 할 수가 없다. 전혀 인상파의 작은 붓터치는 사라져버리고, 굉장히 강렬한 빨강 초록이 쓰여진것이다.

    아를르의 카페. 시골, 이 시골에 이런 강렬한 빛의 대조가 있는 카페가 있엇을까? 없다.

    이유 - 이 카페에서 느기는 감정을 더 강렬하게 표현하려고.

    고흐 쓰길 - 인간의 상태를 그리려고 했다. 초록색은 독이 든것같은 빨강. 빨강은 열병과 같은 빨강. 나는 여기서 일생을 망치거나 버죄를 저지를 수 있는 악마의 욕망과도 같은 시골 카페의 분위기를 나타내고 싶다. 이 그림을 집세 대신 주었다. 전반적으로 보여지는 분위기는 억눌린 우울한 분위기이고, 원근법은 거칠고 서투른것처럼 보이고, 램프광도, 실제로 이런것이 아니라 훨씬 과장된 크기의 주관적인 것이다.

    쇠라의 주관성이 구성과 질서에서 나타난다면, 고흐는 색채로서 자신의 주관을 나타내려 했다.

    색채가 훨씬 두텁게 발라지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 자화상 1888-1889 4점
    • 자화상 30여점.
      • 모델을 낼 돈이 없어서 그린것으로 생각된다.
      • 귀를 자르고 얼마 되지 않은 것
      • 점점 89년것을 보면 의사가 이걸 보더니 거의 증세가 나타난다길래..ㅋㅋ
      • 선이 굉장히 리듬감, 길게길게 가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선이 그림에서 가장 가는 부분이 눈. 슬픈 눈에 시선이 집중된다.
      • 자화상을 통해서 원래 네덜란드에서 렘브란트같은 사람들이 많이 그렸는데, 뒷부분은 열정에 찬 붓터치 - 전체 화면이 강렬한, 구불거리는 선과 리듬감같은것이 점점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자화상에서.
  • 1889 별이 빛나는 밤
    • 실제 그림은 1미터정도? 병을 얻어 생 레미에서 투병중에 그린 것
    • 이사람이 아픈 다음에 그린 그림은 파랑색, 초록색이 많이 사용된다. 초록 파랑이 빨강 노랑보다 많이 쓰인다. 정신이 이상한 이유는, 화면에 가득한 율동감때문에 바로 어저께 그린것같은. 그 열정을 나도 느낄수있을것같고 생생함니 느겨지는데, 실은 이 그림을 즉석에서 그린 것이 아니라 상당히 오래 구상을 했다. 스케치도 있다. 이 그림은 다시말해 상당히 고려끝에 나온것이다.
    • 상상하는 예술가 - 불을 질러서 너무너무 기분이 좋아 집에 와서 그림으로 그린다 - 이런거는 있을수가 없다. 예술이라는 것은 그렇게 충동적 즉흥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조절과 균형 갖가지가 계싼되서 구성되어서 나오는 것이다.
    • 사이프러스가 맨앞에 있어서 타오르는 것 같은데, 너무 강하니까, 이것에 대조되는 선이 완만하게 구불대는 산능선이다. 그럼에도 나무가 너무 세기 때문에 이것을 가로지르는 것이 하늘의 선이다. 이 강한 수직을 수평에 의해 균형을 이루고, 그래도 세니까 달을 놓는다.
    • 모든것은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사실은 이 그림의 중심이 바로 교회이다. 모든 것이 움직이는데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보일 듯 말듯 존재하는 이 교회이다.
    • 당시 무슨생각을 했을까?
      • 나에게 있어서 청색은 천상적인 색채HEAVENLY 노랑은 세속적인 아름다움을 주는 색채이다. 여기 있는 색은 두가지 중심으로 되어있고, 달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아침 새벽에 들어왔다 나오는, 부활과 재생을 의미하는 색이고, 사이프러스 나무도 상록수기 때문에 유럽에서 묘지에 많이 쓰는 나무. 그러면 여기 있는 별들도, - 죽으면 별이 된다는. 그런식으로 생각하자면 이 그림은 생과 사에 대한 많은 시사점이 있는 그림으로 생각할수도 있다. 삶과 죽음을 생각하면서 그린 상징주의적 그림으로 볼수도 있다는거지.

       

       

    폴 고갱

       

       

    고갱의 여행 행로

       

    고갱의 부모는 페루로 이민을 갔다. 고갱은 선원이 되어 배를 타고 나중에 증권브로커를 했다. 문제가 있어서 시장이 붕괴되니깐 그림으로 전업화가. 처음에는 브루통이라는 데를 가서 부인과 떨어져 산다. 부인은 덴마크여자. 성공하면 같이 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마지막.

    그리고 이 시기는 제국주의 시기. 타히티같은데는 이미 프랑스 식민지, 그래서 고갱은 타히티는 파라다이스적인 생활을 상상하며 갔고, 한번 왔다 갔다가, 근처 마르키사스 군도에서 외로이 죽는다.

    시대가 제국주의 시대. 이국적인 문화, 문화와 등진곳을 향해 갔던 사람. 시대적 인물.

       

    파리, 아를르, 마르세이유, 몰펠리에, 루앙, 노르망디, 브리타니,퐁타벤 ,PONT AVEN -

    처음엔 퐁타벤이 물가가 싸서 거기서 그린다

       

    그림을모으다가, 피사로와 같이 일요화가 하다가, 인상파와 그리다가, 나중엔 전업화가로.

    보헤미안적인 사람. 자유스럽고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사람같은데, 세련된 감각주의자. 그 반면에 허영심도 많고, 남을 칭찬하는데에 인색하고, 자기를 굉장히 스타화하려는 경향이 강했던 것도 강한 사람.

       

  • 고갱, 돼지 치는 사람이 있는 풍경, 1888
    • 초기작품, 여기보면 인상파의 터치가 있지만, 훨씬 평면적인 색채가 많이 보여지고, 아직까지 인상파의 자연에 뿌리두고 그리는 것은 인상파적, BUT색채조절을 해서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다르다.
  • 설교 후의 환영, 1888
    • 아까와 달리 분할터치가 없어지고 평면적, 색채도 강렬해진다.
    • 소제목은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 그래서 이것은 구약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야곱이 씨름하다 보니까 그사람이 천사라는 것을 알게 되는 이야기이다. 신부님이 옆에 있는데, 옆에 여자들은 부르통의 여인들. 의상이 아주 이국적으로 보여진다. 민속의상. 일요일 교회에 갈때 특별히 차려입은 모습이다.
    • 아마도 그래서 이것은 신부님이 야곱과 천사의 이야기를 하는데, 이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그것이 여기에 그려졌다라고 할 수 있다. 빨강은 실제 세계가 아니라 상상의 세계이며, 그를 위해 이 빨간 색채라고 할 수 있다.
    • 사과나무가 가로지르는데, 이런 구성은 일본판화에서 나온다. 이런 씨름이 일본 우키요에중 스모 그림에 있다. 그것을 영향받아서 그렸다. 호쿠사이의 그림. 시점도 굉장히 일본판화적.
    • 굉장히 강렬한 색채대조(빨강과 청색과 흰색의 대조, 구불구불한 선이 아주 리드미컬하게 보인다.
    • 결국 종교적으로 경건하면서 복장에서 풍기는 신비스러운 분위기 - 보여지는 세게보다 작가의 상상력이 우선한다고 생각했다. 인상주의는 이런 내면의 신비주의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인상주의에서 벗어나겠다고 함.
    • 당시 에밀 베르나르란 화가가 이지역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이 그림은 호밀을 추수하는 장면. - 이 아웃라인 그리는 방식이 고갱 그림에서 나온다. 고갱이 내 양식을 훔쳤다고 기분나빠한다. 여튼 훔치더라도 훨씬 더 멋있게 사용한다면 처음 쓴 사람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 강한 색채대비, 두꺼운 윤곽선, 구불부굴한 선과 신비주의적 분위기에서 인상주의와 결별함을 볼 수 있다.
  • 1889 자화상
    • 후광이 있는 자화상 이란 제목.
    • 바로 조금전의 양식이 완전히 강렬히. 노랑 빨강, 파랑, 아름다운 곡선을 사용해서 고갱의 얼굴만 빼면 완전히 평면 - 이것이 마티스피카소 등 후대사람에게 완전 영향을 주는 것이다. 고갱은 그래서 이걸 종합주의라고 명명. SYNTHESISM - 종합주의의 특징은 - 클로이조네 : 보석을 만들때 금속으로 아웃라인하고 색을 입혀서 박아넣는 - 비녀만들때 색채우는거 - 그런 양식이 아주 특징적인 양식이다.
    • 자신을 종합주의의 성인으로써 그린 그림. 그래서 이런 그림을 그리다가
  • LA ORANA MARIA, WE HAIL THERE, MARIA, 1898
    • 고흐에게 간 것도 여비를 모으기 위해서 간것 - 그러나 따분하고 흥분만 해서 도망옴- 결국 1891년 타히티로 갔다. 그런데 타히티에 갔더니 꿈꾸던 원시적인 파라다이스가 아니다. 이미 전깃불,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 끊임없이 말썽 - 식민지관리들과 굉장히 문제. 나무 오두막집을 사서 숲에서 과일따먹고 타히티여인과 살고 하면서 타히티어를 배웠는데, 나중에는 돈이 떨어져서 덴마크 와이프에게 돈보내달라. 와이프는 거절 그무렵에 스무살난 딸이 죽는다. 이때 자살을 시도.
    • 첫번째 타히티에는 91-93년 사이. 93-95년 불란서에 있었다. 전시를 해서 작품을 팔아 돈을 모으려고 왔다. 삼촌의 유산을 받으려고 왔다. 누구랑 다녔냐면 자바의 원주민 여인과 다닌다. 그여자는 또 원숭이 한마리를 데리고 다녔다. 기이한 커플이 사람들 눈을 끌수밖에 없다. 그래서 - 선원들과 싸움이 붙어서 돈뜯기고 여자도 돈갖고 튐. 그림은 하나도 안팔림. 이때쯤 되면 이사람은 이미 유명한 고갱이 되어있다.
    • 그래서 이 그림은 타히티 초기의 작품. - 타히티어로 우리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타히티여자지만 완전히 기독교 문맥으로 해석될수밖에 없고(아줌마는후광에아이도 후광) 날개 달고 있고 천사들.
    • 그럼에도 풍요로운 색채의 효과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아름다운 중간색 보라 핑크 - 이런것이 많이 보인다. 타피스트리같은 그런 효과를 준다. 사람들이 반고흐를 색채화가라고 하지만, 그사람은 SOPHISTICATION에는 약했고, 사실 고갱은 프랑스의 감각적인 섬세다양한 색채를 정말 잘 썼다.
    • 고갱이 노아 노아 라는 책을 썼다. 향기로운 냄새 라는 뜻이다. 행복하게 있다는 얘기.
    • PRIMITIVITISM - 원시주의가 굉장히 화제가 된다.
    • Primitive라는 말은 원시적이란 것보다, 전통있는 것이라도 서양것과는 다른것이라는 의미로.
    •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등의, 이런 조각 등에 많이 영향을 받는다.
  • 1892 the spirit of death watching
    • 실제경험
    • 고갱이 어느날 집에 왔더니 고갱의 여자가 불을 꺼놓고 무서워하고있더라. 미신. 여기 보여지는 이 사람이 확실치는 않지만, 신, 죽음의 신, 죽음의 영령 - 저승사자같은 것인지, 아니면 고갱을 나타내는 것인지 여튼 후드는 신비스런존재를 나타냄. 여성의 표정 불안 공포의 느낌을 전달하는 것이고, 몸은 굉장히 둥글게 표현되어있지만 밑의 시트는 굉장히 이차원적, 장식적 패턴. 장식적 패턴을 분위기를 전달하는데에 사용.
    • 이것은 머릿속의 인물일지도. 어쨌건 시각적 이미지로 나타나고 있다.
  • 1896년 성탄
    •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것.
    • 고갱이 타히티여자랑 살다가 아이가 사산. 크리스마스쯤. 처음에는 고갱의 죽은 아이를 데려가는 죽음의 신일수도 있지만, 뒤에는 마구간이 있어서, 예수그리스도릐 성탄도 된다. 아기와 여자가 광배가 있으니깐 서양의 미술 기독교의 문맥에서 이것을 그린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정말로 서양문명을 던지고 살고싶어서 왔을까 싶다. 아니라면 파리의 고객을 염두에 두고 그린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가능하다.
    • 아주 고갱을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 그당시만 해도 인종에 관심이 많았다. 골상학. 무거울수록 머리가 좋다 유럽인이 최고로 머리가 좋고 - 그때 샘플은 스무개정도밖에. Eugenic theory - 미개지의 사람들은 타고날때부터 열등 - 서양문명의 관심거리가 된다. 이러다가 일본이 강국이 되어 - 일본사람들은 두개골이 영국사람과 굉장히 비슷하다 ㅋㅋㅋ이런식의이야기. Social darwinism 적자생존 - 제국주의로 팽창하면서 그런 논리가 지배하던 때 . 고갱이 그린 것도 타히티- 피부가 까만 여자들이 섹시하다거나 서양남자들의 그런 엉뚱한 판타지라고 보기도 한다.
    • 반고흐와 달리 굉장히 상징주의적이고 지적인 그림이다.
  • 1898 the white horse
    • 무르익은 녹음 속의 빨간 말, 모더니즘적인 자의적 색채적용 - 그림은 그림 자체의 구성원리에 의해서 이세상과 달라도 그 속에 그색을 그려넣을 수 있다.
  • Gauguin be in love, you'll be happy 1889
    • 그림이 크고 작은 조합으로 이루어져있다.
    • 오른족 위가 고갱의 얼굴 어린이들이 손가락을 입에 집어넣고 있고, 한소으로 여자의 팔을 꼭 잡고 있고, 아래에는 여우, 그위에는 늙은 여인이 양손을 얼굴에 대고 있ㄷ. 뿌리치려는 여인의 손을 잡고 사랑하라, 그러면 행복할것이다. 라고. 말하는듯.
    • 여우는 인디언의 심술궂음. 늙은 여인을 - 페루에선 사람을 미이라로 만들어 집어넣을때 앉은 자세로 넣는다. 페루의 미이라와 같을 뿐 아니라, 늙은 노년을 상징하는. 수수께끼같은 목판이지만, 굉장히 거칠게 깎고, 몸이 여기저기에 배열되어있고, 뭔가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이 표출된듯한 파격성이 보인다.
  • Where are we from, what we are where are we going? 1897
    • 딸이 독감으로 죽고, 덴마크부인이 돈안부침,
    • 고갱 자살시도, 살긴 살았는데 위가 완전히 망가짐. 세폭 제단화 그림
    •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철학적인 제목.
    • 여기에서 사람들은 오른쪽을 유년기, 가운데를 청년기, 왼쪽이 노년기.
    • 인생의 여정을 나타내는 그림이고, 사람을 영혼의 여행. 배경이 푸른색으로 차있어서, 시간이 정지된 공간을 의미한다. 어린아이 두 여인이 있고, 가운데엔 과일을 따는 여인의 모습, 타히티의 조각.
    • 여러가지 해석이 많은 중요한 작품이다. 인생을 그렇게 그리는 것이 이시기 유행이다. 인류의 전개과정, 인생, 이런것이 당시 분위기.
    • 결국은 고갱이 그런식으로 하다가 결국 혼자 1903년에 외롭게 죽는다.

       

       

    세잔

    세잔은 아버지가 은행가. 재산을 상속받아서 적어도 팔기 위해 그림을 그릴 필요는 없다. 자수성가한 아버지가 세잔을 보면 뭐라 생각할까. 세잔의 엑스 앙 프로방스 - 아를르에서 멀지 않은 남부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이때 세잔의 친구가 에밀 졸라. 에밀졸라가 먼저 파리 상경, 마리의 그림을 두둔하는 글을 쓰고 목로주점으로 유명해짐. 세잔을 올라오라고 종용하는 편지도 씀.

    Masterpiece라는 소설을 씀. 화가가 그림을 인정을 못받는 사람인데 한 작품을 완성하고 자살했는데, 그걸 보면 꼭 세잔같은 생각이 든다. 졸라에게 얘기는 하지 않고 엑상프로방스로 돌아와서 20년동안 그림을 그렸고, 생 빅투아르 산 같은걸 그렸다.

       

  • Uncle dominic, 1865
    • 세잔은 처음에 그림을 잘 못그렸던 것 같다. 이사람은 재주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잔이 주는 교훈은 - 추구하는 것을 찾으려고 끈질기게 노력, 실패한 화가라고 생각 끝까지 했지만, 많은 새로운 것이 제시되었다.
    • 하지만 초기그림을 보면 무겁고 거칠고 엄숙한 그림을 그렸고, 물감을 두껍게 그려서, 편한 느낌을 주고, 장례식 그림, 납치,
  • 납치, 1867
    • 왜곡된, 서투른 바로크적인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회의적으로 생각했다.
  • Modern olympia 18-- - ----

    여기서 벗어나거 1871년에 파리로 가서 73년 제1회 인상파전에 출품하면서 일상주의로

       

   

   

16강결강

2010년 5월 5일 수요일

오후 7:40

   

<<VORC017.WMA>>

4/28

>Modern Olympia, 1872-73

세잔느가 그린 모던 올랭피아. 마네의 그림에서 시작되었음. 올랭피아가 침대 위에 있고 흑인 하녀가 시트를 벗기고, 꽃이 있고, 앞에 앉은 사람이 고갱이라고 생각됨. 강아지도 있음. 모자를 벗은 얼굴은 자신의 얼굴. 색이 굉장히 밝아져서 파리에 와서 인상파를 배움. 붓터치가 훨씬 갈라져서 나오게 됨. 인상주의로 74년 전시에 참석함. 마네나 쿠르베의 경우 자신의 주관을 내세워서 시대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줬다면 여기서는 context문맥이 조금 달라졌음. 고갱은 옷을 입고 있고, 에로틱한 환상을 보여주는, 화가의 심리적인 마음의 상태가 투영되었다고 볼 수도 있음. 누드를 못그렸다고 함. 여성의 누드를 똑바로 보고 그릴 수가 없었던 사라. 그래서 이후에 나오는 누드도 중성적인 누드로 나감. 여성에 대한 두려움이 분명히 있었던 사람. 결혼을 하여 아이도 있었다고 하지만, 거의 함께 산적이 없었다고 함. 자신의 심리적인 투영. 실제 그림 자체는 마네의 올랭피아에서 유래된 그림.

   

   

>하우스 오브

다시 엑상 프로방스로 돌아가기 전까지 인상주의 시대. 목을 멘 사람의 집. 제목도 괴기스러움. 인상파 전시에 출품했던 작품. 피사로의 도움. 빛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서, 빛이 환하게 비쳐지는 것이 보인다. 인상파에 CKADUGot지만 인상주의와 다른점은 섬세한 모네와 같은 것을 혐오했다고 함. 굉장한 견고성이 느껴진다. 모네나 르노와르의 경우 햇빛이 비치면 윤곽선이 보이지 않게 눈부시게 처리되어야, 그러나 구조와 견고성을 잃어버리고 싶어하지 않았음. 아웃라인 치는 등. 조형성에 관심이 많았음. 초기의 강하고 무거운 색에서 변하여 세밀하고 작은 붓터치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광선보다 조형성이 앞서고, 전체의 강한 구성의 느낌을 준다. 완전한 대칭이 아니고 지붕이 강한 어두운 형태에 비해서 대조되는 형태를 만듦. 구성의 대조, 대립, 대칭관계를 굉장히 강조했음. 그러면서도 세잔느의 그림을 보면 편안하게 활짝 퍼지는 그림이 없음. 좁은 통로, 복잡하고 간접적으로 빠지는 도로 등이 나옴.

   

임파스토. 두꺼운 물감을 툭툭 바르는 것이 집의 벽 처리에 보임. 붓보다는 팔레트 나이프로 칠해서 구조 뿐 아니라 질감 면에서도 굉장한 견고성을 보여주는 작품.

   

>still life with commode, 1887

졸라의 문제 때문에 결국 다시 자기가 태어나 자랐던 엑상 프로방스로 돌아갔음. 세잔느는 거의 전설과 같이 매일 아침 생 빅토와르 산(몽상 빅토와르)에 배낭을 메고 가서 그림을 그리거나, 날씨가 나쁠 때는 집에서 정물을 그렸음.

   

정물. 이 사람이 진정한 인상파라면 빨리 보고 끝내야 하지만, 하나를 끝내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렸음. 사과가 썩어 없어지니까, 대용의 물건을 가지고 그렸다고 함. 몇 달씩 그리니까 앉은 자리가 고정되지 않음. 조금씩 자리를 움직여서 그렸음. 처음에는 문제가 없으나 시점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음. 탁자의 시작과 끝 모서리가 맞지 않는 등. 대상들 하나하나가 다 다른 시점으로 본 것들. 테이블보도 치켜 세워져있는 것처럼, 원근법이 저렇게 보일 수가 없음. 대부분의 항아리도 위에서 본 것과 앞에서 본 것이 섞여 나타남. 물건 하나를 그릴 때도 앞에 있고 멀리 있는 것을 생각하여 그렸음. 뒤에 있는 게 안 보이니까 둘 다 보이게 하려고 치켜 올림. 3차원의 깊이가 2차원의 평면으로 전환되었는데, 어떤 것은 2차원이고 어떤 것은 3차원으로 남아있어서, 그 사이의 긴장감이 나타나게 됨. 기본적으로 옛날식의 교육을 받아서피카소 평면을 주면서도 깊이를 주려고 노력했음. 그러한 것이 겹겹이 이 작품에서 나타남.

   

코모드=찬장. 찬장이 있는 정물. 기본적으로 세잔느의 시점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게 되어있음.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점은 공간을 한정시킬 수 있음.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면 넓게 설정되어 컨트롤이 힘듦. 모든 중심은 항상 중앙이 되어, 중앙집중적. 흥미로운 많은 것들이 중앙에 있음. 이러한 것은 다시 고전으로 돌아가는 것. 안정되고 한정된 공간의 느낌이 있고, 그 중앙에 가장 흥미로운 형태와 색채들이 모여있음. 주변에는 직선적인 형태가, 가운데에는 곡선적인 형태가 많음. 우연하면서도, 상당한 배치의 노력이 아주 강하게 들어간 작품. 테이블보는 굉장히 복잡한 형태이고, 이 정물의 구성에서 가장 이질적인 형태. 산과 같은 볼륨감을 가지고 있다. 엄청난 구조를 보여주는 것. 묘사적인 테이블보보다 구조 자체가 산과 같은 구조를 느끼게 함.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의 대조, 대비가 우연하게 보이는 것 같은 정물에 아주 질서가 있음,

   

   

>사과와 오렌지, 1899

굉장히 장황한 것이 테이블보. 묘사라기보다 구조적. 뒤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 치켜 올라갔음. 여기에서 화려한 색으로 되어있고, 앞에 있는 것보다 뒤에 있는 사과들은 더 작아야 함. 큰 것들이 앞에 있는데, 작아보이는 사과도 있음. 같은 위치에 있으니까 앞에 있는 것도 뒤에 있는 것처럼 보임. 사과 등의 형태가 아주 사실적인 형태보다, 기하학적인 원형과 원주형으로 보임. 모든 것이 굉장히 건축적. 샤르댕의 굉장히 섬세하고 질감, 색채를 구사한 것에 비해서 세잔의 사과는 그러한 것도 살리면서 구조와 평면화된 색채까지 모두 다 살리려는 노력이 강했음. 이것이 그에게 매우 중요한 과업이었음. 입체(3차원)와 평면(2차원) 둘 다 살리려고 노력했고, 순간적인 시각과 밑에 깔린 영원한 구조적인 것이 팽팽하게 공존함. 우연하게 큰 그룹과 작은 그룹, 안정과 불안정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음.

   

   

>큐피드가 있는 정물, 1895

높은 데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치켜 올라가는 구도. 어떻게 보면 일본 판화에서 많이 나왔음. 그렇게 보기에는 큐피드가 너무 커보임. 실제 세잔느가 죽은 후에 그 방에 큐피드가 있었다고 함. 큐피드와 사과의 구조를 비교해보면, 여기서는 큐피드가 지나치게 크게 그려졌다. 당시의 미술가들이 사용한 석고 큐피드가 이렇지 않은데, 그의 그림에서는 비례가 과장되었다. 원래 그림대로 하면 61cm가 되는데, 실제 큐피드의 비례를 맞춰보면 46cm 정도로 그려야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강조했음. 인물의 대신으로 생각하는데, 가장 색채가 없는 것이 큐피드이고 가장 화려한 색채를 가진 것이 사과. 큐피드는 몸이 정면이 아니라, 상당히 많이 틀어서 서있음.

   

각도가 굉장히 복잡함. 탁자, 석고상, 사과, 마룻바닥에 세잔느가 그린 캔버스가 놓여있음. 화실에서 그린 그림. 여기에서 보면 바닥이 탁자보다 훨씬 아래에 있어야 하는데, 탁자와 거의 같이 서있고 연결시켜서 마루가 애매하게 처리되어 있고, 뒷면이 경사진 것처럼 보임. 공간이 애매모호하다. 이미 정물을 그린 그림이 놓여있음. 사과를 그린 그림. 탁자에 있는 양파. 양파가 마룻바닥에 놓인 정물에 그대로 연결되어 있음. 양파와 정물이 원근이 상당히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결되어 보임. 공간이 굉장히 압축되어 나타남. 양파와 캔버스가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리가 있는 것. 강렬한 색이 앞에 치중되어 있고, 점점 희미해지고. 찬색이 뒤로 가고 빨간색이 앞으로 가니까, 훨씬 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파란 사과가 더 커서 앞에 있는 것처럼 보임. 뒤의 사과와 앞의 사과의 원근법이 애매하게 없어져서 굉장히 평면화되어 보이게 됨. 이러한 것들이 어떻게 생겼을까?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당히 명백함. 2차원과 3차원, 순간성과 영원성을 양립시키려는 노력. 원형의 구조??을 하다보니까 이러한 작업이 나오게 되었음. 피카소와 마티스에 가면 원근법을 완전히 없애는 추상 쪽으로 나아갔음. 그러한 면에서 세잔느가 상당히 과도적.

   

cf. 18세기 샤르댕이 그린 사과

사실적인 묘사. 원근법과 빛에 의해 묘사했음. 세잔은 아웃라인을 주어 사과를 강조했음. 사과의 뒤는 보이지 않아야하는데, 밝은 색을 칠해서 뒤에있는 것을 다 치켜올리는 것처럼 보이게 됨.

   

   

>bay from l'estaque, 1886

남부 프랑스 아를르, 그 옆에 프로방스, 마르세유. rm 옆에 작은 레스탁이라는 곳이 있었음. 나중에 피카소와 브라크가 여기에 와스 그림. 앞에 있고 뒤에있는 원근법이 형성됨. 밝은 노란색이 파란색보다 잎에 있는 것 같아서 3차원의 거리감이 생겼음. 파란색 같은 것이 평면으로 그려져있지만 노란색이 앞서서 원근법에 따라 바다가 뒤에 있음을 알게 됨. 이러한 형태가 인상파와 같지 않고 대담하게 넓은 면으로 맣이 그려짐. 형태가 인상파처럼 광선과 분위기에 의해 완전히 해체 되지 않음. 앞에 있는 가장자리가 입방체적인 색채로 나타나게 됨. 이때에 세잔느가 한 말, "나는 이 세상을 원통, 원뿔, 구로 보고싶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그린 그림은 존재하지 않음. 그의 말을 정작 실현한 사람은 피카소. 기하학적 형태로 집을 그리고. 그러나 세잔느는 과격하게 보이는 세상에서 떠날 수 없음. 젊었을 때 인상주의를 하며 자라서, 이 세상에서 과감하게 변화를 가져올 수 없었고, 말만 그렇게 했던 것. 작가의 말과 글과 그림에서 괴리가 있기도 함. 세잔느의 경우도 실현되지 못한 케이스.

   

   

>Mt. St. victoire, 1886-88

완전히 돌산이고 나무가 거의 없음. 세잔느가 이 산을 죽을 때까지 20년을 그림. 이 산은 그냥 산이 아니고, 그에게는 거의 물신(패티쉬). 상징적이고, 자신을 지탱해주는 것이었음. 여기서 산을 그리면 대강 거리감이 100m는 되어 보임. 지평선이 보이고, 산이 보이므로. 사진을 찍었을 때 보이는 거리감에 따르면,/ 아직도 거리감이 상당히 남아있어서, 앞에 있는 나무 때문에 원근을 느끼게 됨. 나무를 설정하니까 화가가 그 위치에 서있는 느낌이 남. 나무가 없었더라면 원근이 애매할 수 있다. 나무에서부터 집을 지나 산이 보임. 거리감, 3차원의 공간이 설정되게 됨.

   

그러나 나뭇가지와 파란 잎이 마치 바로 산 위에 있는 것처럼 보임. 산 바로 위에 나뭇가지가 있는 것 같음. 오히려 산이 희미하게 그려져있으니까, 훨씬 더 원근의 느낌이 남. 희미하게 그리지 않고 아웃라인을 통해 강조했음. 거리감??. 어떻게 보aus 2차원으로, 어떻게 보면 3차원으로 보임. 공간 역시 탁 트여진 공간을 그리지 않고, 굉장히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서 그렸음. 결국 산이라는 것은 멀리서도 보이고, 가까운데서도 보이는 식으로 그려져있음. 그가 그린 것은 사진에서 보는 사실적인 산의 모습이 아니라, 어떠한 구조를 그렸고, 색채로서 구조, 거리감을 표현하고자. 순간적인 자연을 표현했지만, 아래에 깔린 구조를 표현함. 아직까지 순간의 느낌을 가지는 것은 나뭇가지가 변화가 많아서 순간적으로 흔들린다는 느낌을 받음

   

   

>1897

순간의 느낌이 없어짐. 나뭇가지가 없어지고, 우리가 보는 것은 웅장하면서 완전히 부동적인 전체의 형태가 들어오게 됨. 쇠라와 같은 확신은 없었음. 확신을 가지고 구조를 적용시켰음. 항상 실패를 거듭하면서, 인상주의를 미술관의 그림처럼 견고하게, 푸생과 같이 고전주의의 견고함으로 그리고 싶다고 함. 이 쯤 되면 특정한 시간대의 순간적인 느낌이 사라지고, 광선이 지속적이고 일관된 것으로 바뀜. 색면을 보면, 붓터치가 일관적으로 변하게 되었음. 붓을 넓적하게 해서 발라감. 그 전에는 훨씬 더 잔 붓터치로 순간을 묘사했다면, 여기서는 턱턱 바르는. 사각형의 기하학적인 형태같이 보이게 됨. 면의 연속으로 그리게 되었음. 결국 외형적인 모습을 그리기 보다는 본질을 그리려고 했음.

   

   

>1906

그가 죽는 해에 그린 생 빅토와르 산. 완전히 터치가 아까 보던 것과 같이 되어ㅇ. 모든 것은 면으로 연결되어 있고, 면 하나가 색채도, 광선도, 구조도 표현하게 됨. 촉각적, 시각적인 것과 구조가 합쳐져있음. 이것이 그의 산. 오래 볼 수 있는 절대적 안정감과 변치 않는 구조, 그러면서도 생생한 순간의 느낌이 전달됨. 모네는 자연을 순간적인 것으로 이해한 것에 반해, 지적으로 이해했음. "모네는 눈 밖에 없다. 그런데 그 얼마나 대단한 눈인가." 자신은 머리로. 그렇다고 해서 세잔느가 자신감이 없었고,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죽었음

   

cf. Durand, study of nature, vermont

미국의 허드슨 강 화파. 사실적인 풍경에 가까움. 모든 사소한 것들, 신비롭고 경이로운 느낌을 주는 자연. 구석구석을 탐험하는 신비감. 황홀한 풍경. 아주 잔 것들, 구석구석을 탐구하는 것은 세잔느에게서 없어지고 산은 하나의 큰 덩어리로 한 눈에 전체를 보게 함. 하나하나 보는 것에 비해 하나의 구조를 한 눈에 보게 하는 산. 풍경이라도 완전히 다름.

   

   

>boy with a red vest, 1895

뒤의 공간. 커튼으로 공간이 완전히 막혀져 버림. 넓게 깊은 공간이라기 보다. 뒤에 있는 공간이 인물을 완전히 압도함. 거기에 소년이 서있는데, 그의 얼굴이 굉장히 예민하고 연약함. 이 인물보다 강렬한 것은 조끼의 색. 색채의 형태가 앞으로 밀어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실제는 소년의 팔을 보면 팔이 아니라, 커튼의 하나로 보이게 됨. 팔이 너무 길어져버렸음.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구조 상의 재배치로 되었음. 형태가 굉장히 단순한데, 그 속에 소년은 힘없이 서있음. 옷을 입고 있지만, 그를 겹겹이 싸고 있는 압박감에 얼굴이 파묻혀진 것처럼 보임. 핵심이 되는 빨간색은 정열적인 빨강보다는 차가운 빨강. 전체적으로 우울하고 회의적이고, 그러나 섬세하고 수줍은, 갈등을 보여주는 얼굴. 카운터 리듬.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려는 리드믹한 형태가 대조되는 작업. 왜 인간을 이렇게 그렸을까?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함.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1892

그가 그린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단순하면서도 신분이 낮은 사람들. 의사나 변호사 그리지 않았고, 정물도 굉장히 평범한 사과와 같은 것을 그림. 굉장히 단순한 형태. 전부 다 중앙에 모여있음. 사람들의 시선도 중앙으로 모이고, 거기서 일이 벌어짐. 벽의 파이프가 없어지면 끝까지 무한한 공간으로 멀어지는데, 벽이고 더 이상 공간이 없음을 시사해줌. 오른쪽 사람의 형태는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견고한 삼각형, 나아가 돔의 gudxol. 묵직한 커튼에 연결되고 오른쪽을 견고하게 만들어줌. 무게가 너무 쏠리게 되니까 왼쪽에 한 사람을 더 세워 균형을 맞춤. 전체적인 균형도 다시 고전으로 돌아가 삼각형 구도? 삼각형이 아니라 돔과 같은 입체적인 구성이라고 할 수 있음. 굉장히 구조적이고 강인한 질서를 보여주는 작품.

   

>five bathers, 1887

수욕도. 벗은 여인들의 목욕하는 그림. 여성의 몸을 느낄 수 있지만, 그에게 있어 여성 누드는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고, 인위적인 자세를 많이 보여줌. 거의 구조의 일부분. 삼각형의 구성. 여기에서 마드모아젤 아비뇽의 하나의 프로트 타입이 되었음.

   

>대수욕도, 1906

그가 그린 마지막 여성. 여성 누드보다는 구조를 지탱해주기 위한 형태에 더 rkRKdna. 감각적인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고, 하나의 구도에 맞춰지는. 누워서 우리를 인도해주는 화살표, 중앙을 보게 하는 구조의 역할을 함. 삼각형을 만들어주는 역할. 세잔느는 남성누드는 별로 안 그렸고, 누드들을 굉장히 많은 해석을 하게 함. 양식적인 혁신.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함.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 내용상으로 연구하려는 노력이 많아서 자전적인 면에 대해 해석하는 경향이 많이 있지만, 모든 것이 확실치 않음.

   

후기 인상주의의 네 작가. 프랑스의 전성기. 1950년대 파리는 이미 전성기가 아니라, 19세기 말~20세기 초가 파리가 중요한 화가들의 도시였음. 이때에 일련의 젊은 작가들이 있었음. 고갱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람. 일명 나비파. nabis 나비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예언자. 틀에 박힌 미술을 거부함. 미술이 너무나 부르주아 취향이 되었다. 거기서 벗어나고자 했던 사람들. 상당히 브루주아 적인 그림을 그렸지만, 자신을 나비라고 불렀음.

   

paul serusier, tailsman, 1888

고갱이 퐁타방에서 그림을 그릴 때 그도 가서 그렸음.호수와 나무가 있는 곳에서 그림을 그림. 집이 보임. 고갱이 지나다가 세르지에에게 충고, 그림자가 파랗게 보이면 니가 사용할 수 있는 순수한 파랑을 칠하라. 그가 충고를 받았지만, 화폭이 없어서 시가박스에 그림을 그린 것이 바로 이것. 부적이라는 제목을 붙임. 굉장히 작은 그림. 완성된 작품을 보면, 우리가 보던 어느 그림보다 추상의 경지. 물의 반영, 물 위에 있음. 고갱이 그렇게 하니까 강하고 순수한 색채를 썼음. 고갱의 레슨은 그림이란 더 이상 보는대로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색채를 리듬감있는 패턴으로 그리는 것이다. 세르지에가 다시 파리에 와서 자신의 친구들에게 이야기하여 나비파가 형성되었음. 세르지에 이외에도 모리스 드니, 뷔아르, 보나르 등이 있음.

   

Maurice denis

"그림이라는 것은 그것이 전쟁터의 말이거나, 누드이거나, 또는 어떤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이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일정한 질서에 의해 그려진 색채배열로 된 표면이다." 그림을 기본적으로 색채 배열, 즉 추상으로 본 것. 이것이 나중에까지 많이 이용되었음. 그러나 드니의 그림을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음. 이 그림을 보면 고갱의 영향이 보임. 평면의 색, 아웃라인. 고갱과 같은 과감한 표현은 보이지 않고, 부드럽고 은밀하고 창백한 신비스러움을 보여줌. 마치 프라안젤리코 같은 류의 그림들을 모리스가 그렸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 그의 그림은 예언자에 가깝지 않았음. 보이는 세계, 인상파처럼 그리지 않느가. 실증주의, 물질주의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보이지 않느 세계로 가려는 움직임이 강했음. 인상주의는 쾌락적이고 부르주아 적인, 눈을 즐겁게 하는 미술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되고, 상징주의 세기말 사상, 회의주의, 비관주의가 도래하여 지식인과 예술가는 보이는 세계에서 떠나기 시작. 나비파는 신비스러운 의식을 하기도 함. 자기들의 모임장소를 temple이라고 해서 옷을 입고와서 의식을 하기도 하고 아편을 피기도 했음. 신비주의적인 종교집단이 이때에 많이 생기고, 기독교가 많은 도전을 받기 시작.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밝혀지면서 우리가 아담과 이브의 후예가 아닌 침팬지의 후예? 기독교가 수세에 몰리기 시작함. 이때에 이러한 사교, 종교집단이 많이 나오고, 나비파도 이러한 것을 많이 했다고 함. 이 시대의 분위기.

   

   

>vuillard, 타피스트리 앞에서, 1899

뷔아르 보나르 같은 사람은 가정집 주제. 분위기가 친밀감과 은밀한 느낌을 주는 그림을 많이 그렸음. the intimist(앙티밋) 은밀한 분위기의 그림을 많이 그렸음. 아카데믹한 트레이닝에 싫증을 느끼고 새로운 색채에 관심을 가졌고, 일본 판화에 심취해있었음. 에꼴 데 보자르에서 전시를 크게 하면서 거의 절정에 이르렀음. 일본 색채와 디자인에 영향을 많이 받음. 중산층의 실내를 많이 그렸음. 화면이 완전히 색채로 덮임. 그림이라는 것이 색채의 배열이라고 한 것처럼. 거의 표면이 색채의 배합으로 덮임. 사람들이 보이는데, 뒤에 있는 직물로 된 벽장식과 앞에 있는 사람들이 거의 분리되지 않을 정도로 벽지와 옷의 패턴을 통해 혼란스럽고, 원근법이 눈에 들어오지 않도록 됨. 자기만의 유화를 사용하지 않는 특수기법. 아교를 썼다고 함. 오일을 쓰지 않은 다른 색채의 형태가 보임. 형태가 서로 구별되지 않고 굉장히 불분명한 시각적인 혼란을 주는, 색채에 덮인 표면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음

   

>작업실, 1893

벽과 사람, 책상이 있음. 여자가 입은 옷의 패턴과 벽지의 패턴이 비슷해서 경계가 불분명하고 화면이 장식적으로 보여짐. 옷을 마드는 직업이었다고 함. 천의 패턴같은 것에 관심을 가지고서 자신의 작품에 많이 쓰게 되었음. 친한 친구들과 속삭이는 듯한 느낌. 그래서 앙티미스트라는 이름이 붙여졌음.

   

>Bonnard, lundheon at grand lamp, 1899

원근이 있기는 하지만, 색채로 덮인 표면인 듯. 마티스의 후식과 굉장히 비슷한 식탁. 중산층 가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음. 작은 붓터치로 화면이 덮여있음. 보나르에게 사람이 중요하지 않고, 사람과 물체가 거의 똑같은 중요성. 정지된 물체들이 비밀스런 대화를 하는 듯한. 물체나 대상의 위치에서 글미을 바라보는 듯한. 사람이 화면에서 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점차 사람이 눈에 띄기 시작하는 그의 그림. 너무나 대상을 앞에 놓고 그리면 불편해져서 이러한 그림을 그렸다고 이야기 함.

   

>베르농의 테라스, 1908

20세기에 넘어와서 어마어마한 호평을 받는 작가로 변함. 아까보다 훨씬 화려한 색채로 덮여지게 됨. 신선하고 화려한 색채화가로 변신.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사람부터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특이한 각도로, 물건의 장소에서 보는 듯한 특이한 각도와 사람들의 모습. 이런 것이 보나르의 여러 관점에서 본, 정지된 물체들이 속삭이는 듯한 느낌을 줌. 1940년대까지 살아서 오래 살았음. 추상표현주의 초기 작가들에게도 상당히 그의 전시가 영향을 미치게 되었음. 화려한 색 때문에 인기가 많음

   

>Four Panels for the Screen, 1892

일본 판화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줌. 색조와 패턴이 장식적으로 사용되고 있음

   

   

   

17강

2010년 5월 3일 월요일

오후 2:00

   

<<오디오 녹음.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5월 3일 월요일 오후 2:01

상징주의 - 이전까지 본것들은 대개 유명한 작가들. 이제부턴 익숙치 않은 작가들이 많다. 상징주의.

느낌이 신비스럽고 애매모호한

상징주의란 것이 왜 이무렵에 중요하냐면 - 여태까지 쿠르베 마네에서 보는 보이는 세계를 그렸다고 하는데 - 1880년대부터는 보이는세계를 너무나 물질적인 세계라고 배격하고 더 고차원적인 관념인 세계 신비로운 세계 환상의 세계를 지향하는 상징주의가 등장. 미술보다 문학이 앞장섬. 말라르메 등. 새로운 영역의 개척 - 인간내면의 세계와 감정의 세계. 전체를 훑어보면 서양미술사에서 르네상스란 종교적이야기라도 눈에 보이는 것만 그리고 이런것이다. 보다보면 그렇지 않은 것들은 낭만주의적 부위기.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라인에서.

말라르메 - 대상을 묘사하지 말고 그것이 자아내는 효과를 그려라. 이들이 지향했던 건 때묻지 않은 표현, 여태까지 타부시되던 주관적인 경험이나 개인적인 것 내성적인 것을 파헤치려고 했다.

   

  • Pierre puvis de chavannes, 성스러운 숲, 1884
    • 피에르 퓨비 드 샤반느 퓨비
    • 전통적인 아카데미의 질서, 고전, 평화로운 모습의 고전주의같다고 느낌이 드는데, 여기서는 아카데미그림에서 보듯 이야기를 읽을 수가 없다. 아카데미와 차이점! 이야기가 잘 읽혀지지 않고 - 시와 같은 것이다.
    • 모든것이 시각적 조형을 통해 전달되도록 - 상투적 아카데미즘에서는 벗어남 - 화가들이 혼란에 빠짐. 중도파는 어떤길을 가야 할지 몰랐을 때 푸비 등이 지나치게 상투적이지도 않으면서 너무 식상하지도 않은 길 제시.
    • 공간의 깊이가 상당히 압축되어있고, 창백하고 맑은 색조 - 세부적인 표현을 억제
    • 옛날같으면 훨씬 공간감이 원근이 많이 나타나야 하는데, 3차원의 깊이를 축소시키는 공간 압축만 해도 상당히 과격한 편
    • 쿠르베보다 어리고 마네보다 나이가 많던 - 전혀 사실주의나 낭만주의에 영향받지 않았다. 처음에는 살롱에서 거절받다가 나중에는 상당히 인정받는 화가
    • 벽화란 것은 기본적으로 평면이기 때문에 단순화 윤곽선을 강조해서 몇마디로 시처럼 요약하고 싶다.
    • 나중에는 내적인 힘이 부족, 너무 관념적이고 변하질 않고 되풀이만 해서 나중엔 별로 따르는 사람이 없다. 전성기엔 상당히 명망있었다.
  • 가난한 어부 1881
    • 원근감이 없진 않지만 뒤가 올라와있다. 사실의 묘사가 아니라 상당히 평면화되어있다. 아카데미에 비하면 상당히 .
    • 그래도 균형과 훈련. 포즈 배경 구도등에서 전통적인 훈련이 보인다.
    • 하지만 주제의식상 굉장히 난해하다.
  • Odilon redon, 에드가 알란 포우에게, 무한대로 여행하는 이상한 풍선과 같은 눈
    • 반 고흐 고갱보다 조금 나이 많다.
    • 그림과는 달리 나이스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다. 미술만 좀 이렇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의 합리성에 따라 그리는 것이다." 상징주의가 어떻게 정의내리는가 Aurrer오리에"상징주의란 아이디어를 감각할 수 있는 형태로 옷을 입히는 것이다."
    • 르동 - 꿈과 같은 신비스런 세계를 보여주려.
    • 동물 식물 형태를 많이 이용. 친구가 식물학. 현미경으로 조그만 식물 곤충들을 어렸을 때 많이 보앗다고 한다.
    • 르동은 사실 건축공부를 해서 - 공간개념 광선 어두움이 건축적 훈련을 느낄 수 있다.
    • 르동의 그림은 유화보다는 목탄 에칭 석판화 재료를 많이 사용했다. 이그림도 석판화.
    • 키아로스쿠로 - 명암법 chiaro scuro - 어두움과 밝음- 을 최대한 살리고, 마치 꿈에 보는듯한 이미지를, 홀린것같은 느낌을 준다.
    • 당시 에드가 알란 포우의 시와 소설이 유럽에 알려지면서 - 에드가 알란 포우에게 바치는 - 눈 - 고대에서부터 영혼, 마음의 창으로 상징. 원구란 것은 광선, 생명 이런것을 나타내서 이런류의 이미지들을 많이 보여주었던 사람이 르동이다.
  • 르동, 순교자의 머리, 1894
    • 어찌보면 형태가 구체적이고 전통적인 양식인데, 신비스럼고 꿈에서나 볼듯한 이미지이다. 여기서 보여지는 이런 키아로스쿠로나 형태같은 것이 어떤 자는 이것을noir picture라고 해서 검은색이 벨벳과 같은 신비스러운 검은색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 이런것들이 나중에 초현실주의로 연결되는 등 상징주의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 멜피스토 1877 (파우스트 악마)
  • 거미, 1881
    • 거미가 웃고 있는데
  • 꽃항아리 1890
    • 나중에는 색채를 많이 사용. 꽃을 보면 전혀 배경이 없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꿈 잡혀질 듯 하면서 사라지고,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굉장히 낙천적이고 괴기하지만 즐거울 수 있는 것이 르동의 세계이다.
  • 귀스타브 모로 gustave moreau, salome, 1876
    • 환상적 데카당한 유혹의 분위기.
    • 모로는 나중에 국립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가 된다. 이 사람의 반에 루오와 마티스가 있었다. 자기자신은 이런 그림을 그렸지만, 마티스가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이끌어주고 인상주의를 배우라고 권함.
    • 평생 독신, 어머니와 친했고, 잘살았던 것 같다. 화가의 집이 미술관이 된 경우가 귀스타프 모로 미술관.
    • 팜므 파탈의 이미지
      • 이무렵만큼 팜므파탈의 이미지가 많은 사람의 상상력을 발휘하게 했던 시대가 없는데, 그러한 이유가 바로 빅토리아 시기에는 얌전하고 순종적인 여성이 덕목이었지만, 순결한 여자는 마돈ㄴ, 타락한 여성은 막달라 마리아.
      • 타락한 여성들이 이무렵 대중매체에서 많이 등장하고 대체로는 비극적 삶으로 끝을 낸다.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보면 이때부터 여성운동이 시작, 참정권 운동이 나오고, 그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도시가 커지고 직업이 나타나면서 신여성 - 직업을 가진 여성이 나타난다. 여태까지 여성은 코르셋으로 몸을 조이고 다녔는데, 코르셋을 집어던지고 관습을 집어던지고 자유롭게 살려고 하는 신여성이 등장. 옷도남성들의 자케을 여성화해서 입고 나타나는 이런 류의 것 - 입슨의 인형의 집 - 가정을 탈출, 성해방..
      • 팜므파탈의 유행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굉장히 성적인 매력이 있는데 파괴적인 여성을 나타내고, 팜므파탈은 자기도취적 감각적 입술 권태적, 특히 중요한 것이 noodle style머리카락이 길게길게 웨이브 남성을 지배하는 상징 - 그런류의 것들이 많이 나타남. 굉장히 데카당에 대한 매혹이다. 이시기.
      • 전반적인 세계의 기본적인 믿음이 혼란되고 무너지고 - 그리스도교가 예전과 같이 힘을 주지 못했고 사람들은 너무나 물질적으로 변해서 정신적 위기를 느끼는 시기이기 때문에 -세기말적 - 모로에서 나오는 사치스럽고 데카당한 이런 팜므파탈은 세기말적 유행이다.
      • 기본적으로 이사람은 19세기 전통을 복합한 것이다.
        • 여성의 몸은 굉장히 고전적인 여성의 누드이지만, 과거의 고대의 시기에 대한 생각은 낭만주의적 분위기와 색채를 보여주기도 하고, 뭔가 신고전주의고증적이면서도 낭만주의적인 것이다. 게다가 데카당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 뒤를 보면 동방의 궁전, 헤롯왕이 있고, 헤롯이 살로메에게 춤을 추면 뭐든지 주게 하겠다 - 세례요한의 목을 달라 - 그래서 세례요한의 목이 나타난다. 시각뿐아니라 감각을 자극하는 - 나는 보이지 않고 느끼는 것만 믿는다. 굉장히 유혹의 분위기를 주는 것이 구스타브 모로의작품이다.
  • Jupiter and semele 1895
    • 이사람 그림들은 물감이 쌓여있는 분위기를 보여준다.
    • 앵그르 그림과 구도가 비슷 - 인간인 세멜레와 주피터와 사랑. 주티퍼를 세멜레가 조른다 - 너는 올림포스의 왕인데 제왕다운 제대로 된 모습을 한번이라도 보여줘라 - 드디어 제왕의 모습으로 나타나니까 인간 세멜레는 그 빛에 견디지 못하고 타버리는.
    • 여기서 보여지는 것은 그것보다 주변의 온갖 장식 식물 동물 건축 - 뭔가 알수없이 데카당한, 게다가 고고학적인 느낌이 난다. 실제 신화나 문헌과 전혀 상관이 없다. 본인이 만들어낸 이야기이고, 이사람은 이런 이국적인 거슬 좋아했고 공상의 미지의 세계
    • 표면에서 보석같은 효과.
    • 1886년부터는 전시를 전혀 하지 않고 완전히 고립된 생활을 했다.

         

         

         

      Henri de toulese0Lautrec

    아르 누보 - art nuveau - 에 속하는 사람이다. 굉장히 곡선에 매혹되는 운동.

    그때에 나타난 사람이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이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은 우리가 배운 사람중에 (왕족의 가문)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데 아주 귀하게 살았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고 다리가 부러졌다. 두번이나 . 이러면서 이사람은 성장이 멈추어서 어른의 상체와 아이의 다리를 가진 몸이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로트렉을 교육을 잘 시켜서 - 밖에 나가서 놀 수가 없으니깐 그림을 잘 그렸다. 나중에 파리에 가서 환락가 - 몽마르트르에서 생활을 하다 36살에 죽는다.

    자기자신이 그림에 자주 나온다. 물랑루즈 영화에도 나온다.

  • Touluouse-lautrec moulin rouge 1889
    • 저 뒤에 있는 사람이 로트렉. 사촌하고 잘 다닌다. 폴리베르제르 등처럼 파리의 캬바레이면서도 카페 콘서트 이런류의 장소가 있었는데,
    • 그가 제일 좋아했던 화가는 드가. 일상생활에 관심을 많이 가짐.
    • 이사람의 그림을 보면 - 이런류의 소위 연예인이라는 것은 일종의 소외계급 - 남을 즐겁게 하는 직업이니깐 - 대단한 가문에서 귀하게 자랐는데 몸은 이렇고 놀러온 나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 매춘부들을 보면 -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그렸다는 것이다. 보는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 사회적인 메시지보다는 거의 저널리스트처럼 그렸다.
    • 구성 자체는 내려다보고 올려다봐서 일본판화같은 영향을 받았던 사람.
    • 드가적 - 우연히 본것같고, 옆에 사람이 머리가 잘려있고 -
    • 전체 분위기를 확 좌우하는 게 저 얼굴. 얼굴 없다면 평범한 모임인데 - 상당히 얼굴이 조명을 받아서 푸르고 빨갛고 노란 머리를 하고 - 색이 충돌적인 색이라서 전체분위기를 확 긴장하게 만든다. 뭔가 캬바레의 분위기를 건전하지 않게 전해주는 효과.
    • 의자의 곡선 - 여기서 보여지는 옷이 이렇게 구불구불한 곡선같은게 많이 사용되면서 아르누보같은 분위기를 보여준다.
    • 드가와 같이 회의론자는 아니었던 것 같고, 캬바레 배우들의 즐거운 순간들이 묘사되는데, 그러면서도 끝은 항상 환멸이나 멜랑콜리 느낌을 준다.
  • Le goulue entering mulin rouge 1892
    • 석판화 - 도미에도 많이 했지만 1880년대에 채색 석판화가 나와서, 이런 색을 대담하고 강하게 써서 이것을 포스터로 만드는 것이 시작. 광고 포스터가 나오기 시작했고,
    • 먼거리에서 눈에 띄기위해서는 대담한 색채 평면구성, 구도디자인
    • 예술성도있어야하지만 상업적 디자인도 결합되어야한다.
    • 물랑루즈의 포스터. 로트렉때문에 당시에 여기에서 등장하는 연예인은 불멸의 연예인이 되었다.
  • Divan japonais, 1893
    • 까만장갑 - 이베트 길베르란 여자. 실제 있는 인물들이다. 연극 캬바레 여인들을 묘사했는데
    • 디방 자포네 - (의자 ) 캬바레 포스터. 일본 목판화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 자포네 - 벽에는 동양비단으로 바르고 부채로 장식, 여자들은 이국적인 기모노를 입고 대접했다.
    • 로트렉은 움직이는 형태에 굉장히 매혹되었다. 드가가 이런것을 그렸단 생각을 해야 한다 ㅋ
    • 드가와는 다르다. 드가는 오케스트라를 앞에 앉히고 무희를 뒤에 배치했는데, 여기에서는 뒤앞저쪽이 전체공간이 압축되어 나타나고 있다.
    • 여성의 실루엣, 악기의 선, 잔느아브릴의 치마. 굉장히 디자인적.
  • 사창가의 여인 1894
    • 해상도가 나빠서 - 이것은 일종의 로트렉이 잘 다니던 사창가 - 매독으로 죽었다.
    • 대부분의 사창가 보면 - 그야말로 아름다움이 없고 하나의 몸통으로 보이고, 지루하고 그런 류의 느낌. 대부분 나이먹고 둔하고 그런 사람들. 르누아르의 누드같은 천진난만한 점은 찾아볼 수 없는 사회상의 기호 어찌보면 도덕적일수도 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 이사람은 워낙 포스터가 대량생산되어서 유럽에 많이 퍼지게 된다. 이무렵 바르셀로나의 피카소도 파리의 툴루즈 로트렉은 알았다. 포스터때문. 피카소 초기그림에 창녀그림많이나오는것도 로트렉의영향.
  • Aristide Bruant dan son cabaret 1893
    • 형태를 보여주면서도 그림에서 형태를 보여줄 수 있는 능력 - 타고난 재능이었다고 할 수 있다.

         

  • Alphonse mucha, JOB
    • 광고가 대중앞에 커다랗게 보여지는 것이 이때 등장하는데 여자가 많이 나온다. 여기서 보면 담배를 피우고 있고, 여자가 바로 팜므파탈의 전형적인 여성이다. 체코태생으로 파리에 와서 당시 최고의 연극배우였던 사라 베른하르트 - 알퐁스 무카는 이여자의 전속포스터를 몇년간 만들었다. 머리카락, 누드스타일, 머리카락이나 약간 벌려진 입 등
  • James Ensor, 1889년에 브뤼셀에 입성하는 그리스도, 1888
    • 벨기에사람. 마스크 파는 가게 하는 집에서 태어남.
    • 마스트는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감추는 의미.
    • 쇠라의 그랑 자트 섬과 같은 크기. 벨기에에 쇠라 작품이 전시되어서 그것과 같은 작품을 만드렁야겟다고 생각하고 4미터가 넘는 작품을 그렸다.
    • 너무나 강렬한 색채와 형태. 눈 산만하고 어디있는지 모르겠지만 - 오늘날의 문제는 그리스도가 없는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무시당하는 것이다. 굉장히 사회비판적인 작품이다. 중간중간에 해골의 미이지가 있어서 - 잘 보면 죽음에 굉장히 관심잇었다.
    • 세밀하게 그려서, 세기말의 강한 비관주의를 감지할 수 있다. 이사람이 이시기에 이나라의 전통이 보슈나 피터 브뤼겔의 전통 후예랄 수 있다
    • 현대사회를 자신이 창조해낸 심볼로 표현했다. 굉장히 시니컬한, 도한 인간의 위선에 대한 작품이랄 수 있다.
    • Vive la sociale 사회주의 만세 - 사회주의 축제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기득권층 도덕적 이데올로기,
  • The intrigue
    • 굉장히 인위적인 색채로 달라졌다. 반 고흐가 개인적인 관심에 침잠, 이사람은 더 사회적인 것, 군중, 현대사회를 상징하는 도상이 되고, 마스크 - 실제 사실 마스크는 사람의 얼굴을 감추고 위협적이지만 이것이 실제 사람의 얼굴이다. 라고 말을 하고 있을수도 있다.

         

    뭉크

  • Death bed
    • 노르웨이 태생 - 어려서부터 굉장히 죽음에 예민했던 사람이다. 다섯살때 엄마가 죽었고 그다음엔 누나가 죽는다. 아버지는 의사. 맨날 기도만 했단다 응??
    • 뭉크 - 스칸디나비아 - 장학금을 타서 파리에 왔는데, 그린 그림들이 굉장히 뭔가 심리적인 작품들이 많다. 정신적인 고립, 불행한 생활이 그림으로.
    • 반고흐와 같이 표현주의적이라면, 뭉크는 불편한 이미지를 통해서 인간의 내면세계를 조명했던 사람이다.
    • 1889년에 파리에 와서 나는 인상주의자처럼 창가에서 뜨게질하는 여자는 안그리겠다. 숨을 쉬고 고통을 느끼는 사람을 그리겠다.
  • 칼 요한 거리, 1892
    • 노르웨이 오슬로의 그림 군중의 이미지가 다시 나타난다.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는데 하나도 정상적이지 않고 해골같다 서로 아무도 소통되지 않고 모두 유령과 같다. 오른족은 오히려 사람이 없는데 형태 이미지가 무얼까 하나의 불안함 두려움의 이미지로밖에 해석이 안되네. 큰 바윗덩어리???
    • 물감도 어떤 부분은 굉장히 짙게 어디는 옅게. 재료자체도 들쑥날쑥한 분위기, 이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디가서든지 철거당하든지 스캔들을 몰고 다녔다. 이사람이 파리에서는 익숙하지만 이사람이 독일에서 전시한다 그러면 진짜 난리난다. 전시거부.
    • 뭉크의 그림때문에 독일에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세제션segetion분리파가 생겨난다. 현대미술의 또하나의 출발점.
  • 절규 1893
    • 대부분의 사람이 잘 아는 - 나는 커다란 외침이 자연에 흘러가는 것을 느낀다. 이 그림을 그릴때를 묘사하기를 - 자기가 하루를 마치고 석양의 어둠에서 산보를 하는데 긴 다리를 겉는다. 두사람이 자기를 지나갔고, 나는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안되는 심정이 되었다.
    • 저 선이 소리일수도 있고, 저것이 해변가 도시다. 어찌보면 해변보다는 외ㅣㅁ의 형태일지ㅗ. 외침이 자연을 핏빛같이 왕왕왕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거의 여성으로 보이는데, 얼굴이 너무 해공같아서 거기로 시선이 가고 차례ㅏ례 붉은빛으로 이동한다 .시각적인 불균형감을 느기게 한다.
    • Mixed mdia를 사용해서 유화지만 긁어낸것같은 처리자체가 어떤때는 dry한 브러시, 시각적 심리적인 감흥을 주는 그림이다.
    • 현대인의 소외감 고독함을 다룬 것이고, 당시에는 이런 문제를 이렇게 직접적으로 다룬 화가는 없어서, 이런 인간적인 문제를 다룬 점에선 굉장히 인간적이다. 처음엔 그렇게 봤지만, 요즘엔 완전히 다르게 해석이 되었다. 요즘은 대중문화에 가지각색으로 해석된다. ㅋㅋㅋㅋㅋ
    • 릴레함메르에서 동계올림픽했는데 그림이 도난당했다.
  • 사춘기 1895
    • 이당시에는 인생의 여러가지 단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여성의 인생단계중 사춘기 - 실내의 침대, 여기 보이는 덜 성숙한 여성의 신체, 손으로 가린 자세, 소녀의 심리적인 상태가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하는데에 성공했다. 과장된 고립으로 느겨지기도 하나, 현대적인 주제고, 큰 눈 동작, 두려움을 느끼는 의식적으로 뭔가 두려워하면서도 기대하고 혼돈스러운 - 사진의 성을 의식하는 단계 - 편안하지 않은 마음 표현하고 있다.
    • 저 그림자가 무엇인가? 남성? 무엇일까

       

       

       

       

   

   

18강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2:03

   

<<18강.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2:03

  • MUNCH 사춘기1895
    • 실내분위기 포즈 - 사춘기 소녀의 심리나 상태가 시각적으로
    • 의식적으로 내면에서 생기는 두려움 갈등을 억누르는 - 그것이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인식, 결코 편안하지 않은 것이 드러나는
  • MUNCH KISS 1895
    • 남녀문제를 자주 다루었고, 남녀관계가 잘 되지 않았음.
    • 이남자의 문제는- 그여자가 너무 좋은데 이사람이 뭉크한테 잘하면 도망가고 -
    • 결국 뭉크가 나중에는 정신병원에 1908년엔가 노르웨이로 돌아가서 입원하고
    • 퇴원하고 그린 그림은 이시기의 그림과는 다른 2류급 화가가 되고 만다.
    • 키스의 장면은 회화뿐아니라 판화로도 제작되었다.
    • 이사람이 키스에 집중한것은 - 남성이 여성에게 위안을 찾고, 여성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 여성의 경우에는 붉은머리를 해서 어찌보면 뱀파이어라는 제목으로 붙기도?응?(요부)
    • 구성 - 두 인체가 하나로 통일되어잇고, 한덩어리. 구도단순. 인간의 깁ㄴ적이면서도 복잡한 심리를 이해하려고 하는 주제라고 생각된다.
    • 여기서 보여지는 두 연인은 절망적인 연인. 편안하고 감각적인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 죽음과연결되는.
    • 이때의 남녀문제를 다룬 세기말작가는 로댕 클림트 뭉크 초기 피카소 등- 유행하는 주제가 된다.
  • MUNCH, THE DANCE OF LIFE 1899-1900
    • 이당시에 낸 작품 중 하나가 생의 FRIEZE 라는 작업을 했는데, 서로 크기가다른 캔버스 22점 이건 그중 하나. 이 작품의 제목은 DANCE OF LIFE
    • 곡선을 많이 사용해서 아르누보같은 영향이 보인다.
    • 대조적인 세 여인 - 흰옷 - 상처받기 쉬운 순수한 여성, 가운데 빨간옷은 열정적인 여성, 까만색은 미움 환멸을 느끼는 여성.
      • 너무 의도적으로 대비가 드러나긴 하다.
      • 삶이란 무엇인가 심리적인 선택을 통해서 드러냈다.
    • 세기말 분위기 - 사회에 대한 환멸, 주제가 병, 사춘기 고독감, 절망적인 사랑, 욕망 질투 이런 모든것이 생의 단계,현대인의 인간적인 문제를 표현적인 색과 곡선으로 나타냈다.
    • 뮌헨에서 전시하려고 보냈는데 철거당했다. 그때 독일에서 분리파가 생긴다. 옛것을 잘라내고 새로운것을 시작한다는- 그래서 결국 독일에서도 새로운 모더니즘의 시작의 계기가 된 것이 뭉크 사건이다.

       

       

    상징주의 작가 두명

  • FERDINAND HODLER - 스위스 태생
    • 선택된 자들 - 19세기 미술의 중심이 프랑스였다면 19세기말엔 예술의 중심이 여러곳으로 퍼지게 되는데, 노르웨이나 스위스에서 많이. 1891년에 파리로 와서, 주로 풍경속에 인물을 배치하는 그림을, 종교적인 반고흐비슷한 사명감을 가지고있던 사람이다. 이사람의 주제도 삶 죽음 사랑 같은 문제였는데, 천사같은 사람이 있고 나무를 심는 어린아이가 보인다.
    • 미래의 희망 정신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 이런것은 룽에같은 독일 낭만주의에서 본적이 있다.
    • 풍경속에서 자연의 생명력과 리듬을 생의 근원과 연관시키려고 한 것 같은데, 느낌이 철학적, 확실하게는 파악이 잘 안된다. 이렇게 수직으로 연속적으로 된다든지 그런것
    • 평행주의라고 부른다. 선이나 형태 색채를 반복으로 수직 혹은 수평으로 계속 배열하는 구성
  • KHNOPFF, 스핑크스, 1896, 벨기에 작가
    • 귀족태생 귀스타브 모로의 제자, 벨기에 브뤼셀
    • 1883년 레벤(12)라는 회를 만들어서 당시 많은 진보적인 사람들이 참여한 모임의 작가
    • 초현실적 세계를 아주 사실적으로 그린
    • 표범의 신체, 여성, 남성과 뺨을 대고 있는, 꿈과 같기도 한, 잠녀가 같이 신체에 있는 안드로기니, 양성적인 표현이 나타난다.

       

    조각

    1876 청동시대

    • 19세기 조각은 카노바정도만 조각을 봤는데,
    • 19세기만큼 많은 조각이 제작된 시기도 없다. 오스망의 도시계획등으로 분수 기념비 석상등이 많이 제작. 그런것을 만들어서 국가라는 의식과 전통의 의미를 만들어낸 전통,
    • 도한 19세기는 예전에 교회 귀족들이 주문자였다면, 19세기에는 거의 정부기관 혹은 부유층이 후원자로서 많이 나온다.
    • 조각이란 그림보다 공공적 성격이 많아서 반고흐나 세잔등의 실험적 양식이 힘들다. 대부분이 고전주의적 조각이다.

         

    • 그래서 로댕은 19세기의 정점이랄 수 있다. 조각하던 사람들은 화가들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가가고 조각만은 고전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로댕또한 이런 기조에서 공부해서 고전의 전통을 파괴한 것이 아닌 전통을 기초로 개혁한 인물이다. 전통을 완전히 파괴한 사람은 피카소 보치오니등이고 로댕은 그냥 현대적으로 만든 사람.
    • 19세기 누구도 로댕을 뛰어넘을수가 없다. 많은 커미션, 당대에도 유명, 오래 살았고,
    • 국립미술학교 입학이 거절되어서, 브뤼셀에서 작업하고 있었는데, 처음 살롱에 전시한 것이 청동시대이다.
    • 벨기에 군인을 모델로 한 작품인데, time of sorrow였다 제목이. 이 작품을 하기 전에 이태리를 가서 많은 조각작품을 보았다. 많은 부분에서 다윗상과 미켈란젤로의 죽어가는 노예에서 자세와 얼굴이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보면 자세나 신체 모두 고전적이지만 얼굴이 너무 평범. 고전적 이상화된 인물이 아닌 평범한 인간.
    • 사진에 비해 정말로 아름답다. 왜 그당시 사람들이 이것이 조각이 아니라 주형을 떴다고 논란이 나왔는지 알 수 있을듯이 너무 아름답다. 섬세한 세부처리, 이때문에 등장하자마자 유명해지고 주문이 쇄도했다
    • 제목이 붙어있지 않은 작품인데, 이 청년이 아침에 일어나서 천천히 깨어나는 의식을 회복하는 장면이다. 인류의 시작. 그래서 나중에 청동시대라고 부른 것은 인류가 문명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촉각적, 만지는듯한 느낌도 잇고, 실제 그리스를 연상시키지만 아주 현실적인 촉각적 표면처리.
    • 당시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해서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내가 연구한것은 그게 다가 아닌데 사람의 조상이 원숭이라는 것만 기억한다. 라고 말했다. 소셜 다위니즘 - 적자생존 나중에 제국주의의 기본적인 이론이되기도 한다. 시대적인 이름을 통해 시대적 사고를 느낄 수 있다.
    • 로댕을 보면 19세기 모든 것이 다 보인다. 고전주의도 보이고, 얼굴에 느겨지는 열정적인 것, 과거를 연상시키는 것은 낭만적이기도 하고, 피부의 빛에 굉장히 민감하고, 굉장히 인상주의적. 아주 상징주의적.
    • 로댕은 청동 - 흙을 먼저 빚어야 하니까, 흙을 모델링할때 엄지손을 꾹 누르면 들어가고 나가고 이것을 손의 터치로 만들었는데, 표면효과 - 이시기에는 대리석보다도 로댕영향으로 많은 사람이 청동을 한다. 대리석보다 훨씬 부드러운 재료, 섬세한 면의 처리가 가능한 작품.

    칼레의 시민, 1887

    백년전쟁때 프랑스 도시 칼레를 열한달동안 포위한다. 여섯명이 나와서 도시를 풀어주는 대신 우리가 인질로 잡히겠다 해서 나왔다. 칼레 시가 로댕에게 부탁했는데, 광장에 세워지는 발로 서있게 하는 대없는 야외조각이 일반적 특징이었는데, 반대가 많아서 대를 세워서 키는 약강 18090정도의 큰 인물.

    대체로 조각을 찍어도 한눈에 그룹으로서의 공통적인 느낌이 없다. 체념 절망 등의 심리적으로는 공통적이다. 또한 자세가 자연스럽지가 않다. 굉장히 과장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우리를 끌게 하는 영웅으로서의 효과가 잇다.

    고전적 표현적 중세적인 모습

    어떤사람이 이것을 보면 이사람을 완전히 현대로 볼 수 없는 것이, 헨리 무어의 조각을 보면 인간이라고 볼 수 없다 구성과 재질감을 보는데, 로댕을 보면 재질감 생각하기 전에 인간대신으로9인간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실제 사람으로, 현대조각은 이런 재현성을 버린다.

    인간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이고, 공감대가 보이지 않는다. 칼레 시가 싫어해서 거부당한거같다. 공공조각인데 조각은 개인적이고, 장소의 의미나 기본적으로 작가적인 작품이다.

       

    지옥의 문 1880-1917

    장식미술관에서 로댕에게 미술관의 문으로 위촉을 했다. 그런데 이것을 로댕이 계속해서 매달려서 결국 완성을 못한다. 안받겠다 해서 돈을 돌려주고 집에서 계속 작업했다. 37년동안 인물이 백수십명이 들어가고, 떼버리고 집어넣고

    로댕이 분명하게 영향받은 것이 피렌체 대성당 앞의 8각형의 세계당

    로렌초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 - 1425-52

    구약에 나오는 기가막힌 이야기- 이 천국의 문의 반대되는 이름을 붙였다.

    기베르티처럼 문을 다 나누려고 했는데, 이사람이 나중에 다 지워버리고 완전히 전체의 문을 거대한 부조로 만들었다. 인물들을 보면 서로 하나도 연결되지가 않고, 기본적으로 저주받은 사람들이 고통속에서 귾임없이 움직이는, 저 세 그림자shades가 지옥문, 앉아있는 것이 생각하는 사람, 처음에는 단테를 생각했다(지옥편- 여기있는 인물을 본래는 단테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생각하는 사람으로.- 로댕 자신일수도 예술가일반일지도)

    최후의 심판을 연상시킨다. 심판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였다면, 여기서는 기독교가 아니고 어떤 예술가일수도, 인간개인일수도. 밑에서 찍어보면, 부조가 아니라 툭튀어나와서 완전히 환조로 표현해놓았다. 끊임없는 움직임, 강한 광선의 효과를 주고, 시점이 한점이 아니고, 모든 작품은 각각 하나의 분리되어있고, 그럼에도 하나로 엮어지고,

       

    누구의 영향을 받았을가? 샤를 보들레르 - 악의 꽃 등 여러가지를 통해서 굉장히 인간은 외롭고 현대인은 정신적으로 눈이 멀었고, 목적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 현대인의 비극이다. 우리가 공통된 감정을 가지지 못하고 이런 것이 비극이다. 라고 했다. 기독교신화 그리스도교 신학 - 혼돈의 상태 인간의 정신적인 부패를 이야기한다. 끊임없는 환멸 속에서 고통을 맞는 사람들. 여기서도 군중이 나온다. 뭉크에서도 앙소르에서도 나오고 - 도상 - 그러면서도 서로 고립되어있고 이런것이 비극이다 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이 조각중 몇 개의 파생된 조각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생각하는 사람.

    생각하는 사람 - 앞으로 다리가 튀어나와있는데, 비례상 잘 안맞다.

    지식인의 생각을 나타내는 자세이다. 모든 몸으로 생각하는 예술가의 이미지인데, 예수가 부재한 지옥의 이야기, 예술가 화가 자신을 말하는것같고 예술가를 높게 이야기,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무덤 조각 - 뒤러의 멜랑콜리아- 지식인의 이미지

    현대 지식인의 이미지라고 볼 수가 있다.

    이것이 너무 강한 인상을 주어서 로댕은 뭉크의 절규처럼 대중적인 아이콘이 되었다. 어떤 고등학교는 버클이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로댕, 키스 1898

    지옥의 한 장면이었는데, 그 지옥의 영혼이랑 안맞다고 생각되어서, 떼온 작품이 키스이다. 독립상으로.

    뭉크와는 완전히 분위기가 다르다. 옆이 거칠게 조각되어있는데, 우리가 보아온 대리석은 거의 ㅢ polish되어있는데 이것은 미켈란젤로의 미완성작품에 많이 영향을 받은것같다. 기본적으로 몸, 팔 손이다. 부드러운 여성의 몸, 남성, 섬세하면서도 강한, 굉장히 심리적인 작품이다. 여성은 굉장히

    수줍어하고, 하지만 정열을 본질적으로 전해주는, 남성의 오른팔을 보면 근육이 있어 육체적이지만 점잖으면서도 감각적인, 움직임이 암시되는, 또한 자제와 욕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발자크 상 1897- 1850년에 죽었다. Human comedy인간의 희극

    1891년에 문인협회에서 로댕이 에밀 졸라와 친해서 로댕에게 작품을 위촉한다. 굉장히 많은 40여점의 습작을 했는데, 너무 몰두해서 발자크가 다니던

       

    처음에는 누드상으로 하려고 했는데 너무 키작고 몸이 그래서.

    발자크가 다니던 양복점에 치수를 알아올정도로 사실적인 이미지를 생각도 했다.

    마지막에는

    발자크가 밤에는 긴 가운을 입고 밤에 글을 썻다는데, 그장면을 나타내보았다.

    수직의 가운 위에 얼굴 하나

    단 위에 있기 때문에 딱 맨위에

    오래에는 얼굴을 보는것을 방해하지 않게 긴 옷으로 -

    영원불멸한 창조성을 표현하기 싫어했다. 관습적인 가치를 싫어했고, 개의치 않을만큼 모든것을 가졌기에

    에드워드 스타이켄 - 예술가 작품을 많이 찍엇다. 브랑쿠지 작품도 찍음 - 작품보다 완전히 분위기를 잡아내는 도하나의 예술작품으로남게 된다.

       

    로댕 여기까지

       

   

   

19강

2010년 5월 12일 수요일

오후 1:57

   

<<19강.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5월 12일 수요일 오후 2:00

아리스타드 마이욜

  • Aristide maillol, 지중해 1905
    • 로댕과 비슷한 시기의 두명
      • 아리스티드 마이욜
      • 부르델
    • 마이욜은 원래 화가였다. 나비파에 속하던 화가였는데, 1900년경부터 조각가로 전향. 대체적으로 여성의 누드를 많이 조각. 보다시피 굉장히 단순한 고갱의 넙적한 면으로 몸을 표현하는것처럼 중량감있는 볼륨으로 표현했다. 로댕의 결루 세부의 표현이 있는데, 이사람은 인체를 단순화시키면서 표면을 처리해서 명암이 고루 퍼지는 느낌을 준다.
    • 마이욜은 기본적으로 고전적인 조각가인데, 조용하고 고상하고 위엄이 있는 이런것이 마이욜 조각의 특징이다. 전체를 하나의 양감으로 하여 변화하지 않는 영원함 견고함을 갖추고 있는것이 마이욜 특징
  • 1902 밤
    • 이것도 비슷.
    • 미켈란젤로의 밤 (메디치 무덤의 밤) 이런것에 영향받은 것이다.
    • 고전주의적인 것도 있지만 상당히 추상화 단순화된 그럼에도 아름다운 균형있고 고상한 느낌을 주는 것이 마이욜의 작품으로,
  • 1925 토르소
    • 팽팽한 신체 -
    • 1925년엔 이미 다다등의 작품이 나오기 때문에 당시눈으로 보면 굉장히 보수적인거일수가 있다.

         

       

       

       

    아르 누보

       

    고갱의 설교 위의 환영, 뭉크, 로트렉 - 자유분방한 선들이 나오는데, 1890-1900년사이에 유럽전역에서 유행하던 아르누보 양식을 반영한다.

    아르누보 자체는 함부르ㅡ 태생의 독일인 출판업자 화상이 사무엘 빙 이라는 사람이 있엇는데, 독일에서0는 지크프리트 빙이라고 하는데, 파리에서 상점(미술가게) 열었는데 HOUSE OF THE ART MESON DE L'ART NUBEAU - 여기서 아르누보

    공예 스테인드 글라스 등을 많이 다루고, 독일에서는 아르누보 대신에 유겐트 슈틸이라는 YOUNG STYJL

    오스트리아는 빈 분리파에서 많이 전시되었기 때문에세제션 슈틸이라고 했다.

    기본적으로는 아르누보로 ㅁ나히 알려져있다.

    아르누보는 지난번에 봤던 미술과 공예운동의 후예라고 생각하면 된다. 윌리엄 모리스 - 미술과 생활 사이의 수공예를 상당히 강조. 모리스의 경우 기계를 혐오해서 기계생산에 의한 대량생산에 반발했으나, 아르누보는 기계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건축디자인 회화의 총체적인 양식을 추구해서 그것이 기계 테크놀러지에 대한 관점 차이이다.

    아르누보 여러사람ㅇ ㅣㅅ는데

       

    안ㅌ니오 가우디

    • CASA MILA, 1905-07
      • 아파트건물을 지었다. 바르셀로나.
      • 이런 들쑥날쑥한 곡선이 아르누보의 가장 특징적인 양식이다. 평면장식을 고집하고 생명력 넘치는 곡선이랄지, 주로 공작의 곡산형태나 파도나 구름의 유기적인 선, 포도넝쿨의 줄기 꽃봉오리, 여자의 긴머리나 목 이런것의 구불구불한 선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아르누보 양식. 미술과 생활을 연관시키려고 하는 - 디자인사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미술운동이다.
      • (녹음)예전에는 선이 구조 드로잉의 의미였는데 여기서는 추상적인 독자적인 자율성을 갖는 것이다 이것이 추상미술로 가는 하나의 과도기적인 기여를 한다.
    • LA SAGRADA FAMILIA - 1882년부터
      • 아르누보 형태의 고딕성당
      • 고딕이지만 완전히 환상적인 세계..
    • GUELL이라는 사업가의 요청으로 공원 전체를 디자인. 1900-14
      • 난간 - 타일을 전부 디자인해서 구운 - 그야말로 동심, 환상적.

       

    HECTOR GUIMARD 헥토 기마르

    • PARIS, METRO STATION
      • 아직도 파리에 가면 어던거는
      • 자연적인 튤립, 식물형태 - 그런형태로 그려진 것을 보고 도시의 것을 잊고 자연을 느끼도록.
      • 소재는 강철, 유리소재.
      • 아르누보는 선들이 굉장히 생명력이 넘치는 상당히 아름답다.

         

      HENRI VAN DE VELDE, TROPON 공장 포스터 1897

      벨기에사람. 벨기에는 아방가르드 - LEVEN12그룹이 등장해서 활동했는데, 디자이너. 공장 포스터나 아름다운 가구나 그릇 디자인.

      이사람은 반드시 곡선만이 아니라 직선도 잘 사용. 벨기에는 반 데 벨데.

      영국의 찰스 매킨토시 - 가구 디자이너.

      비엔나 - 에르만 오브리스트

      유리공예가로는 에밀 갈레 - 모두 아르누보의 공예가 건축가라고 할 수 있다.

    • VICTOR HORTA 집
    • 비어즐리, 살로메 - 영국의 일러스트레이터 오브리 비어즐리
      • 아주 독창적인 상상력과 ㄷ굉장히 세련된 디자인감각. 26에 결핵으로 죽는다.
      • 멘 들잉을 굉장히 잘 - 뾰족한 강철같은 느낌 - 책, 포스터 디자인.
      • 당시 오스카 와일드 책에 - 살로메 라는 그림
        • 구스타프 모로의 그림도 있었고.
      • 세례요한의 머리에서 피가 떨어져서 튤립이 피어나고
      • 흑백 적절히 사용 - 데카당한 미
      • 얼굴을 보면 로제티의 영향을 보여주어서, 어찌보면 심리적이면서 성적인 센세이션을 보여주는 뛰어난 디자이너.
      • 공작새 스커트, 선을 사용하고 흑백의 대빌ㄹ, 비례가 무시되면서 디자인을 위한 효과가 강조된다. 1890년대 데카당스의 상징과도 같은 사람이다.

           

      클림트

      당시 비엔나가 - 프로이드가 꿈의 해석을 썻고, 굉장히 이중적인 도시이다.

      나치 유태인 신고가 가장 많았던 도시가 비엔나이고, 로마 다음으로 많은 매춘부가 있었다. 이미 성에 대한 타부가 많이 풀려졌던 때이고, 도시가 커지면서 뒷골목에 여자들이 굉장히 많앗다. 굉장히 많은 학자가 성과 심리학에 대해 연구하고있었다. 인간의 욕망 본능 남녀관계 - 미술뿐아니라문학에서도 많이 다루어지고, 인간의 표면적으로 보이는 위선 겉치레를 벗겨버리고 그안의 참모습을 찾으려는 것이 많이 잇었다.

      이당시 예술의 중심이되어서 음악가 문학가 미술가 많앗다.

      클림트를 회장으로 하는 빈 분리파가 생긴다. 뮌헨 세제션을 본따서.

      뮌헨세제션이 과거의 회화와의 결별이었다면, 빈세제션은 건축가 조각가 화가 공예가를 모아서 같이 하는 그런. 분리파 전시의 대개는 아르누보 양식이 지배적. 그런이유로 빈에서는 아르누보가 분리파양식이라고 불린다.

      분리파양식의 첫번째 회장이 클림트.

      클림트는 원래 역사화나 벽화훈련을 받은 사람. 동생과 같이 작업. 초기그리믄 굉장히 아카데믹한 그림. 동생이 갑자기 죽는다 잠시 공백기. 1897년에 다시 나타났는데, 완전히 새로운 양식으로 재탄생. 당시 받은 프로젝트가

    • 비엔나 대학 프로젝트. 철학 법학 과학을 그려달라고 했다.

      이것이 공개되자 대학당국이 감짝 놀랐다. 마치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웅크려있다든지, 의학의 경우에 치료의 여신을 마치 독약을 든 것 같은 컵을 들게 한다든지 그런 그림을 그렸다. 대학당국이 격분, 받지 않겠대서 결국 그림은 2차대전때 나치가 파괴. 현재는 없다.

    • 제1회 빈 분리파 포스터. - 타이포그래피
      • 곡선과 타이포그래피
    • 클림트 - 유디트 1, 1907
      • 이사람의 그림을 보면, 굉장히 여성들이 르누아르와 같은 여성이 아니라 세련된것은 극도로 세련 우아하지만, 그것이 무언가 두가지 양식이 섞여있다. 얼굴 가슴은 고전적 사실적, 금장식은 완전히 추상적인 패턴. 평면적 패턴과 사실주의적 양식이 혼합되어서, 이 여성이 어찌보면 패턴속에 갖혀있는것같은 느낌도 든다.
      • 유디트는 구약성서의 여성. 홀로페르네스를 술취하게 해서 목을 베는. 상당히 유명한 팜므파탈. 이미 우리가 뭉크의 키스 요부 비어즐리나 모로의 살로메를 연상시킨다.
    • 다나에, 1908

      약간 입술을 벌려진 입술, 긴 머리카락,

      • 여기서 나타난 여인은 성에 대한 갈망 - 새로운 여인. 인체표현이나 곡선, 두려움과 기대 육체적인 욕망 갈망이 여기 나타난다.
      • 제우스신이 사랑에 빠져서 - 동전으로 떨어져서 다나에가 받고 있는 것.
      • 여자를 보면 유혹하는, 눈에 띄는 직접적인 유혹이 아니라 포착하긴 어렵지만 느낄수있는것. 루벤스의 사랑의 정원처럼 건강하게 표현되어있는것과는 달리 - 여기는 무언가 굉장히 데카당, 자기파괴적으로 몰고가는 위험한 여인이란 느낌을 주는 것이 세기말 여성들의 이미지라 할 수 있다.
      • 추상적인 패턴이 많이 보이고, 황금색 패턴 - 비잔틴의 요소가 상당히 강하다. 테오도라 왕비와 그의 시녀들 모자이크 보면 - 패턴들, 일본의 자포니즘 보면 병풍의 황금빛 그런것에 영향을 받게 된다.
    • 클림트 스톡클레 궁 벽화 1905-09
      • 빈분리파양식 건축가 중 하나가 오토 바그너와 요셉 호프만, 브뤼셀의 어느 부자가 스톡클레 팰리스라는 자기 집을 건축해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요셉 호프만이 집을 짓고 실내를 특히 식당을 클림트가 제작. 식당 벽화. 여기서 보면 모자이크이다. 유리 돌 대리석 금속 에나멜 마졸리타 등을 써서 만들었다.
      • 뭉크 로댕
      • 소용돌이와 패턴에 의해서 남자의 등은 패턴이 굉장히 큼직큼직, 여성의 패턴은 작다. 얼굴을 없애면 완전히 패턴으로만 보인다. 둘이 하나가 되어있는 - 남녀가 완전히 타원 삼각형 곡선 소용돌이의 하나가 되어있는것같은 -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비현실적인 꿈의 세계 - 여기서 표현되는 것은 육체적이면서 심리적인 충족감, 황홀감이 표현되어있다.
      • 시험문제에 뭉크와 로댕의 키스를 이것과 비교하라면 무어라 할 수 있을까 - 어떻게 다를까? 기본적으로 뭉크나 로댕은 실제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 것 같다. 인간적인 체취를 느낄 수 잇는 데에 비해, 클림트는 너무나 정교하고 그래서 실제 사람으로 생각하기 힘들지 않나, 훨씬 더 상징주의적인, 또한 너무나 장식성이 강조되어서, 뭉크나 로댕이 현대미술쪽에 한발 딛었다면 클림트는 그렇게 보기 힘들지 않나. 1908년 키스
    •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1908
      • 당시 귀부인들의 초상 - 얼굴과 목은 사실적이지만 그외에는 추상적인 패턴으로 되어있어서, 일상적인 여성이 아니라 굉장히 화려하고 장식적인 효과를 보여주는 초상화. 장식과 배경이 하나가 되어서, 원근법 없어지고, 여성도 마치 꿈속의 여성같은 느낌을 준다.

           

           

        이정도만 하면 19세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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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2 2강(한국회화사).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1년 9월 22일 목요일 오후 2:09

Patricia Ebrey - Taking out the Grand Carriage : Imperial Spectacle and the Visual Culture of Northern Song Kaifeng

  

Patricia Ebrey, Portrait Sculptures in Imperial Ancestral Rites In Song China.

조각 - 위패,

Scarlet Jang, Realm of the Immortals: Painting and Decorating the Jade Hall of the Northern Song.

  

Imperial Sculptures

Ebrey - 송대 역사학자. 주희의 주자가례 번역, Annotation, 당송시대사의 대가.

최근에는 송 휘종에 관한 책을 하나 냈고, 송 휘종에 관심이 많다. 휘종에 관한 Editor로 낸 책 있다.

이 논문이 중요한 이유 - 한국의 전반적인 시스템을 이해하기에 중요하다.

명패. 神主 = 태묘에 봉안되는 것. 본래 유교 의례에서는 초상이 아니라 신주를 사용하는 것인데,

이것과 초상조각을 모신 사당을 따로 만들었다. 경령궁. 불교적인,유학자들의 반대나 그런것이 많이 .

기본적으로 송대적 전통. 화원제도가 정착, 제도화된 것이 송대이므로 이것을 다루는 것.

신주

황제가 pairing을 부인과 해줘야 하는데, 와이프가 너무 많으면 신주의 pairing이 안되니깐, 어떤 사람은 1:4가 되어서 헐어버리기도 하다.

후궁이기 때문에 황제가 되었을때 empress로 격상시키기도 하고. 신주는 1인당 한명씩 되어야 하는데, 초상조각은 몇개씩 하기도 했다.

이 체제가 조선의 모델이 되었던 체제이다. 역대제왕의 신주를 모시고 교체했는데, 이후 조선 초기부터 왕의 어진을 봉안하는 곳이 생기게 된다. 조선전기 서울 선원전 경기전, 함흥 준원전, 경주에 뭐뭐 이렇게. 초상화를 그려서 여러 카피를 보관했다. 이런 체제가 송대 전통을 따른 것이다. ㅇ

우리는 초상조각이 있기도 하다. 왕건의 초상조각. ㅇ

집에서 제사지낼 때, 주희의 일호불사론.

황제들의 초상조각이 있었다는 건 처음 아는 사람도 있을듯

   

Realm of the Immortals

주된 내용은 - 도교적 요소가 포함되어있는 것을 사료와 함께 엮어서 . 팩트 전달.

곽희의 작품을 엮어서 도교적 요소를 보여주기.

Jade Book?

한림학사를 도교의 선인처럼 여겨지게, 학사원 자체를 도교적 신화에 나오는 곳으로 하는 인식이 한대로부터.

Williams college에 있는데, 캐힐제자이다. 주로 송대 궁정회화에서 정치적 기능에 대한 박사논문을 썼던 사람이다.

원래가 이 주제는 뒤의 주석에 보면, 7번에 , 스즈키케이 회갑논총에 나오는 원정

옥당에 들어갔을 그림은 여기 들어있을 것이다 .

벽화를 그려서 장식화를 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송대의 시스템들이 조선시대로

궁안의 벽화들은 거의 없어지고, 김규진의 해금강 (덕수궁) 그림정도가 남아있다.

그림 내부를 장식하는. 그런걸 알려주어 화원들의 활동이 어떠했을까 짐작이 가능.

   

   

   

  1. 스즈키케이 논문
    1. 송태조 조광윤 초상
      1. 998년 진종 함평 원녕
      2. 대조 3인(waiting to the court)
      3. 예학 6인
      4. 지후 4인,
      5. 학생 40인
        1. 곽희는 예학, 董羽도 예학
        2. 마원, 이당, 하규는 대조까지 했다.
          1. 곽희가 예학이던 시대에 대조에 올랐던 사람은 지금 거의 안알려져있고
    2. 송 휘종 시기 화학(畵學)(신종시기에 개설된 화학을 개혁하여, 일종의 궁정회화 전문학교로 만듦.)
      1. 미불 - 書畵博士.
    3. 애매하기도 하지만, 황제직속의 화원, 서화감식가들이 명확한 제도는 모르지만 특별한 임무를 맡고 있었던 것일거다.
      1. 자비대령화원(우리나라)差備대령화원
        1. 녹취재 - 시험을 보는 것. 그중 잘한 사람 보너스 주고.
        2. 한국의 경우 교수와 겸교수가 있다.
          1. 교수 - 화원내에 있는 자리. 그림 가르쳐주는 것.
          2. 겸교수 - 다른데에 있는 사람인데 여기 교수로도 등록되어있는 ADJUNCT PROFESSOR.
            1. 정선 - 관상감겸교수
      2. 곽희, BENEVOLANT한 RULERSHIP의 상징으로서 이러한 산수화를 그렸을 것이다.
      3. 이당 - 북송의 마지막 대조이자, 남송의 초대 대조가 된 사람.
      4. 마원 - 마씨들의 거의 대조를 했다. 마린.
      5. 하규 - 풍우산수도.
      6. 명대 -
        1. 원대에는 사라져버리고, 명대에는 - 기구는 없고, 임시적으로 화원을 데려다 쓰는 것.
        2. 원체화풍 - Painting Academy style
        3. 절파 화가들 상당수가 화원에서 활동했을 것.
        4. 상희,
        5. 대진 - 나왔다 들어왔다 여러 번 반복.
        6. 오위는 궁정화가를 하지 않았다. 잠깐 부르긴 했으나 종사는 안했다.
  2. 청대.
    1. 명대는 미진했다가.
      1. 아마도 내시들때문이었을듯. 거의 권력을 가졌던.
    2. 청대 시스템 -
      1. 건륭제때 되어서 낭세녕등이.
      2. 궁정회화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
      3. 하나만 그린 게 아니라 여러 개.
      4. 공신상, 전쟁기록화, 행사기록화, 등등..
        1. 전체 100상을 그려서, 장원각공신상 - 중갈몽골과 전쟁했는데, 그중 몇몇개에 어제를 남겼다.
    3. 화원을 3등급으로 나누어 월급을 주었다.
    4. 이 시기에는 벼슬을 가진 사람도
      1. 추일계인지 동방달인지 한사람은
    5. 1급화원 11금, 2급은 9, 3급은 7.
      1. 월급만으로도 먹고 사는데, 보너스를 50근이나 준 경우도 있다.

   

   

  1. 경기전

    경녕궁과 같은 기능을 했던, 태조의 어진을 모신 곳. 1872년 모사작품 하나 남아있다. 전주목에서 사람들이 함께 그려서 만들었다.

    어진을 그리면 찰방이나 현감 벼슬을 주었다. 아주 작은 고을 원님.

  2. 영흥 준원전 1913년 유리건판 사진이 있는데, 어디있는지 모른다.
  3. 영조어진 모사작 1900
  4. 1713 연잉군
  5. 철종어진 1861
  6. 17세기 공산초상 전탁
  7. 이명기의 오재순 초상.
  8. 얼마로 했는진 모르나 강세황 초상화로 그려진 71세상이 26살에 이명기가 그렷는데 10몇냥으로 인건비 많이 안들었다.
  9. 장말손 초상 15세기말 .
    1. 공신으로,
  10. 신숙주초상 15세기
  11. 이항복초상 초본 17세기, 서울대학교 박물관,
    1. 초본으로 잡고, 나중에 비단에 그린다.
  12. 유근 초상 17세기 초 개인 초상.
  13. 18세기 후모론 1651년 원작, 송시열 초상. 국박
    1. 화원이 송시열의 부탁을 받고 개인적으로 커미션된거일수도 있다. 후에 어제를 받음.
  14. 관복입고 찍은 것은 공신초상일 경우가 많다.
  15. 권대운기로연회도(권대운과 그 일파가 커미션.) ㅅ1689년 서울대학교박물관.
  16. 공적인건지 사적인건지 애매한 경우도 이싿.

    아까 강세황초상의 경우 71세. 국가가 약간 지원된 경우도 있다. 부분적으로.

    채제공 초상 1792년. 수원시.

    심환지ㅗ상 경기도박물관.

    1. 진신화상첩 부분 심이지 윤사국 규장각.
    2. 준천시사열무도 영조36(1760) 규장각.
      1. 기록화.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 - 반차도 1759 규장각.경주김씨,

    김홍도, 규장각도 1776년,

    영조세자(문효세자) 책봉의례도. 1784년, 서울대박물관.

    화성원행반차도

    을묘정리의궤반차도 규장각.

    전 김홍도, 화성능행도변 1795. 리움.

    국박 교토대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국박 / 리움 4개본이 있다.

    조선초기부터의 계회도 - 과거급제동기들이 계회 갖고 인원수만큼 만들어 나눠갖는다.

    연방동년일시조사계회도1542 광주박 / 국박 하나씩 있다.

    독서당계회도 1570서울대박물관.

    사옹원계회도 .

    중묘조서연관사연도 1533경 홍대박물관.

    이런것은 공적인 커미션일 경우가 많다. 서연관의 사람들에게 왕이 장치를 베풀었으면 공적일가능성이 많을듯

    호조낭관계회도 -

    총서시예도

       

    안견 그림 최소 30점 나왓다.. 안평대군, 기록.

    김두량 사계산수도

    김두량 김덕하

    궁중승불도.

    이자싱 도갑사관세음보살32응탱

    김명국 - 우리나라가 조선초 도화서 만들다가 인종 - 숙종초까지는 피폐해짐. 17세기에는 어진도 안그린다.

    심지어 세화(new year's painting) 화원이 할일이 별로 없다. 일본가서 인삼밀수까지 했다. <----

    그래서 이런 그림 많이 그린 것이다.

       

    이재난고 - 과거가 아닌 음직으로 장릉참봉을 시작으로 중9품에서 종6픔으로 갔다. 도화서 관직과 같다.

    황윤석의 녹봉은 종7품 직장으로 있었던 연봉이 환전하면 쌀13, 콩6두 - 58녕.

    500석군이었지만 서울에서 관리생활은 부족한 녹봉으로 힘들게 생활. 하숙.

    의복 관복도 비싸니까. 말도 있어야 하고.

    7품도 4.8냥인데 두달마다 받으면 밥먹고 살 돈이 없다는 게 허언이 아니다.

     

       

    회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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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강의.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1년 9월 8일 목요일 오후 2:07

   

조충연씨 - 단국대 중국초기불교 석사

이번학기 -

   

초반에는 중국과 일본 화원 비교

후반기에는 리움에서 작품 택일하여 발표.

   

오늘 핸드아웃은 오주석 <<단원 김홍도>>

생각을 해서 그림을 보게 되면 남들과 다른 관점도 가질 수 있다 <<- creative

화원은 공무원. 이지만, 밤에는 사적 비즈니스를 한다.

리서치 하는 중.

아래 보면 1786년 41살. "도화서교수 한종유의 소회."

실록에 - 정조가 공직생활에 고충이 있으면 말해봐라.

도화의 일은 국가의 일이지만 원래부터 피폐해진지 오래됐다. 정원이 30명이지만 녹봉 받는 자리는 11개 직 - 순환직. 軍門에 화원들을 나누어 소속시키는 뜻을 상언하여 윤허까지 받았으나 예전 그대로.

1773년 계절마다 筵啓를 올려 어명을 이루었지만 역시 시행결과는 없어 지금껏 억울..

내치는 일이 짖아서 화재를 길러내는 방도가 점차 예전만 같지 않다. 汰去

   

여기에서, 관료들의 녹봉을 조사해야 한다.

녹봉을 왜 못 주었냐면, 조선시대 왕실의 재정구조를 알아야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뚜렷하지 않다 하지만 뚜렷한 것은, 녹봉이 부족해서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김홍도 작품들 대부분은 화원으로서 공적인 차원의 작품은 유전작이 거의 없다.

즉, 김홍도의 그림 대부분 사적인 활동으로 그린 것이다. 공적이랄지 사적이랄지 쉽지 않지만.

삼공불환도를 보아도, 강화 유수였던 이가 부하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병풍 3개를 만들었다. 개인적 커미션은 사적이다. 계회를 하고 나누어준 것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조선시대 병풍그림들 - 참여했던 박정혜 조선시대 궁중기록화 연구 - 노동 비용이 나온다. 10몇냥정도밖에 안된다.

그런데, 11냥이 큰 돈이 아니다.

조희룡의 기록 - 화첩그림을 그리고 30냥을 받았다.

황윤석 이재난고 -

황윤석(黃胤錫.1729-1791) 500석지기인데도 땅을 팔았다. 말도 사야 하고..

<<11이해준.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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