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강 다비드
2010년 3월 10일 수요일
오전 3:55
<<20100303수 19세기서양미술 + 중국의 회화 첫강의.WMA>>
3/3
*발표
다다음주 수요일까지 계획서 제출해서 검사 맡으세용
서양미술사 책- 영어로 된 것들 많음.Internet 위키피디아, 이미지 검색
로코코 양식
>Hotel de Soubise
바로크의 거의 마지막 양식. 귀족들의 살롱문화. 밝은 은빛과 파스텔 tone, 가벼운 터치. 주제는 serious한 것 피하고, 남녀의 사랑. 재치 있고 여성들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들이 ideal.
로코코는 곡선적: 다각형의 형태,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연결하여 구불구불. 그래서 로코코 양식은 실내장식을 많이 의미함. 거기에 그려진 그림도 주로 남녀의 사랑. 이것이 18세기 귀족문화를 많이 대변하는 양식
>다이애나 여신의 목욕, 프랑수아 부셰
제목은 신화적인 제목을 가졌지만, 당대 사람들의 생활을 그렸음.
신고전주의의 등장1750년경부터
신고전주의 등장의 배경으로 두 사람이 있다. 둘다 고고학자.
- Antone raphael mengs 안톤 라파엘 멩즈
Winckelmann 빙켈만
빙켈만은 도서관 사서. 그리스미술에 관심을 갖고 로마를 방문.
1750년경부터 신고전주의 양식이 나타남
빙켈만은 그리스에 가본 적은 없고, 로마에 갔다. "noble simplicity and quiet grandeur" - 고상한 단순미와 조용한 장엄함 이런 단어로 그리스 미술을 설명함.
History of Ancient Art (1763) : 미술사의 본격적인 학문의 시작이 빙켈만에서 됐다고도 함. 빙켈만은 양식론을 기본으로 함: 자세한 묘사를 통해서 그리스미술을 최고로 이야기함. 점점 로코코에서 벗어나서 다시 고전주의로 감. 그래서 신고전주의, Neo Classicism !
신고전주의의 성격
- 낭만주의의 한 형태로서 신고전주의전체를 엄밀하게 보면 신고전주의는 낭만주의의 한 가지 형태. so 당시 새롭게 관심 가졌던 사람이 17세기 푸생과 같은 사람들. 그래서 푸생의 그림을 다시 보기도 함.
Antonio Canova, 큐피드와 사이키 |
Paolina Borghese as Venus |
신고전주의는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나타난 현상. 특히 이태리에서~
볼게제는 가문. 실제 여성을 비너스로 나타낸 조각을 함. 누구나 보아도 고전주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능적이기는 하나 그리스 조각과는 차이가 있음.
주제의식상 프랑스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고전주의를 도덕적 방향으로 발전시킴.
디드로, 예술가는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내용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예술이라는 것은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깨우치게 해야 하며, 공공의 선을 위해 봉사하는 고대 로마의 이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프랑스에서 발전시킨 신고전주의는 사회적 역할, 도덕심 등이 강조된 형태로 나타나고, 그것을 처음 실현한 사람이 바로 자크 루이 다비드! (cf. 카노바의 그림에서는 어떠한 도덕적 의미를 찾기 어렵지) 당시로서는 굉장히 혁신적인 양식이었음. 다비드가 나올 당시에는 아주 혁신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자크 루이 다비드
Vien 아래에서 수학
>vien 마르스와 아테네 여신의 싸움, 1780
David는 Vien이란 사람 아래서 공부. 비앙의 그림은 키치적? 대단히 훌륭한 기술을 가졌지만, 주제와 같은 것이 엄격한 고전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의 밑에서 공부하면서 부쉬에를 좋아했음. 이 작품은 그의 초기그림. 옷자락, 광선, 배경에서 약간 로코코양식이 남아있음.
Prix de rome
당시에 젊은 작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데뷔를 해야 했는데, 그 당시 고전의 본거지 로마로 유학을 가는 것이 꿈이었다. 로마를 가서 공부할 수 있는 프리 드 롬(Prize to Rome; 로마상) 장학금이 있었음. 다비드는 스승의 허락 없이 자기 스스로 이 그림을 내고, 심사위원이었던 비앙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여 다비드는 떨어지게 됨. 충격을 받아 굶어서 죽을 생각을 했는데, 설득당하고 결국 다섯 번째로 로마상을 받고 결국 로마로 감. 그러나 체제에 대한 불신, 아카데미에 대한 불신이 가득하게 되고 나중에 프랑스 혁명이 났을 때 아카데미를 닫아버림. 정치적 혼란기에 살았던 사람의 경우, 정치 또는 일생의 사건들과 떨어져서 생각하기 어렵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사람의 그림들이 많이 좌우되게 됨.
제도? ①accademy, ②salon展: 전시장면, 당시에는 벽을 녹색, 붉은색 벨벳에다 그림을 다닥다닥 붙여서 걸었음.
그림의 서열 - 인체 드로잉과 역사화
>다비드, 누드습작, 1780
17세기 파리 아카데미는 가장 중요한 것이 인체 드로잉.
Why? 당시에는 그림에 서열이 있었다! 생각하는 그림, 예를 들면 역사화 같은 것.
서양의 미술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사람을 통해서 감정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인물이 어떤 감정을 나타내는지 잘 알아야함. 공포를 느끼게 하는 표정, 즐거움을 나타내는 표정 등을 따로 공부했다. 이러한 것을 잘 그려야지 가장 훌륭한 화가들이 그리는 역사화를 잘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
다비드의 미술의 성격
다비드의 미술은 선과 형태 중심의 미술이고, 이것이 서양미술의 주류. 미켈란젤로~푸생~다비드 계열은 그림을 조각적으로 그리고, 색보다는 선을 강조. 색채는 동물적인 본능의 요소이므로 지적인 그림에는 색채를 부차적인 요소로 생각했다. 스케치 단계에서도 잘 알 수 있듯이 정확한 해부를 통해 근육 등을 그리고 있음.
>다비드, 호라티우스의 맹서, 1784
왕에게 이 그림을 바침. 로마상 역시 국가(왕) 관장. 당시의 주문자는 왕, 국가. 당시에는 'machine painting'이라고 할 만큼 어마어마한 대작. 오랜 시간에 걸쳐서 그림이 완성됨. 이를 통해 내가 로마에 가서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는지 보여주게 됨. 모두가 흡족하게 생각했음,
호라티우스? 로마의 공화정 원로.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음. 알바라는 옆의 나라와 싸우고 있었는데, 대표 셋이 나와서 판단하자고 함. 알바의 가문은 큐리아티. 오른쪽 맨 뒤의 여성은 알바의 큐리아티의 딸. 내일 자신의 오빠와 남편이 싸우게 되어 굉장히 슬퍼하고 있음. 한 아들은 큐리아티의 약혼자. 이 이야기가 희곡으로 쓰여서 공연이 되었는데, 다비드가 감동을 받음.
사사로운 개인의 감정을 떠나서, 개인을 희생하고 국가를 위해 싸우고 충성하는 의미가 명백함. 시민적 덕목, 자기희생은 계몽주의 철학자들도 요구했지만, 왕 역시 나름대로 만족. 국가가 나니까. 훌륭한 주제로 평가받았음.
그림의 형식 분석
그림이 굉장히 명확함. 뒤에 로마의 아치가 세 개 있음. 중앙에 인물이 있고, 빛이 들어옴.
왼쪽의 세 인물은 자세가 매우 긴장해있고, 결의에 찬 모습. 아버지의 얼굴은 로마의 알프스 아울렐리우스 기마상에서 온 것. 팔을 들고 제우스신에게 맹세하는 장면. 의미가 매우 확실함.
오른쪽의 사사로운 감정에 슬퍼하고 있는 여성은 남성과 의도적으로 대비되고 있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 아니다. 남아있는 드로잉 有
실제로 싸웠을 때의 story= 큐리아티 쪽에서 호라티우스 형제를 죽여 막내만 남게 되었는데, 막내가 큐리아티 삼형제를 죽이고 승리하여 들어옴. 형수가 막내를 뭐라고 하면서 여자를 죽임. ??살해를 하여 원로원에서 재판을 하는데, 아버지가 와서 결국 풀려남. 원래는 다비드가 이러한 장면을 고안하였는데, 훨씬 불분명하고 상황이 복잡하다.
처음 드로잉단계
눈금이 있음/ 당시 캔버스 색깔: 흰 캔버스는 인상파 때 처음 등장. 그 전에는 칙칙한 노랑색, 갈색을 주로 천으로 해서 화가들이 만들어 썼음. 이러한 바탕색이 통일 되니까 색이 충돌하지 않고 색이 어느 정도는 조화를 이룸. 인상파에 와서 흰색 캔버스를 쓰자, 서로 맞지 않는 색을 쓰면 그것이 훨씬 강하게 눈에 자극되게 되는 것. 그러나 옛날식의 캔버스는 색채에서 충돌되는 경우가 생기지 않았음.
영웅의 이미지
도덕적이면서 영웅. 특히 다비드의 경우 이러한 공공의 영웅 이미지를 많이 내세움. 굉장히 단순하고, 근육의 힘 등이 세밀하게 그려졌고, 구도에서 보이는 삼각형의 형태 역시 고전에서 많이 사용되던 것. 카라밧지오적인 효과를 주는 것(카라바지즘). 로마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그림을 그렸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 (in Metropolitan)
소크라테스가 사약을 받고 죽음: 주제가 고전주의일 뿐 아니라, 구성이 매우 '고전주의적'
양식분석과 주제의도
맨 앞에 사람이, 그 다음에 침대가, 그 다음에 벽이, 그 다음에 층계가 있다. 고전 구성이라는 것은 단계적, 점차적으로 깊이를 가지면서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저 사람이 어느 위치에 있다는 것이 명확하게 들어올 때를 말하는 것.
그림에서 제일 앞에 있는 선이 유리로 되어있다고 가정했을 때: 'picture plane' (그림의 면)
강건, 수직적으로 올라가는 소크라테스와 다른 제자들은 선이 다름: 제자들은 선이 흘러내림. 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약한 사람들과 영웅적인 소크라테스를 비교했다. 이 그림 역시 인간의 도덕과 법에 대한 교훈적인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영웅의 이미지
도덕적이면서 영웅. 특히 다비드의 경우 이러한 공공의 영웅 이미지를 많이 내세움. 굉장히 단순하고, 근육의 힘 등이 세밀하게 그려졌고, 구도에서 보이는 삼각형의 형태 역시 고전에서 많이 사용되던 것. 카라밧지오적인 효과를 주는 것(카라바지즘). 로마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그림을 그렸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 (in Metropolitan)
소크라테스가 사약을 받고 죽음: 주제가 고전주의일 뿐 아니라, 구성이 매우 '고전주의적'
양식분석과 주제의도
맨 앞에 사람이, 그 다음에 침대가, 그 다음에 벽이, 그 다음에 층계가 있다. 고전 구성이라는 것은 단계적, 점차적으로 깊이를 가지면서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저 사람이 어느 위치에 있다는 것이 명확하게 들어올 때를 말하는 것.
그림에서 제일 앞에 있는 선이 유리로 되어있다고 가정했을 때: 'picture plane' (그림의 면)
강건, 수직적으로 올라가는 소크라테스와 다른 제자들은 선이 다름: 제자들은 선이 흘러내림. 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약한 사람들과 영웅적인 소크라테스를 비교했다. 이 그림 역시 인간의 도덕과 법에 대한 교훈적인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다비드, 형장의 마리 앙트와네트
혁명과 다비드
- 1789 프랑스혁명: 다비드는 혁명에 적극 참여. 당시 최고위원회의 위원이 됨. 결정한 것 중 하나가 마리 앙트와네트를 단두대로 보내는 쪽에 투표함. 죽기 직전 그녀의 모습을 앉아서 스케치했는데, 아름답지 않은 중년의 여성의 모습으로 그렸다.
다비드는 혁명의 중심에 있으면서, 혁명 퍼레이드 전체를 조직하는 일을 했음. 혁명이라는 것을 이끌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열기를 유지해야 했으므로, 거의 매일 파리에서 사람들의 행진이 있었음.
>Brutus에게 아들의 시신을 가져오는 간수들, 1789
브루투스: 로마 공화국의 원로, 어머니의 사죄에 의해서 두 아들이 왕정으로 복귀하려는 음모에 가담함. 아버지가 새로운 정치질서에 반대하는 두 아들을 죽일 것을 명령함. 간수들에 의해 시신이 들어오고 있는 장면.
주제의식과 표현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자식을 희생하는 것이 주제이긴 한데, 초기의 호라티우스와는 달라짐.
Where is the hero? 우선, 영웅이 분명하게 눈에 띠지 않음. 중앙에 영웅적 인물이 앉아있어야 하지만, 이 그림의 주인공인 브루투스는 그림자가 지는 화면 가장자리에 앉아있음.
물론 아직도 남성과 여성은 대비되어 나타나고 있지만, 중앙은 완전히 비워져있음. 행동이 산만하게 흩어져있음. 다비드는 계속해서 이러한 그림을 그려서, 명료하게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음.
루이 16세는 혁명이 났을 때 자신의 가족을 피신시키고 했으므로, 여기서 보듯이 브루투스가 명령을 내렸지만 그림자 진 곳에 앉아있는 것은 자신의 슬픔을 나타내지 않기 위해서임. 이러한 것이 그 당시에는 굉장히 성공적으로 보여졌고, 이러한 것이 초기에 사회적 메시지를 강하게 주는 그림이었다.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
로베스 피에르, 당통, 마라가 혁명의 3人: 마지막으로 마라 역시 피살당하면서 마지막에 공공장례를 치렀던 인물. 이후에는 완전히 혁명이 혼란에 접어듦. 서로 갈라지고 분열. 다비드 역시 혁명이 변질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음.
마라가 병이 있어서, 습기가 많은 곳에 있어야 했음. 그래서 자기 집에 있는 목욕탕 속에서 집무를 했음. 샬롯 드 콜데이(Corday)가 초대장을 가지고 왔음. 콜데이가 와서 단검으로 마라를 찔러 죽임. 바닥에 떨어진 피 묻은 나이프.
그림구성
굉장히 단순. 벽이 있는 뒷부분= 회색빛의 아무 것도 없음. 우리에게 제일 가깝게 떨어지는 것이 마라의 머리가 되어서, 우리가 직접 마주하고, 직면하는 느낌을 준다.
죽음의 이미지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영웅적인 죽음이었으나, 여기서 나타나는 죽음은 '순교자의 이미지'가 됨
수건으로 머리를 말았는데, 이것은 후광과 같은 의미를 줌. 종교적인 순교자와 같이 됨. 영웅이지만 조금 더 순교자적이고 신비스러운 광선에 의해 비쳐짐.
모든 세부를 너무나 정확하게, 상처자국, 피 묻은 나이프 등을 굉장히 세밀하게 나타내어서, 살인의 현장을 불멸의 미술로 만들어 냄!
cf. illustration과의 비교
이야기 전개는 이것이 더 정확하게 보여줌. 칼로 찔려 소리를 지르니 옆방에서 사람이 달려 나와 발견했다? 그러나 미술의 형태로서 감명을 주거나 어떠한 인상을 주는 것은 여기에 없다. 미술을 이야기할 때 명작이냐 아니냐는, 같은 이야기라도 실제 현장과 다른 의미로 만들어낼 수 있는가의 여부에 달렸으며, 그것이 곧 작가의 능력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다비드, 바라의 죽음, 1793
공공의 리더, 전쟁터의 영웅과는 달라지고, 조금 더 개인에 대한 관심으로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혁명 때 쓰러진 젊은 청년의 모습. 여성처럼 보임. 이런 식의 그림이 다비드에게도 가능했다 ! 자신이 생각하는 미술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사회적, 영웅적, 약간 dry한 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로마인과 사비니인들의 싸움, 1799
변화
단순한 구조에 몇몇 사람이 있는 구성이 아님. 어마어마하게 큰 그림. 인물들도 키가 커지고 늘씬해짐. 이러한 비례는 그리스의 헬레니즘 조각에서 많이 나타나는 비례. 훨씬 더 우아하고 부드럽고 미묘하게 변하는 쪽으로 감. 초기의 로마영향에서 그리스적 영향으로 가게 되었음.
여성의 역할이 달라짐. 중재자 역할. 인물들도 공들여서 다듬어지고 훨씬 우아함
초기의 호라티우스와 많은 부분 달라졌음. 그림이 훨씬 더 복잡해졌다. 로마와 사비니가 싸워서 로마 사람들이 사비니의 여성들을 강탈하여 결혼하여 인구가 많아지면서 로마가 부강해짐. 그런데 사비니 사람들이 다시 쳐들어옴.
준비 스케치: 이러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뼈대를 그리고, 근육을 붙이고 해야 했다. 이 사람의 모델은 그리스의 벨베데레 아폴로, 천을 두르고 있는 그 아폴로에서 모델로 하여 그렸으며 나중에는 누드로 된 것. 한동안 감금되어 있다가 이 작품으로 다비드가 부활하게 됨.
>알프스를 넘어가는 나폴레옹, 1800
다비드는 나폴레옹에게서 새로운 영웅을 찾았고, 나폴레옹 역시 자신의 정부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공적인 미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낌. 자신을 불멸의 영웅으로 만들어 줄 화가가 필요했음. 그래서 다비드가 나폴레옹의 그림을 여러 개 그리게 됨. 이 그림을 그려 받기 위해서 나폴레옹이 다비드를 많이 방문했음. 몇 년 후에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나폴레옹이 원했던 것은 어떻게 자신을 나타낼 것인가, Image making이 중요했던 것. 그리고 다비드는 그 역할을 충실히 다함.
알프스를 넘어갔던 사람들= 보나파르트, 한니발, 카를로스(신성로마제국의 칼 대제)
보나파르트가 그 옆에 있다는 것은 그들과 자신을 똑같이 놓음.
표현.
말을 보면 사나운 바람이 부는 듯: 갈귀, 망토, 모두 다 상향
그리고 그러한 사나운 말 위에서도 참착하게 앉아있는 나폴레옹. 기마상은 고대로부터 통치자들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 많이 쓰였음. 실제로는 노새를 타고 알프스를 넘었다고 함. 상당한 정치가, 어떻게 하면 자신을 잘 선전할 수 있을까.
>대관식, 1805-08
3년에 걸쳐 그려짐. 높이 6m x 가로 10m. 다비드 60세에 그림. 커다란 교회를 빌려서 여러 조수와 작업함. 모든 구성과 스케치의 단계 단계마다 검열 당함.
대관식의 조세핀과 나폴레옹(당시 조세핀은 41세였다고 함)원래는 황제가 되기 위해 로마 교황에게 엎드려 관을 받아야 함. 그러나 실제로는 교황이 앉아있는데 자신의 머리 위에 썼다고 함. 자신이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순간으로 연출.
놀랄만한 기술
옷의 질감(모피, 벨벳, 보석 등)이 굉장히 세부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제2강 다비드 후 (그로, 제라르, 지로데, 앵그르)
2010년 3월 10일 수요일
오전 3:55
<<201003008월 19세기서양미술 2강.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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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 다비드의 후계자들 - 안트완 그로, 지로데, 앵그르
다비드의 영향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유배를 가게 되고 거기서 생을 마감. 다비드가 확립했던 신고전주의가 19세기 전반에 아카데미나 살롱의 하나의 지배적인 흐름이 되고, 그 후계자로 비춰졌던 사람이 그로.
그로 - 당시 나폴레옹의 종군화가로 활약했음.
>Antione Jean Gros, Napoleon Visiting the Pesthouse at Jaffa, 1804
구성
모든 것은 나폴레옹이 있는 쪽으로 집중. 환자를 손으로 만지는, 부가는 손수건을 코에 대고 차마 보지 못함. 나폴레옹은 두려워하지 않고 손을 갖다 대고 있음. 이는 그리스도가 나자로를 치유하는 모습을 연상케 함. 주변 부관이나 사람들은 굉장히 조용하고 무서워 함.
그로 자신은 다비드에게서 배운 준비단계의 그림, 스케치, 오일스케치, 완성작. 그는 스스로 고전적인 그림을 많이 그린다고 생각했지만 주위에서는 낭만적인 느낌을 가진다고 말함. 내가 왜 좋은 모범을 못 보일까? 그는 루벤스를 더 좋아했음. 강렬한 붉은 색, 따뜻한 색이 루벤스적인 따스함과 비슷함.
>Eylau의 전투, 1808
길이 8m의 거대한 작품. 실제 있었던 사건. 1807년 러시아를 쳐들어가서 패배하고 25000명의 사상자가 났음. 이후부터는 나폴레옹의 몰락이 시작됨.
영웅의 이미지
나폴레옹이 축복을 내리는 동작은 고대의 아우구스투스 동상에서부터 로마 황제의 조각상, 그리스도의 모습 등에서 보임. 머리 주위를 비워놓음으로써 후광으로 보이게 하고, 이 거대한 그림 속에서도 나폴레옹을 금방 찾을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시선이 아래에서 위로 우러러 보게 함. 종교적인 영웅화에 대해서 분명.
아래에 보이는 공포. 너무 추워서 얼어 죽은 모습이 아래에 있음. 워낙 큰 그림이므로 앞에서 우리의 시선이 닿는 곳은 희생자와 죽음의 부분. 여기서는 희생자 쪽으로 향하게 됨. 결국 자기 자신의 감정과 반응이 여기에서 보이게 됨.
전쟁화는 누가 그것을 주문했는가가 중요. 국가나 왕이 주문했을 경우, 그것은 선전을 의도한 것. 애국심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 근대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가 나옴. 이전에는 자기의 목소리를 종군화가로서 국가에 대한 의무로 그렸지만 자기가 실제로 본 증언의 목소리 내기 시작.
Gerard제라르
>Gerard, Cupid and Psyche, 1798
16세부터 다비드의 스튜디오에서 공부함. 실제로는 하인의 집안에서 났다고 함. 혁명 이후 루이 18세가 즉위했을 때 궁정화가가 되고, 나중에는 공작으로까지 올라간 화가. 그로가 결국 자살을 하고, 제라르와 지로데.
제라르 그림의 특성
제라르는 다비드의 강렬함에 비해 연약, 절제됨
스토리 역시 영웅이 아닌 신화의 이야기. 많이 다르지만 그 당시 살롱과 국가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여는 국전(le Salon)에서 굉장한 성공을 거두어 그 당시 명성이 대단했음. 예쁜 그림^^
19세기 아카데미 그림이라고 하면 이러한 것. 약간 에로틱. 그렇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신화를 끌어들인 것. 오늘날의 해석으로 보면 에로틱을 노골적으로 표출하지 않고 음미하는 듯한.
Girodet
>Girodet, Endymoin(엔디미온)의 잠, 1791
귀족 출신. 다비드의 제자. 실제로 혁명이 났을 때는 프리드롬의 상을 받고 로마에 가 있었으나, 혁명에 동조했었던 사람.
신화에 나오는 주제. 로맨틱한 월광이 보임. 앤디미온은 아름다운 미소년. 달의 여신이 그에게 사랑에 빠져서 큐피드를 보내는 장면. 달의 여신 셀레네가 언제든지 앤디미온을 찾아갈 수 있게, 영원한 잠에 빠뜨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옴. 달의 여신이 아름다운 남자의 누드. 큐피드가 왼쪽에 와서 있음. 사실은 신화와 달리, 이 그림에서 보이는 것은 큐피드와 앤디미온의 모습. 어떻게 보면 거의 큐피드(로마에서는 에로스)와 앤디미온 두 사람 간의 사랑으로 보임. 둘 다 남성. 그러므로 동성애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앤디미온은 매우 여성적인 아름답고 매끄러운 신체를 갖고 있음. 그리고 그것이 잠에 빠져 의식이 없는 듯한 완전히 무방비상태,
다비드의 영웅적 감성, 도덕적 환기력, 공중에 대한 메시지, 자기희생 등은 사라져버림.
달의 여신이 아름다운 남성에게 사랑에 빠져 적극적인 방식으로 그를 잠에 빠뜨리게 하는 것은 성에 대한 인식이 많은 부분 달라지고 있다는 것. 동성애라는 것이 그리스에서부터 상당히 나쁘게 나타나고 있지만 8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이 되면서 성에 대한 연구가 많아짐. 상당히 많은 이러한 그림들이 있다.
>Atala의 매장, 1808
신고전주의자들의 테크닉이란 매우 뛰어남. 어떻게 저렇게 그릴 수 있지?
표면 마무리, 이상적인 신체는 고전주의. 그러나 낭만주의적 요소가 보인다. 광선, 분위기 등
르네 드 샤또 브리앙이라는 소설 아탈라에서 나온 것. 소설이 나온 지 7년 후에 이 그림이 그려졌고, 그 소설의 마지막 장면. 그 배경은 신대륙인 미국의 캐롤라이나 주에서 있었던 이야기. 아탈라는 인디언 혼혈. 아탈라의 어머니가 어렸을 때 일생을 마리아를 위해 살도록 맹세하겠다고 함. 그러나 청년과 사랑에 빠짐. 어머니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남자가 있음에도 자결함.
아탈라는 그리스의 여성처럼 아름답고 이상적. 남성 역시 이상적. 굉장히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낭만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음. 사제가 있음; 종교와 사랑의 열정이 둘 다 똑같이 나타남. 죽음, 절망적 사랑, 장례로 이어짐.
당시에 대단한 성공을 거둔 작품이 되었음. 굴 속에 있음. 십자가가 보임. 굴 속에 있으므로 어둡고 밝은 부분이 잘 보이고 광선이 흘러들어옴. 야생, 미국의 배경이 굉장히 개인적. 사사로운 개인감정을 다루고 있음. 여기서 여자가 희생한 것은 정치와는 아무 상관없는 개인적인 것.
>다비드, Madame Recamier, 1800
다비드도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다. 머리가 원래 흑발이었고,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겼음. 검은 머리가 안 맞는다고 브라운으로 그려서 여자가 화를 내고 갔다고 함. 다비드의 중요한 제자 앵그르가 왼쪽의 램프를 그렸다고 함.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오래 살았음. 1860년대까지 살아서 다른 사람들보다 작품도 많고, 탁월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음. 당시에 굉장히 많은 초상화가 그에게 의뢰되었음. 같이 활약하고 오래 살았던 사람이 들라크루아.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시대. 당시로는 서로 반대편에 있었음.
>Venus wounded by Diomedes, 1803
신들의 전쟁 중에 디오메데스에게 부상당한 비너스. 전쟁의 신 마르스의 전차 속으로 다시 돌아온 비너스의 모습. 전차를 모는 아이리스 신. 당시에는 고딕적이라고 함. 어색하지 않음. 하나의 선과 형태로 보면 여기서 손이 더 길면 이상하게 보이게 됨. 앵그르는 실제 사람의 해부보다는 그림 자체의 선으로 생각했던 것
디오메데스와 비너스가 같은 공간과 거리에 있는 것으로 보일만큼 굉장히 좁은 공간에서 둘 다 측면인데 서있는 면적이 굉장히 좁은 공간.
>프라 안젤리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15세기 | | |
cf.그리스의 항아리 그림들(francois Vase, Greece, Archa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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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John Flaxman, the fight for the body of patro
일러스트. 아주 섬세하고 부드럽고 움직임이 활발하지 않지만, 움직임의 뉘앙스를 주는 인체 | | |
이러한 고전주의는 어디서 많이 나타날까? 15세기 르네상스.
자세가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약간 딱딱한 자세. 16세기 전성기에 가면 움직임이 나타남. 초기 르네상스에는 그러한 것들이 많지 않았음.
>아킬레스와 사신들, 1801,
부드러운 리듬감. 프리
드
롬의 상을 받은 작품. 아킬레스의 어머니가 그를 여자들이 있는 수녀원에 여장시켜 숨겨두었음. 박물장사가 수녀원에 물건을 팔러가서 그 속에 방패를 숨겨두었음. 여자들을 유심히 관찰했더니, 방패를 보자 한 여자의 눈이 반짝. 들통남.
누드는 아카데미에서 요구하는 고전주의를 충족시키는 정확한 누드. 그러나 다비드와 같은 입체표현을 제한시켜서 볼륨보다는 선을 미묘하게 쓰고, 굉장히 세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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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phel Sistine Madonna |
>LoUis 13세의 맹세, 1820 - 1824년 살롱에 전시됨. 누가 봐도 뻔한 그림. 당시의 국가가 제일 중요하게 여겼던 유명작가가 되면 이러한 종류의 왕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 바쳐야 함. 완전히 루이 13세, 부르봉 왕가를 선전하는 그림을 그리게 됨.
루이 13세가 마리아에게 바치고 있고, 주위에 천사들이 있음. 당시에는 교회와 왕권이 가까웠음. 교회와 국가를 이상화시키는 의도가 담긴 작품. 작가의 양식이 달라질 수 있음. 자기가 정말 원해서 그리고 싶어서 그린 그림. 국가에서 원하는 것은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있어서, 거기에 맞춰서 그린 그림은 양식이 매우 다를 수 있다.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타협. 대중이 보면 감탄하는 것.
cf. 왕도 마음에 듦. 어떤 것을 보고 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됨
시스틴 마돈나를 염두에 두고 그린 것이 분명. 앞의 것이 달라졌지만
cf. 프로파겐다적인 성격이 있어서, 결국은 국가나 교회가 원하던 양식. 이렇게 되었을 때 갈등을 빚는 화가가 있고, 안하겠다는 화가가 있음. 작가가 잘 타협하여 원하는 식으로 그려줌.
>Jupiter와 Thetis, 1811
신고전주의 회화가 새로운 리더를 찾았음. 계속해서 이러한 그림을 그리게 됨. 테티스는 바다의 요정.
제우스= 제왕 같은 엄숙함. / 테티스= 여성의 몸. 두 사람이 서있는 공간이 똑같은, 면적이 작은 공간 안에 서있음. 남성의 몸 옆에 여성이 있는 것이 굉장히 sexual함. 앵그르는 노총각이었다고 함. 남성의 몸에 밀착되어있는 여성의 몸이라든지, 여성의 몸이 구조가 있는 느낌이 나지 않고, 거의 고무처럼 흐물흐물해 보인다. 여성의 목에서 보듯이 선의 윤곽을 보면 아름다운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음. 앵그르는 순수한 선의 윤곽을 가지고 있음. Draw line(선을 그려라). 드가는 굉장히 드로잉을 잘했던 화가. 유명한 예가 있음.
Ingres, Madame Rivière, 1805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였고, 유명한 사람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려서 돈도 많았음.
대체적으로 앵그르의 그림을 보면 친한 사람들의 경우 성격까지 잘 묘사되어 있으나, 주문받아 그릴 때에는 어떠한 사회의 계급 등에 맞추어 이상화시킴.
성격이 잘 나타나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부유한 여성이었음에는 분명함. 손의 비례가 너무 길다. 색채도 배경의 푸른색의 비로드. 빛에 의해 하얗게 보임. 차가운 파랑에서 따뜻한 흰 블루. 화이트. 크림. 화이트의 변화. 아름다운 수를 놓은 천의 색을 보아도 정교하고 아름다움.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손이 길고 이러한 것은 다 잊게 됨. 이것이 앵그르의 중요한 특징.
>마담 르블랑, 1823
소도구, 숄, 보석, 의상을 보면 어느 정도 사회적 위치가 있는 사람. 이상화 됨.
정교하고 꽃무늬. 얼굴에도 집중하게 되지만 사람은 그냥 이상화됐다는 정도일 뿐. 오히려 친구들의 초상에서는 가능해짐.
>마담 M.. ?
얼굴은 퉁퉁한 중년 여인. 화려한 중국자기, 의자에 시선을 뺏김. 이러한 것들이 전형적인 주문초상화. 눈이 즐거워지는 것들~
>그랑 오달리스크
여기서 프랑스 화단에서 일어난 붐이 '오리엔탈리즘' 북아프리카 원정을 가면서 600명의 학자를 데리고 감. 거기에서 많은 자료들을 가지고 옴. 그 중 하나가 로제타스톤, 오벨리스크.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처음으로 해독하는 것이 샹폴리옹이라는 사람.
오리엔트(orient) 이집트 뿐 아니라 모로코, 터키 등 소위 이슬람 국가를 이야기 하는 것.
유럽에 오리엔트, 동방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스핑크스를 그림에 그리거나 하면서 사람들이 여행을 가게 됨. 여행객이 쓴 것들은 첫인상에 불과하고 대체적으로 여행기라는 것이 여러 잘못된 정보도 들어옴. 일반인들에게 퍼지는 것은 이러한 것. 자기네보다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지역에 갔을 때, 특히 남자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그 곳의 이국적인 여성에 대한 호기심. 술탄이 거느리는 후궁들과 같은 이야기가 호기심을 유발. 후궁의 모습을 상상하여 그린 것. 누워서 흘끗 뒤를 보는 것은 서양미술사에서 굉장히 많이 나오는 것. 서양미술이 오리엔탈리즘적인 주제와 결부됨.
얼굴은 라파엘, Madonna of the Chair의 얼굴을 가지고 옴.
빛이 내려와서 밝고 어둡고, 피부에 들어오는 ... 오감을 자극함. 피부의 질감과 시트의 질감. 털, 공작새 등. 선만 강조했지만 선명하고 풍요로운 색채. 등
이 여자의 팔이 너무 길다.팔로 보지 않고 형태로 보았을 때, 커튼의 주름과 팔이 이어지면서 전체가 U자 형태를 이루게 됨. 다리가 너무 길고, 실제로 포즈를 취해보면 어깨가 쳐지고, 이러한 형태가 안 나옴. but 추상적인 눈으로 보면 나무랄 데가 없음.
당시의 누드를 이야기하면
클락, 누드는 벗은 것으로 보지 말아라, 예술의 형태다!
그러나 아무리 예술의 형태로 보여주더라도 실제와 분명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feminist, 이것은 남성들에게 환상을 준다. 언제든지 가질 수 있는... 그러한 것으로 의도된 것
와상 - 서양미술사상 가장 많이 그려진 주제
조르지오네 티션 고야 마네 마티스 등..
그다음
INGRES, ODALISQUE WITH THE SLAVE,1842
나이가 들면서 좀 더 에로틱하게 간다.
그림 뒤에 보면 검은 피부의 얼굴이 있다.
그랑 드 오달리스크는 실내내부가 터키의 암시가 있는데 이 그림은 북아프리카인 것 같고.
그리스 고전(백인 젊은 청년과 아름다운 소년 소녀가 나오는)과는 달리, 외국인, 타인종의 것이 관심의 대상이 되니깐(이 사람이 신고전주의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보아 낭만주의적 요소라 볼 수 있다.
아까 본 대 오달리스크보다 곡선을 더 강조하고 더 따뜻 요염 풍만하게 되어있고, 액세서리가 더 나오는 섹슈어리티인데 더 권태로운것이랄까 하는 분위기가 후기에 가면서 더 강해지는 걸 알 수 있다.
이 사람은 1850년부터는 더 이상 전시를 하지도 않고(많은 명예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그렸는데, 이것을 보면
A SOURCE 샘 1856
1820년에 작업을 시작해서 56년쯤 거의 80인데, 조수와 함께 완성했는데, 여기서 보면 콘트라포스토(왼쪽이나 오른족 다리에 무게중심이 오고 다른 한쪽 다리는 편안히 쉬니깐 몸이 경직된 대칭이 아니라 골반 등이 자연스레 취해지는 편안한 자세가 되는 ) 고전적 인물상에서 가장 많이 나타내는 자세.
이런 것을 보면 그리스 조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호평을 받은 작품,.
김환기 항아리 작품을 보면 그런 게 나온다.
TURKISH BATH 1852-63
52년부터 10년간 그린.
사실 터키탕은 없다.. 상상의 목욕장.
여기 나온 누드는 여기저기 나온 누드를 다 종합한 것이다.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앵그르중에 발 팽송 목욕녀라는 작품의 것에서 시타를 켜는 여자가 나오고, 클레오파트라 그림중에 또 그런 예가 있다.
자기가 여태까지 그린 모든 누드를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시켰다.
원래는 네모난 그림이엇는데, 둥근 원형의 구도TONDO톤도로 고쳐서 63년 82세에 마쳤다.
문양이 터키 목욕탕이라는 것 자체가 동방적인 취향을 보여주고, 거기 보여지는 여성들의 타일 등이 동물적, 감각적 느낌을 굉장히 강조하고 있다. 에로틱, 동물적인 형태가 나타나는 후기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네모의 구성보다는 톤도의 구성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3강 낭만주의(제리코, 들라크루아), 고야
2010년 3월 10일 수요일
오후 2:01
<<오디오 녹음.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3월 10일 수요일 오후 2:01
- 낭만주의
제리코, Theodore Gericault (1791-1824)
왕실 근위대의 장교, 1812
지금까지 본 것들이 신고전주의 다비드와 그 후계자들이었는데, 이제부터 보는 것은 낭만주의 계열 소위 ㅇ로맨티시즘 작가들을 보겠다.
처음 보는 사람은 테오도르 제리코.
앵그르보다 11살 아래, 그담에 낭만주의 기수인 들라크루아보다 7살 위.
과도기적이라 할 수 있지.
다비드나 그로와 같이 혁명을 직접 겪지 않고 혁명기에 난 사람이지만, 듣고 자란 사람이기 때문에 낭만적 기억으로 남아있고, 성격이 아주 모범생은 아니고 전통적인 이상 도덕적인 이상 등에 관심이 없이 약간 문제아적인 사람이엇나 보다. 1812년에 유부녀와 피렌체로 도피했다든가..
이 사람이 1812년에 처음 살롱에 출품한 작품이 제리코의 왕실 근위대의 장교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그로가 그린 대규모 전쟁그림과는 달라져보인다.
준비단계 오일 스케치
이 사람도 다비드와 같이 아카데믹한 준비단계를 착착 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확실히 보이는 것은 - 고전주의는 완성도이다 했는데, 여길 보면 붓터치가 굉장히 달라진 것을 볼 수 있다. 완성작에는 그런 것이 많이 줄었지만, 스케치에는 굉장히 거칠다.
스케치 두 안을 보면
다비드적 고전주의가 아닌 루벤스같은
부르크하트라는 역사학자가(19세기말) 말하길, 미술사상에 말을 잘 그리는 세 사람이 있는데, 하나가 다빈치, 루벤스, 제리코라고 이야기했다. 제리코는 어려서부터 경마장 등에 가서 말을 많이 보고 좋아했고 많이 관찰해서, 전체적으로 생생한 느김을 강조해주고 있다.
배경을 보면 불확실하다. 불확실한 배경은 고전에서 나오지 않는다. 고전에선 배경이 확실히 규정되어야 한다.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이러한 효과는 다 낭만주의적인 그런것.
지로데 앵그르 등에서도 낭만주의적 요소가 있다지만 여기에서 상당히 많아졌다.
들라크루아에선 물론 이보다 더 완연한 낭만주의.
고전의 훈련을 받앗음이 선 등에서 보여지지만,
색의 대조나 터치, 운동감, 따뜻한 색 등에서 낭만주의적 요소가 보여지고 잇다.
제리코. 부상당한 기병 1814
아까같이 싸우는 용감한 군인은 사라지고, 부상당해서 전장터에서 떠나는 군인의 모습이다. 패배의 암시가 느껴지고, 아직까직도 불란서 군인의 머리랄지 화려한 건 입었지만,
그래도 이사람이 어딜 다쳤는진 보이지 않는다.
그로를 볼땐 나폴레옹이 어디를 방문했다는 서사적 맥락이 확실히 보이는데, 이 그림에서는 영웅이라는 이미지, 서사적 사건이란 맥락이 없어진다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1816
모든 영웅적 표지가 제거되고 완전히 서열이 부서진 사회가 보여진다.
생존자는 문명화된 사회의 서열과 위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제리코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메두사의 뗏목.
사실은 이것을 보면 메두사의 이야기는 실제 당시에 있었던 한 얘기이다.
근대에 나타나는 특징 - 신고전주의라면 플루타크 등 옛 고전에서 서사를 따오는데, 이렇듯 근대 이후에서야 당대 실제 있었던 사건을 그린다는 것이 과거와는 매우 다른 현상이다.
이 배가 아프리카로 떠나는 배였다. 폭풍을 만나서 난파했다. 그때 구명보트가 있고, 구명보트는 사람들이 탔지만 뎃목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태웠는데, 구명보트와 뗏목을 연결하는 밧줄이 떨어져서 여튼 뎃목에 탄 사람이 150명이었는데 타고 있다가 12일 후에 행방을 찾지 못하다가 찾아보니 이미 남아있는 사람이 15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당시 신문에 굉장히 크게 보도되었고, 알게 된 사실은 - 배의 선장이 원래는 자격없는 사람인데 공무원한테 뇌물을 줘서 선장으로 다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리코는신문기자처럼 생존자 15명을 다 인터뷰를 하고 실제 흘러간 해안에 가서 보고 파도가 어떻게 친지, 그리고 그 생존자중 목수가 있엇기에 목수에게 뗏목의 모형을 만들어달라고 했고, 모든 것을 준비한 후에 그것을 굉장히 대형 작품으로 그린 것.
이것이 중요한 이유 - 이러한 큰 역사화는 대개 주인공이 유명한 인물 중요한 장군 승리의 이미지 이런 것이었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죽음 시신 이런것들이 그랜드 스타일로 그려진 것이다.
여튼 소문이 - 표류하다 할수없어 뭐 먼저 죽은 사람의 인육을 먹었단는 것도 있어서 이걸 그릴까도 하고, 구출되는 장면을 그릴까도하고
여튼 심리적 긴장감이 극대화될 수 있는 장면을 그리기로 한 것. 그게 이 장면.
그런데 옛날에도 이런 장면들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커다랗게 그려진 것이 처음이라는 게 중요한 것이다.
마지막 단계에선 다들 팔다리가 삐죽삐죽 튀어나온 것이 심리적으로 지그재그가 많이 나와 긴장을 유발, 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처음의 과슈 스케치 - 이건 좀 아니다.^^;
사람도 너무 많고, ㄱ
그다음 오일스케치
이것은 좀 심심해보인다.
구조선이 보이는 스케치
완성작에선 다들 팔다리가 삐죽삐죽 튀어나온 것이 심리적으로 지그재그가 많이 나와 긴장을 유발, 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희망이 거의 보이지 않고 등등..
돛줄이나 사람의 배치, 팔다리 뻗은 것 - 대각선을 형성한다. 심리적 효과
맨아래에 - 죽어가는 사람들 / 중간 - 아직 기운 있는 사람 / 맨위 - 손을 흔드는 사람
그 정점에는 검은 피부의 흑인이 있다. 그 사람을 정점으로 두면서 훨씬 이국적인 낭만주의적 효과가 나타나고,
이 움직임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노끈을 가운데에 대각선으로 자른다.
사실은 이 그림을 보면, 그렇게 급박해보이지가 않는다. 그냥 따로 그린 것이 뻔하지.
마지막에 그리스 철하자처ㅓㅁ 앉아서 생각하는 사람 보면 좀 그렇고, 12일을 굶은 사람 치곤..
지금 쓰러져있는 사람도 굶어죽기 직전이기보단 신체건장하다. 고전주의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 그런지..
근데 이 그림에 모델로 들라크루아가 섰다고 한다.
들라크루아가 단테의 보트라는 그림을 그리는데 이것도 제리코의 영향이 엿보인다.
난파선이라는 주제는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작품이 되다시피 많이 그려지게 된다.
터너의 난파선 노예선 이런 것, 당시 굉장히 유행한 화목이다.
여태까지 보면, 우선 색채가 굉장히 어둡고, 묘사적인 색채가 아니라 웅변적. 색채 자체가 형태보다 중시되고, 흥분되는 터치나 이런 삐죽한 터치랄지, 흥분과 혼란의 감정(낭만주의!)이다.
로맨티시즘은 고전주의의 반대이가 . 혼란 극적인 그런 것. 절제와는 반대인 경외감 열정 이런 것들
젊은 미술가 사이에 불을 지핀 작품이랄 수 있다. 인간의 고통과 절망. 어찌보면 과장된 느낌도 있지만, 추함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잇다고 생각했다는 것.
명암효과 등이 바로크적으로 강한 대조 이런 것들 - 고전주의의 밀집되고 고른 광선과 다른 모습
제리코 1816 잘려진 팔과 다리
이런 것도 그렸다. 정신병원에 가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극적인 장면을 그리기 위해서..
상상력이 많이 필요하고, 지적인 그림보다 우리를 더 감동시키는
이런 것에서 들라크루아같은 사람이 나오게 된다.
여기서부터 고야
고야, 파라솔, 1878
이사람은 아주 중요한 작가인데 어디다 끼워야 할지..
19세기 어쩌면 가장 위대한 미술가 중 한 사람이다.
처음에 시작은 로코코양식에서 시작했으나, 하지만 자신이 관찰한 것으로 항상 작업했기에 사실주의라고 할 수 있고, 엄청난 상상력으로 작업하여 낭만주의랄 수 있고, 어떤 것은 초현실주의 , 표현주의까지 넘나들던 엄청난 사람이다.
다비드와 비슷한 시대 사람 다비드보다 2살 더 많다. 다비드가 초기에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듯 다비드도 계몽주의를 믿었는데, 고야도 계몽주의를 믿었다. 계몽주의 - 인간은 선하기 때문에 인간을 계몽하면 달라지고 발전한다는 사상. 그래서 여튼 이사람도 영향을 받는다.
고야는 80대까지 살았고 막판엔 귀가먹는다 - 여러가지 설 - 납을 많이 사용한 물감을 써서 그랬다는 설도 있고,
만년에는 자기집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광기스런 그림(블랙페인팅 - 분위기가 너무 어두워서 까매서가 아니라) 그려놓고 살았다.
60년에 가까이 작업 700점의 유화, 굉장히 많은 판화를 그렸다. 살아있는 동안 왕이 3명이나 바뀌었다. 그러면서도 부귀영화가 없었지않앗다.
왕의 궁정화가도 되었고, 고야가 살고 있던 시대의 스페인은 아주 어리석고 천하고 무지한 왕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고, 전쟁도 부패 무지와 그런것을 다 보면서 그런 것이 작품에 나타나는 것이 재미있다.
파라솔 이 작품은 젊었을 때 로코코양식의 영향을 받은 초기의 작품인데,
와토를 생각해보면, 로코코는 프랑스에서 시작했는데, 이것을 보면 프랑스 로코코와는 같지 않다. 색이 밝지가 않다. 프랑스 로코코는 색이 밝은데..
포즈 주제 남녀의 사랑 이런것은 같지만, 조금 더 개방되어잇달까 약간 분위기가 다른 개성이 있달까. 와토는 따듯 섬세하고 작은 붓터치가 있는데 고야는 더 가라앉은 색을 사용했다.
Goya, th women and the puppet 1791-92
거의 비슷한 때에 그린
야외에서 여자들이 놀이하는 장면, 근데 좀 섬찟하다. 커다란 남자를 갖고 이렇게 노는 걸 보니깐 무언가 분위기가 무섭다. 비틀어놓고.. 인간사이즈를.. 그런 섬찟함이 이런데서부터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Los Caprichos 80장중 46번째 the sleep of reason produces mosters 1797-98
카프리쵸스 도무지 알수없는 것들
미신 악 사회비판적 인간의 욕심 등..
제목은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여기보면 앞에 책 붓 펜도 있는데, 공부를 한다. (이성)
공부하다 자면 (이성이 없어지고) 온갖 비이성이 판을 친다.
세상에 이성이 없어지면 모든 것을 판을 치는 그런 의미를 가진다.
스라소니같이 생긴 동물 - 아거스 영원한 눈을 가진 동물
악몽들(올빼미로 형상화) 사회비판 - 인간의 위선, 인간은 본래 위선적 존재.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지는 순간 온갖가지 악덕이 발생한다.
이것은 꿈을 그린다. 잠이 든다 이런것은 기본적으로 낭만주의이다.
인간은 합리적으로 사고해나갈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결국은 이 사람은 자기가 본 세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기는 이런데서 그림을 그렸고 화가로서 성공했지만 주변의 환경을 경멸하는(왕의 무지나 이런)
다비드는 혁명을 긍정하고 확신에 차있엇지만, 고야는 시니컬하고 비꼬는 그런 것이 보인다.
Goya, los caprichos "out hunting for teeth"
교수형에 의해서 죽는 사람인데, 당시 믿은에 의하면 그렇게 죽은 사람의 이빨을 뽑으면 복이 온다고 여자들이 가서 이빨을 빼는 그런 모습이다. 이런 것은 아쿠아틴트라는 기법 판화기법(슈가 아쿠아틴트)그라데이션이 굉장히 잘 나타난다. 대부분의 고야 판화가 남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자ㅣ가 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잘 알려져있지 않았다. 특히 1850년 이후에야 외국에 알려지게 된다.
Disasters of the war
전쟁의 참화. 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판화집
1808-1814동안 스페인은 나폴레옹 침범 지배기에 있는다. 그동안 굉장히 많은 사람이 죽는등 그랬는데, 이걸 보면 사람을 자르고 있네.
전쟁화를 많이 보면 이런 류ㅢ 그림이 그려진 것은 고야가 처음이 아닌다. 살해 잔인함 강간 강탈 인간의 극단적인 행위등이 (사실주의도 이것보다 더할것이 없네!)나오고 있다.
또 보면, 아주 섬세한 양식으로 다루고 있다.
사람 교수형
What a sacrifice los disperate라는 판화집안에 있음
부모가 돈이 없어서 자기딸을 늙고 형편없는 사람에게 준다.
얼굴들을 보면
고야라는 영화를 보길 -
Los disperates(가지가지의) unbridled folly *고삐풀린 어리석음)
Goya,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초상화1800년인가 4년인가 그근처
상당히 큰 작품. 당시 무능한 카를로스 4세
누가 더 중심으로 보이는가? 왕비. 왕비는 교만하고 허영심에 들떴던 왕비.
황태자는 옆에 있고. 화려하게 옷이 되어있고, 로코코는 섬세 화려한 터치가 중요한데 ,굉장히 우아 장식적 파스텔톤의 색채 이런건 로코코양식이 보여지고 있는데,
여기서 재밌는 것은 사실 - 이 사람들은 실제로 이그림을 받고 기뻐했다. 멋잇게 그려져있다고.
자세히 볼수록 상당히 풍자적인 느낌이 들고, 조롱당하는 느낌이 들고 있다.
이상화된 초상과는 다른 것이, 굉장히 미묘하다.
이사람들 자신은 화려 번짝번쩍하니까 대단해보이는데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면 얼굴이 상당히 별로다.
어린애 얼굴을 봐도 얼굴이 그렇지 않다.
1655 velasquez Las Meninas
완전 어린애 얼굴인데 순수한.
거기에 비하면 이그림은 좀 오멘에 나오는 그런애..
애같지가 않네.
벨라스케스는 나와 이사람들은 같이 있으며 그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같은 무리로 그렸다.
사실 그림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작품 가족 포상화에는, 고야가 커다란 캔버스와 고야가 저 뒤에 어둡게 보인다. 완전히 벨라스케스를 의식하고 그렸는데, 벨라스케스와 달리 고야는 평민의 옷을 입고 이들과 다르게 그늘 속에 있다. 나는 이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강조치 않고 숨어서 있다. 시니컬한 느낌을 주고 있다. 미묘하다.
오늘은 여기까지.
3-1강 신고전주의 건축
2010년 4월 6일 화요일
오후 3:23
건축에서의 신고전주의를 얘기해보자(뒤에 하면 안되는데)
JAQUES G. SOUFFLOT PANTHEON 1755-92
자크 수플로
팡테온 - 이것은 본래 성 쥬누비에르 교회로 지어졌는데, 로코코에 반발해서 신고전주의로 지은 것
고대의 페디먼트 코린트 주두, 돔형태.
위의 것은 그리스적.
돔은 르네상스적. - ~~의 영향을 받아서
팡테옹 - 다신교 신전. PAN다 THEO신
로마에서 시작이 되서 판테온 7명의 신을 모시는 신전.
프랑스에선 이를 주요 문필가 음악가들의 묘로 마련했는데, 최초에는 교회로 지어졌다.
처음에 드로잉, 옆에서 본 사진
교회를 두가지 형태로 이야기하는데, 정십자형태는 라틴크로스 형태라고 해서, 이것이
명동성당은 정십자가 아닌 들어가는 길이 굉장히 긴 바실리카형태이다.
처음에는 라틴크로스로 설계되었다가 나중엔 바실리카형으로 길고, 돔도 높아졌으며,
여튼 장식이 적고 고전주의로 돌아가려는 그런것.
처음에는 창이 있었다가, 혁명때 공격이나 이런문제로 벽으로 다 막아버렸다.
영국rICHARD Boyle and William Kent Chiswick house 1725
여길 보면 페디먼트 코린트 주식이 보이고,
돔 형태 이런것은 고전에는 보여지지 않고
뭐, 조금더 상상력을 보여주는 (지나치게 과거를 반영한다기보다)작품이다.
Andrea palladio, villa rotunda 1591
이것을 보면 많이 흉내내는 것 같지만, 사진을 보면, 약간의 변형이 나타나고 있다.
고전을 보면 아주 엄격한 조격을 보여주고 있으나, 이런 것을 보면 풀어지면서,
시노아즐리 - cinoazu?? 여튼 중국풍이 유행한다.
중국스러운 것을(자기들의 시각이 반영된) 상상해서 유행.
중국식 망루 정자를 만들고 이런 것이 유행한다.
주변정원을 중국식으로 한달지 그런것이 이런 시대에 섞여서 나오게 된다.
우리가 고등학교대 배우기로는 신고전주의하면 딱떨어지게 배우는데, 그런것은 잘 없다. 기본적으로 신고전주의이지만 그런 요소가 섞여서 나타난다.
고전이라는 것은 항상 대칭이나 질서, 화음을 중시하는데, 이와 비슷한 현상이
Thomas Jefferson, 주청사, Richmond, Virginia, 1785-89
미국의 3대 대통령, 건축가이기도 했다. 내셔널몰에 있는 제퍼슨 기념관도 고전적으로 되어있는 것이 이사람이 신고전주의 건축가이기 때문. 이사람은 프랑스 대사로 가있어서 로마신전을 많이 봤고, 고전이야말로 순수함을 상징하고, 로마공화정을 가장 이상적 정치형태로 보았다. 고대에서 삶의 덕목 원리를 찾으려 했기 때문에, 주청사 이 건물을 보면 신고전주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것 땜누에 워싱터늬 초기건물들이 대체적으로 로마시대 건축을 많이 따온것이 그때문이다.
처음엔 독립은 했지만 자신드르이 과거가 유럽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것을 공부하려는 열망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뿐 아니라 대부분의 미국의 주청사를 보면 대부분 이렇게 고전적으로 되어있다.
미국 대학교 가보면 대부분 콜로니아스타일 - 미국의 장로교에서 지은 학교인데, (미국 대학건물과 많이 유사하다) - 문화란 것이 이렇게ㅈ렇게 왔다갔다 하는 걸 볼 수 있어 재미있다.
4강 고야
2010년 3월 15일 월요일
오후 2:11
<<4강.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3월 15일 월요일 오후 2:11
고야, 옷을 벗은 마하 - 1800
마하는
비너스라고 이름을 붙여야 음란죄에서 벗어난다. 고야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종교재판에
앵그르는 옆에 천사를 그린다든지.
굉장히 감각적이고, 옛날 르네상스와 같이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굉장히 선정적이다.
고야 못을 입은 마하 1807-1808
이것은 전과 달리 양식이 매우 다르다.
전통적인 누드 - 명암을 섬세하게 그려서 둥그런 입체의 표현을 만들고, TACTILE하게 만드는 것
이 다음것을 보면 좀 표면이 다르다.
훨씬 붓터치가 느껴진다. 붓이 지나간 흔적이 훨씬 나타난다. 스케치적.
프랑스에 과거에 이 그림이 있다면 완성작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
투명한 입체감 이런 것이 나서,
선생님이 보기에 - 이 두 그림을 그린 이유는
일종의 양식의 실험이다.
이것이 후기고야다. 이쯤에 보면 시각적, IMPRESSIONISTS OPTIC옵틱하게 그리는 것 인상주의자들과 같이 - 딱 보이는 그정도만 그렸다는 것. 다시 말해, 이것을 어떻게 보는냐, 눈이 그것을 어떻게 혼합시키는가. 이것이 본격적으로 혼합되는 것은 인상파.
정밀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2-3미터 앞에서 볼때처럼 그냥 시각적으로 그린다.
이 세상에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레오나르도가 한 말이고, 고야도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저 이전 누드에는 선이 존재한다.
선은 우리가 만들어놓은 것이지. 다시 보면, 침대는 스케치적으로 그렸어도 몸은 드로잉.
개인적인 실험
화가가 같은것을 이렇게 바꾸어서 그리는 것을 보면 실험이라고 보아야지.
정밀한 관찰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대로만
프라도 미술관에 나란히 전시되어있다.
고야 - 알바 공작부인
처음에는 이 여자를 그린 것으로 알려졌었는데, (고양의 후원자)
공작이 죽자 미망인이 되어 (보통 사이가 아니게 된 것으로)알려져있다.
이 그림의 색채는 프랑스와 달리 고야스런 색이다.
이 사람이 그림 반지를 끼고 있는데, 고야와 공작 부인의 이름이 새겨진 반지를 끼고 있다.
맨 아래에는
ONLY GOYA라고 적혀있다. 마흔 몇살에 죽어서,
고야 WITCHE'S SABBETH 1799 무지와 미신에 대한 풍자 그림 -
종교재판같은 것(당시 계몽사상이 배격하고 있는)에 대해
늙고 나이든 여자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은 당나귀 비슷한 동물 - 사탄
마녀는 악마를 숭배하는데, 마녀는 대개 늙고 추하고 정상이 아닌 (신체 불구)라서 마녀는 아이들의 피를 발아먹어야 젊음을 회복한다는 미신이 있다. 이 사람들이 하는 일은, 사탄에게 아이를 바치는 일을 한다. 동물의 형태를 한 사탄 주변에 모여서 의식을 치루고 있는데, 한 마녀가 데리고 있는 애는 ㅣ골이 상접한 어린애.
고야 - 콜로서스 1808-12
현실과 포초현실, 환상과 사실을 넘나드는 그림.
이런 것을 보면, 다비드의 고ㅓㄴ주의에서 보여주는 이상주의 영웅과는 다른 그런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산이 있고 인간들이 홈비백산해서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는 모습
거인은 이쪽을 향해 위협하지 않고, 맞서고 있는 사람은 아마 저쪽 어딘가.
거인은 환상처럼 나타나있다. 실제의 탄탄한 물리적 형태라기 보다는..
이런 그림들이 실제로 고야의 면모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고야 5월 3일의 학살 - 1814.
상당히 큰 그림, 대작.
역시 실제 일은 1808년에 있었던 일을 프랑스군이 후퇴한 후 그림을 그린다.
프랑스군이 마드리드를 들어와서 마드리드 시민사이에는 여러 소문이 났다.
프랑스에서 스페인황태자를 인질로 데려갔다는 소문
스페인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는데, 당시 기록에 의하면 5월 2일 저녁부터 새벽까지 계속 사람들을 죽이는 총소리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무고한 시민도 많이 죽엇다고.. 어던 재봉사는 재봉가위를 들고 잇었다는 명목으로 죽임당한다든지..
호라티우스의 맹세와 같은거오 ㅏ같기도 다르기도.
저 사람들은 하나의 집단, 또한 공포의 무리, 인간적이지 않고 기계와 같은 가해자 집단, 일률적이고 똑같은 자세.
그에 비해 인간적이고 다양한 자세와 감정을 보여주는 피해자 집단.
얖에 있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등.
고야가 이 그림을 그릴 때는 옷을 입은 마하에서 사용되던 스케치가 훨씬 거칠어졌다.
로코코의 섬세한 붓터치는 보여지지 않고 색채대비가 강하고 터치가 거칠어지는.
FOCAL POINT는 저 손든 사람.
못박힌자국이 손에 조금 있다더라. 십자가에 옷박힌 그리스도를 연상시키는 자세, 용감히 죽는 사람.
흰색 터치를 보면, 초기 정교하게 그리던 그림이 아니라, 몇가의 터치로 처리하는 - 양식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이 왜 유명하냐 - 이것은 전쟁에 대해 직설적으로 비판적인 작품.
그리고 ㅇ것은 이것을 어떤 특정한 사건으로 만들지 않았다.
스페인과 불ㄹ란서의 싸움으로 암시하는 것이 엇다.
프랑스 군인이라는 특징이 군인에겐 없다.
특정한 나라의 사건이 아니라 인간 본연에서 폭력과 희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단 것이지.
그림 자체의 구성도 기막히지만, 이 외에도 이 작품을 보아서 잊어버리기 어려운 이유는 이것은 끝난 이야기가 아니고,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이며 아직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보편적 공감을 얻고 있다. 사회비판적 작품중에 가장 뛰어난 작품.
그로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SATURN DEVOURING HIS SON 1820-23
고야는 오래오래 살았다. 1820년대에 자기집에 이런 음산한 그림을 그려서 걸었다.
블랙 페인팅들.
이 그림은 식당 벽에 있었다고 함.
파괴적인 것에 대한 집착, 정신적 학대 마술 이런것..
무시무시한 상사알 수 없는 공포 이런 것을 붙였다.
마지막에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거의 잃어버린 것 같다.
5월3일의 학살을 보면 어두운 밤하늘에 성당이 있긴 있다 - 마지막 희망같은 것
종료
들라크루아 -
DELACOOIX TO PRE RAPHAELCROIX
DELACROIX BARQUE OF DANTE 1822
1820년대 나폴레옹이 몰락
아직까지도 귀족에 의해 사회가 지배되지만, 중산층 지식인 부르주아중에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정부를 원하는 - 그래서 국가의 힘이 점점 강하게 된다. 여태까지 당연하게 생각했던 권위보다는 개인의 푷ㄴ을 중시하게 되는 경향이 오게 된다. 관습을 맞추기를 거부하고 합리주의를 거부. 감각 직관을 중시하고 냉정한 판단보다 열정을 중시하는 사조.
신고전주의도 낭만적인 것에 들어가지만
자연과 교감을 중시하면서 풍경화의 부흥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기도 함.
이 때 외젠 들라크루아 - 고독함을 즐기면서 굉장히 지적이었는데, 감성, 상상력 풍부 eee
제리코의 뗏못 - 제리코는 보헤미안적인 사람이었다. 들라크루아는 제리코보다 전인적인 사람 교육을 잘 받았고, 부잣집 사생이였던가, 정치 사회 문화 인사들과 사교적인 교류를 많이 가지고 있었고, 도한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던, 쇼팽 이런 사람과도 친했다.
자신은 낭만주의라 부르는 것을 싫어했고, 빅토르 위고나 그런 낭만주의자와 같이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 이론적이고 지식이 많은 균형을 갖추었던 사람.
여기 보는 단테의 보트는 풍랑과 보트 등 낭만주의의 기본주제, 단테의 보트 장면은 원래 (다비드는 플루타크 영웅전에서 나오지만) 단테는 중세에서 가져온다. 고전주의와는 다르다.
단테, 베르길리우스가 신곡에 보면 둘이서 지옥을 탐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옥편 - 지옥은 동심원 9개로 되어있는데, 죄를 제일 많이 지은 사람이 가장 중심 점점점- -- - 지금 이 장면은 5번째 동심원 안이다. 빠져죽는데 완전하게 죽지 않는 벌을 받는다.
음산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 그림을 보았을 때 건장한 체격 뒤틀리고 움직이는 누드는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을 보면 알 수 있다.
저 빠져죽는 사람 신체를 보면 저주받은 영혼보다는 좀 고전적 영웅신체같다.
고전적 삼각구도인데 끄트머리가 잘려있다.
고전적인데 바로크적인, 뒤틀리거나 뭐 …
젊은 들라크루아가 여러 대가들의 것을 흡수하려는 것을 알 수 있다.
색채의 대비 이것이 루벤스적인 것이다.
옛날에 다비드 그림에서 볼 수 없는 시각적인 .
제리코는 원래부터 들라크루아의 재질을 인정했고, 여러가지를 소위 색깔있는 표현, 가슴에 호소할 수 있는 이미지 자체를 호소할 수 있는 지적인 내용보다.
첫번째 데뷔작(살롱) 사람들에ㅔ 주목받게 되었다.
확대 사진
물방울 - 세개의 붓터치로 되어있는데, 이것을 색채터치로 표현.
1824 키오스 섬의 학살 1824
1824 살롱전에 출품한 들라크루아 작품
그리스 독립전쟁을 주제로 그리려고 했는데, 키오스섬은 그리스 섬이긴 하지만, 그때 그리스는 터키 지배를 받고 있어서 독립운동, 그리고 엄청난 탄압을 받는 것이 신문에 보도되고 있다. 900명 이상이 죽고 잡혔다.
실제 당대 주제를 했고, 이 이야기는 파리의 지식인들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리스는 인류문명의 기초고, 민주정치의 발상지인데, 야만인에 의해 핍박받는다는 것이 센세이션을 일으킴.
여러 준비단계를 거쳐 신고전주의적인 방식으로 그렸다. 마지막에는 이것이 중간이후에 바뀌는 것이 - 사람은 전경에 몰려있고, 황량하게 텅 비게 되는(낭만주의적)배치.
키오스 섬의 풍경이 파노라마로 그려져있고, 앞에는 핍박받는 사람과, 끌려가는 아름다운 여인 등..
건초마차 1824 컨스터블
1824년 살롱에는 외국 작품도 있었는데, 그 때 입선된 작품이 잇었는데
들라크루아의 눈을 끈 작품이 영국의 콘스터블이 그린 건초마차.
영국은 아카데미의 전통이 강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테크닉하게 자유로울 수 있다.
전통적으로 나무가 있다면 초록색이니깐 초록색을 써서 어두운색을 섞어 그리거나
근데 이사람은 초록을 그린 위에 붓터치를 더한다.
과학. 색채의 법칙, 보색의 대비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콘스터블은 자연의 생생함을 더하기 위해 초록 옆에 붉은색을 쓰기도 하고, 흰색을 강조하기 위해 두껍게 바르고, 표면효과와 색채효과를 주었다.
콘스터블 개인이 그런 기법을 발견햇는데, 들라크루아가 그 기법을 보고 다시 와서, 이미 완성된 그림에다 재터치를 햇다. 빨상색이 여기저기 칠해져있다.
어떤 평론가는 이 그림을 보고 키오스섬의학살이 아니라 회화의 학살이라고 했다.
표면을 강조하기 위해 눈두덩에 빨간색을 바르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 신고전주의 시대에는 이런것이 거으 ㅣ형명적인 방법이었다.
초기단계에는 보색만 가지고 했었는데, 나중에는 이런 대비를 많이 사용하여 색채화가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DELACROIX 1827 THE DEATH OF SARDANAPOLUS
고대 근동 앗시리아의 왕.
잘 모르는 이역 야만인의 이야기,
성벽이 무너지고 적이 쳐들어와서 사람들이 죽기 직전
이 사람은 자기 여인들을 자기 병사들에게 죽이도록 한다.
아름다운 여성의 죽음, 아비규환 이런 것을 보여준다. 완전히 깊은 공간이 강한 대각선을 이루는데, 바로크 시대에 많이 나타나는 장면인데, 사람들로 가득채워져있고,
드라마틱하고, 또 어찌보면 너무 명료한 것이 없는 것이다.
바이런이 쓴 똑같은 극본이 있다. 거기서는 사르다나팔로스가 혼자 죽는데 여기서는 극적인 효과를 더하기 위해 같이 죽는것으로.
전경에 있는 죽는 여자를 보면 앵그르같으면 그것을 명암으로 했을 것이다. 그런데 들라크루아, 루벤스는 명암의 대조를 보색의 대조로 표현한다. 검은색의 사용을 줄임으로서 색감이 두드러진다.
오늘은 여기까지.
5강 낭만주의(들라크루아), 영국 풍경화(콘스터블까지)
2010년 3월 17일 수요일
오후 2:03
<<오디오 녹음.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3월 17일 수요일 오후 2:03
들라크루아, 바리케이드를 넘어가는 자유, 1830
실제 당대 있었던 사건1830 - 이 것을 전후로 왕정복고/
대혁명 이후에 혁명들이 일어난다. 이대 루이필립이 1830년이후에 왕이 된다.
뒤에 노트르담이 불타는 모습이 보인다.
이것은 그당시 사실적인 묘사라기보다 하나의 혁명 자체를 상징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들라크루아는 자기를 낭만주의자라 불리는 걸 싫어했듯이,
혁명 자체는 상당히 낭만주의적이지만,(쇼팽의 혁명가 에튀드)
그럼에도 불고하고 이 삼각형의 구성이나 여성의 탄탄한 몸 등은 고정적인 것들이 남아있다.
맨아래에 죽어서 넘어진 사람들이 있고, 밑에서
그로가 그린 일라우의 전투 - 아래서 올려다보거나 매달리는 사람,
이 사람이 저 여신을 쳐다보게 하는 시점 집중 - 모든 것의 정점이 삼각형의 끝에.
옆을 보면 자본가(혹은 지식인)와 노동자 두사람이 보인다.
소년 - 실제 당시 혁명기에 어린 소년이 같이 있었다는 소문이 기사에 나고 했다더라..
연기, 광선 등은 열광, 흥분, 바로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움직임이 굉장히 강하다.
재미있는 것은 저 여자인물.
사모트라케의 니케(헬레니즘) 나 라파엘의 갈라테아에서 보여지듯 둥근 몸의 형태, 볼륨등이 그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그림이 굉장히 감정적 흥분을 가져오는 그림이었다. 그림 자체는 살롱에서 환영받지 못했으나, 왕이 이 그림을 샀다.
신고전주의에서 영웅의 주제가 마라 소크라테스 등으로 남성으로 다루어지다가, 여기서는 여성으로 나타난다. 상당히 기품있는 여성으로 묘사.
마리안느 - 프랑스를 상징할때엔 여성으로 나타난다.
[들라크루아 모로코 주제 그림]
그 후에 들라크루아는 모로코를 1831년에 가게 된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 앵그르의 경우는 말로만 듣던 오리엔트(동방)를 오달리스크 등으로 묘사했는데, 들라크루아는 모로코를 직접 방문했던 사람이다. 외교사절로. 남들은 가지 못했던 술탄의 집에도 가게 되고, 그것을 자기 노트에 열심히 적었다. 이 사람의 일기가 상당히 두겁게 나온 것이 있는데, 노트에도 지형적 특징이나 복장 등, 프랑스사람들은 기후탓에 원색을 잘 입지 않는데 - 여름에 바캉스를 간다. 모로코 여행은 들라크루아에게 강렬한 햇빛과 색채에 대해 인상을 주었다. 아랍 지역에 가면 사용하는 색채가 매우 다르다. 모로코여행은 이사람에게 색채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받게 했고, 또한 동물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해서, 말이나 사자 사냥 등을 스케치했다. 현란한 빠른 터치가 나오고, 감정적인 표현을 발달시키게 된다. 또한 당시 많은 유럽사람처럼 동방의 사람을 야만인으로 보았다. 동물사냥 주제.
[다른 그림]
다비드와 앵그르와는 다른
키오스섬의 학살에서 보이던 부분적인 색채가 아주 그림 전체로 확산되게 된다.
이후에 이 사람이 스페인 여행을 가게 되는데, 티치아노의 작품이 당시 스페인에 많이 소장된다. 티치아노는 색채를 많이 사용한 화가이기 때문에 이를 보고 색채에 영향받았을듯.
또한 들라크루아는 색채를 이론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아니지만 직감적으로.
사자 사냥 1861
모로코에서 그린 스케치를 가지고 와서 그린 그림.
루벤스나 바로크 그림을 보면 그림 전체가 하나의 움직임을 이루는데, 이 그림을 보면 네 그룹으로 움직임이 나뉘고, 한 그룹 안에서도 움직임이 서로 지그재그로 상충.
각각 분리되어잇을 뿐 아니라 그 분리된 그룹 안에서 자세, 시선을 이리저리 틀고 있다 - ㅈ화로운 구성이라기보다는 눈이 자극되는 구성이다. 여러가지 구불거리는 선의 복잡함 때문에 눈이 여러군데에 정신없이..
인물들은 모두 아랍인 원주민의 모습 - 이국적
[작품을 위한 스케치]
스케치에도 터치가 난무
어떤 평론가는 술취한 빗자루라고 평함.
낭만주의 - 남들과 다르게, 독자적인 것을 추구함. 낭만주의는 양식이 아니라 일종의 라이프스타일.
영국이나 독일의 낭만주의를 보면 양식이 다 다르다.
신고전주의는 양식에서 고전적인 것을 따라가지만, 낭만주의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것, 규범을 거부하고 등등…
1838 메데아
연극적인 요소를 많이 느낄 수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 나오는 여인.
남편 제이슨에게 버림받고 복수심에 불타 두 사람의 사이에 난 아이들을 다 죽여버리는 여성.
여기서 보여지는 감정 - 복수 사랑 미움이 섞여지는
마녀로 변해서 악인이 된다는 이야기. 일종의 팜므파탈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요녀- 아름답지만 남자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
시커먼 동굴 속에, 공포에 질린 어린아이들, 번쩍이는 단도, 어둠에 얼굴의 반 이상이 가려져있음에도 눈빛이 느껴지고,
이런데도 불구하고 볼륨형태등이 아직까지 고전주의적 누드의 형태가 남아있다.
빅토르 위고의 문학작품에서 나오는 우울하고 이국적이면서 극적인 요소와 비슷한, 굉장히 칼라풀한, 색채가 있는 표현, 규칙규범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 하지만 들라크루아는 훨씬 고전적 형식을 맞추려고 함(위고는 훨신 투쟁적).
들라크루아 누드 / 앵그르 누드(대오달리스크)
같은 시대에 살았던 두 사람의 누드가 이렇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선이 거의 없이 색채 터치가 강해지고
양식 - 문헌이 없는 상황에서는 양식이 근거가 된다. 양식은 눈으로. 자꾸 작품을 보는 수밖에 없다.
붓터치를 쓰는 방법이나 손의 각도의 버릇 등..
19세기는 미술관이 세워지면서 진품을 감정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판화작품 - 두 사람의 캐리커쳐
프랑스 이제 끝
SATAN WATCHING ADAM AND EVE
색채로 감정을 과장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면,
영구에서는 낭만주의는 여러 사람에 의해 실천. 윌리엄 블레이크 - 매우 독특한 사람.
시인이자 화가, 천전난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특이한 경험을 많이 한다.
꿈과 환영을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능력이 있었던 사람.
이 사람이가장 존경한 사람은 미켈란젤로.
낭만주의자였지만 그래서 인체는 신고전주의같이 선, 근육, 인체.
이 사람은 유화를 거의 하지 않았고, 대개 드로잉이나 판화+수채화, 혼합재료를 많이 썼다.
아래 아담이 있고, 위에는 사탄. 이런 것들이 꿈인지 환영인지 그러나 실제처럼 썼고, 성경이야기, 셰익스피어, 밀턴으 ㅣ실락원 등을 일러스트로 그리기도 하고, 그림과 시를 곁들여 놓기도.
르네상스보다는 중세에 대한 애정을 많이 가졋고, 계몽주의에 대해 신념, 실제 미국으 ㅣ혁명을 지지.
연인들의 회오리 바람, 1824-27
드로잉이 굉장히 중요하고, 색채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다. 루벤스 티치아노 베로네제같은 색채화가들을 싫어하고 비난했다. 색채를 안쓰진 않고 상징적 의미가 있을때만 사용.
유화의 두터은 질감을 실험하기도 했다.
이 작품을 보면 인체 드로잉이 마구 섞여 흐르는 환상적인 것.
"유럽 찬화의 예언" 중 속표지
주카로 바울의 개종과 동일.
자신은 층계에서 이 환영을 보았다고 주장.
콤파스라는 것은 예로부터(중세로)신을 콤파스를 가진 것으로 믿는다. 콤파스는 설계자로서 하느님을 나타내는 이미지. 이성, 여기에 봄ㄴ 신이 완전히 둥그런 빛에 둘러싸여있고,
축도법 (FORESHORTENING)원근법으로 그렸고, 결국 콤파스는 이성을 나타내는데, 이성이란 모든 영감을 누르기 때문에 내면이 중요하지 이성이 중요한 것은 아니란 이야기를 한 것이다. 신고전주의를 완전히 배척하진 않지만 내면의 눈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THE GREAT RED DRAGON AND THE WOMAN CLOTHED IN SUN 1806-09
성경의 묵시록편에 같이 들어간 일러스트레이션. 혼성동물들이 블레이크 작품에 많이 등장.
중세 페르시아 이집트 인도 이런 작품들에서 많이 영향받음 괴물 이런것.
상상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
아이작 뉴턴 1795
뉴턴이 르네상스 미켈란젤로적인 누드로 나와서 콤파스로 뭔가 하는중.
1795 네부카드네자르(네부카네잘, 나부코)
아까가 이성이라면 이것은 비이성, 본능, 동물성을 상징.
이슈타르의 문도 이 왕때 완성
무시무시한 공포와 동물적인 모습 - 뉴턴과 같은 이성도 충분하지 않지만, 이런 류의 동물성 감각도 아니다.?
이런것이 블레이크의 중요한 특징
다른사람
심리학책에 많이 등장하는
FUSELI 악몽 1785-90
스위스 태생의 사람, 나중에 신부가 된다. 영국사람.
강한 개성, 그림양식만 보면 앵그르같은 완전한 고전주의양식을 보여주는데 , 내용에서는 악령의 세게ㅡ 꿈의 세계를 보여준다.
낭만주의적 주제.
그다음
영국의 낭만주의 하면 두 명의 풍경화. 한명은 존 콘스터블, 또하나는 윌리암 터너.
프랑스는 워낙 아카데미즘이 강하게 자리잡아 풍경화가는 아직도 말석에 있다. 프랑스에선. 역사화나 신화화가 제일순위.
영국은 아카데미가 있었지만 그렇게 뿌리가 깊지 않아서 풍경화가 오히려 발전,
당시 영국이 제일 잘살고(18세기 후반이후 산업혁명) 산업혁명으로 여행을 많이 가게 된다. 관광붐
돈많은 사람들은 이탈리아를 가장 많이 가고, 돈이 적으면 스코틀랜드나 그런걸 많이 간다.
GRAND TOUR라고 함. 여행 책자도 많이 나온다. 풍경화로.
당시엔 신사들이 갖추어야 할 교양 중 하나가 수채화.
투명수채 WATER COLOUR
프랑스는 스케치가 과슈(포스터칼라) 불투명.
영국은 투명수채가 발달해서, 아마추어 화가들의 소사이어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처칠경, 찰스 황태자 등도잘 그린다. 전통이 있다. 풍경화가 자리잡기에 토대가 잡혀있엇다.
지형 숲 기후에 많이 영향받을 것이다.
독일은 그림형제 이야기 등에도 우서진 숲과 산 등으로…
영국은 섬나라 비가 많이 오고 완만한 산, 언덕, 습하고..
파랑의 색이 검푸른 것이 많아서, 영국의 풍경은 야생적이라기보다는 은밀, 길들여지고 따뜻 편안함.
영국적인 풍경을 그렷던 사람이 콘스터블이다.
이 사람은 SUFFOLK에서 자랐고, 항상 그 주변을 그렸다.
실제 살아있는 풍경의 느낌을 갖오려 했던 사람은 클로드 로랭. 프랑스인, Claude Lorrain
로랭이 19세기 화가들에 미친 영향이 크고, 로랭의 영향을 콘스터블도 많이 받는다.
굉장히 성실히 작업하는 사람이라 하고, 변화무쌍한 날씨를 잘 묘사한다. 구름의 형태가 변화가 많다.
그림에 몇월 몇시 언제 라고 썼다.
이 사람에게 있어 자연의 사생은 과학, 자연의 진실. 이라고 했다. 상상력은 콘스터블에게 필요없다. 자연이 상상력을 능가한다.
터너는 자연을 하나의 신비주의로 보았지만, 이사람은 더 진실한 자연에 관심을 가졋다. 터너와는 반대되는 성격의 사람이었고, 모험을 하진 않았고 시골에서 풍경과 가축 등을 그렸다.
DEDHAM VALE 1802
자기 주변의 풍경을 계속 그렸고, 사실 풍경을 보면 비슷비슷하기도 하다.
바람이 ㅂ불 때 어떻게 반짝거리고, 이슬이 어떻게 맺히고 등..
콘스터블에게 풍경 - 자연이란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으로는 변화없이 웅장한 것이 바로 콘스터블의 풍경화. 그 나름대로 굉장히 견고하다. 자연의 풍요로움에 대한 낭만적인 반응.
클로드 로랭 17세기 CEPHALUS AND PROCRIS
고전주의자이기 때문에 2/5, 대체적으로 하늘이 3/5를 차지하고 전경이 저렇게 흐르는,
고전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그런것인데,
그 영향을 받았더라도 콘스터블은 자기자신의 느낌이 더 강하다.
CONSTABLE / WEYMOUTH BAY 1817
계속 얘기하지만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차이는 공간이다.
호라티우스의 맹서를 보면 아무리 서있어도 뒤가 막혀있다.
그런데 낭만주의는 무한히 확장되는 공간을 보여준다.
원경의 언덕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름이 더 뒤로 넘어가고 있어서 뒤가 연상된다.
고전적 풍경이 세잔. 딱 막아버린다. 그것은 고전주의적.
건초마차 1824
인상파와는 달리 집에 가져와서 완성을 시키는, 느리게 작업하는 방식.
이것도 3-4년에 걸쳐서 완성했다.
이것을 보면 하늘이 로랭과 같이 3/5가 하늘이고,..
여튼
시커먼 구름이 왔다 지나가는 중이고, 파란 하늘이 나오면서 개는 모습,
농가가 있고, 건초마차가 지나가고, 개가 있고 새가 날아가고.
단순하지만 진실되고 순수하고 평범하다. 자연 인간 동물이하나의 화음을 이루고 있고, 전체적으로 이슬이 맻힌 것 같은 분위기가 통일감을 주고 있다.
톡톡톡 붉은색이 튀어나와보이고, 흰색이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두텁게 바른다. 이런것은 프랑스에서는 굉장히 화면에 텍스쳐를 있게 하는 것이다.
1825년 LEAPING HORSE 보면 텍스쳐가 더 거칠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짝이는 햇볕이 강해서, 뭐
1827 Brighton 물살 -
물감을 기름과 섞는데, 여기서는 물감을 그냥 짜서 바른다.
사실묘사가 아니라 텍스쳐를 주어서, 물살에 반짝이는 햇볕을 보여주는것처럼 보인다.
완전히 자신이 창안한 방법. 자연의 신선한 것을 본대로 그리기 위한 테크닉.
이것이 프랑스같은 경우는 규범이 강해서 그리기 어렵다. 영구에서는 이런것에 자유로웠고, 터너는 이런것이 매우 강해진다.
인상파들이 가장 좋아했던 주제가 물.
유동적이고 빛에 가장 잘 반응하고 반짝반짝.
다음시간은 터너
6강 윌리엄 터너
2010년 3월 22일 월요일
오후 1:59
<<오디오 녹음.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3월 22일 월요일 오후 1:59
Turner, Decline of Cathagian Empire 1817
지난시간은 터너 전까지(콘스터블) 했음.
터너는 콘스터블과는 상당히 다른 풍경화가.
이 사람의 주제는 거의 자연의 기본적인 요소(대기 물 불 같은 것이)였다.
콘스터블처럼 스케치하거나 그런걸 거의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아직도 이 사람들이 아카데미나 역사화 전통이 뿌리깊은 나라는 아니었지만, 주제에 대한 의식이 아직 있어서, 카르타고 제국의 쇠락의 주제로 그렸다. 슬라이드를 보면 주제가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이 풍경. 해가 더오르면서 강렬한 빛. 이런것이 이 그림에선 더 중요하다. 콘스터블이 테크닉을 개발했다고하는데, 프랑스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것을 이 사람은 개발. 임파스토impasto두껍게 물감을 바르는 것. 그냥 오일을 섞지 않은. 가령 나이프로 펴지 않고 툭 바르는 것. 여길 보면 두껍게 발라진 터치를 보면 - 거칠은 질감 자체를 느끼게 한다.
이런 그림은 클로드 로랭의 영향이 분명하다. 양족에 고전적인 건물, 성우르술라가 있는 항구(1641)
사실 이걸 보면 바다의 해가 뜨고 지는 풍경이 인상적인 부분이고 그작품에서, 그리고 터너도 여기서 영향을 받는다.
19세기는 풍경화의 전성시대다. 그 최전성기가 인상파다.
영웅이나 이야기의 단지 배경에 불과했던 풍경이 이제 (당시엔 바라보는 감상의 대상이 아니다. 옛날 사람에게 산은 관찰한다 이런것은 근대이후에 등장한 것) 프랑스보다는 영국에서 풍경화가 쉽게 받아들여지면서 인상파로 이어지는 단계.
클로드로랭같은 사람이 그것에 일조했다.
터너 burning of Parliament,1835
실제 있었던 일.
불타는 것을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구경중. 런던시민들.
이미 근대적인 근대가 왔음을 나타내는 특징중 하나.
거대한 다리, 가스등불
산업혁명 최초가 영국이라 산업혁명의 혜택이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 보는 사람들은 중요치도 않고 어렴풋이 보이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이 타오르는 저기.
어느때보다 색채가 강렬하게 빛나고 있고, 시각적 충실성(불이 타는 장면)의 묘사가 아니라, 거의 우주적 차원에서의 용광로처럼 불과 대지 공기와 물이 엄청난 모습을 보이면서 순수한 에너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완전히 사람들을 압도하는 것 때문에 인간이 만드는 구조물은 거의 희미하게 보일 수밖에. 녹아버린 듯. 그렇게 보인다.
그래서 결국 이것은, 자연의 힘에 대한 인간의 낭만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늘이 용광로와 같이 보이는데, 완전히 노랑과 흰색이 눈부시게 빛나며 우리의 현실을 녹여내리는듯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는 태초의 혼란을 상상하게 만드는 그 에너지에 압도되게 만든다. 이것이 낭만주의가 원하는 격정적이고, 숭엄미 sublime beauty 그런것이 낭만주의에서 찾던 감정이다. 인간의 이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야말로 압도되는..
여기서도 보면 매우 자유스럽고 독자적인 테크닉 - 어떤건 임파스토도 있고, 어떤건 손으로 하는것도 있다. 테크닉으로는 자유스럽게 자신이 원하는 표현에 있어선 그렇게 표현되는 것. 그것을 표현한 것은 순수한 색채로. 더 이상은 묘사적이라기보다 표현적 추상적 의미를 가진 색채..
가운데 세부를 보면 텍스쳐 질감이 도드라지게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저 색만 보면 거의 추상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색과 그것자체로만 보면. 이것이 터너의 중요한 특징이다.
저 원초적인 힘에 비하면 인간과 인간의 구조물은 전혀 아무것도 아닌것을 알 수 있다.
1839 slave ship turner
원래 터너는 이런것을 안그렸다고 한다. 이것은 선라이즈 해가 뜨는 장면을 그린 것이었는데, 저 노예 주제가 없었더라면 그야말로 장엄한 풍경이었을텐데, 여기에 도덕적인 메시지가 더해진다.
흑인들을 아프리카에서 데려다가 미국에서 노예로 썼는데, 이것이 단시 사회적인 논의가 되고 있던 것이 덧붙여진것이다.
주제를 생각치 않더라도 공기나 물 대기 이런것이
엄청난 파괴력을 보여주는 자연에 대한 반응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해가 막 나오네. 언제 그랬냐는듯.
노예 발이 묶인 것이 보이고, 물고기가 모여들고,
1872 모네 해돋이-인상
런던에 모네가 가있는 동안에 그린 것이라 터너의 영향을 모네와 같은 사람이 받는것이다.
1842년 snowstorm
이 작품이 전시되고, 거의 배는 보이지도 않고, 눈보라에 쳐서 거의 완전히 우주적인 소용돌이와 에너지에 삼켜져버리는것같은 난폭, 상상할 수 없는 자연의 느낌. 자연의 두려운 힘을 느낄 수 있다.
자연이란 광폭 난폭할 수 있단 낭만적인 상상력. 터너 자신은 이것을 좀더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마스트에 꽁꽁묶어서 눈보라치는 바다에 나가서 4시간동안 버텼다는 이야기가 있다. 직접 경험을 통해서 나오고, 이 소용돌이 속에 인간이 만든 배는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주 두텁게 바르고 발라서 자연이 완전히 하나의 추상적인 패턴 이런 작업을 이 사람이 했다.
배 마스트 부분을 확대해보면, 배가 두껍게 흰 물감을 두껍게 발라서 효과를 내엇다.
증기기관차가 다니기 시작하면서 자연의 소용돌이속에 인간이 만든 구조물과 대비가 되는 ..
거의 색채가 지난번 19세기 낭만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영국의 낭만주의는 전개되어서
영국의 공통분모는 낭만주의 이것은 양식이런게 아니라 , 자연에 대한 감흥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제 독일의 낭만주의 작품
1805-06phillip otto runge 이집트 피신중의 휴식
독일은 영 프와 다르다. 독일은 완전히 통일된 상태가 아니라서
뮌헨등 남부는 카톨릭
북쪽은 프로테스탄트
문화는 독일 - 각도시마다 문화적 분산적인 특징을 갖는다. 드레스덴 베를린 슈투트가르트 다르다. 아카데미와 같은 체제도 없어서 정부에서 이끌어가는 것도 없고. 바이마르는 괴테같은 사람이 활약. 1800년 괴테가 활약하는 이시대에 낭만주의가 발생. 무언가를 동경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단어가 되엇다. 이 사람들은 특히 자연을 굉장히 많이 숭배하고 정신적인 것을 찾으려 하고, 현재의 상황이 힘들기 위해 더미화된 과거를 찾는다. 정신적인 갈망이 문학으로 나타나는 나라였다. 그리고 독일은 숲이란 게 중요. 땅이 굉장히 척박한 곳인데, 숲이 굉장히 울창하다. 오래전부터 개간해서 한 것이다. 독일은 문학이나 뭐나 숲이란 게 중요하고, 자연을 숭배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종교를 찾으려는 것이 강하다. 독일 낭만주의미술이란 것은 거의 사상 속에서 나타나게 되고, 특히 우리가 볼 사람은 두사람
필립오토 룽에
가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
이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종교에 대한 찾기, 그리고 제도적 종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과 개인 사이의 관계로서(영지주의같이) 많다.
이사람은 자연과 인간과 신의 융합을 찾으려했다.
옛날부터 많이 그려지더 ㄴ종교적 주제이다 이그림. 마리아와 요셉.
멀리에 피라미드가 보인다.
이집트로 피난왔다가, 떠오르는 해가 나일계곡을 비춰주는 장면이다.
요셉은 밤에 지폈던 모닥불을 끄고 있다.
여기서 보면 과거의 종교화에서 보듯이 성인이라는 특징이 거의 나타나있지 않다.
신교였기 때문에 새로운 종교화랄 수 있고, 오른쪽에 천사가 꽃이피는 나무 속에서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하나의 천사가 나무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아기는 눈을 뜨고(새벽=자연, 아기그리스도가 눈을 뜨는 것, 새벽은 부활을 상징) 즉 인간의 구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어쨌건 전통적 기독교주제를 낭만적 감정과 연결하려 한 것이 룽에의 시도. 그리고 여러가지로 상징적인(동방의 빛)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굉장히 개인적인 종교화랄 수 있다.
룽에 1809 룽에 아침
매끄럽게 다듬어지고 정교한 처리. 거의 고전주의랄 수 있다.
붉은색 파랑색 노란색을 써서 블루라는 것(푸른색)=하느님을 상징.
노랑은 성령을 상징. 바닥의 레드는 열정 혹은 수난을 상징한다.
아이는 붉은색으로 되어있어서 희망과 환생을 상징한다.
상징이 강한 그림을 그렸다. 많이 그리진 못하고 일찍 죽었다.
Casper david Friedrich.
이사람은 대부분 그린 것이 요술 마술에 걸린듯한 고요한 정적의 그림들.
사람들은 대부분 앞이 아닌 뒷모습으로 나타나있고, 신비스런 것이 마치 홀린듯. 자연의 공간의 신비로움에 끌려들어가게 하는 것 이것이 이사람의 가장 특징적인 작품들. 공동묘지, 부서진 유적, 거기에 고목 그런것이 있는 음산한, 감정적인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그래서 여기서 보는 이런걸 보면 콘스타블 터너와는 또 다른 시점을 느낄 수 있다.
콘스타블 0- 애정을 가지고 관심갖고 묘사
터너 - 에너지, 광적인
프리드리히 - 신비주의랄까.
독일 - 북유럽이나 노르웨이 스칸디나비아 특징을 어떤 사람은 자연을 초월적인 신비주의로 표현하려는 것이 강하다고 하고 있다. 뭉크의 그림 - 절규 보면 뒤에 있는 풍경이 굉장히 신비스럽게 보이는데, 그것이 북구의 특징이다.
프리드리히 홀로 서 있는 나무 1822
이것은 바닷가의 월광 1822 와 짝이 되는 그림이다.
이것은 보면 산의 풍경이고, 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오크 떡갈나무. 예수의 관이 이나무였다고 한다.
이것이 산으로 올라가고 있다.
여기서도 보듯 번개맞은 나무를 보면, 여기는 번개맞은 나무다.
이런 것이 아래서는 잎파리가 나고 있는게 이것은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오크(참나무)는 단단하고 지속적이고, 신앙과 미덕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목동이 있고, 양떼가 있다. 이런것이 인간을 의미해서, 인간과 나무와 자연이 하나로 융합되는 그런 의미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아침 풍경.
이것과 바닷과의 월광.
이것은 도시민. 이것은 저녁일몰풍경이다. 여기서 이사람들은 바닷가 돌에 앉아서 항구에 배가 들어오는 장면을 보고 있다. 예전에는 사람의 일생을 항해하고 비교했다. 항해를 하는 도중에 격풍 풍랑을 만날수도 있고, 항구로 돌아오는 것이 인생의 끝이라는 비유가 많았는데, 여기 보면 이 사람들이 앉아서 끝나가기 시작하는 인생을 보고 잇다.
달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걸 볼 수 있다. 달이 사람들의 여로를 비춰주는 광선의 역할을 하고, 사람들이 앉아있는 튼튼한 바위가 신앙임을 나타낸다.
결국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생의 항로를 발견하고 안전히 인생을 마치는 그런 풍경화.
독일낭만주의는 사실 크지도 않고 테크닉도 부족해서 별로이다. 지나친 종교적 감정이 들어가서 또 별로라는 느낌이 느껴진다. 신비주의자로서 인기있는 작가기도 하다.
황무지 겨울 밤의 풍경 등 불편한 주제들을 많이 해서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도 했다. 빈 공간을 보면 거의 죽음을 느끼게 하는 고요함 . 자기의 고립된 세계속에 살았던 화가이기도 하고, 남들같지 않게 로마에 가서 고전을 공부하거나 그런걸 거부했다.
이사람이 그린것중에
1824 북극해 프리드리히
상당히 큰 그림이다. 가로세로 3미터 이상 되는 대작이다.
취지 - 당시 19세기 탄험을 하기 시작해서 29년까지 페리가 북극을 탐험했고, 아무도 안가본 사람의 흔적이 없는 그곳에 대한 낭만적 상상력. 그런것이 상상력을.
여기서 보는것은 양식적으로는 정확히 그린 고전주의적인 것이지만, 이것은 춥다못해 흰색이 푸른 기를 띠는, 굉장히 신비스러운, 그리고 아주 고요한. 신비로움을 주는데, 자세히 보면 여기에 배가 난파되어있다. 결국 이것은 - 지금은 이렇게 고요하지만, 바로 전에 예측못했던 난폭한 것때문에 배가 완전히 침몰되고 인간의 패배를 나타내는 그림인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작품을 북극해라고 했는데, 어느 책을 보면 hope희망이라고도 제목이 나온다. 희망이 난파되었다고. 난파된 선박, 북극 그런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낭만주의의 상징적 해석으로 또 보느냐의 해석이 있다.
종교적인 해석 - 얼음조각들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 보잘것없는(보트)인간이 신에게 잠히 도전한 것에 대한 결과가 이것으로 나타났다
다른해석 - 역사적 은유 - 그당시 독일은 유명한 독재 메테르니히 독재하에 있엇다.얼어붙은 북극땅은 독일정치의 마비된 상황을 나타내고, 배는 자유의 관이라고 상징된 것이 아니냐.
여기까지 풍경화를 중심으로 보았다.
이제부터 파리.
Corot, Volterra, 1838
신고전주의 앵그르 다비드등이 활동하던 그시기에 또한편 다른화파가 등장한다.
이젤과 캔버스를 들고 밖에 나가서 그리는 화가들이 많아지기 시작. 이사람들은 인상주의 화가드링 아니다. 아직도 집에 들어와서 작품을 하는 사람들인데, 과거 프랑스 어떤 시대보다도 자연 사생을 많이 했던 화가들인데, 일련의 화가들이 간 곳이 파리에서 한시간정도 거리에 바르비종barbigon
대기의 현상과 햇빛, 풍경을 산뜻한 색으로 묘사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바르비종에 가보면 (조그만 도시인데) 프랑수아 밀레- 이사람이 간 곳이 바르비종이다. 이때만 해도 밀레와 다른 화가.
카뮤 코로,
테오돌 루소(앙리루소말고),
밀레
도비니
등이
퐁텐블로 숲을 헤메고 다니면서 강렬한 분위기와 광선을 느낄 수 있는 곳을 찾고, 밖에서 스케치만 하고 집에 와서 제작하는 태도를 완전히 극복하진 못했지만 되도록 밖에서 작업하려고 많이 함. 완성작과 스케치의 경계가 줄어들기 시작.
코로- 이사람은 풍경화만 한 다른사람들과 달리 나이가 좀 많았고, 전통적 미술교육을 받고 인물화등도 많이 그렸다.
조용한 성품 다른 정치 그런것에 휩쓸리기 싫어하고 그러면서 그림을 상당히 잘판 이름잇는 화가. 이사람은 ㅣ탈리아에 가서 공부를 했는데, 미켈란젤로 고전 그림을 열심히 배웠던데 비해서 이탈리아에서 이사람을 사로잡은 것은 맑고 깨끗한 이탈리아의 광선이었다. 풍경화 특히 로마의 고적을 많이 그려서 - 여기서 보여지는 볼테라, 파르네제의 정원에서 보이는 포룸
Corot, Forum seen from Farnese Garden,1826
포룸은 고대로마의 중심. 상당히 질서와 조화를 보여주고, 뛰어난 균형감각, 굉장히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그림들은 거의 실경, 실제 관찰하는 것을 기초로 하는데, 아직도 집에 와서 조금씩 편집을 한다. 이사람이 다른고전주의 푸영화가와 다른 것은 푸생은 굉장히 이사오하시켰지만, 이사람은 보이는것에 상당히 열심이었고, 그러면서도 사색적인 것에 열심.
빛의 느낌이 강하다. 형태가 굉장히 견고하게 보이지만, 건전한 관찰에 의해 구조와 형태가 드러나고, 거기서도 밝고 어두움이 지켜지는 질서있고 조화되는 것이 코로의 특징적인 초기 그림이다.
Corot, mortefontaine의 기념1864
훨씬 초기보다 섬세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은빛 녹회색으로 전체가 사로잡혀서, 모든 것은 광선의 분위기, 미묘 따뜻한 순간적인 이미지를 표현하면서도 고전적인.
광선에 감싸여있는 섬세한 관찰 - 이런것이 코로의 작품들이다.
이런 그림이 한때 달력에 많이 나왔다.
누가 봐도 싫을 수가 없는 그림. 참 분위기있다.
코로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약간 콘스터블과 같은 희냇ㄱ의 터치들이 보인다.
반짝거리는 효과.
그리고 초록색도 훨씬 가는 붓터치. 이렇게 보면 1864년인데, 이때는 이미 모네와 같은 인상파 화가들이 청년이다. 코로의 작품들을 보았을 수 있다.
고전주의에서 인상주의의 가교역할을 했다.
1868-70코로, 진주를 단 여인
얼굴 각도 손 이런것을 보면 모나리자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코로 자신의 오리지널한 느낌이 나오게 그렸다.
인물의 구조를 잘 이해했고, 그것을 강렬한 신비스러움은 없지만 온화하면서도 품위를 지닌 사람으로 표현했다. 단단한 견고성.
절대적인 조화, 그러면서도 상당히 예민한 것이 보여지는 작품이 모나리자랄 수 있다.
친밀함을 느끼게 한다.
Theodore Rousseau, Meadow bordered by Trees 1840-45
리더.
바르비종의 리더는 루소고36년부터 정착., 다른사람은 왔다갔다.
콘스터블이 느끼는 자연의 웅대함에 대한 반응을 보여주면서도 콘스터블보다 훨씬 자연을 세밀하게 그렸다. 팬티즘. 자연속에 신이 있는것같아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세밀하고 정확히 옮기려는 노력을 한 것이다.
세밀한 붓을 써서 전체의 어둡고 밝은 면도 대조하고, 어찌보면 굉장히 어둠과 밝음의 대조가 거의 드라마틱한 바로크적인 효과도 준다. 괴장히 극적인 느낌을 주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세밀히 관찰하면서도 굉장히 낭만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모습을 알 수 있다.
루소, 느티나무 숲
Thomas cole, View from Mt. Holyoke, After the Thunderstorm, 1836
미국의 미술
거의 유럽으로 유학을 간다. 거기서도 일년에 그림
ㅓ음에 발달하는 그림은 초상화나 풍경화다. 아카데믹한 그림은 살사람도 없고 별로 없다.
일련의 풍경화가들 이사람들이 주로 모여서 작업하던 게 동북부 허드슨강 근처 뉴욕주 위를 중심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 허드슨 강 화파
토마스 콜 - 역사화를 그린 이민자(10살)이었는데 풍경화가 인기있었다.
개간지가 낮게 보인다.
이런 그림에서 보면 독일풍경도 험준한 산을 많이 그렷지만, 인간의 세계와 야생의 풍경을 이렇게 대조해서 그린 풍경은 벼롤 없거든.
허드슨강 이 그림들 특징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도 있지만, 인간이 위협당하지 않고 낙천적인(프리드리히는 위협적인 자연, 신비로운, 들어가면 아노디는 곳을 침입한듯한)
야생의 낙천적 자연의 느낌이 강한 것이 미국. 독일의 낭만주의 느낌이 강하다지만, 미국적 풍경을 확립하는데에 성공했던 그룹이다.
Durand, Kindred Spirit 1849
동화되는 느낌(친구가 되는 느낌) 여기 보여지는 인물이 조금 전에 본 토마스 콜. 그 옆에 보이는 것은 목사님 윌리암 컨 브라이언트라는 목사
풍경 - 전체가 실제 물리적인 지형묘사도 정확하지만, 전체적으로 광활한 대지와 숲의 웅장함을 느길 수 있다. 위협받고 있다는 느김은 안든다. 서로 자연과 친밀한 느낌. 자연이란 것은 인간을 살찌우는 ㅈ대상으로서 편안히 느끼는 것들이 미국 풍경이다. 실제 자연의 장면에서 느긴 아름다움 놀라움 이런것이 미국 풍경에서 나타나는 풍경이고, 낭만주의 풍경화가 영국 독일 미국이 서로 다른 방향ㅇ으로 발전. 자연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여기까지 낭만주의 풍경화 끈.
다음부터는 사실주의쪽으로 다시 간다.
7강 미술과 공예운동, 라파엘 전파
2010년 3월 24일 수요일
오후 1:55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3월 24일 수요일 오후 1:57
PPT - DELACROIX TO PRE-RAPHAELITE
PPT -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3월 24일 수요일 오후 1:59
<<7강.wma>>
지난번에 낭만주의를 대강 했고, 지금은 사실주의 조금 전인데, 다시 영국으로 간다.
영국에서 시작한 산업혁명이 19세기의 여러가지 변화를 가져왔지만, 산업혁명에 의한 변화와 근대화는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 한 예는
1851년 런던 joseph pacton the crytal palace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 건물
산업혁명이후에는 기계와 엔지니어에 의해 생산이 대체되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진다. 대량생산 - 표준화. 표준모델과 공정. 중요해지는 것은 기계를 다룰 수 잇는 사람. 생산라인이 효과적, 조직적. 조직을 관리하는 사람이 생겨야 한다. 이런 이유로 과거에 없엇던 것이 등장한다.
좋은것은 물건이 빨리 많이만들어진다.
허나 마구생산되는 서투른 물건이 많이 나오게 되어, 영국에서는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했고, 이 사람들이 만국박람회에서 - 내놓은 물건들을 보니 디자인의 문제를 보게 된다.
만국박람회 주도한 사람이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공. 이 사람은 미술과 문화에 관심을 가졌다.
박람회 건물의 특징은 임시적. 이것을 지은 사람은 조셉 팩스톤. 이 사람은 원예가였다. 이사람은 철근과 유리를 사용해서 작업.
하이드 파크에 지은 철과 유리로 된 조립식 건물. 17주만에 완성,
빨리 짓기 위해 모든 단위를 표준화 시켰다. 건물의 길이는 세로 110미터, 가로 600미터.
영국 전체 생산 유리의 1/3이 들어왔다.
제조품이 많고 섬유 기계 자체를 전시, 원자재도 전시. 빅토리아 여왕도 여길 방문했고, 다른 유럽보다 부유했던 영국의 부 낙천주의. 600만명이 구경왔는데,이럼으로써 정치적인 불안에서 관심을 돌리게 하고(레저) 당시 대부분의 박람회는 아름다운 것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 발명품 보러 가는 것.
이것은 안의 모습. 하이드파크에 있는 고목을 베지 않고 위에 그냥 건물을 씌웠다.
19세기 후반은 발명이 늘어난다.
60 70년대 - 실생활을 혁신하는 발명이 늘어나면서 전례없는 만족스런 단계에 와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인상주의 사람들의 걱정없는 면도 이런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1830 재봉틀 개발 - (티모니에, 싱어 둘다 개발.)
이스트만 코닥, 콜트 6연발 권총…
미술전시회도 이때 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미술작품을 볼 기회는 만국박람회가 주로인데, 여기에 처음으로 62년부터 나오기 시작하는데, 동양 - 중국을 여태까지 생각했으나, 일본이 68년 메이지유신. 되면서 서양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대거 공예품을 출품했고, 여기서 일어나는 것이 자포니즘이다. 일본이란 나라를 확실히 인식시키는데에 성공한 것이 만국박람회, 일종의 외교이다.
당시 기계는 엄청나게 컸고, 당시 사람들은 기계의 규모와 속도에 엄청나게 매료되었다.
Phillip Webb, The Red house1859-60
이때나오는 움직임이 미술과 공예 운동 arts and craft 존러스킨, 윌리엄 모리스라는 사람.
그래서 이사람들은 도시가 엔진 공장으로 가득차는 것에 혐오. 산업제품의 떨어지는 획일화된 질 혐오
인간이 중세와 인간으로 수공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하게 된다. 테크놀러지.반대.
솜씨나 수공예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 수공과 중세의 장인체제에
미술과 너무 대중과 멀어져서 어렵고 비싸서 일반인은 이것에 유리되었다고 생각하기 대문에,
예술가의 역할은 사람들의 사회문화적 환경을 바꾸고 아름답게 만들어주는데에 있다고 보았다. 건축 실내장식 가구 벽지 카펫 심지어 책의 삽화에이르기까지 좀더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바꾸어서 사람들의 환경을 바구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사람은 원래도 돈이 있는 사람이고 사업가적 소양이 있다.
모든것을 손으로 하는 것.
러스킨과 모리스는 조금 달랐는데, 러스킨은 조금 도덕주의자. 미술작품은 도덕적 의지의 결과여야 하는데, 기계는 양심이 없기때문에 기계를 혐오. 모리스는 기게도 당대의 사회제도자체가 인간의 일상생활을 추하게 만든다고 했고,
이주변에 많은사람들(사회주의자)이 모여든다. 그중 하나가
Phillip webb이란 사람. 모리스가 결혼을 할때 이사람이 집을 지어주엇다.
우선 이사람들은 디자인이란 게 실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림의 덕이 아니라. 실용적. 사람들이 금방 사용할 수 있고 그래서 사람드르이 생활을 바로 바꾸어줄 수 있다. 수공예야말로 비인간적 인간의 삶에 변화를 준다.
토탈디자인 개념
건축조각회화공예가 하나를 이루는 총체적 디자인
단순 견고, 기본적인 재료, 예를 들어 모직 마 가죽 돌 참나무,
색채도 갈색 초록색 노랑색 등을 섯고 굉장히 자연에 영감을 받은
이것이 어찌보면 디자인사의 시작이랄 수 있는 것이 모리스의 예인데,
윌리엄 모리스의 문제는 무어시냐면
이 집은 벽돌로만 지어졌고, 이사람들이 원했던 집은 전원풍의 인간적인 집을 원했고,
William morris 이졸데로 분장한 제인(아내)
모리스는 다재다능. 화가였다가 디자인으로 갔지만, 이 그림은 단 하나만 남아있는 윌리엄 모리스의 그림이다.
이 그림 잘 알려진거 보면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 (로제티와 제인이 염문으로 사이가 나빠졌지만,)
로제티의 모델이 많이 되어서 로제티 그림에 이 얼굴이 많이 나온다.
The green dining room 1867
바닥 벽지 등을 전부 손으로 디자인으로 했다. 그런데 너무너무 비싸다. 가격이 엄청나게 올라서 도무지 일반인은 사고 쓸수가 없는 것이 윌리엄 모리스의 문제였는데, 원하는 만큼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수 없었다 가격 생산량 하지만 여튼 .
이것이 아르누보로 갈때(
아르누보는 기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벽지. 꽃, 아칸투스문양 - 이런 벽지에서 모리스의 패턴이 자연 식물 등에서 정교한 디자인..
모리스 컴퍼니 회사를 만들어서 실험을 했는데 80년대 이후에 이득이 생기기 시작.
Rosetti, Beata Beatrix, 1863
모리스와 친했던 사람이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라파엘전파. Pre-raphaelite Brothers라파엘 전파
르네상스 라파엘 이후로는 르네상스가 타락했다. 라파엘이전의 미술을 동경한다.
37살에 죽은 라파엘 1503년부터 그린 것이다. 1500년 이전의 르네상스와 중세를 생각하는 정직도덕적인 미술. 거기로 돌아가고, 그렇게 함으로서 영국의 미술을 개혁하고자 했던 모임이다.
시대에 대한 반응, 과거에 집착, 종교적 동경, 현재를 혐오한다, 약간 환상적이고, 도덕적. ->>>결국 낭만주의.
확실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이런것이 이사람들 특징인데,
당대를 혐오 - 산업혁명으로 물질화, 사람들이 물질에 너무 집착하여 정신이 빈곤.
물질사회에서 도피하여 과거의 영광 속으로 가겠다.
일반적으로 라파엘전파는 그렇게까지 성공한 운동은 아니다.
굉장히 센티멘탈한 느낌이 강해서 당대 사람들과 유리된 것이다.
밀레와 쿠르베는 당대와 밀접한데 이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서 그렇다.
로제티 - 시인이자 화가.
윌리엄블레이크고 그렇고.
(누이가크리스티나 로제티 - 시(교과서에도 나온다))
이 그림 - 비에타 베아트릭스
프라 필리포 리피의 그림 - 굉장히 긴 목, 내성적인, 아들이 있었는데,
그사람을 가르친 사람이 보티첼리이다.
보티첼리와 같은 그런식의 분위기가 로제티 그림이 나온다.
어찌보면 시적이면서도 감상적이기도 하고, 프랑스 사람들이 보기에는 뭔가 약해보인다. 사실은 얼굴표정, 동작, 의상 이런덧이 열정 또는 사랑, 죽음 이런 느낌의 전달이 되는 그런것이고, 분위기가 있긴 하다. 신비스럽고, 그런류의 그림이 비타 비아트릭스,
Lady lillith 1866 Rosette
이 그림 레이디 릴리스는 전설에 나오는 여인인데, 여러가지 설이 있다.
아담이 이브랑 만나기 전에 아내가 있었다. 릴리스
창녀, 여왕, 최초의 악녀.
여기서 나오는 이미지가 팜므 파탈.
당시 이런 여성을 그렇게 부르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운 마녀.
자신이 자신의 매력으로 남성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자기도취에 빠지고.
여기서 중요한 게 붉은 머리카락. 파우스트에 레이디 릴리스가 나오는데,
아름다운 긴 머리카락으로 남자를 한번 묶고는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아직도 남성을 지배하는 상징이 된다.
굉장히 문학적이다. 미술적이라기보다는 문학적 컨텍스트에서 얘기되는데 그것도 라파엘 전파의 특징이다.
클림트의 유디트와 비교해보자면
아직도 성의 억압이 존재했던 빅토리아시기이기 때문에 유혹이나 그런것이 완전히 드러나지는 못했고 은밀하게 감추어져있다.
아름다움 죽음 파괴가 있던 그림이 비난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Rosetti 1850 수태고지
천사가브리엘이 아이를 가졌다고 알리러 온다.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을 들고 마리아에게 간다.
수태고지는 옛날 그림에는 없다.
여기서 마리아는 두려워하고있고, 가브리엘은 빛으로 떠있고 침입한것같다.
완전히 사춘기소녀의 성의 경험으로밖에 받아들일수 없는 작품이 되는데, 섹슈얼한 것이 은밀하게 감추어져있다.
Milais, 요셉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1850
존 밀레
우리가 아는 밀레와 이름이 비슷하기 때문에 옛날 우리나라 잡지를 보면 혼동해서 보기도 한다.
여기를 보면 요셉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제목.
새로운 해석.
요셉은 원래 목수였다.
목수의 작업실. 어린 그리스도. 나무작업을 잘못해서 손에 피가 난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박히는 운명을 암시한다.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는 사실 노동자계급이엇다는 해석.
사회적 의식이 이미 미술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당시 노동자의 권익을 서포트하는 운동하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 이 사람들은 너무 부분부분을 정확하게 그려서 표면의 눈이 그것을 보는데에 왜 이렇게 그렸냐면 테크닉이 부실한 것은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옛날에 우리가 보던 주제와는 매우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1855 Brown 노동
여태까지 사람들이 일을 한다는 것은 존경받는 일이 아니었는데, 노동의 존엄성에 관한.
오른쪽에 있는 두 인물.
토마스 칼라일, 또 하나는 기독교사회운동가 모리스
길에서 도로를 파헤치고 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술을 먹고 이싸.
저 뒤에 있는 사람들은 자본가. 귀부인은 흙이 묻을까봐 조심조심 지나가고 있고,
꽃을 파는 여자 거지 -
오드리 헵번 my fair lady- 버나드 쇼의 유명한 소설을 영화로 만든 히트작인데, 오드리헵번이 꽃파는 형편없는 여자로 시작했다가, 어느 교수가 그 여자를 데려다가 훌륭한 영어를 가르치는 이야기.
올리버트위스트에 나올것같은 아이들 돌아다니고,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노동자들 오른쪽 멀리 있다.
대조된다. 일하는 사람과 노는 사람, 노동과 자본이 대조.
너무 초점이 잘 맞아서 잘 주의가 집중이 안된다.
이사람이 인상주의적 표현을 즐겨해서 ㅏ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나타나고 있다.(오른쪽에 서있는 칼라일)
오히려 전달하려는 이미지는 확실하지 않게 되어버린다.
그리고 공간도 좀 이상하고.
오른쪽원경윗부분은 축소된다든지 강력한 메시지는 나오지 않게 된다.
고아 거지들, 이무렵에 찰스 디킨스가 올리버트위스트를 그린 것.
Brown The last of England 1855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민가는 젊은 부부. 타이타닉처럼.
영국의 해안이 머러지고 있는데 영국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오스트레일리아(금광ㅇ)로 가고 있다. 이사람은 중사늘.
매우 감정적
사진가같이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되어있다.
Hunt 깨어나는 양심 1852-54
여기서 보면 도덕적 메시지 명백.
피아노레슨을 받고 있는데, 여자의 손에는 반지가 없다. 정부 mistress
갑자기 깨어나는 양심.
세밀한 실내 카펫, 피아노, 벽지, 정원의 나무랄지 이런것이 당시에 아주 정밀히 그려져있고,
테스같은 소설도(빅토리아 시대 수많은 문학에 나오는데)
존 러스킨은 근대사회가 여성을 타락으로 내몰았다고 주장, 여성은 근대사회의 희생자.
근대사회의 새로운 층이 매춘부. 187080년대 파리 매춘부 5만명.
이런것들이 당시 사회적인 것을 보여주고, 도덕적 ㅣㄴ실과 물질적 사실사이에서의 악, 속죄, 이런것들이 초점이 나타나있다.
Hunt 양치기의 고용, 1852
이해하는데에 지식이 무슨 필요하겠는가, 중산층들에겐 상당히 어필이 된다. 대부분은 노동계급이라 생각하면 되고, 산업혁명으로 중산층이 조금 생기는 단계.
야외. 젊은 남녀가 야외에서 즐겁게 노는 주제로 생각될만큼 야외풍경이 잘 나타나있는데,
실제 이 남녀는(양치기가 할일을 하고 있지 않고, 이 양이 절로 가고 있고..
여자하고 히히덕..
여자가 입고 있는 치마의 색이 스칼렛. 주홍글씨. 호손. 이것이 로마 카톨릭과 성공회와의 정착에 대한 . 스칼렛(로마 카톨릭)의 유혹에 빠져서 국교회(푸른색 목동)가 정신이 팔려있음
야외 광선에 관심이 너무 많은듯 하이퍼리얼리즘같다.꼭
정밀한 광선과 반사, 명암 이런것이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게 하고 그렸다는 걸 알 수 있다.
양이 배가 아파서 여자가 돌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이제 프랑스
앵그르, 들라크루아같은 사람들이 있었고, 프랑스는 정치적 안정을 가지지 못하고 1848년 혁명. 이때 2월달 3일간 혁명이 나서 왕이엇던 루이 필립이 물러나고 정치혼란, 실업자,
이때 최초로 선거권이 주어지며 많은 결과가 있다.
6월에는 노동자 봉기가 일어난다. 이것을 예전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성공하지 못했기 대문에 봉기라고 한단다.
당대 사회에 예전보다 훨씬 관심을 갖게 되고 그래서 나타나는 것이 사실주의 활발.
영국에서 공산당선언이 발표되었고, 노동자 공장 도시..이때가 1840년대 70 80까지 프랑스 미술은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로 이야기되는데, 엄밀히얘기하자면 인상주의는 사실주의의 한 맥이라 볼 수 있다.
옛날식의 그리스 르네상스 미술의 사실주의와 달리, (그건 소문자 사실주의)
이것은 역사적인 한 운동 Realism 팩트를 이야기한다. 실제 당대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
쿠르베 : 나에게 천사를 보여달라 그러면 천사를 그리겠다. 나는 눈에 안보이는 것은 그리지 않겠다. 셰익스피어, 그리스 신화 이런것은 안보인다. 그것은 소설에 나오는 것이고, 내가 관심있는 것은 내가 사는 이 시대 사람들의 운동 의상 먹는것을 보이겠다.
인상주의도 엄밀히 보면 같다.
여튼 리얼리즘은 노동자 농민 도시영세민쪽으로 갔다. 사회가 과격하게 가면서
밀레는 농민을
도미에는 노동자를.
인상주의는 사람이 잘살게 되면서 중산층이 주제가 되는 것이 다르다.
기본적으로는 엄밀히 보면 사실주의가 되고,
역사화 신화 소설주제 안그리겠다 이거다.
1870년대 파리를 떠오리라 하면 모네 르누아르.
1800년대 떠올리라 하면 안나오지. 그런 주제 그림이 없으니.
영웅과 중요한 인물을 그리다가 우리주변의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미술의 주제가 되는 것이다. 그림 뿐 아니라 문학 사실주의 작가도 마찬가지다. 이상화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풍습 경험을 보여주는 이것이
Meissonier 내전의 기억 1849
낭만주의 들라크루아와 비교해보면
왜 이것이 더 이상 낭만주의가 아닌지 알 수 있다.
애국심을 고취, 사람들의 뭉치는 것, 그런것이 안보인다.
죽어 넘어진 사람들을 단지 기록하는 것. 이것이 사실주의이다.
이런것이 차이가 있다.
사실주의 하면 세명의 중요한 화가.
밀레, 쿠르베, 도미에를 얘기한다. 이사람들은 낭만주의적 환상 도피주의에서 완전히 빠져나와서, 밀레경우는 조금안그렇지만. 밀레르 보면
밀레
키질하는 사람 1848
이사람이 왜 이렇게 동양에서 인기가 있는가
외국사람은 모르는 사람도 있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인기 있는 사람중 하나다 로댕 르누아르 밀레. 일본에 많은 작품이 소자오디어있는데, 농가의 출신으로 실제 농부였다 화가가 된 사람인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육을 굉장히 잘 받앗다. 고전 라틴어 교육 다 받고..
그림을 그리러 파리에 왔는데, 이 사람이 영향받는 바는
1848년 혁명에 많은 영향을 받고 사회적인 현실 이런것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한다.
전설적인 이야기에 의하면
밀레가 파리에 와서 돈이없어 누드를 그리는데, 누가 지나가다 저것도 그림이야 하고 말하는 것을 듣고 진실한 농부가 되갯다고 바르비종을 갓다고 하고 그런 전설적 이야기.
우리나라 사람은 이렇게 밀레에 대한 애착이 있다.
우리나라는 농업국가였고 농사에 대한 것이 있어서 그렇게 볼 수도 있느넫,
사실 밀레는 하녀도 있었고 식탁에 먹을것도 많았다. 결국 그것은 이사람의 친구이자 딜러였던 상시엥이란 사람이 밀레에 대한 미화된 전기르 ㄹ썼다. ㄱ
이사람의 그림이 종교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 많아서 청교도국가인 미국에서 인기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아시아에서 또한 공산화된 중국에서 밀레와 쿠르베를 인정했다.
아시아에서 조아하는 것은 만종 키질하는 사람
쿠바는 씨뿌리는 사람 투쟁적이라서.
밀레는 실제 그린의도와 달리 팝아이콘화 된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의도로 멋대로 읽힌.
당시 농부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농부와 공장노동자는 당시에 그닥 구별이 안되었다. 사회계급이 확실히 구분이 안되어.
노동하는 사람 2/3는 농부였다. 도시에서 농한기에 노동하고 이렇게 유동적이었고 경계가 굉장히 불분명했는데, 키질하는 사람이랄지 씨뿌리는 사람 -
이런그림은 살롱에서 인정받기 어렵다. 다윗상 호라티우스의 맹서 보던 사람이 저렇게 하잘것없이 생각하던 농민을 크게 영웅적으로 그렸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이렇게 불안하던 시기에는 의심을 사기 쉬웠다. 농민 그림을 크게 그리니깐 농민이 또 업라이징하는게 아닌가.
여태까지 아무도 농민을 이렇게까지 표현하던 사람은 없었다
대개가 아름다운 전원의 소도구로 표현.
땅과 하늘풍경에 걸치게 크게 그린 것은 밀레도 인식하고 그렸을 것.
많은 사람들이 비난한 것이 그림이 너무 거칠다. 앵그르 그림에 비하면 그럴것.
8강
2010년 3월 29일 월요일
오후 1:58
<<8강.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3월 29일 월요일 오후 2:04
1849 씨뿌리는 사람
(강의노트 없이 진행)
1848년 혁명(2월), 6월에 또 나서, 왕정ㅇ-공화정으로 다시 가고
49년 살롱은 심사없이 모든 사람이 출품하게 되었는데,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도 그런식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된 작품이다.
(쿠르베 오르낭의 장례도 같은 시기에 출품되었다.)
1848 키질하는 사람
이런것을 보면 여태까지 볻ㄴ 농민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보였고,
우람하고 정직 당순하게 보였는데, 당시에는 농부(키질)들이 도시에서 농한기에 노동자일을 했으므로 당시엔 농부와 노동자 구분이 적고, 당시엔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향하면서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요즘 생각하는 농민 노동자가 다르다.
밀레의 작품들이 전시되었을대 논란이 많았다.
대개 2/3은 이런 새로운 도상을 칭찬하는 평이 더 많앗다. -
1/3은 이것을 비판하는 이유가 - 시커멓고 우람한 이미지의 농민을 묘사해서 밀레가 얻는 이익은 무엇이냐. 충격적, 영웅화, 사회주의적 사상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들 했다.
공산당선언이 선포되었을 때이다.
그림을 보면 - 아래에 대지, 위엔 하늘, 대지와 하늘을 연결하는 것이 인간.
도시민에게 땅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할 수 있는 그림.
대지와 발의 경계가 모호, 혼합이 되어있는듯한 느낌.
노동이라는 도상에 새로운 존엄성을 부여하고 있다.
정직, 단순해보인다.
기본적으로는 농민의 사회적인 힘의 가능성, 신체적 에너지를 표현하는.
거칠은 이미지를 준다.
쿠르베와 비교해보면 조금씩 다른 게, 쿠르베는 농민들의 삶을 직접 다루려고 하는데,
밀레는 낭만적으로 생각한다. 이미지. 씨를 뿌리는 사실적인 묘사와는 다르다.
이사람의 둥그런 입체감 등은 자신이 존경한 미켈란젤로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1860-62 괭이를 든 사람
10년후에 그려진 괭이를 든 사람을 보면 - 초기 밀레의이미지가 나중엔 완전히 달라보이고,
절망의 , 빈곤에 찌든, 희망이 없는 농민의 이미지로 바뀌게 된다.
황폐한 땅에, 허리가 굽어있고 농민의 힘있는 이미지에서 탈피한 것을 볼 수 있다.
1852 PEASANT GIRLS WITH BRUSHWOODS
바르비종만 해도 근대화의 물결이 다가와서 일부는 근대화되기 시작하는 무렵인데, 밀레가 그린 노동하는 모습을 보면 근대화된 기기와는 관계없이 원시적인 노동(가령) 나뭇가지를 모아서 지고 간다든지, 절구를 빻는다든지 근대화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엇기 때문에,
어찌보면 근대화되지 않은 (도시를 혐오해서 도시를 떠났기 때문에, 특히 소음을 싫어햇다)
원시적인 노동에만 종사하는, 노동의 존엄성(인간이 땅에서 태어나 땅에서 일하고 땅으로 돌아가는)이런것이 밀레가 표현하고자 했던 이미지라 할 수 있다.
1850 건초작업
초기 씨뿌리는 사람에서 보였던 이미지가 후에는 매우 감상적 종교적으로 변해서
많은 사람이 밀레에서 느끼는 이미지가 그런 종교적인 느낌이다.
노동하는 장면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감상적인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후로 갈수록 감상적)
1855-57 이삭줍기
이것이 잘 나타난 것.
처음에 느낌은 전원의 생활과 아름다움 화음을 느낄 수 있는데,
전경에 있는 3사람이 있고,
뒤를 보면 넓은 지평선이 있고,
추수를 해서 낱가리를 쌓아둔 것을 볼 수 있고,
수확의 계절 가을의 인간의 노동의 존엄성을 느낄 수 있고,
인물의 표현 입체적 둥그런 표현-미켈란젤로식의 고상하고 준엄한 느낌,
느낌은 2가지로 엇갈리는 느낌.
- 땅위에서 일하는 고상한 노동의 이미지
허리가 굽혀져있고, 머리가 땅을 향해 숙이고 있는
- 노동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이 당시에 이삭을 주울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느 ㄴ것이 아니라.
뒤에 있는 수확한 사람들은 부농이고,
이삭줍고 있는 사람들은 극빈자들(허가받은 사람만) 가능 / 대조적임
보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불온해보일수도 있다.
구성 그림은 리듬감을 주는 구성, 빨강 노랑 파랑, 아름답게 그리고
ARCADIA서사시적이고 고상한 화음
전체를 어느쪽으로 보느냐가 헷갈리는 그림.
농민을 개인으로 표현하지 않고 일반화된 캐릭터, 고상하고 조각적인 사람으로.
밀레의 일생이 각색되어 미화되어 출판되었는데, 80년대에는 번역되어 미국에도 많이 전해졌고,
보스턴지역에서 이 사람의 열혈 팬이 생기고, 90년대에는 일본의 서양화가들이 밀레으 ㅣ동네를 찾아가고 성인화가로서 추앙받게 된다. 청교도인 미국은 프랑스에서보다 더 인기. 봉건제도가 없으므로 사회적인 빈부의 차에 대해 예민한 나라가 아니라, 프랑스에서 보여지는 비난이 미국에선 없다. 그것보다는 전원의 아름다움, 노동의 아름다움으로.
백화점에서 5불(당시엔 큰돈)에 팔린다. 만종 이삭줍기도 처음엔 미국사람에게 팔렸다가 루브르로 돌아가게 된다.
씨앗광고. - 밀레의 이미지로
어린애들이 놀이 (롤플레이)씨뿌리는 사람, 키질하는 사람 - 이런것도 이성ㅆ다.
목사들이 신교 - 밀레를 이용해서 선교에 동원.
우리나라는 박수근이 강원도 12살 초등학생때 원색도판을 밀레 처음 보고,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길 바래서 기도했다 하는 기록이 나와있다.
박수근이 많이 그린 것이 절구 - 밀레그림과 유사.
이중 하나가 대부분의 아시아 나라는 농업국가, 밀레에서 나오는 이미지 - 씨뿌리는 사람보다 이삭줍기등은 투쟁적이지 않고 복종적인 이미지, 순한, - 이사이 감성고 ㅏ맞다.
1864 양치는 소녀와 가축들
이런걸 보면 상당히 종교적.
쿠르베와 비교하면 같은 사실주의 화가지만 다르고 더 낭만주의적인 것을 알 수 있다.
1858-59만종
정말 이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이냐 하는데에서는 의도가 있다.
여자가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확실한데 남자는 그냥 모자를 쥐고 서있는것이라 기다리는것일 뿐이라는 사람도 있다.
먼 대지, 교회를 배경으로 .. 종교적.
오노레 도미에
1830 DAUMIER, LOUIS PHILLIPS AS GARGANTUA, LA CARICATURE
석판화에 그린 것이 잡지 신문에 많이 나왔고, 프랑스에선 신문이 성황하던 때이다.
도미에의 관심은 밀레가 농촌인데 비해 도시.
도시라는 것이 새로운 주제로 부각되는 것도 이시기.
영국의 찰스 디킨스, 샤를 보들레르 - 도시의 현상을 시나 소설의 주제로 잡아서 했다.
도미에의 경우에는 쁘띠부르주아 - 책방주인, 그림파는 화상, 세탁녀,
근대성을 보여주는 철도의 승객, 군중을 도상으로 다루어, 변화하는 당대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LA CARICUTURE - 신문에 그린 캐리커쳐
가르강튀아 - 먹는걸 너무 좋아했던 왕을 의미한다.
루이필립 - 가난한 사람들이 조금씩 모아둔 금덩이나 이런저런것을 집어삼킨다.
프랑스말로 서양 배를 어리석은 의미라고 한다.
밑에 있는 사람들은 아부하는 사람들.
풍자화에 들어가는 것, 고대 로마, 중세에도 낙서 등으로 나타나있다.
그 결과 신문은 폐간되고, 도미에는 재판(감옥엔 안갔다)
샤리 바리라는 새로운 신문으로 갔는데, 정치풍자는 할 수가 없고,
일상삶에서 보는 여러가지 사람들의 위선이나 부당함을 주제로 나타내서,
전체 드로잉 만화 합치면 4000여점이 나타난다.
나중엔 그림, 조각도 취미로 했다.
화가의 작업이 아니라서 자기 마음대로 그릴 수 있었다.
이사람의 중요한 작품들이 그리고 싶을 때 그렸던 조각회화 - 이런것이 독자적인 형식으로 자유롭게 그렸던 것이기 때문.
1834 트랑스노냉 거리
실제 있었던 사건
리옹 - 프랑스 중부 도시(탄광) 사건이 터져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때 군대가 도시에 들어와 진압했는데, 군인들쪽에 총알이 날아가서 날아온 방향에 있는 동네 사람들 집을 들어가서 다 죽였단다.
먼저 눈에 띈 것은 기사와 함께 실렸던 도미에의 석판화다.
근인을 향해 총을 쏘았던 사람이 아니라 일을 당한 가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잠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자다가 변을 당했네..
밑에 어린아이가 깔려있고, 다른 가족들도 쓰러져있는 것이 보인다.
이것이 보도가 되면서, 5월 8일의 학살 비슷하게 사회고발적인 작품으로 할 수 있다.
하지만 도미에의 그림은 정치적인 것보다 풍자적인 것이 더 많다.
이사람이 생각하기에 소위 전형적인, 소시민들을 굉장히 실제적인 사람들로.
이론적인, 도 정의보다는 자신의 안전, 편안함을 추구하고 위협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로 묘사.
도시여성노동자들이 더 자신에게 알맞은 주제로 보았다.
삶에서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
거리에서 보는 보통사람들의 태도를 그렸는데,
전혀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 치고는 인체가 어떻게 움직이고 근골격에 대해 천부적으로 이해했던 사람이다.
이사람의 선이 재미있는데, 당시엔 선을 정확하게 그려야 하는 시대인데, 이사람의 구불구불한 선으로 표정등이 잘 표현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로의 그림 앞에서 1864
누드화를 보고 놀라있는 여성 두명이 보인다.
전시회 관람자들의 반응이 삽화가들에 의해 많이 그려진다.
전시된 그림 앞에서 갓 쓴 사람들이 "일부러 모르게 그리는 것 같다" 이런 얘기도 우리나라 있다.
나다르(사진작가) 1862
공중에서 파리 시가를 찍었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사진기술이 발달되지 않아서, 10분 20분을 그냥 있어야 하는데, 후에는 발달되었다.
새로운 시각으로 찍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 공중에서 찍은 사진.
DAUMIER: GRANDES EAUX D'VESSALLES, FROM LE CHARIVARI
"베르사유에서 장대비를 맞는 사람들"
GRANDES EAUX- 베르사유의 큰 분수
DAUMIER, AFTER THE TRIAL 연대미상
변호사들은 굉장히 부도덕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1847 BEHIND THE RENT
세들어있는 사람이 주인을 피해다니다가 집주인이랑 만난 것.
1848 JUST THE WAY WE WERE - 새를 보면서 노부부가 우리도 한때는 우리도 그랫다고 생각하는 장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깔려 있다.
인간의 부패 위선 좌절을 표현했으나, 인간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피그말리온 이야기
조각가 피그말리온이 조각과 사랑에 빠졌는데, 어느순간 조각이 말을 걸어서
그런데 누드가 쭈그렁하다. 이런 누드는 이전에 없다.
사실주의누드 - 이상화시키지 않고 생긴 그대로.
앵그르와 같은 이상주의적인 누드는 사실주의에 나오지 않는다.
마네 올랭피아만 보아도 -
쿠르베 -
누드가 (물론 그래서 굉장히 육감적인, 살을 느낄 수 있는)
미화되거나 비너스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저런식으로 그리는
DAUMIER, SOUP, WASH DRAWING 연대미상
인생을 철학적으로 보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민 노동계급으로 보이는데,
왕성한, 건강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체격의 여성이 한쪽은 아이에게 젖을 주고 한쪽으론 수프를 먹는. 아무리 힘든 일 어려운 생활을 하더라도 인간의 생명력은 지속되고, 좌절하지 않는다. 라는 생명력 생동감이 표현되어있다.
판화 수집가 THE PRNT COLLECTOR
그러나 인간이라는 것은 그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알고 싶어하는 것 또한 인간적인 것이라
어떤 사람이 판화를 놓고 고르는 장면.
조금 전에 본 수프를 먹는 사람들에서는 먹고 자는 동물적인 장면이었지만, 여기서는 지성과 인문적인 사람을 묘사.
1865 THIRD CLASS
삼등 열차. 유화.
보통사람들이 타는 객실.
여기서 보면 불편한 사람들이 잔뜩 잇고, 할머니, 딸, 아이들,
새로이 나타나는 군중의 모습
열차라는 것도 새로운 모더니티를 나타낸다.
사람들이 하루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는데, 일하러갈때애들을 데리고 간다는 것.
노동환경 - 10대정도 되면 뭐든 다하고 그런 시대. 노동자계급이 시작되는 시대 환경도 보여주고. 아이는 엄마젖을 빨고 3세대가 나타났다는 것은 이렇게 힘들지만 인간은 계속해서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그림은 당시 기준으로 보면 완성단계 그림을 보기도 힘든 그림이다.
세부적인 묘사 없고
형태가 명확히 정의되어있지 않고,
선도 반듯한 것이 아니라 구불부굴, 외곽선만 따놓았고,
매우 못그린 그림인데, 도미에 자신도 이것을 좋은 작품이라고 하지 않앗다.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고, 여기서 보면 서민에 대한 상당한 애정이 느껴진다. 어느 한 개인으로서의 관심, 군중에 대한 관심,그들의 지루함 무표정, 그러면서도 그들의 생활력이 작품에서 느껴지고, 도시 개인의 고독, 이런것들을 표현한 (거의 표현된적이 없는)주제.
어떤것은 물감을 손으로 문지르기도 하는 등 독자적인 방법으로 묘사했다.
쿠르베
COURBET 돌깨는 사람들 1850-51
이사람이야말로 사실주의의 리더.
도미에 밀레도 그렇고 파리의 젊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리더로 비쳐졌고 자신도 그것을 즐겼다.
이사람도 정식 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닌데, 프랑스 스위스 사이 오르낭 태생.
부농의 아들이엇는데, 파리에 화가가 되기로 가서
최초에 17세기 스페인 그림들을 보았고, 스페인 붐이 일어나 고야의 그림이 소개되고
비제의 카르멘 , 춘희 등 문학 음악 미술에서 붐이 되어나타나는데,
이사람은 제대로 된 교육은 받지 못한 사람.
1849년에 밀레 씨뿌리는 사람이 나왔을때 같은때 오르낭의 장례.
이 그림은 완전히 사회주의자로 비난받았다.
쿠르베 그림을 보면 사회주의 메시지가 들어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사람이 실제 사회주의자인지?
여튼 푸르동 생시몽등 사회주의 운동가들이랑 친했고, 자신도 그런 ㄱ류관계를 좋아했다.
이사람의 신념이 그렇게 확실했었는지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이사람 - 고전에 대한 동경은 없다. 당대 사람들의 모습 -사냥꾼 창녀 술취한 신부 등
쿠르베 - 이사람의 과격성은 주제보다는 테크닉에 있다. 주제도 당대 사람이 보기엔 그렇다.
테크닉 - 현대미술의 시작을 어디로 보느냐 했을때 마네로 보는 사람도 있다. (평면성, 선 형태 중심)
여튼 이 그림 - 실제 그림은 없다. 폭격을 맞아서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잇다.
쿠르베의 그림 -파리근외에서 실제 돌을 깨고 있는 어느 할아버지와 소년을 보고 그림으로 그렸는데,
모델에게 똑같은 포즈를 취하게 해서 이 그림을 그렸다.
돌을 깨는 할아버지와 10대의 아이를 / 밀레와 비교해보면
밀레는 둥글게 이사화한 신체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그렇지가 않고,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담흘리고 잇는 사람으로 보인다.
밀레 그림은 추상적인 리듬이 있어서 아름답게 보이는데, 이 그림은 그냥 흘끗 본 장면이지, 이사람은 그림의 구도를 알까 생각이 들만큼 구서의 묘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쿠르베의 그림을 비판하는 근거가 된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나름대로 인체가 구성이 되고 잇긴 하지만..
테크닉 - 팔을 보면 둥근 팔의 느낌이 나지 않는다.
밀레의 이삭줍기를 보면 - 점차적으로 할 열번정도 명암을 조절해서 그렸다. 그에 비해 쿠르베는 한 세단계로 해버린다. 팔으 되게 평면적으로 보인다.
이것을 사람이라니깐 팔로 보이지,
대신 이사람은 물감을 두껍게 그렸다. 이것을 전반적으로 보면 힘이 보인다.
거칠은 물감을 직접 느낄 수 있고, 돌의 무게, 거칠은 질감을 느끼게 해주고, 제한된 갈색 색채 속에서 풍요로운 느낌도 준다. 어쨌든 결국 쿠르베의 그림을 보았을 때에는 최후 풍경화등을 보면 이사람은 아름답게 그리려 하는 화가라는 느낌이 난다.
쿠르베 - 자기자신을 오만하게, 작가로서 생각, 기본적으로 낭만주의에서부터 나오는 천재란 개념. 낭만, 아방가르드. AVANT GARDE - 전위대 - 시대에 따라가지 않고 앞서가는, 화가가 엘리트의식을 갖고 나아가는 1855년 살롱에서 12작품을 출품했는데, 9작품은 입선, 2,3작품 떨어진다.
가건물을 지고 PAVILLION OF ~~- 라는 전시회를 했다. 거의 관람자가 없었는데, 마지막에 온 사람이 80이 넘는 들라크루아가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9강
2010년 3월 31일 수요일
오후 2:01
<<9강.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3월 31일 수요일 오후 2:03
사실주의
주제의식면 고전 X
쿠르베 FLAGEY 지역 농민들의 귀환 1850
잡다한 인물들이 나타나는데 과거의 그림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던 생활소재나 계급적인 asemf이 나타나고 있다. 급격한 도시화 도시사람 시골사람 구분에 대해 보여주고, 이런것도 이미지. 사람들의 특징을 살리는데에(도시 부르주아, 농민, 노동자) 관심 주어 그리고,
일상적인 생활만이 예술적인 사실에 소스가 된다고 생각했다.
쿠르베 1849 오르낭의 장례
오르낭 - 쿠르베의 태어난 고장 이름. 장례식 장면을 그린 것.
그림의 크기가 상당히 크다. 8미터정도 되는 어마어마한 그림.
장례식을 하러 사람들이 모였지만, 이것이 누구의 장례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힌트가 없다.
이런 류의 주제에 대해서 사람들이 익숙하지 않았는데, 뒤에 돌산들이 있고, 기독교 사제들이 장례식을 거행하고 있고, 십자가.
이사람이 태어난 오르낭의 지형을 상당히 잘 표현하고 있다. 이사람의 개인생활의 한 부분이고,
그러나 파리에서는 이것이 여태까지 관시베 대한 공격으로 보였고, 살롱에서 그림을 보는 사랑에게는 굉장히 못마땅히 보이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구성을 한것같지 않고, 무표정, 딴짓하고 서로 다른데 쳐다보고(사실 있는 그대로를 재현해서)
죽음에 대한 슬픔, 죽으면 천당에 간다든지 이런 도덕적, 아름다움 그런것이 전혀 나타나있지 않고 파리 중산층에서 예상하는 세련된 느낌이 여기에는 전혀 없는 것이다.
총 51명 쿠르베의 아버지 누이 오르낭 시장, 여기 사람들의 진짜 초상을 보여주고 있고, 기독교 교구 관리, 이런것들을 원근법의 깊이도 없고, 이렇게 그린 것이
이런 스케일에 이런방식 구도로 그린것으로는 역사화가 있는데, 이것은 또한 역사화에 대한 도전처럼 보여진 것이다.
이 그림에서는
인물들간 서열이 없어진다.
사람들 하나하나가 다 평등한 구성,
따라서 서툴게 보여지고,
- 당시 사람들의 복장이 그대로,
- 이상화도 없고, 세속적인 하나의 죽음으로 묘사.
엘 그레코, 오르가즈 백작의 장례를 보면 횡대로 서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잇다.
누가 죽었는지 - 오르가즈 백작
구성이 아랫부분 위엣부분이 서로 다르다.(지상과 천상의 세계를 구분)
지상의 장면, 중요하고 그래서 실제 성인들이 나와서 관에 넣는 장면
실제 이 그림이 걸린 바로 아래에 실제 석관이 놓여있다. 관에 집어넣는것처럼 보인다.
손에 닿을만큼 바로 위에 천상의 세계가 있고, 지상과 분리.
혼은
이렇게 한줄로 서있는 구성이 대체적으로 고전적 구성이다. 약간씩 비키게 횡대로 서있는 것 - 파르테논 신전. 앞뒤로 서있고 공간이 확대되면 바로크적인 시각이다.
쿠르베의 이러한것도 고대 석관이나 프리즈 조각에서 나오는 구성이다.
이래서 쿠르베는 고전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사람.
이시기는 스페인붐 시대고, 엘그레코는 스페인에서 오래 활동.
사회의 구성원 전부가 이 한자리에
고전적 주제의 그림과 비교하면 매우 특이. 논쟁의 대상.
스스로 그런것을 즐겼고, 자신을 정치적인 사상사로 생각했다.
1852 오르낭에서 마을 처녀들이 양치기소녀에게 돈을 주다
오르낭의 지역 풍경(돌산이 많고)
세명의 마을여자들이 거지소녀에게 돈을 주는 것.
처음에 보면 한가로운 들의 풍경같은데, 세명의 여자들이 서있는 자세 - 옆을 보면 옛날에 보던 구성같다. - 삼미신(보티첼리) 생각난다.
평범한 여자들이 자세를 삼미신처럼 하고 있고,
얼굴이나 손이 상당히 거칠게 그려져잇어서, 이사람들이 이 고장사람들로 일을 많이 한 사람들인데, 옷은 상당히 차려입고 있다. 부농 NOUVO RICH 신부농 처녀들. 뽐내고 , 여유가 잇어서 양치기소ㅕ들에게도 돈을 주는모습.
세명은 쿠르베의 누이동생들.
당시 농민들이 차려입는 모습을 그린 것이 매우 새롭고, 파리의 사람들에게 불안하다.
옛날에 그려진 삼미신에 비해서는 세련된맛은 없지만, 당대 변화하는 농가의 (돈가진 사람들의 모습)
돌에 두터운 질감 이런 테크닉의 개발이 - 프랑스에서는 아직도 완벽한 화면의 마무리가 중요했다. 쿠르베에 이르면 이것도 상당히 느슨해진 것을 볼 수 잇다.
이사람은 들라크루아처럼 색채화가는 아니었지만, 질감면에서 테크닉을 잘 구사해서 두터운 물감을 쌓아올리는 기법이 두드러진다.
1856 세느강변의 젊은 여인들.
이 그림은 외국에선 이상한 것이다.
여자 둘이서 흐느적 - 동성애.
80년대 한국에서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것.
빛에 대한 관심이 있긴 하나 관찰해서 많이 진행된 상태는 아니다.
진짜 쿠르베의 여자 그리기 - 살이 느껴지는, 무거운 신체, 손으로 만지는듯한 - 사실주의
이상화시키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
당대 동성연애 장면이 아닐까?
이런걸 연구하는 사람들은
동성연애 장면은 그리스 이전부터 나오는데, 실
1866 COURBET, SLEEP
A3용지만한 그림인데, 본격저그로 동성애 그림.
1854 BONJOUR M. COURBET
안녕하세요 쿠르베씨
오른쪽이 쿠르베.
확실하게 3명의 타입이 나타난다.
쿠르베.
이지여깅 몽펠리에
그지역의 지형을 고스란히 묘사.
그지방에서 나는 꽃도 있고, 님부 프랑스의 분위기, 거의 사진기록과 같이 정확하게 기록.
여기서 보여지는 쿠르베의 차림은 보헤미안.
라 보엠.
THE BOHEMIAN
이런것은 예술가, 방랑자, 연극인처럼
이런 블라우스는 노동자들이 입는 옷.
쿠르베는 노동자 옷을 입고 배낭을 매고 있으나, 턱을 치켜올려 상당히 오만한 모습으로 나타나있다. 이런 보헤미안 차림의 쿠르베에 비해
이사람에게 인사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차려입은 사람으로서 정치적인 의식이 드러나있고,
포즈나 제스쳐에서 쿠르베의 개성이 드러나있다. 이 그림 발표후 대단한 비판을 받는다.
지평선이 아래에 있고,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는 구성이 실루엣이 하늘을 등지는 구성
VELASQUEZ 이솝- 17세기 초상화에서 나온다.
평면화 - 구두 - 중간톤을 없애고 그냥 센 대비로 보여주기 때문에 그부분만 떼어내서 보면 구분이 안된다 -
- 이것은 또한 그림을 상당히 빨리빨리 그린다는 뜻도 된다.
- 한쪽붓에는 어두운색 한족붓에는 흰색을 해서
- 표면질감효과가 어두운 부분에서 나온다.
또 하나 영향받은 것이 대중소설의 삽화다.
프랑스 소설책에 - POPULAR IMAGE
방랑하는 유태인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삽화.
쿠르베의 구성과 비슷하다.
19세기 오면 이런 잡지와 책이 많이 나온다.
모네는 여자들을 많이 그렸는데, 패션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이것은 패션잡지에서 많이 따왓다.
자신을 소외계층으로 묘사를 하지만, 자신을 천재성을 가진 사람으로 제시하는 경우가 여기도 그렇고 다른사람도 많다.
COURBET SELF PORTRAIT WITH A PIPE 1849
COURBET 화가의 화실 예술가로서의 7년을 종합한 알레고리 1855
파도 1869
쿠르베는 끝. 마네 드가.
당시에 약간 재야세력. 아직까지도 중심은 다비드앵그르를 잇는 고전주의작가들이었다.
만인이
토마스 토마 COUTURE 로마인의 데카당 - 거의 쿠르베의 그림과 같은 사이즈. 7.8미터 4.7미터
역사적 고전적 장엄함 모델이 되는
방탕한 밤을 보낸 다음에 아침에 나른하게 기대있는 모습.
여성들의 모습도 굉장히 (다비드에서 보여지는 도덕적 모습은 없이 에로틱 데카당.)
이런 사람들이 결국 관전양식 OFFICIAL PAINTING
국립미술학교에서 재직하고 이런것은 또 대중들이 쉽게 알 수 있는 것.
- 쿠르베등은 아방가르드. 정치적 논쟁이 되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그리고 세번째 그룹이 마네.
마네는 사람들 사이에서 당대 사람들의 삶을 그렸는데 실제로 그사람을 지지하는 사람은 그닥 없었다. 그담에 나오는 모네에 이르면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살롱전의 힘도 없어져버리고, 화랑들이 생겨서 살롱입선이 큰 메리트가 안되는 것이다.
조금전세대인 마네때는 살롱전이 중요했다. 가장 살롱때문에 고통받은것이 마네다. 자기가 그림을 내면 거부당하고 웃기다. 하지만 마네는 인정받고 싶어서 계속 그림을 내고.
마네는 문학작품(프로베르 보들레르)같은 시기, 근대적 삶에 대해 관심가진 사람.
더 이상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당대의 사람 생활 느낌을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
이사람들이 그린 것이 사람들에겐 기준이 TASTE가 혼란을 자아낸다.
그전의 기조와 충돌을 빚는 시기. 반응이 각각 다르다.
그중 가장 많이 문제가 방법과 형태의 변화.
특히 명암법 원근법 해부 이런것이 중요한데, 마네이후부터는 SKETCHY해지고 즉흥적. 과거와 달리 붓터치가 많이 보인다.
마네부터는 쿠르베 밀레 도미에와 달리 - 노동자 농민 별로 없고 중산층.
- 이때에 파리가 변화. 변화하는 도시의 새로운 삶과 행동에 관심.
마네 드가는 일종의 플라네르 - FLANEUR 산책자. 왜?
마네가 떨어졌을때 입선한 작품이 부게로(부그로)최고의 아카데미 그림 - 비너스의 탄생
기준작.
완벽한
드로잉
고전적 주제 비너스
마네가 풀밭위의 식사를 냈을 때 최고상을 타고 산것이 비너스의 탄생.
1862튈러리의 콘서트
여기서도 보면 마네의 친구들(마네도 이안에 있고) 문인 음악가들이 있고,
이것이 파리의 공원 튈러리 - 이것도 도시계획으로 새로운 명소.
이런그림을 보면 옛날 그림과 다른 것이 구성에 초점이 없다.
어디가 중심이고 아니고가 없고, 거의 어느순간에 흘끗본것같은 느낌.
옛날엔 구성이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쿠르베에게구성을 못한다고 말한것과 똑같은 비난이 마네에게도 가능한 것.
앞으로 이것은 인사파에게 전형적인 구성이다.
우연한듯한 느낌 인상파에도.
쿠르베의 화가의 아틀리에 보면 중심이 쿠르베. 전형적인 구성을 계산적으로 한 것인데,
그당시의 파리사람들을 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정신- 어떤 대화를 하고 냄새를 풍기고 그것을 전하고 싶었다고 이야기.
하지만 평론가들이 보기에는 감정도 없고 이야기하고싶은것이 없고 해박한 지식도 없고. 여기서 나오는 것은 일화적 내용 상징 아무것도 없어서 사람들은 이사람이 상상력 독창성이 없이 테크닉을 얘기할 뿐.
마네 - 그림이 무엇을 주장해야한다는데에반대한다.
시대상을 객관적으로 그리는 것이지 작가의 주관이 어떻고가아니다.
일상적인 장면이 주제로 나오게 된다.
1862년 60년대 그린 정물
뱀장어 - 냄비
이런 정물이란 것은 유명한 대가들이 그린 것이 아니라 서열이 낮은 화목이었고, 이그림이 그렇다손 치더라도 두드러지게 보여지는 것은 -
굉장한 붓터치. 윤기있고 색채가 생생한 붓획의 폭, 단순함, 신선한 느낌이 있다. 이사람은 이런것을 잘 그린 사람. 쿠르베와 같은 찬사를
붓을 잘 구사. 정물화는 잘 그린다고 이야기했다는데,
마네또한 고전에 대해 잘 알고 잇는데, 레몬에 칼이 대각선으로 놓여있는 것이 - 네덜란드 그림에도 보인다. 냄비앞에 반짝이는 것이나 - 기다란 붓이 지나간것과 같은
샤르댕 - 일반 서민집에있는 것을 장중하게 그린것처럼 - 스페인 그림들을 굉장히 많이 공부했다.
186X년 인물화(기타치는 사람, MADMOISELE? VICTORINE투우사의 모습
색채 자체가 모노크롬적인 색채가 있어서 고야, 벨라스케스 영향,
이무렵 처음으로 고야의 판화가 알려지게 된다. 굉장히
두번째 그림 - 모너니즘 평면화
10강
2010년 4월 5일 월요일
오후 2:00
<<오디오 녹음.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4월 5일 월요일 오후 2:01
마네 시대구분
초기 60년대 중반 - 옛 대가들의 작품을 COPY많이- 루브르.
특히 스페인 벨라스케스 고야 등의 MONOCHROME에 가까운 작품들을 많이.
이당시 스페인열풍( 비제 카르멘 등) 문학에도..
이때 고야의 판화등이 파리에 알려졌고, 이대는 특히 집시, 기타치는 사람 등이
쿠르베의 경우는 아직도 정치사회적 의미가 담긴 작품들이 많은 데 비해서
마네의 중요성 - 처음으로, 그림의 세계는 우리와는 다른 독자적인 reality를 가지고 있다는 인식.
쿠르베는 일상에서 나오는것들이 캔버스에 드러나고, 그것을 화가가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자 하느냐가 강한 반면
마네의 경우 그림은 현실세계의 법칙과 독립된 것이며, 순수하게 시각적인 것이다.
1960중반-70년대 초기
점점 더 독창적인 형태와 주제를 다루게 된다.
70년대 초기-이후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터치가 엉성 형태가 단순, 일본판화의 영향같은 것이 보인다.
- 그의 생각 그림은 무엇을 주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색채와 형태가 석여서 생긴 노래와 같은 것이므로 색형을 내버두는 것이면 된다는 - 주제의식 별로 확실하지 않은.
보들레르, 에밀 졸라, 말라르메 등과 친해진다.
1859 압상트를 마신 사람, old musician 1862
- 드가의 경우도 이런것을 마신 사람을 그린 예가 있고, 고흐도 많이 마셨다.
- 파리에서 볼 수 잇엇던 음악가였고, 마네 스튜디오 근처에 어린 거지들이 살았다고 한다.
벨라스케스, murillo의 그림을 보면 - 벨라스케스에서 인물의 타입(서민적인), 색채나 그런 것을 이어받았음을 알 수 있다.
- 앙투안 와토의 그림 중에 comedian de l'arte 거기 등장하는 인물의 모습을 그렸는데, 그 인물이 old musician에 같은 인물에 나온다.
- 대가들의 작품을 섞어서 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자기 눈을 거친 그림.
형태가 큼직큼직하게 그렸고, 다비드처럼 거대하게 한 화면에 작업한 게아니라, 부분부분 일관되지 않게 작업한 것을 볼 수 있다. 얼굴부분은 밀집된 붓터치로, 옷 나무 등은 큼직하게. 어떤 부분은 흰 캔버스가 전혀 칠해지지 않은 부분도.
- 이렇게 실험적이다. 압생트를 마신 사람을 보면 시각적 환영이 아니라 굉장히 평면적 단순하게 처리했다. 나름대로 자기가 실험하던 느낌이 강하다.
- 그외에도 (여기저기서 모티브를 가져와서 복합시켰는데, ) 잡지 등에서도 참조하고 source가 옛날에 비해 다양하다.
Concert at tuilries, 1862
풀밭위의 식사, 1863
- 이시대에 화단의 리더가 안생기고, 아카데미는 더욱 보수화되엇다.
살롱전 - 4천여명이 낙선했다.
- 샤르댕 냄비 정물 - 영향받았다.
- 네덜란드 17세기 정물화들
- 이런것을 보면, 기름진 붓터치 뭉텅뭉텅 지나간 흔적 등이 보이는데, 오늘날에는 특별하다고 보이지 않지만, 당시로선 획기적인 그림이었다.
- 건강하고 가정적인 색채이다. 시각적으로 유쾌하고 편한 느낌의 그림.
- 레몬- 네덜란그 정물화를 보면 대각선으로 칼이 나와있어서, 전반적인 색조를 보았을 때, 마네가 이런 전통을 보고 나왔지만, 근대적인 맛이 살아나는 것을 알 수 있다.
Manet, medemoiselle victorine as Espada 1864
- 투우사의 옷을 입혀 그림을 그렸다. 투우장에서 그린 것 같지만 배경은 따로 그렸고, 여자는 마네 스튜디오에서 그려진 - 배경과 인물이 잘 맞지가 않다. 다리에도 문제가 좀 있다.
- 거으 ㅣ평면으로 보인다. 우리가 느끼는 것은 강한 색채대조, 검은색과 노랑색 핑크.
- 그림은 무엇ㅂㅗ다 시각적인데, 여태까지는 그림이 문학역사쪽에 접근해있었는데, 그림의 순수한 면에 더 집중하게 되고, art for art sake-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림의 내용이 아닌 형식. 여기서 모더니즘이 시작, 그림의 자율성이 존중. 선 색 형태가 어떻게 배합되어 나타내느냐. 그림이 문학역사적 메시지를 줄 필요가 없이 그림은 그림이다 라는 것의 시작이 마네.!
Manet, 올랭피아, 1863제작,65년전시
- 엄청난 비난과 조롱을 받아서, 그림을 안보이는 방구석 문위에다 걸었다.
누가 봐도 꽃달고 목에 리본, 꽃을 보내왔다. 매춘부. 밤의 고객
- 개성이 매우 강한 그림인데다 뻔뻔스럽게 사람을 똑바로 본다. 상상불가.
- Titiano, urbino의 비너스 - 둥그런 입체, 손에 닿는듯한 느낌을 주는데, 여기 있는 여자 비너스 - 분명 모델이 있었나 보고, 어떠어떠한 사정을 보아 그냥 비너스라 한 것 같다. 은밀한 눈으로 보고, 강아지가 자고있고, 뒤에는 방이 있고 깊은 공간이 있다.
여기 보면 공간이 생략되어 보이지가 않고 깊이깊이 보는 것이없어지고, 앞의 여자에만 눈이 가고, 까만 고양이가 여기를 보며 꼬리를 샥 세우고 있다. Titian의 비너스에서 유래된것인데 여긴 완전히 매춘부고, 많은 매춘부가 당시에도 그려졌지만, 올랭피아가 아니라 그냥 비너스란 이름을 붙였다. 고분고분하지 않고 올랭피아라는 이름은 매춘부로 소설에 나오는 이름이다. 에밀 졸라의 나나, 뒤마의 아들들 이란 소설에서 올랭피아는 창녀의 이름으로 나온다. 이것도 모더니티. 근대화되면서 새로운직업여성군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런 여성들을 마네에서도 드가, 툴루즈 로트렉이 많이 그린다.
에밀졸라의 변호
- 검은 고양이는 그자리에 까만고양이가필요한것이다.
- 왜 꽃 - 그자리에 구성상 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등
- 영화 My fair lady를 보면 의상상을 탔다. 거길 보면 거의 흑백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마네의 영향이라고 본다. 마네는 색이 신선하다. 제한된 색에서 신선한 변화가 나온다. 마네 이후의 그림은 어제 그린것처럼 순수하고 신선한 색채 맛이 나온다.
- 매춘부 사진 - 매춘부들이 자신을 광고하기 위한 사진을 만들여 뿌린다. 우리나라도 한국기생사진이 퍼지듯. 티치아노는 고전의 비너스를 모방해 포즈를 취함.
마네 피리부는 소년, 1866
- 배경이 중간색이고 전신이 나왔을때엔 누구의 영향인가? - 스페인에서 벨라스케스에 의해 많이 그려졌다. - 이솝의 초상화 중요함! 상당히 많이 나온다
- 부분부분이 거의 평면 색면으로 나타나있고, 굉장히 바지가 평면적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부분간 색채대조가 나오지 입체느낌이 안난다. 색채 선 형태가 강하게 들어간다. 선과 형태의 구성이지 뭘 들고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 크고 대담한 형태와 윤곽이 분명하게 튀어나오고 배경이 간단해서 시각적인 디자인적 효과를 나타내고, 얼굴은 훨씬 세밀하게 그렸다. 옷은 넓게넓게.
- 여기에서 미술을 그리는 사람과 보는 사람의 간극이 벌어지는 것이 art for art sake미술을 위한 미술 예술을 위한 예술
浮世畵우키요에 에도시대 채색판화
졸라의 초상 1868
마네, 1867년 maximilian의 처형
- 곧바로 고야 5월 3일의 처형과 비슷.
- 고야는 전과 후, 야만적 행동에 대한 비판이 분명하게 드러나있는데, 마네의 경우에는 그런것이 하나도 없다. 감정이 없고 도덕적 심리적 충격이 없다. 거리를 두고 보는.
- 멕시코의 왕인데 꼭두각시왕. 처형장면이 보여지고있고, 집중해서 죽이는 그런게아니라 그냥 흔한 처형정면으로 보인다. 무심히 총알을 다시 끼우는 것 보이고, 전혀 감정이 들어가지 않고 팩트 중심으로 보인다. 황제의 처형장면이 역사적으로 보이는 것 뿐. 논평이 없고 드라마도 ㅇ벗고 단지 하나의 시각적인 경험에 불과. 이것이 사실주의. 마네 자신은 물론 보지 않았다.
Manet, 1875 argenteulle
- 아르장타이유 - 모네 르누아르등이 많이 가서 그림을 그렸다.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서 훨씬 터치가 짧고 빨라진다. 그러나 모네같이 진보된 것은 아니고 햇볕에 대한 관심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 모네와 이사람의 차이는 검은색이 항당 들어가고있어서 흑백의 효과가 나타나고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74 보트위에서 그림그리는 모네
- 완전히 인상파의 영향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 인상파 사람들이 마네를 초대해서 모임을 하자고 했는데, 마네는 늙으막에 젊은이들과 다시 전시하는 것은 명예에 먹칠하는것이 아닐까 생각해서 거부 하지만 그림은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그린다.
- 살롱전 작품 입선이 되었다고 연락이 와서 가보니 모네그림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
- 1875 grand canal
1881-82, bar at the follies-bergeres
11강
2010년 4월 7일 수요일
오후 1:53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4월 7일 수요일 오후 2:01
<<11강.wma>>
아까 폴리-베르제르의 바
- 이 그림 앞의 관람자가 보는 인상은 - 정면상이기 대문에 거울 뒤에서 똑바로 본다는 생각을 하는데, 지금 이 그림에는 두 사람의 시점이 복합되어있는 느낌을 주고,
- 그리고 여자의 얼굴이 - 일상적인 무표정한 권태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데, 여자보다 나이든 사람
- 거울뒤에서는 남자에게 기대서 말을 듣고 있는거같은 느낌?
표현형식
화면에 있는 것을 보는 즐거운 - 직접 눈으로 보는것같이 보이지만, 뒤에 거울에 비친 원경은 불분명해보이는, 결국 물감이 어떻게 발라지고 색채와 구성을 보게 되는 것이지, 원근법(입체감) 대신, 보는 사람에게 화면자체의 평면적으로 샇여있는 것을 보게 한다는 것. 주제의식보다는 그것이 시각적으로 어떻게 달라지고 비쳐지는가.
공간 - 라파엘의 아테네 학당과 비교 - 그림이라는 것이 창밖을 내다보는 것 같은 똑같이 비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화면 자체에 어떻게 물감이 발리지고 하는가를 보게 되는, 이것이 새로운 그림을 보는 방법.
t.j. clarke에 의해 - 노동계급의 여성, 그리고 성을 돈으로 사는 현장
모더니티의 주체는 남성이고, 여성은 더 아래라는 것이다.
근대에 플란넬들은 남성이다. 그리고 일하는 여성은 어디다 넣느냐.
당시엔 일하는 여성은 여성이 아니다. 라는 것. 양쪽에 분명히 위치하지 않은 유동적 위치가 이 여성들의 위치.
드가 - 요즘은 발레리나가 예술가에 속하지만, 그당시엔 노동자. 화가의 모델도 언제나 화가와 성적 관계를 가능성에 두고 있는 상태다.
영국
James Whistler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 런던으로 건너와 라파엘 전파와 친하게 지냈고, 빅토리아시대의 물질주의를 배격했던.
Music Room 1860
- 거울에 반사된 여자. 또한 검은색 옷을 입은 여자의 실루엣에서도 세련된 구성을 볼 수 있다. 친밀감있는 실내 장면이면서 굉장히 informal하다. 화가가 그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 것이 아니라 한순간. 평범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형태와 형태,
- 구성이 아주 추상적. 디자인 감각이 느껴짐. 실제로 구성을 보면 삼차원이 아닌 이차원. 커튼등의 패턴도 훌륭함 아주 감각적으로.
- 앵그르와 같은 선의 형태를 중시.
- 그러면서도 광선에 대한 관심
- 동양의 도자작품 - 보스턴 출신. Boston orientalist라는 말도 있다. 한때 보스턴은 세계적으로 동양미술 콜렉션이 가장 많은 곳이다. 또한 일본 판화도 잘 알아서, 여태 보던것과는 다른 감각의 그림이란 걸 알 수 있다.
Symphony in white #1 The White Girl 1862
- 그림을 소리, 음악으로 생각했다.
- 여성이 입은 흰 옷이 있고, 뒤에는 조금 더 어두운 흰 배경이 있고, 그밑엔 모피가 깔려있고, 그밑에는 카펫이. 하나의 하모니.
- 또한 붓을 길게 길게 사용해서 마네같이 짤막하지 않게 칠했다. 조금씩 뉘앙스가 다른 색에서, 또한 전체적으로 흰색에 머리카락은 갈색으로 써서 얼굴을 돋보이게 하는 것. 구도상으론 여성의 얼굴이 중심이 되게 만드는
- 인물의 전신상을 이렇게 그리는 것은 스페인 영향이 있고
- 색채와 대조를 중요하게 생각.
- 이사람은 휘슬러 애인.
Caprice in Purple and Gold, : Irish Geisha, 1864
- 청화백자, 옷이 이국적. 동양풍.
- 동양적+19세기유럽취향이 혼합된 느낌
- 옷등의 프린트 패턴도 디자인적 취향
- 여태까지 이렇게 비대칭적인 자세로 앉아있는 여성상도 없다. 세련됨. 누구보다 이런 면에선 뛰어났다.
Caprice in Purple and Gold, The Golden Screen, 1864
Arrangement in Black And Grey 1871
Whistlerm nocturne in Blue and Gold, Old Battersea Bridge, 1875
Nocturne in black and gold, falling rocket 1875
강가가 보이고, 사람이 서있고 불꽃놀이.
- 무엇을 그렸는지 알기가 어려운, 하지만 황홀한 불꽃 야경 등이 보인다. 아까그림보다 형태가 더 없어져서 알아보기 힘들다. 형태가 녹아들듯함.
- Nocturne in blue and silver
Nocturne in blue and gold: St.Marco 1879-80
- 그림이 매우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수ㅏ 있다.
The Peacock Room
드가Degas, (Hilaire-Germain)-Edgar
(1834.7.19,法国
巴黎~1917.9.27,巴黎)
이사람도 일종의 플란넬이고, 인상파들과 같이는 지냈지만 이사람은 어찌보면 사실주의화가라고도할수있고, 아버지가 은행가라 부자. 팔기 위해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다.
르누아르와 드가 모두 여자를 많이 그렸는데, 르누아르는 뽀얗고 아름다운 그런 여자인데 드가는 어딘가 ugly한 여자를 그렸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 독신. Misogynic 혹은 게이라는 오해를 샀다. 가장 숭배했던 화가는 앵그르였다. 아버지가 앵그르를 만나게 어린 드가를 데려가니 앵그르 왈 draw lines라고 이야기했단다.
이사람이 다른 인상파와 다른점은 고전을 잘알고 뎃생력이 뛰어난점 표면적 인체구조를 탁월히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는데, 1860년대에는 다른 화가들처럼 도시가 화제가 된다. 거리 카페 승마장 오페라. 이런곳에서 스케치를 하는데, 인물들이 단단하고 고전적인 그림들. 이사람은 단편. 전체 삶에 대한 그림보다 어느 단편적인 장면을 보여주는데, 나중에 인상파들과 함께하면서 색채나 빛에 민감한 그림 그렸지만 여튼 기억을 더듬어그리거나 드로잉은 다른 인상파와 다른 사람. 전형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12강
2010년 4월 12일 월요일
오후 1:52
<<12강.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4월 12일 월요일 오후 2:01
이다음월요일 중간고사. 공부할작품은 ETL
85작품정도이다.
- 시험은 IDENTIFICATION문제. 슬라이드테스트. 작가 작품 연대
비교문제
기본적으로 정확하게 연대를 외워라.
Prima 발레리나
이사람이 발레리나를 그린 이유
- 여기서도 보면 올라가고 내려가는 시점(우키요에같기도 하고- 압상트나 발레리나나), 스냅샷같은 구성, 광선이 비치고, 인상파들과 어울리니까 조명에 빛이 반사되어 나타나는 효과등도 관심이 나타남.
- 드가는 실제 연습실에도 와서 스케치를 많이 한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은 그 순간에 바로 그렸기 대문에 스케치를 안했지만, 드가는 고전에 근거해 그려서 스케치를 많이 했다. 드가가 매일 와서 그림을 그렸다.
- 발레하는 사람들은 자세가 똑바르고 흐트러지지않는다. 쉴때도 흐트러지지않는다.
댄스 레슨, 1872
-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이것은 굉장히 계산된 공간과 구도이다. 공간의 명료성과 균형이 완벽하게 보여진다. 방의 공간 안에 인물이나 사물들의 배치와 향해있는 방향이 흐트러지지 않게 해주는 것이 의자이다. 인물이 적은 쪽의 사람은 반대쪽의 많은사람보다 큰 인물로 그려서 균형을 맞춘다.
- 자연스럽지만 정지되어있는 순간.
- 머리등도 거의 수평을 맞추어 되어있도, 그림안에 균형을 맞추어 배치.
- 균형과 움직임이 잘.. 구성은 드가가 최고.
발레 연습, 1874
- 시대칭적이지만 저 뒤와 오른쪽 앞이 균형이 맞고,
- 광선에 따라 반사되는 빛과 색이 보이고
- 이때부터 파스텔을 많이 사용했는데, 이사람이 눈이 잘 안보이는데, 거칠은 파스텔 눌러진것을 많이 사용하게 된다. 이 그림은 파스텔-오일 혼합소재. 파스텔은 가루이기 때문에 나중에 없어지기가 쉽다 이사람이 헤어스프레이같은 용액을 개발해서 파스텔의 단점을 극복해서 겹겹히 파스텔이 채색-고정-채색-고정한 작품이 있다.
- 드가는 보수적인 사람이었고, 용액에 무엇을 넣는지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서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스프레이 비슷한것을 썼을 것이다. 하고 추측된다.
- 초기에는 사실주의화가들과 유사한 관심을 갖지만, 18xx년에 인상파화가들과 함께하게 되는데, 드가는 인상주의들과 어울려서 득될 것이 없었다. 아방가르드라서. 그러나 드가는 이사람들이 새로운 움직임을 시작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빛과 순간적 우연한 장면등에 공감을 느꼈기 때문에 같이 활약하게 되어, 74-86년까지 종종 8번 전시에 전부 참여했다(모네는 나중에 떠나고)
- 이들이 주로 모였던곳이 guerbois괴르보아 - 약간 귀찮은 존재였다. 많은 사람들이 드가를 좋아했지만 드가는 좋고싫고가 솔직했고, 부유하고 작품을 팔 필요가 없어서 그런지 잘난척을 했단다. 어쨌든 같이 활약했다. 여튼.
- 드로잉
14years old little ballerina
- 주로 조소를 했고 대부분은 흙으로 빚어놓은대로 남아있다,
- 이것은 청동으로 주조한 실제크기.
- 옷을 그대로 입혀놓았다
1886 머리를 빚는 여인
- 인체는 기본적으로 인상파의 주제가 아니다. 고전적인 주제인데, 이사람이 보는 인체는 균형을 중시. 하지만 앵그르에서 보이는 정교 감각적 아름다움에는 관심이 없다.
- 앵그르의 터키탕과 비교해서, 몸과 허ㅣ 팔 다리가 어떻게 움직이고 이런것을 관찰했던 사람인데, 어찌보면 뛰어난 관찰자였다.
- 르누아르의 수욕도 - 인상파긴 하지만 상당히 전형적인 고식의 누드를 계승하고 잇고, 즐거운 여성들의 야외에서의 그런 느낌이 강하다.
- 드가의 그림은 - 앞을 보는 누드는 전혀 없고, 이상화되지도 않고, 남을 의식하고 있지도 않다. 앵그르 그림도 보면 앞에있는 관람자를 의식하는, 약간 폼도 잡고. 르누아르도 그렇다.
욕조1886
- 또한 드가의 누드는 실내의 누드(보통은 자연이나 침대였지만!). 목욕하는 목욕탕이 아니다. 대야에서 목욕하고 있고
목횩후 머리를 말리는 여인
- 텁이 있지만 침실이나 실내에서 말리고 있지만, 과연 이사람들이 그렇게 실내에서 목욕을 했는가 - 그렇지 않다.
- 대부분 사람들은 대중탕을 갔고, 물사정이 나빴는지 한달에 한번이상 목욕하는것은 피부에 나브다고 생각했다. 목욕을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사람들은 다 매춘부였다. 그래서 전에는 여기 나오는 여인들이 가정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저들이 매춘부로 볼 수 있지 않냐는 의견이 많이 나왔다. 게다가 등을 돌리고 있어서 남에게 보여지는것을 거부하는 듯 하고.
- 드가의 말에 따르면 이들의 그림은 vision은 key-hole vision이다.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보듯 자기자신이 들여다본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채 움직이는- 시점은 위에서 내려다보는것이 좀 많고, 남성의 시선에 수동적인 대상인 자세이고, 모두 굉장히 불편한 자세이다. 전통적인 예전의 그림들은 아름다운 자세를 취하는데,
- 파스텔 - 손으로 문지른, 직접적인 하나의 터치가 몸에 닿은 신체적 접촉이 암시되어있고, 굉장히 특이한 누드.
- 색채, 거친 터치, 강한 선과 누드는 화면의 하나의 추상적인 구조가 되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 그래서 앵그르의 아름다운 윤곽선은 다 사라져버리는 그런것이 이사람의 후기 누드이다.
욕조
Boudin, trouville의 바닷가 1865
외젠 부뎅 - 모네와 연결이 중요한 사람이다. 모네는 중요한 인상주의 화가인데 태어난 곳이 노르망디. 프랑스 사람들은 노르망이라고 - ㄱ고집센 사람들.
- 10대후반의 모네는 드로잉실력이 상당히 좋아서 신문의 캐리커처를 그리는 일을 했다. 굉장히 잘 그림. 부뎅이란 사람이 어느날(나이많은) 모네의 캐리커처 그리는거 보고 칭찬을 하면서 같이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자고 했다. 모네는 피하다가 할 수 없이 한번 가서 그렸는데, 바로 그날 내 눈이 열렸다고 한다. 그때부터 모네는 풍경화를 그리게 된다.
- 부뎅은 파리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지만 50 60년대 르아브르(노르망디근처)항구를 돌아다니면서 바다풍경을 많이 그렸다. 노르망디 해안의 특징은 깎아지른 절벽과 파도가 세서 험한 해안.
- 해변의 여인이나 그런것을 그렸는데, 이것이 아직도 인상파와 달리 어두운 빛이 많이 보이지만, 생생한 느낌, 거친 파도나 하늘등 역동하는 기후 광선 등이, 거칠고 스케치한듯한 느낌이 드러난다. 어쩌면 바르비종사람들과는 또다른 그런것이다.
- 전반적으로 회색 톤이 많은데, 순간적인 변화나 터치가 굉장히 멋있다. 잔 붓터치로 구름과 파도의 순간적인 형태를 잘 잡아냈다.
모네, 바다 풍경, 폭풍우 1866-67
- 바다의 순간적인 느낌.
- 색채 어둡고 무거운 느낌. 터치도 두껍고. 그런것은 옛날에 쿠르베의 풍경화와 상당히 비슷하다. 초기에는 이런식의 것은 초기에. 형태에 집중하느라 중량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밝고 어두움의 대조로 자연을 이해하는 초기의 작품들이 여기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 시기는 dark impressionism이라고 말한다. 어떤사람은 pre라고.
- 쿠르베, 바르비종, 부뎅 등의 영향을 받는 시기. 여기서 광선에 따라 색채가 변한다는 레슨을 받고.
- 이시대에는 집에서 조절을 하지만, 아직까지 형태질감 무게에 관심을 갖던 것을 알 수 있다.
1867, 모네, 정원의 여인들
- 아까와 같은 무거움은 없어졌다. 붓터치가 훨씬 작아졌다. 더 빨리 적용이 된다. 훨씬 시각적인 느낌이 강조가 되고, 형태가 확실하다.
- 먼데 있는 여자를 보면 아직까지는 형태와 주변 공간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수준에 머물러있지만, 대개는 빛의 효과에 대해 관심이 많이 보인다. 나무사이, 그림자속으로 들어오는 빛 이런것이 보인다. 볼륨감이 보이지만 그래도 형태와 바르는 것에서 탈피.
- 어두운 검은색이 아닌 색을 가질 수 있다는 이해가 있게 되고, 결국은 자연에는 검은색이라는 것은 없다. 검은색을 화면에서 많이 추방하게 되는 것이 여기서 시작하게 되고,
- 또 운에 띄는 것이 옷. 패셔너블한 드레스, 줄무늬, 상당히 멋있는 것을 (대중적인 패션잡지에서 참조)-이것도 근대성을 볼 수 있다. 생생한 광선의 느낌이. 보인다.
1869 la grenouillere 라 그르누이에르
- 검은색이 많이 없어져서
이때부터 르누아르와 캔버스를 놓고 같이 그리게 되어
- 중산층의 여가를 즐기는 모습.
- 물 - 물은 항상 움직이고 반짝거리고 인상파 화가들의 주제. 색이라는 것이 보면 햇빛에서 받는 것도 있지만, 받는 형태에 따라 도로 반사할수도 흡수할수도 있다. 요즘 유행하는 반짝거리는 옷을 보면 반사하게 되어있고, 흰옷입은 사람에 옆에 있으면 그사람은 광선도 받지만 옆에있는 색의 영향도 받는다. 이런것을 훨신 세밀하게 이해하게 되고, 이제 중요한 것은 색채를 섞어쓰지 않는다. 예전에는 정확하게 연두색을 그렸는데, 이젠 섞을 시간이 없어 바로 원색을 칠해서 옆에 노랑원색을 칠해서 관람자의 눈이 그것을 섞어서 연두색으로 보게 된다. 화면에는 원색 순수한 색이 발라지게 되니깐 화면이 훨신 생생하게 느껴진다. 인상파 그림은 어제 칠한것같은 신선함이 보인다.
- 어느시각이냐 아침 점심 오후냐 비오는날이냐 무엇이냐. 색이라는 것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유동적인 것.
르누아르와 비교 - 대체적으로 많이 이야기하는것은 어느쪽이 더 사람의 형태가 명확한가 - 르누아르다. 르누아르는 인물이 더 중요하다 로코코의 부셰등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인물을 포기할수가 없었다. 확실하게 좀더 정의가 내려져있는 반면, 보트 집 나무와 마찬가지로 인물이나 이런것은 모네에게 그냥 빛을 반사하는 표면에 불과하다.
Monet, beach at trouville 1870
형태가 큼직큼직, 햇볕이 위에서 내려오고, 얼굴부분에 그림자가 생기고, 나머지는 그림자가 안생기는 부분. 여기를 보면 형태가 없어져버린다. 빛에 의해서 가운데 옷은 윤곽선이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눈이 부셔서 정확한 형태를 알아볼 수 없듯이. 흰색은 옷의 색이 아니라 햇빛의 색이라 할 수 잇다. 의자의 이것도 의자의 색이 아니라 햇빛의 색.
- 이때만해도 햇빛의색을 흰색으로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더 분화.
- 형태는 빛속에 녹아들어가버리고
Monet, the boat ar argeteuil 1875
- 색으로 대체해버리려는 것이, 이것을 보면 완전히 발달된 인상주의다 라고 할 수 있다
- Divisionism완전히섞어서 칠하는 것이 아니라 분할되서 칠하게 되고, 각 붓터치는 획을 간직하고 있어서 섞어진 것이 아닌데 멀리서 보면 섞여보인다. 색채가 더 생생하게 보인다는 것이 인상주의의 교훈. 74 75 이무렵엔 붓터치가 전 화면에 퍼져보인다.
- 전형적인 인상파가 나타나는거임.
해돋이, 인상
- 74년 인상주의화가들이 모여서 - 원래는 코로도 초청할예정이었는데 무산 마네는 참가 안함
- 첫번째 인상파 전시는 나다르의 사진스튜디오에서 열리게 되고, 여기 참여자는 30명정도. 전시이름이 인상파가 아니라, 화가 조각가 판화가의 연합이라는 이런류의 anonymous society of art이렇게 한사람이 여러점 165점 작품이 전시가 되었다. 거기 낸 작품이 모네의 해돋이.인상이란 작품 연대는 72년이지만 74년전시에 출품.
- 이것을 본 사람들은 굉장히 놀라워한다. 아무도 이것이 완성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앗다. 스케치에 불과하다고 비판. 과격한 젊은 청년들이란 인상이 보였고, 임신한 여성은 보지를 말아라 충격받는다 ㅋㅋ
- 이작품에서 인상주의란 조롱한 의미. 본질을 그린것이 아니라 단지 눈에 비쳐진 인상에 그쳤다는 것
Monet, blvd. Capuccines, 1873
- 이사람들은 도덕적 가치나 그런것에 관심이 없고, 굉장히 중산층적인 가치관을 가졌다. 새로움에 대한 매혹과 만족, 그래서 처음에 인상파 화가드링 많이 그린것이 근대화에 관심. 오스망에 의해 이루어진 도시화에 관심을 보여주고 잇다.
- 눈으로 관찰하니까 이 세계가 끊임없이 달라지고 그리고자 했는데, 카푸친대로 - 사진작가 나다르의 스튜디오에서 대로를 내려다보고 그린 그림. 새로운 도시에 대한 매혹, 근대성을 표현하고 있어서 물질적인 외향적으로 변한 이런 것을 추구했지, 정신적인 것을 추구한 사람은 아니었다.
- 이 그림을 본 사람이 믿을 수가 없어서, 내 안경에 물기가 서렸나 해서 안경을 닦았다. 흐린날의 흐린 그림을 그려서 익숙치 않다고. 파리의 기후가 대체로 이렇다. 겨울에도 부슬부슬 이러고. 작은 터치 자잘 섬세.
Monet, gare st.lazare 1877
- 생라자르 기차역
- 새로 지어진 건물과 근대적 힘과 에너지, 소리 소음 이런것을이 이사람들이 매혹단한 도시의 변화.
Monet gare at.lazare 1877
13강
2010년 4월 14일 수요일
오후 1:58
<<13강.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4월 14일 수요일 오후 2:00
파라솔을 쓴 여인, 1886
Rouen 대성당 1893
- 루앙에 있는 고딕 성당. 육중한 돌로 만든 건물, 모네가 그린 그림은 같은 성당이지만 색이 매우 다르다. 고정색(local colour) 고유색이라는 것은 원래 없다는 것. 색이란 옆에 어떡 색과 대비되는가, 비추어지는 빛이 어떤 색이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고,
- 이것은 성당을 그린 것이 아니라 성당에 비춰지는 광선을 그린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검은색은 없어져버리고, 붓터치가 예전보다 훨씬 작아졌다. 그림 전체가 붓터치로 덮히게 된다.
지베르니의 건초가리, 해질녘 1888 아침1891
- 표면이 2차원적인 패턴이 되어서, 완전히 인지하기 어려운 미세한 색채분할로 나타나게 되고, 형태가 사라지게 된다.
1891 포플라 시리즈
모네의 집, 지베르니(사진) 1883년에 이사
- 연작을 하게 되면 점점 눈에 비친 것만을 그리던 초기와 달리 (objective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눈에 비친 것을) (모네는 머리도 심장도 없다고 평을 한다 하지만 얼마나 대단한 눈을 가졌느냐)
- 1880년대에는 통일된 분위기를 가지게 된다. 이 연작에서 나타나는 것이 자주색ㄱㅘ 푸른색이 많아져서 전체적으로 통일된 분위기를 가지는 것이 이 때 연작.
- 1870년대 과학과 실증주의 물질주의로 세상이 발전할 것이라는 것이 1880년대에는 사라지고 이 경향과 연관이 있다. 1883년 이사, 파리 화가들과도 거의 연락안한다. 지베르니에서 죽을때까지 거의30년을 살았다.
- 스케일이 작은 그림들을 그리다가 1906년쯤에는 스케일이 큰걸 그리게 되고 , 나중에는 엄청난 큰 그림들을 그리게 된다. 큰 캔버스를 하기 어려우면 두쪽의 캔버스를 그리게도 된다.
- 수련 바깥과 물 안과 물 표면이 다 비치는 광경.
- 처음에는 눈이 좋아서 멀리서 그리는데, 점점 눈이 나빠지면서 물에 가갑게 놓고 그려서 작품도 점점 물에 가까워지게 (바깥세상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그려진다.
1904 수련
- 수련이 뜬 물에는 외부세계가 보이고, 색채의 조합만으로 이루어진 화면을 보여준다. 순수한 시각경험. 완전히 시각경험 그 자체로 우리를 감동시킨다.
- 드뷔시도 인상주의에 감명을 받게 된다. 초기에는 인상파였다가(물의 반영, 성당) 후기에는 상징주의로 간다.
1904 수련
- 점점 수면으로만 프레임을 잡고, 초기와는 달리
후기작품
1910년대 수련그림
- 이시기에는 마티스 피카소 나오는 시기. 이시대에는 모네 드림도 추상적으로, 나중에는 표현주의적으로 간다.
Moma 수련 작품(캔버스 3개 대작)
르누아르
르누아르는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지만, 아직도 인체를 많이 그렸고, 인간생활의 유쾌하고 아름다운 면을 그렸다. 가장 대조적인 것이 드가와 르누아르. 드가의 여인들은 르누아르처럼 예쁘지도 않고 단편에 관심을 가졋다면, 르누아르는 인생은 충만함,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꾸미지 않는 자세를 보여주는 이것이 이사람의 특징적인 것이다. 특히 이 사람은 로코코미술, 부쉐등의 그림을 많이 묘사한다. 18세기 로코코. 달콤한 색조가 있는데 이것이 르누아르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부쉐는 작위적인데 르누아르는 자연스럽게. 70년대에는 인상주의의 광선의 효과에 빠지게 되지만, 이사람에게서는 항상 여성과 아이들과꽃이 나타난다. 일종의 대지, 삶을 상징, 번명 번성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것이 프랑스미술에서 전통적으로 나타나는 신비 즐거움과 찬미의 대상이라는 것이 프랑스에서. 독일에선 힘들고. 여튼 인간관계의 예민함 이런것을 잘 그렸다. 그래서 대부분이 아는 르누아르의 그림은 1870년대의 화려한 색 부드러운 피부 따뜻한 색조 이런것으로 알고 있다.
Le grenouillere 1869
- 모네와 같이 놓고 그린 그림.
- 빛에 대한 관심이 보인다. 그림자가 광선이 비치는 것보다 어두운것만은 아니다. 광선이란 굉장히 많은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 모네는 순간적. 르누아르는 좀더 우연성보다 균형잡힌 그림을 하려. 전통의 기반이 있는 화가였기 때문에. 터치가 잘게 분할
Monet painting,renoir
- 르누아르가 그린 모네의 모습. 터치가 훨씰 잘게 분할.
Molin de la galette 1876
- 여기서도 보면 모네가 이런 그림을 그렸다고 상상하기 힘들다. 인물과 인체가 많이 등장한다. 인간생활의 단순함 가운데서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 초록색 나무 사이로 빛이 내려와서, 사람들에게 빛이 점점이 떨어지고 있다.
- 이곳은 파리 야외 공원 비슷한 곳인데, 이런 것도 오스망 도시계획 이후 사람들이 즐거운 여가생활 장소로 떠오른 곳. 사람들이 담소를 즐기고 있고, 자연스럽고 포즈를 전혀 취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 인상파들의 구성 우연한듯한, 공간이 계속되는 듯한 구성 - 어느부분을 잘라도 그림이 될것같은, 늘려도 줄여도.
- 다비드등이 영원보편적인 것을 구했다면, 르누아르는 순간적인 것을 그렸지만, 굉장히 삶에 대한 긍정적인 느낌을 주는 그림이다.
- 그리고 르누아르에 등장하는 그림을 보면 점잖고 여성을 아끼는 남자로 나오는데, 그럼에도 르누아르에 나오는 여성의 이미지는 굉장히 순진무구하다. 굉장히 남성위주의 시각이라고 비판한다. 페미니스트들이. 아마도 지적으로 여성이 생각할 수 있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
선상파티의 점심식사 1881
1884-87 수욕도 bathers
- 82년에 이태리 여행 르네상스 특히 라파엘 영향을 받고 다시 구성 양식 볼륨에 관심을 가진다. 그래서 그려진 작품
- 이사람이 왜 이렇ㄱ 갔냐면, 광선만을 추구하면 너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아직도 자연에서 인상파적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인물들을 보면 선이 다시 등장, 볼륨이 등장 굉장히 전통적인, 부셰의 여성의 움직임과 리듬감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돌아오게 된다.
- 여성이 장난치는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이런것도 부쉐, 프라고나르의 전통을 보여준다. 역간 자연스럽다기보다는 작위적인 포즈를 보여준다.
- 페미니스트 보기에는 이것은 굉장히 남성주의적인 시각. 여기서 여성은 자연의 일부로 보여진다. 항상 여성은 자연에서 누드로 보여졌다. 문화화된 것이 아닌 다른 생각이 전혀 없는 ,그에 비해 남자는 항상 옷을 입고 서재에 있는데 이런 대비가 바로 르누아르의 예이다. 여성은 자연에 융화되어서 재생을 상징하느 ㄴ이미지이고, 여성을 보면 항상 즐겁게 집안일을 하고 그렇다. 이쯤 되면 여성이 사회문제로 제기되던 때이다. 여성이 교육받고 일하게 되고 new women 이 나타나게 되면서 여성의 권리 요구가 커지는데, 많은 책들이 나오게 된다. 어머니의 중요성 이런것….
Boucher 1742 목욕후의 diana 여신
- 색이 굉장히 신선 감각적인, 빛의 효과 천과 대비되는 여성의 색채, 핑크의 피부 이런 것이 귀족들이 좋아하던 그림이다. 누드를 감상하는데, 그냥 누드라고 할 수 없으니 여신이라고 붙여서 18세기에 나온다. 이런 전통이 르누아르에 계승.
1900이후 말기의 수욕도
- 이사람도 점차 표현적. 따뜻 붉어지면서 형태가 굉장히 둥글고 커지고 해서, 혹자는 그로테스크하다고 하지만, 사조에서 완전히 자유스러운 것을 형성해서, 크기나 볼륨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 어떤 여신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 일본 화가들이 이때 유학와서 많이 보이는데
Caillebotte, 마루를 깎아내는 사람 1875
- 까이유보트 - 부자, 친구들의 그림을 많이 사주고, 자신의 그림을 국가에 헌납하게 된다. 이 그림은 인상파와는 좀 다르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형태가 아직도 견고하고, 뭔가 사실주의에 가까운, 살롱전에 떨어져서 1870년 인상파전에 출품.
- 드가가 사회의 단편을 그리는 그런것이나 구도의 임의성을 보면 드가와 유사 하지만 여전히 소극적 구도. 몸이 구조 세부묘사에 여전히 관심을 둔다. 밀레의 이삭줍기같은 리듬감과 유사하지 않나. 그래서 인상파들과 어울렸지만 사실주의와 연관있는 사람이 이사람이다.
Camille pissaro 정물화 1867
- 피사로는 인상파에 늦게 합류한 사람. 쿠르베를 연상시키고 터치가 무거운 사람.
Pissaro, Hermitage at pontoise 1867
- 형태 견고한 구조에서는 아직 pre-impressionism에 해당된다.
- 왜 중요하냐면, 인상파들과 거의 관계를 갖고 있어서 세잔이 화가가 되는데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 이사람이 굉장히 좋은사람, 여러 화가를 도와주고 해서 화가로서보다는 그런의미에서 인상파에 중요했던 사람이고, 고갱에게 화가가 되기를 격려했던 사람도 pissaro.
- 피사ㅗ는 1880년대부터는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졌고, 어떤이는 이사람이 무정부주의자로 알고있다. 1880년부터는 사회에 대해 환멸을 느끼면서 무정부주의자들이 생기기 시작하ㅡㄴ데, 어느때나 그렇지만 예술가는 항상 자기를 진보라고 생각했다. 쿠르베는 자신이 진정으로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했을까?하지만 여튼
- 일하는 농민을 많이 그린 사람.
Alfred sisley bridge at villeneuve-sur-le garenne, 1872
- 터치나 빛에서 인상주의를 알 수 잇지만 질감과 견고함, 강한 선에서는 여전히 pre적.
- 시슬리는 코로와 더 연결된다. 코로가 바르비종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상당히 고전주의적 경향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연결이 된다.
1876 flood at port marly
- 인상주의와 같은 경향으로 나아가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도 구조와 선 속에 머물러있다. 어디상 나아가지 않는다.
1876 snow at louveciennes
- 상당히 시적인 그림이고, 굉장히 분위기가 중요하다. 약간 로맨틱하다. 결국 이들은 일종의 중도파이다.
-
1891 어머니와 아기
- 인상파 여성화가 둘인데 한명은 mary cassatt
- 여성화가 둘의 공통점은 - 거의가 여성을 그렸다. 19세기에 여성 화가가 나오는데 그 배경은 이제 미술교육학교를 다닐 수가 있고(과거에는 남자모델 누드가 많아서 그릴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달라져서) 그러나 두사람이 남성을 그렸다 이런것은 없고, 1850년대에 로자 보네르 라는 여자화가가 있었는데, 상당히 남성적인 동물화나 그런 대작을 그렸는데, 바지를 입고 자신을 남자로 생각함. 당시 조르쥬 상드(쇼팽의 연인)와 둘이 남장. (그땐 바지입으려면 경찰서에 허가받아야된단다)
- 주로 상류층, 모성(어머니와 아이들) 그림을 그렷는데, 여튼 인상파 그림에서 중요한 역할을. 주로 그리는 것이 거리는 별로 없고, 거실 침실, 베란다, 정원. 그당시만 해도 사적인 영역. 가정집 안. 남자들과 같은 공적인 세계는 그리지 않았다. 플라네르 플란넬은 남성의 영역. 당시 사람들은 도시가 위험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그렇다.
- 이사람은 펜실페니아 아카데미 오브 파인 아츠. 이사람은 누드 말고 석고를 주로 그렸다. 1851년에 파리로 가서, 5년간 아카데믹한 그림을 그리던 장 레옹 제롬이란 화가에게 배웠다. 68-75년까지는 살롱 실제로도 그림이 좀 팔렷다. 드가와 친해서 드가가 메리 카사트를 인상파에 출품하게 되어서 18--년에는 출품하게 된다 인생을 독신으로 산다.
- 이사람에 의해 미국에 인상파가 소개되고 인상파 화가가 생겨난다.
- 예전에는 이런것이 유모가 하는 일이엇고 이시대에는 physical touch가 중요하다 이래서 따뜻 친밀한 모자간 관계가 보이는데, 상당히 터치가 아직도 모네등보다는 건고하다. 그리고 스케치적인 터치가 보인다. 붓이 상당히 길다. 신체는 아직도 상당히 견고하다. 어쨌든 엄마가 애를 키우고 재우는 애정에 초점이 맞추어져잇다.
Mary cassatt, 특별석의 여인 1879
- 빛이 어때를 비치고, 사람들의 모습이 뒤에 보인다. 터치는 인상파적인 세밀한 터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중산층 여성의 자연스런 이미지로 보인다.
Mary cassatt 오페라의 여인 1880
- 공적인 공간이지만 격리되어있는 공간에 여성이 앉아있고, 재미있는 건 저쪽의 남자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Mary cassatt 편지 1891 판화
- 이사람은 판화와 드가영향으로 파스텔도 했다.
- 거의 똑같은 우키요에가 있다. 기타가와 우타마로의 그림. 이사람도 일본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았다. 평면적인 색, 각도도 특이한 각도, 이런 것이 어찌보면 인상파의 주제이기도 하지만 우키요에에서도 보여진다. 기본적으로 우키요에를 왜 좋아했냐면 화가들이) - 일상생활의 주제의식과 특이한 각도 이것이 자신들과 비슷한 관심으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이래서 많이 수집한다. 반 고흐는 거의 400점을 수집. 이당시 자포니즘이 상당히 큰. 비서구권 미술이 서양미술에 큰 영향을 준 거의 최초의 예이다.
- 공예품은 이미 백화점에서 팔고, 우키요에는 일본에서는 고급미술이 아니다. 도자기를 수출하는데 우키요에를 싸는데에 썼다. 브라크몽이란 화가가 도자기를 싼걸 보니 호쿠사이의 판화가 있어서.
Mary cassatt, 여인의 초상, 1878
독일의 인상주의 화가들
인상주의만큼 독일로 퍼진 운동이 없다. 동양이 문호를 개방하면서 처음 받아들이는 것이 인상주의부터이다. 그런데, 그중에서 보이는 것은 빌헬름 라이블이란 사람이 - 독일은 아직도
Leibl, linda kirchdorffer, 1871
- 큰 붓을 사용해서 약간 쿠르베 류 earth color 하류계층의 여성같다.
세 여인 1881
- 이런것은 아카데믹한 고전주의라고 알 수 있다.
- 상당히 종교적인 느낌. 약간 낭만주의적 감각이 느겨지는 독일의 그림.
Menzel, 무도회 - 상당히 인상주의적인 분위기가 느겨진다. 터치가 자유스럽게 되고, 아직도 물론 선 형태가 강조되어잇지만, 샹들리에 이런것에선 프랑스 인사웆의의 것이 드러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스는 들라크루아부터 천천히 간데 비해서 독일이 한번에 막 들어오고 게다가 조금있다 뭉크 그림이 들어오고 (철거되고 소동일어남) 그러니깐 독일은 현대미술에 대해 급속히 들어오는 현상이 드러나게 된다.
여기까지 인상주의 끝.
ㅏ.
14강결강
2010년 4월 26일 월요일
오후 1:58
4/21
새로운 화가들이 나와서 미술의 방향을 인상주의에서 달리 가게 하는 역할을 했음.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룹끼리 활동하여 서로 굉장히 친했던 사람들이었지만, 후기 인상주의는 서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cf. 고흐&고갱은 친했지만)이 매우 달라서 서로 고립되어 있었음.
>Seurat, 일하는 농부들, 1882
초기작. 노동의 주제가 당시에 많이 그려짐. 이미 이러한 주제를 쿠르베나 밀레의 경우에서 보았음. 쿠르베의 노동자와는 매우 다르다. 쿠르베의 경우 인물에 강조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인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체에 인물은 단지 한 부분인 것처럼 보임. 밀레나 도미에는 인간에 대한 반응을 느낄 수 있지만, 여기서는 하나의 단순화된 형태로 보임. 쇠라는 아카데미 훈련을 받은 에꼴 데 보자르 출신이었고, 아카데미에서의 훈련을 그림 그리는 방식에 적용을 시켰음. 준비단계가 복잡(펜슬-목탄-수채-유화)한 아카데미의 각 단계를 작품에 적용시켜서 순간적인 인상보다는 여러 단계에 걸친 작업을 함. 그래서 붓터치를 다루는 것이 인상파와 많이 다름. 인상파 그림은 빛을 포착하여 빨리 그려야하므로 막 그려진 느낌. 그러나 붓질이 규칙적으로 되어있음. 인상파의 경우 빛에 의해 구조가 분해되는 것 같지만, 여기서는 밑에 깔린 구조를 느낄 수 있음. 이러한 것이 그의 초기작품에서 나타남. 아직도 빛에 대한 관심이 매우 강함. 재미있는 것은 전부 논인 배경에서 햇볕이 비치는 부분에는 오렌지색을 많이 칠했고, 어두운 부분에는 자주, 초록, 푸른색으로 하여 빛의 색깔 배합을 처리했음.
>Seurat, 돌을 깨는 사람과 수레, 1883
쿠르베와 똑같은 주제의 돌 깨는 사람.. 터치 하나하나가 빛의 색. 어두운 그림자에는 푸른색이 적용되었음. 밝은 부분에 오렌지색이 있고, 사람의 형태도 인상파처럼 빛에 의해 분해되는 것이 아니라 형태가 분명하게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쇠라의 경우 아카데믹한 교육을 받았지만, 카미유 피사로의 영향을 받아서 인상주의를 배우게 되었음.
>Seurat, Bathers from Asnieres, 1883-84
초기의 중요한 작품. 아스니에르의 목욕하는 사람들. 학교를 다니면서 들라크루아도 공부하고, 자연에서의 색채관찰이 중요함을 느꼈음. 그러면서도 굉장히 원래 타고난 고전주의적 성향, 조직적이고 자기 작품에 질서와 조화를 구현하고자 했음. 순간적인 빛의 인상과 화면 안의 인물이나 풍경을 질서 있게 조화시키고자. 모네처럼 순간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인 영원성을 주는 화면을 보여주려고 했음. 이때부터는 이미 인상주의가 인정받게 되었음. 74년부터 그룹전. 쇠라와 같은 사람이 자신도 인상주의에 뿌리를 두고 자랐지만, 이제는 인상주의에서도 보수적인 것이 느껴졌던 것. 너무나 형태와 구조가 없어지고, 희생당했다고 생각.
아스니에르는 파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 그 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 80년대쯤 되면 교외도 상당히 근대화되기 시작하여 뒤의 공장지대가 보임. 공장의 굴뚝과 거기서 나오는 연기. 아마도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라고 생각됨. 인상주의 붓보다는 매우 규칙적으로 적용되어있음. 물가를 보면, 수평으로 붓터치가 가있고, 풀은 풀이 자라나듯 붓터치. 빛이 화면 앞 중앙쯤에서 떨어지는 듯. 하이라이트가 생기니까 원칙적인 인상주의라면 희미하게 그렸어야. 그러나 물빛을 더 진하게 그려서 확실한 몸의 경계가 보여지게 됨. 물과 등 사이에서도 오히려 하얗게 하이라이트를 주어서 선이 더 뚜렷하게 나타나게 됨. 몸이 원통과 같은 입체의 형태로 분명하게 나타나게 됨. 이것은 과학적이지 않다. 인상파는 객관적으로 묘사하려고 했으므로 어느 정도는 과학적으로, 관찰에 의해서 그렸는데,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작가의 주관적인 결정이 들어갔다. 자신이 원하기 때문에 조정할 수 있는 subjective한 성격이 들어가게 됨. 경계가 확실, 형태가 더 확실하고 둥글게 나타남.
굉장히 많은 준비 작업을 함. 처음에는 훨씬 더 사실적인 그림을 그림. 훨씬 일상적인, 흔히 볼 수 있는 모습. 완성작에 조금 더 가깝게 되어있음. 스케치를 보면 붓터치를 느낄 수 있다. 훨씬 더 한가롭게 즐기는 듯 누워있음. 완성작에서는 확실한 형태가 드러남. 아무도 서로 소통이 되어있지 않음. 안정감을 주고, 일상의 한 순간이 아니라 영원한 느낌을 줌. 당시 사람들이 쇠라의 그림을 보고 이집트 적이라고 함. 순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장면이 아니라, 체계적인 시스템을 적용하여 화면이 일시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 부동적인 질서를 주려고 했음.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리듬, 디자인적인 요소가 느껴짐. 공간감, 입체감, 패턴, 색채를 살리려는 노력.
>Seurat, Sunday afternoon on La Grande Jatte, 1886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이 그림을 2년 그렸고, 그것을 위해 40점의 스케치와 20점의 소묘를 했다고 함. 크기가 크고, 테두리를 둘렀음. 보통 사람들이 여가를 즐기고 쉬는 모습은 아스니에르와 비슷하다. 옷차림을 보면 전 작품의 노동자느낌 보다도, 정장차림을 하고 패셔너블해서 중산층이라는 생각이 듦. 측면의 얼굴이 거의 대부분. 패턴화 되고 반복된 리듬감을 느끼게 되고, 전체적으로 원근을 적용시켜서 맨 앞에 있는 사람은 크고 점점 작아짐. 사람의 크기를 통해 깊은 원근감을 주는 것 같이 보임. 이런 것은 고전주의. 다비드, 점차적으로 원근의 효과를 주었던 것처럼. 모두가 정적인데, 한 소녀만 뛰어가고 있음. 측면의 얼굴 뿐 아니라 파라솔도 반복되는 움직임. 아주 전형적인 고전주의처럼 단계적으로 작아짐. 사람의 눈이 전경에서 원경 깊이로 들어가게 함. 원근의 느낌이 굉장히 강한 것도 아님. 그렇게 하려면 뒤는 훨씬 색이 흐려져야 하는데, 똑같은 강렬한 색을 썼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평면으로 보이기도 하면서, 입체로 보이기도 하는. 3차원적이면서도 2차원적인. 표면의 장식적 효과 자체는 평면으로 보인다. 순간적인 인상주의의 세계라면, 여기서는 시간이 정지한 영원하고 조화로운 세계로 변모했다고 할 수 있음.
터치도 아주 규칙적인데, 터치도 대강 1cm 정도. 화면에서 분할. 똑같은 잔디인데, 햇빛이 비치는 잔디에는 햇볕이 강하게 비치는 직사광선의 경우 오렌지색을 쓰고, 반사광선은 초록을 띤 오렌지 색을 씀. 그림자는 푸른색이나 자주색을 쓰는 등 그런 식으로 작업했음. 인상파의 무분별한 터치를 거의 기계적인 적용을 하여 굉장히 합리화시키려는 느낌을 준다. 쇠라는 당시에 굉장히 과학을 믿었던 사람. 무엇이든지 자연의 법칙으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함.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시대정신. positivism! 우리나라에서는 '실증주의' 무엇이든지 과학으로 설명가능하다는 생각에서 나옴. 모네 같으면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렸지만, 쇠라의 경우 그것을 과학적으로 분할함. 햇빛이 비칠 때와 그림자가 질 때의 색을 퍼센트로 나누어. 마치 화학실험실에서 성분을 정확하게 집어넣는 것과 비슷한 작업을 통해 완성된 것. 오래 걸릴만 하네. 결과적으로 세부적인 것에 관심이 없이, 굉장히 단순화되고 세부가 생략되어 서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고 확실한 구조와 견고한 형태로 나타나게 됨.
이것을 하기 위해서 스케치. 처음에는 인상주의에 가깝게 그렸음. 사람들을 다 빼고 잔디와 나무들만 그림.프레임을 그렸음. 목탄 스케치를 함. 흑백만 가지고 농담(tone)을 조절하여 어두운 부분, 약간 밝은 부분, 환한 부분을 연구함. 아주 견고하다. 그 다음에 붓터치로 발라가기 시작. 조금씩 광선의 색채가 완성이 되어가면서 최종.
구성 역시. 여러 가지로 볼 수 있지만, 예를 들어 나무를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다가 왼쪽으로 뻗쳐서 왼쪽 강의 보트로 연결. 보트 돛이 곡선적으로 돌아 나와서 다시 섬 쪽으로 돌아오게 함. 반대방향으로 되어 있다면 시선이 바깥으로 빠지게 될 것. 사람을 통해 다시 시선이 오른쪽으로 가도록 해서, 일종의 방향표 역할. 본 순간적인 모습이 아니라 화면의 질서와 안정감을 위해 철저하게 계산된 구도라는 것!
붓터치에 점이 있지만, 선이 아래로 내려가서 수평으로 가고 있음. 약간의 흰색 터치가 섞여있음. 팔에 흰색이 훨씬 많이 섞여있어서, 이것이 더 밝은 빛이 닿는 부분이 됨. 쇠라는 좀 신비주의였고, 나중에 그가 죽었을 때 아무도 몰랐는데,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함. 과학적, 체계적인 것을 해서 이 경우에는 '신인상주의'라는 말을 씀. 물론 인상주의 후에 나왔다고 하여 후기 인상주의라고 하지만, 쇠라의 경우 Neo-Impressionism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나머지 세 사람보다 훨씬 더 인상주의에 가깝게 그렸다는 것. 빛에 대한 관심, 그러나 인상주의와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나갔음.
>Seurat, Bridge at Courbevois, 1886
아까보다 훨씬 추상화되었음. 사람이 덜 중요해지고 전체적인 구성이 중요해짐. 다리에 굉장히 많은 선들이 나오는데, 전부 겹쳐지고 띄워져서 나옴. 황금비례와 황금분할을 적용시킴. 수학적 비례를 어떻게 함으로써 그림에서 조화를 주는가. 그랑자트 섬에서는 질서와 기하학적 구도가 덜 나타났지만, 여기서는 굉장히 명료한 체계와 엄격하고 체계적인 느낌이 난다. 선의 관계가 수학적이다? 그래서 딱딱한 것 같으면서도 무감각하지 않고 굉장히 시적인 분위기를 주는 것이 이 사람의 특징. 조화와 정적이고, 점묘, 포인트로 되어있음.
>Seurat, Pose, 1888
전부 점묘로 되어있음. 그랑자트 섬이 뒷 배경으로 그려져있고, 방에 모델이 셋 있다. 누드라는 주제는 인상주의에서 거의 쓰지 않음. 고전주의적인 주제를 다시 가져옴. 그러면서도 빛의 관심을 보임. 여기에서의 빛은 실내 광선의 빛을 적용시켰음. (cf.그랑자트 섬은 야외광선) 이 누드 하나하나에 스케치가 따로따로 되어있어서 완성되기까지 역시 1년이 걸렸다고 함. 그랑자트 섬에서는 색이 대조되었음. (ex. 빨강-노랑-초록) 그에 비해서 여기서는 색이 점차적으로 변함. 다시 삼각형 구도가 등장. 고전에서 많이 쓰는 것. 이런 식으로 앞, 뒤, 측면으로 누드를 그린 것도 고전에서 많이 하던 방식.
>Seurat, The Parade, 1889
그랑자트 섬과 비교가 됨. 아까는 대낮의 광선이었지만, 이것은 밤의 광선. 그림 맨 위에 있는 것이 가스등. 파리에는 이제 가로등이 세워졌는데, 전기가 아닌 가스등을 쓰는 야외의 불빛아래 서커스 단원들이 서커스를 하는 도중에 광고하는 모습. 무대에 선 악사들, 단장, 관람자(구경꾼)의 모습. 사람들이 거의 모두 정면으로 단순화되게 보임. 그에 비해 규칙적으로 유사하게 그려진 사람에 비해서 구경꾼들의 모자를 보면, 제각각의 형태들로 나타나고 있음. 포즈나 그랑자트 섬에서 보면 깊숙한 원근법이 나는 것에 비해서, 여기는 거의 평면으로 보임. 그래서 어떤 사람은 꼭 일본병풍 같다고 하기도.
완전히 비례에 의해서 평면적인 면이 연속적으로 나타남. 대체적으로 3:4:5의 비례를 많이 썼음. 이 당시에 쇠라의 친구가 솔본느에서 가르치고 있었던 샤를르 앙리라는 수학자. 그와 굉장히 친해서 이러한 것이 적용되었다고 생각함.
완성 전 스케치 단계. 그가 쓴 캔버스는 흰색 캔버스가 아니라, 옛날에 썼던 갈색 캔버스. 여기서도 굉장히 규칙적이지만, 뭐든지 일관적으로 처리하여 다시 최종작으로 완성되었음.
비교) 그랑자트 섬- 색은 대조되는 색이 아니라, 조금씩 점차적으로 변하는 색채로 되어 있음.
대낮의 야외광선/밤의 광선. 원근의 느낌/평면으로 가로막힌 느낌. 빨-노-파의 색 대조/유사한 색채로 연결. 이 두 그림은 상당히 대조되는 시도를 보임
>Seurat, Circus.
시스템을 어떤 식으로 적용했는가? 수평적인 선은 굉장히 조용하고 균형적인 느낌을 주는데, 올라간 선을 즐거움을, 내려간 선은 슬픔을 준다. 내려간 선은 차가운 색이 주는 느낌과 비슷. 올라가는 선은 따뜻한 색의 경우. 모든 것들이 이러한 system에서 인간의 감정을 어떻게 색채와 선의 방향과 움직임을 통해서 전달할 수 있느냐. 이것은 작가가 모든 것을 컨트롤 하는 것을 의미함.
>Seurat, 소란스러운 춤(La Chahut), 1890
다리가 모두 위로 올라가서, 즐겁고 생기 있는 느낌이 남. 기본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위로 올라가는 선. 그래서 전체적으로 생기 있는 느낌이 난다. 처음 보았을 때 시선이 위로 향하여 위를 쳐다보게 되는데, 위는 훨씬 공간이 열린 느낌이, 아래는 공간이 복잡한 느낌이 난다. 이 그림이야말로 쇠라가 그린 첫 번째 움직임이 많은 그림. 색채는 대조적인 색을 쓴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변하는 색을 씀. 다리의 각도도 모두 계산된 것.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주관'. 어떻게 결정하여 질서와 조화로 되돌아갈 것인가.
후기인상주의
인상주의 화가들은 기본적으로 객관적인objective 묘사를 하려고 함. 그러나 후기에 와서는 '작가의 주관'이 강하게 들어오는데, 그것이 쇠라에게는 질서, 구조, 고전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반 고흐의 경우에는 색채로, 고갱의 경우에는 또 다른 식으로 나타나면서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이고, 작가가 어떻게 하느냐는 자기 마음대로다. 라는 생각이 강해지던 때. 현대미술이 이때에 기본적인 방향이 잡히게 되었음. 그래서 이 시기 작가들이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이유이기도. 하나같이 고통스러운 인생을 보냈던 사람들. 그림을 잘 팔지도 못했고, 너무나 개성이 강해서 인정받지도 못했음.
>Seurat, Paul Signac, Grand Canal of Venice, 1905
쇠라가 이런 식으로 작업을 해서, 보이는 세계를 합리적으로 재구성하여 독자적인 화음과 질서를 가진 세계로 만들고, 자연을 충실하게 묘사하는 것에서 벗어나 화가의 이성이 지배적인 그림으로 나아감. 이때에 이것을 알아차린 일련의 화가들이 있었음. 그 중에 폴 시냑. 베니스의 대운하. 시냑은 쇠라와 자신이 탐구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같은 것임을 알아차림. 쇠라는 자기 그림을 떠벌리고 다닌 사람이 아닌데, 시냑은 설명하기를 굉장히 좋아해서 쇠라에서 시작한 신인상주의를 전파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 쇠라와 굉장히 비슷한데, 시냑의 경우 터치가 훨씬 크다. 쇠라는 미세한 점인데 비해, 그는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로 크게 그려져서 색채 대조가 훨씬 강하게 나타남. 나중에 시냑과 비슷한 신인상주의가 중요한 것은 화단의 중요한 인물이 되면서 대부분의 현대미술 화가들(마티스, 피카소)이 처음에 영향을 받은 것이 신인상주의. 거기의 시냑같은 사람이 젊은이들을 밀어주는 역할을 했음.
빈센트 반 고흐
멋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 네덜란드는 신교(칼뱅교)의 나라, 이 집안은 대대로 목사나 전도사가 많았다고 함. 아니면 화상. 여러 형제로 태어남. 항상 남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데,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상이 너무 높았고, 그러면서도 사랑을 갈구하여 옆에 있으면 부담스러운 사람. 처음에는 선교사도 하고, 탄광촌에서 전도사도 하고, 화랑에서 이야기도 했는데. 1880년 27세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 반 고흐가 그림을 그린 10년. 대부분 사람들이 아는 사람들은 85년부터 5년 동안의 그림. 그게 200여점 정도? 상당히 많은 양의 그림을 그렸음. 처음에 80년부터 많이 그린 것은 주로 목탄이나 크레용으로 드로잉을 많이 했음. 그는 정규 미술학교를 다니지 못하여 자기 혼자 미술학교에서 배우는 대로 독학을 했음. 열심히 드로잉을 함. 그러나 이 드로잉이 그 당시 기준의 드로잉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음. 특히 앵그르의 드로잉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서투르다. 당시 기준으로 매우 못 그린ugly 드로잉.
>Van Gogh, 땅을 파는 농부의 아내, 1882
처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소박한 배경을 많이 그렸음. 농부, 풍경.
네덜란드의 그림이 대개 이런 식. 여기에는 아직 인상파 그림이 잘 소개가 안 되어서 굉장히 어두운 그림들. 렘브란트, 할스, 도미에 류의 어두운 그림을 많이 그렸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 기독교적인 경건함을 가지고 있음. 반 고흐가 생각하기로, 종교적인 집안에서 났기 때문에 농부들의 모습이야말로 미술의 가장 심장부에 있다고 보고 농부들을 많이 그림.
>Van Gogh, Nuenen의 교회
색채는 어둡고, 드로잉이 강한 그림. 붓터치 하나하나가 거의 목탄 드로잉과 같은 느낌이 듦. 그러면서도 감정적인 그림.
>Van Gogh, 감자를 먹는 사람들, 1885
이제부터 완성된 작품이 나옴. 그것이 1885년이고, 이때에 그린 중요한 그림. 85년이 됐지만 인상파를 아직 모르고 있는 듯. 나름대로 아카데미 전통에 의해서 하나하나 스케치하고 구성해서 작업하여 자신이 나름대로 배우려는 노력을 했음. 탄광촌에 부모, 딸과 사위의 젊은 부부, 그리고 그 사이의 딸. 삼대가 감자를 저녁으로 먹는 모습. 고흐, "나는 램프 빛 아래, 땅을 판 바로 그 손으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었다." 이 당시 이 사람은 미적인 것보다도 주제에 집착하고, 밀레와 도미에와 같은 부류에 머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램프가 있고, 좁은 집.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그림이 걸려있음. 희미한 불빛이 내려와 사람들을 비쳐줌. 아이만 얼굴이 우리에게서 뒤돌아 있음. 감자에서 나오는 김이 아이의 주변을 거의 후광처럼 비춰줌. 여기에서 이 아이가 희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때 반고흐가 열심히 읽었던 것이, 스토브인이 썼던 '엉클 톰스 케빈' 굉장히 종교적인 느낌이 듦. 이러한 종교적인 느낌은 17세기 르넹이라는 형제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 평범하고 서민적인 일상생활에서 종교적인 느낌이 나는 그림들이 있음. 여기서도 농부들이 술과 빵을 먹는데, 성찬예배처럼, 그저 평범한 것이 아니라 뭔가 종교적인 느낌이 있음. 그것이 반 고흐의 초기 그림에 나타남.
cf. Le Nain 형제, 17세기, 프랑스
강조된 것이 거칠고 두터운 손. 하이라이트를 주어 손을 강조한 것을 보면 사실이 아니라, 표현주의적인 터치. 이러한 것들이 그 당시에는 거친 드로잉으로 보이게 됨. 이 그림을 그리고 1년 후인 86년에 파리로 가게 됨
>Van Gogh, Pere Tanguy, 1887
테오 반 고흐가 파리에서 화상을 하고 있었음. 테오가 형을 위해 많은 일을 해주는데, 여기에서 처음 인상파 화가들을 알게 됨. 페르낭 꼬르몽이라는 아카데믹한 화가의 스튜디오에서 약간 그림을 배우게 됨. 여기서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과 피사로를 만나서, 인상주의 색채로 전환하게 됨. 색채가 완전히 변해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서 일본 우키요에를 알게 되었음. 87년에 파리에 정착하면서 당시의 모든 경향을 흡수하던 때가 바로 이 때.
쟈포니즘
테오에게 쓴 편지에도 우키요에 이야기가 등장. 나는 일본과 같은 따뜻한 남쪽나라에 가고 싶다. 일본을 이상향으로 생각했음. 쟈포니즘의 붐이 일던 때이지만, 쟈포니즘은 아직까지도 일종의 이국취향이고 일본을 잘 알았던 것은 아님. 일종의 환상. 일본이라는 나라는 섬세하고 공예품을 잘 만들고, 게이샤가 있는데 모든 여성들은 복종적이다? 사실은 일본을 잘 모르면서 환상을 가졌던 것. 반 고흐 역시 400점의 우키요에를 테오와 함께 수집. 뻬르 땅기는 물감장수. 줄리앙 땅기가 본명. Pere는 아저씨uncle라는 의미. 작가들이 돈이 없으면 돈 대신 작품으로 많이 받았고, 특히 세잔느와 거래를 많이했음. 반 고흐의 경우 물감은 잔뜩 쓰지만 돈 대신 준 그림은 팔리지 않았으니까 문제가 되었음. 나중에 땅기가 팔게 됨.
굉장히 직접적인 초상. 완전히 정면을 보고 있음. 그러면서도 굉장히 조각적이다. 앞에 있는 땅기. 차가운 청색의 옷을 입고 있고, 뒤에는 밝고 화려한 색으로 되어있어서 원근의 느낌을 받을 수 없음. 앞으로 튀어나오는 밝은 노랑색을 쓰고 있으나, 우리의 시선이 앞으로 오지 않고 땅기로 가는 이유는 그의 얼굴 때문. 물리적인 존재가 아주 확고하게 견고하고 조각적으로 있기 때문에 그 주변이 화려해도 시선이 주인공에게 가게 됨. 특히 눈이 우키요에에 지거나 압도되지 않는 강한 존재를 보여주는 그림이 됨.
인상주의의 터치가 보임. 분할되어 있고 잔 터치. 그러나 인상주의의 터치라고 할 수가 없는 부분도 있음. 흰색은 역시 빛의 색인데, 길쭉하게 되어있고 아웃라인을 그려서 형태를 확실하게 강조하게 됨. 87년. 85년 감자먹는 사람에서 86년에 파리에서 인상주의를 배웠지만, 87년에는 이미 인상주의를 넘어선다는 것! 굉장히 주관적인, 강하고 율동감 있는 선들이 이미 이 그림에서 나타나기 시작하고, 자신의 특유한 양식과 테크닉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음. 여기서 보이는 아주 즐겁고 유쾌한 색채들이 뒤에 나와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강렬한 눈이 있어서 복잡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인물이 전체를 장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cf. 우키요에
400점을 모으고, 많이 카피함. 히로시게의 목판화를 카피하여 한문을 옮겨 쓰려는 노력까지.
>Van Gogh, Fishing boat on the beach, 1888
88년 남부 프랑스의 아를르로 가게 됨, 그 곳을 가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따뜻한 남쪽나라에의 동경. 일본 대신 아를르로 간 것. 고흐의 꿈, 작가들이 서로 작업할 수 있는 그들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싶어했음. 그가 함께 작업하고 싶었던 사람이 폴 고갱, 에밀 베르나르 등 몇몇. 테오가 말하길, 그곳은 물가가 파리보다 싸니까 가서 생활비를 보내주겠다고 하고 고갱을 구슬려서 거기서 그림을 보내오면 거래하여 생활비를 대주겠다고 약속하여 반 고흐가 간 후에 처음으로 간 사람이 폴 고갱이 되었음. 두 사람이 2~3개월을 같이 지내는데, 미술사에서 개성 강한 두 사람이 잘 맞지 않았던 것. 12월의 어느 날, 결국 고갱이 화를 내고 파리로 돌아가겠다고 하며 파리로 돌아가겠다고 하여, 완전히 절망에 빠져서 첫 번째 발작을 일으키게 됨, 불안정한 상태. 반 고흐가 왜 죽었을까? 실제로 이 집안에 정신발작을 일으킨 사람이 많았음. 귓불을 면도칼로 잘라서 그것을 싸서 자기와 한 때 살던 암스테르담의 매춘부에게 우편으로 부침. 그의 정신병은 결국 1881년 후에는 생 레미의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물론 언젠가 죽을 것을 알았지만 잘 지내다가, 테오가 갑자기 결혼할 것이라는 전보를 받음. 이것이 그를 무너뜨리는 요인이 되었고, 90년에 권총자살을 하고 이틀 후에 죽었음. 그리고 테오는 형이 죽은 후 6개월 만에 죽음.
아를르는 고갱이 오기 전까지 그가 가장 행복했던 시기. 갈등과 같은 것은 나타나지 않고, 조용하고 평화롭고 패턴화 된 느낌이 보임. 인상주의가 아님. 평면화로 보이게 된다. 인상주의 터치는 보이지 않고, 평면화와 윤곽선이 일본판화의 영향. 뒤에 있는 터치는 인상주의. 두 가지 터치. 인상주의적인 하늘의 터치, 보트에는 일본 판화. 나름대로 그것이 굉장히 조화가 됨. 그것을 그렸음.
>Van Gogh, Peach Blossom, 1888
파리는 항상 약간 어두컴컴하고 해가 많이 나지 않지만, 남부 프랑스에 와서 햇빛을 받고 황홀감을 느낌. 광선이 하나의 즐거움이 됨. 기본적으로 흰색의 붓으로 하늘에 흩어지는 순수한 풍경의 느낌. 감각에 도취된, 꽃이 만발하는 모습. 여기에는 질서가 하나도 없이 그저 취하는 느낌이 나게 됨. 이것이 초기에 그가 그렸던 아를르의 그림.
>Van Gogh, Sunflower, 1888
고갱이 오게 되자, 고갱이 머무를 방을 단장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 해바라기. 윤곽선, 평면의 색채는 더 이상 인상주의가 아님. 여기에서도 반 고흐 특유의 율동적인 선이 강조되고 있다. 이것이 가장 전성기의 독창적인 작품으로 나타남. 실제로 해바라기는 반 고흐에게 어떤 행복을 상징하는 꽃이었음. 정열의 노란색? 사실 이 그림을 보면 이것이 정말 행복과 정열만이 가득한 색인가? 그렇지도 않은 것이, 해바라기를 자세히 보면 꽃이 다 시든 느낌이 남. 해바라기가 시들면 중앙의 씨 때문에 거칠게 됨. 그래서 이 그림에서 행복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음.
15강
2010년 4월 26일 월요일
오후 1:58
<<15강 .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4월 26일 월요일 오후 2:00
Ppt제목 후기인상주의와 상징주의
폴 시냑, grand canal of venice, 1905
고갱의 등장
고갱을 반 고흐가 아를르에 불러서 ~~
해바라기
고갱의 방을 장식하기 위해 고흐가 그렸다.
Van gogh, 반 고흐의 의자, 반 고흐, 고갱의의자, 둘다1888
정물화가 의자 이상이라고 생각되고, 의자의 주인을 시사하는 그림.
차이가 나는것,
전자
선이 직선
선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는 엇갈리는 선.
놓여있는 물건도 반고흐가 애용하는 파이프와 담배쌈지.
후자
선이 엘레간트, 곡선을 많이 사용했고,
여기에는 책과 촛부르 뒤에는 등불이 있고,
전자는 자전적 요소, 뒤에는 고갱..
오른쪽 - 훨씬 지적인 요소, 촛불 - 상징적인 요소가 많다. 훨씬 더 상징성을 띠었다.
앞은 단순 덜 세련됨
결국 무슨얘기냐면,
고갱은 상상력을 중시해서, 고갱과 반고흐의 미술 개념의 차이를 보여준다.
그때만 해도 고갱이 나이가 더 있었고, 인정받았엇기 때문에, 충고하길,
너는 왜 눈에 보이는 것만 그리느냐, 상상해서 그려라,
반고흐는 일기나 편지로.. 고갱은 나한테 그러는데 난 절대 안그럴거야. 밀레, 이스라엘리(네덜란드사람)처럼 할거라고. 고흐는 항상 작품의 영감을 주는 대상이 눈앞에 있어야 한다.
반고흐의 그림을 보면 자신의 의자, 신던 구두, 다니던 카페, 침실 이렇게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 연결이 되는 대상이나 자연 앞에서 가장 그림을 잘 그렸던 것이다. 그런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반면 고갱은 드가를 좋아하고, 고흐는 밀레를 좋아해서 서로 개념이 다르다. 서로 싸울수밖에 없다. 여기 보면 그 대조가 보여진다.
NIGHT CAFE, 1888
잘 알려진 그림인데, 이쯤 되면 인상파라고 할 수가 없다. 전혀 인상파의 작은 붓터치는 사라져버리고, 굉장히 강렬한 빨강 초록이 쓰여진것이다.
아를르의 카페. 시골, 이 시골에 이런 강렬한 빛의 대조가 있는 카페가 있엇을까? 없다.
이유 - 이 카페에서 느기는 감정을 더 강렬하게 표현하려고.
고흐 쓰길 - 인간의 상태를 그리려고 했다. 초록색은 독이 든것같은 빨강. 빨강은 열병과 같은 빨강. 나는 여기서 일생을 망치거나 버죄를 저지를 수 있는 악마의 욕망과도 같은 시골 카페의 분위기를 나타내고 싶다. 이 그림을 집세 대신 주었다. 전반적으로 보여지는 분위기는 억눌린 우울한 분위기이고, 원근법은 거칠고 서투른것처럼 보이고, 램프광도, 실제로 이런것이 아니라 훨씬 과장된 크기의 주관적인 것이다.
쇠라의 주관성이 구성과 질서에서 나타난다면, 고흐는 색채로서 자신의 주관을 나타내려 했다.
색채가 훨씬 두텁게 발라지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자화상 1888-1889 4점
자화상 30여점.
- 모델을 낼 돈이 없어서 그린것으로 생각된다.
- 귀를 자르고 얼마 되지 않은 것
- 점점 89년것을 보면 의사가 이걸 보더니 거의 증세가 나타난다길래..ㅋㅋ
- 선이 굉장히 리듬감, 길게길게 가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선이 그림에서 가장 가는 부분이 눈. 슬픈 눈에 시선이 집중된다.
- 자화상을 통해서 원래 네덜란드에서 렘브란트같은 사람들이 많이 그렸는데, 뒷부분은 열정에 찬 붓터치 - 전체 화면이 강렬한, 구불거리는 선과 리듬감같은것이 점점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자화상에서.
1889 별이 빛나는 밤
- 실제 그림은 1미터정도? 병을 얻어 생 레미에서 투병중에 그린 것
- 이사람이 아픈 다음에 그린 그림은 파랑색, 초록색이 많이 사용된다. 초록 파랑이 빨강 노랑보다 많이 쓰인다. 정신이 이상한 이유는, 화면에 가득한 율동감때문에 바로 어저께 그린것같은. 그 열정을 나도 느낄수있을것같고 생생함니 느겨지는데, 실은 이 그림을 즉석에서 그린 것이 아니라 상당히 오래 구상을 했다. 스케치도 있다. 이 그림은 다시말해 상당히 고려끝에 나온것이다.
- 상상하는 예술가 - 불을 질러서 너무너무 기분이 좋아 집에 와서 그림으로 그린다 - 이런거는 있을수가 없다. 예술이라는 것은 그렇게 충동적 즉흥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조절과 균형 갖가지가 계싼되서 구성되어서 나오는 것이다.
- 사이프러스가 맨앞에 있어서 타오르는 것 같은데, 너무 강하니까, 이것에 대조되는 선이 완만하게 구불대는 산능선이다. 그럼에도 나무가 너무 세기 때문에 이것을 가로지르는 것이 하늘의 선이다. 이 강한 수직을 수평에 의해 균형을 이루고, 그래도 세니까 달을 놓는다.
- 모든것은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사실은 이 그림의 중심이 바로 교회이다. 모든 것이 움직이는데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보일 듯 말듯 존재하는 이 교회이다.
당시 무슨생각을 했을까?
- 나에게 있어서 청색은 천상적인 색채HEAVENLY 노랑은 세속적인 아름다움을 주는 색채이다. 여기 있는 색은 두가지 중심으로 되어있고, 달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아침 새벽에 들어왔다 나오는, 부활과 재생을 의미하는 색이고, 사이프러스 나무도 상록수기 때문에 유럽에서 묘지에 많이 쓰는 나무. 그러면 여기 있는 별들도, - 죽으면 별이 된다는. 그런식으로 생각하자면 이 그림은 생과 사에 대한 많은 시사점이 있는 그림으로 생각할수도 있다. 삶과 죽음을 생각하면서 그린 상징주의적 그림으로 볼수도 있다는거지.
폴 고갱
고갱의 여행 행로
고갱의 부모는 페루로 이민을 갔다. 고갱은 선원이 되어 배를 타고 나중에 증권브로커를 했다. 문제가 있어서 시장이 붕괴되니깐 그림으로 전업화가. 처음에는 브루통이라는 데를 가서 부인과 떨어져 산다. 부인은 덴마크여자. 성공하면 같이 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마지막.
그리고 이 시기는 제국주의 시기. 타히티같은데는 이미 프랑스 식민지, 그래서 고갱은 타히티는 파라다이스적인 생활을 상상하며 갔고, 한번 왔다 갔다가, 근처 마르키사스 군도에서 외로이 죽는다.
시대가 제국주의 시대. 이국적인 문화, 문화와 등진곳을 향해 갔던 사람. 시대적 인물.
파리, 아를르, 마르세이유, 몰펠리에, 루앙, 노르망디, 브리타니,퐁타벤 ,PONT AVEN -
처음엔 퐁타벤이 물가가 싸서 거기서 그린다
그림을모으다가, 피사로와 같이 일요화가 하다가, 인상파와 그리다가, 나중엔 전업화가로.
보헤미안적인 사람. 자유스럽고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사람같은데, 세련된 감각주의자. 그 반면에 허영심도 많고, 남을 칭찬하는데에 인색하고, 자기를 굉장히 스타화하려는 경향이 강했던 것도 강한 사람.
고갱, 돼지 치는 사람이 있는 풍경, 1888
- 초기작품, 여기보면 인상파의 터치가 있지만, 훨씬 평면적인 색채가 많이 보여지고, 아직까지 인상파의 자연에 뿌리두고 그리는 것은 인상파적, BUT색채조절을 해서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다르다.
설교 후의 환영, 1888
- 아까와 달리 분할터치가 없어지고 평면적, 색채도 강렬해진다.
- 소제목은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 그래서 이것은 구약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야곱이 씨름하다 보니까 그사람이 천사라는 것을 알게 되는 이야기이다. 신부님이 옆에 있는데, 옆에 여자들은 부르통의 여인들. 의상이 아주 이국적으로 보여진다. 민속의상. 일요일 교회에 갈때 특별히 차려입은 모습이다.
- 아마도 그래서 이것은 신부님이 야곱과 천사의 이야기를 하는데, 이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그것이 여기에 그려졌다라고 할 수 있다. 빨강은 실제 세계가 아니라 상상의 세계이며, 그를 위해 이 빨간 색채라고 할 수 있다.
- 사과나무가 가로지르는데, 이런 구성은 일본판화에서 나온다. 이런 씨름이 일본 우키요에중 스모 그림에 있다. 그것을 영향받아서 그렸다. 호쿠사이의 그림. 시점도 굉장히 일본판화적.
- 굉장히 강렬한 색채대조(빨강과 청색과 흰색의 대조, 구불구불한 선이 아주 리드미컬하게 보인다.
- 결국 종교적으로 경건하면서 복장에서 풍기는 신비스러운 분위기 - 보여지는 세게보다 작가의 상상력이 우선한다고 생각했다. 인상주의는 이런 내면의 신비주의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인상주의에서 벗어나겠다고 함.
- 당시 에밀 베르나르란 화가가 이지역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이 그림은 호밀을 추수하는 장면. - 이 아웃라인 그리는 방식이 고갱 그림에서 나온다. 고갱이 내 양식을 훔쳤다고 기분나빠한다. 여튼 훔치더라도 훨씬 더 멋있게 사용한다면 처음 쓴 사람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 강한 색채대비, 두꺼운 윤곽선, 구불부굴한 선과 신비주의적 분위기에서 인상주의와 결별함을 볼 수 있다.
1889 자화상
- 후광이 있는 자화상 이란 제목.
- 바로 조금전의 양식이 완전히 강렬히. 노랑 빨강, 파랑, 아름다운 곡선을 사용해서 고갱의 얼굴만 빼면 완전히 평면 - 이것이 마티스피카소 등 후대사람에게 완전 영향을 주는 것이다. 고갱은 그래서 이걸 종합주의라고 명명. SYNTHESISM - 종합주의의 특징은 - 클로이조네 : 보석을 만들때 금속으로 아웃라인하고 색을 입혀서 박아넣는 - 비녀만들때 색채우는거 - 그런 양식이 아주 특징적인 양식이다.
- 자신을 종합주의의 성인으로써 그린 그림. 그래서 이런 그림을 그리다가
LA ORANA MARIA, WE HAIL THERE, MARIA, 1898
- 고흐에게 간 것도 여비를 모으기 위해서 간것 - 그러나 따분하고 흥분만 해서 도망옴- 결국 1891년 타히티로 갔다. 그런데 타히티에 갔더니 꿈꾸던 원시적인 파라다이스가 아니다. 이미 전깃불,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 끊임없이 말썽 - 식민지관리들과 굉장히 문제. 나무 오두막집을 사서 숲에서 과일따먹고 타히티여인과 살고 하면서 타히티어를 배웠는데, 나중에는 돈이 떨어져서 덴마크 와이프에게 돈보내달라. 와이프는 거절 그무렵에 스무살난 딸이 죽는다. 이때 자살을 시도.
- 첫번째 타히티에는 91-93년 사이. 93-95년 불란서에 있었다. 전시를 해서 작품을 팔아 돈을 모으려고 왔다. 삼촌의 유산을 받으려고 왔다. 누구랑 다녔냐면 자바의 원주민 여인과 다닌다. 그여자는 또 원숭이 한마리를 데리고 다녔다. 기이한 커플이 사람들 눈을 끌수밖에 없다. 그래서 - 선원들과 싸움이 붙어서 돈뜯기고 여자도 돈갖고 튐. 그림은 하나도 안팔림. 이때쯤 되면 이사람은 이미 유명한 고갱이 되어있다.
- 그래서 이 그림은 타히티 초기의 작품. - 타히티어로 우리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타히티여자지만 완전히 기독교 문맥으로 해석될수밖에 없고(아줌마는후광에아이도 후광) 날개 달고 있고 천사들.
- 그럼에도 풍요로운 색채의 효과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아름다운 중간색 보라 핑크 - 이런것이 많이 보인다. 타피스트리같은 그런 효과를 준다. 사람들이 반고흐를 색채화가라고 하지만, 그사람은 SOPHISTICATION에는 약했고, 사실 고갱은 프랑스의 감각적인 섬세다양한 색채를 정말 잘 썼다.
- 고갱이 노아 노아 라는 책을 썼다. 향기로운 냄새 라는 뜻이다. 행복하게 있다는 얘기.
- PRIMITIVITISM - 원시주의가 굉장히 화제가 된다.
- Primitive라는 말은 원시적이란 것보다, 전통있는 것이라도 서양것과는 다른것이라는 의미로.
-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등의, 이런 조각 등에 많이 영향을 받는다.
1892 the spirit of death watching
- 실제경험
- 고갱이 어느날 집에 왔더니 고갱의 여자가 불을 꺼놓고 무서워하고있더라. 미신. 여기 보여지는 이 사람이 확실치는 않지만, 신, 죽음의 신, 죽음의 영령 - 저승사자같은 것인지, 아니면 고갱을 나타내는 것인지 여튼 후드는 신비스런존재를 나타냄. 여성의 표정 불안 공포의 느낌을 전달하는 것이고, 몸은 굉장히 둥글게 표현되어있지만 밑의 시트는 굉장히 이차원적, 장식적 패턴. 장식적 패턴을 분위기를 전달하는데에 사용.
- 이것은 머릿속의 인물일지도. 어쨌건 시각적 이미지로 나타나고 있다.
1896년 성탄
-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것.
- 고갱이 타히티여자랑 살다가 아이가 사산. 크리스마스쯤. 처음에는 고갱의 죽은 아이를 데려가는 죽음의 신일수도 있지만, 뒤에는 마구간이 있어서, 예수그리스도릐 성탄도 된다. 아기와 여자가 광배가 있으니깐 서양의 미술 기독교의 문맥에서 이것을 그린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정말로 서양문명을 던지고 살고싶어서 왔을까 싶다. 아니라면 파리의 고객을 염두에 두고 그린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가능하다.
- 아주 고갱을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 그당시만 해도 인종에 관심이 많았다. 골상학. 무거울수록 머리가 좋다 유럽인이 최고로 머리가 좋고 - 그때 샘플은 스무개정도밖에. Eugenic theory - 미개지의 사람들은 타고날때부터 열등 - 서양문명의 관심거리가 된다. 이러다가 일본이 강국이 되어 - 일본사람들은 두개골이 영국사람과 굉장히 비슷하다 ㅋㅋㅋ이런식의이야기. Social darwinism 적자생존 - 제국주의로 팽창하면서 그런 논리가 지배하던 때 . 고갱이 그린 것도 타히티- 피부가 까만 여자들이 섹시하다거나 서양남자들의 그런 엉뚱한 판타지라고 보기도 한다.
- 반고흐와 달리 굉장히 상징주의적이고 지적인 그림이다.
1898 the white horse
- 무르익은 녹음 속의 빨간 말, 모더니즘적인 자의적 색채적용 - 그림은 그림 자체의 구성원리에 의해서 이세상과 달라도 그 속에 그색을 그려넣을 수 있다.
Gauguin be in love, you'll be happy 1889
- 그림이 크고 작은 조합으로 이루어져있다.
- 오른족 위가 고갱의 얼굴 어린이들이 손가락을 입에 집어넣고 있고, 한소으로 여자의 팔을 꼭 잡고 있고, 아래에는 여우, 그위에는 늙은 여인이 양손을 얼굴에 대고 있ㄷ. 뿌리치려는 여인의 손을 잡고 사랑하라, 그러면 행복할것이다. 라고. 말하는듯.
- 여우는 인디언의 심술궂음. 늙은 여인을 - 페루에선 사람을 미이라로 만들어 집어넣을때 앉은 자세로 넣는다. 페루의 미이라와 같을 뿐 아니라, 늙은 노년을 상징하는. 수수께끼같은 목판이지만, 굉장히 거칠게 깎고, 몸이 여기저기에 배열되어있고, 뭔가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이 표출된듯한 파격성이 보인다.
Where are we from, what we are where are we going? 1897
- 딸이 독감으로 죽고, 덴마크부인이 돈안부침,
- 고갱 자살시도, 살긴 살았는데 위가 완전히 망가짐. 세폭 제단화 그림
-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철학적인 제목.
- 여기에서 사람들은 오른쪽을 유년기, 가운데를 청년기, 왼쪽이 노년기.
- 인생의 여정을 나타내는 그림이고, 사람을 영혼의 여행. 배경이 푸른색으로 차있어서, 시간이 정지된 공간을 의미한다. 어린아이 두 여인이 있고, 가운데엔 과일을 따는 여인의 모습, 타히티의 조각.
- 여러가지 해석이 많은 중요한 작품이다. 인생을 그렇게 그리는 것이 이시기 유행이다. 인류의 전개과정, 인생, 이런것이 당시 분위기.
- 결국은 고갱이 그런식으로 하다가 결국 혼자 1903년에 외롭게 죽는다.
세잔
세잔은 아버지가 은행가. 재산을 상속받아서 적어도 팔기 위해 그림을 그릴 필요는 없다. 자수성가한 아버지가 세잔을 보면 뭐라 생각할까. 세잔의 엑스 앙 프로방스 - 아를르에서 멀지 않은 남부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이때 세잔의 친구가 에밀 졸라. 에밀졸라가 먼저 파리 상경, 마리의 그림을 두둔하는 글을 쓰고 목로주점으로 유명해짐. 세잔을 올라오라고 종용하는 편지도 씀.
Masterpiece라는 소설을 씀. 화가가 그림을 인정을 못받는 사람인데 한 작품을 완성하고 자살했는데, 그걸 보면 꼭 세잔같은 생각이 든다. 졸라에게 얘기는 하지 않고 엑상프로방스로 돌아와서 20년동안 그림을 그렸고, 생 빅투아르 산 같은걸 그렸다.
Uncle dominic, 1865
- 세잔은 처음에 그림을 잘 못그렸던 것 같다. 이사람은 재주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잔이 주는 교훈은 - 추구하는 것을 찾으려고 끈질기게 노력, 실패한 화가라고 생각 끝까지 했지만, 많은 새로운 것이 제시되었다.
- 하지만 초기그림을 보면 무겁고 거칠고 엄숙한 그림을 그렸고, 물감을 두껍게 그려서, 편한 느낌을 주고, 장례식 그림, 납치,
납치, 1867
- 왜곡된, 서투른 바로크적인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회의적으로 생각했다.
Modern olympia 18-- - ----
여기서 벗어나거 1871년에 파리로 가서 73년 제1회 인상파전에 출품하면서 일상주의로
16강결강
2010년 5월 5일 수요일
오후 7:40
<<VORC017.WMA>>
4/28
>Modern Olympia, 1872-73
세잔느가 그린 모던 올랭피아. 마네의 그림에서 시작되었음. 올랭피아가 침대 위에 있고 흑인 하녀가 시트를 벗기고, 꽃이 있고, 앞에 앉은 사람이 고갱이라고 생각됨. 강아지도 있음. 모자를 벗은 얼굴은 자신의 얼굴. 색이 굉장히 밝아져서 파리에 와서 인상파를 배움. 붓터치가 훨씬 갈라져서 나오게 됨. 인상주의로 74년 전시에 참석함. 마네나 쿠르베의 경우 자신의 주관을 내세워서 시대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줬다면 여기서는 context문맥이 조금 달라졌음. 고갱은 옷을 입고 있고, 에로틱한 환상을 보여주는, 화가의 심리적인 마음의 상태가 투영되었다고 볼 수도 있음. 누드를 못그렸다고 함. 여성의 누드를 똑바로 보고 그릴 수가 없었던 사라. 그래서 이후에 나오는 누드도 중성적인 누드로 나감. 여성에 대한 두려움이 분명히 있었던 사람. 결혼을 하여 아이도 있었다고 하지만, 거의 함께 산적이 없었다고 함. 자신의 심리적인 투영. 실제 그림 자체는 마네의 올랭피아에서 유래된 그림.
>하우스 오브
다시 엑상 프로방스로 돌아가기 전까지 인상주의 시대. 목을 멘 사람의 집. 제목도 괴기스러움. 인상파 전시에 출품했던 작품. 피사로의 도움. 빛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서, 빛이 환하게 비쳐지는 것이 보인다. 인상파에 CKADUGot지만 인상주의와 다른점은 섬세한 모네와 같은 것을 혐오했다고 함. 굉장한 견고성이 느껴진다. 모네나 르노와르의 경우 햇빛이 비치면 윤곽선이 보이지 않게 눈부시게 처리되어야, 그러나 구조와 견고성을 잃어버리고 싶어하지 않았음. 아웃라인 치는 등. 조형성에 관심이 많았음. 초기의 강하고 무거운 색에서 변하여 세밀하고 작은 붓터치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광선보다 조형성이 앞서고, 전체의 강한 구성의 느낌을 준다. 완전한 대칭이 아니고 지붕이 강한 어두운 형태에 비해서 대조되는 형태를 만듦. 구성의 대조, 대립, 대칭관계를 굉장히 강조했음. 그러면서도 세잔느의 그림을 보면 편안하게 활짝 퍼지는 그림이 없음. 좁은 통로, 복잡하고 간접적으로 빠지는 도로 등이 나옴.
임파스토. 두꺼운 물감을 툭툭 바르는 것이 집의 벽 처리에 보임. 붓보다는 팔레트 나이프로 칠해서 구조 뿐 아니라 질감 면에서도 굉장한 견고성을 보여주는 작품.
>still life with commode, 1887
졸라의 문제 때문에 결국 다시 자기가 태어나 자랐던 엑상 프로방스로 돌아갔음. 세잔느는 거의 전설과 같이 매일 아침 생 빅토와르 산(몽상 빅토와르)에 배낭을 메고 가서 그림을 그리거나, 날씨가 나쁠 때는 집에서 정물을 그렸음.
정물. 이 사람이 진정한 인상파라면 빨리 보고 끝내야 하지만, 하나를 끝내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렸음. 사과가 썩어 없어지니까, 대용의 물건을 가지고 그렸다고 함. 몇 달씩 그리니까 앉은 자리가 고정되지 않음. 조금씩 자리를 움직여서 그렸음. 처음에는 문제가 없으나 시점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음. 탁자의 시작과 끝 모서리가 맞지 않는 등. 대상들 하나하나가 다 다른 시점으로 본 것들. 테이블보도 치켜 세워져있는 것처럼, 원근법이 저렇게 보일 수가 없음. 대부분의 항아리도 위에서 본 것과 앞에서 본 것이 섞여 나타남. 물건 하나를 그릴 때도 앞에 있고 멀리 있는 것을 생각하여 그렸음. 뒤에 있는 게 안 보이니까 둘 다 보이게 하려고 치켜 올림. 3차원의 깊이가 2차원의 평면으로 전환되었는데, 어떤 것은 2차원이고 어떤 것은 3차원으로 남아있어서, 그 사이의 긴장감이 나타나게 됨. 기본적으로 옛날식의 교육을 받아서피카소 평면을 주면서도 깊이를 주려고 노력했음. 그러한 것이 겹겹이 이 작품에서 나타남.
코모드=찬장. 찬장이 있는 정물. 기본적으로 세잔느의 시점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게 되어있음.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점은 공간을 한정시킬 수 있음.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면 넓게 설정되어 컨트롤이 힘듦. 모든 중심은 항상 중앙이 되어, 중앙집중적. 흥미로운 많은 것들이 중앙에 있음. 이러한 것은 다시 고전으로 돌아가는 것. 안정되고 한정된 공간의 느낌이 있고, 그 중앙에 가장 흥미로운 형태와 색채들이 모여있음. 주변에는 직선적인 형태가, 가운데에는 곡선적인 형태가 많음. 우연하면서도, 상당한 배치의 노력이 아주 강하게 들어간 작품. 테이블보는 굉장히 복잡한 형태이고, 이 정물의 구성에서 가장 이질적인 형태. 산과 같은 볼륨감을 가지고 있다. 엄청난 구조를 보여주는 것. 묘사적인 테이블보보다 구조 자체가 산과 같은 구조를 느끼게 함.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의 대조, 대비가 우연하게 보이는 것 같은 정물에 아주 질서가 있음,
>사과와 오렌지, 1899
굉장히 장황한 것이 테이블보. 묘사라기보다 구조적. 뒤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 치켜 올라갔음. 여기에서 화려한 색으로 되어있고, 앞에 있는 것보다 뒤에 있는 사과들은 더 작아야 함. 큰 것들이 앞에 있는데, 작아보이는 사과도 있음. 같은 위치에 있으니까 앞에 있는 것도 뒤에 있는 것처럼 보임. 사과 등의 형태가 아주 사실적인 형태보다, 기하학적인 원형과 원주형으로 보임. 모든 것이 굉장히 건축적. 샤르댕의 굉장히 섬세하고 질감, 색채를 구사한 것에 비해서 세잔의 사과는 그러한 것도 살리면서 구조와 평면화된 색채까지 모두 다 살리려는 노력이 강했음. 이것이 그에게 매우 중요한 과업이었음. 입체(3차원)와 평면(2차원) 둘 다 살리려고 노력했고, 순간적인 시각과 밑에 깔린 영원한 구조적인 것이 팽팽하게 공존함. 우연하게 큰 그룹과 작은 그룹, 안정과 불안정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음.
>큐피드가 있는 정물, 1895
높은 데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치켜 올라가는 구도. 어떻게 보면 일본 판화에서 많이 나왔음. 그렇게 보기에는 큐피드가 너무 커보임. 실제 세잔느가 죽은 후에 그 방에 큐피드가 있었다고 함. 큐피드와 사과의 구조를 비교해보면, 여기서는 큐피드가 지나치게 크게 그려졌다. 당시의 미술가들이 사용한 석고 큐피드가 이렇지 않은데, 그의 그림에서는 비례가 과장되었다. 원래 그림대로 하면 61cm가 되는데, 실제 큐피드의 비례를 맞춰보면 46cm 정도로 그려야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강조했음. 인물의 대신으로 생각하는데, 가장 색채가 없는 것이 큐피드이고 가장 화려한 색채를 가진 것이 사과. 큐피드는 몸이 정면이 아니라, 상당히 많이 틀어서 서있음.
각도가 굉장히 복잡함. 탁자, 석고상, 사과, 마룻바닥에 세잔느가 그린 캔버스가 놓여있음. 화실에서 그린 그림. 여기에서 보면 바닥이 탁자보다 훨씬 아래에 있어야 하는데, 탁자와 거의 같이 서있고 연결시켜서 마루가 애매하게 처리되어 있고, 뒷면이 경사진 것처럼 보임. 공간이 애매모호하다. 이미 정물을 그린 그림이 놓여있음. 사과를 그린 그림. 탁자에 있는 양파. 양파가 마룻바닥에 놓인 정물에 그대로 연결되어 있음. 양파와 정물이 원근이 상당히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결되어 보임. 공간이 굉장히 압축되어 나타남. 양파와 캔버스가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리가 있는 것. 강렬한 색이 앞에 치중되어 있고, 점점 희미해지고. 찬색이 뒤로 가고 빨간색이 앞으로 가니까, 훨씬 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파란 사과가 더 커서 앞에 있는 것처럼 보임. 뒤의 사과와 앞의 사과의 원근법이 애매하게 없어져서 굉장히 평면화되어 보이게 됨. 이러한 것들이 어떻게 생겼을까?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당히 명백함. 2차원과 3차원, 순간성과 영원성을 양립시키려는 노력. 원형의 구조??을 하다보니까 이러한 작업이 나오게 되었음. 피카소와 마티스에 가면 원근법을 완전히 없애는 추상 쪽으로 나아갔음. 그러한 면에서 세잔느가 상당히 과도적.
cf. 18세기 샤르댕이 그린 사과
사실적인 묘사. 원근법과 빛에 의해 묘사했음. 세잔은 아웃라인을 주어 사과를 강조했음. 사과의 뒤는 보이지 않아야하는데, 밝은 색을 칠해서 뒤에있는 것을 다 치켜올리는 것처럼 보이게 됨.
>bay from l'estaque, 1886
남부 프랑스 아를르, 그 옆에 프로방스, 마르세유. rm 옆에 작은 레스탁이라는 곳이 있었음. 나중에 피카소와 브라크가 여기에 와스 그림. 앞에 있고 뒤에있는 원근법이 형성됨. 밝은 노란색이 파란색보다 잎에 있는 것 같아서 3차원의 거리감이 생겼음. 파란색 같은 것이 평면으로 그려져있지만 노란색이 앞서서 원근법에 따라 바다가 뒤에 있음을 알게 됨. 이러한 형태가 인상파와 같지 않고 대담하게 넓은 면으로 맣이 그려짐. 형태가 인상파처럼 광선과 분위기에 의해 완전히 해체 되지 않음. 앞에 있는 가장자리가 입방체적인 색채로 나타나게 됨. 이때에 세잔느가 한 말, "나는 이 세상을 원통, 원뿔, 구로 보고싶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그린 그림은 존재하지 않음. 그의 말을 정작 실현한 사람은 피카소. 기하학적 형태로 집을 그리고. 그러나 세잔느는 과격하게 보이는 세상에서 떠날 수 없음. 젊었을 때 인상주의를 하며 자라서, 이 세상에서 과감하게 변화를 가져올 수 없었고, 말만 그렇게 했던 것. 작가의 말과 글과 그림에서 괴리가 있기도 함. 세잔느의 경우도 실현되지 못한 케이스.
>Mt. St. victoire, 1886-88
완전히 돌산이고 나무가 거의 없음. 세잔느가 이 산을 죽을 때까지 20년을 그림. 이 산은 그냥 산이 아니고, 그에게는 거의 물신(패티쉬). 상징적이고, 자신을 지탱해주는 것이었음. 여기서 산을 그리면 대강 거리감이 100m는 되어 보임. 지평선이 보이고, 산이 보이므로. 사진을 찍었을 때 보이는 거리감에 따르면,/ 아직도 거리감이 상당히 남아있어서, 앞에 있는 나무 때문에 원근을 느끼게 됨. 나무를 설정하니까 화가가 그 위치에 서있는 느낌이 남. 나무가 없었더라면 원근이 애매할 수 있다. 나무에서부터 집을 지나 산이 보임. 거리감, 3차원의 공간이 설정되게 됨.
그러나 나뭇가지와 파란 잎이 마치 바로 산 위에 있는 것처럼 보임. 산 바로 위에 나뭇가지가 있는 것 같음. 오히려 산이 희미하게 그려져있으니까, 훨씬 더 원근의 느낌이 남. 희미하게 그리지 않고 아웃라인을 통해 강조했음. 거리감??. 어떻게 보aus 2차원으로, 어떻게 보면 3차원으로 보임. 공간 역시 탁 트여진 공간을 그리지 않고, 굉장히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서 그렸음. 결국 산이라는 것은 멀리서도 보이고, 가까운데서도 보이는 식으로 그려져있음. 그가 그린 것은 사진에서 보는 사실적인 산의 모습이 아니라, 어떠한 구조를 그렸고, 색채로서 구조, 거리감을 표현하고자. 순간적인 자연을 표현했지만, 아래에 깔린 구조를 표현함. 아직까지 순간의 느낌을 가지는 것은 나뭇가지가 변화가 많아서 순간적으로 흔들린다는 느낌을 받음
>1897
순간의 느낌이 없어짐. 나뭇가지가 없어지고, 우리가 보는 것은 웅장하면서 완전히 부동적인 전체의 형태가 들어오게 됨. 쇠라와 같은 확신은 없었음. 확신을 가지고 구조를 적용시켰음. 항상 실패를 거듭하면서, 인상주의를 미술관의 그림처럼 견고하게, 푸생과 같이 고전주의의 견고함으로 그리고 싶다고 함. 이 쯤 되면 특정한 시간대의 순간적인 느낌이 사라지고, 광선이 지속적이고 일관된 것으로 바뀜. 색면을 보면, 붓터치가 일관적으로 변하게 되었음. 붓을 넓적하게 해서 발라감. 그 전에는 훨씬 더 잔 붓터치로 순간을 묘사했다면, 여기서는 턱턱 바르는. 사각형의 기하학적인 형태같이 보이게 됨. 면의 연속으로 그리게 되었음. 결국 외형적인 모습을 그리기 보다는 본질을 그리려고 했음.
>1906
그가 죽는 해에 그린 생 빅토와르 산. 완전히 터치가 아까 보던 것과 같이 되어ㅇ. 모든 것은 면으로 연결되어 있고, 면 하나가 색채도, 광선도, 구조도 표현하게 됨. 촉각적, 시각적인 것과 구조가 합쳐져있음. 이것이 그의 산. 오래 볼 수 있는 절대적 안정감과 변치 않는 구조, 그러면서도 생생한 순간의 느낌이 전달됨. 모네는 자연을 순간적인 것으로 이해한 것에 반해, 지적으로 이해했음. "모네는 눈 밖에 없다. 그런데 그 얼마나 대단한 눈인가." 자신은 머리로. 그렇다고 해서 세잔느가 자신감이 없었고,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죽었음
cf. Durand, study of nature, vermont
미국의 허드슨 강 화파. 사실적인 풍경에 가까움. 모든 사소한 것들, 신비롭고 경이로운 느낌을 주는 자연. 구석구석을 탐험하는 신비감. 황홀한 풍경. 아주 잔 것들, 구석구석을 탐구하는 것은 세잔느에게서 없어지고 산은 하나의 큰 덩어리로 한 눈에 전체를 보게 함. 하나하나 보는 것에 비해 하나의 구조를 한 눈에 보게 하는 산. 풍경이라도 완전히 다름.
>boy with a red vest, 1895
뒤의 공간. 커튼으로 공간이 완전히 막혀져 버림. 넓게 깊은 공간이라기 보다. 뒤에 있는 공간이 인물을 완전히 압도함. 거기에 소년이 서있는데, 그의 얼굴이 굉장히 예민하고 연약함. 이 인물보다 강렬한 것은 조끼의 색. 색채의 형태가 앞으로 밀어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실제는 소년의 팔을 보면 팔이 아니라, 커튼의 하나로 보이게 됨. 팔이 너무 길어져버렸음.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구조 상의 재배치로 되었음. 형태가 굉장히 단순한데, 그 속에 소년은 힘없이 서있음. 옷을 입고 있지만, 그를 겹겹이 싸고 있는 압박감에 얼굴이 파묻혀진 것처럼 보임. 핵심이 되는 빨간색은 정열적인 빨강보다는 차가운 빨강. 전체적으로 우울하고 회의적이고, 그러나 섬세하고 수줍은, 갈등을 보여주는 얼굴. 카운터 리듬.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려는 리드믹한 형태가 대조되는 작업. 왜 인간을 이렇게 그렸을까?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함.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1892
그가 그린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단순하면서도 신분이 낮은 사람들. 의사나 변호사 그리지 않았고, 정물도 굉장히 평범한 사과와 같은 것을 그림. 굉장히 단순한 형태. 전부 다 중앙에 모여있음. 사람들의 시선도 중앙으로 모이고, 거기서 일이 벌어짐. 벽의 파이프가 없어지면 끝까지 무한한 공간으로 멀어지는데, 벽이고 더 이상 공간이 없음을 시사해줌. 오른쪽 사람의 형태는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견고한 삼각형, 나아가 돔의 gudxol. 묵직한 커튼에 연결되고 오른쪽을 견고하게 만들어줌. 무게가 너무 쏠리게 되니까 왼쪽에 한 사람을 더 세워 균형을 맞춤. 전체적인 균형도 다시 고전으로 돌아가 삼각형 구도? 삼각형이 아니라 돔과 같은 입체적인 구성이라고 할 수 있음. 굉장히 구조적이고 강인한 질서를 보여주는 작품.
>five bathers, 1887
수욕도. 벗은 여인들의 목욕하는 그림. 여성의 몸을 느낄 수 있지만, 그에게 있어 여성 누드는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고, 인위적인 자세를 많이 보여줌. 거의 구조의 일부분. 삼각형의 구성. 여기에서 마드모아젤 아비뇽의 하나의 프로트 타입이 되었음.
>대수욕도, 1906
그가 그린 마지막 여성. 여성 누드보다는 구조를 지탱해주기 위한 형태에 더 rkRKdna. 감각적인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고, 하나의 구도에 맞춰지는. 누워서 우리를 인도해주는 화살표, 중앙을 보게 하는 구조의 역할을 함. 삼각형을 만들어주는 역할. 세잔느는 남성누드는 별로 안 그렸고, 누드들을 굉장히 많은 해석을 하게 함. 양식적인 혁신.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함.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 내용상으로 연구하려는 노력이 많아서 자전적인 면에 대해 해석하는 경향이 많이 있지만, 모든 것이 확실치 않음.
후기 인상주의의 네 작가. 프랑스의 전성기. 1950년대 파리는 이미 전성기가 아니라, 19세기 말~20세기 초가 파리가 중요한 화가들의 도시였음. 이때에 일련의 젊은 작가들이 있었음. 고갱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람. 일명 나비파. nabis 나비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예언자. 틀에 박힌 미술을 거부함. 미술이 너무나 부르주아 취향이 되었다. 거기서 벗어나고자 했던 사람들. 상당히 브루주아 적인 그림을 그렸지만, 자신을 나비라고 불렀음.
paul serusier, tailsman, 1888
고갱이 퐁타방에서 그림을 그릴 때 그도 가서 그렸음.호수와 나무가 있는 곳에서 그림을 그림. 집이 보임. 고갱이 지나다가 세르지에에게 충고, 그림자가 파랗게 보이면 니가 사용할 수 있는 순수한 파랑을 칠하라. 그가 충고를 받았지만, 화폭이 없어서 시가박스에 그림을 그린 것이 바로 이것. 부적이라는 제목을 붙임. 굉장히 작은 그림. 완성된 작품을 보면, 우리가 보던 어느 그림보다 추상의 경지. 물의 반영, 물 위에 있음. 고갱이 그렇게 하니까 강하고 순수한 색채를 썼음. 고갱의 레슨은 그림이란 더 이상 보는대로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색채를 리듬감있는 패턴으로 그리는 것이다. 세르지에가 다시 파리에 와서 자신의 친구들에게 이야기하여 나비파가 형성되었음. 세르지에 이외에도 모리스 드니, 뷔아르, 보나르 등이 있음.
Maurice denis
"그림이라는 것은 그것이 전쟁터의 말이거나, 누드이거나, 또는 어떤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이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일정한 질서에 의해 그려진 색채배열로 된 표면이다." 그림을 기본적으로 색채 배열, 즉 추상으로 본 것. 이것이 나중에까지 많이 이용되었음. 그러나 드니의 그림을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음. 이 그림을 보면 고갱의 영향이 보임. 평면의 색, 아웃라인. 고갱과 같은 과감한 표현은 보이지 않고, 부드럽고 은밀하고 창백한 신비스러움을 보여줌. 마치 프라안젤리코 같은 류의 그림들을 모리스가 그렸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 그의 그림은 예언자에 가깝지 않았음. 보이는 세계, 인상파처럼 그리지 않느가. 실증주의, 물질주의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보이지 않느 세계로 가려는 움직임이 강했음. 인상주의는 쾌락적이고 부르주아 적인, 눈을 즐겁게 하는 미술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되고, 상징주의 세기말 사상, 회의주의, 비관주의가 도래하여 지식인과 예술가는 보이는 세계에서 떠나기 시작. 나비파는 신비스러운 의식을 하기도 함. 자기들의 모임장소를 temple이라고 해서 옷을 입고와서 의식을 하기도 하고 아편을 피기도 했음. 신비주의적인 종교집단이 이때에 많이 생기고, 기독교가 많은 도전을 받기 시작.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밝혀지면서 우리가 아담과 이브의 후예가 아닌 침팬지의 후예? 기독교가 수세에 몰리기 시작함. 이때에 이러한 사교, 종교집단이 많이 나오고, 나비파도 이러한 것을 많이 했다고 함. 이 시대의 분위기.
>vuillard, 타피스트리 앞에서, 1899
뷔아르 보나르 같은 사람은 가정집 주제. 분위기가 친밀감과 은밀한 느낌을 주는 그림을 많이 그렸음. the intimist(앙티밋) 은밀한 분위기의 그림을 많이 그렸음. 아카데믹한 트레이닝에 싫증을 느끼고 새로운 색채에 관심을 가졌고, 일본 판화에 심취해있었음. 에꼴 데 보자르에서 전시를 크게 하면서 거의 절정에 이르렀음. 일본 색채와 디자인에 영향을 많이 받음. 중산층의 실내를 많이 그렸음. 화면이 완전히 색채로 덮임. 그림이라는 것이 색채의 배열이라고 한 것처럼. 거의 표면이 색채의 배합으로 덮임. 사람들이 보이는데, 뒤에 있는 직물로 된 벽장식과 앞에 있는 사람들이 거의 분리되지 않을 정도로 벽지와 옷의 패턴을 통해 혼란스럽고, 원근법이 눈에 들어오지 않도록 됨. 자기만의 유화를 사용하지 않는 특수기법. 아교를 썼다고 함. 오일을 쓰지 않은 다른 색채의 형태가 보임. 형태가 서로 구별되지 않고 굉장히 불분명한 시각적인 혼란을 주는, 색채에 덮인 표면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음
>작업실, 1893
벽과 사람, 책상이 있음. 여자가 입은 옷의 패턴과 벽지의 패턴이 비슷해서 경계가 불분명하고 화면이 장식적으로 보여짐. 옷을 마드는 직업이었다고 함. 천의 패턴같은 것에 관심을 가지고서 자신의 작품에 많이 쓰게 되었음. 친한 친구들과 속삭이는 듯한 느낌. 그래서 앙티미스트라는 이름이 붙여졌음.
>Bonnard, lundheon at grand lamp, 1899
원근이 있기는 하지만, 색채로 덮인 표면인 듯. 마티스의 후식과 굉장히 비슷한 식탁. 중산층 가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음. 작은 붓터치로 화면이 덮여있음. 보나르에게 사람이 중요하지 않고, 사람과 물체가 거의 똑같은 중요성. 정지된 물체들이 비밀스런 대화를 하는 듯한. 물체나 대상의 위치에서 글미을 바라보는 듯한. 사람이 화면에서 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점차 사람이 눈에 띄기 시작하는 그의 그림. 너무나 대상을 앞에 놓고 그리면 불편해져서 이러한 그림을 그렸다고 이야기 함.
>베르농의 테라스, 1908
20세기에 넘어와서 어마어마한 호평을 받는 작가로 변함. 아까보다 훨씬 화려한 색채로 덮여지게 됨. 신선하고 화려한 색채화가로 변신.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사람부터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특이한 각도로, 물건의 장소에서 보는 듯한 특이한 각도와 사람들의 모습. 이런 것이 보나르의 여러 관점에서 본, 정지된 물체들이 속삭이는 듯한 느낌을 줌. 1940년대까지 살아서 오래 살았음. 추상표현주의 초기 작가들에게도 상당히 그의 전시가 영향을 미치게 되었음. 화려한 색 때문에 인기가 많음
>Four Panels for the Screen, 1892
일본 판화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줌. 색조와 패턴이 장식적으로 사용되고 있음
17강
2010년 5월 3일 월요일
오후 2:00
<<오디오 녹음.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5월 3일 월요일 오후 2:01
상징주의 - 이전까지 본것들은 대개 유명한 작가들. 이제부턴 익숙치 않은 작가들이 많다. 상징주의.
느낌이 신비스럽고 애매모호한
상징주의란 것이 왜 이무렵에 중요하냐면 - 여태까지 쿠르베 마네에서 보는 보이는 세계를 그렸다고 하는데 - 1880년대부터는 보이는세계를 너무나 물질적인 세계라고 배격하고 더 고차원적인 관념인 세계 신비로운 세계 환상의 세계를 지향하는 상징주의가 등장. 미술보다 문학이 앞장섬. 말라르메 등. 새로운 영역의 개척 - 인간내면의 세계와 감정의 세계. 전체를 훑어보면 서양미술사에서 르네상스란 종교적이야기라도 눈에 보이는 것만 그리고 이런것이다. 보다보면 그렇지 않은 것들은 낭만주의적 부위기.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라인에서.
말라르메 - 대상을 묘사하지 말고 그것이 자아내는 효과를 그려라. 이들이 지향했던 건 때묻지 않은 표현, 여태까지 타부시되던 주관적인 경험이나 개인적인 것 내성적인 것을 파헤치려고 했다.
Pierre puvis de chavannes, 성스러운 숲, 1884
- 피에르 퓨비 드 샤반느 퓨비
- 전통적인 아카데미의 질서, 고전, 평화로운 모습의 고전주의같다고 느낌이 드는데, 여기서는 아카데미그림에서 보듯 이야기를 읽을 수가 없다. 아카데미와 차이점! 이야기가 잘 읽혀지지 않고 - 시와 같은 것이다.
- 모든것이 시각적 조형을 통해 전달되도록 - 상투적 아카데미즘에서는 벗어남 - 화가들이 혼란에 빠짐. 중도파는 어떤길을 가야 할지 몰랐을 때 푸비 등이 지나치게 상투적이지도 않으면서 너무 식상하지도 않은 길 제시.
- 공간의 깊이가 상당히 압축되어있고, 창백하고 맑은 색조 - 세부적인 표현을 억제
- 옛날같으면 훨씬 공간감이 원근이 많이 나타나야 하는데, 3차원의 깊이를 축소시키는 공간 압축만 해도 상당히 과격한 편
- 쿠르베보다 어리고 마네보다 나이가 많던 - 전혀 사실주의나 낭만주의에 영향받지 않았다. 처음에는 살롱에서 거절받다가 나중에는 상당히 인정받는 화가
- 벽화란 것은 기본적으로 평면이기 때문에 단순화 윤곽선을 강조해서 몇마디로 시처럼 요약하고 싶다.
- 나중에는 내적인 힘이 부족, 너무 관념적이고 변하질 않고 되풀이만 해서 나중엔 별로 따르는 사람이 없다. 전성기엔 상당히 명망있었다.
가난한 어부 1881
- 원근감이 없진 않지만 뒤가 올라와있다. 사실의 묘사가 아니라 상당히 평면화되어있다. 아카데미에 비하면 상당히 .
- 그래도 균형과 훈련. 포즈 배경 구도등에서 전통적인 훈련이 보인다.
- 하지만 주제의식상 굉장히 난해하다.
Odilon redon, 에드가 알란 포우에게, 무한대로 여행하는 이상한 풍선과 같은 눈
- 반 고흐 고갱보다 조금 나이 많다.
- 그림과는 달리 나이스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다. 미술만 좀 이렇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의 합리성에 따라 그리는 것이다." 상징주의가 어떻게 정의내리는가 Aurrer오리에"상징주의란 아이디어를 감각할 수 있는 형태로 옷을 입히는 것이다."
- 르동 - 꿈과 같은 신비스런 세계를 보여주려.
- 동물 식물 형태를 많이 이용. 친구가 식물학. 현미경으로 조그만 식물 곤충들을 어렸을 때 많이 보앗다고 한다.
- 르동은 사실 건축공부를 해서 - 공간개념 광선 어두움이 건축적 훈련을 느낄 수 있다.
- 르동의 그림은 유화보다는 목탄 에칭 석판화 재료를 많이 사용했다. 이그림도 석판화.
- 키아로스쿠로 - 명암법 chiaro scuro - 어두움과 밝음- 을 최대한 살리고, 마치 꿈에 보는듯한 이미지를, 홀린것같은 느낌을 준다.
- 당시 에드가 알란 포우의 시와 소설이 유럽에 알려지면서 - 에드가 알란 포우에게 바치는 - 눈 - 고대에서부터 영혼, 마음의 창으로 상징. 원구란 것은 광선, 생명 이런것을 나타내서 이런류의 이미지들을 많이 보여주었던 사람이 르동이다.
르동, 순교자의 머리, 1894
- 어찌보면 형태가 구체적이고 전통적인 양식인데, 신비스럼고 꿈에서나 볼듯한 이미지이다. 여기서 보여지는 이런 키아로스쿠로나 형태같은 것이 어떤 자는 이것을noir picture라고 해서 검은색이 벨벳과 같은 신비스러운 검은색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 이런것들이 나중에 초현실주의로 연결되는 등 상징주의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 멜피스토 1877 (파우스트 악마)
거미, 1881
꽃항아리 1890
- 나중에는 색채를 많이 사용. 꽃을 보면 전혀 배경이 없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꿈 잡혀질 듯 하면서 사라지고,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굉장히 낙천적이고 괴기하지만 즐거울 수 있는 것이 르동의 세계이다.
귀스타브 모로 gustave moreau, salome, 1876
- 환상적 데카당한 유혹의 분위기.
- 모로는 나중에 국립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가 된다. 이 사람의 반에 루오와 마티스가 있었다. 자기자신은 이런 그림을 그렸지만, 마티스가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이끌어주고 인상주의를 배우라고 권함.
- 평생 독신, 어머니와 친했고, 잘살았던 것 같다. 화가의 집이 미술관이 된 경우가 귀스타프 모로 미술관.
팜므 파탈의 이미지
Jupiter and semele 1895
아르 누보 - art nuveau - 에 속하는 사람이다. 굉장히 곡선에 매혹되는 운동.
그때에 나타난 사람이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이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은 우리가 배운 사람중에 (왕족의 가문)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데 아주 귀하게 살았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고 다리가 부러졌다. 두번이나 . 이러면서 이사람은 성장이 멈추어서 어른의 상체와 아이의 다리를 가진 몸이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로트렉을 교육을 잘 시켜서 - 밖에 나가서 놀 수가 없으니깐 그림을 잘 그렸다. 나중에 파리에 가서 환락가 - 몽마르트르에서 생활을 하다 36살에 죽는다.
자기자신이 그림에 자주 나온다. 물랑루즈 영화에도 나온다.
Touluouse-lautrec moulin rouge 1889
- 저 뒤에 있는 사람이 로트렉. 사촌하고 잘 다닌다. 폴리베르제르 등처럼 파리의 캬바레이면서도 카페 콘서트 이런류의 장소가 있었는데,
- 그가 제일 좋아했던 화가는 드가. 일상생활에 관심을 많이 가짐.
- 이사람의 그림을 보면 - 이런류의 소위 연예인이라는 것은 일종의 소외계급 - 남을 즐겁게 하는 직업이니깐 - 대단한 가문에서 귀하게 자랐는데 몸은 이렇고 놀러온 나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 매춘부들을 보면 -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그렸다는 것이다. 보는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 사회적인 메시지보다는 거의 저널리스트처럼 그렸다.
- 구성 자체는 내려다보고 올려다봐서 일본판화같은 영향을 받았던 사람.
- 드가적 - 우연히 본것같고, 옆에 사람이 머리가 잘려있고 -
- 전체 분위기를 확 좌우하는 게 저 얼굴. 얼굴 없다면 평범한 모임인데 - 상당히 얼굴이 조명을 받아서 푸르고 빨갛고 노란 머리를 하고 - 색이 충돌적인 색이라서 전체분위기를 확 긴장하게 만든다. 뭔가 캬바레의 분위기를 건전하지 않게 전해주는 효과.
- 의자의 곡선 - 여기서 보여지는 옷이 이렇게 구불구불한 곡선같은게 많이 사용되면서 아르누보같은 분위기를 보여준다.
- 드가와 같이 회의론자는 아니었던 것 같고, 캬바레 배우들의 즐거운 순간들이 묘사되는데, 그러면서도 끝은 항상 환멸이나 멜랑콜리 느낌을 준다.
Le goulue entering mulin rouge 1892
- 석판화 - 도미에도 많이 했지만 1880년대에 채색 석판화가 나와서, 이런 색을 대담하고 강하게 써서 이것을 포스터로 만드는 것이 시작. 광고 포스터가 나오기 시작했고,
- 먼거리에서 눈에 띄기위해서는 대담한 색채 평면구성, 구도디자인
- 예술성도있어야하지만 상업적 디자인도 결합되어야한다.
- 물랑루즈의 포스터. 로트렉때문에 당시에 여기에서 등장하는 연예인은 불멸의 연예인이 되었다.
Divan japonais, 1893
- 까만장갑 - 이베트 길베르란 여자. 실제 있는 인물들이다. 연극 캬바레 여인들을 묘사했는데
- 디방 자포네 - (의자 ) 캬바레 포스터. 일본 목판화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 자포네 - 벽에는 동양비단으로 바르고 부채로 장식, 여자들은 이국적인 기모노를 입고 대접했다.
- 로트렉은 움직이는 형태에 굉장히 매혹되었다. 드가가 이런것을 그렸단 생각을 해야 한다 ㅋ
- 드가와는 다르다. 드가는 오케스트라를 앞에 앉히고 무희를 뒤에 배치했는데, 여기에서는 뒤앞저쪽이 전체공간이 압축되어 나타나고 있다.
- 여성의 실루엣, 악기의 선, 잔느아브릴의 치마. 굉장히 디자인적.
사창가의 여인 1894
- 해상도가 나빠서 - 이것은 일종의 로트렉이 잘 다니던 사창가 - 매독으로 죽었다.
- 대부분의 사창가 보면 - 그야말로 아름다움이 없고 하나의 몸통으로 보이고, 지루하고 그런 류의 느낌. 대부분 나이먹고 둔하고 그런 사람들. 르누아르의 누드같은 천진난만한 점은 찾아볼 수 없는 사회상의 기호 어찌보면 도덕적일수도 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 이사람은 워낙 포스터가 대량생산되어서 유럽에 많이 퍼지게 된다. 이무렵 바르셀로나의 피카소도 파리의 툴루즈 로트렉은 알았다. 포스터때문. 피카소 초기그림에 창녀그림많이나오는것도 로트렉의영향.
Aristide Bruant dan son cabaret 1893
Alphonse mucha, JOB
- 광고가 대중앞에 커다랗게 보여지는 것이 이때 등장하는데 여자가 많이 나온다. 여기서 보면 담배를 피우고 있고, 여자가 바로 팜므파탈의 전형적인 여성이다. 체코태생으로 파리에 와서 당시 최고의 연극배우였던 사라 베른하르트 - 알퐁스 무카는 이여자의 전속포스터를 몇년간 만들었다. 머리카락, 누드스타일, 머리카락이나 약간 벌려진 입 등
James Ensor, 1889년에 브뤼셀에 입성하는 그리스도, 1888
- 벨기에사람. 마스크 파는 가게 하는 집에서 태어남.
- 마스트는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감추는 의미.
- 쇠라의 그랑 자트 섬과 같은 크기. 벨기에에 쇠라 작품이 전시되어서 그것과 같은 작품을 만드렁야겟다고 생각하고 4미터가 넘는 작품을 그렸다.
- 너무나 강렬한 색채와 형태. 눈 산만하고 어디있는지 모르겠지만 - 오늘날의 문제는 그리스도가 없는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무시당하는 것이다. 굉장히 사회비판적인 작품이다. 중간중간에 해골의 미이지가 있어서 - 잘 보면 죽음에 굉장히 관심잇었다.
- 세밀하게 그려서, 세기말의 강한 비관주의를 감지할 수 있다. 이사람이 이시기에 이나라의 전통이 보슈나 피터 브뤼겔의 전통 후예랄 수 있다
- 현대사회를 자신이 창조해낸 심볼로 표현했다. 굉장히 시니컬한, 도한 인간의 위선에 대한 작품이랄 수 있다.
- Vive la sociale 사회주의 만세 - 사회주의 축제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기득권층 도덕적 이데올로기,
The intrigue
굉장히 인위적인 색채로 달라졌다. 반 고흐가 개인적인 관심에 침잠, 이사람은 더 사회적인 것, 군중, 현대사회를 상징하는 도상이 되고, 마스크 - 실제 사실 마스크는 사람의 얼굴을 감추고 위협적이지만 이것이 실제 사람의 얼굴이다. 라고 말을 하고 있을수도 있다.
뭉크
Death bed
- 노르웨이 태생 - 어려서부터 굉장히 죽음에 예민했던 사람이다. 다섯살때 엄마가 죽었고 그다음엔 누나가 죽는다. 아버지는 의사. 맨날 기도만 했단다 응??
- 뭉크 - 스칸디나비아 - 장학금을 타서 파리에 왔는데, 그린 그림들이 굉장히 뭔가 심리적인 작품들이 많다. 정신적인 고립, 불행한 생활이 그림으로.
- 반고흐와 같이 표현주의적이라면, 뭉크는 불편한 이미지를 통해서 인간의 내면세계를 조명했던 사람이다.
- 1889년에 파리에 와서 나는 인상주의자처럼 창가에서 뜨게질하는 여자는 안그리겠다. 숨을 쉬고 고통을 느끼는 사람을 그리겠다.
칼 요한 거리, 1892
- 노르웨이 오슬로의 그림 군중의 이미지가 다시 나타난다.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는데 하나도 정상적이지 않고 해골같다 서로 아무도 소통되지 않고 모두 유령과 같다. 오른족은 오히려 사람이 없는데 형태 이미지가 무얼까 하나의 불안함 두려움의 이미지로밖에 해석이 안되네. 큰 바윗덩어리???
- 물감도 어떤 부분은 굉장히 짙게 어디는 옅게. 재료자체도 들쑥날쑥한 분위기, 이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디가서든지 철거당하든지 스캔들을 몰고 다녔다. 이사람이 파리에서는 익숙하지만 이사람이 독일에서 전시한다 그러면 진짜 난리난다. 전시거부.
- 뭉크의 그림때문에 독일에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세제션segetion분리파가 생겨난다. 현대미술의 또하나의 출발점.
절규 1893
- 대부분의 사람이 잘 아는 - 나는 커다란 외침이 자연에 흘러가는 것을 느낀다. 이 그림을 그릴때를 묘사하기를 - 자기가 하루를 마치고 석양의 어둠에서 산보를 하는데 긴 다리를 겉는다. 두사람이 자기를 지나갔고, 나는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안되는 심정이 되었다.
- 저 선이 소리일수도 있고, 저것이 해변가 도시다. 어찌보면 해변보다는 외ㅣㅁ의 형태일지ㅗ. 외침이 자연을 핏빛같이 왕왕왕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거의 여성으로 보이는데, 얼굴이 너무 해공같아서 거기로 시선이 가고 차례ㅏ례 붉은빛으로 이동한다 .시각적인 불균형감을 느기게 한다.
- Mixed mdia를 사용해서 유화지만 긁어낸것같은 처리자체가 어떤때는 dry한 브러시, 시각적 심리적인 감흥을 주는 그림이다.
- 현대인의 소외감 고독함을 다룬 것이고, 당시에는 이런 문제를 이렇게 직접적으로 다룬 화가는 없어서, 이런 인간적인 문제를 다룬 점에선 굉장히 인간적이다. 처음엔 그렇게 봤지만, 요즘엔 완전히 다르게 해석이 되었다. 요즘은 대중문화에 가지각색으로 해석된다. ㅋㅋㅋㅋㅋ
- 릴레함메르에서 동계올림픽했는데 그림이 도난당했다.
사춘기 1895
- 이당시에는 인생의 여러가지 단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여성의 인생단계중 사춘기 - 실내의 침대, 여기 보이는 덜 성숙한 여성의 신체, 손으로 가린 자세, 소녀의 심리적인 상태가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하는데에 성공했다. 과장된 고립으로 느겨지기도 하나, 현대적인 주제고, 큰 눈 동작, 두려움을 느끼는 의식적으로 뭔가 두려워하면서도 기대하고 혼돈스러운 - 사진의 성을 의식하는 단계 - 편안하지 않은 마음 표현하고 있다.
- 저 그림자가 무엇인가? 남성? 무엇일까
18강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2:03
<<18강.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2:03
MUNCH 사춘기1895
- 실내분위기 포즈 - 사춘기 소녀의 심리나 상태가 시각적으로
- 의식적으로 내면에서 생기는 두려움 갈등을 억누르는 - 그것이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인식, 결코 편안하지 않은 것이 드러나는
MUNCH KISS 1895
- 남녀문제를 자주 다루었고, 남녀관계가 잘 되지 않았음.
- 이남자의 문제는- 그여자가 너무 좋은데 이사람이 뭉크한테 잘하면 도망가고 -
- 결국 뭉크가 나중에는 정신병원에 1908년엔가 노르웨이로 돌아가서 입원하고
- 퇴원하고 그린 그림은 이시기의 그림과는 다른 2류급 화가가 되고 만다.
- 키스의 장면은 회화뿐아니라 판화로도 제작되었다.
- 이사람이 키스에 집중한것은 - 남성이 여성에게 위안을 찾고, 여성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 여성의 경우에는 붉은머리를 해서 어찌보면 뱀파이어라는 제목으로 붙기도?응?(요부)
- 구성 - 두 인체가 하나로 통일되어잇고, 한덩어리. 구도단순. 인간의 깁ㄴ적이면서도 복잡한 심리를 이해하려고 하는 주제라고 생각된다.
- 여기서 보여지는 두 연인은 절망적인 연인. 편안하고 감각적인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 죽음과연결되는.
- 이때의 남녀문제를 다룬 세기말작가는 로댕 클림트 뭉크 초기 피카소 등- 유행하는 주제가 된다.
MUNCH, THE DANCE OF LIFE 1899-1900
상징주의 작가 두명
FERDINAND HODLER - 스위스 태생
- 선택된 자들 - 19세기 미술의 중심이 프랑스였다면 19세기말엔 예술의 중심이 여러곳으로 퍼지게 되는데, 노르웨이나 스위스에서 많이. 1891년에 파리로 와서, 주로 풍경속에 인물을 배치하는 그림을, 종교적인 반고흐비슷한 사명감을 가지고있던 사람이다. 이사람의 주제도 삶 죽음 사랑 같은 문제였는데, 천사같은 사람이 있고 나무를 심는 어린아이가 보인다.
- 미래의 희망 정신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 이런것은 룽에같은 독일 낭만주의에서 본적이 있다.
- 풍경속에서 자연의 생명력과 리듬을 생의 근원과 연관시키려고 한 것 같은데, 느낌이 철학적, 확실하게는 파악이 잘 안된다. 이렇게 수직으로 연속적으로 된다든지 그런것
- 평행주의라고 부른다. 선이나 형태 색채를 반복으로 수직 혹은 수평으로 계속 배열하는 구성
KHNOPFF, 스핑크스, 1896, 벨기에 작가
- 귀족태생 귀스타브 모로의 제자, 벨기에 브뤼셀
- 1883년 레벤(12)라는 회를 만들어서 당시 많은 진보적인 사람들이 참여한 모임의 작가
- 초현실적 세계를 아주 사실적으로 그린
- 표범의 신체, 여성, 남성과 뺨을 대고 있는, 꿈과 같기도 한, 잠녀가 같이 신체에 있는 안드로기니, 양성적인 표현이 나타난다.
조각
1876 청동시대
칼레의 시민, 1887
백년전쟁때 프랑스 도시 칼레를 열한달동안 포위한다. 여섯명이 나와서 도시를 풀어주는 대신 우리가 인질로 잡히겠다 해서 나왔다. 칼레 시가 로댕에게 부탁했는데, 광장에 세워지는 발로 서있게 하는 대없는 야외조각이 일반적 특징이었는데, 반대가 많아서 대를 세워서 키는 약강 18090정도의 큰 인물.
대체로 조각을 찍어도 한눈에 그룹으로서의 공통적인 느낌이 없다. 체념 절망 등의 심리적으로는 공통적이다. 또한 자세가 자연스럽지가 않다. 굉장히 과장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우리를 끌게 하는 영웅으로서의 효과가 잇다.
고전적 표현적 중세적인 모습
어떤사람이 이것을 보면 이사람을 완전히 현대로 볼 수 없는 것이, 헨리 무어의 조각을 보면 인간이라고 볼 수 없다 구성과 재질감을 보는데, 로댕을 보면 재질감 생각하기 전에 인간대신으로9인간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실제 사람으로, 현대조각은 이런 재현성을 버린다.
인간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이고, 공감대가 보이지 않는다. 칼레 시가 싫어해서 거부당한거같다. 공공조각인데 조각은 개인적이고, 장소의 의미나 기본적으로 작가적인 작품이다.
지옥의 문 1880-1917
장식미술관에서 로댕에게 미술관의 문으로 위촉을 했다. 그런데 이것을 로댕이 계속해서 매달려서 결국 완성을 못한다. 안받겠다 해서 돈을 돌려주고 집에서 계속 작업했다. 37년동안 인물이 백수십명이 들어가고, 떼버리고 집어넣고
로댕이 분명하게 영향받은 것이 피렌체 대성당 앞의 8각형의 세계당
로렌초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 - 1425-52
구약에 나오는 기가막힌 이야기- 이 천국의 문의 반대되는 이름을 붙였다.
기베르티처럼 문을 다 나누려고 했는데, 이사람이 나중에 다 지워버리고 완전히 전체의 문을 거대한 부조로 만들었다. 인물들을 보면 서로 하나도 연결되지가 않고, 기본적으로 저주받은 사람들이 고통속에서 귾임없이 움직이는, 저 세 그림자shades가 지옥문, 앉아있는 것이 생각하는 사람, 처음에는 단테를 생각했다(지옥편- 여기있는 인물을 본래는 단테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생각하는 사람으로.- 로댕 자신일수도 예술가일반일지도)
최후의 심판을 연상시킨다. 심판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였다면, 여기서는 기독교가 아니고 어떤 예술가일수도, 인간개인일수도. 밑에서 찍어보면, 부조가 아니라 툭튀어나와서 완전히 환조로 표현해놓았다. 끊임없는 움직임, 강한 광선의 효과를 주고, 시점이 한점이 아니고, 모든 작품은 각각 하나의 분리되어있고, 그럼에도 하나로 엮어지고,
누구의 영향을 받았을가? 샤를 보들레르 - 악의 꽃 등 여러가지를 통해서 굉장히 인간은 외롭고 현대인은 정신적으로 눈이 멀었고, 목적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 현대인의 비극이다. 우리가 공통된 감정을 가지지 못하고 이런 것이 비극이다. 라고 했다. 기독교신화 그리스도교 신학 - 혼돈의 상태 인간의 정신적인 부패를 이야기한다. 끊임없는 환멸 속에서 고통을 맞는 사람들. 여기서도 군중이 나온다. 뭉크에서도 앙소르에서도 나오고 - 도상 - 그러면서도 서로 고립되어있고 이런것이 비극이다 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이 조각중 몇 개의 파생된 조각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생각하는 사람.
생각하는 사람 - 앞으로 다리가 튀어나와있는데, 비례상 잘 안맞다.
지식인의 생각을 나타내는 자세이다. 모든 몸으로 생각하는 예술가의 이미지인데, 예수가 부재한 지옥의 이야기, 예술가 화가 자신을 말하는것같고 예술가를 높게 이야기,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무덤 조각 - 뒤러의 멜랑콜리아- 지식인의 이미지
현대 지식인의 이미지라고 볼 수가 있다.
이것이 너무 강한 인상을 주어서 로댕은 뭉크의 절규처럼 대중적인 아이콘이 되었다. 어떤 고등학교는 버클이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로댕, 키스 1898
지옥의 한 장면이었는데, 그 지옥의 영혼이랑 안맞다고 생각되어서, 떼온 작품이 키스이다. 독립상으로.
뭉크와는 완전히 분위기가 다르다. 옆이 거칠게 조각되어있는데, 우리가 보아온 대리석은 거의 ㅢ polish되어있는데 이것은 미켈란젤로의 미완성작품에 많이 영향을 받은것같다. 기본적으로 몸, 팔 손이다. 부드러운 여성의 몸, 남성, 섬세하면서도 강한, 굉장히 심리적인 작품이다. 여성은 굉장히
수줍어하고, 하지만 정열을 본질적으로 전해주는, 남성의 오른팔을 보면 근육이 있어 육체적이지만 점잖으면서도 감각적인, 움직임이 암시되는, 또한 자제와 욕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발자크 상 1897- 1850년에 죽었다. Human comedy인간의 희극
1891년에 문인협회에서 로댕이 에밀 졸라와 친해서 로댕에게 작품을 위촉한다. 굉장히 많은 40여점의 습작을 했는데, 너무 몰두해서 발자크가 다니던
처음에는 누드상으로 하려고 했는데 너무 키작고 몸이 그래서.
발자크가 다니던 양복점에 치수를 알아올정도로 사실적인 이미지를 생각도 했다.
마지막에는
발자크가 밤에는 긴 가운을 입고 밤에 글을 썻다는데, 그장면을 나타내보았다.
수직의 가운 위에 얼굴 하나
단 위에 있기 때문에 딱 맨위에
오래에는 얼굴을 보는것을 방해하지 않게 긴 옷으로 -
영원불멸한 창조성을 표현하기 싫어했다. 관습적인 가치를 싫어했고, 개의치 않을만큼 모든것을 가졌기에
에드워드 스타이켄 - 예술가 작품을 많이 찍엇다. 브랑쿠지 작품도 찍음 - 작품보다 완전히 분위기를 잡아내는 도하나의 예술작품으로남게 된다.
로댕 여기까지
19강
2010년 5월 12일 수요일
오후 1:57
<<19강.wma>>
오디오 녹음 시작: 2010년 5월 12일 수요일 오후 2:00
아리스타드 마이욜
Aristide maillol, 지중해 1905
로댕과 비슷한 시기의 두명
- 마이욜은 원래 화가였다. 나비파에 속하던 화가였는데, 1900년경부터 조각가로 전향. 대체적으로 여성의 누드를 많이 조각. 보다시피 굉장히 단순한 고갱의 넙적한 면으로 몸을 표현하는것처럼 중량감있는 볼륨으로 표현했다. 로댕의 결루 세부의 표현이 있는데, 이사람은 인체를 단순화시키면서 표면을 처리해서 명암이 고루 퍼지는 느낌을 준다.
- 마이욜은 기본적으로 고전적인 조각가인데, 조용하고 고상하고 위엄이 있는 이런것이 마이욜 조각의 특징이다. 전체를 하나의 양감으로 하여 변화하지 않는 영원함 견고함을 갖추고 있는것이 마이욜 특징
1902 밤
- 이것도 비슷.
- 미켈란젤로의 밤 (메디치 무덤의 밤) 이런것에 영향받은 것이다.
- 고전주의적인 것도 있지만 상당히 추상화 단순화된 그럼에도 아름다운 균형있고 고상한 느낌을 주는 것이 마이욜의 작품으로,
1925 토르소
아르 누보
고갱의 설교 위의 환영, 뭉크, 로트렉 - 자유분방한 선들이 나오는데, 1890-1900년사이에 유럽전역에서 유행하던 아르누보 양식을 반영한다.
아르누보 자체는 함부르ㅡ 태생의 독일인 출판업자 화상이 사무엘 빙 이라는 사람이 있엇는데, 독일에서0는 지크프리트 빙이라고 하는데, 파리에서 상점(미술가게) 열었는데 HOUSE OF THE ART MESON DE L'ART NUBEAU - 여기서 아르누보
공예 스테인드 글라스 등을 많이 다루고, 독일에서는 아르누보 대신에 유겐트 슈틸이라는 YOUNG STYJL
오스트리아는 빈 분리파에서 많이 전시되었기 때문에세제션 슈틸이라고 했다.
기본적으로는 아르누보로 ㅁ나히 알려져있다.
아르누보는 지난번에 봤던 미술과 공예운동의 후예라고 생각하면 된다. 윌리엄 모리스 - 미술과 생활 사이의 수공예를 상당히 강조. 모리스의 경우 기계를 혐오해서 기계생산에 의한 대량생산에 반발했으나, 아르누보는 기계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건축디자인 회화의 총체적인 양식을 추구해서 그것이 기계 테크놀러지에 대한 관점 차이이다.
아르누보 여러사람ㅇ ㅣㅅ는데
안ㅌ니오 가우디
HECTOR GUIMARD 헥토 기마르
PARIS, METRO STATION
- 아직도 파리에 가면 어던거는
- 자연적인 튤립, 식물형태 - 그런형태로 그려진 것을 보고 도시의 것을 잊고 자연을 느끼도록.
- 소재는 강철, 유리소재.
- 아르누보는 선들이 굉장히 생명력이 넘치는 상당히 아름답다.
HENRI VAN DE VELDE, TROPON 공장 포스터 1897
벨기에사람. 벨기에는 아방가르드 - LEVEN12그룹이 등장해서 활동했는데, 디자이너. 공장 포스터나 아름다운 가구나 그릇 디자인.
이사람은 반드시 곡선만이 아니라 직선도 잘 사용. 벨기에는 반 데 벨데.
영국의 찰스 매킨토시 - 가구 디자이너.
비엔나 - 에르만 오브리스트
유리공예가로는 에밀 갈레 - 모두 아르누보의 공예가 건축가라고 할 수 있다.
- VICTOR HORTA 집
비어즐리, 살로메 - 영국의 일러스트레이터 오브리 비어즐리
- 아주 독창적인 상상력과 ㄷ굉장히 세련된 디자인감각. 26에 결핵으로 죽는다.
- 멘 들잉을 굉장히 잘 - 뾰족한 강철같은 느낌 - 책, 포스터 디자인.
당시 오스카 와일드 책에 - 살로메 라는 그림
- 세례요한의 머리에서 피가 떨어져서 튤립이 피어나고
- 흑백 적절히 사용 - 데카당한 미
- 얼굴을 보면 로제티의 영향을 보여주어서, 어찌보면 심리적이면서 성적인 센세이션을 보여주는 뛰어난 디자이너.
공작새 스커트, 선을 사용하고 흑백의 대빌ㄹ, 비례가 무시되면서 디자인을 위한 효과가 강조된다. 1890년대 데카당스의 상징과도 같은 사람이다.
클림트
당시 비엔나가 - 프로이드가 꿈의 해석을 썻고, 굉장히 이중적인 도시이다.
나치 유태인 신고가 가장 많았던 도시가 비엔나이고, 로마 다음으로 많은 매춘부가 있었다. 이미 성에 대한 타부가 많이 풀려졌던 때이고, 도시가 커지면서 뒷골목에 여자들이 굉장히 많앗다. 굉장히 많은 학자가 성과 심리학에 대해 연구하고있었다. 인간의 욕망 본능 남녀관계 - 미술뿐아니라문학에서도 많이 다루어지고, 인간의 표면적으로 보이는 위선 겉치레를 벗겨버리고 그안의 참모습을 찾으려는 것이 많이 잇었다.
이당시 예술의 중심이되어서 음악가 문학가 미술가 많앗다.
클림트를 회장으로 하는 빈 분리파가 생긴다. 뮌헨 세제션을 본따서.
뮌헨세제션이 과거의 회화와의 결별이었다면, 빈세제션은 건축가 조각가 화가 공예가를 모아서 같이 하는 그런. 분리파 전시의 대개는 아르누보 양식이 지배적. 그런이유로 빈에서는 아르누보가 분리파양식이라고 불린다.
분리파양식의 첫번째 회장이 클림트.
클림트는 원래 역사화나 벽화훈련을 받은 사람. 동생과 같이 작업. 초기그리믄 굉장히 아카데믹한 그림. 동생이 갑자기 죽는다 잠시 공백기. 1897년에 다시 나타났는데, 완전히 새로운 양식으로 재탄생. 당시 받은 프로젝트가
비엔나 대학 프로젝트. 철학 법학 과학을 그려달라고 했다.
이것이 공개되자 대학당국이 감짝 놀랐다. 마치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웅크려있다든지, 의학의 경우에 치료의 여신을 마치 독약을 든 것 같은 컵을 들게 한다든지 그런 그림을 그렸다. 대학당국이 격분, 받지 않겠대서 결국 그림은 2차대전때 나치가 파괴. 현재는 없다.
제1회 빈 분리파 포스터. - 타이포그래피
클림트 - 유디트 1, 1907
- 이사람의 그림을 보면, 굉장히 여성들이 르누아르와 같은 여성이 아니라 세련된것은 극도로 세련 우아하지만, 그것이 무언가 두가지 양식이 섞여있다. 얼굴 가슴은 고전적 사실적, 금장식은 완전히 추상적인 패턴. 평면적 패턴과 사실주의적 양식이 혼합되어서, 이 여성이 어찌보면 패턴속에 갖혀있는것같은 느낌도 든다.
- 유디트는 구약성서의 여성. 홀로페르네스를 술취하게 해서 목을 베는. 상당히 유명한 팜므파탈. 이미 우리가 뭉크의 키스 요부 비어즐리나 모로의 살로메를 연상시킨다.
다나에, 1908
약간 입술을 벌려진 입술, 긴 머리카락,
- 여기서 나타난 여인은 성에 대한 갈망 - 새로운 여인. 인체표현이나 곡선, 두려움과 기대 육체적인 욕망 갈망이 여기 나타난다.
- 제우스신이 사랑에 빠져서 - 동전으로 떨어져서 다나에가 받고 있는 것.
- 여자를 보면 유혹하는, 눈에 띄는 직접적인 유혹이 아니라 포착하긴 어렵지만 느낄수있는것. 루벤스의 사랑의 정원처럼 건강하게 표현되어있는것과는 달리 - 여기는 무언가 굉장히 데카당, 자기파괴적으로 몰고가는 위험한 여인이란 느낌을 주는 것이 세기말 여성들의 이미지라 할 수 있다.
- 추상적인 패턴이 많이 보이고, 황금색 패턴 - 비잔틴의 요소가 상당히 강하다. 테오도라 왕비와 그의 시녀들 모자이크 보면 - 패턴들, 일본의 자포니즘 보면 병풍의 황금빛 그런것에 영향을 받게 된다.
클림트 스톡클레 궁 벽화 1905-09
- 빈분리파양식 건축가 중 하나가 오토 바그너와 요셉 호프만, 브뤼셀의 어느 부자가 스톡클레 팰리스라는 자기 집을 건축해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요셉 호프만이 집을 짓고 실내를 특히 식당을 클림트가 제작. 식당 벽화. 여기서 보면 모자이크이다. 유리 돌 대리석 금속 에나멜 마졸리타 등을 써서 만들었다.
- 뭉크 로댕
- 소용돌이와 패턴에 의해서 남자의 등은 패턴이 굉장히 큼직큼직, 여성의 패턴은 작다. 얼굴을 없애면 완전히 패턴으로만 보인다. 둘이 하나가 되어있는 - 남녀가 완전히 타원 삼각형 곡선 소용돌이의 하나가 되어있는것같은 -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비현실적인 꿈의 세계 - 여기서 표현되는 것은 육체적이면서 심리적인 충족감, 황홀감이 표현되어있다.
- 시험문제에 뭉크와 로댕의 키스를 이것과 비교하라면 무어라 할 수 있을까 - 어떻게 다를까? 기본적으로 뭉크나 로댕은 실제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 것 같다. 인간적인 체취를 느낄 수 잇는 데에 비해, 클림트는 너무나 정교하고 그래서 실제 사람으로 생각하기 힘들지 않나, 훨씬 더 상징주의적인, 또한 너무나 장식성이 강조되어서, 뭉크나 로댕이 현대미술쪽에 한발 딛었다면 클림트는 그렇게 보기 힘들지 않나. 1908년 키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1908
당시 귀부인들의 초상 - 얼굴과 목은 사실적이지만 그외에는 추상적인 패턴으로 되어있어서, 일상적인 여성이 아니라 굉장히 화려하고 장식적인 효과를 보여주는 초상화. 장식과 배경이 하나가 되어서, 원근법 없어지고, 여성도 마치 꿈속의 여성같은 느낌을 준다.
이정도만 하면 19세기 끝.